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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조교님 2화
1장. 여기가 대체 어디냐고! (2)
유진이 근무하는 군부대는 최전방이면서 야생 동물이 상당히 많은 곳이기도 했다. 그중에서 군바리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역시나 정력에 좋은 걸로 유명한 배암이 되시겠다. 그 뱀이 한번 부대 안에 떴다 싶으면, 장교고 하사관이고 병사고 가릴 것 없이 서로 잡아서 술에 담그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모습이나 맛은 엿 같지만 정력에만 도움이 되면 뱀은커녕 뱀 할아비까지 잡아먹으려 하는 곳이 바로 군대다. 남자밖에 없는 곳에서 정력을 길러 봐야 전혀 도움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군바리들은 뱀만 나타나면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 들었다.
그것은 남자밖에 없는 곳에서 여자만 만나면 절륜하고 싶다는 일종의 보상 심리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냄새부터 좀 맡아 보고.”
음식이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근거로 가장 유용한 것이 바로 코다. 그는 일단 뚜껑을 열어 요상한 색을 가진 액체의 냄새를 맡았다. 특별히 이상한 냄새는 없었다. 맛있어 보이는 복숭아 같은 과일의 향긋하고 달짝지근한 향만이 느껴질 뿐이다. 문득 유진은 자신이 아직 점심 짬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런 깨달음으로 확 일어난 허기는 엄청났고, 배에서 요란스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전부 그 선배 놈 개자식 때문이다. 그 선배 놈이 중간에 토끼지만 않았다면 이런 이상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분노가 올라오자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유진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작은 약병 안에 있는 액체를 단번에 들이마셨다. 액체는 무언가 끈적끈적한 느낌과 함께 그의 목을 넘어간다. 그러자 달큼하고 향긋한 향이 화악 그의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는지 그의 배가 다시금 요란하게 울렸다.
“좀 더 먹을 게 없나?”
유진은 이제 예비역 선배 놈에 대한 생각은 완전 뒷전으로 보낸 채 본격적으로 침대와 협탁을 뒤지기 시작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짬도 못 먹은 군인이 무슨 다른 의욕이 있을 것인가. 하지만 협탁 위에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끼이이익!
이상한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에 문이 있었던가? 유진은 온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니 더 가까운 곳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다시금 들린다. 유진은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다 문득 입을 턱 벌렸다.
소리가 난 곳은 어이없게도 거울이 걸린 벽에서 나고 있었다. 아무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거울 뒤에 문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은 비상 상황이다. 자신의 이성이 아니라 본능을 믿어야 했다. 유진은 민첩한 속도로 거울 쪽으로 다가갔고 그것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 이상하네. 그냥 거울이잖아.”
거울의 뒷면에는 그냥 평범한 벽만이 존재하고 있다. 몇 번을 두드려 보고 확인해도 같은 결론밖에 나질 않는다. 그러면 아까 그 문 열리는 소리는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
끼이이이익!
점점 가까이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이제 바로 유진의 옆에서 들렸다. 유진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거울을 노려보았다. 어떠한 비상사태가 나도 훈련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군인이라는 존재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입술이 마르는 것은 또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킁킁킁.”
순간 거울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으로 떨어진 후 처음 들은 타인의 목소리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울의 안에서 쑤욱 하고 손이 뻗어져 나왔다. 그것은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남자의 손이었다.
유진은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지금 그는 전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다. 수류탄이라도 한 발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 그런 무기를 쓴다는 것은 너 죽고 나 죽자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있어 봤자 전혀 쓸모가 없다.
남은 것은 새파란 신병들 앞에서 보여 주기 위해 FM으로 훈련한 태권도와 유도 실력뿐이다. 나타날 상대의 실력을 알 수는 없지만 특수 부대급만 아니면 일대일 정도는 자신이 있는 유진이다.
“우와, 생각보다 팔팔한데?”
거울 속에서 다 빠져나온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선 유진을 보며 웃었다. 그런 남자의 머리에는 짐승의 귀, 그중에서도 쥐의 귀가 달려 있었다.
-3-
짐승의 귀를 단 청년이 자신을 보며 씽긋 웃었다. 처음에는 무슨 덩치에 안 어울리는 짐승 귀 머리띠인가 했다. 거울 속에서 나온 청년은 언뜻 자신과 비슷한 또래 또는 조금 더 많은 나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저런 짐승의 귀가 붙어 있는 머리띠를 근처에서 자주 판다는 것을 잘 안다. 야구장이나 유원지에서 자주 팔아서 커플끼리 하고 다니는 것을 자주 봤으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유진은 자신의 판단을 정정해야만 했다. 쥐의 귀가 자유자재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희한한 옷차림이네. 어디서 온 것일까?”
쥐 청년이 유진의 군복을 뜯어보며 중얼거린다. 그렇게 보면 청년의 옷이 더 희한하다. 현대 시대에는 잘 입지 않는 고풍스런 서양풍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 옷을 빠방하게 알고 있는 애들도 있긴 한데 유진에게는 그런 취미가 없었다.
옷은 춥거나 덥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물론 자신이 입은 군복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워서 짜증나긴 하지만.
“그나저나 배가 많이 고팠나 보네. 저 물약을 전부 다 마신 걸 보면.”
청년이 그렇게 이야기하며 웃었다. 그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180이 조금 모자라는 유진보다 적어도 5센티는 더 커 보였고 몸도 적당히 잘 발달되어 있었다. 은회색의 잔잔한 머리칼에, 갈색의 눈동자가 상당히 영리해 보이면서도 잔망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보니 완전히 이상한 세계에 있다는 실감이 난다.
“맛있는 걸 잔뜩 먹여 줄까? 응?”
“…….”
“내가 배부르게 해 주지. 장장 열 달 동안 말이야.”
쥐 청년은 자신이 한 말이 무척이나 재미있는 듯 하하하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듣기만 하던 유진은, 갑작스레 저 미친 쥐가 여자에게도 써먹어서는 안 되는 섹드립을 자신에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좆같은 쥐새끼.”
입에서 절로 욕이 나오는 것은 단순히 유진이 욕을 잘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쥐 청년의 눈에 번들거리는 빛을 읽은 탓이다. 그것은 눈앞에 있는 대상을 욕망하는 탐욕 어린 시선이었다.
유진의 부모님은 해외에서도 쉽게 표기될 수 있으면서 한국에서도 어색하지 않을 이름을 골랐고, 유리와 유진 중에 후자로 이름을 붙이셨다 한다. 영어로는 ‘Eugene’이라 표기되니 충분히 남자들에게도 어울릴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유명한 남자 전자 바이올리니스트의 이름도 동일하니까. 하지만 한국에서는 달랐다. ‘진’ 자는 주로 여자에게 붙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가끔 실명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여자로 오해받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문제는 현실의 일이었다. 이런 말을 하기에 심히 짜증나지만, 유진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게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가끔 자신에게 요상한 눈빛을 보내는 이들과 대면하는 엿 같은 상황을 접하기도 했다.
그 엿 같은 상황 중 하나가 바로 자대 배치받은 날이었다. 훈련소에서 군기가 빡빡하게 들어서 자대로 배치되자 내무반에 있던 고참들이 전부 눈에 짓궂은 빛을 띠며 놀리기 시작했다. 자대 배치 받았으면 총을 사 와야 하는데 왜 안 사 왔느냐를 비롯해 일반적인 놀림을 할 때였다. 내무반의 왕고가 유진을 보더니 스르르 웃었다.
“우와, 이번 막내는 상당히 예쁘네.”
이제 제대를 앞둔 유진에게는 하늘같은 고참이자, 내무반에서는 이제 퇴물 취급을 받는 말년 병장이 아직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 유진을 보면서 웃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이거야. 다음 말이 유진을 완전 얼어붙게 했다.
“내 첫사랑 닮았어.”
그 뒤로 유진만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내무반의 다른 선임들이 그 말년 고참에게 유진을 딱 붙여 줬기 때문이다. 마치 변 사또의 옆에 기생처럼 붙여 두는 바람에, 여러 훈련과 작업에서 열외 되어 몸은 편하기는 했다. 하지만 마음은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 왕고는 유진에게 상당히 잘해 준 편이었다. 기회가 되면 그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PX에서 맛있는 것을 유진에게 사 주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없어서 못 먹는다는 만두와 각종 간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비는 시간만 되면 그런 음식들을 유진의 앞에 널어놓고선 언제나 음식을 권하곤 했다.
“이거 맛있어. 좀 먹어 봐.”
“아,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깨작깨작 먹었다가는 군 생활 오래 못 한다.”
“……네.”
유진에게 하루 중 제일 무서운 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가히 밤에 잘 때라고 할 수 있었다. 잠자는 곳까지 그 고참의 옆이었다. 유진은 그 고참이 제대하기까지 한 달 반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눈을 붙여 본 적이 없었다. 그 고참이 자신에게 손가락 하나도 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유진은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그 말년 고참은 유진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을 뿐, 요구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굳이 뭐 요구하는 게 있었다고 한다면, 자신이 사 준 음식을 유진이 잘 먹어 주기를 바라는 정도랄까? 뭐 장점도 있었다. 유진도 그 왕고의 비호 속에서 얼른 자대의 분위기를 익힐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 왕고가 제대하고 나서 유진은 막내로서 교육을 제대로 받기 시작했고 시작은 찜찜했으나 좀 편안한 자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작업에도 부지런히 배치되어 요령을 익혔고 다른 사람들과도 활발하게 어울렸다. 그리고 유진의 아래로 후임이 배당된 이후 사건이 시작되었다.
곱상한 외모에 맞지 않게 악바리 근성에 성깔 있고 입이 험한 유진과는 달리, 유진의 후임은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에 대답도 잘 못 하는 성격이었다. 한 방 들어오면 적어도 한 방, 아니면 그 이상으로 보복하는 유진과는 달리, 그는 부당한 대우에도 속으로만 삭이는 편이었다. 외모는 평범했지만 그 소심한 성격이 바로 화를 불렀다.
“너처럼 좆같은 쥐새끼는 반드시 뜨거운 맛을 보여 주고 만다.”
유진이 이를 갈며 쥐 청년에게 이야기하자 청년이 눈을 반짝 빛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자신의 후임을 반 년 동안이나 성추행했던 놈들의 비열한 눈을 연상케 했다.
“어떻게? 아하! 마침 침대도 있었지? 오늘 죽여주는 밤을 지내겠는걸!”
“그래. 진짜로 죽여주마.”
“어머, 오늘 끝내주는 밤이 되겠다.”
“너 죽었어!”
그 말을 끝으로 유진이 덤벼들었다. 말은 분기에 가득 찼지만 유진의 머릿속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전투는 언제나 냉철한 가운데 벌여야 승기를 잡는 법이다.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지는 것이 바로 전투다.
상대는 자신보다 큰 덩치에 체격이 좋으니 분명 완력도 강할 것이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나름대로 덩치가 큰 상대를 상대하는 노하우가 있었다. 상대의 힘을 이용해 힘이 집중된 공격이 들어왔을 때 빈틈을 노려 반격한다. 유진의 눈이 상대의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휘익! 하고 강력한 훅이 들어오자 유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청년은 쥐란 동물 특유의 민첩함과 재빠름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생각보다 머리가 좋다. 그가 상대적으로 완력이 약한 유진의 약점을 금세 파악하여 막강한 힘으로 밀어붙인다. 웬만한 상대였으면 바로 아래에 깔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웬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조교 생활을 하면서 쌓인 전국 오만 잡것들의 행동 패턴이 이미 입력이 되어 있었다. 그 개망나니 같은 것들을 다루면서 쌓은 노하우는 청년의 힘을 가히 압도했다.
그리고 쥐 청년에게는 결정적인 장점이자 단점인 기관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유진에게는 없고 청년에게만 있는 기다란 꼬리였다. 유진은 어릴 때 집 근처에 있던 시궁쥐를 잡아서 괴롭혔던 것을 기억하곤 사정없이 발을 날렸다.
콰직!
“아아악!”
오만 곳을 다 오고 가도 끄떡없는 군화에 자신의 꼬리가 마구 짓밟히자 청년이 비명을 내질렀다. 기세를 잡은 유진은 여세를 몰아 그의 꼬리를 꺾고선 잡아당겨 청년의 목을 졸랐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진은 꼬리로 목을 졸라 단번에 끝내 버릴 생각이었다. 그다음 순간 청년이 낸 소리만 아니었다면!
“앗! 아응, 아앙! 하응!”
순식간에 유진을 가득 채우던 분노가 싸르르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온몸에서 소름이 오도도 돋기 시작했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변태였고 더 싫어하는 것은 같은 남자에게 손대는 변태였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같은 남자에게 손을 대는 맛이 간 변태다. 유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당장 손을 뗐다.
“자기야, 자기 정말 멋지다.”
쥐 청년이 멍한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순간 유진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까까지 자신에게 죽어라 덤비던 쥐의 눈에는 이제 하트가 가득했던 것이다.
“나 완전 자기에게 뿅 갔어. 조금만 더 해 줘. 응?”
구속이 이미 풀렸는데도 쥐 청년의 눈은 아직도 이상하다. 무언가에 홀려 헤롱헤롱하는 눈이 자신을 바라보자 유진이 질색했다.
“꺼져! 저리 가, 이 쥐새끼야.”
“내 이름은 래트야. 래트라고 그 섹시한 목소리로 한 번만 불러 줘. 응?”
“래트나, 쥐새끼나.”
“자기는 완전 여왕님이구나. 아흥. 구두 핥아도 돼?”
“…….”
이 망할 놈의 쥐는 완전히 미친 것이 틀림이 없다. 유진은 자신의 앞에서 눈에 하트를 가득 담은 쥐 청년 래트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밀실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가 이곳으로 들어온 방법을 알아내야 이 방을 벗어날 수가 있지 않겠는가.
-4-
유진은 몇 번이고 망설이다 쥐 청년을 쳐다보았다. 청년은 아까와는 다른 시선으로 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렬히 숭배하는 눈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어서 부담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성질 같아서는 마구 발로 까면서 욕지거리를 하고 싶지만 그러면 아마도 좋아하면서 소름 돋는 신음 소리를 낼 것이 분명하다. 그건 더 싫다.
“야, 쥐.”
“하응, 자기. 카리스마 죽인다.”
좋은 말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쥐 청년 래트가 몸을 배배 꼬았다. 순간 유진은 자신의 몸에 돋는 소름에 온몸을 박박 비비며 소리를 쳤다.
“그 자기란 소리 집어치워. 소름이 돋아 죽을 지경이니까.”
“그럼 여왕님이라 불러도 돼?”
“그게 되겠냐? 응?”
“히잉.”
유진이 마구 노려봤지만 청년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얼굴에는 홍조를 띠고 눈에는 하트가 가득하다. 난생 처음으로 욕을 해서 통하지 않는 대상을 만난 유진은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하지만 미친 쥐에게서라도 알아낼 것은 알아내야 했다. 자신은 이곳의 정보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야, 래트.”
“흐와, 저 섹시한 목소리로 내 이, 이름을…….”
“잔말 말고 대답이나 해. 쌔꺄. 혹시 여기 오면서 내가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한 옷차림의 누군가를 본 적이 없어?”
그랬다. 여기를 나가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유진에게 우선순위 1위는 역시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그 선배 놈의 행방이다. 그냥 이곳을 나가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선배 놈, 개자식과 함께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옷차림이라면 이 이상한 개구리 무늬 같은 거?”
이 쥐새끼가 개구리 무늬 군복이 단종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 개구리 운운하는 건지 모르겠다. 유진이 인상을 썼다.
“개구리 무늬 아니거든. 하여튼 이런 옷 입은 인간 봤어, 못 봤어?”
“흐음.”
래트의 분홍 귀가 쫑긋쫑긋 움직인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눈치더니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봤어.”
“어디로 갔어, 그 개자식?”
유진의 입에서 이제는 자연스럽게 개자식이란 말이 자동으로 출력이 된다. 아무래도 자신의 분노 게이지가 상당히 올라간 모양이다.
“개? 그거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개였어?”
래트의 얼굴이 순간 사색이 되었다. 물론 쥐에게 개는 상당히 무서운 동물이긴 하다. 쥐를 사냥하는 게 개의 주된 낙이니까. 그래도 공식적인 천적인 고양이보다는 낫지 않은가.
“아, 우리 쪽에서 나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 어디로 갔어?”
유진은 평이한 어투로 친절하게 래트에게 개자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변태 자식에게 친절할 필요는 없지만 알아낼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래트의 얼굴이 금세 풀리더니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여튼 엄청 빨리 달리더라고. 그런데 버니 걸이 뭐야?”
“응?”
“그 사람, 버니 걸을 봤다면서 정말 즐거워했거든. 재수 없는 흰 토끼의 뒤를 따라서 쏜살같이 달리더라고. 물론 그 사람에게도 맛있는 냄새가 물씬 풍겼지만, 나는 이쪽의 달큼한 냄새 쪽이 더 취향이어서 말이지.”
이상한 세계에서 난데없이 웬 버니 걸이란 말인가. 유진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여하튼 요약해 보면 그 버니 걸을 쫓아서 그 선배 놈이 이동을 하고, 자신은 그놈을 쫓다 떨어지게 된 거라 이거지?
그런데 순간, 흰 토끼란 단어가 유진을 사로잡았다.
흰 토끼, 급격한 강하, 이상한 라벨이 달린 약병, 그리고 눈앞의 이상한 동물. 이런 키워드는 유진이 최근에 본 야동이 아니라 더 어릴 때 본 동화와 더 연관이 있다. 그렇다. 그는 이제야 자신이 이상한 나라 속으로 직접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말이야. 여기가 하트 여왕님이 사는 곳 맞아?”
굉장히 불쾌한 생각이 유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릴 적 아무런 생각 없이 읽었을 때는 그 정신 나간 동화의 세계가 상당히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온통 미친놈만 떼거리로 나오는 동화가 아닐 수 없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어, 어떻게 알았어?”
순간 래트의 몸이 경직되었다. 바짝 젖힌 귀나 빳빳하게 굳은 꼬리를 보니 겁먹은 게 확실해 보인다. 그런 래트를 보며 유진은 낭패감을 느꼈다. 이건 그 유명한 책 속으로 들어왔다는 설정이 아닌가!
군에 들어오기 전에 가끔 심심풀이 삼아 읽던 판타지 소설에서 이런 식으로 책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많았었다. 하지만 이렇게 책 속으로 들어가서 나중에 어떻게 되었더라? ……그래, 대부분 ‘책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더라’로 끝났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은 현역 군인이다. 임무를 끝까지 완수해야 할 책임이 있다. 자신의 임무를 정확하게 부여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 예비역 선배 놈을 잡아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탈영이 된다.
‘그런데 차원 이동한 애들은 잘만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던데, 책 속으로 들어온 애들은 제대로 돌아갔던가?’
유진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그가 읽었던 소설이 그리 적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중에서 책 속으로 들어온 후 다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유진은 다시 한 번 낭패를 느꼈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
“야, 래트.”
한번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니 자연스럽게 이름이 달라붙는다. 래트는 쥐의 한 종류이니 래트라고 불러도 쥐라고 부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만 말이다. 그러자 래트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응.”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나가야 해?”
“여기서 나가려고? 난 단둘이 있는 게 더 좋은데?”
“너 같은 변태와 단둘이 있으라니……. 내가 차라리 죽고 만다.”
“자기가 죽으면 안 돼.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
래트가 필사적인 얼굴을 했다. 유진은 황당할 뿐이었다. 저 미친 쥐가 자기를 본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저런 표정을 짓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된다. 그래도 저 쥐를 살살 꼬드기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죽는 게 싫으면 이곳을 나가는 방법을 일러 주던가.”
“히잉.”
쥐 청년이 고민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무래도 쥐의 귀와 꼬리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 급한 쥐의 성격까지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자기가 죽는 건 싫으니까…….”
래트가 자신이 나온 벽 거울 쪽으로 갔다. 유진은 충분히 경계를 하며 래트의 뒤를 따랐다. 처음 겪는 데다 이상한 일들이니 긴장을 안 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래트가 자신에게 손짓을 하자 그는 천천히 거울 앞으로 이동했다.
“자자, 우리 같이 흠뻑 젖어 보자구.”
“뭐?”
유진이 반문한 순간 래트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거울의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한 유진이 반항해 보려 했지만 래트의 힘은 생각보다도 더 강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진의 몸이 래트와 함께 거울 속으로 쑤욱 들어갔다.
1장. 여기가 대체 어디냐고! (2)
유진이 근무하는 군부대는 최전방이면서 야생 동물이 상당히 많은 곳이기도 했다. 그중에서 군바리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역시나 정력에 좋은 걸로 유명한 배암이 되시겠다. 그 뱀이 한번 부대 안에 떴다 싶으면, 장교고 하사관이고 병사고 가릴 것 없이 서로 잡아서 술에 담그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모습이나 맛은 엿 같지만 정력에만 도움이 되면 뱀은커녕 뱀 할아비까지 잡아먹으려 하는 곳이 바로 군대다. 남자밖에 없는 곳에서 정력을 길러 봐야 전혀 도움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군바리들은 뱀만 나타나면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 들었다.
그것은 남자밖에 없는 곳에서 여자만 만나면 절륜하고 싶다는 일종의 보상 심리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냄새부터 좀 맡아 보고.”
음식이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근거로 가장 유용한 것이 바로 코다. 그는 일단 뚜껑을 열어 요상한 색을 가진 액체의 냄새를 맡았다. 특별히 이상한 냄새는 없었다. 맛있어 보이는 복숭아 같은 과일의 향긋하고 달짝지근한 향만이 느껴질 뿐이다. 문득 유진은 자신이 아직 점심 짬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런 깨달음으로 확 일어난 허기는 엄청났고, 배에서 요란스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전부 그 선배 놈 개자식 때문이다. 그 선배 놈이 중간에 토끼지만 않았다면 이런 이상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분노가 올라오자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유진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작은 약병 안에 있는 액체를 단번에 들이마셨다. 액체는 무언가 끈적끈적한 느낌과 함께 그의 목을 넘어간다. 그러자 달큼하고 향긋한 향이 화악 그의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는지 그의 배가 다시금 요란하게 울렸다.
“좀 더 먹을 게 없나?”
유진은 이제 예비역 선배 놈에 대한 생각은 완전 뒷전으로 보낸 채 본격적으로 침대와 협탁을 뒤지기 시작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짬도 못 먹은 군인이 무슨 다른 의욕이 있을 것인가. 하지만 협탁 위에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끼이이익!
이상한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에 문이 있었던가? 유진은 온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니 더 가까운 곳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다시금 들린다. 유진은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다 문득 입을 턱 벌렸다.
소리가 난 곳은 어이없게도 거울이 걸린 벽에서 나고 있었다. 아무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거울 뒤에 문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은 비상 상황이다. 자신의 이성이 아니라 본능을 믿어야 했다. 유진은 민첩한 속도로 거울 쪽으로 다가갔고 그것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 이상하네. 그냥 거울이잖아.”
거울의 뒷면에는 그냥 평범한 벽만이 존재하고 있다. 몇 번을 두드려 보고 확인해도 같은 결론밖에 나질 않는다. 그러면 아까 그 문 열리는 소리는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
끼이이이익!
점점 가까이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이제 바로 유진의 옆에서 들렸다. 유진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거울을 노려보았다. 어떠한 비상사태가 나도 훈련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군인이라는 존재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입술이 마르는 것은 또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킁킁킁.”
순간 거울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으로 떨어진 후 처음 들은 타인의 목소리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울의 안에서 쑤욱 하고 손이 뻗어져 나왔다. 그것은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남자의 손이었다.
유진은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지금 그는 전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다. 수류탄이라도 한 발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 그런 무기를 쓴다는 것은 너 죽고 나 죽자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있어 봤자 전혀 쓸모가 없다.
남은 것은 새파란 신병들 앞에서 보여 주기 위해 FM으로 훈련한 태권도와 유도 실력뿐이다. 나타날 상대의 실력을 알 수는 없지만 특수 부대급만 아니면 일대일 정도는 자신이 있는 유진이다.
“우와, 생각보다 팔팔한데?”
거울 속에서 다 빠져나온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선 유진을 보며 웃었다. 그런 남자의 머리에는 짐승의 귀, 그중에서도 쥐의 귀가 달려 있었다.
-3-
짐승의 귀를 단 청년이 자신을 보며 씽긋 웃었다. 처음에는 무슨 덩치에 안 어울리는 짐승 귀 머리띠인가 했다. 거울 속에서 나온 청년은 언뜻 자신과 비슷한 또래 또는 조금 더 많은 나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저런 짐승의 귀가 붙어 있는 머리띠를 근처에서 자주 판다는 것을 잘 안다. 야구장이나 유원지에서 자주 팔아서 커플끼리 하고 다니는 것을 자주 봤으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유진은 자신의 판단을 정정해야만 했다. 쥐의 귀가 자유자재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희한한 옷차림이네. 어디서 온 것일까?”
쥐 청년이 유진의 군복을 뜯어보며 중얼거린다. 그렇게 보면 청년의 옷이 더 희한하다. 현대 시대에는 잘 입지 않는 고풍스런 서양풍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 옷을 빠방하게 알고 있는 애들도 있긴 한데 유진에게는 그런 취미가 없었다.
옷은 춥거나 덥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물론 자신이 입은 군복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워서 짜증나긴 하지만.
“그나저나 배가 많이 고팠나 보네. 저 물약을 전부 다 마신 걸 보면.”
청년이 그렇게 이야기하며 웃었다. 그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180이 조금 모자라는 유진보다 적어도 5센티는 더 커 보였고 몸도 적당히 잘 발달되어 있었다. 은회색의 잔잔한 머리칼에, 갈색의 눈동자가 상당히 영리해 보이면서도 잔망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보니 완전히 이상한 세계에 있다는 실감이 난다.
“맛있는 걸 잔뜩 먹여 줄까? 응?”
“…….”
“내가 배부르게 해 주지. 장장 열 달 동안 말이야.”
쥐 청년은 자신이 한 말이 무척이나 재미있는 듯 하하하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듣기만 하던 유진은, 갑작스레 저 미친 쥐가 여자에게도 써먹어서는 안 되는 섹드립을 자신에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좆같은 쥐새끼.”
입에서 절로 욕이 나오는 것은 단순히 유진이 욕을 잘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쥐 청년의 눈에 번들거리는 빛을 읽은 탓이다. 그것은 눈앞에 있는 대상을 욕망하는 탐욕 어린 시선이었다.
유진의 부모님은 해외에서도 쉽게 표기될 수 있으면서 한국에서도 어색하지 않을 이름을 골랐고, 유리와 유진 중에 후자로 이름을 붙이셨다 한다. 영어로는 ‘Eugene’이라 표기되니 충분히 남자들에게도 어울릴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유명한 남자 전자 바이올리니스트의 이름도 동일하니까. 하지만 한국에서는 달랐다. ‘진’ 자는 주로 여자에게 붙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가끔 실명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여자로 오해받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문제는 현실의 일이었다. 이런 말을 하기에 심히 짜증나지만, 유진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게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가끔 자신에게 요상한 눈빛을 보내는 이들과 대면하는 엿 같은 상황을 접하기도 했다.
그 엿 같은 상황 중 하나가 바로 자대 배치받은 날이었다. 훈련소에서 군기가 빡빡하게 들어서 자대로 배치되자 내무반에 있던 고참들이 전부 눈에 짓궂은 빛을 띠며 놀리기 시작했다. 자대 배치 받았으면 총을 사 와야 하는데 왜 안 사 왔느냐를 비롯해 일반적인 놀림을 할 때였다. 내무반의 왕고가 유진을 보더니 스르르 웃었다.
“우와, 이번 막내는 상당히 예쁘네.”
이제 제대를 앞둔 유진에게는 하늘같은 고참이자, 내무반에서는 이제 퇴물 취급을 받는 말년 병장이 아직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 유진을 보면서 웃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이거야. 다음 말이 유진을 완전 얼어붙게 했다.
“내 첫사랑 닮았어.”
그 뒤로 유진만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내무반의 다른 선임들이 그 말년 고참에게 유진을 딱 붙여 줬기 때문이다. 마치 변 사또의 옆에 기생처럼 붙여 두는 바람에, 여러 훈련과 작업에서 열외 되어 몸은 편하기는 했다. 하지만 마음은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 왕고는 유진에게 상당히 잘해 준 편이었다. 기회가 되면 그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PX에서 맛있는 것을 유진에게 사 주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없어서 못 먹는다는 만두와 각종 간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비는 시간만 되면 그런 음식들을 유진의 앞에 널어놓고선 언제나 음식을 권하곤 했다.
“이거 맛있어. 좀 먹어 봐.”
“아,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깨작깨작 먹었다가는 군 생활 오래 못 한다.”
“……네.”
유진에게 하루 중 제일 무서운 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가히 밤에 잘 때라고 할 수 있었다. 잠자는 곳까지 그 고참의 옆이었다. 유진은 그 고참이 제대하기까지 한 달 반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눈을 붙여 본 적이 없었다. 그 고참이 자신에게 손가락 하나도 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유진은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그 말년 고참은 유진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을 뿐, 요구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굳이 뭐 요구하는 게 있었다고 한다면, 자신이 사 준 음식을 유진이 잘 먹어 주기를 바라는 정도랄까? 뭐 장점도 있었다. 유진도 그 왕고의 비호 속에서 얼른 자대의 분위기를 익힐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 왕고가 제대하고 나서 유진은 막내로서 교육을 제대로 받기 시작했고 시작은 찜찜했으나 좀 편안한 자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작업에도 부지런히 배치되어 요령을 익혔고 다른 사람들과도 활발하게 어울렸다. 그리고 유진의 아래로 후임이 배당된 이후 사건이 시작되었다.
곱상한 외모에 맞지 않게 악바리 근성에 성깔 있고 입이 험한 유진과는 달리, 유진의 후임은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에 대답도 잘 못 하는 성격이었다. 한 방 들어오면 적어도 한 방, 아니면 그 이상으로 보복하는 유진과는 달리, 그는 부당한 대우에도 속으로만 삭이는 편이었다. 외모는 평범했지만 그 소심한 성격이 바로 화를 불렀다.
“너처럼 좆같은 쥐새끼는 반드시 뜨거운 맛을 보여 주고 만다.”
유진이 이를 갈며 쥐 청년에게 이야기하자 청년이 눈을 반짝 빛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자신의 후임을 반 년 동안이나 성추행했던 놈들의 비열한 눈을 연상케 했다.
“어떻게? 아하! 마침 침대도 있었지? 오늘 죽여주는 밤을 지내겠는걸!”
“그래. 진짜로 죽여주마.”
“어머, 오늘 끝내주는 밤이 되겠다.”
“너 죽었어!”
그 말을 끝으로 유진이 덤벼들었다. 말은 분기에 가득 찼지만 유진의 머릿속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전투는 언제나 냉철한 가운데 벌여야 승기를 잡는 법이다.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지는 것이 바로 전투다.
상대는 자신보다 큰 덩치에 체격이 좋으니 분명 완력도 강할 것이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나름대로 덩치가 큰 상대를 상대하는 노하우가 있었다. 상대의 힘을 이용해 힘이 집중된 공격이 들어왔을 때 빈틈을 노려 반격한다. 유진의 눈이 상대의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휘익! 하고 강력한 훅이 들어오자 유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청년은 쥐란 동물 특유의 민첩함과 재빠름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생각보다 머리가 좋다. 그가 상대적으로 완력이 약한 유진의 약점을 금세 파악하여 막강한 힘으로 밀어붙인다. 웬만한 상대였으면 바로 아래에 깔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웬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조교 생활을 하면서 쌓인 전국 오만 잡것들의 행동 패턴이 이미 입력이 되어 있었다. 그 개망나니 같은 것들을 다루면서 쌓은 노하우는 청년의 힘을 가히 압도했다.
그리고 쥐 청년에게는 결정적인 장점이자 단점인 기관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유진에게는 없고 청년에게만 있는 기다란 꼬리였다. 유진은 어릴 때 집 근처에 있던 시궁쥐를 잡아서 괴롭혔던 것을 기억하곤 사정없이 발을 날렸다.
콰직!
“아아악!”
오만 곳을 다 오고 가도 끄떡없는 군화에 자신의 꼬리가 마구 짓밟히자 청년이 비명을 내질렀다. 기세를 잡은 유진은 여세를 몰아 그의 꼬리를 꺾고선 잡아당겨 청년의 목을 졸랐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진은 꼬리로 목을 졸라 단번에 끝내 버릴 생각이었다. 그다음 순간 청년이 낸 소리만 아니었다면!
“앗! 아응, 아앙! 하응!”
순식간에 유진을 가득 채우던 분노가 싸르르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온몸에서 소름이 오도도 돋기 시작했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변태였고 더 싫어하는 것은 같은 남자에게 손대는 변태였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같은 남자에게 손을 대는 맛이 간 변태다. 유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당장 손을 뗐다.
“자기야, 자기 정말 멋지다.”
쥐 청년이 멍한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순간 유진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까까지 자신에게 죽어라 덤비던 쥐의 눈에는 이제 하트가 가득했던 것이다.
“나 완전 자기에게 뿅 갔어. 조금만 더 해 줘. 응?”
구속이 이미 풀렸는데도 쥐 청년의 눈은 아직도 이상하다. 무언가에 홀려 헤롱헤롱하는 눈이 자신을 바라보자 유진이 질색했다.
“꺼져! 저리 가, 이 쥐새끼야.”
“내 이름은 래트야. 래트라고 그 섹시한 목소리로 한 번만 불러 줘. 응?”
“래트나, 쥐새끼나.”
“자기는 완전 여왕님이구나. 아흥. 구두 핥아도 돼?”
“…….”
이 망할 놈의 쥐는 완전히 미친 것이 틀림이 없다. 유진은 자신의 앞에서 눈에 하트를 가득 담은 쥐 청년 래트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밀실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가 이곳으로 들어온 방법을 알아내야 이 방을 벗어날 수가 있지 않겠는가.
-4-
유진은 몇 번이고 망설이다 쥐 청년을 쳐다보았다. 청년은 아까와는 다른 시선으로 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렬히 숭배하는 눈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어서 부담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성질 같아서는 마구 발로 까면서 욕지거리를 하고 싶지만 그러면 아마도 좋아하면서 소름 돋는 신음 소리를 낼 것이 분명하다. 그건 더 싫다.
“야, 쥐.”
“하응, 자기. 카리스마 죽인다.”
좋은 말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쥐 청년 래트가 몸을 배배 꼬았다. 순간 유진은 자신의 몸에 돋는 소름에 온몸을 박박 비비며 소리를 쳤다.
“그 자기란 소리 집어치워. 소름이 돋아 죽을 지경이니까.”
“그럼 여왕님이라 불러도 돼?”
“그게 되겠냐? 응?”
“히잉.”
유진이 마구 노려봤지만 청년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얼굴에는 홍조를 띠고 눈에는 하트가 가득하다. 난생 처음으로 욕을 해서 통하지 않는 대상을 만난 유진은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하지만 미친 쥐에게서라도 알아낼 것은 알아내야 했다. 자신은 이곳의 정보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야, 래트.”
“흐와, 저 섹시한 목소리로 내 이, 이름을…….”
“잔말 말고 대답이나 해. 쌔꺄. 혹시 여기 오면서 내가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한 옷차림의 누군가를 본 적이 없어?”
그랬다. 여기를 나가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유진에게 우선순위 1위는 역시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그 선배 놈의 행방이다. 그냥 이곳을 나가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선배 놈, 개자식과 함께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옷차림이라면 이 이상한 개구리 무늬 같은 거?”
이 쥐새끼가 개구리 무늬 군복이 단종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 개구리 운운하는 건지 모르겠다. 유진이 인상을 썼다.
“개구리 무늬 아니거든. 하여튼 이런 옷 입은 인간 봤어, 못 봤어?”
“흐음.”
래트의 분홍 귀가 쫑긋쫑긋 움직인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눈치더니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봤어.”
“어디로 갔어, 그 개자식?”
유진의 입에서 이제는 자연스럽게 개자식이란 말이 자동으로 출력이 된다. 아무래도 자신의 분노 게이지가 상당히 올라간 모양이다.
“개? 그거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개였어?”
래트의 얼굴이 순간 사색이 되었다. 물론 쥐에게 개는 상당히 무서운 동물이긴 하다. 쥐를 사냥하는 게 개의 주된 낙이니까. 그래도 공식적인 천적인 고양이보다는 낫지 않은가.
“아, 우리 쪽에서 나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 어디로 갔어?”
유진은 평이한 어투로 친절하게 래트에게 개자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변태 자식에게 친절할 필요는 없지만 알아낼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래트의 얼굴이 금세 풀리더니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여튼 엄청 빨리 달리더라고. 그런데 버니 걸이 뭐야?”
“응?”
“그 사람, 버니 걸을 봤다면서 정말 즐거워했거든. 재수 없는 흰 토끼의 뒤를 따라서 쏜살같이 달리더라고. 물론 그 사람에게도 맛있는 냄새가 물씬 풍겼지만, 나는 이쪽의 달큼한 냄새 쪽이 더 취향이어서 말이지.”
이상한 세계에서 난데없이 웬 버니 걸이란 말인가. 유진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여하튼 요약해 보면 그 버니 걸을 쫓아서 그 선배 놈이 이동을 하고, 자신은 그놈을 쫓다 떨어지게 된 거라 이거지?
그런데 순간, 흰 토끼란 단어가 유진을 사로잡았다.
흰 토끼, 급격한 강하, 이상한 라벨이 달린 약병, 그리고 눈앞의 이상한 동물. 이런 키워드는 유진이 최근에 본 야동이 아니라 더 어릴 때 본 동화와 더 연관이 있다. 그렇다. 그는 이제야 자신이 이상한 나라 속으로 직접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말이야. 여기가 하트 여왕님이 사는 곳 맞아?”
굉장히 불쾌한 생각이 유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릴 적 아무런 생각 없이 읽었을 때는 그 정신 나간 동화의 세계가 상당히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온통 미친놈만 떼거리로 나오는 동화가 아닐 수 없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어, 어떻게 알았어?”
순간 래트의 몸이 경직되었다. 바짝 젖힌 귀나 빳빳하게 굳은 꼬리를 보니 겁먹은 게 확실해 보인다. 그런 래트를 보며 유진은 낭패감을 느꼈다. 이건 그 유명한 책 속으로 들어왔다는 설정이 아닌가!
군에 들어오기 전에 가끔 심심풀이 삼아 읽던 판타지 소설에서 이런 식으로 책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많았었다. 하지만 이렇게 책 속으로 들어가서 나중에 어떻게 되었더라? ……그래, 대부분 ‘책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더라’로 끝났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은 현역 군인이다. 임무를 끝까지 완수해야 할 책임이 있다. 자신의 임무를 정확하게 부여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 예비역 선배 놈을 잡아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탈영이 된다.
‘그런데 차원 이동한 애들은 잘만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던데, 책 속으로 들어온 애들은 제대로 돌아갔던가?’
유진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그가 읽었던 소설이 그리 적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중에서 책 속으로 들어온 후 다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유진은 다시 한 번 낭패를 느꼈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
“야, 래트.”
한번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니 자연스럽게 이름이 달라붙는다. 래트는 쥐의 한 종류이니 래트라고 불러도 쥐라고 부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만 말이다. 그러자 래트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응.”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나가야 해?”
“여기서 나가려고? 난 단둘이 있는 게 더 좋은데?”
“너 같은 변태와 단둘이 있으라니……. 내가 차라리 죽고 만다.”
“자기가 죽으면 안 돼.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
래트가 필사적인 얼굴을 했다. 유진은 황당할 뿐이었다. 저 미친 쥐가 자기를 본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저런 표정을 짓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된다. 그래도 저 쥐를 살살 꼬드기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죽는 게 싫으면 이곳을 나가는 방법을 일러 주던가.”
“히잉.”
쥐 청년이 고민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무래도 쥐의 귀와 꼬리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 급한 쥐의 성격까지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자기가 죽는 건 싫으니까…….”
래트가 자신이 나온 벽 거울 쪽으로 갔다. 유진은 충분히 경계를 하며 래트의 뒤를 따랐다. 처음 겪는 데다 이상한 일들이니 긴장을 안 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래트가 자신에게 손짓을 하자 그는 천천히 거울 앞으로 이동했다.
“자자, 우리 같이 흠뻑 젖어 보자구.”
“뭐?”
유진이 반문한 순간 래트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거울의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한 유진이 반항해 보려 했지만 래트의 힘은 생각보다도 더 강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진의 몸이 래트와 함께 거울 속으로 쑤욱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