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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주민 센터에서 받은 열쇠로 낡은 목조 건물 책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닷바람에 젖은 듯한 종이 냄새가 확 느껴졌다. 진희는 가방을 한구석에 놓고 할머니의 책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기껏 대여섯 개의 책장 안에는 신간은 없이 오래된 옛 소설과 시집들이 어지럽게 꽂혀 있었고, 바다가 보이는 전면 창 앞으로 긴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할머니의 글씨로 자신의 전화번호와 주소가 쓰여 있는 낡은 노트 하나가 놓여 있었다.
2층으로 연결된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자 할머니의 살림들이 고즈넉이 숨죽이고 있었다. 오래전 기억 속의 할머니처럼 그곳에 앉아 진희는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다 낯선 방문객들의 부름에 1층으로 내려왔다.
“박진희? 야, 오랜만이네.”
아이는 오래전보다 세 배는 커져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될 만큼 자라 있었다.
“과일가게 찰스?”
“하하하. 그래 그렇게 불렀지 날. 과일가게 아들 찰스. 오랜만인데 악수나 할까?”
내미는 손을 잡은 진희는 마주 잡은 따뜻한 손의 기운과 함께 오래전 유년의 기억들이 전해 오는 듯했다.
“할머님 물건들 정리하려고 온 거지? 워낙 깐깐하고 단정한 분이셔서 정리할 게 많지는 않을 거야. 너하고는 연락이 전혀 안 되는 줄 알고 장례는 마을 분들과 상의해서 진행했어. 선아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선아?”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오랜만인데 기분은 어때?”
“그냥, 좀 허무한 느낌? 네가 말하는 단정한 우리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날 찾지 않으셨지. 난 결국 살아 있는 할머니와 화해할 기회를 완전히 놓친 거 같아. 여기서 얼마간 지낼까 해. 할머니가 내게 남겼다는 유산 속에서 조금 쉬어 갈까 생각 중이지.”
철수는 진희를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을 꺼냈다.
“패잔병처럼 이야기하는구나. 누구나 그렇지. 여길 한동안 떠났다가 돌아오는 젊음들은 그렇게 다들 상처받고 피 흘리고 돌아오곤 해.”
“그래서, 다들 상처를 치유하고 훨훨 날아갔나?”
“글쎄다. 어떻게 설명하면 네가 좀 위안을 얻을까? 근사한 대답이 생각나면 해 주지. 오늘은 우리 오래전 친구들과 저녁이나 같이 먹자.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이 서진동으로 돌아와 있거든. 어때?”
“음, 동지들이 있다는 이야기군. 좋아. 이렇게 시작해 보지, 서진동과의 두 번째 시작을.”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던 철수와 영희가 서진동에 있었다. 과일가게 아들내미 철수는 교사가 되어 고향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등학교에서 국어 선생을 하고 있다 했다.
영희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개명했다. 이영희가 아니라 이연희로. 한 글자 차이인데도 품격이 달라졌노라 말했다.
늘 장난스러움으로 가득했던 형준이는 개그맨을 꿈꾸다 아버지 손에 끌려와 오징어 배를 탄다고 했다. 언젠가 오징어가 바다에서 사라지는 그날, 세상이 자신을 알아봐 줄 거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물 손질을 하시던 춘식이의 부모님이 그날 낮에 잡은 날생선 회를 가지고 와 진희의 손을 반갑게 잡았을 때, 춘식이의 부모님이 꼬맹이 진주의 시부모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유년 속의 아이들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걸어온 것처럼 보여 어쩐지 서글퍼지려는 순간, 진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끌벅적한 자리를 벗어나 고요하고 한적한 해가 지면 멀리 오징어 뱃머리의 불빛만이 가득한 바닷가 바위에 앉아 진희는 밀려오고 밀려 나가는 파도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뒷모습이 낯설지 않네. 이런 시간에 혼자 바닷가에 앉아 있는 여자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는 여자라. 이런 걸 우연이라고 하나? 아님 운명이라고 하나?”
어둠과 밤바람 사이로, 파도 소리와 달빛의 숨소리 사이로, 그렇게 그가 진희에게 걸어왔다. 진희는 달빛밖에는 비치지 않는 바닷가에서 기억 속에 없는, 그런데도 익숙한 남자와의 어색한 시간을 떨쳐 내려 짧은 말을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처음 뵙는 분이고, 이곳 역시도 제겐 낯설어서 오늘은 도망가야겠어요. 우연이든 운명이든 밝은 날 이야기하죠. 저는 저기 [바닷가 책방]이란 곳에 있으니까, 책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오세요.”
어쩐지 낯설지 않은 남자를 어둠 저편에 놓아두고 진희는 다시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공간으로 발을 디뎠다.
“주인공이 자리를 비우면 어쩌냐?”
“미안.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아무래도 우리 마을이 시끄러워질 거란 이야기.”
“그래? 무슨 일일까나?”
“우리 마을에 뭔 호텔 같은 게 들어선다고 하네.”
호텔. 자신이 그만둔 회사에서도 호텔 부지 선정을 하고 있었고, 사실 그곳에서 선정한 부지 중 하나가 서진동이란 것을 잠깐 떠올렸지만, 진희는 이내 서울에서의 시간들을 잊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어 다시 서진동의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 개발이 진희의 인생 전체를 흔들 것이란 걸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바닷가 책방]은 할아버지의 유산이었다. 예전에 서진동에 존재했다던 천 명도 넘는 아이들이 다녔다는 전설 속의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을 한 할아버지는 책방을 꾸몄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연금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책방 문을 닫지는 않으셨다.
진희가 바다가 보이는 창가의 넓은 나무 책상에 커피 한 잔을 놓고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로움이 두렵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서점의 문이 열리는 맑은 풍경 소리와 함께 철수가 들어서고 있었다.
“매일 들를 생각이야? 너 출근 안 해?”
“반갑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여기 이거, 도서 리스트. ‘동네 책방 살리기 프로젝트’야. 우리 학교 도서 구입은 동네 서점 [바닷가 책방]에서 하고 있거든. 이거 학교로 보내 줘.”
“와,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데? 커피 한잔 할 시간은 있어?”
“그래. 한잔할까? 책 구매를 핑계로 일찍 학교 빠져나왔거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려 철수에게 가져다주고는 진희도 자리에 앉았다.
“정말 할머니 서점을 계속할 생각이야?”
“몰라. 그냥 일상에서 도망쳤고, 마침 도망칠 곳이 생긴 거지. 난 이 책방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 단정하기만 했던 할머니는 글을 몰랐어. 기억해?”
“그래, 할머님은 한글을 다 모르셨지.”
“그런데도 책을 팔았고, 교사였던 할아버지와 평생을 사셨어. 그러고는 그 알지도 못하는 한글로 또박또박 내 주소와 연락처를 적어 두셨지. 할머니는 내가 여기로 다시 올 걸 알았을까? 아니면 날 기다리고 계셨을까?”
어쩐지 현실에 발을 딛지 않는 몽롱함 같은 것이 가득 담겨 있는 진희의 말소리에 철수는 오래전 어린 시절의 그녀를 순간 떠올렸다.
“생각이 많구나.”
“그러게. 여기 오니까 생각이 많아지네. 이런 이야긴 그만두고, 동네가 좀 시끄러워지는 것 같네.”
“그래, 유명한 호텔 부지로 선정된 모양이야. 개발바람이 이 작고 조용한 마을에도 불어닥치겠지. 지금 개발 관련 공청회 때문에 그 회사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모양이더라. 어수룩한 어촌 사람을 흔들 서울 사람들이 들이닥친 거지.”
“나 여기 오기 전에 그런 일 했었는데, 아는 사람이 무서운 법이니까 돈 많이 쳐준다고 하면 홀라당 팔아 버리고 날라야겠어. 몇 배나 줄라나? 아니, 이 책방이 얼마나 할까?”
가벼운 말소리가 낡은 책들의 소리들과 섞이고 있었다. 그때, 딸랑거리며 다시 풍경이 울렸다.
“계십니까? 한진컨설턴트에서 나왔습니다. 혹시 여기 사장님 계신지요? 어? 박진희 씨.”
딸랑이는 풍경 소리를 뒤로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닷가 책방]에 들어섰고, 그 안에 익숙한 사람들의 무리가 보이자, 진희는 지금까지 고요했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찰나의 순간 참 많은 생각들이 스쳐 갈 수 있구나, 스스로 신기해하며 진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얼굴에 떠올리며 말을 꺼냈다.
“아! 한진컨설턴트 최순찬 씨! 야, 강철수. 나 이 집 안 팔고 버텨 볼란다.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내가 갑질을 좀 할 수 있을 것 같다. 할머니가 오늘처럼 고맙기는 처음이네. 자, 최순찬 씨 제가 이곳 [바닷가 책방] 사장입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당신이 하는 모든 제안은 거절입니다.”
진희의 얼굴에는 묘한 쾌감으로 만들어진 미소가 번지고 있었고, 최 과장의 얼굴은 낭패스러움과 당혹스러움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둘의 묘한 긴장감을 사이에 두고 형우와 철수가 마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낡은 목조 건물 작은 책방의 오래된 종이 냄새 사이로 새로운 이야기가 꿈틀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