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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솔아, 이모한테 와 봐. 자, 이거 보이지? 이모한테 오면 이거 줄게.”
눈앞에서 유혹하는 아기용 과자를 빤히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던 솔이 엉덩이를 움찔움찔거리며 시동을 걸더니 바닥에 배를 대고 주욱 밀며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와아, 솔아! 잘했어, 조금만 더, 더 이리로 와 봐!”
흥분한 단우가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며 손에 든 과자를 더 흔들어 대자 아기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더니 팔을 앞으로 내딛으며 어설프게 기어서 단우에게로 다가왔다. 단우는 아기를 반짝 안아 들고 볼에 소리 나게 쪽쪽 입맞춤을 하고 볼을 맞비볐다.
“아이고, 우리 솔이. 드디어 기는구나. 이렇게 잘 기는데 왜 그동안 안 했어. 예뻐, 세상에서 최고로 예뻐.”
단우가 아기를 물고 빨며 찬사를 퍼붓는 동안 아기는 짧고 통통한 팔을 뻗어 단우의 손에 들린 과자를 잡으려고 낑낑거렸다. 기다란 모양의 과자를 손에 쥐여 주고 아기를 무릎에 앉힌 단우가 사랑이 철철 넘치는 눈으로 아기가 오물거리며 과자를 먹는 모습을 황홀하게 지켜봤다.
띠띠띠띠.
현관문 번호 키 누르는 소리가 나자 간식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아기가 현관문을 바라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엄마 오셨나 보다.”
단우가 아기를 안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리더니 아기 엄마인 한주가 지친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오다가 아기와 단우를 보고 활짝 웃었다. 아기는 단우의 품에서 날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양팔을 엄마를 향해 활짝 벌리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솔아, 엄마 왔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다가온 한주가 아기를 받아서 꼭 끌어안았다. 그 모양을 단우는 마치 한주의 엄마라도 되는 양 흐뭇하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옷 갈아입고 손 씻고 나와.”
“응. 솔아, 이모랑 잠깐 있어. 엄마 옷 갈아입고 올게.”
아기는 엄마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유순하게 다시 단우의 품에 안겼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한주가 단우에게서 다시 딸을 받아 안고 소파에 앉아 아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니, 오늘 힘든가 봐. 얼굴이 안됐네.”
“너무 피곤해, 오늘. 새벽부터 시작해서 회의, 회의, 미팅, 미팅…… 20분 동안 점심 먹고 정말 10분도 못 쉬었어. 죽을 것 같아.”
“그럼 저녁 먹고 일찍 쉬어. 내가 솔이 봐줄 테니까.”
“아니야. 하루에 몇 시간 얼굴도 못 보는데 우리 딸이랑 놀아 줘야지. 너도 저녁 안 먹었지? 밥 먹자.”
“응. 국만 뜨면 되니까 와서 앉아.”
아기는 하이체어에 앉아 아기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도록 준비해 주고 단우와 한주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밥 먹는 것조차 귀찮은지 한주의 숟가락질은 영 맥이 없었다.
“언니 이러는 거 형부가 알면 또 회사 그만두라고 난리 날 텐데.”
“그럴까 봐 내가 준우 앞에서는 힘들다 소리도 못 해.”
배시시 웃는 한주를 보고 단우는 혀를 찼다.
“천생연분이야, 진짜.”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우, 진짜!”
쿡쿡거리던 한주가 진지한 얼굴로 단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런데 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그러게.”
“나야 오늘처럼 급한 일 생기면 솔이도 부탁하고 좋다만 너, 언제까지 이러고 놀 거야?”
“나, 모아 놓은 돈도 좀 있고, 당분간은 놀아도 괜찮아.”
“너!”
한주가 숟가락으로 식탁을 탕 내려쳤다. 솔이 깜짝 놀라 울먹이는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자 한주와 단우는 동시에 아기가 좋아하는 과일 조각이며 씨리얼들을 아기 접시에 놓아주며 달랬다.
“애 놀라게 왜 큰 소리는 내고 그래.”
단우의 타박에 한주가 눈을 흘긴다.
“돈이 문제야? 한창 나이에 능력도 있는 애가 노는 게 문제지.”
“좀만 더 놀고.”
“너 계속 그럴 거면 대양으로 다시 들어와.”
“싫어.”
단우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한주가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어투를 바꾸어 단우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단우야. 나, 네가 무슨 마음인지 너무 잘 알아. 하지만 이렇게 회피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일단 돌아와. 와서 일하면서 같이 다른 길을 찾아보자.”
단우가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한주를 똑바로 쳐다봤다.
“언니. 난 거기 사람들한테 질릴 대로 질렸어. 변호사 직함 걸고 일할 곳이 대한민국에 거기밖에 없다고 한다면 난 차라리 변호사를 관둘 거야. 내가 마음이 여리고 약한 사람이라 이러는 거 아니라는 거, 언니도 잘 알잖아.”
한주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곱지 않은 시선들 속에서도 꿋꿋하게 잘 버텨내던 단우였다. 1년 전, 인생이 송두리째 뒤집힌 단우에게 같은 건물의 동료들이 보여 준 잔인함은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기는 했다.
“너무 오래 쉬지 마. 차라리 개업을 할래? 내가 도와줄게.”
“개업은 뭐 아무나 하나. 사실은 같이 일하자고 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아, 언니도 아는 사람이야. 예전에 대양에서 나랑 같은 팀에 있었던 유형운 변호사라고.”
형운의 이름을 들은 한주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형운의 이름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그의 아내가 생각났다. 두어 번 회사까지 찾아와 부부싸움을 벌이곤 했던 그 대단한 아내. 유형운 변호사가 대양을 그만둔 건 망신살이 뻗쳐서, 라는 것이 주변의 의견이었다.
“유 변호사는 개인 사무실이 훨씬 적성에 잘 맞을 거야. 그럼 네가 월급 변호사로 들어간다는 말이야?”
“일단은. 유 선배가 민사랑 행정 쪽을 맡는다니까 나는 가정 사건을 전담하려고.”
한주의 얼굴이 확 흐려졌다.
“단우야.”
“알아, 언니. 그렇지만 난 그 일이 하고 싶어.”
한주가 물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단우는 괜히 잘 놀고 있는 아기에게 다가가 장난을 걸며 딴전을 피웠다.
한주는 단우가 가사 사건에 관심을 갖는 걸 아주 못마땅해했다. 단우의 가정사를 누구보다 잘 아는 한주로서는 단우가 부디 거기에서 빠져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가정 사건을 전담하게 되면 아픈 가정사를 자꾸만 떠올리게 되고, 의뢰인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될 것이었다. 한주는 그런 단우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 변호사랑 일할 마음을 굳힌 거야?”
“생각 중이야. 혼자 개업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고, 안 맞는 사람하고 동업하면 더 힘들 것 같고. 언니도 알다시피 유 변호사님이 사람도 유순하고 일도 잘하고, 꽤 괜찮은 파트너잖아. 학교 선배라는 친분도 있고.”
“그렇긴 하지.”
“그래서 생각 중이야. 우리 솔이, 엉망이 됐구나. 이모랑 버블버블 할까?”
목욕을 의미하는 버블버블이라는 말에 솔이가 알아듣고는 좋아서 꺄악 높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단우가 음식을 먹기보다는 뒤집어쓴 것 같은 아기를 하이체어에서 빼내 욕실로 데려가자 한주는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때 테이블에 놓여 있는 단우의 전화가 울렸다. 슬쩍 들여다 본 액정에 유형운, 이라는 이름이 뜨자 한주는 얼른 전화기를 집어 들고 욕실로 뛰어갔다.
아이 옷을 벗겨서 목욕 의자에 앉혀 욕조에 넣고 버블을 잔뜩 풀어 물을 받던 단우가 뛰어 들어오는 한주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데?”
“전화 받아.”
“나중에.”
“유 변호사 전화야.”
“목욕 끝나고 내가 하면 돼.”
“얼른 받아!”
한주의 성화에 단우는 한숨을 쉬고 전화를 받아 들었다.
“네, 선배.”
― 이단우. 너 요즘 연애해?
뜬금없는 소리에 단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
― 연애하냐고. 아니지?
“무슨 소리예요?”
― 좋은 건수 있어서 그러지.
“네?”
― 너 소개팅 좀 해라. 내가 진짜 근사한 놈으로 붙여 줄게.
“됐어요.”
단우가 대번에 거절하자 형운이 전화 건너편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를 냈다.
― 왜?
“제가 지금 무슨 남자를 만나요. 당장 내 인생에 해결할 일들이 산더미인데.”
― 그럴수록 연애를 해야지. 너, 사람한테 연애라는 게 얼마나 에너지가 되는 건지 알아?
“선배, 저 같은 사람 소개하면 선배 나중에 욕먹어요. 선은 잘못되면 뺨이 석 대라는 말도 모르세요?”
― 네가 왜? 네가 어때서?
“선배.”
― 이 변호사야. 일단 만나나 보고 얘기해. 너 막상 만나고 나면 생각이 바뀔 거야. 아마 네가 만난 남자 중에, 아, 아니다. 연예인은 빼고 일반인 남자 중에서는 제일 잘생긴 놈일 거야. 키도 크고, 스타일도 죽여. 너하고 진짜 잘 어울릴 거야.
왜 이래, 정말.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어지는 형운이 귀찮아서 단우는 전화기를 귀에서 잠시 떼었다. 연애라니, 정말 요즘 같은 상황에 그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길가다가 우연히 이상형에 120% 부합하는 남자를 만난다 한들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할 판이다. 단우가 이런 자리를 거절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는 형운일 텐데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러나.
“선배. 전 관심 없어요. 다른 사람 붙여 주세요.”
― 이 변호사.
“그렇게 잘생기고 스타일 좋은 남자면 저 말고라도 소개해 줄 사람 널렸을 거 아니에요. 혹시 인물만 번드르르하고 저처럼 백수예요?”
― 아니. 무슨 소리야. 능력도 얼마나 좋은 놈인데.
“그럼 더더군다나 뭐가 걱정이에요. 인물 좋아, 능력 있어, 여자가 줄을 서겠네요.”
결국 듣다 못한 한주가 다가와 단우의 팔을 꼬집었다. 단우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한주를 돌아보자 한주가 입모양으로 한다고 해, 를 연발했다. 단우가 고개를 젓자 한주는 전화기를 뺏어 들었다.
“유 변호사님.”
― …… 누구십니까?
“저 강한주입니다.”
― 아, 강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제가 지금 옆에서 다 들었는데요, 그 소개팅 할게요.”
― 네?
“저 말고 이단우가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날짜 잡으세요. 얘 요즘 노니까 얘 스케줄 별로 신경 쓰실 거 없을 것 같아요. 그쪽 스케줄에 맞춰서 날짜 잡고 연락 주세요.”
― 정말 그래도 됩니까?
“저만 믿으세요. 그럼 끊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단우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언니!”
“너 자꾸 상황이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사람이 힘들수록 연애만 한 약이 없어. 일단 만나 봐.”
“내 처지에 무슨.”
“네 처지가 뭐? 너 정도면 요즘 애들 하는 말로 대박이지.”
단우가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만다.
“옆에서 듣자 하니 인물도 좋고 능력도 좋다며. 만나면 바로 결혼을 할 것도 아니고 젊은 남녀, 한번 만나 보라는 건데 뭘 그래? 마음 편하게 가서 만나 봐. 내가 봐도 너 요즘 너무 남자한테 무심하더라. 그러면 안 돼.”
하필이면 한주가 옆에서 들어 버리는 바람에 꼼짝없이 소개팅인지 뭔지를 해야 하게 생겼다. 한숨을 연달아 내쉬는 단우를 곁눈질하던 한주가 슬쩍 묻는다.
“근데 뭐 하는 사람이래?”
“나도 몰라. 언니가 전화 채 가는 바람에 못 물어봤잖아.”
“뭐, 유 변호사가 소개하는 사람이면 자기 밥벌이는 할 줄 아는 사람이겠지.”
“상관없어. 변호사만 아니면 돼.”
한주가 씁쓸하게 웃는다. 한때는 이 바닥에 질려서 아예 변호사 생활을 그만두려 했던 단우가 아니었던가.
“형운 선배가 상대방에게 내 얘기를 과연 다 할까?”
“네 얘기 뭐?”
“…….”
“하면 뭐가 어때서? 그리고 그게 왜 네 얘기야? 너는 제발 그 앞서 걱정하는 짓 좀 그만해.”
“어, 언니. 쟤 비눗물 먹는다!”
장난감 그릇으로 욕조에 담긴 비눗물을 막 떠서 마시려고 하는 아기를 향해 단우가 몸을 던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눗물을 뒤집어썼지만 아기가 마시는 건 다행히 막았다. 온몸에 거품을 잔뜩 묻히고 욕실 바닥에 주저앉은 단우를 보고 한주와 솔이 까르르 웃어 대기 시작했다.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됐는데 웃는 거야, 이 모녀가 정말!”

3. 우연을 가장한 필연


달칵.
조용히 열린 드레스룸 문 안으로 막 샤워를 마친 맨몸의 민혁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들어섰다. 문 가까이에 있는 서랍을 열어 속옷을 꺼내 일단 걸친 후 색색깔의 드레스 셔츠와 슈트가 걸린 행거 앞에 섰다. 셔츠와 슈트를 찬찬히 훑으며 머릿속으로 색상 매치를 하는 민혁의 눈에 즐거운 빛이 감돈다.
민혁의 옷장에는 반듯하게 다림질까지 마쳐진 수십 벌의 드레스 셔츠와 슈트가 걸려 있었다. 변호사라는 직업상 대부분의 시간을 양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도 이유겠지만 민혁은 슈트를 좋아했다. 다림질이 잘된 드레스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벨트를 맨 바지에 재킷 단추까지 여민 완벽한 옷차림이 민혁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이런 취향은 민혁의 어린 시절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민혁의 외가는 조부모님 시절부터 청량리에 자리를 잡고 살아왔다. 그 시작은 외할아버지로부터였다. 민혁의 외조부는 철도청 소속의 기관사였다. 당시 철도청 공무원을 위해 나라에서 제공해 준 관사가 청량리에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기관사로 일하는 동안 민혁의 외가는 형편이 괜찮았다.
외할아버지가 아직 40대 창창한 나이일 때, 처음으로 나라에서 기관사를 대상으로 색맹, 색약 검사가 시행이 되었다. 놀랍게도 외할아버지는 색약이었다. 평생 본인이 색약이라는 걸, 아니 색약이라는 명칭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할아버지는 그 길로 권고사직을 당했다. 연금이 있었지만 금액은 아주 미미했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할아버지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자리를 찾을 만한 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민혁의 외할머니가 그동안 모았던 목돈을 쌈짓돈으로 청량리 유흥가를 돌며 일수를 놓기 시작했다. 주 대상은 유흥가와 사창가의 아가씨들이었다. 민혁의 외할머니는 다른 일수쟁이들처럼 지독하게 돈을 받아 내기보다는 엄마처럼, 큰언니처럼 그 아가씨들의 애환을 들어 주고 위로도 해 주었다. 이 때문에 청량리 유흥가에는 외할머니를 따르는 아가씨들이 늘어났다.
민혁의 어머니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일수 돈을 걷는 일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그 일에 뛰어들었다. 말 그대로 일수쟁이였던 외할머니와는 조금 다르게 여장부 스타일인 어머니는 제대로 대부업을 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실제로 해냈다.
어머니의 대부업은 점점 규모가 커져서 한때는 청량리에서 가장 큰손이라는 소리를 들었었다. 자식들이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머니는 조금씩 사업 규모를 줄여 나갔고 현재는 돈을 벌 목적보다는 돈이 정말 필요한 사람을 돕는 정도의 일을 하고 있다.
민혁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집에 있던 샌님이었다. 책을 좋아하고 화초 가꾸는 것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앉은뱅이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화초 잎사귀를 물 적신 수건으로 닦아 주고 있는 모습으로 민혁의 기억 속에 가장 많이 남아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친구 집에 놀러 가는 일이 잦아지면서 민혁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일반적인 다른 아버지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양복을 입고 출퇴근을 하고 퇴근길에 만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용돈을 쥐여 주는 지극히 일반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낯설어하면서도 동경하기 시작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판사 해라.”
타고나길 머리가 좋고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둘째 아들에게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사춘기 때는 그 소리가 지겹고 반항심이 들어서 죽어도 법대는 안 갈 거라고, 죽어도 판사는 안 될 거라고 악을 쓰고 대들기도 했다. 실제로 부모님과 선생님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법대에 진학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거의 평생을 어머니로부터 들어온 판사가 되라는 말은 주문 같은 효과가 있었는지 어느새 민혁은 사법시험을 준비했고 대학 졸업반 때 합격했다. 연수원 수료 후 당연히 판사가 될 줄 알았던 아들이 변호사를 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실망감을 애써 내색하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아들의 개업을 도와주었다.
사법시험 성적과 연수원 성적이 아주 좋았음에도 별난 성질 탓에 남 밑에서 일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게 어머니가 짐작한 민혁의 변호사 개업 이유였다. 절반은 사실이었고 절반은 아니었다. 하지만 민혁은 진짜 이유를 어머니에게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개업에 필요한 비용은 모두 어머니에게 은행 이자로 빌렸고 매달 꾸준히 갚아 나가고 있는 중이다. 변호사로 개업하면서 민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무실을 꾸미는 일도, 직원을 뽑는 일도 아닌, 백화점을 돌며 슈트를 사는 일이었다. 처음 개업할 때의 다섯 벌은 지금은 수십 벌로 늘어서 지금 이 드레스룸을 채우고 있다.
출근 전에 드레스룸에서 셔츠와 넥타이, 슈트 색상을 매치하는 일은 민혁이 진심으로 즐기는 일상 중의 하나다. 한참의 고민 끝에 고른 옷은 살짝 광택이 도는 하늘색 셔츠에 네이비색의 슈트다. 보라색과 파랑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폭이 좁은 넥타이를 매고 가장 좋아하는 향수를 살짝 뿌렸다. 거울을 보고 머리카락도 손가락 끝으로 살짝 매만진 후 전체적으로 한 번 훑은 민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나 참.”
거울로 자기 모습을 확인하고 만족해하던 민혁이 뒤이어 헛웃음을 지었다. 뭐 대단한 자리라고 이렇게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다.
뒷모습만 봤을 뿐인 여자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무슨 마음으로 그날 형운에게 그 여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뒷모습은 눈을 쉽게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긴 했다. 늘씬한 키에 주변이 다 환해 보이는 화사한 연노랑색의 시폰 원피스를 입고 걸어가던 여자는 무엇보다 등을 똑바로 펴고 또박또박 걷는 그 걸음걸이가 인상적이었다.
지독하게 못생겼다는 형운의 말에도 불구하고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은 태어나 처음으로 저 여자를 만나게 해 달라는 부탁의 말을 오민혁의 입에서 나오게 만들었다.
사실 그 여자를 보기 전 돌잔치 장소로 향하면서 이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자는 이야기를 형운에게 건넬 참이었다. 형운의 버릇을 고쳐 놓겠다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돈 대신 여자를 소개받는 행위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짓이었다. 기왕 하는 거, 즐겨보겠다는 처음 의도와 다르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발생시키는 일이 되어 버린 그 짓을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제 입으로 저 여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내뱉고 말았다.
“이미 뱉은 말을 어쩔 거야.”
거울 속의 자기에게 대고 비웃듯 말하고 민혁은 드레스룸을 나섰다. 인물에 대한 기대는 이미 버렸지만 부디 저녁 식사가 즐거울 수 있는, 말이 통하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모처럼, 정말 드물게, 어지간한 일에는 요지부동인 민혁의 가슴이 아주 조금 설레고 있었다.

기미가 좋지 않다. 멀쩡하던 차량용 휴대폰 충전기가 왜 갑자기 고장이 났을까. 약속 장소에 도착해 휴대폰을 확인한 민혁이 배터리 경고등을 반짝거리는 전화기를 확인하고 잠시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차에서 내렸다.
다행히 편의점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약속 시간도 넉넉히 남아 있다. 직원에게 전화기를 맡기고 신문 한 부를 사서 테이블 위에 펼쳤다. 건성으로 기사들을 훑으며 종이를 넘기다가 문득 고개를 든 민혁의 시선이 유리벽 밖에 가 닿았다.
도로 한중간에 한 여자가 서 있다. 물빛처럼 파란 러플 스커트에 광택이 있는 흰색 실크 블라우스를 매치한 옷차림이 멋스러웠다. 허리는 날씬하고 하이힐을 신은 종아리는 늘씬하다. 일부러 살짝 헝클어뜨린 것처럼 틀어 올린 머리모양도 예쁜 목선과 썩 잘 어울린다. 이목구비도 어디 하나 모자란 데 없이 아름다운, 상당한 미인이었다.
민혁은 잠시 넋을 놓고 여자를 바라봤다. 길을 찾고 있는 모양인지 여자는 도로 한복판에 선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눈을 떼기가 어려울 정도로 여자는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민혁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비 오네.”
등 뒤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던 민혁이 다시 고개를 돌려 여자를 봤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지 여자가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보며 손을 들어 이마에 댔다. 민혁은 빠르게 신문을 접어 한쪽으로 밀어 놓고 그 옆에 놓인 우산을 집어 카운터로 걸어갔다.
“얼마죠?”

단우는 도로 중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형운의 길 설명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이 동네 도로 구조가 이상한 건지, 도무지 약속 장소로 정한 건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형운에게 전화도 걸어 봤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난처해하며 도로 중간에 서서 길 잃은 아이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비 피할 생각도 못 하고 하늘만 쳐다보다가 빗줄기가 굵어지는 걸 보고 당황해서 막 자리를 뜨려 했다.
그 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며 우산 하나가 드리워졌다. 단우가 비를 가려 보겠다고 이마에 댔던 손을 내리고 우산의 주인공을 봤다. 낯선 남자다. 여자치고는 작지 않은 키의 단우가 하이힐을 신고도 살짝 올려다봐야 할 정도이니 키가 꽤 큰 남자다.
“고맙습니다.”
한껏 상냥하게 인사를 하며 남자와 눈을 맞추다가 단우는 멈칫했다. 우산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단우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강렬했다. 단우는 자기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좁은 우산 아래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혹스러워하는 단우에게 남자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느 쪽으로 가십니까? 방향이 같으면 같이 가시죠.”
규칙적이고 리드미컬하게 우산 위로 빗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다.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남자의 목소리가 동그란 우산대를 타고 단우의 머리 위에서 나직하게 울렸다.
“사실은 약속 장소를 못 찾아서 헤매고 있던 중이었어요. 덕분에 쫄딱 젖는 대참사는 면했네요.”
“이 근처가 길 찾기 수월하진 않더군요. 건물 번지나 간판도 잘 안 보이고.”
남자가 서글서글하게 대꾸했다. 잘못 봤나.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섬뜩할 정도로 강렬해 보이던 눈빛은 아무래도 착각이었나 보다. 나지막하고 울림이 좋은 친절한 목소리에 단우는 살짝 긴장했던 마음을 풀었다.
바로 앞 건물 1층에 카페가 보였다. 별수 없이 잠깐 저기서 시간을 때워야겠다 생각한 단우가 살짝 웃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저는 아무래도 저기서 비를 좀 피해야겠네요.”
단우의 말에 남자가 단우가 가리킨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둘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남자는 매너 좋게 한 발 떨어진 채로 단우에게 비가 닿지 않도록 우산을 받쳐 주고 있었다.
남자에게서 상쾌하고 좋은 향이 났다. 비가 쏟아지기 직전에 우산을 받쳐 준 친절한 낯선 남자. 기분 좋은 설렘이 일었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가벼운 설렘일지언정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 본 것이.
단우는 엉뚱한 생각을 날려 보내려는 듯 아무것도 없는 눈앞에 빈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고맙습니다.”
카페 입구에 도착하자 우산 밑에서 빠져나와 카페 입구의 차양 아래로 자리를 옮긴 단우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했다. 남자가 살짝 우산을 들었다. 어머. 단우의 눈이 커졌다. 우산 주인은 제대로 보니 꽤 잘생긴 남자였다. 흠. 잘생기고 친절한 낯선 남자인가.
“별말씀을.”
남자가 감미롭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돌아섰다. 돌아선 남자의 등을 보고 단우는 깜짝 놀랐다. 재킷의 어깨와 등 부분이 온통 젖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우산은 성인 둘이 넉넉히 쓸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남자는 단우를 배려해서인지 줄곧 한 발 떨어져서 걸었다. 미안함 때문인지 뭔지 몰라도 가슴이 찡 하고 울렸다.
“저기요.”
자기도 모르게 남자를 불러 세웠다.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려 단우를 봤다.
“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커피 한 잔 하실래요? 고마움의 표시로 제가 살게요.”
단우를 지그시 돌아보는 눈빛이 어쩐지 서늘했다. 괜한 말을 했나. 우산 좀 씌워 줬다고 내가 들이대는 걸로 느꼈나. 단우는 속으로 자책하며 거절의 말을 들을 것을 대비해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럴까요, 그럼?”
분명 눈빛이 서늘하게 느껴졌었는데 어느새 양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빙긋이 웃는 남자를 보며 단우의 가슴이 두근, 하고 뛰었다. 단우의 옆 차양 아래로 어느새 들어선 남자가 우산을 내려 접고 물기를 살짝 털었다.
“안 그래도 뜨거운 커피 생각이 났는데.”
우산 밖으로 나와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짝 털어 내는 남자는 가까이에서 자세히 봐도 상당히 잘생겼다. 젖어 버리긴 했지만 네이비색 슈트에 하늘색 드레스 셔츠와 매칭 컬러의 넥타이까지. 세련된 옷차림이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절한 남자로 치기엔 존재감이 너무 강하다.
길 가다가 갑자기 내린 비에 우산을 씌워 주는 친절을 베푼 남자에게 커피 한 잔을 사 주는 단순한 이 상황이 어쩐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아메리카노. 아무것도 넣지 말고요.”
커피 종류가 뭐 그렇게 많은지 코팅된 한 장짜리 메뉴 앞뒤로 빡빡하게 적혀 있지만 단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주문을 했다.
“같은 걸로 주세요.”
남자도 직원이 건넨 메뉴에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직원이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걸어가고 나자 남자는 몸을 조금 움직여 젖은 재킷을 벗으려다가 문득 단우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좀 젖어서.”
“아, 아니에요. 실례는 무슨.”
의자 등받이에 재킷을 걸고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걸어 느슨하게 만들고는 셔츠 맨 위 단추를 하나 푼다. 얇은 드레스 셔츠 아래로 비치는 상체가 꽤 탄탄했다. 운동 열심히 하나 보네. 단우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괜히 민망해서 테이블 위에 놓인 물 잔을 들어 물을 마시다가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얼음물에 한기가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은 팔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시선을 돌리다가 빤히 자기를 보고 있는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면 움찔할 만도 한데 그는 당황하기는커녕 씩 웃었다. 오히려 단우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커피 나왔습니다.”
카페 직원이 다시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커피 두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컵을 들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신 단우가 눈을 반짝거렸다.
“맛있어요.”
단우를 따라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맛있네요.”
투명한 유리벽에 연신 비가 부딪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카페 안은 한산했다. 그들을 제외하면 구석 테이블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책을 읽고 있는 젊은 아가씨 하나가 손님의 전부였다.
카페 안에는 곡명을 알 수 없지만 귀에 익은 경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비 오는 날씨와 썩 잘 어울리는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의 음악들이다. 누가 선곡을 했는지 몰라도 선곡자의 센스가 상당하다.
유리벽 밖으로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몸과 마음이 모두 노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 내리는 텅 빈 거리는 마치 화보 속의 한 컷처럼 예쁘고 에어컨이 적당히 돌아가는 카페 안은 쾌적하다. 따끈한 커피는 맛있고 앞에 앉은 남자는 눈이 즐거울 정도로 잘생기고 친절했다.
거리에 서서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속수무책으로 맞을 때만 해도 더럽게 운수 사나운 날이다 싶었는데 단우는 어느새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조차 잊고 있었다.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네요.”
남자의 말에 단우는 유리벽 밖을 향했던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네. 이런 날은 집 밖으로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요.”
남자가 하하 웃었다.
“이렇게 앉아서 비 구경하면서 커피 한 잔 하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덕분에요. 아까 우산 씌워 주시지 않으셨으면 지금처럼 여유 있게 커피나 마시고 있지 못했겠죠. 커피 한 잔으로 인사가 될지 모르겠어요.”
“듣고 보니 커피 한 잔은 좀 약소하군요.”
재치 있게 대꾸하는 남자를 보는 단우의 눈빛에 웃음기가 서렸다. 길에서 만난 사람과 커피를 마시는 일 따위 단우에게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화려한 외모 덕에 여러 가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방어막을 치고 살아온 단우였다. 아는 사람도 경계하는 성격이면서 처음 만난 남자와 커피를 마시다니. 아무리 우산을 씌워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단우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 안 좋아하십니까?”
남자가 또 묻자 단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좋아해요. 오히려 하늘이 파란, 맑은 날씨를 싫어하는 편이죠.”
“어째서?”
짧게 다시 묻는 그를 힐끗 보고 단우는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은 유리벽 밖의 빗줄기를 잠시 응시했다.
“맑은 날은 모든 게 너무 선명하게 보이잖아요. 적당히 흐리고, 적당히 가려지는 게 더 좋아요.”
너무 감상적이었다 싶어서 단우는 금방 한 말을 후회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이라고 해도 속내를 너무 드러내는 일은 진심으로 사양이었다. 자기가 한 말을 덮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오늘 같은 날은 소파에서 뒹굴면서 만화책이나 쌓아 놓고 보는 게 최고예요. 비 들이치지 않을 정도로만 창문을 열어 놓고 손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간식거리도 잔뜩 가져다 놓고.”
설명하는 단우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는지 남자가 빙긋이 웃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단우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오늘 같은 날은 그래야 하는 건데 말이에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며 창밖을 지그시 바라보는 여자의 옆모습이 민혁의 시선을 잡아끌고 놔주지 않는다. 길에서 예쁜 여자를 훔쳐보는 취미 따위 민혁에게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그가 눈을 떼지 못했을 정도로 편의점 유리벽 밖에 서 있던 여자는 외모가 완벽히 그의 스타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