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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2
6월 초입, 바다의 습기를 머금은 더운 공기가 다시 한번 책방으로 확 밀려들어 오며 풍경 소리가 울렸다. 진희와 철수, 그리고 최 과장과 형우를 비롯한 개발팀 직원들이 와글거리는 공간 안으로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 하나가 들어와 그들의 팽팽한 긴장감을 깨어 놓았다.
“아줌마가 이 책방의 새로운 사장이에요?”
“김선아. 선생님을 보면 인사가 먼저다.”
철수가 먼저 알은척을 했다. 눈이 크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아이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운터 테이블에 가방을 벗어 던지고 철수가 전해 주었던 학교 도서 리스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여자는 나 혼자인데, 아줌마는 날 말하는 거니?”
“그럼 누굴 말하겠어요? 할머니 손녀라면서요?”
“그런데 넌 누군데?”
“알바요.”
선아라는 여자아이의 등장으로 묘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돌던 책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그 달라진 공기를 깨고 형우가 먼저 말을 건넸다.
“여기 서진동에 우리 호텔을 건설할까 하는데, 이와 관련한 설명회와 공청회를 진행할 겁니다.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박진희 사장님.”
한형우가 자신의 명함을 진희와 철수에게 내밀었다.
“아, 그런가요?”
최순찬 과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다가 말을 꺼냈다.
“할머님이 물려주신 건가 보네, 진희 씨. 어차피 운영하지 않을 거면 높은 가격으로 우리에게 넘기는 게 좋지 않겠어?”
“글쎄요. 저기, 성함이? 아, 최순찬 씨. 잊고 있었네. 이 책방 물려받으면서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려고 하는 중이라서요. 늦둥이 돌잔치에 장모 칠순, 그리고 장인 상에, 부친 개업에 갖다 바친 돈 봉투가 몇 개인데, 받아먹은 사람은 할머니 상에 봉투 하나 안 주더라구요. 그렇게 자기 이익만 계산하는 사람하고는 기본적으로 거래 따위는 안 할 생각인데, 어떠신가요?”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진희를 당황한 듯 쳐다보는 건 최 과장뿐만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5년 가까이 함께했던 동료들도 이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상황을 주시하고 서 있었다.
“그건, 박진희 씨가 급하게 사직서를 내는 바람에 내가 챙겨 주지 못한 거지. 내가 안 그래도 보내려고 했어.”
최 과장의 비굴한 대답에 진희는 작정한 듯 말을 쏟아 냈다.
“보내려고 했어가 아니라, 보냈어야죠. 저기 있는 이 대리님이 우리 팀에서 모은 조의금 봉투를 보냈을 때에요. 거기 뒤에 서 계시는, 보자, 한형우 실장님. 전 기본적으로 이런 분과는 합의, 계약, 협정 이런 것 안 합니다. 아, 공청회는 참석하죠. 지피지기해야 백전백승이라면서요. 소금 준비 하셔야 할 겁니다. 제가 좀 재수 없을 거거든요. 그럼 품위 있는 갑인 제가 소중한 을인 우리 아르바이트 학생과 깊은 대화를 좀 나눠야 할 듯하니, 나가 주시겠어요?”
속사포 같은 진희의 말에, 최 과장은 자신의 곁에 있는 형우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바닷가라 소금은 흔하겠군요. 공청회에서 보죠.”
“아, 한 가지 더. 저기 최순찬 씨 뒤에 계시는 팀원들 닦달해서 저에게 보내거나 회유하려 하시면, 소금 더 많이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알아들으셨죠? 그럼 안녕히 가시죠.”
형우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최 과장을 뒤로하고 진희를 흘끗 쳐다보고는 책방을 빠져나갔다. 책방의 창밖으로 개발팀 무리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진희는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봤어? 최 과장 얼굴? 와,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네. 이래서 갑질, 갑질 하는구나.”
“전에 다니던 회사 상사?”
“어, 재수 오지게 없는 상사. 나쁜 상사의 전형이야. 그런데 저 아인 누구야?”
진희는 자신들과는 별개인 듯 학교에서 가져온 리스트의 책을 찾고, 없는 것들의 주문서를 작성하는 선아에 대해 물었다.
“직접 들으시지. 난 간다, 선아야. 사장님하고 계약 잘해라. 초보 사장이라 잘 모를 거다. 이럴 때 ‘을’로서 챙길 거 다 챙기는 거다.”
철수는 씨익 웃으며 책방을 나섰다. 철수가 나가고도 한동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선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희가 먼저 말을 건넸다.
“어이, 아르바이트 학생. 우리 차나 한잔하면서 이 상황을 정리해 볼까?”
진희의 말에 선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창가의 넓은 테이블에 앉았다.
“아르바이트라……. 장사가 될 리 없는 이런 서점에 알바가 필요한 이유가…….”
“할머닌 한글을 모르셨으니까요.”
아이는 감정의 동요 없이 당연하다는 듯 메마른 대답을 뱉었다.
“그럼 한글을 아는 난, 네가 필요할까?”
“새 사장님은 할머니를 모르시잖아요.”
“내가 이제 와서 할머니를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할머니의 책방이니까요. 이걸 운영하실 거면 할머니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아무튼 다들 돈 많이 받고 자기 가게들을 판다고 하니까, 팔릴 때까지는 일을 해 드리죠. 참, 고용 계약서는 없었지만 시급은 칠천 원, 하교하고 5시부터 8시까지 일해요. 주말에는 오전 12시부터 6시까지 일하구요. 일요일은 쉽니다. 그럼 새로운 사장님이시니까 고용 계약서를 작성할까요? 아, 제가 좀 알아봤는데요, 고용 승계 아시죠? 저 지금 자르시면 되게 나쁜 갑질이에요.”
선아의 딱 떨어지는 말투에 진희는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랬다. 글씨를 몰랐던 할머니가 혼자서는 운영할 수 없었던 책방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할머니는 이 책방의 문을 닫지 않고 계속해서 운영했을까? 아이의 말대로 할머니를 모른 채 할머니의 책방을 운영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네가, 그러니까 이 책방에 딸린 옵션이라는 거구나. 좋아. 안 그래도 할머니가 어떻게 이 책방을 운영했나 싶었는데. 고용 계약서 작성하자. 너한테 좋은 갑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나도 공식적인 갑질 좀 해 보자. 잘해 보자. 이름이?”
“김선아요.”
선아는 불쑥 내미는 진희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웃음기 없이 사무적이기만 선아의 얼굴이 신경 쓰였지만, 선아를 알아 가는 건 천천히 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진희가 책방을 열고 나서 일주일 동안 한 권의 책도 팔리지 않았다. 결국 할머니는 선아와 할아버지의 연금을 나눠 가졌을 것이다. 자신 역시도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을 선아와 나눠 가져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김선아. 여기 책이 팔리기는 하니?”
“서진동 학교에서 우리 동네 서점 살리기 운동을 하면서 1년에 네 번 정도 책을 주문해요.”
“아, 아까 철수, 아니, 너희 선생님이 가져다준 거?”
“네. 그게 수익의 대부분이고요, 여름철 관광객들이 가끔 책을 사서 가요. 책 주문은 제가 알아서 했는데, 출판 도매상분들이 잘나가는 책들을 들고 오세요.”
“그렇구나. 알았어. 오늘만 날이겠니? 천천히 알아 가는 걸로 하자. 여기에서 찻집을 병행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다른 건 몰라도 여기 앉아서 저기 바다를 바라보는 거, 진짜 끝내준다.”
“진짜 할머니 손녀 맞나 봐요. 할머니도 내내 거기 앉아 계셨거든요.”
아무런 감정 없이 툭 말을 내뱉고는 선아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철수가 전해 준 리스트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진희는 의도하지 않은 순간, 자신의 앞으로 내던져진 할머니의 기억을 주어 담으며 서진동에서, [바닷가 책방]에서 살아가는 게, 자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스펙터클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
그 시각, 형우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최 과장을 앞에 두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침묵에 긴장하던 최 과장이 형우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실장님, 박진희 씨가 그렇게 모진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 잘 설득하면 문제없을 겁니다. 퇴사하면서 기분이 틀어진 게 있었던 모양인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김 대리의 말대로,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최 과장은 비겁해 보였다.
“그러게, 그렇게 모질지 않은 사람을 모질게 만드셨어요. 최 과장님.”
“네?”
“원래는 안 그런 사람이었다면서요. 그날 그 여자를 울린 사람도 당신이었겠군. 결국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인가? 재밌겠네. 그럼 해 보세요. 최 과장님의 최선을. 저희는 여기에 호텔을 지을 겁니다. 그러니까 박진희 씨를 비롯한 여기 서진동 사람들을 잘 설득하시죠. 시끄럽지 않게. 그 사람들이 더 모질어지지 않게.”
“네, 알겠습니다.”
형우의 방을 나온 최 과장의 머리는 지끈거렸다.
“젠장. 하필 이때 박진희가 왜 튀어나온 거야!”
형우와 있던 때와는 다르게 거친 혼잣말을 쏟아 낸 최 과장의 얼굴은 복잡했다. 고작 서른여덟 살의 애송이 한형우 실장, 그러나 그는 실장이기 이전에 H그룹의 외손자였다.
최 과장은 눈앞에 놓인 한형우와 H호텔이라는 대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박진희를 적군에서 아군으로 돌려놓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또다시 낮은 욕설을 내뱉고는 건물을 빠져나갔다.
최 과장이 자리를 떠나고 혼자 남은 형우는 계속해서 ‘박진희, 박진희’ 하며 진희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고 있었다. 분명 기억 속의 이름이었다.
우는 뒷모습, 박진희.
계속해서 지난 시간들을 들춰내던 형우의 기억 속에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아, 박진희. 너였구나.”
형우는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진희의 [바닷가 책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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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초입, 바다의 습기를 머금은 더운 공기가 다시 한번 책방으로 확 밀려들어 오며 풍경 소리가 울렸다. 진희와 철수, 그리고 최 과장과 형우를 비롯한 개발팀 직원들이 와글거리는 공간 안으로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 하나가 들어와 그들의 팽팽한 긴장감을 깨어 놓았다.
“아줌마가 이 책방의 새로운 사장이에요?”
“김선아. 선생님을 보면 인사가 먼저다.”
철수가 먼저 알은척을 했다. 눈이 크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아이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운터 테이블에 가방을 벗어 던지고 철수가 전해 주었던 학교 도서 리스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여자는 나 혼자인데, 아줌마는 날 말하는 거니?”
“그럼 누굴 말하겠어요? 할머니 손녀라면서요?”
“그런데 넌 누군데?”
“알바요.”
선아라는 여자아이의 등장으로 묘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돌던 책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그 달라진 공기를 깨고 형우가 먼저 말을 건넸다.
“여기 서진동에 우리 호텔을 건설할까 하는데, 이와 관련한 설명회와 공청회를 진행할 겁니다.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박진희 사장님.”
한형우가 자신의 명함을 진희와 철수에게 내밀었다.
“아, 그런가요?”
최순찬 과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다가 말을 꺼냈다.
“할머님이 물려주신 건가 보네, 진희 씨. 어차피 운영하지 않을 거면 높은 가격으로 우리에게 넘기는 게 좋지 않겠어?”
“글쎄요. 저기, 성함이? 아, 최순찬 씨. 잊고 있었네. 이 책방 물려받으면서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려고 하는 중이라서요. 늦둥이 돌잔치에 장모 칠순, 그리고 장인 상에, 부친 개업에 갖다 바친 돈 봉투가 몇 개인데, 받아먹은 사람은 할머니 상에 봉투 하나 안 주더라구요. 그렇게 자기 이익만 계산하는 사람하고는 기본적으로 거래 따위는 안 할 생각인데, 어떠신가요?”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진희를 당황한 듯 쳐다보는 건 최 과장뿐만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5년 가까이 함께했던 동료들도 이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상황을 주시하고 서 있었다.
“그건, 박진희 씨가 급하게 사직서를 내는 바람에 내가 챙겨 주지 못한 거지. 내가 안 그래도 보내려고 했어.”
최 과장의 비굴한 대답에 진희는 작정한 듯 말을 쏟아 냈다.
“보내려고 했어가 아니라, 보냈어야죠. 저기 있는 이 대리님이 우리 팀에서 모은 조의금 봉투를 보냈을 때에요. 거기 뒤에 서 계시는, 보자, 한형우 실장님. 전 기본적으로 이런 분과는 합의, 계약, 협정 이런 것 안 합니다. 아, 공청회는 참석하죠. 지피지기해야 백전백승이라면서요. 소금 준비 하셔야 할 겁니다. 제가 좀 재수 없을 거거든요. 그럼 품위 있는 갑인 제가 소중한 을인 우리 아르바이트 학생과 깊은 대화를 좀 나눠야 할 듯하니, 나가 주시겠어요?”
속사포 같은 진희의 말에, 최 과장은 자신의 곁에 있는 형우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바닷가라 소금은 흔하겠군요. 공청회에서 보죠.”
“아, 한 가지 더. 저기 최순찬 씨 뒤에 계시는 팀원들 닦달해서 저에게 보내거나 회유하려 하시면, 소금 더 많이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알아들으셨죠? 그럼 안녕히 가시죠.”
형우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최 과장을 뒤로하고 진희를 흘끗 쳐다보고는 책방을 빠져나갔다. 책방의 창밖으로 개발팀 무리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진희는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봤어? 최 과장 얼굴? 와,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네. 이래서 갑질, 갑질 하는구나.”
“전에 다니던 회사 상사?”
“어, 재수 오지게 없는 상사. 나쁜 상사의 전형이야. 그런데 저 아인 누구야?”
진희는 자신들과는 별개인 듯 학교에서 가져온 리스트의 책을 찾고, 없는 것들의 주문서를 작성하는 선아에 대해 물었다.
“직접 들으시지. 난 간다, 선아야. 사장님하고 계약 잘해라. 초보 사장이라 잘 모를 거다. 이럴 때 ‘을’로서 챙길 거 다 챙기는 거다.”
철수는 씨익 웃으며 책방을 나섰다. 철수가 나가고도 한동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선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희가 먼저 말을 건넸다.
“어이, 아르바이트 학생. 우리 차나 한잔하면서 이 상황을 정리해 볼까?”
진희의 말에 선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창가의 넓은 테이블에 앉았다.
“아르바이트라……. 장사가 될 리 없는 이런 서점에 알바가 필요한 이유가…….”
“할머닌 한글을 모르셨으니까요.”
아이는 감정의 동요 없이 당연하다는 듯 메마른 대답을 뱉었다.
“그럼 한글을 아는 난, 네가 필요할까?”
“새 사장님은 할머니를 모르시잖아요.”
“내가 이제 와서 할머니를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할머니의 책방이니까요. 이걸 운영하실 거면 할머니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아무튼 다들 돈 많이 받고 자기 가게들을 판다고 하니까, 팔릴 때까지는 일을 해 드리죠. 참, 고용 계약서는 없었지만 시급은 칠천 원, 하교하고 5시부터 8시까지 일해요. 주말에는 오전 12시부터 6시까지 일하구요. 일요일은 쉽니다. 그럼 새로운 사장님이시니까 고용 계약서를 작성할까요? 아, 제가 좀 알아봤는데요, 고용 승계 아시죠? 저 지금 자르시면 되게 나쁜 갑질이에요.”
선아의 딱 떨어지는 말투에 진희는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랬다. 글씨를 몰랐던 할머니가 혼자서는 운영할 수 없었던 책방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할머니는 이 책방의 문을 닫지 않고 계속해서 운영했을까? 아이의 말대로 할머니를 모른 채 할머니의 책방을 운영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네가, 그러니까 이 책방에 딸린 옵션이라는 거구나. 좋아. 안 그래도 할머니가 어떻게 이 책방을 운영했나 싶었는데. 고용 계약서 작성하자. 너한테 좋은 갑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나도 공식적인 갑질 좀 해 보자. 잘해 보자. 이름이?”
“김선아요.”
선아는 불쑥 내미는 진희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웃음기 없이 사무적이기만 선아의 얼굴이 신경 쓰였지만, 선아를 알아 가는 건 천천히 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진희가 책방을 열고 나서 일주일 동안 한 권의 책도 팔리지 않았다. 결국 할머니는 선아와 할아버지의 연금을 나눠 가졌을 것이다. 자신 역시도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을 선아와 나눠 가져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김선아. 여기 책이 팔리기는 하니?”
“서진동 학교에서 우리 동네 서점 살리기 운동을 하면서 1년에 네 번 정도 책을 주문해요.”
“아, 아까 철수, 아니, 너희 선생님이 가져다준 거?”
“네. 그게 수익의 대부분이고요, 여름철 관광객들이 가끔 책을 사서 가요. 책 주문은 제가 알아서 했는데, 출판 도매상분들이 잘나가는 책들을 들고 오세요.”
“그렇구나. 알았어. 오늘만 날이겠니? 천천히 알아 가는 걸로 하자. 여기에서 찻집을 병행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다른 건 몰라도 여기 앉아서 저기 바다를 바라보는 거, 진짜 끝내준다.”
“진짜 할머니 손녀 맞나 봐요. 할머니도 내내 거기 앉아 계셨거든요.”
아무런 감정 없이 툭 말을 내뱉고는 선아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철수가 전해 준 리스트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진희는 의도하지 않은 순간, 자신의 앞으로 내던져진 할머니의 기억을 주어 담으며 서진동에서, [바닷가 책방]에서 살아가는 게, 자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스펙터클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시각, 형우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최 과장을 앞에 두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침묵에 긴장하던 최 과장이 형우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실장님, 박진희 씨가 그렇게 모진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 잘 설득하면 문제없을 겁니다. 퇴사하면서 기분이 틀어진 게 있었던 모양인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김 대리의 말대로,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최 과장은 비겁해 보였다.
“그러게, 그렇게 모질지 않은 사람을 모질게 만드셨어요. 최 과장님.”
“네?”
“원래는 안 그런 사람이었다면서요. 그날 그 여자를 울린 사람도 당신이었겠군. 결국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인가? 재밌겠네. 그럼 해 보세요. 최 과장님의 최선을. 저희는 여기에 호텔을 지을 겁니다. 그러니까 박진희 씨를 비롯한 여기 서진동 사람들을 잘 설득하시죠. 시끄럽지 않게. 그 사람들이 더 모질어지지 않게.”
“네, 알겠습니다.”
형우의 방을 나온 최 과장의 머리는 지끈거렸다.
“젠장. 하필 이때 박진희가 왜 튀어나온 거야!”
형우와 있던 때와는 다르게 거친 혼잣말을 쏟아 낸 최 과장의 얼굴은 복잡했다. 고작 서른여덟 살의 애송이 한형우 실장, 그러나 그는 실장이기 이전에 H그룹의 외손자였다.
최 과장은 눈앞에 놓인 한형우와 H호텔이라는 대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박진희를 적군에서 아군으로 돌려놓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또다시 낮은 욕설을 내뱉고는 건물을 빠져나갔다.
최 과장이 자리를 떠나고 혼자 남은 형우는 계속해서 ‘박진희, 박진희’ 하며 진희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고 있었다. 분명 기억 속의 이름이었다.
우는 뒷모습, 박진희.
계속해서 지난 시간들을 들춰내던 형우의 기억 속에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아, 박진희. 너였구나.”
형우는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진희의 [바닷가 책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