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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상당한 미인이기는 하지만 남자의 시선으로 보면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스타일이기도 하다. 특히나 눈꼬리가 길게 빠진 눈매가 도도하고 매서워서 어지간한 남자라면 기가 눌릴 법도 했다. 민혁은 그 눈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여성성을 어필하기 위해 가볍게 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똑바로 마주하는 당당하고 도도한 저 눈매.
“저기.”
힘없이 부르는 목소리에 올려다보니 그들을 제외한 유일한 손님이던 구석 자리의 아가씨가 어느새 그들의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시선 때문인지 아가씨는 안절부절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불쑥 무언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옮겨졌다. 아가씨가 올려놓은 것은 영화 티켓으로 보이는 종이였다.
“자동차 극장 티켓인데요, 제가 못 가게 되어서요. 필요하시면 쓰세요.”
아가씨는 빠르게 이 말을 마치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후다닥 걸어 카페를 나섰다. 우산을 펼쳐 쓰고 빠른 걸음으로 아직 비가 내리를 도로를 걷는 아가씨를 쳐다보다가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풋 웃음이 터졌다.
“일행인 줄 알았나 보네요.”
여자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테이블 위의 종이를 집어 들었다. 놓고 간 아가씨의 말대로 자동차 극장의 티켓이었다. 멀지 않은 곳이다.
“저 아가씨는 왜 이 티켓을 자기가 쓰지 않고 남을 줬을까요?”
“글쎄요.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갑자기 약속을 취소한 게 아닐까요. 보아하니 차를 가지고 나오진 않은 모양이니까.”
“그럼 나중에 쓰면 될 텐데. 아, 오늘까지네요.”
티켓 뒷면에 찍힌 유효기간이 오늘까지였다. 그저 어디서 얻은 티켓을 가지고 있다가 아까워서 버리듯이 남에게 준 걸까, 아니면 민혁의 짐작대로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나오지 않은 걸까. 후자라고 생각하니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으로 비 오는 거리를 걸어가던 여자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에도 영화 상영을 할까요?”
여자가 여전히 티켓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글쎄요.”
“아, 그것도 여기 있네요. 우천 시에도 상영한다고. 비 오는 날도 하는구나.”
가고 싶은 건가? 티켓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들여다보는 그녀의 얼굴에 아이 같은 호기심이 잔뜩 서려 있었다.
“자동차 극장, 좋아하십니까?”
민혁의 물음에 여자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도 안 가 봤어요.”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는 웃음이 기가 막히게 예쁘다. 민혁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고 있었다. 민혁의 입술이 열렸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여자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우아하게 컬이 진 속눈썹이 빠르게 깜박였다.
“……네?”
말을 던져 놓고 민혁은 당황하고 있었다. 제 입에서 나온 말인지도 의심스러웠다. 같이 가자고? 어딜? 이성의 혼란스러움과는 상관없이 입은 제멋대로 다시 움직였다.
“주신 성의를 봐서라도 잘 써 줘야 할 것 같은데요. 같이 가시죠. 차는 제가 가지고 왔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손에 쥔 티켓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민혁은 입이 말랐다.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속이 탔지만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생긋 웃더니 들고 있던 티켓을 민혁 쪽으로 밀었다.
“선약이 없었다면 두말없이 따라갔겠는데요.”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민혁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자기도 모르게 던진 말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진심이었다. 난생처음으로 처음 만난 여자에게 소위 작업을 건 셈이었다.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이제 민혁은 앞뒤 가릴 여유가 없었다.
“그 선약, 깨시죠.”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챙기던 여자의 손이 멎었다.
“네?”
잘못 들었다 싶어 되묻는 단우에게 남자가 상체를 테이블 위로 굽혀 가까이 다가왔다.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감돌았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움푹 파여 그늘이 진 눈매가 좀 전까지는 분명 선하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도발적으로 보였다. 뭐지, 하면서도 단우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 그 자동차 극장에 가고 싶은 거 아닙니까? 가고 싶으면…… 가면 되잖습니까.”
몇 초 간 침묵이 흘렀다.
“지금 혹시 작업 거시는 거예요?”
단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남자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남자는 이내 씩 웃으며 대꾸했다.
“뜻으로만 보면 맞습니다, 작업.”
단우는 막무가내로 구는 앞자리의 남자보다 그 말에 흔들리는 자신이 더 황당했다. 이게 고민거리나 되는 일이냔 말이다. 그냥 코웃음 쳐 주고 일어나면 될 일이었다. 앞에 앉은 남자는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다. 뭐 하는 사람인지, 믿을 만한 사람인지는 고사하고 나이와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그저 친절한 남자라고 생각했었지만 찬찬히 보아하니 저 남자, 매끈한 외모에 언뜻 봐도 꽤 고가로 보이는 옷차림, 우산을 씌워 준 것부터가 작업의 전초전이었나 싶다. 그렇다면 먼저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한 나를 보며 이미 낚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농담이 아니시라면 저도 대답을 해 드려야겠네요.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남자는 물러서지 않고 조금 더 몸을 앞으로 밀며 단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선약을 포기한 걸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자신만만한 남자의 눈매가 매력적으로 보였다. 아랫입술을 깨무는 단우의 입가에 참으려고 했지만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걸 누가 장담하나요?”
남자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제가요.”
하. 단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려다가 얼른 수습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속으로는 엄청 떨고 있는데 티 안 나나 봅니다.”
결국 웃고 말았다. 단우의 웃음에 긴장이 조금 풀어진 듯 남자도 미소를 지었다. 단우가 웃음을 멈추고는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우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대하는 듯 남자의 시선이 단우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단우가 더할 나위 없이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우산, 고마웠어요. 커피값은 제가 낼게요.”
돌아서서 자리를 뜨려던 단우의 손목을 남자가 움켜잡았다. 단우가 황당한 표정으로 뒤로 돌며 그를 쏘아봤다. 남자는 테이블 위의 티켓을 집어 단우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 표가 우리 손에 들어온 게 우연이라고 생각합니까? 마침 그때 비가 내린 것도, 내 손에 우산이 있었던 것도, 아까 그 아가씨가 오늘 이 티켓을 쓸 수 없게 된 것도, 그 카페에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던 것도 모두 우연이 아닐 겁니다.”
두근. 두근. 두근. 단우의 심장이 격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꼭 쥔 단우의 팔목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일탈은 이럴 때 하는 겁니다.”
눈앞의 여자를 향한 말인지, 자신을 향한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민혁은 간절함을 담아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알았다고 해. 그러겠다고 해. 가겠다고 하라고! 최면을 걸 듯 민혁은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다.
아직도 여전히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카페 안은 종업원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손목을 잡은 민혁의 손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것 같다.
말없이 민혁의 눈을 응시하던 여자가 천천히 잡힌 손목을 잡아당겼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손의 힘을 풀며 자기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는 여린 손목을 바라보는 민혁을 향해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 간다고 연락은 해야죠.”
민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오늘은 초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일기라도 써야 할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

“이게 뭐야?”
형운은 문자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음을 듣고 별생각 없이 전화기를 들었다가 사색이 되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자는 단우에게서 온 것이었다.
[선배. 오늘 약속은 못 지킬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만나기로 한 분께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곧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이 계집애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쳐 놓고 자기가 한 말에 놀라 자기 입을 손으로 막았다.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이 채 10분도 남지 않았다. 와, 미치겠네. 형운은 전화기를 손에 쥔 채 제자리를 뱅뱅 돌았다. 민혁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할 텐데, 이 사태를 어찌 수습하나.
“미치겠네, 정말.”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어뜯으면서 고민을 하던 형운은 다시 문자 알림음이 울리자 단우인가 하며 얼른 전화기를 들었다.
[오늘 약속은 취소해 줘. 노란 원피스에게는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더라고 꼭 좀 전해 줘. 오늘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생겼어.]
민혁에게서 온 문자였다. 한참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형운의 고개가 15도 정도 옆으로 기울었다.
“이게 뭐야, 도대체?”
띠릭, 소리와 함께 한 통의 문자가 더 들어왔다.
[미안해, 형.]
형운이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전화기를 휙 집어던졌다.
“누구냐, 넌!”
미안해, 형, 이라니. 민혁이 할 말이 아니지 않은가. 형운은 조심스럽게 전화기를 집어 들고 다시 문자들을 찬찬히 읽었다.
“뭐…… 한 쪽만 깬 게 아니라 다행이긴 하다지만, 이것들이 도대체 뭐하는 짓이지?”

***

형운에게 문자를 보내 놓고 단우는 전화기를 꺼 버렸다. 울리는 전화를 안 받을 배짱도, 받아서 거짓말로 변명을 할 뻔뻔함도 없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단우는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를 가지고 오겠다며 비 내리는 거리로 나간 남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사실 아직도 단우의 마음은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남자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형운에게는 미안하다고 빌고 좀 늦더라도 약속 장소로 가겠다고 할까.
“아, 미치겠네. 어떡하지, 정말.”
자학하듯 벽에 머리를 콩콩 박고 있는 단우에게 카페 종업원이 다가와 전화기를 내밀었다.
“손님, 전화 좀 받아 보세요.”
“저요?”
“네. 같이 오신 남자분이시라는데요?”
단우는 전화기를 받아들며 창밖을 내다봤다. 창밑 도로에 흰색 SUV 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네.”
― 입구 앞에 서 있습니다.
전화를 끊고 마지막으로 고민을 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까짓 거 인생 뭐 있어.”
단우는 결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사 저 남자가 선수면 어떠랴. 덕분에 오늘 하루라도 즐거울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지.

건물 입구로 내려오자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빙긋이 웃었다. 차를 가지러 간다면서 우산을 놓고 가더니 머리가 다시 젖어 있었다. 손으로 대충 털어 낸 듯 헝클어진 젖은 머리가 마치 샤워를 막 마치고 나온 것처럼 풋풋해 보였다.
“영화 시간에 맞추려면 빠듯하겠네요.”
남자가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며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차에 올라타자 적당히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풀 냄새 같은 향기가 맡아졌다. 운전석으로 올라탄 그가 차를 출발시키며 빗속에서 차선을 옮기기 위해 사이드 미러를 보고 있는 사이, 단우는 차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신형 국산 중형 SUV. 깔끔한 내부에 뒷자리에는 묵직해 보이는 검정색 가죽 서류가방과 노트북, 파일들이 보였다. 팔을 뻗어 파일을 열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꾹 참았다.
“식사를 할 시간이 안 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편의점에 들러서 간식거리라도 살까요?”
그래,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이었지. 비로소 단우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네.”
“오케이. 그럼 일단 편의점이 보일 때까지 가봅시다.”
옆얼굴로 보이는 남자의 큰 웃음이 싱그러웠다.
“오민혁입니다.”
불쑥 남자가 자기 이름을 말했다. 통성명을 하자는 의도를 알면서도 단우는 선뜻 자기 이름을 대지 못하고 망설였다. 처음 본 남자를 따라 그 남자의 차까지 덥석 올라탔으면서 이름을 말하는 것은 망설이는 자신이 좀 우스웠지만 이름을 대는 것이 마치 큰 의미라도 있는 양 단우는 조금 더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단우예요.”
신호에 걸려 차가 섰다. 남자가 핸들 위에 손을 얹고 단우를 돌아봤다.
“단우. 이단우……. 예쁜 이름이네요.”
중성적이고 딱딱해서 평생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이름인데 남자의 입으로 되뇌어지는 자기 이름이 어쩐지 꽤 예쁜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장을 간질거리게 만든다.

***

인생은 정말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움직인다.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아니 집을 나설 때만 하더라도 오늘 이런 반전이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느냔 말이다. 아마 내일 형운과 통화를 하면서 사죄를 할 때 오늘 하는 짓을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되겠지만 그건 그때 일이다. 지금은 그냥 이 상황을 즐겨야지.
슬쩍 운전 중인 민혁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보면 볼수록 잘생겼다. 반듯하게 생긴 옆모습에 핸들을 잡고 있는 길고 매끈한 팔도 멋지다. 얇은 여름 셔츠 아래로 언뜻언뜻 비치는 단단한 몸도 눈을 즐겁게 했다. 3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아무리 봐도 20대의 객기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서른은 넘었을 것이다.
“저기 편의점이 있네요. 들어가서 뭐 좀 사 올 테니 차에서 기다리시죠.”
민혁이 길가의 편의점을 보고 차를 세웠다. 단우는 민혁을 훔쳐보던 시선을 얼른 거둬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이 차에서 내려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아까 뒷좌석에서 본 파일이 떠올랐다.
뒷좌석을 돌아봤다.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파일이 있었다. 슬쩍 열어서 확인하고 도로 내려놔도 모를 것이다. 저걸 열어 보면 적어도 뭐 하는 사람인지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강렬한 유혹에 거의 팔을 뻗기 직전까지 간 단우가 다시 앞으로 돌아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뭐가 중요할까. 길에서 만난 낯선 남자를 따라나서 놓고 그걸 궁금해하는 게 모순이지. 정 궁금하다면 물어보면 될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거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편의점 밖으로 민혁의 모습이 나타났다. 뭘 샀는지 묵직해 보이는 비닐봉투를 손에 든 민혁이 뛰어와 차 문을 열었다.
“뭘 그렇게 많이 샀어요?”
단우가 비닐봉투를 받아들고 안을 들여다봤다. 삼각 김밥, 샌드위치, 캔 커피와 생수병에 과자까지.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골고루 많이도 샀다.
“배가 고파서 영화가 눈에 안 들어오면 안 되잖습니까. 어떻게 보게 된 영화인데.”
뭔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민혁은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비가 꽤 내리는데도 자동차 극장의 입구에는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고 안내문대로 라디오를 켜서 주파수를 맞췄다. 조금 약해진 듯했던 빗줄기가 다시 거세지면서 광고가 상영되고 있는 스크린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자.”
민혁이 샌드위치 팩을 내밀었지만 식욕이 전혀 돋지 않는 단우는 선뜻 잡지 못하고 쳐다만 봤다.
“그냥 커피만 마실게요.”
“그럼 이거라도.”
민혁이 샌드위치 대신 초콜릿을 내밀었다. 단우가 웃으며 받아들었다. 빗줄기가 요란하게 차 지붕을 두드리고 있었다. 밖에는 수많은 차들이 열을 지어 있었지만 지금 이 차 안은 밖과는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운 듯, 혹은 반대로 상당히 먼 듯 느껴진다. 미묘한 긴장감과 아슬아슬함이 좁은 차 안에 감돌고 있었다.
“영화 제목이 뭐였죠?”
말없이 차 유리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던 민혁이 불현듯 물었다. 단우는 티켓에서 봤던 영화 제목을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단우를 보고 민혁이 피식 웃었다.
“어떤 영화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죠.”
혼잣말 같은 민혁의 중얼거림에 단우의 볼이 확 달아올랐다. 단우는 홧홧한 볼에 손부채질을 해 식히며 막 영화가 시작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빗소리에 섞여 로맨틱한 백뮤직이 흐르고 영어로 된 남녀 주인공의 대사를 100%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달달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로맨스 영화인가 보다.
때맞춰서 약해진 빗줄기 덕분에 스크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화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였다. 잘생긴 남자 주인공과 예쁜 블론드 머리카락의 여자 주인공. 우연하고 재미있는 만남부터 티격태격하는 중간의 발전과정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먼저 알았다면 절대 일부러 보러 오지는 않았을 가벼운 영화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었다. 가볍고 유치하지만 달콤한 대사와 장면들이 내내 웃음을 머금게 했다.
단우는 어느새 영화에 몰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민혁은 마음껏 단우를 지켜볼 수 있었다. 자막도 잘 보이지 않고,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영어 대사들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래도 단우는 눈을 반짝거리며 스크린을 보며 놀랐다가, 인상을 찡그렸다가, 웃었다가 했다. 단우의 표정 변화를 따라 민혁도 눈이 커졌다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가, 미소를 짓다가를 반복했다.
영화 속 커플이 만나기 직전에 간발의 차이로 비껴 지나는 장면이 몇 번 되풀이되자 단우가 짜증이 가득 담긴 투덜거림을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단우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초콜릿 하나를 입에 집어넣었다.
“재미있습니까?”
민혁의 물음에 단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아니라고요?”
“네. 제 취향 아니거든요.”
풉. 웃음이 터진 민혁을 단우가 흘겨봤다.
“왜 웃어요?”
“본인 취향 아니라 재미없다고 하기엔 너무 몰입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냥 보이니까 보는 거예요. 전 이런 로맨틱 코미디 안 좋아해요.”
“그럼 어떤 영화 좋아합니까?”
“음…… 액션이나 스릴러. 공포영화는 싫지만 미스터리는 좋아요.”
민혁이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그건 나하고 같군요. 그럼 다음에는 액션 영화 보죠.”
다음? 그 말에 또 심장이 두근, 움직였다. 우리에게 다음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 건가. 단우는 무의식중에 초콜릿 하나를 또 입에 넣었다.
“어머.”
단우가 뜻 모를 감탄사를 내질렀다. 그 소리에 민혁도 스크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짜증날 정도로 어긋남을 반복하던 커플이 드디어 만났나 보다. 남주인공이 부둥켜안았던 여자를 그윽하게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술을 가까이 가지고 갔다. 농밀한 키스가 이어졌다.
아무리 비가 내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초여름 날씨인데 단우는 팔에 소름이 돋았다. 요즘 세상에, 고작 영화 속의 키스신 따위에 민망해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단우는 민혁이 앉은 쪽으로 눈동자도 돌릴 수가 없었다.
낱낱이 일어섰던 솜털이 가라앉으면서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밭은 숨이 흘러나왔다. 큰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 진한 키스는 정말이지 실감이 났다. 뒤편에서 비추는 조명을 받아 부드럽게 그림자가 진 두 남녀의 옆얼굴이 겹쳐지고 또 겹쳐졌다. 남자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그 사이로 여자의 얇은 입술을 머금고 빨아들였다. 아우. 단우는 몸서리를 쳤다. 뭐가 저렇게 리얼하냔 말이다.
공기마저 숨을 죽인 것처럼 침묵이 흐르던 차 안에서 갑자기 민혁이 몸을 움직였다. 화들짝 놀란 단우가 몸을 돌리다가 머리를 유리창에 부딪쳤다.
“아.”
정신이 번쩍 나도록 통증이 느껴지는 뒤통수를 단우의 손보다 먼저 민혁의 손이 감쌌다.
“괜찮습니까?”
낮은 목소리가 머리 바로 위에서 울린다. 아픔보다 앞선 창피함 때문에 단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아픈 머리를 어루만졌다.
“괜찮아요?”
다시 민혁이 묻자 단우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
민혁의 손이 여전히 단우의 뒷머리를 감싸고 있는 덕분에 둘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단우는 조금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민혁이 오히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묶고 있는 끈을 풀었다. 굵게 컬이 진 긴 머리카락이 스르륵 내려와 어깨를 덮었다. 다시 민혁의 손이 살살 아픈 부위를 달래듯이 쓰다듬었다.
“왜 그렇게 놀랐어요?”
끈적거리고 무거운 공기가 차 안에 가득했다. 단우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몸은 열이 나는 것처럼 뜨거운지.
“갑자기 움직였잖아요.”
단우가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 민혁이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앞 유리에 습기가 차길래 에어컨을 키려고 했던 건데. 혹시 내가 저 남자 흉내라도 내려고 했다고 생각했습니까?”
여전히 민혁의 손은 단우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제는 아프지 말라고 만져 주는 건지 다른 의도인지 알 수가 없다.
“흉내라도 낼 수는 있고요?”
미쳤나 보다. 단우는 자기가 하고 있는 말을 자기 귀로 들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이 잘못 나갔다고 수습하는 대신 오히려 도발적인 시선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나른하고 부드럽던 민혁의 눈빛에 반짝 섬광이 비쳤다.
“그거, 굉장히 남자를 도발하는 말인데.”
민혁의 목소리는 높지도, 어조가 세지도 않지만 단우는 등골이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여기서 적당히 수습하고 물러서야 하나. 하지만 이성과는 별개로 단우의 몸이 그러길 원치 않았다. 미친 짓이라는 걸 알지만 지금 여기에 이 남자와 있다는 것 자체가 충분히 미친 짓이다.
“도발이라면 어쩔 건데요?”
단우가 뒤로 밀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서로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단우는 민혁의 목에 팔을 감았다. 입술이 닿았다.
“이단우.”
지독하게 뇌쇄적인 느낌을 담은 목소리로 민혁이 단우의 이름을 속삭였다. 단우는 무릎을 세우고 민혁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단우는 과감했다.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붙여 온 입술 사이로 촉촉한 혀끝이 민혁의 입술을 핥았다. 그 혀를 맞이하려는 듯 달싹거리는 민혁의 입술을 응징이라도 하듯 이 끝으로 살짝 깨문다.
안달이 난 민혁의 손이 애꿎은 단우의 머리채를 감아 잡고 있었다. 다시 벌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민혁의 입술을 이번에는 단우의 입술이 꽉 물고 혀로 살짝 말아 쪽 빨았다. 민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순 없다.
살짝 입술을 뗐다. 감겨 있던 단우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리는 모습이 매혹적이다 못해 에로틱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느라 민혁의 목울대가 요동을 쳤다. 비록 선수를 빼앗겼지만 이게 끝은 아니지.
머리카락을 감고 있던 손을 앞으로 돌려 발갛게 달아오른 단우의 양 볼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며 눈꺼풀이 다시 내려앉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따뜻하고 달큰한 숨이 새어 나왔다. 그 숨을 들이마시기라도 하듯 민혁이 숨을 삼키며 입술을 붙였다.
아까와는 달리 무방비 상태인 단우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간 혀가 말캉한 단우의 혀를 감아 당겼다. 나직한 신음 소리가 단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단우의 입안은 달았다. 정말 다디달았다. 아까 먹은 초콜릿의 맛인지 아님 원래 단우의 맛인지 모르겠다. 민혁은 정신이 다 혼미했다.
달콤하고 로맨틱한 여자의 키스와는 달리 남자의 키스는 열정적이고 뜨거웠다. 단우의 뒷머리를 감싼 손아귀에는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민혁의 몸과 꼭 붙은 단우의 가슴이 가쁜 숨을 쉬느라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 민혁의 혀가 아플 정도로 거세게 입안을 휘저었다.
그칠 듯하다가 다시 거세진 빗줄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차 지붕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둘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작은 불씨 하나만으로도 폭발해 버릴 듯 달아오른 차 안의 공기는 거센 빗줄기에도 전혀 식을 기미가 없었다.
빠앙!
빗소리를 뚫고 요란한 경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번째 경적이 울린 후에야 민혁은 정신을 차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났나 보다. 차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단우에게로 돌렸다. 민혁의 어깨에 기대 있는 단우의 머리 밑으로 손을 넣어 살며시 들어 올렸다. 온통 분홍빛으로 얼굴이 물들어 버린 단우가 살짝 감았던 눈을 떴다.
“우리 집에 갑시다.”
단순한 문장이지만 뜻만은 단순하지 않은 말을 던지고 민혁이 단우의 답을 기다렸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뚫어져라 민혁의 눈을 한참 바라보던 단우가 몸을 똑바로 세우더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쓱쓱 빗어 다시 틀어 올려 묶었다. 선바이저에 달린 거울로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올리더니 안전벨트를 맨다. 민혁은 말없이 단우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가죠.”
벨트 버클을 채운 단우가 담백하게 말했다. 민혁은 입술에 힘을 주고 미소를 참으며 박력 있게 기어를 바꾸고 차를 출발시켰다.

***

심플한 모양의 수도꼭지는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대자 소리 없이 물을 흘려보냈다. 향이 좋은 물비누를 손바닥에 받아 거품을 내고 물로 한참 손을 헹궜다. 벽에 걸린 보송보송한 수건에 손을 닦고 나자 은은한 향과 함께 뽀득거리는 손의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살피다가 가방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딱히 번지거나 심하게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화장을 좀 손봤으면 좋았을 뻔했다. 대충 틀어 올렸던 머리를 풀어 만진 후 다시 묶었다. 거울을 보니 드러난 목선이 너무 노골적으로 보인다. 묶었던 머리를 다시 풀었다.
“휴우.”
화장실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새삼스럽게 긴장이 된다. 솔직히 말해 긴장의 최고조는 오피스텔 문 앞에서 민혁이 키패드의 비밀번호를 누를 때였다. 띠릭,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리고 민혁의 손이 문손잡이를 잡아 열 때,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긴장했었다.
문을 연 민혁이 한 발 물러서며 단우가 앞서는 것을 기다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안으로 먼저 들어서자 현관의 센서등이 반짝, 하며 켜졌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단우는 잠시 숨을 내쉬는 것도 잊은 채 신경을 온통 등 뒤에 곤두세우고 서 있었다.
“한 잔 할까요?”
머리 바로 위에서 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잔? 하고 반문하는 사이에 민혁은 쓱 단우를 지나쳐 구두를 벗고 집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손에 들었던 재킷을 소파 위에 던지고 셔츠 소매의 커프스를 빼던 민혁이 현관에 서 있는 단우를 돌아보고 들어오라는 듯 슬쩍 턱짓을 했다.
“들어와요.”
단우는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이 풀어지며 풀썩 웃고 말았다.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저 남자가 야수로 돌변해서 현관 벽에 자기를 밀어붙이기라도 할 것을 상상했을까. 아니, 기대했을까. 단우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한 발 들어섰다.
“화장실이 어디예요? 손 좀 씻고 싶은데.”

손을 씻는다는 핑계로 화장실에 들어와서 시간이 꽤 지났다. 더 지체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다시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화장품 파우치를 들고 오지 않은 것을 한 번 더 후회한 후에 화장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주방 쪽에서 나오던 민혁이 단우를 보고 씩 웃었다.
“앉아요.”
단우가 먼저 소파에 앉자 민혁이 조금 떨어진 옆에 앉았다. 넥타이는 풀어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고 셔츠 단추 몇 개를 열고 소매를 접어 올린 차림이 느긋해 보였다. 민혁은 들고 온 유리잔을 미리 테이블에 가져다 놓았던 위스키 병 옆에 내려놓았다.
“위스키 좋아하지 않으면 다른 술로 줄까요? 맥주도 있고 와인도 있습니다만.”
“위스키로 할래요.”
“얼음?”
“네.”
유리잔 안에 얼음 몇 개를 넣고 색이 고운 술을 잔에 따르자 톡 쏘는 향기가 코를 찔렀다. 자기 잔에는 얼음 없이 술만 따른 민혁이 얼음이 든 잔을 단우에게 내밀었다.
“자.”
단우가 잔을 받아들자 자기 잔을 가볍게 단우의 잔에 부딪히고는 입으로 가지고 간다. 단우도 잔을 흔들어 얼음과 술을 섞어서 한 모금 마셨다. 독하게 쏘는 것과 별개로 목 넘김이 부드럽고 향이 좋았다. 한 모금 더 마셨다. 순식간에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술기운이 퍼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빈속일 텐데 뭘 좀 같이 먹어요.”
마리네이드 된 토마토와 치즈 조각 따위가 테이블에 같이 놓여 있었다. 단우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까부터 먹은 게 없잖습니까.”
민혁이 치즈 조각을 작은 포크에 찍어 내밀었다. 치즈 조각을 가만히 보던 단우가 손을 내미는 대신 입을 살짝 벌렸다. 민혁이 턱을 약간 들고 한쪽 입가만 슬쩍 올리며 미소 지었다. 깊이 파인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살짝 열린 단우의 입술 사이에 치즈 조각을 넣어 주고 포크를 내려놓은 민혁의 손이 다시 올라와 귀 옆으로 탐스럽게 흘러내린 단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인데, 얼굴이나 목덜미에 손끝도 닿지 않았는데 단우는 그 부근의 신경이 온통 곤두서서 왼쪽 얼굴이 뻣뻣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카락 만지는 거 좋아하나 봐요.”
약이 오를 정도로 나른한 표정의 민혁이 능청맞게 되물었다.
“내가요?”
“아까도 머리카락을 계속 손으로 감…….”
종알거리던 단우가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입을 다물었다. 민혁이 손등으로 단우의 볼을 쓸어내렸다.
“다른 곳 만지는 것도 좋아합니다.”
능청스럽기 짝이 없는 말투다. 단우가 발끈해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했다.
“이단우 씨.”
아, 어쩜 좋아.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까지도 섹시하다. 단우는 눈을 감아 버렸다. 이 상황이, 여기에 있는 자신이 도무지 현실이라고 믿기지가 않는다. 낯선 남자를 따라 온 그의 집에서 그 남자의 눈빛, 손길, 심지어는 목소리에까지 반응하는 자신의 몸이 너무나 생소했다.
상상으로조차 자신에게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 지금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단우의 몸이 지금 앞에 있는 남자를 원하고 있다. 낯선 감각이었지만 그만큼 강렬했다. 짧은 망설임과 고민을 끝내고 단우는 눈을 떴다.
민혁을 외면하고 있던 단우의 고개가 천천히 다시 그를 향해 움직였다. 마주친 시선 끝에 있는 민혁의 눈이 뜨거웠다. 남자가 뭘 원하는지, 그리고 여자가 뭘 원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둘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뜨거운 눈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점잖은 말투다. 단우는 실소했다.
“비겁하시네요.”
냉랭한 단우의 말에 민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여기까지 와서 원하지 않으면 아무 짓도 안 한다니. 모든 책임은 너에게 있다, 뭐 그런 건가요? 그런 책임 떠넘길 생각은 없지만 비겁한 남자와 뭘 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어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던 단우가 다음 순간 휘청하며 소파 위로 넘어지듯 쓰러졌다. 긴 소파 위에 천장을 보고 누워 버린 단우의 몸 위로 민혁의 몸이 겹쳐졌다. 민혁의 눈에서 조금 전처럼 나른하고 여유로운 느낌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 멍청한 발언에 대해서 사과하죠.”
단우가 고민하는 척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 줄게요, 그 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