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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조교님 3화
1장. 여기가 대체 어디냐고! (3)
하트 왕은 오늘도 혼자서 높은 궁전에서 아래에 펼쳐진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왕국은 오늘도 여전히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왕의 얼굴에는 그 누구보다도 온화해 보이는 표정이 담겨 있었지만 근처에는 그 어떤 신하도, 시종도 군사도 없었다. 그만큼 왕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당신이 좋아해 마지않던 그 아이가 곧 여기로 도착할 것이오.”
하트 왕은 그렇게 속삭였다.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상대가 없었으니 그 속삭임은 왕 혼자의 허무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왕의 시선은 정원을 떠나 더 먼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가서 앨리스를 유혹해 여기로 데려오라 흰 토끼에게 명을 내렸지만 아직 궁으로 도착을 하지 않았다. 그 애가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간 지 세월이 제법 지났다. 자신의 반려, 하트 여왕이 무척이나 좋아했던 여자애는 이제 제법 아름다운 처녀로 자랐을 것이다. 그 모습이 상당히 기대가 된다. 처녀가 된 소녀가 다시 이곳으로 온다면 이번이야말로 즐거운 게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아이가 오면 당신도 즐거운 크로케 경기를 할 수 있지 않겠소?”
그가 자신의 손 언저리를 보며 즐겁게 속삭였다. 왕의 손에는 여왕의 모습을 한 인형이 있었다. 인형술사가 인형극을 위해 만든 것 같은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놈의 목을 잘라라.”
인형을 바라보던 왕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다시금 감돌기 시작했다. 온화한 표정과 맞지 않는 그 무시무시한 말은 바로 왕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형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5-
처음에는 그냥 벽에 부딪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유진을 감싸는 것은 차가운 물이었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물 위로 떠오르기 위해 헤엄을 쳤다.
수면 위로 올라와 주변을 살펴보니 래트가 유유히 앞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이따금 자신을 보면서 헤엄을 치는 것을 보니 가는 길을 충분히 유도할 의도인 모양이다.
유진은 래트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에 그의 유도를 따라 물가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한 10분 정도가 지나자 둘은 물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제야 뒤를 바라볼 여유가 생긴 유진은 천천히 자신이 온 곳을 둘러보았다. 거기에는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거대한 호수가 하나 있었다.
‘역시 이상한 나라는 이상한 나라 맞는가 보군.’
거울의 반대쪽이 거울이 아닌 호수라니 역시 상상 이상이다. 유진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이후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전혀 없다.
모든 옷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군복은 젖으면 더 무거워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젖어 버린 상태다. 언제나 쓰고 있어야 할 베레모는 어느샌가 사라진 지 오래다. 유진은 일단 머리 위에서 줄줄 흐르는 물부터 턴 다음 천천히 군복 상의를 벗었다. 겨우 벗은 상의를 들어서 쭉쭉 짜니 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엉?”
열심히 군복 상의를 짜던 유진은 자신을 응시하는 무수한 시선들을 느꼈다. 바로 자신의 옆에서 눈에 불이 날 것처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래트는 둘째 치고, 호수 근처에 있는 숲과 호숫가에서 그를 보는 눈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눈들이 하나같이 조금씩 맛이 간 느낌이다.
유진은 서둘러 군복의 물기를 마저 짠 뒤 탈탈 털어 대충 편 다음 얼른 주워 입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무수한 시선들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군복 상의 안에는 물론 러닝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상의를 입어서 맨살이 가려지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욕망의 대상이 되는 기분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엿 같다.
“뭐야! 눈 깔아, 이 새끼들아. 그 눈깔 얼른 안 돌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유진이 호수가 떠나가라 고함을 쳤다. 그의 앞에 있었던 것들이 자신에게 훈련을 받는 신병이었으면 오금을 못 펴고 말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유진을 바라보는 열렬한 시선들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유진의 얼굴이 더욱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숲속에서 그의 앞으로 나왔다. 화려한 붉은색의 긴 머리를 한 여자였다. 인간의 머리 색 중에 저렇게 선명한 빨간색이 있었던가? 유진의 시선은 여자의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예쁜 얼굴에 닿았다. 여자는 제법 미인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곁으로 오자 사납게 떠진 유진의 눈매가 즉시 풀리기 시작한다.
“저기, 미안해. 우리가 너무 예의 없이 바라봤지?”
여자가 유진의 곁으로 와서는 몸을 비비 꼬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미인인 것 같다. 유진은 래트에게 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상냥한 태도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뭐, 신기한 세계에서 온 상대라면 볼 수도 있는 거지 뭐.”
군에서 만날 수 있는 여자는 언제나 깐깐하고 말이 많은 여군들이나 자신들에게 잘 대해 주지만 어머니뻘이라 할 수 있는 부녀회장 정도다. 그렇기에 유진은 기본적으로 여자들에게 상당히 약한 편이었다. 그것도 이런 미인이면 특히 말이다.
“그렇게 말해 주니 정말 기뻐. 난 로리라고 해.”
“난 유진이야. 음, 유진 김.”
“앗, 자기야. 나한테는 이름도 안 알려 주고, 왜 쟤만!”
옆에서 자신에게 항의하는 래트는 완전히 무시한 채 유진은 상냥한 얼굴로 로리라 자신의 이름을 밝힌 여자에게 웃어 주었다. 그러자 로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도 정말 예뻤다.
“유진은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정말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도 폴폴 나고. 성격도 상냥하고. 아이, 좋아라.”
“뭐?”
중간에 절대 흘려 넘길 수 없는 단어가 나오자 헤벌레 웃던 유진이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래트도 아까 자신을 보고 달큼한 냄새가 난다고 했었지.
“저기…… 있잖아, 로리 씨.”
“으응, 왜?”
로리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손이 어느새 자신의 팔을 은근히 잡고 있었다. 래트가 그랬다가는 바로 집어 던졌겠지만 유진은 미인에게 여전히 약했다. 로리가 슬그머니 팔짱을 끼는 감촉도 은근 나쁘지 않다. 유진은 다정한 어투로 로리에게 속삭였다.
“나한테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무슨 냄새인데?”
군인들에게 나는 냄새라고 해 봤자 시큼한 땀 냄새 아니면 큼큼한 발 냄새가 전부다. 게다가 유진은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호수에 한 번 빠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서 날 큼큼한 냄새에 물비린내까지 합쳐져서 더욱 고약한 냄새가 나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런데 자신에게 맛있는 냄새가 난다 하니 더욱 이상하다.
‘혹시 사람을 잡아먹는 그런 종은 아니겠지?’
자신과 처음 만났던 래트가 쥐의 귀를 가졌던 만큼 로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여자도 원래는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혹시 호랑이나 표범 같은 그런 맹수는 설마 아니겠지? 순간 유진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유진한테는 달콤한 복숭아 향이 나는 걸? 한입 베어 물면 즙이 쭈욱 나올 거 같은, 잘 익고 향긋한 복숭아 말이야. 아아, 또 그런 향도 있어.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사과나 귤의 향기. 여하튼 자꾸 맡고 싶고, 먹고 싶은 향이야.”
“……어. 그, 그래?”
무언가 분위기가 요상해진다. 유진은 절로 몸이 움츠러들 것 같았다.
“다른 세계의 인간이 핑크빛 물약을 먹으면 환상적인 향을 풍기면서 마음을 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긴 했는데…… 정말일지는 몰랐어. 이렇게 환상적일 줄이야. 전설 최고야.”
“뭐? 핑크빛 물약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유진에게 짚이는 것이 있었다. 하강하던 자신이 러브호텔 같은 방에서 마셨던, 불량 식품 분위기가 돌던 이상한 정력제 생각이 이제야 난 것이다. 그 정력제에서 나던 향과 로리가 묘사하던 향이 비슷한 것이 아마 연결 고리가 될 것이다.
‘설마 그 약의 효과가 내가 정력이 세지는 것이 아니라, 혹시 상대방의 정력이 세지는 거 아냐? 무슨 이런 엿 같은 약이 다 있어?’
순간 유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론 현재 사태에서 자신의 과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수상한 것일수록 전후 사정을 더 알아보고 먹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유진은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아까보다도 더 많은 기척이 그의 주변에서 느껴진 탓이다. 몇 십? 아니다, 몇 백은 될 것 같다. 유진이 아무리 각개 전투에 능하다 해도 그는 그저 인간일 뿐이다.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절대적인 수의 우위를 이길 방도는 결코 없다. 그런 유진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로리가 웃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 유진. 있잖아.”
“어, 왜?”
“한 번만이라도 좋아. 네 달콤한 속살을 빨아 보면 안 될까? 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입에 넣고 빨아 보고 싶어.”
“그게 무슨! 저, 저기…… 그게…….”
“전설대로라면 정말 환상적인 밤이겠지?”
“이 손 놔!”
유진은 순간 로리의 팔을 자신의 팔에서 거칠게 풀어냈다. 하지만 로리의 표정은 전혀 기분이 상한 것 같지가 않다.
그 순간 숲에서 다른 이들이 하나씩 흐느적거리며 나왔다. 그중에는 래트처럼 동물의 귀나 꼬리를 단 이들도 있었고, 로리와 비슷하게 화려한 색의 긴 머리를 가진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흐리멍텅했다.
순간 유진은 약간의 공포를 느꼈다. 상대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았던 탓이다. 무수히 많은 경쟁자가 등장하자 래트와 로리가 동시에 긴장하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그들도 이 엄청난 수의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유진의 시선이 탈출구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탈출할 수 있는 곳이 보이질 않는다. 일단 부딪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것은 군 상부의 늘상 있는 요구이기도 하니까. 정 안 되면 다시 호수에라도 뛰어들 생각이었다. 유진이 일단 가장 가까이 온 동물에게 주먹을 휘두르려는 때였다.“냐아아아아아아아옹!”
온 숲을 울리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다른 고양이에게 경고를 날리는 것과 유사했다. 거대한 울림소리는 폭풍처럼 숲과 호수를 뒤집고 근처 산에 부딪쳐 거대한 메아리를 울리며 잦아들었다. 순간 유진에게 다가오던 이들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다.
“뭐야, 체셔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체셔가 어디? 어디 있냐고?”
“몰라! 난 세상에서 고양이가 제일 싫어!”
“으와아아아! 도망쳐야 해!”
순간 수백의 무리가 패닉을 일으켰다. 일부는 옷 속에 숨겨 둔 자신의 날개로 하늘을 날아서 도망쳤다. 로리가 바로 그러했다. 다른 일부는 자신들의 빠른 발을 이용해 숲의 어두움 속으로 도망갔다. 래트가 바로 그러했다.
이런 혼란이 가라앉자 호숫가에 남은 것은 오직 유진 혼자뿐이었다.
체셔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천천히 아래를 바라보았다. 호숫가에는 오직 이방인 혼자만 남아 주변을 훑어보고 있다.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서 나는 달콤한 향이 느껴진다. 하지만 못 참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흥!”
전설에 나오는 이상한 약의 효과에 홀려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질색이다. 그런 것으로 여기 이상한 나라의 주민인 동물들이 다툼을 벌이는 것도 그다지 좋지 않다. 단지 그것 때문에 그는 경고음을 낸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에게서 시선이 떠나질 않는다. 이렇게 거리가 먼 곳임에도 불구하고! 체셔는 어쩌면 이런 자신의 반응이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옛날 어린 앨리스를 처음 봤을 때 그녀의 곁에 계속 있고 싶었던 것처럼.
체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와 동시의 그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가 있었던 자리에는 그의 미소만이 남았다.
2장. 나름의 적응(?) (1)
-1-
혼자가 되고 나서야 유진은 이제 자신의 현재 상황을 대충이나마 판단할 수 있었다. 이상한 나라로 들어오는 동안 들른 이상한 방에서 이상한 물약을 먹었고, 그 결과 자신의 몸에서 다른 이를 유혹하는, 일종의 페로몬이 풍겨 나오는 것까지 이해했다. 여기까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비슷한 전개다.
‘그런데 다음 내용이 뭐였지?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너무 어릴 때 읽었던 동화라 그런지 다음 내용이 쉬이 생각이 나질 않지만 현재 유진 자신의 목표는 잘 알고 있다. 이 세계로 처음 들어왔을 때의 최고 목표는 바로 그 선배 놈을 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변화된 상황으로 목표를 수정해야만 한다. 선배 놈을 추격하기도 전에 자신이 추격당하는 것은 꿈에서라도 상상하기 싫다.
‘그래, 일단은 내 몸에서 난다는 냄새를 숨겨야겠어.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눈에 띄는 복장도 바꿔 입을 필요가 있고.’
여기가 이상한 나라가 맞다 한다면 적어도 150년 전의 세계일 것이다. 지금 유진의 복장은 너무 현대적이라 눈에 띄었다. 게다가 호수 물에 젖어서 눅눅하기까지 하다. 이런 상태라면 자신에게 난다는 달콤한 냄새가 훨씬 강력하게 퍼질 것이다.
모든 군사 행동의 시작은 정보 수집이다. 손자병법의 문구가 아니더라도 지형지물을 잘 알아야 적에게서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유진은 일단 그 근처에서 가장 높은 지형을 찾았다. 근처의 지형지물을 전혀 모르니 무엇이 있는지부터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어, 저기 좋네.”
마침 적당한 동산이 하나 있었다. 한여름에 완전 군장하고 오르는 거였으면 짜증부터 났겠지만 지금 유진은 빈 몸이다. 정보 수집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지 않던가. 30분에 걸쳐 호수 근처에 있는 제법 높아 보이는 동산으로 오르자, 곧 근방의 지형이 환하게 유진의 눈에 들어왔다.
“우와! 풍경 좋구나.”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숲이나 자연뿐이라는 것이 좀 아쉽기는 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탓에 군에 와서야 가도 가도 숲인 지형을 마주했다.
이런 식으로 녹음이 풍성한 지형은 정말 처음인 것 같다. 어쩌면 여기 사는 주민들이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여기로 들어와 짐승들만 만났고 사람은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어, 저기 집이 있네?”
녹음의 연속에 벌써 지쳐 버린 그의 눈이 기가 막히게 바로 숲 사이에 위치한 전원주택을 찾아냈다.
한국의 건축 양식도 아니고 녹음 사이에 있긴 했지만 그것은 확실히 인간이 거주하는 형태의 집이었다. 집의 지붕과 기둥을 보는 순간 그의 위장이 꼬르르륵 울렸다.
“일단 저 집으로 가 보자. 가면 무슨 수가 있겠지.”
마음을 정한 이상 유진에게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유진의 눈이 저택으로 가는 최단 루트를 찾아냈다. 지형지물에 익숙하도록 훈련받은 군인이라 그리 어렵지 않게 산세를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저택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자신의 냄새를 맡고 달려들지도 모르는 짐승들을 피하려면 속도전이 필요한 법이다.
“일단 가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음식을 조금 먹어야겠어. 아니, 밥부터 먹고 옷을 갈아입는 쪽이 나으려나?”
무엇이 먼저가 되었든 지금은 최대한 빨리 여기를 뜨는 것이 중요했다. 앞으로의 일은 밥을 먹고 나서 생각해 볼 참이었다.
대리석으로 지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저택에 마차가 도착했다. 그 마차에서 내린 이는 고고한 태도로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하얀 머리카락과 하얀 토끼 귀, 붉은 눈을 가진 그, 화이트가 나타나자 하인인 기니피그 패트가 주인을 알아보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주인님, 이제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조금 피곤하니 2층으로 차를 가져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자신의 방에 들어선 화이트는 신경질적인 태도로 장갑을 벗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올라간 지상에서 앨리스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앨리스가 살던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엄청난 소음과 무수한 사람의 홍수에 화이트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나마 자신이 있었던 곳과 비슷할 정도로 녹음이 많은 곳으로 이동했으나 그곳에는 미묘하게 자극적인 냄새가 가득했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자주 맡았던 화약이란 것의 냄새와 비슷했다.
사용하는 말이 다른 것도 다른 것이지만 그곳의 인간들이 쓰는 물건들은 얼핏 보아도 자신들의 시대와는 다른 고차원 기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리에는 마차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를 지닌 말 없는 마차가 거리를 누비고, 사람들은 모두 이상한 사각형의 물체를 들고 다니면서 이야기한다. 하늘에는 신기한 것들이 떠다니고 거리에는 밤이고 낮이고 온통 불빛이 가득하다.
그제야 그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있던 세계와 앨리스가 있던 세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며, 바깥의 세계가 자신들의 세계보다 빨리 진보되어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폐하께 도대체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나.”
여왕 폐하가 급서한 이후 하트 왕은 하루가 다르게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냉혹하고 다혈질이던 여왕이 생존했을 때 곁에서 온화함을 유지하던 왕은 여왕의 사후 혼잣말을 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더니, 여왕의 성격을 닮아 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여왕의 생전 모습과 비슷한 인형을 만들어 일인이역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왕의 명령은 지엄한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엉터리라고 해도 신하인 이상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화이트는 그 근처에서 앨리스의 기운이 느껴지는 인간을 유혹해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에게 암시를 걸어 자신의 모습을 그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바꾼 것이다. 작전은 성공했다. 인간은 그에게 홀려 이곳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다음 문제는 그 인간이 이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주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약간 배타적인 습성이 있다. 그들의 집은 그들 자신만의 성이기 때문에 이 근처의 집들을 일일이 수색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그래도 찾아내야 한다.
“빌! 안으로 들어와.”
화이트의 명령에 그의 시종인 도마뱀 빌이 안으로 들어왔다. 화이트는 성미가 급한 주인이기에 빌은 최대한 빨리 그의 앞에 와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이 근처에서 혹시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의 소문이 없던가?”
“이방인의 소문요? 저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혹시 그 엄청난 앨리스가 다시 돌아온 것입니까?”
빌이 떨면서 되물었다. 지난번 어린 소녀 앨리스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거대화된 소녀의 손길에 혼쭐이 났던 빌은 이제 이방인이라면 치가 떨릴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빌을 바라보는 화이트의 시선은 여전히 냉정했다.
“앨리스는 아니야. 그녀는 이제 없다.”
“아, 네.”
“내가 찾는 것은 20대 중반의 남자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고 특이한 올리브색 의복을 입고 있을 거다. 집 안의 하인들을 죄다 동원해 반드시 찾아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빌이 공손히 인사하며 방을 나갔다. 화이트는 목 주변의 단추를 하나 풀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빌은 성실하지만 생각보다 머리가 나쁜 편이라 그가 주도하는 수색에선 별 성과가 없을 것이다.
하트 왕이 앨리스를 데려오라고 명을 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하트 여왕이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하지만 왕의 지근거리에서 그를 오래 모셨던 화이트는 왕의 속내를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왕은 새로운 여왕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트 여왕이 살아 있었을 때 여왕은 폭군의 상징이었다. 여왕은 심심하면 화를 냈고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이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참수 명령을 내렸다. 여왕은 이름만 하트 여왕이었지 실은 죽음을 암시하는 스페이드의 여왕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화이트는 그런 여왕의 곁에서 온화하게 웃는 왕이 실은 여왕의 악행을 부추기며 여왕에게 악명을 전부 몰아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참수 명령을 내릴 때마다 왕은 나중에 그들을 찾아가 몰래 사면시켜 주곤 했다. 그 덕에 원성은 여왕이, 칭송은 왕이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모든 시도에 단 한 가지의 목적만이 걸려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일을 쉽게 추진하면서 악명까지 전부 안고 갈 누군가가 필요했다면 다른 대신을 내세워 일을 진행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하트 왕은 어쩌면 어린 앨리스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었고, 방해꾼이 여왕이 사라지자 그녀를 데려오라 한 것일지도 모른다.
왕의 목적이 어찌 되었든 그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앨리스의 세계가 발전된 모습을 봤을 때, 예전에 이 세계로 왔던 앨리스는 이미 나이를 먹어 사망했을 확률이 높았다. 자신의 면피를 위해 앨리스 대신 데려온 사내는 앨리스의 혈통을 이어받고는 있었으나 그 피가 아주 미미하다.
자신이 데려온 그 사내를 왕이 어떤 식으로 이용하든 화이트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왕의 손발. 왕이 시키는 대로 행할 뿐이다. 왕의 명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또 쓸모를 증명했으니 그는 아마도 다음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1장. 여기가 대체 어디냐고! (3)
하트 왕은 오늘도 혼자서 높은 궁전에서 아래에 펼쳐진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왕국은 오늘도 여전히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왕의 얼굴에는 그 누구보다도 온화해 보이는 표정이 담겨 있었지만 근처에는 그 어떤 신하도, 시종도 군사도 없었다. 그만큼 왕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당신이 좋아해 마지않던 그 아이가 곧 여기로 도착할 것이오.”
하트 왕은 그렇게 속삭였다.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상대가 없었으니 그 속삭임은 왕 혼자의 허무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왕의 시선은 정원을 떠나 더 먼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가서 앨리스를 유혹해 여기로 데려오라 흰 토끼에게 명을 내렸지만 아직 궁으로 도착을 하지 않았다. 그 애가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간 지 세월이 제법 지났다. 자신의 반려, 하트 여왕이 무척이나 좋아했던 여자애는 이제 제법 아름다운 처녀로 자랐을 것이다. 그 모습이 상당히 기대가 된다. 처녀가 된 소녀가 다시 이곳으로 온다면 이번이야말로 즐거운 게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아이가 오면 당신도 즐거운 크로케 경기를 할 수 있지 않겠소?”
그가 자신의 손 언저리를 보며 즐겁게 속삭였다. 왕의 손에는 여왕의 모습을 한 인형이 있었다. 인형술사가 인형극을 위해 만든 것 같은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놈의 목을 잘라라.”
인형을 바라보던 왕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다시금 감돌기 시작했다. 온화한 표정과 맞지 않는 그 무시무시한 말은 바로 왕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형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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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냥 벽에 부딪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유진을 감싸는 것은 차가운 물이었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물 위로 떠오르기 위해 헤엄을 쳤다.
수면 위로 올라와 주변을 살펴보니 래트가 유유히 앞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이따금 자신을 보면서 헤엄을 치는 것을 보니 가는 길을 충분히 유도할 의도인 모양이다.
유진은 래트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에 그의 유도를 따라 물가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한 10분 정도가 지나자 둘은 물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제야 뒤를 바라볼 여유가 생긴 유진은 천천히 자신이 온 곳을 둘러보았다. 거기에는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거대한 호수가 하나 있었다.
‘역시 이상한 나라는 이상한 나라 맞는가 보군.’
거울의 반대쪽이 거울이 아닌 호수라니 역시 상상 이상이다. 유진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이후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전혀 없다.
모든 옷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군복은 젖으면 더 무거워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젖어 버린 상태다. 언제나 쓰고 있어야 할 베레모는 어느샌가 사라진 지 오래다. 유진은 일단 머리 위에서 줄줄 흐르는 물부터 턴 다음 천천히 군복 상의를 벗었다. 겨우 벗은 상의를 들어서 쭉쭉 짜니 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엉?”
열심히 군복 상의를 짜던 유진은 자신을 응시하는 무수한 시선들을 느꼈다. 바로 자신의 옆에서 눈에 불이 날 것처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래트는 둘째 치고, 호수 근처에 있는 숲과 호숫가에서 그를 보는 눈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눈들이 하나같이 조금씩 맛이 간 느낌이다.
유진은 서둘러 군복의 물기를 마저 짠 뒤 탈탈 털어 대충 편 다음 얼른 주워 입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무수한 시선들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군복 상의 안에는 물론 러닝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상의를 입어서 맨살이 가려지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욕망의 대상이 되는 기분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엿 같다.
“뭐야! 눈 깔아, 이 새끼들아. 그 눈깔 얼른 안 돌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유진이 호수가 떠나가라 고함을 쳤다. 그의 앞에 있었던 것들이 자신에게 훈련을 받는 신병이었으면 오금을 못 펴고 말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유진을 바라보는 열렬한 시선들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유진의 얼굴이 더욱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숲속에서 그의 앞으로 나왔다. 화려한 붉은색의 긴 머리를 한 여자였다. 인간의 머리 색 중에 저렇게 선명한 빨간색이 있었던가? 유진의 시선은 여자의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예쁜 얼굴에 닿았다. 여자는 제법 미인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곁으로 오자 사납게 떠진 유진의 눈매가 즉시 풀리기 시작한다.
“저기, 미안해. 우리가 너무 예의 없이 바라봤지?”
여자가 유진의 곁으로 와서는 몸을 비비 꼬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미인인 것 같다. 유진은 래트에게 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상냥한 태도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뭐, 신기한 세계에서 온 상대라면 볼 수도 있는 거지 뭐.”
군에서 만날 수 있는 여자는 언제나 깐깐하고 말이 많은 여군들이나 자신들에게 잘 대해 주지만 어머니뻘이라 할 수 있는 부녀회장 정도다. 그렇기에 유진은 기본적으로 여자들에게 상당히 약한 편이었다. 그것도 이런 미인이면 특히 말이다.
“그렇게 말해 주니 정말 기뻐. 난 로리라고 해.”
“난 유진이야. 음, 유진 김.”
“앗, 자기야. 나한테는 이름도 안 알려 주고, 왜 쟤만!”
옆에서 자신에게 항의하는 래트는 완전히 무시한 채 유진은 상냥한 얼굴로 로리라 자신의 이름을 밝힌 여자에게 웃어 주었다. 그러자 로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도 정말 예뻤다.
“유진은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정말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도 폴폴 나고. 성격도 상냥하고. 아이, 좋아라.”
“뭐?”
중간에 절대 흘려 넘길 수 없는 단어가 나오자 헤벌레 웃던 유진이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래트도 아까 자신을 보고 달큼한 냄새가 난다고 했었지.
“저기…… 있잖아, 로리 씨.”
“으응, 왜?”
로리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손이 어느새 자신의 팔을 은근히 잡고 있었다. 래트가 그랬다가는 바로 집어 던졌겠지만 유진은 미인에게 여전히 약했다. 로리가 슬그머니 팔짱을 끼는 감촉도 은근 나쁘지 않다. 유진은 다정한 어투로 로리에게 속삭였다.
“나한테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무슨 냄새인데?”
군인들에게 나는 냄새라고 해 봤자 시큼한 땀 냄새 아니면 큼큼한 발 냄새가 전부다. 게다가 유진은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호수에 한 번 빠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서 날 큼큼한 냄새에 물비린내까지 합쳐져서 더욱 고약한 냄새가 나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런데 자신에게 맛있는 냄새가 난다 하니 더욱 이상하다.
‘혹시 사람을 잡아먹는 그런 종은 아니겠지?’
자신과 처음 만났던 래트가 쥐의 귀를 가졌던 만큼 로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여자도 원래는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혹시 호랑이나 표범 같은 그런 맹수는 설마 아니겠지? 순간 유진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유진한테는 달콤한 복숭아 향이 나는 걸? 한입 베어 물면 즙이 쭈욱 나올 거 같은, 잘 익고 향긋한 복숭아 말이야. 아아, 또 그런 향도 있어.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사과나 귤의 향기. 여하튼 자꾸 맡고 싶고, 먹고 싶은 향이야.”
“……어. 그, 그래?”
무언가 분위기가 요상해진다. 유진은 절로 몸이 움츠러들 것 같았다.
“다른 세계의 인간이 핑크빛 물약을 먹으면 환상적인 향을 풍기면서 마음을 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긴 했는데…… 정말일지는 몰랐어. 이렇게 환상적일 줄이야. 전설 최고야.”
“뭐? 핑크빛 물약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유진에게 짚이는 것이 있었다. 하강하던 자신이 러브호텔 같은 방에서 마셨던, 불량 식품 분위기가 돌던 이상한 정력제 생각이 이제야 난 것이다. 그 정력제에서 나던 향과 로리가 묘사하던 향이 비슷한 것이 아마 연결 고리가 될 것이다.
‘설마 그 약의 효과가 내가 정력이 세지는 것이 아니라, 혹시 상대방의 정력이 세지는 거 아냐? 무슨 이런 엿 같은 약이 다 있어?’
순간 유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론 현재 사태에서 자신의 과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수상한 것일수록 전후 사정을 더 알아보고 먹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유진은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아까보다도 더 많은 기척이 그의 주변에서 느껴진 탓이다. 몇 십? 아니다, 몇 백은 될 것 같다. 유진이 아무리 각개 전투에 능하다 해도 그는 그저 인간일 뿐이다.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절대적인 수의 우위를 이길 방도는 결코 없다. 그런 유진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로리가 웃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 유진. 있잖아.”
“어, 왜?”
“한 번만이라도 좋아. 네 달콤한 속살을 빨아 보면 안 될까? 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입에 넣고 빨아 보고 싶어.”
“그게 무슨! 저, 저기…… 그게…….”
“전설대로라면 정말 환상적인 밤이겠지?”
“이 손 놔!”
유진은 순간 로리의 팔을 자신의 팔에서 거칠게 풀어냈다. 하지만 로리의 표정은 전혀 기분이 상한 것 같지가 않다.
그 순간 숲에서 다른 이들이 하나씩 흐느적거리며 나왔다. 그중에는 래트처럼 동물의 귀나 꼬리를 단 이들도 있었고, 로리와 비슷하게 화려한 색의 긴 머리를 가진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흐리멍텅했다.
순간 유진은 약간의 공포를 느꼈다. 상대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았던 탓이다. 무수히 많은 경쟁자가 등장하자 래트와 로리가 동시에 긴장하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그들도 이 엄청난 수의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유진의 시선이 탈출구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탈출할 수 있는 곳이 보이질 않는다. 일단 부딪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것은 군 상부의 늘상 있는 요구이기도 하니까. 정 안 되면 다시 호수에라도 뛰어들 생각이었다. 유진이 일단 가장 가까이 온 동물에게 주먹을 휘두르려는 때였다.“냐아아아아아아아옹!”
온 숲을 울리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다른 고양이에게 경고를 날리는 것과 유사했다. 거대한 울림소리는 폭풍처럼 숲과 호수를 뒤집고 근처 산에 부딪쳐 거대한 메아리를 울리며 잦아들었다. 순간 유진에게 다가오던 이들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다.
“뭐야, 체셔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체셔가 어디? 어디 있냐고?”
“몰라! 난 세상에서 고양이가 제일 싫어!”
“으와아아아! 도망쳐야 해!”
순간 수백의 무리가 패닉을 일으켰다. 일부는 옷 속에 숨겨 둔 자신의 날개로 하늘을 날아서 도망쳤다. 로리가 바로 그러했다. 다른 일부는 자신들의 빠른 발을 이용해 숲의 어두움 속으로 도망갔다. 래트가 바로 그러했다.
이런 혼란이 가라앉자 호숫가에 남은 것은 오직 유진 혼자뿐이었다.
체셔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천천히 아래를 바라보았다. 호숫가에는 오직 이방인 혼자만 남아 주변을 훑어보고 있다.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서 나는 달콤한 향이 느껴진다. 하지만 못 참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흥!”
전설에 나오는 이상한 약의 효과에 홀려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질색이다. 그런 것으로 여기 이상한 나라의 주민인 동물들이 다툼을 벌이는 것도 그다지 좋지 않다. 단지 그것 때문에 그는 경고음을 낸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에게서 시선이 떠나질 않는다. 이렇게 거리가 먼 곳임에도 불구하고! 체셔는 어쩌면 이런 자신의 반응이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옛날 어린 앨리스를 처음 봤을 때 그녀의 곁에 계속 있고 싶었던 것처럼.
체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와 동시의 그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가 있었던 자리에는 그의 미소만이 남았다.
2장. 나름의 적응(?) (1)
-1-
혼자가 되고 나서야 유진은 이제 자신의 현재 상황을 대충이나마 판단할 수 있었다. 이상한 나라로 들어오는 동안 들른 이상한 방에서 이상한 물약을 먹었고, 그 결과 자신의 몸에서 다른 이를 유혹하는, 일종의 페로몬이 풍겨 나오는 것까지 이해했다. 여기까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비슷한 전개다.
‘그런데 다음 내용이 뭐였지?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너무 어릴 때 읽었던 동화라 그런지 다음 내용이 쉬이 생각이 나질 않지만 현재 유진 자신의 목표는 잘 알고 있다. 이 세계로 처음 들어왔을 때의 최고 목표는 바로 그 선배 놈을 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변화된 상황으로 목표를 수정해야만 한다. 선배 놈을 추격하기도 전에 자신이 추격당하는 것은 꿈에서라도 상상하기 싫다.
‘그래, 일단은 내 몸에서 난다는 냄새를 숨겨야겠어.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눈에 띄는 복장도 바꿔 입을 필요가 있고.’
여기가 이상한 나라가 맞다 한다면 적어도 150년 전의 세계일 것이다. 지금 유진의 복장은 너무 현대적이라 눈에 띄었다. 게다가 호수 물에 젖어서 눅눅하기까지 하다. 이런 상태라면 자신에게 난다는 달콤한 냄새가 훨씬 강력하게 퍼질 것이다.
모든 군사 행동의 시작은 정보 수집이다. 손자병법의 문구가 아니더라도 지형지물을 잘 알아야 적에게서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유진은 일단 그 근처에서 가장 높은 지형을 찾았다. 근처의 지형지물을 전혀 모르니 무엇이 있는지부터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어, 저기 좋네.”
마침 적당한 동산이 하나 있었다. 한여름에 완전 군장하고 오르는 거였으면 짜증부터 났겠지만 지금 유진은 빈 몸이다. 정보 수집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지 않던가. 30분에 걸쳐 호수 근처에 있는 제법 높아 보이는 동산으로 오르자, 곧 근방의 지형이 환하게 유진의 눈에 들어왔다.
“우와! 풍경 좋구나.”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숲이나 자연뿐이라는 것이 좀 아쉽기는 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탓에 군에 와서야 가도 가도 숲인 지형을 마주했다.
이런 식으로 녹음이 풍성한 지형은 정말 처음인 것 같다. 어쩌면 여기 사는 주민들이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여기로 들어와 짐승들만 만났고 사람은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어, 저기 집이 있네?”
녹음의 연속에 벌써 지쳐 버린 그의 눈이 기가 막히게 바로 숲 사이에 위치한 전원주택을 찾아냈다.
한국의 건축 양식도 아니고 녹음 사이에 있긴 했지만 그것은 확실히 인간이 거주하는 형태의 집이었다. 집의 지붕과 기둥을 보는 순간 그의 위장이 꼬르르륵 울렸다.
“일단 저 집으로 가 보자. 가면 무슨 수가 있겠지.”
마음을 정한 이상 유진에게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유진의 눈이 저택으로 가는 최단 루트를 찾아냈다. 지형지물에 익숙하도록 훈련받은 군인이라 그리 어렵지 않게 산세를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저택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자신의 냄새를 맡고 달려들지도 모르는 짐승들을 피하려면 속도전이 필요한 법이다.
“일단 가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음식을 조금 먹어야겠어. 아니, 밥부터 먹고 옷을 갈아입는 쪽이 나으려나?”
무엇이 먼저가 되었든 지금은 최대한 빨리 여기를 뜨는 것이 중요했다. 앞으로의 일은 밥을 먹고 나서 생각해 볼 참이었다.
대리석으로 지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저택에 마차가 도착했다. 그 마차에서 내린 이는 고고한 태도로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하얀 머리카락과 하얀 토끼 귀, 붉은 눈을 가진 그, 화이트가 나타나자 하인인 기니피그 패트가 주인을 알아보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주인님, 이제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조금 피곤하니 2층으로 차를 가져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자신의 방에 들어선 화이트는 신경질적인 태도로 장갑을 벗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올라간 지상에서 앨리스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앨리스가 살던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엄청난 소음과 무수한 사람의 홍수에 화이트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나마 자신이 있었던 곳과 비슷할 정도로 녹음이 많은 곳으로 이동했으나 그곳에는 미묘하게 자극적인 냄새가 가득했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자주 맡았던 화약이란 것의 냄새와 비슷했다.
사용하는 말이 다른 것도 다른 것이지만 그곳의 인간들이 쓰는 물건들은 얼핏 보아도 자신들의 시대와는 다른 고차원 기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리에는 마차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를 지닌 말 없는 마차가 거리를 누비고, 사람들은 모두 이상한 사각형의 물체를 들고 다니면서 이야기한다. 하늘에는 신기한 것들이 떠다니고 거리에는 밤이고 낮이고 온통 불빛이 가득하다.
그제야 그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있던 세계와 앨리스가 있던 세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며, 바깥의 세계가 자신들의 세계보다 빨리 진보되어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폐하께 도대체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나.”
여왕 폐하가 급서한 이후 하트 왕은 하루가 다르게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냉혹하고 다혈질이던 여왕이 생존했을 때 곁에서 온화함을 유지하던 왕은 여왕의 사후 혼잣말을 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더니, 여왕의 성격을 닮아 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여왕의 생전 모습과 비슷한 인형을 만들어 일인이역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왕의 명령은 지엄한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엉터리라고 해도 신하인 이상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화이트는 그 근처에서 앨리스의 기운이 느껴지는 인간을 유혹해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에게 암시를 걸어 자신의 모습을 그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바꾼 것이다. 작전은 성공했다. 인간은 그에게 홀려 이곳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다음 문제는 그 인간이 이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주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약간 배타적인 습성이 있다. 그들의 집은 그들 자신만의 성이기 때문에 이 근처의 집들을 일일이 수색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그래도 찾아내야 한다.
“빌! 안으로 들어와.”
화이트의 명령에 그의 시종인 도마뱀 빌이 안으로 들어왔다. 화이트는 성미가 급한 주인이기에 빌은 최대한 빨리 그의 앞에 와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이 근처에서 혹시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의 소문이 없던가?”
“이방인의 소문요? 저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혹시 그 엄청난 앨리스가 다시 돌아온 것입니까?”
빌이 떨면서 되물었다. 지난번 어린 소녀 앨리스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거대화된 소녀의 손길에 혼쭐이 났던 빌은 이제 이방인이라면 치가 떨릴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빌을 바라보는 화이트의 시선은 여전히 냉정했다.
“앨리스는 아니야. 그녀는 이제 없다.”
“아, 네.”
“내가 찾는 것은 20대 중반의 남자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고 특이한 올리브색 의복을 입고 있을 거다. 집 안의 하인들을 죄다 동원해 반드시 찾아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빌이 공손히 인사하며 방을 나갔다. 화이트는 목 주변의 단추를 하나 풀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빌은 성실하지만 생각보다 머리가 나쁜 편이라 그가 주도하는 수색에선 별 성과가 없을 것이다.
하트 왕이 앨리스를 데려오라고 명을 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하트 여왕이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하지만 왕의 지근거리에서 그를 오래 모셨던 화이트는 왕의 속내를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왕은 새로운 여왕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트 여왕이 살아 있었을 때 여왕은 폭군의 상징이었다. 여왕은 심심하면 화를 냈고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이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참수 명령을 내렸다. 여왕은 이름만 하트 여왕이었지 실은 죽음을 암시하는 스페이드의 여왕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화이트는 그런 여왕의 곁에서 온화하게 웃는 왕이 실은 여왕의 악행을 부추기며 여왕에게 악명을 전부 몰아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참수 명령을 내릴 때마다 왕은 나중에 그들을 찾아가 몰래 사면시켜 주곤 했다. 그 덕에 원성은 여왕이, 칭송은 왕이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모든 시도에 단 한 가지의 목적만이 걸려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일을 쉽게 추진하면서 악명까지 전부 안고 갈 누군가가 필요했다면 다른 대신을 내세워 일을 진행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하트 왕은 어쩌면 어린 앨리스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었고, 방해꾼이 여왕이 사라지자 그녀를 데려오라 한 것일지도 모른다.
왕의 목적이 어찌 되었든 그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앨리스의 세계가 발전된 모습을 봤을 때, 예전에 이 세계로 왔던 앨리스는 이미 나이를 먹어 사망했을 확률이 높았다. 자신의 면피를 위해 앨리스 대신 데려온 사내는 앨리스의 혈통을 이어받고는 있었으나 그 피가 아주 미미하다.
자신이 데려온 그 사내를 왕이 어떤 식으로 이용하든 화이트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왕의 손발. 왕이 시키는 대로 행할 뿐이다. 왕의 명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또 쓸모를 증명했으니 그는 아마도 다음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