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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자신이 앞에 앉아 있다는 걸 잊은 것처럼 아내에게 치근대는 준우를 보는 게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단우는 옆에 있던 쿠션을 집어 던지는 시늉을 했다.
“이단우. 너 집에 좀 가라. 나, 해외 촬영 갔다가 3주 만에 왔거든? 우리 딸도 엄마 아빠 오붓하게 보내라고 일찍 자 주는데 네가 이렇게 방해를 하냐.”
“단우 일요일까지 우리 집에 있기로 했는데.”
한주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준우의 이마에 주름이 갔다.
“뭐? 왜?”
“단우네 아파트 수도관이 터져서 단수래.”
“요즘 세상에 그런 아파트가 어딨어! 당장 이사해!”
준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 이사를 하더라도 오늘 밤에 할 순 없잖아.”
단우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이 방에서 잘 테니까 솔이 걱정하지 말고 뜨거운 밤 보내셔.”
“괜찮아, 단우야. 손님방 가서 자.”
미안한 마음에 말리는 한주의 옆구리를 준우가 쿡 찔렀다.
“강한주. 오늘 밤은 나만 좀 봐.”
귀에 대고 속삭이며 목덜미로 입술을 미끄러뜨리는 남편을 뿌리치지 못하고 한주가 단우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내가 정말 치사해서 비켜 준다!”
장난스럽게 거친 발걸음으로 솔이 방으로 들어가는 단우의 등 뒤에서 준우가 고맙다고 외쳤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선 단우는 가릉가릉 귀여운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아기의 옆에 서서 가만히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솔아, 니네 엄마 아빠는 맨날 뭐가 그렇게 좋으니.”
아기 침대 옆에 있는 간이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니 또 그 남자가 떠오른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집을 나온 이후 1초도 예외 없이 그 남자는 단우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거지 같은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도 떠오르는 그 남자의 모습이 지저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니 신기한 노릇이다. 그 잘생긴 얼굴과 굵고 낮은 목소리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날 밤 침대 위에서의 모습을 생각하면 온몸이 간질거렸다.
“나아쁘은 놈.”
길게 늘이면서 입안으로 욕설을 되씹었다.
“나쁜 놈. 나쁜 새끼. 개자식.”
더 심한, 노골적인 욕을 하고 싶지만 입이 더러워질까 참았다. 그렇게 좋지나 말 것이지. 임신이라는 단어만 아니었다면 아마 해명이라는 명목으로 늘어놓는 말을 들어 주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 날 여자가 울면서 하는 말들로 봐서는 이전에 이미 끝난 사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원했건 원치 않았건 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여자가 존재하는 한, 아무리 좋았던들, 아무리 반했던들 어쩔 것인가. 네 핏줄을 가졌다고 소리를 지르던 여자의 목소리와 눈물로 온통 젖은 그 얼굴이 아직 선했다.
만일 내가 그렇게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오지 않았다면 과연 무슨 변명을 했을까. 원치 않았는데 여자가 혼자 임신했다고 할 셈이었을까? 다시 또 한숨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만약에 그 날, 그 시간에 그 여자가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밤새도록 그 집, 그 침대에 머무르면서 온밤을 하얗게 불태웠을 것이다. 지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밤을 기억하고 있는 몸이 뜨거워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존재를 모른 채 얼마간 인연이 이어질 수도 있었겠지.
어찌 되었건 시작부터 잘못된 관계였다. 애초에 길에서 생판 모르는 남자의 얼굴에 홀려 졸래졸래 따라갔다는 자체가 모든 잘못의 시초였던 것이다.
미쳤지, 미쳤지. 10대에도 안 하던 짓을 이제 와서 어떻게. 단우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이로서 이단우 인생에 인물값, 아니지 꼴값 하는 남자가 하나 더 늘었다. 아, 정말이지 외모 잘난 만큼 인간성도 잘난 남자는 없단 말인가.
“바보 같은 놈. 그 협탁 속의 콘돔은 다 뭐야. 그렇게 콘돔을 가지고 있으면서 임신은 왜 시켜? 등신.”

***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꽃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에서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너무 작아서 꽃송이 하나하나의 모양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소파에 앉아서 창밖으로 꽃비를 감상하던 단우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어서 나부끼는 꽃잎을 하나라도 잡아 볼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사무실의 창은 열리지 않게 되어 있다.
“미안하다. 직원들이 없으니까 뭐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냉장고에 캔커피 있길래 가지고 왔어. 괜찮지?”
“그럼요.”
형운이 캔커피 두 개를 테이블에 놓고 앞자리에 앉았다.
“일요일에 사무실에는 어쩐 일로 나오셨어요?”
“응, 오전 일찍 손님하고 약속이 있어서 나온 건데 오후로 밀렸어. 그래서 너한테 전화한 거야. 일요일에 만나자고 해서 미안하다.”
“뭐, 백수가 일요일이라고 무슨 의미가 있나요?”
단우가 캔커피 뚜껑을 따며 미소 지었다. 형운도 캔을 따서 한 모금을 마시고는 단우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생각 좀 해 봤어?”
“안 그래도 고민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저도 혼자 개업하는 건 너무 부담이 커서 사실상 포기하고 있거든요.”
“그럼 더 고민할 거 뭐 있냐. 여기 네 방도 다 셋업 되어 있어서 넌 들어와서 일 바로 시작하면 돼.”
“사무실이 생각보다 크네요.”
“여기가 원래 변호사 셋이 같이 일하던 데거든. 그래서 변호사 방만 세 개고, 회의실 두 개가 따로 있어.”
“선배 혼자 여기 유지하려면 힘들지 않아요?”
“그러니까 빨리 와서 같이 좀 하자고.”
단우는 대답 대신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일단 너 들어오고 나면 나머지 한 방도 채울 거야. 그쪽은 형사 사건 전문으로 하는 친구로 들일 거니까 셋이 한번 잘 해 보자.”
“형사 전문? 검사 출신이에요?”
“아니. 연수원 나와서 바로 개업한 친구야.”
“그거 너무 위험하지 않아요? 변호사 셋이 다 연수원 출신이면?”
“너나 나는 로펌 경력이 있고, 그 친구는 연수원 출신이긴 해도 형사 쪽으로는 탁월하거든. 시시껄렁한 검사 출신보다 나으면 낫지 못하진 않아. 형사 전문 하나, 가사 전문 하나, 내가 민사랑 행정 쪽 맡고. 우리 충분히 승산 있지 않겠냐?”
사실 단우는 마음이 거의 기울었다. 그저 대답을 하기 전 마지막 망설임의 단계에 있는 것이다.
“이단우. 너도 알겠지만 내가 동업자로서는 나쁘지 않아. 어차피 네가 혼자 개업할지, 남이랑 같이 할지를 망설이는 게 아니라면 나랑 같이 일해 봐도 후회는 안 할 거야.”
변호사라는 직업에 비해 조금은 가벼운 성격에 나이가 더 많은데도 그다지 의지가 되지는 않는 선배라고 생각하지만 이럴 때 보면 또 달라 보인다. 빙긋이 웃으며 자분자분 말하는 형운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사인하고 여기서 일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끈 들었다.
“뭐…… 그럼 그럴까요?”
“그렇지! 잘 생각했어. 언제부터 출근할래? 내일?”
“내일이요?”
“월요일이잖아. 내일부터 출근해. 그동안 많이 놀았는데 더 쉴 필요 있어?”
“일주일만 주세요. 백수도 정리할 게 있어요.”
“알았어. 그럼 그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는 거다? 그렇게 알고 준비할 거야?”
“네.”
단우는 지금 앉아 있는 사무실을 한 번 슥 눈으로 다시 훑었다.
“이 방은 지금 비어 있는 거죠?”
“응. 왜? 이 방이 맘에 들어? 여기 네가 쓸래?”
“네.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이 좋아서요.”
“그래, 그래.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 해.”
싱글벙글하며 커피를 들이켠 형운이 오늘 단우를 일요일임에도 불러낸 본론이나 다름없는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단우야.”
“네.”
“지난번에 네가 깬 소개팅 약속 말이야.”
단우의 얼굴에 난감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그땐 정말 죄송했어요. 많이 곤란했죠?”
“뭐. 그럴 만한 일이 있었으니까 네가 그랬겠지.”
“네. 좀…….”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며 단우는 형운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할 거 없어. 다시 약속 지켜 주면 되지, 뭐. 지난번에는 내가 얘기 잘 해 뒀거든.”
아, 정말.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물론 약속을 그렇게 깬 것은 정말 미안한 노릇이지만 그렇게 깨진 소개팅을 다시 하라는 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죄송하지만 애초에 전 그 자리 나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물론 그래서 그렇게 매너 없이 깬 건 아니고 이유가 있긴 했지만요. 기왕 그렇게 된 거 그냥 없던 일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형운이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야. 약속이라는 게 한 번 못 지켰으면 다음에라도 지켜 줘야지. 내가 그 날, 상대편 달래느라고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아? 이러면 이 변호사 너뿐만 아니라 내 얼굴도 엉망이 되는 거라고. 그러지 말고 해 주기로 한 거, 눈 딱 감고 한 번만 나가 줘. 내가 이번 주말로 후딱 약속 잡을게.”
이 사람이 이렇게 집요한 성격이었나. 단우는 한숨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 죄가 있으니 더 이상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그래. 말마따나 눈 딱 감고 한 번 해 보자.
“그럼 시간 정하셔서 연락 주세요. 그런데요, 선배. 정말 마지막이에요. 저, 이런 자리 정말 싫어하거든요.”
“알았어, 알았어. 고마워.”
끝내 내키지 않아 하는 단우를 배웅하고 돌아온 형운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고 민혁의 번호를 눌렀다.
― 왜.
퉁명스러운 대답에 발끈했지만 꾹 참았다.
“이번 주말에 지난번에 깨진 약속 다시 잡았다.”
민혁은 대답이 없었다.
“듣고 있냐?”
― 그거, 그냥 취소하면 안 되나?
이것들이 진짜. 둘 다 약속 시간 10분도 안 남겨 놓고 문자로 못 나간다 통보하는 개매너를 보여 놓고 어떻게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수 있나.
“너, 남자 놈이 여자한테 그런 짓을 해놓고 뻔뻔하게 그런 말이 나오냐? 그것도 네가 먼저 만나게 해 달라고 해서 기껏 잡은 약속이었는데. 웃기지 말고 나가서 잘하고 와, 인마!”
민혁이 한숨을 푹푹 쉬더니 한참 만에 약속 시간과 장소를 문자로 알려 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이고, 속이 다 시원하다. 그날 맘 졸인 생각을 하면 이렇게 곱게 끝낼 것이 아니라 둘을 더 들들 볶아야 하겠지만 형운의 캐릭터로는 오민혁이나 이단우를 상대하기 버겁다.
형운에게는 혼자만 가지고 있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이 두 남녀의 만남에서 부디 스파크가 팍팍 튀어야 할 텐데. 그래서 비어 있는 두 방에 오민혁 변호사와 이단우 변호사의 명패를 달고 두 어깨 든든하게 이 회사를 꾸려 나가는 것이다.
혹시 아나. 둘이 그렇게 시작해서 진짜 연애라도 할지.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둘을 연결시켜 준 중매쟁이로 뻣뻣하기 그지없는 그 둘에게 큰소리도 땅땅 쳐 볼 수 있을 텐데. 형운은 혼자 헛물을 켜며 히죽거리고 웃었다.

***

규혁은 생각보다 깊이 숨어 버린 모양이었다. 갈 만한 곳을 다 찔러 봤지만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규혁이 처음 집에서 나갈 때 사용한 콜밴 운전사는 시외버스 정류장에 내려 주었다고 했지만 휠체어를 타지 않고는 거동이 불편한 규혁이 버스를 타고 움직였을 리 만무했다.
퇴원을 해서 집으로 돌아온 연경이 하루하루 말라 가는 걸 보고 속이 타는 어머니는 매일 민혁에게 어떻게든 형을 찾아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퉁명스럽게 거절했겠지만 아기를 가진 연경을 생각하면 민혁도 그럴 수는 없었다.
낮에는 일이, 업무 후에는 규혁을 찾는 일이 적당히 분배되어 머릿속을 차지해 준 덕분에 잠깐씩 이단우를 잊을 수도 있었다.
달칵.
드레스룸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 여느 때처럼 한눈으로 셔츠와 슈트를 매치하며 훑어봤다. 맨 앞쪽에 걸린 네이비색 슈트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 앞으로 걸어간 민혁이 손을 들어 차르르 흐르는 슈트 표면을 가만히 쓸어 봤다. 그 날 비를 많이도 맞았던 옷은 말끔하게 드라이를 마치고 다시 제자리에 걸려 있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그 옷을 한참 보다가 시선을 돌려 진회색 재킷을 집어 들었다. 아주 옅은 보랏빛이 도는 드레스 셔츠에 진한 보라색의 타이까지 꺼내 들고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별생각 없이 침대 위에 들고 나온 옷을 툭툭 던지다가 다시 시선이 멎었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이불 위로 그 날 밤 그 여자의 잔상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던 민혁이 피식 웃으며 셔츠를 집어 들었다.
“너, 이번에도 실수하면 진짜 가만히 안 둘 줄 알아. 돈 200만 원이 문제가 아니라 이건 남자 위신이 달린 문제라고. 알았어?”
어울리지도 않게 힘을 주고 겁박을 하는 형운은 두렵기는커녕 우스웠지만 일방적으로 약속을 깼던 여자에게는 미안함 마음이 있었다. 잊고 있었던 노란 시폰 원피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후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마음으로 누굴 만나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저녁만은 최선을 다해 여자를 상대할 것이다. 이런 비장한 마음으로 여자를 만나 본 것도 처음이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민혁이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고 넥타이 매듭을 고친 후에 즐겨 쓰는 향수에 습관적으로 손을 뻗었다. 향수병을 쥔 손을 손목으로 가지고 가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내려놓았다.
“너무 완벽한 것도 책임지지 못할 여자에게 예의가 아니지.”
거만한 표정으로 거울에 대고 속삭인 후에 평소의 냉소적인 표정으로 돌아가 먼지 하나 없이 닦인 구두에 발을 넣고 집을 나서려는 민혁을 주머니 속의 전화가 몸을 떨어 대며 붙들었다. 성가신 표정으로 전화기를 꺼내 확인한 민혁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망설임 없이 전화기를 귀로 가지고 갔다.
“안 죽고 살아 있었나 보지.”
싸늘하기 그지없는 어투만 들으면 전화의 발신인이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형이라는 걸 짐작하기는 쉽지 않을 일이었다.

***

“단우야.”
유리벽 건너편으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단우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수형복 차림의 남자가 접견실 안으로 들어서며 밝게 웃어 보였다.
“오빠.”
단우도 마주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단우가 있는 곳은 한 지방 교도소의 접견실이다. 삭막한 분위기의 작은 공간은 그나마도 투명한 유리벽으로 중간이 막혀 있다.
단우와 유리벽을 사이에 놓고 애틋하게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은 단우의 오빠 강욱이었다. 강욱의 뒤로 교도관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단우의 눈이 카운트를 시작하는 시계를 원망의 눈으로 바라봤다.
“뭐 하러 또 왔어. 혹시 일 때문에 왔다가 들른 거야?”
단우는 고개를 저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너 혹시 아직도 일 안 해?”
걱정스러운 오빠의 시선에 단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할 곳은 정해졌어. 곧 출근할 거야.”
오빠를 안심시키려고 단우는 더 힘주어 말했다.
“그래? 잘됐네. 어디?”
“예전에 같은 로펌에서 일했던 선배 변호사가 개업을 했거든. 고맙게도 같이 일하자고 말해 줘서 그러기로 했어.”
“해야지. 어렵게 공부했는데 써먹어야지. 잘됐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강욱의 얼굴을 보며 단우는 슬펐다.
공부. 그래, 공부. 우리 오빠가 정말 잘했지, 공부. 그 잘했던 공부, 그 많이 한 공부 써먹지도 못하고 인생을 망쳐 버린 불쌍한 우리 오빠.
“오빠.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음식이 입에 안 맞지?”
“그런 소리 할 시기는 지났지. 이젠 여기 음식도 먹을 만해. 네가 영치금 넉넉히 넣어 줘서 먹고 싶은 것도 다 사 먹고.”
“책 필요한 건 없어?”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괜찮아.”
애써 심상하게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주워섬기던 단우의 눈빛이 애잔하게 변했다.
“오빠.”
“응.”
“조금만 고생해. 응?”
늘 하는 단우의 말, 그리고 늘 같은 강욱의 웃음.
“그래, 알았어.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너나 잘 지내.”
“오빠가 무슨 내 걱정이야.”
“단우야.”
“응.”
“어머니는 찾아가 봤니?”
단우가 얼굴 전체를 찡그렸다. 예쁜 동생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며 강욱은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면 동생이 이렇게 반응할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이야기다.
“안 갈 거라고 했잖아.”
“단우야.”
“오빠 참 질기다. 그 사람 이야기 꺼낼 때마다 내가 그렇게나 질색을 하는데도 포기 안 하는 거 보면. 난 안 가. 그러니까 이 귀한 시간에 제발 그 얘기 좀 하지 마.”
강욱이 벽 앞으로 바짝 나가왔다.
“오빠 대신이라고 생각해. 응? 오빠 대신 한 번만 찾아가 봐. 어떻게 사는지, 괜찮은지 그냥 그것만 챙겨 봐. 더 바라지도 않아. 더할 것도 없어. 오빠 부탁이야, 단우야.”
조르는 건 늘 단우가 하는 짓이었다. 오밤중에 화장실에 혼자 가기 무서우니 같이 가자고 조르고, 학교에 같이 등교하면 교실까지 데려다 달라고 조르고, 좀 더 커서는 밤에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길이 무서우니 늘 데리러 와 달라고 졸랐다. 겨우 두 살 위일 뿐이지만 아빠 같은, 엄마 같은 오빠였는데. 공부 잘하고 잘생긴 내 오빠.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던 오빠. 그런 내 오빠.
“싫어.”
단호한 단우의 대답에 강욱이 한숨을 내쉬었다. 단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싫어. 절대 안 할 거야. 아무리 오빠가 애원한다고 해도 난 그 사람들 절대 찾아가지 않을 거야.
“그래. 싫으면 좀 더 기다리자, 네 마음이 용납할 수 있을 때까지. 오빠가 할 일을 너한테 자꾸 강요해서 미안하다.”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단우는 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단우야. 일 새로 시작하면 열심히 해. 그리고 자주 오지 마. 나야 네 얼굴 봐서 좋지만 너 여기 왔다 가면 괜히 심란해하는 거 오빠 잘 알아. 그냥 가끔, 혹시 일 때문에 오는 길 있거나 아니면 명절 때나 한 번씩 와. 알았지?”
“내 맘대로 할 거야. 매주 오고 싶으면 매주 올 거니까 해라 마라 하지 마.”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동생을 보고 강욱이 허허 웃는다.
“자식.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는 성질머리는 여전하지.”
“누구 동생인데.”
강욱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모처럼 듣는 오빠의 웃음소리에 단우도 그만 웃고 말았다.
“강 변호사님이랑 이준우 씨도 잘 계시고?”
“응.”
“그래도 그분들 덕분에 네가 덜 외롭구나.”
한주와 준우. 오빠의 말 덕분에 갑자기 떠오른 그들의 얼굴이 한없이 가라앉고 있던 단우의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들이 들을 리 없지만 단우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귀는 사람은 없고?”
단우가 눈을 흘겼다.
“별소리를 다 한다.”
“그게 왜 별소리야. 내 하나뿐인 여동생, 어릴 때부터 남자라는 놈들은 죄다 침을 흘렸는데 지금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 아냐.”
얼굴이 어두워진 동생의 기분을 바꿔 주고 싶었는지 강욱이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빠의 의도를 눈치챈 단우가 장단을 맞췄다.
“오빠가 잘 모르는구나. 나 정도 미모 레벨이면 아무나 함부로 못 붙어. 내가 까다롭기는 또 좀 까다로워. 내 눈에 차려면 보통 조건으로 안 된다고. 일단 하이힐 신은 내 키보다 커야지, 내 미모에 눌리지 않으려면 그만큼 잘생겨야지, 털털한 게 남자 매력이라면서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는 사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 알지? 아무리 남자래도 자기 몸 하나 정도는 꾸밀 줄 알아야 한다고. 가볍고 말 많은 남자 딱 질색이고, 그렇다고 입 꾹 다물고 있는 무뚝뚝한 남자도 밥맛이고…….”
농담처럼 강욱에게 종알거리며 늘어놓다가 단우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이미지가 형상화되어서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삐딱하게 서서 자신을 향해 씨익 웃고 있는 그 남자. 오민혁.
“그렇게 네 입맛에 딱 맞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그런 놈은 애들 보는 순정 만화책에나 나오는 거 아니야?”
단우는 피식 웃었다. 오빠, 순정 만화 주인공들은 그런 야한 짓 안 할걸.
“그나저나 옷 취향이 바뀐 거야? 너답지 않게 너무 얌전한데.”
강욱의 말에 단우는 자기 옷을 내려다봤다. 강욱을 만나고 나면 그 문제의 소개팅이 오늘 저녁 약속에 잡혀 있었다. 처음에는 평소보다 더 화려하고, 더 강한 차림을 할까 생각했지만 형운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트러블은 더 이상 사양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을 바꿨다.
사법시험 면접을 위해 구입했던 무릎길이의 크림색 H라인 스커트와 비슷한 색상의 블라우스를 입고 눈 화장은 생략한 옅은 피부화장만 했다. 혈색이 죽은 지루한 인상을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청순함이 풍기는 차림이었다.
“안 어울리나?”
“아니, 어울려. 무지하게 고상해 보여. 그대로 9시 뉴스 진행해도 되겠는데.”
“어째 놀리는 것 같은데.”
뒤에 앉아 있던 교도관이 시계를 한 번 보고 단우와 눈을 마주쳤다. 짧은 면회 시간이 벌써 다 흘렀다.
“오빠, 몸조심해.”
“너야말로. 아프지 말고.”
“금방 또 올게.”
돌아서서 접견실을 나가는 강욱의 뒷모습을 보다가 단우는 유리벽에 얼굴이 닿을 듯이 다가서며 오빠를 외쳐 불렀다.
“오빠!”
강욱이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반 지났어. 알지? 우리 1년만 참자. 맘 약해지면 안 돼. 내가 하루씩 날짜 세면서 오빠 기다리는 거 알지? 나한테는 오빠밖에 없어, 알지?”
강욱이 슬프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도관의 재촉에 아쉬움이 남는 얼굴로 접견실을 나갔다. 강욱이 나간 문이 닫히자 면회실을 나오는 단우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강욱은 이제 형기를 1년 남겨 두고 있었다. 단우가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을 할 의지를 갖게 된 것도 강욱 때문이다. 강욱이 출감하면 전과자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살 오빠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은 단우밖에 없다.
수형복 차림으로 교도관에게 이끌려 나가던 오빠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단우는 이를 악물었다.

***

위태로운 속도로 차를 달려 민혁이 도착한 곳은 서울 외곽의 펜션이었다. 인기척 없이 조용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린 민혁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펜션 건물을 훑어봤다. 여기 숨어 있었단 말이지.
성큼성큼 건물을 향해 걸어가던 민혁의 걸음이 멎었다. 건물 반대편의 펜션 입구에 규혁이 탄 휠체어가 나타났다. 소리 없이 스르륵 움직이는 휠체어 위에 그렇게 찾아다녔던 형, 규혁이 앉아 있었다.
“빨리 왔네.”
민혁을 발견한 규혁이 비식 웃으며 말을 걸었다. 민혁은 대꾸 없이 팔짱을 끼고 서서 형을 내려다봤다. 꼭 닮은 형제다. 선이 진하고 냉랭하게 생긴 민혁의 얼굴에 비해 규혁은 선이 곱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체구도 작고, 성격도 유순하고 다정스러운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고집 세고 성격 강한 민혁과 대조적인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형과의 비교에 화를 낸 적도 많지만 민혁은 자기에게는 없는 규혁의 장점을 존중했다. 살면서 이번처럼 규혁이 비겁하게 도망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연경이는 다 죽어 가던데 형은 얼굴이 좋네.”
민혁의 빈정거림에도 규혁은 별로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는지 흐릿하게 웃기만 했다. 심통맞게 말하긴 했지만 걱정보다 얼굴이 괜찮아서 민혁은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일단 집에 가서 얘기해.”
민혁이 차 문까지 여는 시늉을 했다. 규혁의 눈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문제가 있으면 연경이랑 마주 앉아서 해결을 하라고.”
“그래. 그래야겠지.”
생각보다 순순히 인정하는 규혁을 보고 민혁은 차 문을 조금 더 열며 고갯짓으로 타겠냐고 물었다.
“저 안에 짐 좀 빼 올래? 방문 열면 큰 가방 하나 있으니까 그것만 가져다 줘.”
“차에 먼저 타고 있어.”
자연스럽게 형의 어깨를 걸어 일으킨 민혁이 조수석 의자로 앉을 수 있게 부축을 해 주었다. 규혁이 자리를 잘 잡고 앉은 것을 확인하고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실은 후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큰 방 한구석에 가방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가방을 뒷좌석에 싣고 운전석에 올라탄 민혁이 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다시 한 번 규혁을 빤히 쳐다봤다.
“왜?”
동생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규혁이 손으로 그쪽 얼굴을 가린다.
“아니다.”
탓하면 뭐하고 비난하면 뭐할까. 민혁은 입을 다물었다. 형의 인생은 민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굴곡들이 있을 텐데 내가 감히 뭐라고 거기에 입을 댈까.
“민혁아.”
차가 출발한 지 한참 만에 규혁이 입을 열었다.
“왜.”
“내가 정말 결혼이라는 걸 하고 아빠가 될 자격이 있을까.”
그런 물음에 다정한 해답을 줄 수 있는 동생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규혁이니 저건 민혁에게 꼭 답을 바란다기보다는 혼잣말 같은 것일 거다. 민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규혁은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를 못 하는 놈이 결혼을 하고, 아내를 만들고, 아이를 낳는다는 건 정말 지독하게 이기적인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연경이 인생을 내가 내 욕심에 망가뜨리는 것 같고.”
“임신까지 시켜 놓고 자신 없다고 내빼는 건 그 여자 인생 망가뜨리는 게 아니고?”
결국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 이내 후회했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치사스러운 변명이다.”
규혁의 절망스러운 대꾸를 들으며 민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걔는 거의 평생을 형 하나 보고 살아온 애야. 아니라고 생각했으면 진즉에 포기를 시켰어야지. 결혼식 날 잡아 놓고 임신까지 하게 하고서야 이게 옳은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거야? 그동안 도대체 뭐 했어? 머리가 놀았어? 35년 중에 32년 동안 연경이가 형 옆에 있었어. 그동안은 연경이 인생에 대한 고민이 안 들었어? 고민을 하려면 좀 빨리 하지, 애 임신시킬 일 하기 전에 하지 그랬냐고! 형, 다리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뇌 쪽에도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속에서 나오는 대로 목소리 높여 내뱉어 놓고 민혁은 입속으로 욕설을 씹으며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이래서 입을 아예 열지 말아야 하는데. 나란 놈은 도대체 어릴 때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입만 열면 이따위 칼날 같은 소리만 내뱉는 건지 어머니한테 한 번 다시 정식으로 물어봐야겠다고 민혁은 자책 대신 되뇌었다.
“네 말이 맞다. 다리에만 장애가 있는 줄 알았는데 머리도 정상이 아닌가 보다.”
규혁의 말에 웃음기가 묻어나 있었다. 마침 빨강색으로 변한 신호등을 보고 브레이크를 밟으며 민혁은 무안한 표정으로 규혁을 돌아봤다. 규혁의 표정은 차에 올라타기 전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형, 욕 들으면 쾌감 느끼는 타입이야?”
미안하다는 말 대신 퉁명스러운 민혁의 타박에 규혁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집에 도착해서 차를 세우고 휠체어를 트렁크에서 꺼낸 민혁이 조수석 문을 열고 규혁에게 팔을 내밀었다.
“아니. 그냥 그거 이리 대 줘.”
휠체어를 가까이 대어 주자 규혁은 휠체어에 팔을 얹고 차에서 몸을 빼기 위해 힘을 주었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겨워 보였지만 지켜보는 민혁도 아무 말 않고 기다렸고, 규혁도 도와 달라는 말 대신 이마에 땀이 송송 배도록 애를 쓰면서 끝내 혼자 힘으로 휠체어로 옮겨 앉았다.
휠체어 바퀴를 굴려 집 대문을 향해 간 규혁이 초인종 아래 규혁을 위해 달아 놓은 별도의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냐고 묻는 목소리 대신 현관문이 요란하게 열리고 대문을 향해 달려 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대문이 열리고 막 울 것 같은 연경의 얼굴이 나타났다.
“너는 임신을 해도 애가 이렇게 칠칠치 못하냐. 임산부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규혁의 등 뒤에서 민혁이 혀를 차자 연경이 있는 대로 눈을 치켜뜨며 민혁을 노려봤다.
“연경아.”
규혁의 다정한 목소리가 연경을 부른다. 민혁을 향해 잔뜩 독기를 품고 있던 연경의 눈이 스르르 풀리며 규혁을 향했다.
“미안해. 오빠가 잘못했어. 나 정신 차렸으니까 이제 너 마음 아프게 안 할게.”
연경이 자리에 선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규혁의 품으로 뛰어들지도 않고, 원망의 말도 없이 그저 서럽게 울기만 했다. 규혁이 연경의 손을 꼭 잡고 손등을 톡톡 두드린다.
“계속 그러고 서 있을 거야? 오빠는 일어서서 너 안아 주지도 못하는데.”
그 말에 연경이 으앙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 규혁의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민혁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서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출발하기 전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 응.
“밖에 형 있어요.”
― ……뭐?
“지금 대문 밖에 연경이랑 형 있다고요. 지금 말고 한 10분 지나도 안 들어오면 나가 보세요.”
― 넌 어딘데?
“가는 길이요.”
― 집까지 와서 들어오지도 않고 간다고?
“큰아들이랑 재회의 감격을 나누시라고 작은아들은 빠져 주는 겁니다. 어머니, 아무리 큰아들 보고 싶어도 일단은 나가지 마시고 좀 두세요.”
― 내가 그렇게 센스 없는 노인네인 줄 알아?
전화 건너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걸 들으며 민혁은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집을 향해 차를 몰던 민혁은 갑자기 뒷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고 몸서리를 쳤다.
“뭐야, 갑자기.”
그리고 5초 후에 이유를 깨달았다.
“에이, 젠장!”
노란 원피스와의 약속 시간이 막 지나고 있었다. 본가에 들렀다가 약속 장소로 향할 작정으로 집을 나설 때 형의 전화를 받은 후로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유턴 금지 지역에서 불법으로 차를 돌려 약속 장소로 향하며 민혁은 전화기를 집어 들고 형운의 번호를 눌렀다.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무래도 노란 원피스와는 악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