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이상한 나라의 조교님 1화
프롤로그
군대란 집단은 어떤 나라의 군대든, 어느 시대와 어느 민족이든, 원래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집단이다. 그렇기에 군대는 인간의 조직 중에서 가장 기강이 세고 상명하복의 경향이 강한 집단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듯이, 가장 경직된 형태를 가진 집단의 기본적 규칙에도 상당한 예외가 있다. ‘당나라 부대’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부대가 당나라 부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선배님들 여기로 집합하십니다!”
현재 예비군 훈련장의 조교로 복무 중인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막 상병을 달고 이제 좀 군 생활이 피나 싶었더니, 신이 그에게 갑자기 새로운 시련을 내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병을 달았다는 것은 이제 군에 들어와서 어려운 시절 다 보내고 꽃다운 시절이 시작된다는 말과 동일하다. 아니, 신병 교육 열심히 시키고 있는데 갑자기 예비군 동원 훈련 조교라니! 이게 말이야, 빵구야!
유진의 눈에 핏발이 섰다. 자신이 오늘 갈궈야 할 대상들이 어리바리 신병들이면 차라리 좀 낫다. 바로 쌍욕을 엄청난 데시벨로 내뱉으면 어버버거리더라도 말은 들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인간들은 전부 상병에게는 하늘만큼 먼, 전역한 민간인이다. 기수도 까마득하고 계급도 자신보다 높은 데다가, 무엇보다 군 생활을 빠듯하게 꿰고 있으며 요령에는 도가 튼 인간들인 것이다.
“슨배님들! 집합하십니다.”
선배님들이라 불러야 하지만 이빨을 갈면서 말하니 절로 발음이 왜곡된다. 참을 인을 또다시 발휘하여 예비역들의 집합을 시도했지만 이가 악물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그런 기분을 알아채는 예비역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핸드폰을 하든가, 졸린 눈으로 어슬렁거리며 유진의 앞을 어기적댈 뿐이다.
그들의 마음을 유진이라고 전혀 모르진 않는다. 그렇게 뺑이를 치면서 제대해 놨더니 이 망할 나라는 예비군 훈련이라면서 그 지긋지긋한 군복을 입고 이전의 악몽을 다시금 재연하라 주기적으로 명령하는 게 아닌가.
이런 시간 따윈 억지로 때울 수만 있으면 때우고 넘어가는 것이 상책이다. 거꾸로 가기만 해도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가는 법이니까.
“아이고, 우리 후배님이 오늘 음―청 고생한다 아이가. 다들 좀 가 주자.”
유진이 몇 번이고 악을 쓰자 예비군들 중에서 그마나 성격 좋고 사회생활을 한 축들이 대충 눈치를 까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것만 해도 상당히 용하긴 하지만 아직 까마득하게 멀었다.
“점심시간 아직도 멀었나. 아이고, 배가 출출하니 더 움직이기 싫네.”
“오랜만에 짬을 묵을라 하니, 아오, 진짜 속이 뒤집어질라 칸다.”
“짬도 추억으로 묵으면 물만 하다 아니가.”
부산에서 온 것 같은 두 사람이 넉살 좋은 목소리로 사담을 나누자, 예비역의 반은 그 말에 호응하고 반은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저런 인간들을 통솔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유진의 속에서 다시 한 번 천불이 올라왔다. 저런 오합지졸이 과연 군의 모든 훈련을 거치고 제대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다.
‘아오, 진짜! 이대로 수류탄 하나 까서 그냥 콱 던져 버려?’
입 밖으로 감히 꺼내지 못하는 소리지만 이런 상상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 예비군 조교와 예비군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존재했다. 그 벽은 통곡의 벽보다 더 높고 안드로메다은하보다 더 넓지만, 그래도 명령은 추상같고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가야 했다.
오전의 주특기 훈련은 혼신의 힘을 다한 후에야 끝났다. 물론 예비역 선배님들은 대답만 네네 하며 그냥 어슬렁거리거나 퍼져 있을 뿐이고, 훈련에는 관심이 없었다. 조교인 유진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FM대로 고생해야 했다. 형식상으로 조금 네네 할 뿐이지, 유진의 현 상태에 관심이 있는 선배님들은 하나도 없다.
유진은 분노 속에서 참을 인을 그리며 겨우 오전 시간을 버텨 나갔다.
그래도 시간 되어서 점심 먹으러 잘 와 주는 것은 좀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군대 짬밥이 먹기 짜증난다며 도시락을 시켜 먹거나, 배달시켜 먹으면 안 되냐는 맛 간 중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훈련에 그런 인간들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예비역들보다 서둘러 와서 상황을 살피러 온 유진은 재빨리 밥 먹으러 와서 줄을 서는 예비역 선배님들을 매의 눈으로 관찰했다. 가끔 점심때 낮잠이라도 잠시 잔다 해 놓고 짱 박히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군 생활과 사회생활까지 두루 겸한 예비역들의 짱 박히는 능력은 가히 스텔스기를 방불케 한다. 짱 박히기 전에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니면 겨우 상병인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찾아낼 수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짬을 끝낸 예비역 선배님 중에 한 사람의 눈치가 이상하다. 그의 시선이 여러 간부들을 차례로 훑으면서 출입구를 힐끔힐끔 살피는 것이 분명 사고를 칠 폼이다. 유진은 그가 본격적으로 짱 박히기 위해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는 것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예비역 선배님이 행동을 개시했다.
예비군 하나 짱 박혀서 나타나지 않는 걸 간부들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상병인유진은 그럴 군번이 아니었다. 휘하 예비역들을 통솔해야 하는 입장인지라 짱 박히기 전에 얼른 주의를 주는 것이 중요했다.
‘아오, 진짜 신병만 되었어도 저 엿 같은 인간을 반쯤 죽여 놓는 건데…….’
유진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군대는 계급이 깡패다. 상대는 신입 중위 정도는 완전 애처럼 갖고 놀면서 노가리를 까는 예비역 병장으로 제대한 일반인이다. 말 그대로 베테랑이다.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단순하게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다.
휘익!
아까 동원 훈련할 때는 굼벵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느렸던 예비역 선배님은 초특급 훈련을 통과한 특수 부대 못지않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이 누구던가. 모든 신병의 두려움을 산 독사 조교가 아니던가. 훈련에 이미 익숙해진 그의 다리는 알아서 최고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가 예비역 선배의 뒤를 바짝 쫓을 때였다. 독을 품고 추적하고 있기 때문인지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운 상태다. 조금만 더 빨리 달려간다면 저 선배님의 뒤통수를 갈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갈긴다는 것은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응?”
살기등등하던 유진의 얼굴에 황당한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의 앞에서 달리던 선배님의 모습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완전히, 완벽하게!
“어, 말도 안 돼! 어디로 간 거야?”
낭패 어린 표정을 한 유진이 아까까지 예비역 선배님이 있던 곳으로 급히 뛰어갔다. 하지만 선배님은 무슨 스텔스 기능을 장착한 모양인지 흔적조차 없다.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오, 쓰바!”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이제껏 계급에 밀려 제대로 쓰지 못했던 쌍욕이 혼자가 되면서 저절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1장. 여기가 대체 어디냐고! (1)
-1-
군에서 상병 딱지를 달았다는 것은 이제 군 생활에 대해 대부분을 꿰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강하 훈련 정도는 밥 먹듯이 했다는 것과 동일하다. 유진은 서둘러 땅에 착지할 때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낙법 자세를 취했다. 이대로 떨어졌다간 치명상을 입을 것이 눈에 불 보듯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상당히 이상하다.
‘왜 자유 낙하의 느낌이 안 드는 거지?’
자신의 생각으론 이 깊은 곳은 분명 평소에 잘 안 쓰는 방공호가 분명할 것이다. 자신이 있는 군부대에는 간혹 이런 이름 없는 방공호가 나타나서 낙오자를 만들곤 했으니까.
위에서 그렇게 주의를 줌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이런 곳에 빠져서 다리를 다치고 군 병원으로 이송되는 머저리가 몇 명씩 나오곤 했다. 때론 일부러 뛰어드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다.
그나마 여기 군부대 내 사정에 속속들이 밝은 자신이 잘 모르는 방공호라면 아마도 6.25때 만들어졌다가 제대로 관리나 폐기가 안 된 곳이리라. 군대는 언제나 예산이 문제인 집단이라, 2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군이 쓰던 수통을 역사와 전통이란 이름으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허, 거참 희한하네.”
원래 자유 낙하하는 물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도를 받는 법이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떨어진 가벼운 물체가 지상에 도달하기 직전에는 엄청난 흉기가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갈수록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하, 수상하다. 유진은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팔짱을 꼈다. 자신이 떨어지고 있는 곳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분명 이런 상황을 어디서 본 적이 있긴 한데 당최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야동에서 봤던가? 아닌데……. 그럼 애니인가?”
군에 들어오기 전에는 나름 여러 방면(?)으로 문화생활을 충분히 향유했던 유진이다. 물론 그 문화생활이 남들에게 취미라고 자랑할 만한 고급문화는 아니었지만 나름 최고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의 용돈과 알바비를 톡톡히 까먹는 정도는 되었다.
“에이, 썅. 몰라.”
군대에 들어오기 전에는 유진도 상당히 촉이 예민하고 섬세한 대학생이었다. 또래보다 사회의 이슈에도 밝았고 유행에도 민감한 편이었다. 하지만 군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런 대학생 유진은 사라지고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인 김유진만 남았다. 몸에 옷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에 몸을 맞추는 상황이 되는 상황에 익숙해진 지도 옛날이다.
“아, 참! 그 선배 놈은 어찌 되었지?”
그제야 예비역 선배가 머리에 떠오른 유진은 슬슬 몸을 돌려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이제 떨어지는 것에도 조금 익숙해져서 이런 것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하 훈련을 하다 보면 먼저 떨어지는 인간들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잘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래로 몸을 숙이자 서서히 아래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밝아졌냐 하면 자신이 떨어지는 옆으로 관물대를 비롯해 이상한 형태의 정리함들이 있다는 것이 서서히 눈에 들어올 정도다. 그리고 관물대에서 익숙한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심한데 이거나 좀 봐야겠다.”
그는 바로 손을 뻗어 관물대에 있는 잡지를 하나 꺼냈다. 그것은 휴가 나온 군인들이 필수적으로 사 온다던 모 잡지로, 어리바리한 신참이 가끔 커피로 착각하여 사 왔다가 고참들에게 혼쭐이 난다는 바로 그 물건이었다.
“룰루루루.”
표지에 건강한 체격의 남자가 나오는 것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끔 관물대 검열이 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이런 잡지 표지에는 영화 잡지 표지를 덧붙이는 작업을 해 놓는 것이 좋다.
센스 있고 선임의 귀염을 받는 후임이라면 이 정도의 작업은 알아서 해 놓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잡지를 편 유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오, 시바! 이게 뭐야!”
분명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몸매와 얼굴이 착한 여자들이 페이지를 수놓아야 했다. 입었는지 벗었는지 알 수 없는 옷차림과 그녀들의 음란하면서도 아슬아슬한 포즈, 도발적이거나 풀어진 눈매가 이 잡지의 존재 이유여야 했다.
그런데 유진이 펼친 잡지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페이지마다 현란하게 수놓고 있는 것은 떡대의 남자들이 거의 중요 부위만 가린 채로 서로 껴안고 있는 장면이거나, 털 많은 남자들의 아슬아슬한 장면들뿐이었던 것이다. 유진의 표정이 마구 일그러졌다.
“아오, 시바! 좆같네. 뭐 이런 개 같은 잡지가 있냐. 완전히 눈 배렸잖아. 아오, 시바! 내 눈!”
유진은 이제 거칠 것이 없이 욕을 내뱉었다. 원래도 그리 말버릇이 아름다운 편이 아니었지만 군에 와서 월등하게 는 것이 바로 각종 지역에서 수집한 욕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이 미친놈의 잡지를 발로 밟아서 문대고 싶지만 지금은 떨어지는 와중이다.
유진은 잡지를 아래로 집어 던지려다가 그만 참았다. 지금 자신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잘못 잡지를 던졌다가 자신이 이 좆같은 잡지에 맞을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재수 옴 붙은 것 같은 잡지다.
게다가 저 아래 예비군 선배 놈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그 선배 놈이 이걸 맞고 계급으로 자신을 갈군다면…….
다른 판단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자신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장교들까지도 능글거리며 갈구는 것이 바로 제대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예비역이란 종족이다. 유진은 잡지를 돌돌 말아서 아래로 층층이 이어지는 관물대 안으로 짱 박아 두었다. 내려가는 속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것도 가능했다.
“어?”
순간 유진의 눈이 깜빡였다. 분명 저 관물대 안에는 사람이 들어갈 공간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 것이다. 그것도 기분 나쁠 정도로 아주 음험한 시선이었다. 유진은 재빨리 고개를 위로 돌렸다. 자신이 본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관물대는 이미 지나가 버린 뒤다.
“내가 잘못 봤나? 아이 썅! 몰라.”
그나저나 지금 자신이 이런 식으로 방공호 안으로 떨어지고 있으니 오늘 훈련은 이미 물 건너 갔다. 남은 예비역 선배 놈들은 옳다구나 하고 차나 구석의 매점에 짱 박혀서 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이렇게 황금 같은 오후 훈련 시간에 토끼는 선배 놈 하나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났는데 말이지.
“그나저나 빨리 안 돌아가면 이거 탈영으로 처리되는 거 아냐?”
탈영이란 단어가 머리에 떠오르자 순간 유진의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졌다. 부모님께서 입대하는 자신에게 신신당부하시던 것 중 하나가 바로 탈영에 관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성질이 개차반인 데다가 한 다혈질 하는 유진이라 그랬던 것이리라.
군대에서 탈영은 상당히 무거운 죄질로 다루어진다. 하지만 한창 때의 젊은 남자들을 왕창 한곳에 모아 놓으면 꼭 한 번은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는 것도 바로 탈영이다.
유진은 남들의 괴롭힘을 받아서 홧김에 탈영하느니 차라리 남을 괴롭히고 만다는 주의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탈영하게 되다니, 역시 인간의 앞일은 알 수가 없는 법이다.
“에라이, 될 대로 되라지.”
중요한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은 제쳐 두고 말이다. 일단 탈영이라 하더라도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상당히 정상 참작이 된다. 군대도 인간이 모인 집단이니까.
그의 머릿속에서 일단 우선순위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할 것은 일단 자신의 이 일탈의 원인이 된 저 예비역 선배 놈을 잡는 것이다. 일단 잡아서 구워삶든 찌든 해서 입을 맞춰 두고 난 뒤에 돌아가면 어찌어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몸과의 대화가 먼저지. 흐흐흐”
아무리 예비역 선배 놈이 요령을 잘 알고 있다고 해도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다. 더 젊고 군기가 꽉 잡혀 있는 자신을 저 허랑방탕한 사회생활을 한 민간인 따위가 감히 이길 수가 없는 법이다. 일단 말로 접근했다가 영 안 되면 몸으로 대화를 할 생각에 유진의 얼굴이 확 펴졌다.
“어어어!”
그 순간이었다.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까 먼저 사라졌던 예비역 선배 놈의 목소리가 분명해 보인다. 분명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이리라.
‘드디어 이 길의 끝인가 보군.’
그 끝에 과연 에어 매트리스가 있을지, 아니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이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긴장감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속도라면 그렇게 크게 다치지는 않을 테지만 또 앞일은 알 수 없다.
유진은 자연스럽게 낙법 자세를 취했다. 군 생활을 하면서, 특히 조교로 있으면서 각 잡힌 생활을 한 탓이다. 비록 아래가 콘크리트라고 하더라도 중력 가속도도 없는 편이니까 낙법 자세를 잘 활용하면 그다지 많이 안 다치고 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중력 가속도도 없는 편이니까. 그런데 그런 그의 눈앞에 하얀 침대가 나타났다.
“엉?”
너무 의외의 상황에 유진의 입이 절로 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탄력 있는 침대 속으로 폭삭 휩싸였다.
-2-
당황의 시간은 상당히 짧았다. 이제 갓 상병을 달아 아직 군기가 바짝 들어 있던 유진은 서둘러 낙법으로 마무리한 후에 훈련받은 대로 침대에서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경계했다.
아니, 분명 방공호로 떨어졌는데 웬 침대? 쿠션 좋은 침대의 흔들림 위에서도 유진은 아직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찰싹!
유진은 자신의 손을 들어 스스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 얼마나 손힘이 셌던지 눈에 별이 번쩍인다. 순간 얼굴에 시뻘건 손자국이 났다. 원래부터 잘 타지 않는 하얀 얼굴이라 손자국이 더욱 크게 표가 나는 것 같다.
“아오, 내 손이지만 맵기는 뒤지게 맵네.”
얼굴에 달아오르는 열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해 봤지만 열은 쉬이 식지 않는다. 유진은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떨어진 곳의 형태는 상당히 낯이 익었다. 그것은 마치…….
“뭐야? 이거 러브호텔 같은데?”
그랬다. 커다란 원형 침대와 거울이 달린 벽, 작은 협탁이 하나 있을 뿐, 다른 가구라곤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여기에 큰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 웬수 같은 예비역 선배 놈이 그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 썅.”
유진은 버릇처럼 욕을 내뱉으며 침대 밖으로 나갔다. 그는 유격 훈련에서 배운 그대로 방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런데 정말이지 이상하게도 출입구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유진이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한번 빠지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파리지옥도 아니고, 밖으로 전혀 나갈 수 없는 곳이라니!
“이 개자식은 도대체 어디로 갔냐고. 아오, 시바! 미치겠네.”
이제 하늘 같은 예비역 선배님에서 선배 놈을 거쳐 개자식으로 하락한 인간은 이제 유진의 눈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명줄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분명히 이곳으로 떨어진 기색은 있는데 사라지다니…… 환장할 일이다.
유진은 일단 침대 밖의 사방을 철저히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없는 공간이니 뒤지다 보면 분명히 출구가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입구의 존재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마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선배 놈처럼 말이다.
“이거 완전 좆 됐네. 이제 어쩌지?”
황당한 유진은 원형 침대 위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이제껏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비일상적이란 건 알겠다. 문제는 탈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눈이 자신이 내려온 끝없는 천장을 향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저 위로 기어 올라가는 것은 솔직히 무리다. 문이나 창문 비슷한 곳만 있어도 빠져나갈 수 있으련만 이곳은 완벽한 밀실 그 자체였다.
“응?”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그의 눈에 문득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요상한 핑크핑크의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약병이었다. 즉시 그는 약병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깨알같이 표시하고선 안 중요한 상표는 크게 표시하는 일반 약병과 달리 그 핑크핑크한 병에는 별 특이한 표시가 없었다. 단지 하나의 라벨만이 있었을 뿐이다.
-날 끝까지 전부 마셔 줘잉.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라벨을 읽던 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러브호텔에 비치된 수상한 색의 약이다. 어쩌면 동물성 최음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니면 강력한 수면제라든가.
“절대 안 먹어. 누가 먹는가 보라지.”
군인다운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그가 협탁 위에 약병을 놔두었다. 가끔 귤 농사가 대풍이 되면 귤이, 조류 독감으로 전국에 비상이 걸리면 닭이, 구제역으로 육류의 가격이 하락하면 육류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군대이기 때문이다.
국방을 거의 무보수로 지키는 젊은이들에게 나라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먹여도 시원찮을 판이다. 그런데 보통은커녕, 특별한 요인으로 급히 처리해야 할 식재료 처리반이 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분이 나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유통 기한 하루 앞둔 음식을 급히 처분하라며 인수대로 배당할 때가 제일 짱 난다.
“유통 기한도 없는 약 따위 누가 먹을까 보냐.”
그가 이렇게 말하며 이를 뽀드득 갈자, 갑자기 약의 라벨에 적힌 글에 변화가 생겼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든 유진은 다시금 약병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위에 적혀 있는 내용이 바뀌어 있었다.
-밤일에 좋은 약품. 정말 효능이 끝내줍니다♡♡♡♡♡
이러면 상황이 또 다르다. 유진의 마음속에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물론 유통 기한도 적혀 있지 않은 수상한 약물 따위는 그렇게 관심이 없지만, 정력에 좋다는 음식이라면 얼마간의 위험을 무릅쓸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도 남자가 아닌가.
프롤로그
군대란 집단은 어떤 나라의 군대든, 어느 시대와 어느 민족이든, 원래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집단이다. 그렇기에 군대는 인간의 조직 중에서 가장 기강이 세고 상명하복의 경향이 강한 집단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듯이, 가장 경직된 형태를 가진 집단의 기본적 규칙에도 상당한 예외가 있다. ‘당나라 부대’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부대가 당나라 부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선배님들 여기로 집합하십니다!”
현재 예비군 훈련장의 조교로 복무 중인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막 상병을 달고 이제 좀 군 생활이 피나 싶었더니, 신이 그에게 갑자기 새로운 시련을 내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병을 달았다는 것은 이제 군에 들어와서 어려운 시절 다 보내고 꽃다운 시절이 시작된다는 말과 동일하다. 아니, 신병 교육 열심히 시키고 있는데 갑자기 예비군 동원 훈련 조교라니! 이게 말이야, 빵구야!
유진의 눈에 핏발이 섰다. 자신이 오늘 갈궈야 할 대상들이 어리바리 신병들이면 차라리 좀 낫다. 바로 쌍욕을 엄청난 데시벨로 내뱉으면 어버버거리더라도 말은 들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인간들은 전부 상병에게는 하늘만큼 먼, 전역한 민간인이다. 기수도 까마득하고 계급도 자신보다 높은 데다가, 무엇보다 군 생활을 빠듯하게 꿰고 있으며 요령에는 도가 튼 인간들인 것이다.
“슨배님들! 집합하십니다.”
선배님들이라 불러야 하지만 이빨을 갈면서 말하니 절로 발음이 왜곡된다. 참을 인을 또다시 발휘하여 예비역들의 집합을 시도했지만 이가 악물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그런 기분을 알아채는 예비역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핸드폰을 하든가, 졸린 눈으로 어슬렁거리며 유진의 앞을 어기적댈 뿐이다.
그들의 마음을 유진이라고 전혀 모르진 않는다. 그렇게 뺑이를 치면서 제대해 놨더니 이 망할 나라는 예비군 훈련이라면서 그 지긋지긋한 군복을 입고 이전의 악몽을 다시금 재연하라 주기적으로 명령하는 게 아닌가.
이런 시간 따윈 억지로 때울 수만 있으면 때우고 넘어가는 것이 상책이다. 거꾸로 가기만 해도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가는 법이니까.
“아이고, 우리 후배님이 오늘 음―청 고생한다 아이가. 다들 좀 가 주자.”
유진이 몇 번이고 악을 쓰자 예비군들 중에서 그마나 성격 좋고 사회생활을 한 축들이 대충 눈치를 까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것만 해도 상당히 용하긴 하지만 아직 까마득하게 멀었다.
“점심시간 아직도 멀었나. 아이고, 배가 출출하니 더 움직이기 싫네.”
“오랜만에 짬을 묵을라 하니, 아오, 진짜 속이 뒤집어질라 칸다.”
“짬도 추억으로 묵으면 물만 하다 아니가.”
부산에서 온 것 같은 두 사람이 넉살 좋은 목소리로 사담을 나누자, 예비역의 반은 그 말에 호응하고 반은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저런 인간들을 통솔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유진의 속에서 다시 한 번 천불이 올라왔다. 저런 오합지졸이 과연 군의 모든 훈련을 거치고 제대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다.
‘아오, 진짜! 이대로 수류탄 하나 까서 그냥 콱 던져 버려?’
입 밖으로 감히 꺼내지 못하는 소리지만 이런 상상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 예비군 조교와 예비군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존재했다. 그 벽은 통곡의 벽보다 더 높고 안드로메다은하보다 더 넓지만, 그래도 명령은 추상같고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가야 했다.
오전의 주특기 훈련은 혼신의 힘을 다한 후에야 끝났다. 물론 예비역 선배님들은 대답만 네네 하며 그냥 어슬렁거리거나 퍼져 있을 뿐이고, 훈련에는 관심이 없었다. 조교인 유진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FM대로 고생해야 했다. 형식상으로 조금 네네 할 뿐이지, 유진의 현 상태에 관심이 있는 선배님들은 하나도 없다.
유진은 분노 속에서 참을 인을 그리며 겨우 오전 시간을 버텨 나갔다.
그래도 시간 되어서 점심 먹으러 잘 와 주는 것은 좀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군대 짬밥이 먹기 짜증난다며 도시락을 시켜 먹거나, 배달시켜 먹으면 안 되냐는 맛 간 중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훈련에 그런 인간들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예비역들보다 서둘러 와서 상황을 살피러 온 유진은 재빨리 밥 먹으러 와서 줄을 서는 예비역 선배님들을 매의 눈으로 관찰했다. 가끔 점심때 낮잠이라도 잠시 잔다 해 놓고 짱 박히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군 생활과 사회생활까지 두루 겸한 예비역들의 짱 박히는 능력은 가히 스텔스기를 방불케 한다. 짱 박히기 전에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니면 겨우 상병인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찾아낼 수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짬을 끝낸 예비역 선배님 중에 한 사람의 눈치가 이상하다. 그의 시선이 여러 간부들을 차례로 훑으면서 출입구를 힐끔힐끔 살피는 것이 분명 사고를 칠 폼이다. 유진은 그가 본격적으로 짱 박히기 위해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는 것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예비역 선배님이 행동을 개시했다.
예비군 하나 짱 박혀서 나타나지 않는 걸 간부들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상병인유진은 그럴 군번이 아니었다. 휘하 예비역들을 통솔해야 하는 입장인지라 짱 박히기 전에 얼른 주의를 주는 것이 중요했다.
‘아오, 진짜 신병만 되었어도 저 엿 같은 인간을 반쯤 죽여 놓는 건데…….’
유진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군대는 계급이 깡패다. 상대는 신입 중위 정도는 완전 애처럼 갖고 놀면서 노가리를 까는 예비역 병장으로 제대한 일반인이다. 말 그대로 베테랑이다.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단순하게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다.
휘익!
아까 동원 훈련할 때는 굼벵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느렸던 예비역 선배님은 초특급 훈련을 통과한 특수 부대 못지않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이 누구던가. 모든 신병의 두려움을 산 독사 조교가 아니던가. 훈련에 이미 익숙해진 그의 다리는 알아서 최고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가 예비역 선배의 뒤를 바짝 쫓을 때였다. 독을 품고 추적하고 있기 때문인지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운 상태다. 조금만 더 빨리 달려간다면 저 선배님의 뒤통수를 갈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갈긴다는 것은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응?”
살기등등하던 유진의 얼굴에 황당한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의 앞에서 달리던 선배님의 모습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완전히, 완벽하게!
“어, 말도 안 돼! 어디로 간 거야?”
낭패 어린 표정을 한 유진이 아까까지 예비역 선배님이 있던 곳으로 급히 뛰어갔다. 하지만 선배님은 무슨 스텔스 기능을 장착한 모양인지 흔적조차 없다.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오, 쓰바!”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이제껏 계급에 밀려 제대로 쓰지 못했던 쌍욕이 혼자가 되면서 저절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1장. 여기가 대체 어디냐고! (1)
-1-
군에서 상병 딱지를 달았다는 것은 이제 군 생활에 대해 대부분을 꿰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강하 훈련 정도는 밥 먹듯이 했다는 것과 동일하다. 유진은 서둘러 땅에 착지할 때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낙법 자세를 취했다. 이대로 떨어졌다간 치명상을 입을 것이 눈에 불 보듯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상당히 이상하다.
‘왜 자유 낙하의 느낌이 안 드는 거지?’
자신의 생각으론 이 깊은 곳은 분명 평소에 잘 안 쓰는 방공호가 분명할 것이다. 자신이 있는 군부대에는 간혹 이런 이름 없는 방공호가 나타나서 낙오자를 만들곤 했으니까.
위에서 그렇게 주의를 줌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이런 곳에 빠져서 다리를 다치고 군 병원으로 이송되는 머저리가 몇 명씩 나오곤 했다. 때론 일부러 뛰어드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다.
그나마 여기 군부대 내 사정에 속속들이 밝은 자신이 잘 모르는 방공호라면 아마도 6.25때 만들어졌다가 제대로 관리나 폐기가 안 된 곳이리라. 군대는 언제나 예산이 문제인 집단이라, 2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군이 쓰던 수통을 역사와 전통이란 이름으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허, 거참 희한하네.”
원래 자유 낙하하는 물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도를 받는 법이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떨어진 가벼운 물체가 지상에 도달하기 직전에는 엄청난 흉기가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갈수록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하, 수상하다. 유진은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팔짱을 꼈다. 자신이 떨어지고 있는 곳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분명 이런 상황을 어디서 본 적이 있긴 한데 당최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야동에서 봤던가? 아닌데……. 그럼 애니인가?”
군에 들어오기 전에는 나름 여러 방면(?)으로 문화생활을 충분히 향유했던 유진이다. 물론 그 문화생활이 남들에게 취미라고 자랑할 만한 고급문화는 아니었지만 나름 최고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의 용돈과 알바비를 톡톡히 까먹는 정도는 되었다.
“에이, 썅. 몰라.”
군대에 들어오기 전에는 유진도 상당히 촉이 예민하고 섬세한 대학생이었다. 또래보다 사회의 이슈에도 밝았고 유행에도 민감한 편이었다. 하지만 군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런 대학생 유진은 사라지고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인 김유진만 남았다. 몸에 옷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에 몸을 맞추는 상황이 되는 상황에 익숙해진 지도 옛날이다.
“아, 참! 그 선배 놈은 어찌 되었지?”
그제야 예비역 선배가 머리에 떠오른 유진은 슬슬 몸을 돌려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이제 떨어지는 것에도 조금 익숙해져서 이런 것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하 훈련을 하다 보면 먼저 떨어지는 인간들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잘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래로 몸을 숙이자 서서히 아래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밝아졌냐 하면 자신이 떨어지는 옆으로 관물대를 비롯해 이상한 형태의 정리함들이 있다는 것이 서서히 눈에 들어올 정도다. 그리고 관물대에서 익숙한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심한데 이거나 좀 봐야겠다.”
그는 바로 손을 뻗어 관물대에 있는 잡지를 하나 꺼냈다. 그것은 휴가 나온 군인들이 필수적으로 사 온다던 모 잡지로, 어리바리한 신참이 가끔 커피로 착각하여 사 왔다가 고참들에게 혼쭐이 난다는 바로 그 물건이었다.
“룰루루루.”
표지에 건강한 체격의 남자가 나오는 것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끔 관물대 검열이 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이런 잡지 표지에는 영화 잡지 표지를 덧붙이는 작업을 해 놓는 것이 좋다.
센스 있고 선임의 귀염을 받는 후임이라면 이 정도의 작업은 알아서 해 놓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잡지를 편 유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오, 시바! 이게 뭐야!”
분명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몸매와 얼굴이 착한 여자들이 페이지를 수놓아야 했다. 입었는지 벗었는지 알 수 없는 옷차림과 그녀들의 음란하면서도 아슬아슬한 포즈, 도발적이거나 풀어진 눈매가 이 잡지의 존재 이유여야 했다.
그런데 유진이 펼친 잡지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페이지마다 현란하게 수놓고 있는 것은 떡대의 남자들이 거의 중요 부위만 가린 채로 서로 껴안고 있는 장면이거나, 털 많은 남자들의 아슬아슬한 장면들뿐이었던 것이다. 유진의 표정이 마구 일그러졌다.
“아오, 시바! 좆같네. 뭐 이런 개 같은 잡지가 있냐. 완전히 눈 배렸잖아. 아오, 시바! 내 눈!”
유진은 이제 거칠 것이 없이 욕을 내뱉었다. 원래도 그리 말버릇이 아름다운 편이 아니었지만 군에 와서 월등하게 는 것이 바로 각종 지역에서 수집한 욕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이 미친놈의 잡지를 발로 밟아서 문대고 싶지만 지금은 떨어지는 와중이다.
유진은 잡지를 아래로 집어 던지려다가 그만 참았다. 지금 자신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잘못 잡지를 던졌다가 자신이 이 좆같은 잡지에 맞을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재수 옴 붙은 것 같은 잡지다.
게다가 저 아래 예비군 선배 놈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그 선배 놈이 이걸 맞고 계급으로 자신을 갈군다면…….
다른 판단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자신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장교들까지도 능글거리며 갈구는 것이 바로 제대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예비역이란 종족이다. 유진은 잡지를 돌돌 말아서 아래로 층층이 이어지는 관물대 안으로 짱 박아 두었다. 내려가는 속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것도 가능했다.
“어?”
순간 유진의 눈이 깜빡였다. 분명 저 관물대 안에는 사람이 들어갈 공간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 것이다. 그것도 기분 나쁠 정도로 아주 음험한 시선이었다. 유진은 재빨리 고개를 위로 돌렸다. 자신이 본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관물대는 이미 지나가 버린 뒤다.
“내가 잘못 봤나? 아이 썅! 몰라.”
그나저나 지금 자신이 이런 식으로 방공호 안으로 떨어지고 있으니 오늘 훈련은 이미 물 건너 갔다. 남은 예비역 선배 놈들은 옳다구나 하고 차나 구석의 매점에 짱 박혀서 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이렇게 황금 같은 오후 훈련 시간에 토끼는 선배 놈 하나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났는데 말이지.
“그나저나 빨리 안 돌아가면 이거 탈영으로 처리되는 거 아냐?”
탈영이란 단어가 머리에 떠오르자 순간 유진의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졌다. 부모님께서 입대하는 자신에게 신신당부하시던 것 중 하나가 바로 탈영에 관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성질이 개차반인 데다가 한 다혈질 하는 유진이라 그랬던 것이리라.
군대에서 탈영은 상당히 무거운 죄질로 다루어진다. 하지만 한창 때의 젊은 남자들을 왕창 한곳에 모아 놓으면 꼭 한 번은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는 것도 바로 탈영이다.
유진은 남들의 괴롭힘을 받아서 홧김에 탈영하느니 차라리 남을 괴롭히고 만다는 주의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탈영하게 되다니, 역시 인간의 앞일은 알 수가 없는 법이다.
“에라이, 될 대로 되라지.”
중요한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은 제쳐 두고 말이다. 일단 탈영이라 하더라도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상당히 정상 참작이 된다. 군대도 인간이 모인 집단이니까.
그의 머릿속에서 일단 우선순위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할 것은 일단 자신의 이 일탈의 원인이 된 저 예비역 선배 놈을 잡는 것이다. 일단 잡아서 구워삶든 찌든 해서 입을 맞춰 두고 난 뒤에 돌아가면 어찌어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몸과의 대화가 먼저지. 흐흐흐”
아무리 예비역 선배 놈이 요령을 잘 알고 있다고 해도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다. 더 젊고 군기가 꽉 잡혀 있는 자신을 저 허랑방탕한 사회생활을 한 민간인 따위가 감히 이길 수가 없는 법이다. 일단 말로 접근했다가 영 안 되면 몸으로 대화를 할 생각에 유진의 얼굴이 확 펴졌다.
“어어어!”
그 순간이었다.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까 먼저 사라졌던 예비역 선배 놈의 목소리가 분명해 보인다. 분명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이리라.
‘드디어 이 길의 끝인가 보군.’
그 끝에 과연 에어 매트리스가 있을지, 아니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이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긴장감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속도라면 그렇게 크게 다치지는 않을 테지만 또 앞일은 알 수 없다.
유진은 자연스럽게 낙법 자세를 취했다. 군 생활을 하면서, 특히 조교로 있으면서 각 잡힌 생활을 한 탓이다. 비록 아래가 콘크리트라고 하더라도 중력 가속도도 없는 편이니까 낙법 자세를 잘 활용하면 그다지 많이 안 다치고 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중력 가속도도 없는 편이니까. 그런데 그런 그의 눈앞에 하얀 침대가 나타났다.
“엉?”
너무 의외의 상황에 유진의 입이 절로 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탄력 있는 침대 속으로 폭삭 휩싸였다.
-2-
당황의 시간은 상당히 짧았다. 이제 갓 상병을 달아 아직 군기가 바짝 들어 있던 유진은 서둘러 낙법으로 마무리한 후에 훈련받은 대로 침대에서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경계했다.
아니, 분명 방공호로 떨어졌는데 웬 침대? 쿠션 좋은 침대의 흔들림 위에서도 유진은 아직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찰싹!
유진은 자신의 손을 들어 스스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 얼마나 손힘이 셌던지 눈에 별이 번쩍인다. 순간 얼굴에 시뻘건 손자국이 났다. 원래부터 잘 타지 않는 하얀 얼굴이라 손자국이 더욱 크게 표가 나는 것 같다.
“아오, 내 손이지만 맵기는 뒤지게 맵네.”
얼굴에 달아오르는 열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해 봤지만 열은 쉬이 식지 않는다. 유진은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떨어진 곳의 형태는 상당히 낯이 익었다. 그것은 마치…….
“뭐야? 이거 러브호텔 같은데?”
그랬다. 커다란 원형 침대와 거울이 달린 벽, 작은 협탁이 하나 있을 뿐, 다른 가구라곤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여기에 큰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 웬수 같은 예비역 선배 놈이 그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 썅.”
유진은 버릇처럼 욕을 내뱉으며 침대 밖으로 나갔다. 그는 유격 훈련에서 배운 그대로 방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런데 정말이지 이상하게도 출입구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유진이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한번 빠지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파리지옥도 아니고, 밖으로 전혀 나갈 수 없는 곳이라니!
“이 개자식은 도대체 어디로 갔냐고. 아오, 시바! 미치겠네.”
이제 하늘 같은 예비역 선배님에서 선배 놈을 거쳐 개자식으로 하락한 인간은 이제 유진의 눈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명줄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분명히 이곳으로 떨어진 기색은 있는데 사라지다니…… 환장할 일이다.
유진은 일단 침대 밖의 사방을 철저히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없는 공간이니 뒤지다 보면 분명히 출구가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입구의 존재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마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선배 놈처럼 말이다.
“이거 완전 좆 됐네. 이제 어쩌지?”
황당한 유진은 원형 침대 위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이제껏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비일상적이란 건 알겠다. 문제는 탈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눈이 자신이 내려온 끝없는 천장을 향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저 위로 기어 올라가는 것은 솔직히 무리다. 문이나 창문 비슷한 곳만 있어도 빠져나갈 수 있으련만 이곳은 완벽한 밀실 그 자체였다.
“응?”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그의 눈에 문득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요상한 핑크핑크의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약병이었다. 즉시 그는 약병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깨알같이 표시하고선 안 중요한 상표는 크게 표시하는 일반 약병과 달리 그 핑크핑크한 병에는 별 특이한 표시가 없었다. 단지 하나의 라벨만이 있었을 뿐이다.
-날 끝까지 전부 마셔 줘잉.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라벨을 읽던 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러브호텔에 비치된 수상한 색의 약이다. 어쩌면 동물성 최음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니면 강력한 수면제라든가.
“절대 안 먹어. 누가 먹는가 보라지.”
군인다운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그가 협탁 위에 약병을 놔두었다. 가끔 귤 농사가 대풍이 되면 귤이, 조류 독감으로 전국에 비상이 걸리면 닭이, 구제역으로 육류의 가격이 하락하면 육류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군대이기 때문이다.
국방을 거의 무보수로 지키는 젊은이들에게 나라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먹여도 시원찮을 판이다. 그런데 보통은커녕, 특별한 요인으로 급히 처리해야 할 식재료 처리반이 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분이 나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유통 기한 하루 앞둔 음식을 급히 처분하라며 인수대로 배당할 때가 제일 짱 난다.
“유통 기한도 없는 약 따위 누가 먹을까 보냐.”
그가 이렇게 말하며 이를 뽀드득 갈자, 갑자기 약의 라벨에 적힌 글에 변화가 생겼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든 유진은 다시금 약병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위에 적혀 있는 내용이 바뀌어 있었다.
-밤일에 좋은 약품. 정말 효능이 끝내줍니다♡♡♡♡♡
이러면 상황이 또 다르다. 유진의 마음속에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물론 유통 기한도 적혀 있지 않은 수상한 약물 따위는 그렇게 관심이 없지만, 정력에 좋다는 음식이라면 얼마간의 위험을 무릅쓸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도 남자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