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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여자. 민혁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천천히 머리를 아래로 내리며 민혁이 마지막 예의를 차렸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겁니다. 싫으면 지금 싫다고 해요.”
단우의 손이 민혁의 뒷머리를 감쌌다. 어떤 대답보다 확실하다. 민혁의 입술이 단우의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뜨겁다. 콧대를 타고 내려온 입술이 볼을 지나쳐 귓가로 향했다. 귓불을 이 끝으로 잘근 깨물며 혀로 귓바퀴를 핥자 단우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시 입술을 목덜미로 내리며 손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가늘고 매끄러운 허리선을 따라 손을 오르내리자 가쁜 숨을 쉬느라 들썩이는 몸의 움직임이 그대로 느껴졌다. 허리 밑으로 치고 올라오는 흥분을 누르느라 목덜미를 빨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아차 하고 입술을 뗐을 땐 이미 발그스름한 자국이 단우의 목덜미에 그대로 남아 버린 후였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민혁이 상반신을 일으켜 다급히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감았던 눈을 뜨고 그 모습을 보던 단우가 윗몸을 일으켜 단추를 푸는 민혁의 손을 잡았다. 대신 풀어 주겠다는 걸까. 기대가 실린 눈으로 바라보는 민혁의 눈을 야릇하게 응시하며 단우의 손이 셔츠 깃 아래 부분을 쥐더니 있는 힘껏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후드득. 단추가 뜯겨져 바닥으로 튀는 소리가 들렸다. 민혁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단우의 얼굴과 바닥에 떨어진 단추를 번갈아 봤다. 발그레한 얼굴로 단우가 생긋 웃는다.
“한 번 해 보고 싶었어요.”
단우의 손이 벌어진 셔츠 앞자락을 파고들었다. 옷자락 사이로 맨몸을 어루만지던 단우가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가슴이 성감대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민혁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민혁의 손이 단우의 등줄기를 훑는다. 천천히, 척추 뼈 마디마디를 짚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세하게. 단우의 혀가 가슴팍을 핥는 순간 민혁은 이대로 소파에서 끝을 볼 것인가 아주 잠시 고민하다가 곧 머리를 흔들었다. 남아 있는 자제력을 그러모아 붙들고 벌떡 일어섰다.
단우의 팔목을 잡아 쥐고 방문을 발로 차서 연 민혁이 말끔하게 정돈된 침대 위에 단우를 밀어 눕혔다. 치맛단이 말려 올라가 드러난 늘씬한 허벅지에 눈이 부셨다. 민혁은 급한 마음과는 대조적인 여유로운 몸짓으로 팔에 걸려 있는 셔츠를 마저 벗어내 바닥에 던지고 벨트를 끄르기 시작했다.
단우는 민혁이 내려놓은 그 자세 그대로 누운 채 가늘게 뜬 눈으로 민혁이 옷을 벗는 모습을 지켜봤다. 단우의 눈길마저 에로틱해서 옷을 벗는 동안도 민혁의 허리 바로 아랫부분은 점점 더 뻐근하게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벨트가 풀어진 바지가 스르륵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하나 남은 속옷 안의 남성이 꺼내어 달라고 울부짖는 것 같다. 속옷은 그대로 남겨 놓은 채 침대 위로 올라온 민혁이 단우의 허벅지에 입술을 댔다. 치마 자락을 손으로 밀어 올리며 입술도 점점 더 위로 옮겨 갔다. 하늘거리는 속옷에 닿기 직전에 손을 멈추고 민혁은 몸을 위로 밀어 올렸다.
단우의 얼굴 바로 옆에 팔을 짚어 지탱하며 위에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발갛게 물든 볼에 달뜬 눈이 서두르라고 민혁을 재촉하는 것 같다. 입술을 포개며 민혁의 손이 치마허리 밖으로 삐져나온 블라우스 단추를 끌렀다.
쉽게 열린 블라우스 앞자락을 당겨 침대 밑으로 던져 버리고 스커트를 잡아 내리는 민혁의 손놀림을 단우가 허리를 들어 도왔다. 등 뒤로 손을 돌려 브래지어 후크를 풀자 아름답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가슴이 드러났다. 손도 대지 않았는데 가슴 돌기가 한껏 도드라져 올라 민혁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혁은 혀로 입술을 축이고 한쪽 가슴을 답삭 베어 물었다. 단우의 손이 민혁의 머리카락을 움켜쥔다. 단단하게 솟아오른 작은 것을 입안에 넣어 혀로 굴리고 입술로 물었다가 이 끝으로 살짝 물기도 했다. 다른 손으로는 애달아 기다리고 있는 나머지 한쪽을 손가락 끝으로 쥐고 부드럽게 문지른다.
“하……아…….”
애가 타는 신음을 흘리며 단우의 긴 다리가 민혁의 다리를 감고 힘을 주었다. 가슴을 어루만지던 민혁의 손이 배를 지나 옆구리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무게감이 전혀 없는 얇은 천이 손에 닿자 조심스럽게 그 안을 비집고 들어간다.
단우의 애타는 신음이 점점 커지고 머리채를 붙든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더 이상은 민혁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벌떡 상체를 일으켜 마지막 남은 속옷을 벗어 던졌다. 기다림의 한계에 도달한 민혁이 잔뜩 성이 난 남성을 들이밀며 단우의 마지막 옷을 벗겨 내는 순간.
“잠깐만요.”
민혁의 가슴에 손바닥을 댄 단우가 가쁜 숨을 삼키며 외쳤다.
“뭡니까?”
급한 마음에 민혁의 대꾸가 퉁명스럽기까지 했다.
“그거 없어요?”
“뭐요?”
“피임…….”
단우의 말에 민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단 한 번도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면서 콘돔을 잊어 본 적이 없는데. 단우가 일깨워 주지 않았다면 콘돔 없이 마지막까지 갈 뻔했다.
민혁은 손을 뻗어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었다. 늘 그곳에 들어 있는 콘돔을 하나 꺼내 포장을 뜯고 서둘러 착용을 했다. 자신의 준비성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게 없었다면 단우가 여기서 멈추자고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다시 여자의 몸으로 눈을 돌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흰 시트 위에 누워 있는 여자는 소름 끼치게 섹시했다. 여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절정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가장 끝내주는 순간이 남아 있는데.
다시 여자의 샘에 조심스럽게 손을 댔다. 아직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민혁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 남성의 끝을 조심스럽게 대고 밀어 넣기 시작했다.
“흐윽…….”
그 속을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곳으로 남성을 밀어 넣는 마찰만으로도 하반신 전체가 녹아내릴 것 같은 쾌감이 밀려왔다. 깊게, 깊게. 서로의 몸이 맞닿을 정도로 깊이 결합되자 단우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민혁은 이 순간 여자에게서 열렬한 애정을 느꼈다. 이 격한 감정이 무얼까. 몸이 느끼는 쾌락 때문이라고만은 설명할 수 없는, 이때까지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단우의 귀에 입을 대고 사랑한다고,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의 그런 말이 상대에게 얼마나 헛되게 느껴질지 짐작하기에 민혁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그 말을 꾹 삼켰다.
대신 민혁은 팔을 단우의 목 아래로 밀어 넣고 머리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미친 듯이 허리를 움직이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정성스럽고 깊은 키스를 했다. 귓불을 빨고 목덜미에도 진한 키스를 했다. 아까보다 더 단단해진 가슴 돌기도 다시 혀로 말아 빨아들였다.
“그만…… 제발…….”
단우가 애원한다. 민혁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느리고 얕게 시작한 움직임은 이내 빠르게, 거칠고 깊게 변해 갔다. 여태까지 몇 번의 섹스를 했을까. 잠자리를 한 상대의 수는 셀 수 있지만 그 상대들과 나눈 잠자리의 횟수는 다 세기 어렵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모든 잠자리는 오늘, 지금 이 순간에 비하면 다 부질없는 것들이다. 움직일 때마다 죽어도 좋다 싶을 정도의 강한 쾌감은 더, 더 그 세기를 더하고 있었다.
단우도 다르지 않았다. 이거였구나. 내 몸은 이 순간을 미리 알고 그렇게나 저 남자를 원했던 것이었구나. 이상한 약이라도 잘못 먹은 건가 싶을 정도로 이 남자에게 반응하던 내 몸은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구나. 단우가 이제껏 알았던, 이제껏 겪었던 남자의 몸은 다 무엇이었나.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끝인가 싶으면 더한 것이, 이보다 좋을 순 없겠다 싶으면 그를 넘는 쾌감이 끝도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온몸의 모든 신경이 남자의 몸과 맞닿은 그곳으로 몰린 것만 같았다. 남자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그 움직임이 더 세지고 깊어질수록 그곳에서 시작된 흰 점은 점점 크고 밝아졌다. 민혁이 신음 소리가 절로 새어 나오는 입술을 꾹 다물며 더 깊이 단우를 몰아붙였다. 다음 순간 그 흰 점은 결국 단우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교성을 내지르게 만들며 폭발했다.
뒤이어 민혁도 참았던 숨을 내쉬며 단우의 몸 위로 엎어졌다. 민혁은 단우의 가슴골에 얼굴을 묻으며 살 냄새를 흠뻑 들이마셨다. 이 여자야. 도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지. 아니다. 이제라도 만났으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민혁은 눈앞에서 단우가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가슴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장난기가 솟아 이 끝으로 살짝 돌기 끝을 깨물었다. 단우가 손바닥으로 민혁의 맨어깨를 찰싹 내려쳤다. 민혁이 아이처럼 크게 웃으며 다시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끌어안고 단잠을 자고 싶었다. 달큰한 살 냄새를 맡고 보드라운 살결을 느끼며 밤새도록 자고 싶다. 단우가 꼼지락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왜?”
“씻을래요.”
민혁이 단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좀 이따가.”
“일단 씻고요.”
허리에 두른 민혁의 팔을 푼 단우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시 단우에게로 뻗는 민혁의 팔을 살짝 피해 욕실로 달려간 단우는 욕실문을 잠그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적시는 단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아.”
달뜬 숨을 내쉬며 샤워 부스 벽에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단우는 손으로 자기 몸을 쓸어 보았다. 남자의 손이 닿았던 느낌과는 딴판이었지만 아까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정말, 너무 좋았다.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니다, 경험이 없었다면 이 남자가 얼마나 근사한 남자인지조차도 제대로 알 수 없었겠지. 그걸 구별할 수 있을 만큼의 경험이 있다는 것조차 고맙게 느껴질 정도라니. 혼자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바디 클렌저 뚜껑을 열어 코에 대자 아까 침대에서 맡았던 익숙한 향이 맡아졌다. 그 향을 타고 온몸의 감각이 거짓말처럼 되살아났다. 샤워 타월에 거품을 잔뜩 내서 몸을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단우의 손길에는 야릇한 기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갔을 때 민혁의 표정이 궁금했다. 잔뜩 흐트러진 채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있을 민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샤워를 마치고 부스 밖으로 나와 벽에 달린 수납장을 열었다. 곱게 개어져 있는 목욕 수건 하나를 꺼내 머리를 가볍게 털고 몸을 닦은 후 몸에 두르는데 밖에서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곧이어 민혁이 방에서 나가는 발소리도 들렸다.
단우는 혹시나 하고 수건을 꼼꼼히 여미고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방문이 살짝 열려 있어서 현관문 쪽에서 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여자 목소리다. 여자가…… 울고 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야…… 나더러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잖아…….”
곧이어 약간은 짜증스러운 민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지금 나더러 뭘 어떡하라고.”
“넌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가 있어!”
“나중에 얘기해.”
“나중이 어디 있어! 나 여기서 나가면 확 죽어 버릴지도 몰라!”
아이고. 단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바닥에 너부러진 옷들을 주워 급하게 입었다. 둘렀던 수건을 대충 개서 욕실에 들여놓고 거울을 보고 젖은 머리도 대충 손질했다. 헝클어진 모습으로 나갔다가 괜한 봉변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아, 진짜.”
단우는 세면대에 팔을 짚고 서서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몽롱하던 환상이 깨지고 모든 것은 현실로 돌아왔다. 미친 짓이다. 처음 만난 남자를 따라 그 집까지 와서 침대에 뛰어든 것도 모자라 저건 뭔가. 기대감에 들떠 샤워까지 마치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는데 거실에는 다른 여자가 울고 있고. 이게 무슨 3류 영화 같은 상황이냔 말이다.
“이건 정말 쪽팔리는 거지, 이단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대로 방에 숨어 있다가 저 여자를 달래고 돌아온 민혁을 마주하는 건 더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단우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욕실을 나섰다. 방문을 조용히 열고 거실로 나왔을 때 민혁의 뒷모습이 먼저 보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에 반바지만 입은 채 한 손은 골반 위에, 다른 한 손은 한쪽 머리를 잡고 있었다. 단우가 애써 담담하게 그쪽으로 걸어갈 때 민혁에게 가려 보이지 않는 여자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이 나쁜 새끼야! 어떻게 그렇게 남 일 얘기하듯 할 수가 있어! 나 임신했단 말이야, 너희 집 핏줄을 가졌다고!”
그 말에 단우가 걸음을 멈췄다. 오. 마이. 갓. 지금 이 상황에서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최악이다. 갑자기 민혁의 앞에 서서 울고 있을 여자에 대해 무한 동정심이 솟아올랐다.
다시 방으로 되돌아가 민혁이 여자를 돌려보낼 때까지 숨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 단우를 마주친다면 여자가 얼마나 절망할까.
살금살금 물러서려고 할 때 갑자기 민혁이 휙 돌아서며 단우와 눈이 마주쳤다. 덕분에 민혁에게 가려져 있던 여자와도 마주하게 됐다. 눈물로 온통 젖은 채 절망이 가득 깔린 얼굴로 단우와 마주한 여자의 눈이 커졌다.
“단우 씨.”
당황한 표정으로 민혁이 단우의 이름을 불렀지만 단우는 민혁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여자를 향해 지을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온화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오해하실 만한 상황인 거 알지만 흥분하시면 안 될 것 같은데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세요. 저는 얼른 빠질게요. 죄송합니다.”
“단우 씨!”
여자를 지나쳐 현관으로 향하며 단우는 민혁을 향해 손을 들어 다가오는 것을 제지했다.
“여자분, 안정시켜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저는 괜찮으니까 돌봐 드리세요.”
“이단우 씨, 잠깐만 있어 봐요.”
단우는 빠르게 현관문을 빠져나와 미련을 끊듯 문을 닫았다.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다가 중간에 있는 비상계단용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단우의 움직임에 캄캄하던 비상계단이 환해졌다. 계단 손잡이를 잡고 아래로 내려가며 단우는 헛웃음을 웃었다.
참 가지가지 하는 하루다. 그나마 곱게 그 집을 나온 게 어디인가. 잘못했으면 침대 위에서 개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계단 중간에 멈춰선 단우가 위를 올려다봤다. 쫓아 나왔으려나. 만일 쫓아 나왔더라도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겠지. 아니면 그냥 그 여자와 함께 있었을까.
가슴이 욱신거리며 흐린 통증이 느껴졌다. 만일 그랬다면 완전히 개차반은 아니었다고 위로를 삼아야 하는 거겠지.
오피스텔을 나오자 마침 손님을 내려주는 빈 택시가 있어서 바로 잡아탔다. 행선지를 불러 주고 등받이에 기대서 눈을 감았다. 아, 한주가 이 얘길 들으면 뭐라 하려나. 처음 만난 남자 집에 쫄쫄 따라가서 침대에 덜렁 누워 버린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욕을 먹겠지. 단우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발을 동동 굴렀다. 미쳤지, 미쳤어. 뭐에 홀려서 이런 짓을 한 거지.
“그래도…… 좋은 건 좋았지.”
정말 일말의, 일말의 아쉬움이 들었다. 정말이지 너무 좋았던 거다. 앞으로 이런 경험을 또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쁜 자식. 그런 좋은 능력을 말이지…….”
단우는 오피스텔을 향해 눈을 흘기고 한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4. 오해


계속해서 울려 대는 앰뷸런스 소리. 의사와 간호사들의 바쁜 발걸음 소리. 오밤중의 응급실은 시끄럽다. 민혁은 링거 바늘을 꽂고 잠들어 있는 연경의 옆에 앉아 혹시라도 소음 때문에 연경이 깰까 침대를 가린 커튼을 조금 더 여몄다.
“후우.”
피곤하다.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힘겨울 지경이었다. 민혁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커튼을 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어머니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 무슨 일이야?
오밤중에 걸려 온 둘째 아들의 전화가 불안감을 들게 했는지 대뜸 어머니가 묻는다. 병원 외벽에 기대선 민혁은 피우지도 않는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어머니. 좀 오셔야겠는데요.”
― 뭐? 어딜? 왜?
“연경이가 지금 병원에 있어요.”
놀라서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는데 전화 반대편은 조용했다.
“어머니.”
― 연경이가 왜?
평소 같으면 별거 아닌 일에도 약간은 호들갑스럽게 수선을 떠는 양반이 너무나 침착하고 나직하게 다시 묻는다. 어머니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알 수 있었다.
“큰일 아니니까 걱정은 마시고요. 지금 병원에서 링거 맞고 잠들어 있는데 저보다는 어머니가 옆에 계시는 게 연경이한테 좋을 것 같아서요.”
어머니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병원이 어디냐고 물었다. 전화를 끊고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잔디밭 옆에 있는 벤치로 가 앉았다. 머리가 멍했다. 몇 시간 전 일이 벌써 한참 전 일처럼 아득했다.
단우가 그렇게 나가자 윗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도 잊고 거실용 슬리퍼를 신은 채로 따라 나가려는데 연경이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그래?”
놀라서 다가온 민혁에게 연경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따라가 봐. 오해한 모양인데…….”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차마 주저앉은 연경을 놓고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연경은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배 아파?”
“괜찮다니까. 빨리 쫓아가.”
“배 아프냐고!”
민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연경이 미안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민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은 119에 전화를 할 작정으로 전화기를 들다가 직접 데리고 가는 것이 빠르겠다 싶어 급하게 옷을 걸치고 연경을 데리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갔다.
적은 양이지만 하혈을 했고, 유산기가 있다는 소견이 있어 유산방지주사 링거를 꽂은 연경은 탈진한 사람처럼 늘어져 버렸다. 안타까워서 차마 바로 볼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타이밍도 더럽게 못 맞추는 계집애. 하필 오늘 같은 날 찾아와서 나한테 좋은 소리도 못 듣고. 하소연하자고 찾아온 연경에게 퉁명스럽게 대했던 것이 미안하고 맘이 아팠다. 뒤이어 말로 다 표현 못 할 후회와 아쉬움이 해일처럼 민혁을 뒤덮었다. 그 여자를 그렇게 보내버리고 말았다.
연경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민혁은 정말 심각하게 배를 붙잡고 주저앉은 연경을 두고 단우를 쫓아갈 것을 고민했다. 이름 하나 달랑 알 뿐이지 어디서 뭐 하고 사는 사람인지, 연락할 전화번호 하나 없다. 그렇게 보내면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한 사람이었다.
민혁은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허리를 숙였다. 앞이 안 보이는 상실감이 밀려들어서 가슴이 먹먹했다. 아는 거라곤 달랑 이름 하나. 그나마 흔한 이름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머리를 좀 식히고 어떻게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이대로 하룻밤 꿈처럼 흘려버릴 수는 없는 사람이다.
“민혁아!”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민혁을 현실로 불러들였다. 뛰다시피 걸어오는 어머니 뒤로 아버지 모습도 보인다.
“연경이는? 어디가 아픈 거야?”
아버지가 신경 쓰였지만 어차피 알아야 할 일이다 싶어 민혁은 어머니에게 설명을 했다. 연경이 임신을 했고, 유산기가 있다고 해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고. 아무 대꾸 없이 듣고 있던 어머니가 병원 건물을 향해 걷다가 비틀거렸다. 민혁보다 먼저 아버지가 어머니의 팔을 붙들었다.
“그래도…… 아기를 가질 수 있었던 모양이구나.”
어머니의 중얼거림과 동일한 생각은 아버지와 민혁의 머릿속에서도 이미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민혁의 형, 규혁에게는 장애가 있었다. 5―6세 무렵 이유 모를 열병을 앓은 후 멀쩡하던 아이가 걷지를 못했다. 하반신 마비는 아니었다. 감각도 모두 살아 있었고, 움직일 수도 있었다. 다만 혼자 서거나 걸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전국의 병원도 모자라서 외국 병원까지, 어머니가 안 가 본 곳이 없었지만 의사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결혼을 앞둔 규혁이 잠적한 것도 장애를 가진 자신이 연경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었다. 연경이 간절히 원했고, 반대하던 가족들도 결국 연경에게 두 손 들어 결혼을 찬성하게 됐지만 정작 본인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임신이 가능했구나. 모두는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형 좀 찾아봐.”
연경이 있는 곳으로 어머니를 안내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민혁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네.”
“꼭 좀 찾아봐. 연경이가 지금 기다리는 게 뭐겠니. 그 못난 놈도 지 서방 될 사람이고 지 새끼 애비 될 놈이라고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겠어. 너라도 좀 찾아서 덜미를 잡아서라도 끌고 와 봐.”
어머니의 말끝에 습기가 묻어났다. 민혁은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향하며 민혁은 새삼 연경에 대해 미안하고 애달픈 마음이 들었다.

연경이 민혁의 집에 온 것은 태어나 백일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고 했다. 연경의 어머니는 사창가의 여자였다. 사창가 아가씨들에게 일수를 놓던 민혁의 어머니 박 여사는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복지기관 등과 연결해 주는 일도 병행하고 있었다.
연경도 그렇게 박 여사의 손으로 건너왔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집에서 며칠 데리고 있다가 알맞은 기관으로 넘길 생각이었는데 그 며칠 동안 어머니는 연경에게 쏟아지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당시 민혁도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아기였다. 아마도 그래서 손안에 들어온 불쌍한 아기에게 더 마음이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박 여사는 연경을 직접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연경은 순한 아기였다. 배가 고파도 울지 않고, 기저귀가 젖어도 울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이유 없이 안아 달라고 우는 일은 절대 없었다. 자기 처지를 알고 태어난 것처럼 굴어서 박 여사는 온통 엉망이 된 연경의 기저귀를 갈아 주다가 아이고, 이 아둔한 것아, 하며 눈물을 훔친 적도 많았다.
자라는 동안 박 여사는 두 아들 이상으로 연경을 사랑했다. 어릴 적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이는 연경을 위해 피아노를 사고 유명한 교수들을 집으로 불러 레슨을 시키기도 했다. 아마 음악에 소질을 보인 것이 아들 중 하나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지출이었다.
그렇게 연경은 민혁의 동생으로, 유일한 딸로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어여쁘고 행복하게 자랐다.
연경과 민혁이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연경의 어머니가 나타났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찾아온 연경의 어머니는 연경을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박 여사 앞에 무릎을 꿇고 오열하며 자기에게 남은 것은 연경이밖에 없다고 했다.
자신이 박 여사의 친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친어머니를 처음으로 대면한 연경은 혼란에 빠졌다. 그 나이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늙고 병색이 완연한 여자를 보며 연경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연경아. 네가 싫으면 그냥 지금처럼 모르는 사이로 살아도 돼. 엄마가 그렇게 해 줄게. 걱정하지 마.”
박 여사가 연경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연경은 슬픈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엄마, 이때까지 이렇게 키워 주신 것도 너무 감사해요. 그리고 저 여자…… 아니, 제 친엄마한테는 저밖에 없다는데…… 제가 모른 척하면 안 되잖아요.”
박 여사는 연경의 어머니가 아니라 연경을 위해 작은 집과 작은 가게를 마련해 주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연경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 그 집을 드나들던 어느 날, 연경의 어머니가 박 여사에게 말했다.
“도와주신 것은 고맙지만 자꾸 이렇게 오시면 우리 연경이가 저한테 정을 못 붙여요. 안 그래도 저한테 엄마 소리도 안 하는데…….”
박 여사는 어쩔 수 없이 연락을 끊었다. 그 후 가끔 민혁은 하굣길에 연경의 학교 앞을 지키고 서 있다가 연경을 만나곤 했다. 날이 갈수록 수척해 가는 연경을 보고 집으로 다시 오라고 화도 냈다.
“나 집에 가면 뭘 얼마나 잘해 주려고? 규혁 오빠도 아니고 네가 그러니까 이상하다, 야.”
배시시 웃는 연경에게 짜증을 있는 대로 내고는 주머니를 털어 돈을 건네면 연경은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고마워.”
박 여사가 친엄마 모르게 쥐여 주는 돈이나, 규혁이 주는 돈은 절대 받지 않았지만 민혁이 주는 돈은 떡볶이 값이 생겼다고 좋아하며 받곤 했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식이 있던 아주 추운 겨울날. 민혁의 졸업식이 끝나고 식구들끼리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박 여사가 도저히 안 되겠다며 연경의 집에 들러 보자고 했다. 졸업식인데 사진이라도 한 장 찍었는지, 고기라도 한 점 먹었는지 눈에 밟혀서 그냥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규혁이 탄 휠체어를 끌고 민혁이 앞장섰다. 졸업식이 끝난 학교 앞에서 막 자판을 정리하는 꽃장수에게 산 꽃다발은 규혁이 꼭 안고 있었다. 연경의 집이 가까워 올수록 민혁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저거…… 연경이야?”
막 모퉁이를 돌아 연경의 집이 보이는 골목에 들어서자 민혁이 발을 멈췄다. 그날은 참 추웠다. 두툼한 패딩 점퍼를 입고도 밖으로 나온 귀와 코가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추운 날이었다. 연경은 교복 블라우스만 입은 차림으로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민혁은 휠체어 손잡이를 놓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야! 김연경!”
자기 몸을 팔로 감싸고 쪼그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던 연경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미쳤어? 얼어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이 추운데, 옷이 그게 뭐야? 왜 이러고 나앉아 있어?”
민혁이 팔을 잡아 일으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던 연경이 배시시 웃었다.
“어쩐 일이야, 여기까지? 졸업식이라고 챙겨 주러 왔구나.”
“시끄러워! 너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잠깐. 그냥 바람 쐬러 잠깐.”
“뭐? 바람? 야! 바람 쐬다 얼어 죽으려고 그랬냐!”
성질을 이기지 못해 버럭거리던 민혁은 자신의 뒤를 향한 연경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봤다. 어느새 다가온 규혁이 거기 있었다. 규혁은 입고 있던 패딩 재킷을 벗고 연경을 향해 팔을 벌렸다. 입술을 깨물고 서 있던 연경이 풀썩 주저앉아 규혁의 다리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규혁이 연경의 몸 위에 재킷을 덮고 꼭 안았다.
뒤따라온 어머니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아무 말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커다란 가방 하나를 들고 나와 민혁에게 들려주었다.
“여보, 애들 데리고 먼저 집으로 가세요. 전 여기 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규혁과 민혁, 그리고 연경으로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그 이후로 연경은 다시는 민혁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 후로 2년쯤 지났을 때인가. 연경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박 여사는 연경을 데리고 하루 동안 어딘가를 다녀왔다. 규혁이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박 여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시신을 수습해서 화장을 해 어딘가에 뿌리고 온 모양이었다.
연경의 얼굴에는 늘 슬픔이 있었다. 웃음도 많고, 애교도 많고, 장난기도 많은 그녀였지만 문득 혼자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을 때면 처연할 정도의 슬픔이 얼굴에 있었다. 그 슬픔을 유일하게 내보이고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연경에게는 바로 민혁의 형, 규혁이었다.
그런데 지금, 가장 필요한 순간에는 옆에 없다니. 민혁은 새삼스레 형에게 화가 치밀었다. 어디 있는지 알기만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끌고 올 텐데. 성치도 않은 몸으로 도대체 어디 가 있느냐는 말이다.

민혁이 집에 도착한 시간은 날이 밝으려고 하는 새벽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욕실로 가 샤워를 했다. 속옷만 걸치고 침대에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베개에서, 시트에서, 이불에서 온통 단우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 여자가 여기에 있었던 건 꿈이 아니다. 이렇게 진하게 아직 그 여자의 향기가 남아 있는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으로 이 침대 위에 누워 도발적으로 민혁을 바라보던 그 눈빛. 그 키스, 그 손길과 그…… 그……. 상상만으로도 다시 하반신이 뻐근해졌다. 민혁은 주먹으로 침대를 내리쳤다.
“젠장. 젠장!”
이게 아니란 말이다. 지금 이렇게 혼자 침대에 누워 절규하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고. 그 돌발 상황만 아니었다면 밤새도록 품에 안고 절대 놔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기가 막힌 오해를 한 채로 절대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부글부글 속은 끓어오르는 와중에도 지난밤을 꼬박 새운 덕에 잠이 쏟아졌다. 어느새 잠에 빠져든 민혁의 꿈속에서 침대 위에 여신처럼 누운 나신의 단우가 고혹적으로 손짓을 하고 있었다.

***

“미친 거지.”
준우의 입에서 단호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한주가 타박을 할 만도 하건만 조용하다는 건 준우의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겠다. 단우는 끌어안고 있는 아이스크림 통에서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숟갈 떠서 베어 물었다.
“그게 넘어 가냐?”
준우가 한심하다는 듯 핀잔을 주고는 아이스크림 통을 빼앗아서 떠먹는다.
“도대체가 남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 너 시집은 가겠냐?”
“그런 3류 드라마 같은 상황을 내가 어떻게 예상해?”
“그러니까 남자 보는 눈이 없다는 거잖아. 아니지, 남자 보는 안목하고는 별개로 너 정말 정신이 나간 거 아니야? 뭘 믿고 길에서 꼬시는 남자한테 홀랑 넘어가? 게다가 집까지 쫓아갔다고?”
연신 타박을 하면서도 준우는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숟가락을 멈추지 않는다. 한주가 옆에서 보다 못해 숟가락을 빼앗았다.
“그만 먹어.”
“왜?”
“밥은 제때 못 챙겨 먹으면서 이런 것만 달고 사니까 살은 안 찌고 건강만 상하잖아.”
준우는 아내의 말에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스크림 통 뚜껑을 닫아 주방으로 가지고 갔다. 준우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한주가 무서운 눈으로 단우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너, 그 남자랑 잤어?”
“언니는…… 무슨…….”
답지 않게 당황하는 단우를 보고 한주는 대번에 상황을 짐작했다.
“진짜 미친 거지.”
남편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한주가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도대체 넌…… 소개팅 하라고 내보냈더니 그건 엎고 길에서 만난 남자 집에 따라가서, 잤다고?”
“진짜 미쳤었나 봐.”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단우를 보며 한주는 더 속이 터졌다.
“거기다가 다른 여자가 집에 쳐들어와서 임신했다고 울고불고하는 꼴까지 보고?”
“뭐 그냥 보기만 했어. 내가 험한 꼴 당한 건 아니니까.”
“장하다, 계집애야.”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고 돌아온 준우가 다시 한주 옆에 앉자 한주와 단우는 입을 다물었다.
“뭐지? 왜 내가 오니까 말을 하다 말아?”
“안 피곤해? 들어가서 쉬지.”
한주의 말에 준우가 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정말?”
“피곤할 텐데 왜 여기 지키고 앉아 있어?”
“시차 때문에 아까 자서 괜찮아. 나 들여보내고 뭐 하려고?”
“여자들끼리 그 남자 욕이나 실컷 하려고 그러지.”
“나도 같이 하면 되잖아.”
“너도 남자잖아.”
“아, 진짜. 남자래도 급이 다르지. 어디 그런 놈하고 한 무리로 취급하지? 기분 나쁘게.”
한주가 웃으며 준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헝클었다.
“그걸 내가 모를까 봐. 이런 남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어.”
준우가 바보처럼 헤실거리고 웃는다. 매일 보지만 한심하면서도 참으로 부러운 모습이다. 아픈 가정사가 있는 단우에게 이들의 가정은 치료제 같은 것이었다. 주변의 질투 어린 지분거림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굳건하게 서로를 믿고 사랑하고 지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단우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정에 대한 비뚤어진 가치관을 많이 바꿔 가고 있었다.
만일 내가 결혼하고 싶은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와 결혼을 한다면 나는 이들과 같은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만일 이들을 알지 못하고 계속 살아갔다면 아마 단우는 가정이라는 것 자체에 깊은 회의를 갖고 살아갔을 것이다. 지독히 망가져 버린 단우의 가정은 그녀에게 돌아가 쉴 곳이 아니라 잊고 싶고, 피하고 싶은 기억일 뿐이니까.
“그만 좀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