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일탈의 결말
1화
1. 엉뚱한 시작
“살려 주라.”
사람들이 떠난 테이블에서 빈 컵을 모으던 민혁이 등 뒤에서 들려온 간절하디간절한 한마디에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민혁의 등 뒤에 형운이 애절한 얼굴로 손까지 가지런히 앞에 모아 쥐고 처분만 기다리겠다는 듯 민혁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 살기도 바빠. 내가 형을 무슨 수로 살려?”
“그 돈, 내가 꼭 다달이 갚을게. 매달 10만 원, 아니 20만 원씩…….”
“형.”
민혁의 반듯한 이마에 주름이 졌다. 서늘하게 부르는 형, 소리에 형운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그 돈, 내일 오전까지 갚을 수 없으면 빌릴 생각 하지 말라고.”
“설마 그렇게 잃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냐? 민혁아, 너도 봤잖아. 내가 아까 진짜 패가 좋았다니까. 정 검사, 그 자식만 아니었으면 내가 그 판을 다…….”
“형!”
민혁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시 불렀다. 형운은 입을 꾹 다물고 어깨를 움츠렸다. 이럴 줄 뻔히 알고 있었다. 민혁은 의자를 끌어내 앉으며 형운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포커 판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건 형운의 고질적인 나쁜 습관이었다. 오늘도 재미 삼아 술값이나 걸고 치는 포커 모임에서 혼자 흥분해 돈을 밀어 넣다가 결국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털렸다. 그쯤에서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한발 더 가서는 말리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뻥뻥 치며 민혁에게 돈까지 빌려서 결국 200만 원이라는 큰돈을 잃고 만 것이다.
다른 날 같았으면 판이 끝난 후에 다음에 술이나 한잔 사라며 딴 돈을 돌려주었겠지만 오늘은 민혁이 형운의 버릇을 고쳐 놓을 작정으로 다른 일행들에게 형운이 잃은 돈을 돌려주지 말라고 미리 귀띔을 해 두었다. 의례히 판이 끝나면 잃은 돈을 돌려주려니 하고 기대하고 있던 형운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을 설마설마하며 지켜보다가 결국 민혁에게 통사정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일 오전이야. 오전까지 내 계좌로 돈 안 들어오면 형수한테 문자 보낼 테니까 알아서 해.”
아내에게 문자를 보낸다는 민혁의 말에 형운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민혁아, 오민혁!”
형운이 민혁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기세로 매달렸다. 민혁은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찼다. 저 인간이 저래 봬도 잘나가는 변호사다. 돈 200만 원이 없어서 저러는 게 아니다. 형운이 엄처시하(嚴妻侍下)에서 전업주부인 아내에게 경제권을 몽땅 빼앗기고 10만 원 이상의 돈을 아내의 허락 없이 융통하지 못한다는 소문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카드만 보면 눈이 뒤집혀서 앞뒤 생각 못 하고 저러는 버릇을 오늘은 정말 확실하게 고쳐 놓아야겠다. 민혁은 울기 직전의 표정을 하고 있는 형운을 보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져 먹었다.
“내가, 내가 돈 대신…… 그래, 그 돈 대신 내가 다른 걸 해 주면 어떠냐? 내가 뭐든 좋으니까 그 돈 대신 네가 하라는 거 다 할게. 아니, 안 갚겠다는 게 아니라 조금 늦춰만 주라. 아니면 아까 말처럼 다달이 갚게라도 해 주라. 그럼 내가 진짜 너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민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일 정오까지야. 예외 없어. 시간 넘기면 바로 형수한테 전화할 거야.”
“민혁아아!”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까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던 형운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여자, 내가 여자 소개시켜 줄게. 네가 원하는 스타일로, 네가 만족할 때까지 내가 소개팅시켜 준다고.”
민혁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껏 했다는 생각하고는. 형운은 자신을 무시하고 다시 테이블을 치우는 민혁의 옆을 맴돌며 열심히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너, 요즘 여자 안 만나더라? 솔직히 그렇고 그런 애들한테 질린 거 아니야? 내가 진짜 네 취향에 맞춰서, 100% 네가 원하는 스타일로 골라서 주선해 줄게. 야, 내가 그깟 돈 때문에 이런 소리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내가 너, 그 잘난 얼굴로 혼자 늙어가는 게 아쉬워서 그런다.”
민혁은 뉘 집 개가 짓나, 하는 표정으로 형운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테이블에서 가지고 온 컵들을 싱크대에 넣고 물을 틀었다. 형운은 물소리에 목소리를 더욱 높이며 설거지를 하는 민혁의 옆에서 열변을 토했다.
“너도 이제 서른 넘었어. 이제 슬슬 어머니가 결혼 얘기 하시지 않냐? 울 엄마 말로는 네 어머니가 지난번 계모임에서 네 선 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하셨다던데. 엄마 잔소리 시작되기 전에 네가 마땅한 여자 찾아서 부지런히 소개팅도 하고, 좀 그래야지 않겠냐? 이 형이 책임지고 진짜 너한테 걸맞는 여자들로 대 줄게. 응? 민혁아, 오민혁.”
들은 척도 안 하고 설거지를 끝낸 민혁이 젖은 손을 수건에 닦고 냉정한 눈으로 형운을 응시했다.
“내일 12시야. 점심 먹으러 가기 전에 입금 확인하고 안 들어와 있으면 바로 형수한테 문자 쏜다고 분명 경고했어. 만일 형수가 그게 무슨 돈이냐고 물어 오면 다 얘기할 거니까 알아서 해.”
“민혁아!”
민혁의 셔츠 소매 자락을 부여잡는 형운의 눈이 촉촉해져 있었다. 얼씨구. 저러다 진짜 울겠네. 어쩔 수 없이 민혁의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형제처럼 얽혀 자란 형운은 민혁에게는 친형 이상의 존재였다. 유약하고 빈틈 많은 성격 때문에 형이라기보다는 동생처럼 느껴지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남 일에 상관하는 걸 질색하는 민혁이 그의 나쁜 버릇을 고쳐 놓겠다며 이 귀찮은 짓을 하고 있는 거다.
처음 의도는 형운이 저렇게나 두려워하는 그의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려 단단히 혼을 내주려는 것이었지만 눈까지 촉촉하게 적시며 사정을 하는 형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흔들렸다. 저렇게나 마누라가 무서울까. 한심하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 그럼.
“형이 내 여자 취향을 알아?”
민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직하게 물었다. 그 말에 희망이 보였는지 형운이 흥분된 어조로 덤벼들었다.
“그걸 내가 모르면 세상에 누가 알겠냐!”
“형이 소개해 준 여자가 내 맘에 안 들면?”
“10번이고 100번이고 네가 오케이 할 때까지 계속 대 줄게. 내 연줄, 마누라 연줄, 우리 처제 연줄까지 다 끌어다가 대 줄 테니까 걱정 마.”
민혁은 손을 닦은 수건을 다시 걸고 식탁 의자 하나를 뺐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긴 다리를 꼬아 올렸다. 민혁의 일거수일투족에 온통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형운은 침만 꼴깍 삼킨다. 물론 형운에게 쉬운 해결책이 되어 줄 생각은 없었다. 골릴 만큼 골려 줄 생각이다. 하지만 어차피 여자들을 만나야 한다면 형운의 말처럼 기왕이면 취향에 맞는 여자라면 좋지 않겠는가.
민혁의 올해 나이 서른둘. 32년을 살면서 여자에 처음 눈을 뜬 이래 한 번도 여자가 아쉬웠던 적은 없었다. 먼저 다가오는 여자들도 넘쳐났고, 그렇지 않더라도 민혁이 내민 손을 잡지 않은 여자는 없었다. 여자도 쉬웠고, 연애도 쉬웠다.
쉬워서 그랬는지, 형운의 말마따나 취향의 여자를 제대로 못 만난 건지는 몰라도 남들처럼 열렬한 연애를 해 본 기억은 없다. 이제는 슬슬 어머니의 성화처럼 적당한 조건의 여자를 만나 결혼할 궁리를 해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한번 말이나 해 봐. 네가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이 어떤 건지 빼지도 더하지도 말고 구체적으로. 응?”
민혁의 침묵이 긍정적인 반응의 반증이라고 생각한 형운은 민혁에게 바짝 다가앉으며 적극적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말없이 식탁 상판을 톡톡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던 민혁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키는 165 이상. 작고 아담한 여자는 취향 아니야. 청순하거나 귀엽게 생긴 여자도 싫어. 멍청하게 눈 깜박 깜박거리거나 입술 내밀면서 애교 부리는 여자, 절대 사절이야. 평생 빛이라고는 못 본 것처럼 얼굴 흰 여자도 싫어. 비쩍 마른 여자도 싫어. 전체적으로 살집 있는 건 괜찮지만 배나 옆구리에만 살 붙은 스타일도 싫어. 때와 장소에 맞춰 캐주얼하게 입는 건 괜찮지만 일상복이 그런 건 곤란해. 원피스나 치마가 잘 어울리는 스타일, 검정색이나 무채색보다 밝은 색을 잘 소화하는 사람이면 좋겠어. 하이힐 신고 하루 종일 걸어도 괜찮으면 더 좋고.”
민혁이 늘어놓는 조건들을 들으며 형운의 미간에 점점 주름이 졌다. 너무 구체적이다. 설마 평소에 어디다 써 놓기라도 했던 걸까. 민혁이 잔뜩 구름이 드리운 형운의 얼굴을 힐끗 봤다.
“그만해?”
“아니, 아니야. 다 말해. 원하는 거 다 얘기해 봐.”
장난삼아 시작했는데 말하다 보니 스스로 빠져들고 있었다. 민혁은 식탁 위에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하며 말을 이어 갔다. 긴 손가락이 버릇처럼 미간을 톡톡 두드렸다.
“학벌은 상관없지만 무식한 여자도 사양이야.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화가 될 정도는 돼야지. 가진 재산이나 경제적 능력이 크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궁상맞은 건 안 돼. 웃음 헤픈 여자는 싫어. 눈꼬리가 아래로 처진 여자도 싫어.”
형운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원하는 여자 스타일을 대라고는 했지만 저런 말을 지껄일 줄은 몰랐다. 도대체 민혁이 말하는 취향의 여자가 어떤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어떤 대상에 대한 묘사인 걸까, 아니면 말 그대로 정말 이상형일까.
“나는 대충 말한 것 같은데.”
“응? 응?”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형운이 정신을 차렸다.
“형이 원하는 대로, 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에 대해 말했다고. 내가 말한 그런 여자를 찾아 줄 자신이 있단 말이지? 그것도 내가 오케이 할 때까지?”
그런 자신 따위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형운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그럼, 그럼. 이 형만 믿어. 아마 첫 약속 자리에서 너, 깜짝 놀라게 될 거다. 나의 이상형이 도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나 하고.”
형운의 너스레를 비웃듯 단정하게 생긴 입술의 한쪽 끝만 비틀어 올렸다가 내린 민혁이 싱크대로 가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몸을 돌려 방 쪽으로 향했다.
“잠깐만 기다려.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건 하나를 잊었어.”
“……뭔데?”
“법조계 종사자는 사양이야. 판사, 검사, 변호사 모두. 직계가족도 싫어.”
의외의 말을 하는 민혁을 형운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건 왜? 같은 업종 종사자면 좋잖아?”
민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형운은 괜한 소리를 했다 싶어 어깨를 으쓱거렸다.
“싫다고.”
“알았어, 알았어. 판사, 검사, 변호사, 그리고 직계가족은 뺄게. 됐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가는 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형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쉽게 민혁이 넘어와 줬다. 200만 원, 그것도 포커판에서 잃었다고 한다면 아내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으이구, 미쳤지, 미쳤어.”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쿵쿵 쳤다. 도대체 왜 카드만 잡으면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이것이 몇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친목 도모 자리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앞으로는 커피값 내기 포커도 치지 않으리라 또 한 번 다짐을 했다.
방 밖으로 다시 나오는 민혁의 손에 노트북이 들려 있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놓고 무언가 타이핑을 하고서 형운을 향해 와서 보라는 손짓을 한다. 의아한 얼굴로 다가가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본 형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이…… 이…… 독사 같은 새끼.”
“별로 적당한 표현이 아닌데. 이의 없지? 출력한다.”
다시 방으로 가 종이 두 장을 가지고 나온 민혁이 펜을 형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사인해.”
[채무 이행서]
채무자 강형운(이하 을)은 채권자 오민혁(이하 갑)에게 채무금 2,000,000원을 대신해 다음과 같이 이행한다.
1. 을은 을이 먼저 제시한 대로 갑에게 이성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2. 동일한 여성과의 만남이 세 번 지속되면 채무의 이행으로 간주한다.
3. 횟수는 지정하지 않되 기한은 최대 1년으로 지정한다.
4. 상대 여성은 갑이 제시한 조건에 최대한 부합하도록 한다.(별지 첨부)
5. 3과 4를 만족치 않을시 을은 갑이 요청한 날짜로부터 이틀 이내에 채무금을 상환한다.
6. 5를 만족치 않을시 갑은 을의 아내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릴 수 있다.
“너 진짜 이러기냐?”
형운이 펜을 바닥에 집어 던지자 민혁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사인할 거야, 아니면 형수한테 전화할까?”
형운은 모양 빠지게 쪼그리고 앉아 자기가 내던졌던 펜을 도로 집어 들고 민혁이 내민 종이에 사인했다.
“공증은 안 해도 되냐?”
형운이 빈정거리자 민혁은 서류를 착착 접어 바지 뒷주머니에 넣으며 싱긋 웃었다.
“이 밤중에 어딜 가서 공증을 해? 그리고 돈 들잖아. 형이 자기가 사인해 놓고 위조했다고 우길 정도로 악질도 아니고.”
‘악질은 네가 악질이지.’
형운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중얼거리며 입안으로 말을 씹었다.
“얼른 가. 자정 넘겼다 괜히 집에서 쫓겨나지 말고.”
그 말에 깜짝 놀란 형운이 시계를 확인하고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민혁은 헛웃음을 웃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돌아서 남은 집 정리를 위해 소매를 걷었다.
***
“고객님, 정말 운이 좋으셨어요. 이 제품, 지금 전 세계적으로 품귀 현상이잖아요. 그 미션 임파서블에서 나오면서 히트치는 바람에 정말 이거 없어서 못 팔아요. 재벌가 따님들도 구하려고 난리시지만 못 구하시는 거예요.”
직원의 호들갑에 단우는 티 나지 않게 피식 웃는다. 재벌가 아가씨들이 고작 이까짓 가방 하나에 난리를 칠까. 허풍도 어느 정도여야 먹히지.
“포장, 특별히 예쁘게 좀 해 주세요.”
“네, 고객님.”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한 직원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가방을 들고 사라졌다. 단우는 매장 가운데 있는 소파에 앉으며 전화기를 꺼내 들고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 지금 가방 들어왔다는 연락받고 매장에 왔어. 일단 내가 계산할게.]
전화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검정색 레이스 스타킹을 신은 늘씬한 다리를 꼬아 올렸다. 몸에 딱 붙는 검정 원단에 하늘하늘, 과하지 않은 프릴이 달린 원피스는 단우에게 썩 잘 어울렸다. 거기에 레이스 스타킹과 단순한 검정색 하이힐. 굵은 세팅을 넣어 풀어 내린 긴 머리.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단우에게 더할 나위 없이 빛나는 아웃핏이다.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직원이 다가와 싹싹하게 물었다.
“주시면 감사하고요.”
단우의 대답에 김이 오르는 따끈한 커피가 금세 테이블 위에 놓아졌다. 호호 불어 한 모금 넘긴 단우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커피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뜨겁고, 쓰고, 시큼하다.
“최근 들어 마신 커피 중에 최악이군.”
테이블 위에 놓아둔 전화기가 드르르르 요란하게 몸을 떨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단우가 혀를 차며 전화기를 들었다.
“바쁘신 분이 어쩐 일로 문자를 바로 봤나 봐?”
― 구했다고?
전화기 건너편의 남자가 인사도 없이 대뜸 확인부터 한다.
“응. 혹시 놓칠까 봐 연락받자마자 왔어. 일단 내가 결제할 테니까 계좌로 송금해 줘. 가방은 택배로 보내?”
― 거기가 어딘데?
“**백화점.”
― 5분 안에 갈 테니까 기다려. 내가 가서 계산할게.
“뭐? 지금 어디 있는데?”
전화는 끊겨 버렸다. 단우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전화기를 보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죄송하지만 돈 낼 사람이 지금 온다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네에!”
여직원들이 목소리를 합쳐 낭랑하게 대답했다. 말이 5분이지 5분 안에야 오겠는가. 단우는 소파 깊숙이 몸을 묻으며 매장 안을 눈으로 훑었다. 고급스럽고 깔끔한 분위기의 매장 안에 가방과 신발들이 각기 자리를 잡고 앉아 온몸으로 조명을 받으며 맵시를 뽐내고 있었다.
디자이너가 고심을 해서 만들었을 아름다운 곡선의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단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누군가에게는 사치품으로 여겨지는 것들이겠지만 단우에게는 충분한 가치를 지닌 아름다운 물건들로 보인다. 하이힐의 선은 단순하지만 아름다웠고, 바늘땀 하나, 작은 부속품 하나에도 신경을 쓴 가방이나 소품들도 매력적이었다.
다행히도 그런 취향을 만족시킬 만한 경제력이 단우에게는 있었다. 어린 나이에 대형 로펌의 변호사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자신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아름다운 외모는 단우의 취향과 동떨어지지 않은 것이어서 한때 그녀는 명품 매장에 드나드는 것에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살았었다.
단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쓸쓸하게 변했다. 아마 한동안은 이런 매장에 들락거릴 일도, 고가의 물건을 구입할 일도 없을 것이다. 명품 매장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지금의 처지가 단우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만든 계기가 문득 떠올라 그녀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매장으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큰 키에 청바지, 무늬 없는 검정 티셔츠 차림이지만 주변 시선을 확 잡아끄는 남자다. 선글라스에 챙이 긴 야구모자까지 눌러쓴 남자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는 직원들을 지나쳐 소파의 단우에게로 걸어갔다.
“이단우.”
단우가 남자를 올려다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진짜 왔네?”
“어디 있어, 가방?”
단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직원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그 가방, 아직 포장 전이면 좀 보여 주시겠어요?”
“네에.”
여직원이 조심스런 손길로 검정 가방을 들고 나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저것도 똑같은 거 아닙니까?”
남자가 가리킨 쪽에 똑같은 디자인의 빨강색 가방이 진열되어 있었다.
“네. 저것도 오늘 들어온 따끈따끈한 제품이에요.”
“좀 볼 수 있을까요?”
“아, 네.”
팔짱을 끼고 가방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시야가 답답했는지 선글라스를 벗어 들고 검정 가방을 집어 들었다.
“헉.”
옆에 서 있던 여직원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남자는 힐긋 여직원에게 눈길을 주며 씩 웃는다.
“일어나서 둘 다 한번 들어 봐.”
“나랑 언니랑은 분위기가 완전 다르잖아.”
“그래도 일어나서 한번 들어 보라고.”
“아우, 진짜. 언니한테 빨강 가방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단우는 짜증을 내면서도 일어나서 남자가 내미는 검정 가방의 스트랩을 어깨에 걸쳤다.
“빨강도 매 봐.”
포기했다는 듯 대꾸 없이 빨강 가방을 다른 쪽 어깨에 멨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검정 가방의 손잡이를 잡아채서는 직원에게 내밀었다.
“이거, 예쁘게 포장해 주세요.”
“……네? 아, 네!”
“혹시 리본 같은 거 있으면 좀 매 주시구요.”
“예.”
“그리고 이 빨강도 같이 주세요.”
“이것도요?”
남자가 싱긋 웃으며 눈을 찡긋거리고는 여직원에게만 들리게 나직이 속삭였다.
“따로 포장해 주세요.”
“네…… 네!”
여직원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자 남자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길게 뻗으며 다시 선글라스를 챙겨 썼다.
“우리 마누라가 좋아하겠지?”
“자기 입으로 가방 예쁘다는 소리 처음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똑같은 가방을 두 개를 산 거야, 지금?”
“색깔이 다르잖아, 색깔이. 아, 여기 결제요.”
다른 직원이 쪼르르 달려왔다. 남자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자 카드의 이름을 확인한 직원이 아까 다른 직원이 냈던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냈다. 남자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눈을 보였다.
“신분증 필요하세요?”
“아, 아니에요. 누구신지 뻔히 아는데요.”
살짝 떨리기까지 하는 직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여자를 녹아내리게 할 것같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먼저 가방을 들고 갔던 직원이 커다란 쇼핑백 두 개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여기.”
“어느 쪽이 검정이고 어느 쪽이 빨강이죠?”
“이쪽이 검정 가방입니다.”
쇼핑백 두 개를 받아든 남자가 빨강색 가방이 담긴 쇼핑백을 단우에게 내밀었다.
“뭐야?”
“선물이야.”
단우는 시큼털털한 맛이 나는 커피가 든 잔을 들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누구 선물?”
“네 선물.”
“왜?”
“왜는 무슨 왜야. 형부가 처제한테 가방 하나 못 사주냐?”
단우가 피식 웃으며 손으로 살짝 쇼핑백을 밀쳐 냈다.
“그런 건 진짜 형부, 처제 사이에서나 가능한 말이지.”
“야, 이단우. 넌 그렇게 생각하냐? 진짜 서운하다. 나는 너하고 형부 처제 맺은 날부터 단 한 번도 네가 내 진짜 처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강한주가 들으면 가슴을 치면서 서운해할 말이구나.”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 줄은 남자도 알고 단우도 알았다. 하지만 단우는 이런 비싼 선물을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정말 나 주려고 한 거면 여기서 나가기 전에 빨리 얘기하고 환불 받아.”
“됐어. 강한주한테 가지고 가서 내가 너한테 선물했더니 네가 진짜 처제도 아닌데 이런 선물을 왜 받느냐고 정색하더라고 이를 거야.”
“에이, 진짜.”
“그러니까 강한주 서운해하는 거 보기 싫으면 잔말 말고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 나 같은 형부 둔 게 네 복이다 생각하고.”
차마 잡을 수가 없어서 쇼핑백을 쳐다만 보는 단우에게 남자는 억지로 백을 쥐여 주었다.
“이런 화려한 색의 가방은 우리 이단우 양 아니면 소화 못 하지. 이건 딱 네 가방이야.”
남자의 능청에 단우는 웃고 말았다.
그렇게 매장을 나간 둘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목을 빼고 뒷모습을 바라보던 직원이 제자리에서 팔짝거리고 뛰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맞지? 이준우 맞지?”
“맞다니까. 내가 카드 받았잖아.”
“그런데 저 여자는 누구야? 이준우 와이프야?”
“아닌데. 전에 잡지에서 본 적 있는데 굉장히 평범한 스타일이었거든. 그 여자, 연예인 아니었어?”
두 여직원이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단우의 정체를 밝히지는 못했다.
백화점 구석의 한적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단우는 혹시나 누가 볼까 얼른 준우에게서 떨어져 차를 향해 걸었다. 연신 주변을 살피며 걷는 단우를 보고 준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연예인이냐? 왜 그렇게 주변을 의식 하냐?”
“누가 알아보면 괜히 피곤해질까 봐 그러지. 차 어디 있어? 빨리 가.”
매의 눈으로 준우의 차를 찾아낸 단우가 준우를 떠밀고 바쁘게 그 자리를 떠났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단우는 준우의 뒷모습에 대고 다시 한 번 고마움의 인사를 외쳤다.
“고마워, 형부! 진짜 고마워. 잘 쓸게.”
준우가 껄껄 웃으며 머리 위로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순순히 고맙다고 하니까 얼마나 예쁘냐. 그래야 앞으로 또 사 줄 맛이 나지.”
준우의 말에 단우는 못 말린다고 중얼거리면서도 풋 웃고 말았다.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하고 시동을 걸고 난 단우는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쇼핑백 안에 손을 넣어 가방을 꺼냈다.
대시 보드 위에 올려놓고 보니 아까 매장에서 조명 아래 있던 것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내 것이 되어서 그런가. 단우는 흐뭇한 표정으로 가방을 바라봤다. 이 가방이 단우의 손에 들어오게 된 시작은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였다.
“언니, 지난 토요일 날 밤에 나한테 음성 남겼더라? 어제 들었어.”
한주와, 그리고 그 남편 준우와 점심을 먹던 중에 단우가 문득 생각난 듯 한주에게 말했다. 한주는 회사 선배로 시작해서 단우가 회사를 나온 지금은 가족과 연락이 끊긴 단우에게 가족 같은, 아니 가족보다 가까운 사람이었다.
“빨리도 얘기한다.”
한주가 타박하자 단우가 무안한 듯 웃었다.
“영화 보자고 전화했었어. 아버지가 솔이 데리고 주무신다고 하시고, 이 사람은 해외 촬영 가서 없고…… 밤에 심심하길래 영화나 보자고 전화했는데 너, 안 받더라.”
“그래서? 영화 못 봤어?”
“아니, 봤어, 혼자.”
준우가 막 들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아내를 봤다.
“밤에 혼자 영화를 봤다고?”
“집 앞 극장에서. 말이 심야영화지 사람도 얼마나 많고 환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위험하게 혼자 밤에 영화를 보러 나간다는 게 말이 돼? 앞으로는 절대 나 없이 밤에 외출하지 마!”
실수했다, 생각하며 한주가 어깨를 움츠렸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아내의 일에 걱정이 많은 준우였다. 소위 잘나가는 연예인인 까닭에 집을 비울 일이 많아서인지 3살 연상의 아내를 과보호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걸 깜박 잊고 혼자 심야 영화 봤다는 이야기를 남편 앞에서 해 버린 덕분에 당분간 골치 좀 아프겠다 생각한 한주는 제 발등을 찍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잖은가.
“무슨 영화 봤어? 재미있었어?”
단우가 눈치껏 끼어들었다. 준우의 잘생긴 얼굴에는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쯤에서 입을 다물고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미션 임파서블.”
“그거 봤어? 나도 보고 싶었는데! 재미있었어?”
“재미있더라. 탐 크루즈 늙은 거 보면서 저 꽃미남이 저렇게 늙는 거 보면 예쁜 우리 남편도 언젠가는 늙겠구나, 생각도 하고.”
한주가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애교스럽게 웃었다. 아직 마음이 다 풀리지 않았던 준우가 드물게 볼 수 있는 아내의 애교에 배시시 웃고 말았다. 두 사람을 보는 단우의 눈에도 웃음기가 감돌았다.
“참, 거기 나오는 가방. 그거 예쁘던데 실제로 있는 건가?”
“가방?”
한주의 입에서 나온 가방, 이라는 단어에 단우와 준우가 동시에 되물었다.
“응. 프라다 로고가 붙어 있길래. 예쁘더라고. 예쁜 여배우가 들어서 예뻐 보였는지 몰라도.”
“언니 입에서 가방 예쁘다는 소리를 다 듣고. 별일이네. 그 가방 아마 구하기 힘들걸. 안 그래도 그 영화가 흥행 성공하면서 품귀 현상이라고 하더라고.”
단우가 무심한 척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별거 아닌 그 말이 어쩐지 무심히 들리지 않는 한주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영화를 보지도 않았다면서 어떻게 대번에 한주가 말하는 가방이 뭔지를 알아들었을까.
“그렇게 구하기 힘들대?”
한주가 다시 슬쩍 물었다. 단우는 한주가 떠보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잡지에서 보고 예쁘길래 백화점 나갈 일이 있어서 매장에도 한 번 들러 봤었는데 구하기 어렵다대.”
“여보, 당신이 좀 구해 주면 안 돼? 단우랑 나랑 하나씩.”
한주의 말에 숙이고 있던 단우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언니. 사려면 언니나 사. 나는 능력 안 돼.”
“무슨 가방 하나 가지고 능력씩이나. 매장까지 가서 찾아봤으면 마음에 들었다는 거잖아.”
“그냥 구경이나 하려고 한 거지. 내가 지금 처지에 무슨 가방을.”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젓는 단우를 보며 예전의 단우가 어땠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한주는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한주가 일하던 로펌 대양에 단우가 처음 입사했을 때 그녀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보수적인 분위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집단에서 단우처럼 외모로 튀는 변호사는 좋은 시선을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한주는 처음 봤을 때부터 단우가 마음에 들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얼굴, 늘씬한 몸매에 너무 잘 어울리는 과감한 옷차림, 주변의 못마땅한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늘 당당한 그녀가 좋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그 외모에 업무 능력까지 아주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이단우 변호사는 도대체 자기 몸치장하는 데 들이는 돈이 얼마야?”
어느 날, 화장실에서 여변호사 둘이 단우를 놓고 뒷담화 하는 소리를 들었다.
“글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명품이지, 아마? 돈 벌어서 거기다 다 쓰나 봐.”
“제 몸치장할 시간에 일이나 더 열심히 하지. 그 팀 남자들이 이단우 보느라 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하더라. 법정에서도 섹스어필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 돈 들이고 그만큼 안 예쁜 여자가 어디 있냐?”
한주가 화장실 문을 거칠게 밀고 나오자 세면대 앞에 서 있던 여변호사들이 깜짝 놀라 몸을 세우고 꾸벅 인사했다.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옆에서 손을 씻은 한주가 냉정한 눈으로 두 여변호사를 차례로 빤히 봤다.
“돈 들이고 그만큼 안 예쁜 여자…… 여기도 둘이나 있네요.”
여자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댁들 시간당 인건비가 얼만데 그런 쓸데없는 수다에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정신 차리고 일들이나 하세요. 우리 팀 남자직원들, 댁들보다 훨씬 일 잘하니까 남 걱정 그만하시고.”
그런 소리까지 듣던 단우가 지금 가방 하나 따위에 자기가 그럴 형편이 되느냐며 고개를 내젓는 모습이 한주에게는 애잔하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1화
1. 엉뚱한 시작
“살려 주라.”
사람들이 떠난 테이블에서 빈 컵을 모으던 민혁이 등 뒤에서 들려온 간절하디간절한 한마디에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민혁의 등 뒤에 형운이 애절한 얼굴로 손까지 가지런히 앞에 모아 쥐고 처분만 기다리겠다는 듯 민혁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 살기도 바빠. 내가 형을 무슨 수로 살려?”
“그 돈, 내가 꼭 다달이 갚을게. 매달 10만 원, 아니 20만 원씩…….”
“형.”
민혁의 반듯한 이마에 주름이 졌다. 서늘하게 부르는 형, 소리에 형운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그 돈, 내일 오전까지 갚을 수 없으면 빌릴 생각 하지 말라고.”
“설마 그렇게 잃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냐? 민혁아, 너도 봤잖아. 내가 아까 진짜 패가 좋았다니까. 정 검사, 그 자식만 아니었으면 내가 그 판을 다…….”
“형!”
민혁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시 불렀다. 형운은 입을 꾹 다물고 어깨를 움츠렸다. 이럴 줄 뻔히 알고 있었다. 민혁은 의자를 끌어내 앉으며 형운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포커 판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건 형운의 고질적인 나쁜 습관이었다. 오늘도 재미 삼아 술값이나 걸고 치는 포커 모임에서 혼자 흥분해 돈을 밀어 넣다가 결국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털렸다. 그쯤에서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한발 더 가서는 말리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뻥뻥 치며 민혁에게 돈까지 빌려서 결국 200만 원이라는 큰돈을 잃고 만 것이다.
다른 날 같았으면 판이 끝난 후에 다음에 술이나 한잔 사라며 딴 돈을 돌려주었겠지만 오늘은 민혁이 형운의 버릇을 고쳐 놓을 작정으로 다른 일행들에게 형운이 잃은 돈을 돌려주지 말라고 미리 귀띔을 해 두었다. 의례히 판이 끝나면 잃은 돈을 돌려주려니 하고 기대하고 있던 형운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을 설마설마하며 지켜보다가 결국 민혁에게 통사정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일 오전이야. 오전까지 내 계좌로 돈 안 들어오면 형수한테 문자 보낼 테니까 알아서 해.”
아내에게 문자를 보낸다는 민혁의 말에 형운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민혁아, 오민혁!”
형운이 민혁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기세로 매달렸다. 민혁은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찼다. 저 인간이 저래 봬도 잘나가는 변호사다. 돈 200만 원이 없어서 저러는 게 아니다. 형운이 엄처시하(嚴妻侍下)에서 전업주부인 아내에게 경제권을 몽땅 빼앗기고 10만 원 이상의 돈을 아내의 허락 없이 융통하지 못한다는 소문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카드만 보면 눈이 뒤집혀서 앞뒤 생각 못 하고 저러는 버릇을 오늘은 정말 확실하게 고쳐 놓아야겠다. 민혁은 울기 직전의 표정을 하고 있는 형운을 보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져 먹었다.
“내가, 내가 돈 대신…… 그래, 그 돈 대신 내가 다른 걸 해 주면 어떠냐? 내가 뭐든 좋으니까 그 돈 대신 네가 하라는 거 다 할게. 아니, 안 갚겠다는 게 아니라 조금 늦춰만 주라. 아니면 아까 말처럼 다달이 갚게라도 해 주라. 그럼 내가 진짜 너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민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일 정오까지야. 예외 없어. 시간 넘기면 바로 형수한테 전화할 거야.”
“민혁아아!”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까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던 형운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여자, 내가 여자 소개시켜 줄게. 네가 원하는 스타일로, 네가 만족할 때까지 내가 소개팅시켜 준다고.”
민혁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껏 했다는 생각하고는. 형운은 자신을 무시하고 다시 테이블을 치우는 민혁의 옆을 맴돌며 열심히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너, 요즘 여자 안 만나더라? 솔직히 그렇고 그런 애들한테 질린 거 아니야? 내가 진짜 네 취향에 맞춰서, 100% 네가 원하는 스타일로 골라서 주선해 줄게. 야, 내가 그깟 돈 때문에 이런 소리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내가 너, 그 잘난 얼굴로 혼자 늙어가는 게 아쉬워서 그런다.”
민혁은 뉘 집 개가 짓나, 하는 표정으로 형운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테이블에서 가지고 온 컵들을 싱크대에 넣고 물을 틀었다. 형운은 물소리에 목소리를 더욱 높이며 설거지를 하는 민혁의 옆에서 열변을 토했다.
“너도 이제 서른 넘었어. 이제 슬슬 어머니가 결혼 얘기 하시지 않냐? 울 엄마 말로는 네 어머니가 지난번 계모임에서 네 선 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하셨다던데. 엄마 잔소리 시작되기 전에 네가 마땅한 여자 찾아서 부지런히 소개팅도 하고, 좀 그래야지 않겠냐? 이 형이 책임지고 진짜 너한테 걸맞는 여자들로 대 줄게. 응? 민혁아, 오민혁.”
들은 척도 안 하고 설거지를 끝낸 민혁이 젖은 손을 수건에 닦고 냉정한 눈으로 형운을 응시했다.
“내일 12시야. 점심 먹으러 가기 전에 입금 확인하고 안 들어와 있으면 바로 형수한테 문자 쏜다고 분명 경고했어. 만일 형수가 그게 무슨 돈이냐고 물어 오면 다 얘기할 거니까 알아서 해.”
“민혁아!”
민혁의 셔츠 소매 자락을 부여잡는 형운의 눈이 촉촉해져 있었다. 얼씨구. 저러다 진짜 울겠네. 어쩔 수 없이 민혁의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형제처럼 얽혀 자란 형운은 민혁에게는 친형 이상의 존재였다. 유약하고 빈틈 많은 성격 때문에 형이라기보다는 동생처럼 느껴지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남 일에 상관하는 걸 질색하는 민혁이 그의 나쁜 버릇을 고쳐 놓겠다며 이 귀찮은 짓을 하고 있는 거다.
처음 의도는 형운이 저렇게나 두려워하는 그의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려 단단히 혼을 내주려는 것이었지만 눈까지 촉촉하게 적시며 사정을 하는 형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흔들렸다. 저렇게나 마누라가 무서울까. 한심하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 그럼.
“형이 내 여자 취향을 알아?”
민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직하게 물었다. 그 말에 희망이 보였는지 형운이 흥분된 어조로 덤벼들었다.
“그걸 내가 모르면 세상에 누가 알겠냐!”
“형이 소개해 준 여자가 내 맘에 안 들면?”
“10번이고 100번이고 네가 오케이 할 때까지 계속 대 줄게. 내 연줄, 마누라 연줄, 우리 처제 연줄까지 다 끌어다가 대 줄 테니까 걱정 마.”
민혁은 손을 닦은 수건을 다시 걸고 식탁 의자 하나를 뺐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긴 다리를 꼬아 올렸다. 민혁의 일거수일투족에 온통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형운은 침만 꼴깍 삼킨다. 물론 형운에게 쉬운 해결책이 되어 줄 생각은 없었다. 골릴 만큼 골려 줄 생각이다. 하지만 어차피 여자들을 만나야 한다면 형운의 말처럼 기왕이면 취향에 맞는 여자라면 좋지 않겠는가.
민혁의 올해 나이 서른둘. 32년을 살면서 여자에 처음 눈을 뜬 이래 한 번도 여자가 아쉬웠던 적은 없었다. 먼저 다가오는 여자들도 넘쳐났고, 그렇지 않더라도 민혁이 내민 손을 잡지 않은 여자는 없었다. 여자도 쉬웠고, 연애도 쉬웠다.
쉬워서 그랬는지, 형운의 말마따나 취향의 여자를 제대로 못 만난 건지는 몰라도 남들처럼 열렬한 연애를 해 본 기억은 없다. 이제는 슬슬 어머니의 성화처럼 적당한 조건의 여자를 만나 결혼할 궁리를 해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한번 말이나 해 봐. 네가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이 어떤 건지 빼지도 더하지도 말고 구체적으로. 응?”
민혁의 침묵이 긍정적인 반응의 반증이라고 생각한 형운은 민혁에게 바짝 다가앉으며 적극적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말없이 식탁 상판을 톡톡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던 민혁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키는 165 이상. 작고 아담한 여자는 취향 아니야. 청순하거나 귀엽게 생긴 여자도 싫어. 멍청하게 눈 깜박 깜박거리거나 입술 내밀면서 애교 부리는 여자, 절대 사절이야. 평생 빛이라고는 못 본 것처럼 얼굴 흰 여자도 싫어. 비쩍 마른 여자도 싫어. 전체적으로 살집 있는 건 괜찮지만 배나 옆구리에만 살 붙은 스타일도 싫어. 때와 장소에 맞춰 캐주얼하게 입는 건 괜찮지만 일상복이 그런 건 곤란해. 원피스나 치마가 잘 어울리는 스타일, 검정색이나 무채색보다 밝은 색을 잘 소화하는 사람이면 좋겠어. 하이힐 신고 하루 종일 걸어도 괜찮으면 더 좋고.”
민혁이 늘어놓는 조건들을 들으며 형운의 미간에 점점 주름이 졌다. 너무 구체적이다. 설마 평소에 어디다 써 놓기라도 했던 걸까. 민혁이 잔뜩 구름이 드리운 형운의 얼굴을 힐끗 봤다.
“그만해?”
“아니, 아니야. 다 말해. 원하는 거 다 얘기해 봐.”
장난삼아 시작했는데 말하다 보니 스스로 빠져들고 있었다. 민혁은 식탁 위에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하며 말을 이어 갔다. 긴 손가락이 버릇처럼 미간을 톡톡 두드렸다.
“학벌은 상관없지만 무식한 여자도 사양이야.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화가 될 정도는 돼야지. 가진 재산이나 경제적 능력이 크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궁상맞은 건 안 돼. 웃음 헤픈 여자는 싫어. 눈꼬리가 아래로 처진 여자도 싫어.”
형운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원하는 여자 스타일을 대라고는 했지만 저런 말을 지껄일 줄은 몰랐다. 도대체 민혁이 말하는 취향의 여자가 어떤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어떤 대상에 대한 묘사인 걸까, 아니면 말 그대로 정말 이상형일까.
“나는 대충 말한 것 같은데.”
“응? 응?”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형운이 정신을 차렸다.
“형이 원하는 대로, 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에 대해 말했다고. 내가 말한 그런 여자를 찾아 줄 자신이 있단 말이지? 그것도 내가 오케이 할 때까지?”
그런 자신 따위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형운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그럼, 그럼. 이 형만 믿어. 아마 첫 약속 자리에서 너, 깜짝 놀라게 될 거다. 나의 이상형이 도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나 하고.”
형운의 너스레를 비웃듯 단정하게 생긴 입술의 한쪽 끝만 비틀어 올렸다가 내린 민혁이 싱크대로 가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몸을 돌려 방 쪽으로 향했다.
“잠깐만 기다려.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건 하나를 잊었어.”
“……뭔데?”
“법조계 종사자는 사양이야. 판사, 검사, 변호사 모두. 직계가족도 싫어.”
의외의 말을 하는 민혁을 형운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건 왜? 같은 업종 종사자면 좋잖아?”
민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형운은 괜한 소리를 했다 싶어 어깨를 으쓱거렸다.
“싫다고.”
“알았어, 알았어. 판사, 검사, 변호사, 그리고 직계가족은 뺄게. 됐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가는 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형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쉽게 민혁이 넘어와 줬다. 200만 원, 그것도 포커판에서 잃었다고 한다면 아내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으이구, 미쳤지, 미쳤어.”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쿵쿵 쳤다. 도대체 왜 카드만 잡으면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이것이 몇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친목 도모 자리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앞으로는 커피값 내기 포커도 치지 않으리라 또 한 번 다짐을 했다.
방 밖으로 다시 나오는 민혁의 손에 노트북이 들려 있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놓고 무언가 타이핑을 하고서 형운을 향해 와서 보라는 손짓을 한다. 의아한 얼굴로 다가가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본 형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이…… 이…… 독사 같은 새끼.”
“별로 적당한 표현이 아닌데. 이의 없지? 출력한다.”
다시 방으로 가 종이 두 장을 가지고 나온 민혁이 펜을 형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사인해.”
[채무 이행서]
채무자 강형운(이하 을)은 채권자 오민혁(이하 갑)에게 채무금 2,000,000원을 대신해 다음과 같이 이행한다.
1. 을은 을이 먼저 제시한 대로 갑에게 이성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2. 동일한 여성과의 만남이 세 번 지속되면 채무의 이행으로 간주한다.
3. 횟수는 지정하지 않되 기한은 최대 1년으로 지정한다.
4. 상대 여성은 갑이 제시한 조건에 최대한 부합하도록 한다.(별지 첨부)
5. 3과 4를 만족치 않을시 을은 갑이 요청한 날짜로부터 이틀 이내에 채무금을 상환한다.
6. 5를 만족치 않을시 갑은 을의 아내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릴 수 있다.
“너 진짜 이러기냐?”
형운이 펜을 바닥에 집어 던지자 민혁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사인할 거야, 아니면 형수한테 전화할까?”
형운은 모양 빠지게 쪼그리고 앉아 자기가 내던졌던 펜을 도로 집어 들고 민혁이 내민 종이에 사인했다.
“공증은 안 해도 되냐?”
형운이 빈정거리자 민혁은 서류를 착착 접어 바지 뒷주머니에 넣으며 싱긋 웃었다.
“이 밤중에 어딜 가서 공증을 해? 그리고 돈 들잖아. 형이 자기가 사인해 놓고 위조했다고 우길 정도로 악질도 아니고.”
‘악질은 네가 악질이지.’
형운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중얼거리며 입안으로 말을 씹었다.
“얼른 가. 자정 넘겼다 괜히 집에서 쫓겨나지 말고.”
그 말에 깜짝 놀란 형운이 시계를 확인하고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민혁은 헛웃음을 웃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돌아서 남은 집 정리를 위해 소매를 걷었다.
***
“고객님, 정말 운이 좋으셨어요. 이 제품, 지금 전 세계적으로 품귀 현상이잖아요. 그 미션 임파서블에서 나오면서 히트치는 바람에 정말 이거 없어서 못 팔아요. 재벌가 따님들도 구하려고 난리시지만 못 구하시는 거예요.”
직원의 호들갑에 단우는 티 나지 않게 피식 웃는다. 재벌가 아가씨들이 고작 이까짓 가방 하나에 난리를 칠까. 허풍도 어느 정도여야 먹히지.
“포장, 특별히 예쁘게 좀 해 주세요.”
“네, 고객님.”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한 직원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가방을 들고 사라졌다. 단우는 매장 가운데 있는 소파에 앉으며 전화기를 꺼내 들고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 지금 가방 들어왔다는 연락받고 매장에 왔어. 일단 내가 계산할게.]
전화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검정색 레이스 스타킹을 신은 늘씬한 다리를 꼬아 올렸다. 몸에 딱 붙는 검정 원단에 하늘하늘, 과하지 않은 프릴이 달린 원피스는 단우에게 썩 잘 어울렸다. 거기에 레이스 스타킹과 단순한 검정색 하이힐. 굵은 세팅을 넣어 풀어 내린 긴 머리.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단우에게 더할 나위 없이 빛나는 아웃핏이다.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직원이 다가와 싹싹하게 물었다.
“주시면 감사하고요.”
단우의 대답에 김이 오르는 따끈한 커피가 금세 테이블 위에 놓아졌다. 호호 불어 한 모금 넘긴 단우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커피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뜨겁고, 쓰고, 시큼하다.
“최근 들어 마신 커피 중에 최악이군.”
테이블 위에 놓아둔 전화기가 드르르르 요란하게 몸을 떨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단우가 혀를 차며 전화기를 들었다.
“바쁘신 분이 어쩐 일로 문자를 바로 봤나 봐?”
― 구했다고?
전화기 건너편의 남자가 인사도 없이 대뜸 확인부터 한다.
“응. 혹시 놓칠까 봐 연락받자마자 왔어. 일단 내가 결제할 테니까 계좌로 송금해 줘. 가방은 택배로 보내?”
― 거기가 어딘데?
“**백화점.”
― 5분 안에 갈 테니까 기다려. 내가 가서 계산할게.
“뭐? 지금 어디 있는데?”
전화는 끊겨 버렸다. 단우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전화기를 보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죄송하지만 돈 낼 사람이 지금 온다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네에!”
여직원들이 목소리를 합쳐 낭랑하게 대답했다. 말이 5분이지 5분 안에야 오겠는가. 단우는 소파 깊숙이 몸을 묻으며 매장 안을 눈으로 훑었다. 고급스럽고 깔끔한 분위기의 매장 안에 가방과 신발들이 각기 자리를 잡고 앉아 온몸으로 조명을 받으며 맵시를 뽐내고 있었다.
디자이너가 고심을 해서 만들었을 아름다운 곡선의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단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누군가에게는 사치품으로 여겨지는 것들이겠지만 단우에게는 충분한 가치를 지닌 아름다운 물건들로 보인다. 하이힐의 선은 단순하지만 아름다웠고, 바늘땀 하나, 작은 부속품 하나에도 신경을 쓴 가방이나 소품들도 매력적이었다.
다행히도 그런 취향을 만족시킬 만한 경제력이 단우에게는 있었다. 어린 나이에 대형 로펌의 변호사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자신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아름다운 외모는 단우의 취향과 동떨어지지 않은 것이어서 한때 그녀는 명품 매장에 드나드는 것에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살았었다.
단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쓸쓸하게 변했다. 아마 한동안은 이런 매장에 들락거릴 일도, 고가의 물건을 구입할 일도 없을 것이다. 명품 매장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지금의 처지가 단우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만든 계기가 문득 떠올라 그녀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매장으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큰 키에 청바지, 무늬 없는 검정 티셔츠 차림이지만 주변 시선을 확 잡아끄는 남자다. 선글라스에 챙이 긴 야구모자까지 눌러쓴 남자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는 직원들을 지나쳐 소파의 단우에게로 걸어갔다.
“이단우.”
단우가 남자를 올려다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진짜 왔네?”
“어디 있어, 가방?”
단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직원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그 가방, 아직 포장 전이면 좀 보여 주시겠어요?”
“네에.”
여직원이 조심스런 손길로 검정 가방을 들고 나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저것도 똑같은 거 아닙니까?”
남자가 가리킨 쪽에 똑같은 디자인의 빨강색 가방이 진열되어 있었다.
“네. 저것도 오늘 들어온 따끈따끈한 제품이에요.”
“좀 볼 수 있을까요?”
“아, 네.”
팔짱을 끼고 가방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시야가 답답했는지 선글라스를 벗어 들고 검정 가방을 집어 들었다.
“헉.”
옆에 서 있던 여직원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남자는 힐긋 여직원에게 눈길을 주며 씩 웃는다.
“일어나서 둘 다 한번 들어 봐.”
“나랑 언니랑은 분위기가 완전 다르잖아.”
“그래도 일어나서 한번 들어 보라고.”
“아우, 진짜. 언니한테 빨강 가방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단우는 짜증을 내면서도 일어나서 남자가 내미는 검정 가방의 스트랩을 어깨에 걸쳤다.
“빨강도 매 봐.”
포기했다는 듯 대꾸 없이 빨강 가방을 다른 쪽 어깨에 멨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검정 가방의 손잡이를 잡아채서는 직원에게 내밀었다.
“이거, 예쁘게 포장해 주세요.”
“……네? 아, 네!”
“혹시 리본 같은 거 있으면 좀 매 주시구요.”
“예.”
“그리고 이 빨강도 같이 주세요.”
“이것도요?”
남자가 싱긋 웃으며 눈을 찡긋거리고는 여직원에게만 들리게 나직이 속삭였다.
“따로 포장해 주세요.”
“네…… 네!”
여직원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자 남자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길게 뻗으며 다시 선글라스를 챙겨 썼다.
“우리 마누라가 좋아하겠지?”
“자기 입으로 가방 예쁘다는 소리 처음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똑같은 가방을 두 개를 산 거야, 지금?”
“색깔이 다르잖아, 색깔이. 아, 여기 결제요.”
다른 직원이 쪼르르 달려왔다. 남자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자 카드의 이름을 확인한 직원이 아까 다른 직원이 냈던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냈다. 남자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눈을 보였다.
“신분증 필요하세요?”
“아, 아니에요. 누구신지 뻔히 아는데요.”
살짝 떨리기까지 하는 직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여자를 녹아내리게 할 것같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먼저 가방을 들고 갔던 직원이 커다란 쇼핑백 두 개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여기.”
“어느 쪽이 검정이고 어느 쪽이 빨강이죠?”
“이쪽이 검정 가방입니다.”
쇼핑백 두 개를 받아든 남자가 빨강색 가방이 담긴 쇼핑백을 단우에게 내밀었다.
“뭐야?”
“선물이야.”
단우는 시큼털털한 맛이 나는 커피가 든 잔을 들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누구 선물?”
“네 선물.”
“왜?”
“왜는 무슨 왜야. 형부가 처제한테 가방 하나 못 사주냐?”
단우가 피식 웃으며 손으로 살짝 쇼핑백을 밀쳐 냈다.
“그런 건 진짜 형부, 처제 사이에서나 가능한 말이지.”
“야, 이단우. 넌 그렇게 생각하냐? 진짜 서운하다. 나는 너하고 형부 처제 맺은 날부터 단 한 번도 네가 내 진짜 처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강한주가 들으면 가슴을 치면서 서운해할 말이구나.”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 줄은 남자도 알고 단우도 알았다. 하지만 단우는 이런 비싼 선물을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정말 나 주려고 한 거면 여기서 나가기 전에 빨리 얘기하고 환불 받아.”
“됐어. 강한주한테 가지고 가서 내가 너한테 선물했더니 네가 진짜 처제도 아닌데 이런 선물을 왜 받느냐고 정색하더라고 이를 거야.”
“에이, 진짜.”
“그러니까 강한주 서운해하는 거 보기 싫으면 잔말 말고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 나 같은 형부 둔 게 네 복이다 생각하고.”
차마 잡을 수가 없어서 쇼핑백을 쳐다만 보는 단우에게 남자는 억지로 백을 쥐여 주었다.
“이런 화려한 색의 가방은 우리 이단우 양 아니면 소화 못 하지. 이건 딱 네 가방이야.”
남자의 능청에 단우는 웃고 말았다.
그렇게 매장을 나간 둘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목을 빼고 뒷모습을 바라보던 직원이 제자리에서 팔짝거리고 뛰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맞지? 이준우 맞지?”
“맞다니까. 내가 카드 받았잖아.”
“그런데 저 여자는 누구야? 이준우 와이프야?”
“아닌데. 전에 잡지에서 본 적 있는데 굉장히 평범한 스타일이었거든. 그 여자, 연예인 아니었어?”
두 여직원이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단우의 정체를 밝히지는 못했다.
백화점 구석의 한적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단우는 혹시나 누가 볼까 얼른 준우에게서 떨어져 차를 향해 걸었다. 연신 주변을 살피며 걷는 단우를 보고 준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연예인이냐? 왜 그렇게 주변을 의식 하냐?”
“누가 알아보면 괜히 피곤해질까 봐 그러지. 차 어디 있어? 빨리 가.”
매의 눈으로 준우의 차를 찾아낸 단우가 준우를 떠밀고 바쁘게 그 자리를 떠났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단우는 준우의 뒷모습에 대고 다시 한 번 고마움의 인사를 외쳤다.
“고마워, 형부! 진짜 고마워. 잘 쓸게.”
준우가 껄껄 웃으며 머리 위로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순순히 고맙다고 하니까 얼마나 예쁘냐. 그래야 앞으로 또 사 줄 맛이 나지.”
준우의 말에 단우는 못 말린다고 중얼거리면서도 풋 웃고 말았다.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하고 시동을 걸고 난 단우는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쇼핑백 안에 손을 넣어 가방을 꺼냈다.
대시 보드 위에 올려놓고 보니 아까 매장에서 조명 아래 있던 것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내 것이 되어서 그런가. 단우는 흐뭇한 표정으로 가방을 바라봤다. 이 가방이 단우의 손에 들어오게 된 시작은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였다.
“언니, 지난 토요일 날 밤에 나한테 음성 남겼더라? 어제 들었어.”
한주와, 그리고 그 남편 준우와 점심을 먹던 중에 단우가 문득 생각난 듯 한주에게 말했다. 한주는 회사 선배로 시작해서 단우가 회사를 나온 지금은 가족과 연락이 끊긴 단우에게 가족 같은, 아니 가족보다 가까운 사람이었다.
“빨리도 얘기한다.”
한주가 타박하자 단우가 무안한 듯 웃었다.
“영화 보자고 전화했었어. 아버지가 솔이 데리고 주무신다고 하시고, 이 사람은 해외 촬영 가서 없고…… 밤에 심심하길래 영화나 보자고 전화했는데 너, 안 받더라.”
“그래서? 영화 못 봤어?”
“아니, 봤어, 혼자.”
준우가 막 들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아내를 봤다.
“밤에 혼자 영화를 봤다고?”
“집 앞 극장에서. 말이 심야영화지 사람도 얼마나 많고 환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위험하게 혼자 밤에 영화를 보러 나간다는 게 말이 돼? 앞으로는 절대 나 없이 밤에 외출하지 마!”
실수했다, 생각하며 한주가 어깨를 움츠렸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아내의 일에 걱정이 많은 준우였다. 소위 잘나가는 연예인인 까닭에 집을 비울 일이 많아서인지 3살 연상의 아내를 과보호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걸 깜박 잊고 혼자 심야 영화 봤다는 이야기를 남편 앞에서 해 버린 덕분에 당분간 골치 좀 아프겠다 생각한 한주는 제 발등을 찍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잖은가.
“무슨 영화 봤어? 재미있었어?”
단우가 눈치껏 끼어들었다. 준우의 잘생긴 얼굴에는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쯤에서 입을 다물고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미션 임파서블.”
“그거 봤어? 나도 보고 싶었는데! 재미있었어?”
“재미있더라. 탐 크루즈 늙은 거 보면서 저 꽃미남이 저렇게 늙는 거 보면 예쁜 우리 남편도 언젠가는 늙겠구나, 생각도 하고.”
한주가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애교스럽게 웃었다. 아직 마음이 다 풀리지 않았던 준우가 드물게 볼 수 있는 아내의 애교에 배시시 웃고 말았다. 두 사람을 보는 단우의 눈에도 웃음기가 감돌았다.
“참, 거기 나오는 가방. 그거 예쁘던데 실제로 있는 건가?”
“가방?”
한주의 입에서 나온 가방, 이라는 단어에 단우와 준우가 동시에 되물었다.
“응. 프라다 로고가 붙어 있길래. 예쁘더라고. 예쁜 여배우가 들어서 예뻐 보였는지 몰라도.”
“언니 입에서 가방 예쁘다는 소리를 다 듣고. 별일이네. 그 가방 아마 구하기 힘들걸. 안 그래도 그 영화가 흥행 성공하면서 품귀 현상이라고 하더라고.”
단우가 무심한 척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별거 아닌 그 말이 어쩐지 무심히 들리지 않는 한주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영화를 보지도 않았다면서 어떻게 대번에 한주가 말하는 가방이 뭔지를 알아들었을까.
“그렇게 구하기 힘들대?”
한주가 다시 슬쩍 물었다. 단우는 한주가 떠보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잡지에서 보고 예쁘길래 백화점 나갈 일이 있어서 매장에도 한 번 들러 봤었는데 구하기 어렵다대.”
“여보, 당신이 좀 구해 주면 안 돼? 단우랑 나랑 하나씩.”
한주의 말에 숙이고 있던 단우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언니. 사려면 언니나 사. 나는 능력 안 돼.”
“무슨 가방 하나 가지고 능력씩이나. 매장까지 가서 찾아봤으면 마음에 들었다는 거잖아.”
“그냥 구경이나 하려고 한 거지. 내가 지금 처지에 무슨 가방을.”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젓는 단우를 보며 예전의 단우가 어땠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한주는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한주가 일하던 로펌 대양에 단우가 처음 입사했을 때 그녀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보수적인 분위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집단에서 단우처럼 외모로 튀는 변호사는 좋은 시선을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한주는 처음 봤을 때부터 단우가 마음에 들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얼굴, 늘씬한 몸매에 너무 잘 어울리는 과감한 옷차림, 주변의 못마땅한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늘 당당한 그녀가 좋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그 외모에 업무 능력까지 아주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이단우 변호사는 도대체 자기 몸치장하는 데 들이는 돈이 얼마야?”
어느 날, 화장실에서 여변호사 둘이 단우를 놓고 뒷담화 하는 소리를 들었다.
“글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명품이지, 아마? 돈 벌어서 거기다 다 쓰나 봐.”
“제 몸치장할 시간에 일이나 더 열심히 하지. 그 팀 남자들이 이단우 보느라 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하더라. 법정에서도 섹스어필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 돈 들이고 그만큼 안 예쁜 여자가 어디 있냐?”
한주가 화장실 문을 거칠게 밀고 나오자 세면대 앞에 서 있던 여변호사들이 깜짝 놀라 몸을 세우고 꾸벅 인사했다.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옆에서 손을 씻은 한주가 냉정한 눈으로 두 여변호사를 차례로 빤히 봤다.
“돈 들이고 그만큼 안 예쁜 여자…… 여기도 둘이나 있네요.”
여자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댁들 시간당 인건비가 얼만데 그런 쓸데없는 수다에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정신 차리고 일들이나 하세요. 우리 팀 남자직원들, 댁들보다 훨씬 일 잘하니까 남 걱정 그만하시고.”
그런 소리까지 듣던 단우가 지금 가방 하나 따위에 자기가 그럴 형편이 되느냐며 고개를 내젓는 모습이 한주에게는 애잔하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