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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무슨 꿍꿍이인지 저 식사자리의 다음 날, 준우가 단우에게 전화를 걸어 그 가방을 구해 달라고 했다. 내가 무슨 수로 없는 가방을 구하냐고 되묻는 단우에게 깜짝 선물을 할 작정이니 꼭 좀 구해 놓으라고 당부를 하고 준우는 해외 촬영을 떠났다.
매장에 예약을 부탁해 놓고 꽤 오래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빨리 가방이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은 게 오늘이었다. 그리고 이 가방이 이렇게 자신의 손에까지 들어올 줄은 진심으로 예상치 못했다.
“예쁘다.”
지하 주차장의 칙칙한 조명 아래에서도 우아하게 빛을 발하는 빨간 가방에서 단우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건 그냥 비싼 가방, 이 아니었다. 단우가 잊고 살았던, 덮어 누르고 있었던 단우의 지난날과 같은 것이다.
준우와 한주가 이 가방으로 단우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것 같았다. 그만 움츠리고 다시 예전의 그 당당하던 이단우로 돌아가라는 뜻이겠지. 이 화려한 빨강색 가방이 잘 어울리는 그때의 이단우로.
단우는 한참 동안 가방을 바라보다가 다시 쇼핑백 안에 집어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단우를 닮은 날렵한 흰색 쿠페가 묵직한 엔진 소리를 내며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2. 옷깃만 스쳐도 인연


“여긴가?”
민혁이 올려다보고 있는 레스토랑 건물은 언뜻 어느 이온음료 광고에 나오는 지중해 연안의 건물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었다. 강남 한복판에 이 정도 크기의 레스토랑이라. 돈 좀 있는 집안인가 보군. 민혁의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외국에서 요리학교를 졸업한 딸을 위해 부모님이 마련해 준 거라고는 하지만 29살 여자가 가지고 있기에 과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건물 계단을 올라가며 민혁은 형운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설명을 할 만큼 했는데도 도대체 민혁이 뭘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배경으로 보자면 강남 한복판에서 부모가 차려 준 고급 양식당을 운영하는 20대 후반의 여자는 절대 민혁의 취향이 아니다.
오늘이 형운이 마련한 네 번째 자리다. 지난 세 번의 여자들도 다 비슷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음악 전공자, 미술 전공자, 무용 전공자. 예체능계 전공자를 폄하할 생각은 절대 없지만 이 또한 민혁의 취향은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외모마저도 모두 비슷했다. 가느다랗고 하늘하늘한 몸에 햇빛이라고는 쬐여 본 적 없어 보이는 흰 피부와 긴 생머리까지.
“어서 오십시오…….”
상냥하지만 전형적인 억양으로 인사를 건네던 여종업원이 민혁을 보고 눈을 깜박거리며 자리에 멈춰 섰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종업원의 볼이 발그스레하게 물들었다.
“혼자 오셨습니까?”
유난스럽게 끝을 늘이며 다가오는 여종업원을 향해 민혁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은서현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아, 사장님 손님이세요? 잠시만요. 금방 불러 드릴게요.”
앉을 자리를 안내해 주고 사람을 부르러 갈 만도 한데 여종업원은 정신없이 자리를 떠났다. 식사 시간이 아니라 한가한 홀 가운데 덩그러니 남은 민혁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심드렁하게 실내를 둘러보았다.
네 번째 약속을 알리는 형운의 전화를 받고 이제 그만하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지금 민혁의 입에서 먼저 관두자는 말이 나온다면 형운만 좋은 일을 시키는 셈이다. 형운의 버릇을 고쳐 놓으려면 조금은 더 고생을 시켜 봐야 한다.
“저를 찾아오셨다고요?”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민혁이 하마터면 여자의 면전에서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 오늘의 소개팅 상대도 이전의 세 번의 여자들과 유사한 외모였다. 형운에게 예쁜 여자란 저런 모습으로 정형화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 만나 뵙기로 약속한 오민혁입니다.”
“어머.”
여자는 대답 대신 의미가 불분명한 감탄사를 지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변호사시라고 들었는데…….”
많은 의미를 내포한 듯한 말이다. 민혁이 피식 웃었다.
“맞습니다만.”
서현은 연신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실례라는 것도 잊고 민혁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 남자는 서현이 오늘 소개팅 상대가 변호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짐작했던 이미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큰 키의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몸에 적당히 감기는 세련된 디자인의 슈트 차림은 레스토랑에 자주 드나드는 패션계 종사자들과 비교해도 딸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더 압권은 얼굴이었다. 그냥 잘생겼다, 라고 표현하기엔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잘난 남자였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균형 잡힌 얼굴 전체가 다 멋있지만 여자들의 눈길을 가장 잡아끄는 것은 눈매다. 움푹 파인 눈두덩 아래로 길게 뻗은 서늘한 눈매. 뭐라 표현하기는 어려운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눈매는 여자들이 민혁에게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원천 같은 것이었다. 이건 취향의 문제가 아닌 듯 식당 안 여종업원들도 넋을 놓고 민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서현이 레스토랑 안쪽으로 민혁을 안내했다. 민혁을 뒤따라 걷는 여자의 볼 위로 아까 여종업원의 얼굴에 떠올랐던 것과 똑같은 홍조가 어렸다.

“와인 맛이 어떠세요? 메인 음식과 어울리는 것으로 골라 봤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좋습니다.”
민혁은 간단하게 대꾸하고 잊고 있었다는 듯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식사 시작부터 계속 와인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서현은 대단한 와인 마니아인 모양이었다. 사실 민혁은 그다지 와인을 즐기지 않았다. 오늘 식사도 서현이 꽤나 자랑스러워하는 고급 와인보다는 음식 쪽이 훨씬 인상적이었다.
“요리도 직접 하십니까?”
민혁의 물음에 서현이 잠시 대답을 고르는 듯 뜸을 들였다.
“셰프가 따로 있어요. 저는 주로 운영에 관여하고요. 하지만 주방 재료 매입부터 메뉴까지, 대부분은 제 손을 거치죠.”
직접 주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인이 운영하는 식당의 음식이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면 운영자도 충분히 칭찬을 받을 만했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이 식당의 요리는 훌륭했다. 음식 맛만으로도 오늘의 이 자리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민혁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법조계 종사자들을 꽤 아는데 민혁 씨처럼 멋진 변호사는 본 적이 없어요.”
서현이 부끄러운 듯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나. 잠시 난감해하던 민혁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음먹고 날려 준 민혁의 미소에 여자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민혁 씨는 왜 법원이나 검찰로 안 가고 변호사가 되셨어요?”
민혁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은 질문이었다.
“변호사가 되고 싶었거든요.”
서현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로펌을 가시지 왜 바로 개업을 하셨어요?”
“집단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검사나 판사 경력 없이 개업해서 일하기 힘드시지 않으세요? 연수원 출신이라고 하면 일단은 의뢰인들도 접고 들어간다고 하던데.”
민혁은 포크를 내려놓고 물 잔을 들어 입가심을 했다.
“이쪽에 대해서 좀 아시나 봅니다.”
“아, 아버지가 검찰에 오래 계셨었어요. 오빠는 지금 부산지검에서 근무하는 검사고요.”
죽었어, 유형운. 민혁은 티 나지 않게 이를 갈았다. 법조계 연관자는 싫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갑자기 음식 맛이 뚝 떨어졌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전 지금 제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서현은 그 대답에 그렇게 납득한 듯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를 으쓱했다.
“뭐 민혁 씨가 만족하신다면 그걸로 된 거죠.”
생긋 웃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끝에 달하게 치솟던 민혁의 짜증스러움이 살짝 진정이 되었다. 어쨌거나 음식은 맛있었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이 자리를 떠나면 다시 보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
“민혁 씨 부모님은 뭐 하는 분이세요?”
드디어 입맛이 뚝 떨어졌다. 민혁은 다시 포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두 분이 함께 작은 사업을 하십니다. 서현 씨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민혁은 슬쩍 서현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는 검사 생활 접으시고 잠시 변호사 생활 하시다가 지금은 정계에 계세요.”
“아, 그러시군요.”
쓰리 아웃. 민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취향이 아닌 외모의 여자, 검찰 출신에 현재 정치인인 부모까지. 정말 이렇게 아니기도 어렵겠다. 민혁은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타이밍을 잡아야 했다.
우우웅.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민혁은 반가운 표정을 애써 감추며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전화 좀…….”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가며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세요, 어머니.”
― 민혁아, 큰일 났다. 얼른 집에 좀 와라. 응?
“또 무슨 일인데요?”
민혁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무슨 일이건 일단 큰일 났다, 로 시작하는 건 어머니의 말버릇이다.
― 네 형이 결혼을 엎겠다고 난리야. 어쩌면 좋니.
“엎는다고 하면 엎으라고 하세요. 본인이 안 하겠다는 걸 누가 말려요.”
―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야박하게 하니. 내 말은 듣지도 않는데 너라도 형을 말려야지.
“그러니까 어머니도 못 말리는 걸 제가 무슨 수로 말려요. 어머니, 형 나이가 서른넷이에요. 어머니가 이러실 일이 아니라고요. 놔두세요.”
― 진짜 결혼 깨져 봐. 연경이 죽어, 죽는다고!
“연경이가 죽긴 왜 죽어요. 걔가 형 아니면 결혼할 남자가 없을까 봐요?”
― 너 이 새끼, 잔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안 튀어 와?
결국 어머니가 고상함을 버리고 버럭 소리를 지른 후에야 민혁은 알았다고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여기서 저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바에야 어머니 하소연 들어 주러 가는 게 낫겠다.
“죄송합니다.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어머니가 급하게 절 찾으시네요. 오늘은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아니, 무슨…….”
민혁의 말에 서현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민혁은 최대한 정중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식사, 아주 좋았습니다. 계산은 했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다는 의례적인 인사말도 남기지 않고 민혁은 자리를 떴다.

차에 올라타 부모님의 집으로 차를 몰며 형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 왜 벌써 전화를 해?
약속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걸려 온 민혁의 전화에 대충 상황을 감지했는지 형운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형,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래?”
― 엉? 뭘?
“아버지랑 오빠가 전, 현직 검사라는데, 형 그거 알았어?”
― 진짜? 아니, 난 몰랐어. 민혁아, 나 진짜 몰랐어.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건지 근본적인 이유를 형이 부디 잊지 말았으면 해. 머리가 나빠서 외우지 못하겠다면 계약서를 펴 놓고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 봐.”
나직하고 쌩한 목소리에 민혁이 어지간히 열이 올랐다는 걸 눈치챈 형운이 바짝 엎드린다.
― 알았어, 알았어. 내가 실수했다. 네 형수가 아는 동생이라 집안까지는 내가 미처 알아볼 생각을 못 했어. 민혁아, 시간 조금만 줘 봐. 내가 다시 잘 골라 볼게. 형 한번 믿어 봐.
“형을 믿어서가 아니라 이때까지 쓴 내 시간이 아까워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어. 다음번에도 이런 수준 미달 들이밀면 그땐 정말 알아서 해.”
주절주절 뭐라고 변명을 하는 형운의 말을 듣지도 않고 민혁은 전화를 끊었다. 누굴 원망하겠는가. 내 발등을 내가 찍은 것을. 형운에게 겁을 주려고 다음번 운운했지만 이 짓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낯익은 길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몇 년 전 독립할 때까지 살았던 집에서 여전히 부모님이 형과 함께 살고 있다. 이 동네는 정말 발전이 안 된다. 동네 어귀에 어릴 적부터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오가며 다니던 양과자집도 그대로, 손으로 쓴 것처럼 투박하고 촌스러운 간판을 단 구멍가게도 그대로다. 근방의 주택가는 모두 빌라나 아파트로 개발이 되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이 동네는 그대로였다.
한동안 이 동네를 벗어나라고 어머니를 닦달한 적이 있었다. 이 궁상맞은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부모님이 이해가 정말 안 되었지만 요즘은 여길 찾아올 때면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그런 향수를 느낄 때마다 나이를 먹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집이 있는 골목으로 민혁의 차가 들어서자 그 앞으로 작은 그림자 하나가 폴짝 뛰어들며 팔을 머리 위로 흔들었다. 차를 멈춘 민혁이 운전석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민혁의 승용차 지붕에 키가 간신히 닿을 정도로 아담 사이즈인 민혁의 어머니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거기서 뭐하고 계셨어요?”
“너 차 세울 자리 없을까 봐 자리 맡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잖아.”
50대 중반 나이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앳된 얼굴의 어머니는 마치 부잣집 막내딸로 곱게 곱게만 자라 부유한 남편을 만나 편안히 살아온 가정주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20살이 채 되기도 전부터 청량리 유흥가를 돌며 일수 일을 시작해 평생 대부업을 직업으로 삼아 지금까지 살아온 험한 인생 여정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고운 외모였다.
“주차할 자리 없어서 집에 못 들어갈까 봐요?”
“매정한 놈. 엄마가 저 주차하기 편하라고 이렇게 고생하면서 자리까지 맡아 줬더니.”
“그러니까 주차장 넉넉한 아파트로 이사 좀 가시라고요.”
“이 나이에 평생 살던 동네를 왜 떠나!”
발끈하는 어머니를 보며 민혁은 턱을 들고 웃었다. 싹싹한 아들은 아니지만 민혁은 어머니는 사랑했다. 살아온 험한 세월도 어머니가 가진 유쾌하고 밝은 천성은 해치지 못했고 민혁은 그런 어머니가 좋았다. 담벼락에 바짝 붙여서 차를 세우고 내리자 민혁의 어깨에 머리끝이 간신히 닿을 정도인 어머니가 아들의 팔짱을 끼며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너는 형이 결혼을 엎는다고 하고, 엄마가 그렇게 걱정스럽게 전화를 했는데 어쩜 그렇게 쌀쌀맞니. 내 배로 낳았지만 진짜 못됐어.”
“어머니 배로 낳았지만 아버지 피가 반 섞였잖아요.”
“뭐, 듣고 보니 그렇구나.”
자신의 말에 수긍하는 어머니를 보며 민혁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형은요?”
“네 아버지한테 한 대 얻어맞고 나갔는데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연경이는요?”
“안에 있지. 너, 그 호칭 좀 고쳐. 연경이가 뭐야, 형수 될 사람한테.”
“형수는 무슨. 결혼이나 하고 얘기하세요.”
모자(母子)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집 안으로 들어서자 주방에서 연경이 고개를 쏙 내밀고는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
어머니 얘기대로라면 싸매고 누웠어야 할 텐데 평소와 전혀 다름없이 화사한 얼굴로 생글거리며 인사를 하는 연경을 보고 그럼 그렇지 하며 민혁은 혀를 찼다.
“뭐야, 싸매고 누운 줄 알았더니.”
물 잔을 들고 나와 옆에 앉는 연경을 보고 민혁이 대뜸 물었다. 연경은 입을 삐죽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싸매고 누우면 나만 손해지.”
연경은 배시시 웃으며 홀짝거리고 물을 마셨다. 원래도 마른 체형이지만 살이 더 빠진 것 같다.
연경은 태어나서 백일 무렵에 처음 이 집에 왔다. 그때부터 같이 자랐으니까 남매나 다름없는 사이다. 민혁과는 동갑내기라 친구처럼, 쌍둥이 남매처럼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서로에게 많은 위로도 되어 주면서 그렇게 자랐다.
성인이 되어서 민혁의 형인 규혁과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고 당연히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 가족들에게 인식이 되면서 어머니는 가끔 형수라고 부르라는 잔소리를 하곤 했지만 민혁에게나 연경에게나 영 익숙해지지 않는 호칭이었다.
“이유가 뭔데?”
“그렇지, 뭐.”
“어디 갔어?”
“모르겠어.”
체념을 한 건지, 아니면 믿고 있어서 그런 건지. 시선을 내리깔고 물을 홀짝이는 연경의 마른 얼굴이 안쓰러웠다.
형이 결혼을 엎겠다고 변덕을 부린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그에게도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그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연경은 상처 입었고 그런 연경을 바라보는 가족들도 마음이 아팠다.
“왔냐?”
민혁의 목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안방에서 나오면서 알은척을 했다. 민혁은 자리에서 일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인사치고는 참 멋도 없다.
“규혁이한테 전화해 봤어?”
“아니요.”
“거 좀 해 보지. 전화 안 받으면 갈 만한 데 좀 찾아보고.”
“애도 아니고…… 들어올 때 되면 오겠죠.”
얼핏 무심하게 들리지만 민혁의 말이 정답임을 가족 모두 알고 있었다.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무거움을 참지 못한 어머니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저녁 먹었니?”
“어머니가 하도 성화를 해서 먹다 말고 나왔어요. 밥 좀 주세요.”
“그래. 연경이가 아까 해물찜 했는데 맛있더라.”
민혁이 과장되게 눈살을 찌푸리며 연경을 힐끗 봤다.
“연경이 음식이 맛있다고요?”
“나 요즘 음식 솜씨 좀 늘었어. 무시하지 마.”
“늘어 봤자 김연경 요리가 거기서 거기지. 라면이나 끓여 줘.”
“오민혁!”
식구들의 마음을 온통 휘저어 놓고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을 규혁을 생각하면 다들 마음이 무거웠지만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주방으로 모였다. 혼자 있을 규혁이 가장 마음 아파하고 있을 것은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

언제부터 돌잔치라는 행사가 결혼식이나 어르신들의 칠순 잔치처럼 큰 행사가 되었을까. 호텔의 연회장이 결혼식 피로연과 비슷한 숫자로 돌잔치 장소로 대여되는 게 당연하게 된 지 오래다.
어느 돌잔치나 비슷비슷하게 입구에는 아이의 지난 1년간의 성장이 담긴 사진이 진열되어 있고, 덕담을 써달라고 하는 커다란 보드도 함께 놓여 있었다. 아기 엄마는 아마 며칠 밤을 새면서 사진을 골랐을 것이고, 전문가의 손을 거쳐서 이 멋진 작품을 만들었겠지만 사실 들인 정성에 비하면 그 사진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주인공 아기가 여자아이인 듯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연회장 안은 온통 분홍색 천지였다. 파스텔톤 분홍의 풍선들이 연회장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테이블보도 분홍색, 미리 세팅 되어 있는 식기의 색상도 분홍색이다.
주인공 아기와 부모가 화사한 색상의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대부분의 돌잔치에서 그렇듯 아기는 지쳐서 짜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행사 시작 시간이 되려면 좀 남아 있어서 연회장 안은 사진을 찍느라 부산스러운 가족들을 빼고는 한적했다.
일찍 행사장에 도착한 단우는 입구에 있는 아기의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아기와 부모들의 포토타임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참…… 예쁘단 말이지.”
단우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사진 속의 아기는 참 예뻤다. 솔직히 아기들은 다 예쁘지만 오늘의 주인공 여자아기는 그중에서도 특히 예쁘다. 아기 엄마 인물이 출중하긴 하지만 손을 많이 댔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아기 얼굴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절친한 사람만 초대되었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절친한 사람의 목록에 왜 자기가 들어갔는지 조금은 의아하기도 했다. 아기 아빠인 유형운 변호사가 대학 선배이긴 하지만 학생 시절에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고, 같은 로펌의 같은 팀에서 일하긴 했지만 그 팀에서 초대된 것은 단우 하나다.
“단우야. 꼭 와라. 와서 회사 사람들이랑 인사도 좀 하고.”
“회사 사람들이요?”
“그래. 앞으로 같이 일할 사이니까 이런 기회에 눈도장 찍으면 좋지.”
형운이 그 로펌을 나와 개업한 얼마 후 단우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로펌을 그만뒀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형운은 자기와 같이 일하자고 조르고 있는 중이었다. 아주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고민 중이긴 하지만 앞으로 같이 일할 사이 운운하는 형운의 설레발은 알아줘야 한다.
학교 선배에, 옛 직장 동료에, 앞으로 같이 일할지도 모르는 사이. 이 정도면 돌잔치 정도는 얼굴 내밀어도 억울할 것 없겠다 싶었다. 게다가 단우는 아기를 아주 좋아했다. 미인으로 소문난 형운의 아내를 닮았다면 얼마나 예쁠까 기대를 잔뜩 하고 왔는데 사진 속의 아기는 기대만큼 예뻤다.
“내가 딸을 낳아도 이렇게 예쁘려나.”
사진 한 장 한 장을 마치 아기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입가에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 찬찬히 살피다가 덕담 보드 앞에서 펜을 들고 또 열심히 고민을 하며 아기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단우 씨.”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덕담 쓰기에 열중해 있던 단우의 고개가 들렸다. 저만치서 아기를 안은 형운의 아내, 혜주가 손을 머리 위로 흔들었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와 줘서 고마워요.”
“얘가 주인공이구나? 저 안아 봐도 돼요?”
“괜히 예쁜 옷 버릴까 봐. 괜찮겠어요?”
“네. 이리 와 봐, 아가야.”
품에 안은 아기는 사진보다 백배는 더 예뻤다. 보들보들한 살결에 눈을 꽉 채운 까만 눈동자, 은은하게 풍기는 우유 냄새까지. 한복이 불편한지 자꾸 보채는 아기를 익숙하게 안아서 토닥거리는 단우를 보고 혜주가 감탄했다.
“처녀가 어쩜 이렇게 아기를 잘 봐요?”
“제가 워낙 아기들을 좋아해요.”
“얼른 결혼해서 자기 아기 낳아야겠다. 남의 애가 이렇게 예쁜데 본인 애는 얼마나 예쁘겠어.”
“그럴까요?”
“사귀는 사람 없어요?”
“지금은 없어요.”
“왜요?”
“저, 요즘 백수잖아요. 백수가 무슨 연애를 해요.”
아기가 에치, 하며 귀여운 소리로 재채기를 했다. 단우가 입은 원피스 어깨에 아기 침이 묻자 혜주가 질색을 하며 아기를 떼어 놓으려 했다.
“어머, 예쁜 옷에.”
“괜찮아요. 아기 침이 뭐 더러운가요.”
단우는 테이블에서 냅킨을 집어 옷에 묻은 것을 쓱쓱 닦고 아기 입도 닦아 주고는 다시 아기를 고쳐 안았다.
“진짜. 단우 씨, 생긴 거하고 다르게 털털하네.”
“제가 그런 소리 좀 들어요.”
단우와 혜주가 까르르 웃고 있는 사이로 양복 차림의 형운이 얼굴을 내밀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정연이가 단우 씨 옷에 침을 묻혔는데 이 아가씨가 쓱쓱 닦고는 도로 애를 안잖아. 도도하게 생겨서는 하는 짓이 하도 털털해서.”
“이 변호사 성격 하나는 끝내주지. 인상이 이래서 사람들이 그걸 알 만큼 가까이 다가가지를 않으니 그걸 알 수가 없는 게 문제지만. 넌 얼굴이 안티라니까.”
형운의 실없는 농담에 혜주가 남편을 향해 눈을 흘겼다.
“단우 씨 같은 미인이 왜 얼굴이 안티야? 지들이 못났으니까 이렇게 잘난 여자한테 함부로 가까이 못 다가가는 거지. 저 인물에, 저 몸매에, 학벌, 직업. 뭐가 하나 빠져? 저렇게 다 갖추고 저 정도 도도한 맛도 없으면 그게 여자야?”
칭찬인가? 단우는 모호한 표정으로 부부가 투닥거리는 틈에서 한 발 물러섰다.
“난 좋은 뜻으로 한 말이야, 좋은 뜻으로. 기왕 예쁘게 생긴 거, 착하게도 생겼으면 얼마나 좋아.”
“생각 좀 하고 말을 하라고. 그게 좋은 뜻으로 들리겠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어물거리던 단우는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저기, 저 지금 가 봐야 해서요.”
아기를 형운에게 건네주고 들고 있던 돌 반지가 든 작은 가방은 혜주 손에 들려 주었다.
“아니, 왜? 밥 먹고 가지.”
“선약이 있어서요. 얼굴만 보려고 잠깐 들른 거예요.”
“이렇게 가면 서운해서 어떡해요. 내가 나중에 따로 밥이라도 살게요.”
단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다음에 꼭 밥 사 주세요.”
아이를 아내에게 안겨 주고 형운은 단우를 따라나섰다.
“바쁜데 뭐 하러 나오세요. 알아서 갈 테니까 손님 맞을 준비나 하세요.”
“준비야 여기서 다 해 주는데 뭐. 그건 그렇고 이단우, 언제부터 출근할 거야?”
단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출근하겠다고 한 적 없는데.”
형운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단우의 등을 툭 쳤다.
“그만 튕겨, 이 변호사. 얼른 일 시작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자. 너무 오래 쉬면 감 떨어져.”
일을 같이 하고 말고를 떠나서 정말 고마웠다. 어떤 사람에게는 같이 일하기를 기피할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단우에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 주다니. 형운의 입장에서는 그저 일 잘하는 동료를 섭외하려는 것뿐일지 몰라도 최근 들어 사람으로부터 지독한 상처를 연달아 받았던 단우에게는 가슴이 찡하게 고마운 일이었다.
“사무실에 한번 들러. 응?”
확답을 받듯 다시 한 번 묻는 형운에게 단우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연락드리고 갈게요.”
“약속한 걸로 알고 있을게. 꼭 연락해.”
미소를 남기고 단우는 개나리를 꼭 닮은 연노랑 시폰 원피스 자락을 날리며 사뿐사뿐 주차장을 가로질러 갔다.
단우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내 기분 좋은 얼굴로 돌아서던 형운은 등 뒤에 서 있던 민혁과 마주치자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아이고, 깜짝이야.”
민혁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다가 저만치 사라지고 있는 단우의 노란 실루엣을 힐끗 봤다.
“왜 그렇게 놀라?”
“기척도 없이 등 뒤에 서 있으니까 그렇지.”
얼마나 놀랐는지 가슴까지 쓸어내리는 형운을 시큰둥하게 보고 민혁이 턱짓으로 단우를 가리켰다.
“누구야?”
“누구?”
“저기 노란 원피스.”
민혁이 가리킨 쪽을 목을 빼고 쳐다봤지만 이미 주차장에 빽빽이 주차된 차 사이로 사라진 단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
“지금 막 형하고 인사하고 간 노란 원피스.”
“아. 아는 후배. 왜?”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민혁은 잠시 단우가 사라진 주차장 쪽에 시선을 주며 서 있었다.
“예뻐?”
“뭐?”
“뒷모습밖에 못 봐서. 예쁘냐고, 그 후배.”
형운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하는 민혁을 이상하다는 듯 위아래로 쓸어 봤다.
“아니, 지독하게 못 생겼어.”
퉁명스러운 형운의 대답에 민혁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민혁은 내심 아깝다고 생각했다. 하늘거리는 연노란색 시폰 원피스를 늘씬한 몸에 휘감고 등을 똑바로 편 멋진 자세로 또각또각 걸어가는 뒷모습이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멋있었는데.
형운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앞서 걸었다. 변호사는 싫다고 못을 박았으니 단우는 민혁에게 대 줄 소개녀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엄청 예쁜데 네가 절대 싫다는 변호사다! 라고 말해 줄 걸 그랬나.

돌잔치가 열릴 연회실 안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형운이 앞서 연회실 안에 들어서고 뒤이어 민혁이 모습을 나타내자 웅성거리던 소음이 마치 TV 볼륨을 낮춘 것처럼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형운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민혁에게로 일시에 몰린 연회실 안의 시선을 휘둘러봤다. 뭐 드문 경험도 아니었고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지만 매번 신기하기도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저 녀석에게는 자석처럼 여자들의 시선이 따라다녔다. 지금처럼 저렇게 시큰둥하고 불퉁맞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도 민혁의 앞에 서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볼을 발그레 붉히며 입가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미소를 머금곤 했다. 그게 오민혁의 힘, 이라는 걸 형운은 중학교 1학년, 동네 누나의 결혼식장에서 처음 알았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형운과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민혁은 어머니들의 강권으로 셔츠에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동네 계모임 멤버 아주머니의 딸 결혼식에 참석했었다. 그날 결혼식 하객으로 온 신부의 친구들의 고작 초등학교 6학년일 뿐인 민혁의 주변에 몰려드는 걸 보고 형운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다.
민혁이 잘생겼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동네 여자 꼬맹이들이 민혁을 놓고 양쪽에서 팔을 붙잡아 가며 싸움질을 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봤지만 그저 어린 여자애들의 유치한 기싸움이려니 했다.
근방의 유흥가를 상대로 대부업을 하던 민혁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민혁의 집에 드나들던 젊은 누나들이 늘상 민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손에 뭐라도 쥐여 주는 모습도 수없이 봤지만 그저 민혁의 어머니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결혼식장에서 처음 만난 20대 초중반의 신부 친구들이 6학년인 민혁을 둘러싸고 얼굴에 홍조를 띠우며 10년만 일찍 태어나지 그랬냐는 둥, 몇 년만 지나면 숨이 막히겠다는 둥 허튼소리를 하는 모습을 보고 형운은 민혁에게 나이를 막론하고 여자를 끄는 힘이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게다가 그 선명한 기억 속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민혁의 표정이었다. 고작 13살짜리 남자애 주제에 20대의 한껏 차려입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저렇게 시크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아마 저 자리에 있는 것이 형운 자신이었다면 숨도 제대로 못 쉬다가 산소 부족으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여보.”
옛 생각에 잠시 잠겼던 형운은 아내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어. 왜?”
“거기서 뭐하고 있어? 와서 손님들한테 인사하지 않고.”
남편에게 짜증을 낸 혜주가 옆에 서 있는 민혁을 못마땅한 눈으로 쓱 훑어 내렸다.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닌 듯 민혁도 만만치 않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혜주를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혜주는 민혁에게 끌리지 않는 몇 안 되는 여자 중 하나였다.
연애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둘은 앙숙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 인물만 잘난 남자들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는 혜주는 외모가 잘난 남자를 일단 경계하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유순한 성격의 형운을 쥐고 흔드는 성격 강한 민혁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 좋다고 납작 엎어지는 사람에게도 친절하지 않은 민혁이, 대놓고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는 혜주에게 친절할 리는 만무했다. 그렇게 둘은 만나기만 하면 불꽃이 튀었지만 대개는 다혈질인 혜주가 혼자 바르르 떠는 걸로 끝이 나곤 했다.
“축하드립니다.”
퉁명스럽게 툭 던진 민혁의 인사에 혜주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빈손이에요?”
까칠한 대꾸에 민혁이 피식 웃고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살짝 봉투를 꺼내 보였다.
“형수님이 이걸 제일 좋아하실 것 같아서.”
발끈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 혜주는 팩 하니 돌아섰다. 안절부절못하던 형운이 멀어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형.”
민혁의 뒷모습에 대고 눈을 흘기며 주먹질을 하던 형운은 갑자기 획 돌아보는 민혁의 얼굴을 마주하고 심장이 발끝까지 뚝 떨어졌다가 튕겨 올라오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응? 응?”
“아까 그 여자.”
“여자? 누구?”
“주차장에서 봤던 노란 원피스.”
노란 원피스? 기억을 더듬던 민혁의 뇌리에 단우의 모습이 확 튀어 올랐다.
“걔는 왜?”
“다음은 그 여자하고 약속 잡아 줘.”
잠시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된 형운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눈을 번쩍 떴다.
“걔? 아니, 걔는…….”
네가 절대 싫다던 변호사라니까, 라는 말이 입술 밖으로 막 튀어나오려고 할 때 형운은 평생 가장 뛰어난 순발력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입으로 전달한 덕분이었다. 분명 저 녀석이 먼저 제 입으로 만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즉 이 만남이 성사된다면 그건 전적으로 민혁의 책임이다.
눈만 껌벅이고 있는 형운을 보고 엉뚱한 짐작을 한 민혁이 코웃음을 웃었다.
“지독하게 못생겼어도 상관없다고.”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돌아서 걸어가는 민혁의 뒷모습을 어리둥절하게 보던 형운은 자기가 아까 단우를 놓고 그렇게 말했던 걸 그제야 떠올렸다. 푸하, 하고 웃음이 터졌다. 웃다가 생각해 보니 희한하다. 지독하게 못생겼어도 상관없다고? 저 자식. 무슨 마음이야, 도대체?
다시 웃음이 히죽 배어 나왔다. 지독히 못생긴 여자를 각오하고 나갔다가 단우를 마주하면 아무리 저 자식이래도 놀라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혼자 어깨까지 들썩이며 키득거리던 형운은 돌잔치를 시작한다는 사회자의 안내에 허둥지둥 단상 앞에서 도끼눈을 뜨고 있는 혜주에게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