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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조교님 4화
2장. 나름의 적응(?) (2)
-2-
유진은 빠르게 저택에 접근했다. 저택을 오고 가는 이들이 대부분 동물의 귀를 달고 있는 걸 보면 여기의 주인도 동물 귀를 달고 다닐 확률이 높다. 유진은 최대한 머리를 짜내어 앨리스에 나오는 동물들을 유추해 보았지만, 이미 굳어져 버린 군인의 머리에서 보드라운 동화 내용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그는 기억을 짜내는 것을 포기하고 일단 저택부터 살폈다.
‘일단 부엌의 위치 확보.’
각 나라별로 집의 구조가 다르긴 했지만, 배고픈 군인이라면 본능적으로 먹을 것이 있는 곳을 탐지하는 센스가 있다. 마침 식당에서는 향긋한 쿠키가 구워지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장작을 때어 오븐을 데우는 모양인지 연기가 가득한 식당 안에는 여자 한 명이 혼자서 쿠키를 굽고 있었다.
망설임의 시간은 짧았다. 유진은 즉시 탈출 경로를 확보하는 동시에 몰래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부엌으로 먼저 들어온 것은 일단 요란한 소리를 내는 자신의 위장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그와 동시에 맛있는 냄새가 풀풀 풍기는 곳으로 가면, 자신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감출 수 있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유진은 번개 같은 속도로 연기가 가득한 부엌의 안으로 들어섰다. 선반 위에는 이제 오븐에서 꺼낸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쿠키가 접시 위에 있는 것이 보인다.
쿠키의 달달한 냄새에 유진이 바로 돌진했다. 요리를 하는 하녀가 돌아선 틈을 타서 접시에 담긴 쿠키를 재빨리 낚아챈 것이다. 하녀는 차를 우려내느라 소리 없이 움직이는 유진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우와, 이 얼마 만에 먹는 사제 음식이냐.’
갓 구운 쿠키가 유진의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단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지만 군인이라면 단것은 돌이라도 삼킬 수 있다. 게다가 쿠키는 정말이지 맛이 있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쿠키가 아니라 고기를 먹고 싶었지만, 남의 음식을 몰래 축내는 중에 더운밥, 찬밥 가릴 형편이 못 된다.
갓 구운 쿠키 한 접시가 이내 빈 접시가 되었다. 쿠키 부스러기까지 입 안에 털어 넣은 그는 서둘러 다른 곳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그러자 차를 다 우려낸 하녀가 쿠키가 있었던 곳으로 다가왔다.
“어? 이상하네. 분명히 홍차와 곁들일 쿠키를 얹어 놨는데?”
하녀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어렸다. 유진은 약간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기는 했으나 그녀의 눈을 피해 도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여자 하나 제압하고 도망치는 것이야 누워서 떡 먹기같이 쉬운 일이지만, 음식까지 훔쳐 먹은 주제에 민간인 여자에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천천히 후진했다.
“이걸 어쩐다지? 모양이 안 좋은 쿠키밖에 없는데…….”
그녀는 다시 한 번 선반과 다른 곳을 확인했으나 사라진 쿠키가 다시 나타날 리가 없다. 그녀가 부엌을 다시 뒤지는 동안 요란한 벨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차를 가져오라고 재촉하는 화이트의 벨소리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수 없네. 이거라도 내어 가야지.”
하녀는 어쩔 수 없이 남은 쿠키를 접시에 얹어서 들고 부엌을 나섰다. 아까 접시에 올려 둔 쿠키보다 모양은 영 떨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북풍한설이 몰아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정성껏 우린 홍차와 쿠키를 들고 화이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메리 앤, 쿠키의 상태가 왜 이 모양이지?”
다과를 받자마자 화이트가 바로 입을 열었다. 예민한 그의 눈은 쿠키의 모양이 그다지 예쁜 것이 아님을 바로 알아본 것이다.
“아, 그것이…… 보기 좋은 것으로 미리 꺼내 둔 쿠키가 귀신같이 사라져 버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주인님.”
하녀 메리 앤이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지만 화이트는 그녀를 무심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그래, 알았다. 그만 나가 봐도 된다.”
“네, 주인님.”
화이트는 메리 앤이 나가자 천천히 백자 찻잔을 들어 올려 홍차를 음미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홍차의 맛은 여전히 좋았다. 그의 붉은 눈이 서서히 쿠키를 향했다. 아몬드를 곱게 슬라이스해서 구운 쿠키는 맛도 좋았지만 홍차와 정말 잘 어울리는 간식이기도 했다.
“쿠키가 없어졌다는 것이 좀 걸리는군.”
메리 앤은 그동안 화이트의 저택에서 오래 일하던 성실한 하녀였다. 그런 그녀가 일부러 모양이 안 좋은 쿠키를 내놓을 리가 없다. 안 그래도 자신이 유혹해 온 이방인이 없어진 것이 바로 이 근방이다. 화이트의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답은 바로 나왔다. 이방인이 지금 그의 집 안에 있는 것이다.
그는 즉시 벨의 손잡이 줄을 잡아당겼다. 그의 호출을 들은 도마뱀 빌이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급히 시킬 일이 생겼다.”
“급히 시키실 일이라니요?”
“네가 곧 찾으러 나가야 할 이방인이 지금 이 저택에 있어.”
“정말이십니까?”
빌의 표정이 즉시 진지해졌다. 화이트는 빌의 외형을 훑어보았다. 빌은 도마뱀답게 가느다란 팔다리를 가지고 있다. 건장한 체격이고 성인인 인간 남자 이방인과 일대일로 붙는다면 상당히 불리하다. 다른 이들을 붙여 주는 편이 승률이 더 높을 것이다.
“일단 혼자서 덤비지는 말고 패트를 비롯해서 다른 이들을 죄다 소집해. 이방인이 이 저택 안에 있는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한다.”
“네, 주인님.”
공손히 대답하는 빌의 눈에 결의가 가득 찼다.
“그런데 그 이방인이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일단은 배를 채웠으니…….”
화이트의 시선이 쿠키가 남아 있는 접시에 와 닿았다. 앨리스의 세계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려면 두 가지 입구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하나는 쿠키를 먹고 작아져서 들어오는 입구로, 거기는 황금 열쇠가 없으면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입구는 바로 거울을 통해 이곳의 호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다음 수순은 분명 마른 옷일 것이다.”
앨리스가 예전에 들어왔던 입구의 황금 열쇠는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다. 하면 이방인은 다른 곳 거울을 통해 들어왔을 것이고 옷은 아직 젖어 있을 것이다. 화이트는 서둘러 차를 비우고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엌을 나온 유진은 저택 안을 한참 동안이나 방황했다. 이곳은 그가 사는 서울의 현대식 집과 다른 구조로 되어 있어서 원하는 곳으로 가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방 하나하나를 전부 뒤진 끝에 유진은 드디어 옷이 가득 들어 있는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누구 옷인지는 몰라도 더럽게 팔다리가 기네. 이건 뭐야? 남자 옷 같은데 무슨 레이스가 이렇게 주렁주렁해?”
유진은 몰랐지만 그곳은 이 저택의 주인인 화이트의 옷을 넣어 두는 일종의 드레스 룸이었다. 180이 조금 못 되지만 한국에서는 그래도 표준보다 큰 편인데도 그가 옷을 입으려면 소매는 한 번, 바지는 두 번은 접어야 될 것 같다. 하지만 찬밥, 더운밥을 가릴 시기가 아니다.
유진은 서둘러 군복을 벗고 거기에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소박하고 장식이 적으면서도 활동적인 옷으로 갈아입었다. 지퍼가 없이 단추로만 되어 있어서 채우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무슨 단추가 이렇게 많아?”
유진이 불평불만을 하며 단추를 잠글 때 갑자기 문이 활짝 열렸다. 순간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집주인에게 자신의 위치를 들킨 것이다.
“이곳의 옷들은 전부 시중을 드는 이들이 입혀 주는 옷이거든.”
유진은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집주인을 그저 응시할 뿐이었다. 자신의 눈앞에는 180대 후반으로 보이는 훤칠한 미남이 서 있었다. 눈부신 백발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머리 위에서 움직이는 토끼 귀. 이곳이 앨리스의 세계가 맞다면 그는 아마도 앨리스를 이 세계로 인도한 흰 토끼일 것이다.
“내 옷이 좀 긴 편이긴 한데 적당한 옷을 줄까?”
화이트가 웃으며 이방인에게 말을 걸었다. 옷을 갈아입다가 걸려서 가만있는 이방인에게서 엄청 맛있는 냄새가 진동한다. 자신이 데려온 이방인이 아니었지만 화이트는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저 이방인은 분명 그 방에 있는 핑크빛 약물을 먹은 게 틀림없다. 약물의 전설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달콤한 유혹을 하는 향을 낼 줄은 화이트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무단 침입하고 옷도 훔쳐 입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유진이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입이 험하긴 하지만 유진은 정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상대가 호의를 베풀면 공손한 태도로 대응하는 것이 유진의 방식이었다.
“그럼 따라와.”
화이트가 환하게 웃었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그를 즐겁게 했던 것이다.
-3-
화이트는 이방인이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고 응접실로 오자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자신이 데려오려 했던 이방인에 비해 상당히 모발이 짧은 편이다. 이번에 건너가서 인간들이 많은 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이렇게 머리가 짧은 남자는 좀 드물었던 것 같다.
동양인을 자주 못 봐서 나이는 가늠할 수 없지만 남자이면서도 오목조목한 것이 외모가 제법 반반한 편이었다.
“많이 시장한 거 같은데 뭐 좀 들겠어?”
화이트가 웃으며 제안하자 이방인이 자신의 모습을 바로 응시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가 예쁘면서도 인상적이다. 귀여운 첫인상과는 달리 조금 강단 있는 남자 같아서 더 눈에 간다.
이 나라의 일반적인 지배 계급 남자들과는 달리 몸도 상당히 단련되어 있고 말이지. 게다가 예의를 전혀 모르지도 않는다.
“이렇게 적당한 옷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식사까지는 염치가 좀 없지 말입니다.”
남자는 특유의 딱딱한 어투로 대답했다. 순하고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성격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마음에 드는 것이 또 이상하다. 몇 살쯤 되었을까. 한 스물? 스물하나?
“어쨌든 우리 집에 온 손님이잖아. 어떤 사연이 있다 하더라도 집을 찾아온 손님은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지.”
만약 화이트를 아는 다른 이였다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화이트는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한 성격이어서 냉정하다는 평을 많이 받는 이였다. 하트 여왕이 생존했을 때부터 이런 성격 덕으로 그는 큰 신임을 얻었었다. 옆에 같이 있는 빌과 패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화이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원래 왕에게 넘기려고 했던 이방인을 찾을 수 없을 때, 이 이방인이라도 넘기면 왕은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지금 왕에게는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존재라면 그 누구라도 좋을 테니까. 게다가 몸에서 풍기는 이 향기로운 페로몬이라면 당장 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화이트는 이 남자를 왕에게 넘기는 것이 조금 아까워졌다. 앨리스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기에 왕에게 넘겨야 할 의무도, 필연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오랜만에 관심이 가는 타인이 아니던가.
“나도 어차피 식사를 해야 하니, 같이 먹는 게 어때?”
일단 경계의 빛이 강한 이 남자와 친해질 필요가 있다. 화이트는 이렇게 말하고선 빙긋 웃었다. 자신이 가진 미모를 이용해 일종의 미인계를 쓰려는 생각에서다. 미모도 자신이 가진 자원이었고, 화이트는 이것을 언제나 적재적소에 사용할 줄 알았다.
“그, 그러시다면야…….”
그래, 그래야지. 앨리스의 후손을 놓치고 저조해졌던 기분이 이제 좀 좋아진다. 화이트는 옆에서 우물쭈물하는 빌과 패트에게 고개로 신호를 했다. 그들은 당장 밖으로 나갔다. 두 명분의 식사를 준비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유진은 자신의 앞에서 계속 웃고 있는 화이트란 남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부하들이 빠릿빠릿 움직이는 것을 봐서는 성격이 보통은 넘어 보인다. 놀라울 정도의 미모와 우아함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 본 전형적인 귀족 도련님 같았지만, 유진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군대에서 이런 성격의 인간들을 간혹 보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자에게 군대란 짧은 시간동안 오만 계층의 사람들을 전부 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늦게 공부를 마치고 들어온 늦깎이 대학원생부터 고등학교만 간신히 마치고 들어온 솜털이 빠지지 않은 애들, 사회 물 좀 먹고 돌아다니다 들어온 이들까지. 유진은 정말 다양한 인간의 군상을 군대에서 접했다.
‘분명히 꿍꿍이가 있어. 누가 속아 넘어갈 줄 알고?’
속으로는 이렇게 마음먹었지만, 유진은 순순히 식사 초대에 응했다. 상대의 움직임을 아직 보진 못했지만 1대 3은 유진에게도 확실히 버거웠기 때문이다. 탈출한다면 일단 일대일 상황을 만들어 놓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격투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고.
‘누군가가 순순히 호의를 베푸는 것은 일단 의심을 하고 봐야 해.’
저 아름다운 남자를 보는 순간 군만두와 웰치스에 관한 소문이 자동으로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터넷에 도는 괴담과 우스갯소리로 치부하는 이야기지만 간혹 이런 이야기 속에도 진실은 숨어 있는 법이다.
‘기회를 봐서 얼른 도망쳐야겠어. 그 전에는 이치를 안심시키는 것이 중요해.’
식사로 나온 음식이 무엇이 되었든 여기서는 먹지 않을 것이다. 음식에 무엇을 탔을지 전혀 알 수 없지 않는가. 같이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긴장을 푼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 전에 탈출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다.
‘바깥의 기척은 둘. 문제는 이 남자인데…….’
자신이 눈을 마주치니 남자가 웃었다. 정말 그린 듯한 미소였다. 붉은 눈이란 원래 불길하게 느껴져야 함에도 남자의 눈은 홍옥처럼 아름다웠다. 이 자가 정말 흰 토끼라면 ‘토끼다’란 단어의 어원이 된 것처럼 속도도 빠를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곤란한 것은 자신이다. 이곳의 지리도 익숙하지 않은데 적이 더 빠르다면 탈출할 길이 요원하다.
“이름이 어떻게 돼? 나만 소개한 것 같은데…….”
“김유진, 아니 유진 김이라고 합니다.”
“유진이라…… 예쁜 이름이네. 비슷한 또래 같은데 말 놓고 이야기해.”
“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남자가 다시 웃었다. 유진은 그런 남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흰 토끼가 어떤 존재였던가. 그렇게 많은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앨리스에게 그렇게 친절한 토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단은 대화를 해 봐야 한다. 이 남자는 분명 이상한 세계에서 처음 만난 래트보다 단수가 높은 편이니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렇게 자연스럽게 단둘이 있다는 것은 불의의 상황에 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능률적이다.
“그럼 말 놓을게.”
이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진이 순순히 대화를 시도하자 화이트가 응대했다.
“그래.”
“혹시 내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지는 않아?”
“아마도 우리 세계와는 다른 곳에서 왔겠지. 그렇게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니까.”
“맞아. 나는 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왔어. 여기와는 달리 사람이 많고 복작복작하지.”
“그렇구나.”
화이트는 자신이 잠시 들렀던 무수한 사람들의 물결과 광고판, 그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던 높은 건물들의 숲을 떠올렸다. 그렇게 복잡한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조금 신기할 뿐이다. 거기에는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들뿐이었던 것 같다.
“여긴 정말 나무가 많고 숲이 많아서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들어. 어쩌다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렇구나.”
“그런데 나는 돌아가야 하거든. 군인이라서.”
“아하.”
그러고 보니 자신이 숲을 찾아 들어간 곳은 유진이 입었던 옷과 비슷한 옷을 입은 이들이 정말 많았다. 그것이 전부 군인이었다는 건가. 소속을 나타내는 색도 없이 칙칙한 옷은 상당히 질겨 보이는 소재로 되어 있었다. 그 복장으로 숲에 숨으면 찾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하나 질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유진이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물어봐.”
“여기서 어떻게 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지?”
유진이 진지한 눈으로 화이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순간 화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돌아가고 싶어?”
“당연하지. 이대로 이 세계에 남아 있으면 탈영이란 말이야.”
“아하.”
화이트가 알기에도 군인에게 탈영이란 엄청난 중징계가 내려지는 행동이다. 하지만 화이트는 순순히 그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유진을 보내 준다면 최소한 원래 자신이 데리고 왔던 인간을 찾아내야 하는데, 최악의 경우 다시 앨리스의 세계로 넘어가야 한다. 그 번잡하고 인간들만 있는 세계로 다시 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일단 시장하니 식사부터 먼저 하자. 그리고 같이 방법을 생각해 보는 거야.”
식사에는 미리 강력한 수면제를 타 두라고 지시해 두었다. 그것도 자신이 그리 즐기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고기에 말이다. 인간이고 군인이라면 그 어떤 음식보다 고기 종류를 먼저 선호하는 것을 화이트는 잘 알고 있다.
수면제가 든 고기를 먹고 잠든 그를 이대로 왕에게 넘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으로 삼을 것인지 아직 결정은 하지 않았다. 일단은 그를 자신의 집 지하실에 구속해 두고 난 뒤에 생각해 볼 예정이었다. 일단 중요한 것은 그를 완벽하게 확보하는 것이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식당으로 가시지요.”
빌이 때마침 응접실로 들어와 이야기를 전한다. 화이트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 유진, 일단 같이 식사를 하러…….”
화이트의 말은 중간까지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응접실 문이 열리자마자 유진이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테이블을 엎고는 그대로 달려 나간 것이다.
그런 유진의 행동에 놀란 화이트가 테이블을 바로 하고 그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유진은 침착하게 빌의 멱살을 잡더니 화이트에게 내던졌다. 가벼운 체구의 빌이 요란한 비명과 함께 그대로 화이트의 위로 날아간다. 유진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안으로 들어오려는 패트를 확 밀치고선 그가 균형을 잡는 사이 그대로 밖으로 내달렸다.
“어어어!”
화이트를 덮친 멍청한 빌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다 화이트 위에 다시금 넘어졌다. 화이트는 그를 피하고 싶었으나 빌이 워낙 허둥거리는 터라 피할 겨를이 없었다. 그 바람에 둘은 패트가 일으켜 줄 때까지 바닥에서 한참 동안이나 굴러야 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멍청이 같으니. 저자를 잡아야 해! 지금 당장! 얼른!”
화이트가 마구 화를 냈다. 거의 그물 안으로 다 들어온 고기를 눈앞에서 놓친 그의 얼굴에는 분노만이 가득했다. 빌이 벌벌 떨며 기어서 응접실을 나갔다. 바깥에는 한참 동안이나 ‘잡아라, 저기다!’ 같은 소란스러운 소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젠장.”
상황을 파악한 화이트가 얼굴을 구겼다. 유진이 자신의 저택을 별 어려움 없이 탈출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4-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유진은 자신의 뒤를 쫓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옷만 갈아입고 신발은 그대로 전투화를 신었던 것이 승리의 요인 되시겠다. 게다가 군에서 완전 군장을 하고 달리던 게 이제 몸에 배인 상태라, 빈 몸으로 달리는 것쯤은 정말 가뿐함 그 자체였다.
‘역시 그 화이트란 작자는 이름만 화이트이지 속은 시커먼 능구렁이가 맞았어.’
자신의 감에 따르기로 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분명 무슨 오해가 있었다면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의 뒤를 쫓지 않았을 터. 자신에게 제공된 음식에 수면제나 독을 타는 등,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아까 쿠키를 잔뜩 먹어 둔 게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머리야, 좀 생각을 짜내 봐라.’
발은 계속 달리면서도 유진은 끊임없이 자신의 머리를 닦달했다. 인간은 쓰면 쓸수록 극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동물이다. 그의 머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앨리스 책을 읽었던 아주 어릴 적의 기억을 더듬다가 유진은 문득 한 캐릭터를 떠올렸다.
그랬다. 바로 쐐기벌레였다. 이상한 것들을 마구 먹어서 신체를 제어할 수 없었던 앨리스는 쐐기벌레가 준 버섯을 손에 얻은 후에야 자신의 몸 크기를 제어할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쐐기벌레의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는 길에 작은 사람 크기의 쐐기벌레 옷을 입은 이가 천천히 터키식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섯 모양의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쐐기벌레의 모습은 마치 룸펜 같다.
유진의 걸음이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2장. 나름의 적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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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빠르게 저택에 접근했다. 저택을 오고 가는 이들이 대부분 동물의 귀를 달고 있는 걸 보면 여기의 주인도 동물 귀를 달고 다닐 확률이 높다. 유진은 최대한 머리를 짜내어 앨리스에 나오는 동물들을 유추해 보았지만, 이미 굳어져 버린 군인의 머리에서 보드라운 동화 내용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그는 기억을 짜내는 것을 포기하고 일단 저택부터 살폈다.
‘일단 부엌의 위치 확보.’
각 나라별로 집의 구조가 다르긴 했지만, 배고픈 군인이라면 본능적으로 먹을 것이 있는 곳을 탐지하는 센스가 있다. 마침 식당에서는 향긋한 쿠키가 구워지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장작을 때어 오븐을 데우는 모양인지 연기가 가득한 식당 안에는 여자 한 명이 혼자서 쿠키를 굽고 있었다.
망설임의 시간은 짧았다. 유진은 즉시 탈출 경로를 확보하는 동시에 몰래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부엌으로 먼저 들어온 것은 일단 요란한 소리를 내는 자신의 위장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그와 동시에 맛있는 냄새가 풀풀 풍기는 곳으로 가면, 자신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감출 수 있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유진은 번개 같은 속도로 연기가 가득한 부엌의 안으로 들어섰다. 선반 위에는 이제 오븐에서 꺼낸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쿠키가 접시 위에 있는 것이 보인다.
쿠키의 달달한 냄새에 유진이 바로 돌진했다. 요리를 하는 하녀가 돌아선 틈을 타서 접시에 담긴 쿠키를 재빨리 낚아챈 것이다. 하녀는 차를 우려내느라 소리 없이 움직이는 유진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우와, 이 얼마 만에 먹는 사제 음식이냐.’
갓 구운 쿠키가 유진의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단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지만 군인이라면 단것은 돌이라도 삼킬 수 있다. 게다가 쿠키는 정말이지 맛이 있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쿠키가 아니라 고기를 먹고 싶었지만, 남의 음식을 몰래 축내는 중에 더운밥, 찬밥 가릴 형편이 못 된다.
갓 구운 쿠키 한 접시가 이내 빈 접시가 되었다. 쿠키 부스러기까지 입 안에 털어 넣은 그는 서둘러 다른 곳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그러자 차를 다 우려낸 하녀가 쿠키가 있었던 곳으로 다가왔다.
“어? 이상하네. 분명히 홍차와 곁들일 쿠키를 얹어 놨는데?”
하녀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어렸다. 유진은 약간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기는 했으나 그녀의 눈을 피해 도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여자 하나 제압하고 도망치는 것이야 누워서 떡 먹기같이 쉬운 일이지만, 음식까지 훔쳐 먹은 주제에 민간인 여자에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천천히 후진했다.
“이걸 어쩐다지? 모양이 안 좋은 쿠키밖에 없는데…….”
그녀는 다시 한 번 선반과 다른 곳을 확인했으나 사라진 쿠키가 다시 나타날 리가 없다. 그녀가 부엌을 다시 뒤지는 동안 요란한 벨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차를 가져오라고 재촉하는 화이트의 벨소리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수 없네. 이거라도 내어 가야지.”
하녀는 어쩔 수 없이 남은 쿠키를 접시에 얹어서 들고 부엌을 나섰다. 아까 접시에 올려 둔 쿠키보다 모양은 영 떨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북풍한설이 몰아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정성껏 우린 홍차와 쿠키를 들고 화이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메리 앤, 쿠키의 상태가 왜 이 모양이지?”
다과를 받자마자 화이트가 바로 입을 열었다. 예민한 그의 눈은 쿠키의 모양이 그다지 예쁜 것이 아님을 바로 알아본 것이다.
“아, 그것이…… 보기 좋은 것으로 미리 꺼내 둔 쿠키가 귀신같이 사라져 버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주인님.”
하녀 메리 앤이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지만 화이트는 그녀를 무심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그래, 알았다. 그만 나가 봐도 된다.”
“네, 주인님.”
화이트는 메리 앤이 나가자 천천히 백자 찻잔을 들어 올려 홍차를 음미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홍차의 맛은 여전히 좋았다. 그의 붉은 눈이 서서히 쿠키를 향했다. 아몬드를 곱게 슬라이스해서 구운 쿠키는 맛도 좋았지만 홍차와 정말 잘 어울리는 간식이기도 했다.
“쿠키가 없어졌다는 것이 좀 걸리는군.”
메리 앤은 그동안 화이트의 저택에서 오래 일하던 성실한 하녀였다. 그런 그녀가 일부러 모양이 안 좋은 쿠키를 내놓을 리가 없다. 안 그래도 자신이 유혹해 온 이방인이 없어진 것이 바로 이 근방이다. 화이트의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답은 바로 나왔다. 이방인이 지금 그의 집 안에 있는 것이다.
그는 즉시 벨의 손잡이 줄을 잡아당겼다. 그의 호출을 들은 도마뱀 빌이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급히 시킬 일이 생겼다.”
“급히 시키실 일이라니요?”
“네가 곧 찾으러 나가야 할 이방인이 지금 이 저택에 있어.”
“정말이십니까?”
빌의 표정이 즉시 진지해졌다. 화이트는 빌의 외형을 훑어보았다. 빌은 도마뱀답게 가느다란 팔다리를 가지고 있다. 건장한 체격이고 성인인 인간 남자 이방인과 일대일로 붙는다면 상당히 불리하다. 다른 이들을 붙여 주는 편이 승률이 더 높을 것이다.
“일단 혼자서 덤비지는 말고 패트를 비롯해서 다른 이들을 죄다 소집해. 이방인이 이 저택 안에 있는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한다.”
“네, 주인님.”
공손히 대답하는 빌의 눈에 결의가 가득 찼다.
“그런데 그 이방인이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일단은 배를 채웠으니…….”
화이트의 시선이 쿠키가 남아 있는 접시에 와 닿았다. 앨리스의 세계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려면 두 가지 입구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하나는 쿠키를 먹고 작아져서 들어오는 입구로, 거기는 황금 열쇠가 없으면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입구는 바로 거울을 통해 이곳의 호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다음 수순은 분명 마른 옷일 것이다.”
앨리스가 예전에 들어왔던 입구의 황금 열쇠는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다. 하면 이방인은 다른 곳 거울을 통해 들어왔을 것이고 옷은 아직 젖어 있을 것이다. 화이트는 서둘러 차를 비우고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엌을 나온 유진은 저택 안을 한참 동안이나 방황했다. 이곳은 그가 사는 서울의 현대식 집과 다른 구조로 되어 있어서 원하는 곳으로 가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방 하나하나를 전부 뒤진 끝에 유진은 드디어 옷이 가득 들어 있는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누구 옷인지는 몰라도 더럽게 팔다리가 기네. 이건 뭐야? 남자 옷 같은데 무슨 레이스가 이렇게 주렁주렁해?”
유진은 몰랐지만 그곳은 이 저택의 주인인 화이트의 옷을 넣어 두는 일종의 드레스 룸이었다. 180이 조금 못 되지만 한국에서는 그래도 표준보다 큰 편인데도 그가 옷을 입으려면 소매는 한 번, 바지는 두 번은 접어야 될 것 같다. 하지만 찬밥, 더운밥을 가릴 시기가 아니다.
유진은 서둘러 군복을 벗고 거기에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소박하고 장식이 적으면서도 활동적인 옷으로 갈아입었다. 지퍼가 없이 단추로만 되어 있어서 채우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무슨 단추가 이렇게 많아?”
유진이 불평불만을 하며 단추를 잠글 때 갑자기 문이 활짝 열렸다. 순간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집주인에게 자신의 위치를 들킨 것이다.
“이곳의 옷들은 전부 시중을 드는 이들이 입혀 주는 옷이거든.”
유진은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집주인을 그저 응시할 뿐이었다. 자신의 눈앞에는 180대 후반으로 보이는 훤칠한 미남이 서 있었다. 눈부신 백발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머리 위에서 움직이는 토끼 귀. 이곳이 앨리스의 세계가 맞다면 그는 아마도 앨리스를 이 세계로 인도한 흰 토끼일 것이다.
“내 옷이 좀 긴 편이긴 한데 적당한 옷을 줄까?”
화이트가 웃으며 이방인에게 말을 걸었다. 옷을 갈아입다가 걸려서 가만있는 이방인에게서 엄청 맛있는 냄새가 진동한다. 자신이 데려온 이방인이 아니었지만 화이트는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저 이방인은 분명 그 방에 있는 핑크빛 약물을 먹은 게 틀림없다. 약물의 전설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달콤한 유혹을 하는 향을 낼 줄은 화이트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무단 침입하고 옷도 훔쳐 입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유진이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입이 험하긴 하지만 유진은 정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상대가 호의를 베풀면 공손한 태도로 대응하는 것이 유진의 방식이었다.
“그럼 따라와.”
화이트가 환하게 웃었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그를 즐겁게 했던 것이다.
-3-
화이트는 이방인이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고 응접실로 오자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자신이 데려오려 했던 이방인에 비해 상당히 모발이 짧은 편이다. 이번에 건너가서 인간들이 많은 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이렇게 머리가 짧은 남자는 좀 드물었던 것 같다.
동양인을 자주 못 봐서 나이는 가늠할 수 없지만 남자이면서도 오목조목한 것이 외모가 제법 반반한 편이었다.
“많이 시장한 거 같은데 뭐 좀 들겠어?”
화이트가 웃으며 제안하자 이방인이 자신의 모습을 바로 응시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가 예쁘면서도 인상적이다. 귀여운 첫인상과는 달리 조금 강단 있는 남자 같아서 더 눈에 간다.
이 나라의 일반적인 지배 계급 남자들과는 달리 몸도 상당히 단련되어 있고 말이지. 게다가 예의를 전혀 모르지도 않는다.
“이렇게 적당한 옷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식사까지는 염치가 좀 없지 말입니다.”
남자는 특유의 딱딱한 어투로 대답했다. 순하고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성격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마음에 드는 것이 또 이상하다. 몇 살쯤 되었을까. 한 스물? 스물하나?
“어쨌든 우리 집에 온 손님이잖아. 어떤 사연이 있다 하더라도 집을 찾아온 손님은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지.”
만약 화이트를 아는 다른 이였다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화이트는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한 성격이어서 냉정하다는 평을 많이 받는 이였다. 하트 여왕이 생존했을 때부터 이런 성격 덕으로 그는 큰 신임을 얻었었다. 옆에 같이 있는 빌과 패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화이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원래 왕에게 넘기려고 했던 이방인을 찾을 수 없을 때, 이 이방인이라도 넘기면 왕은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지금 왕에게는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존재라면 그 누구라도 좋을 테니까. 게다가 몸에서 풍기는 이 향기로운 페로몬이라면 당장 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화이트는 이 남자를 왕에게 넘기는 것이 조금 아까워졌다. 앨리스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기에 왕에게 넘겨야 할 의무도, 필연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오랜만에 관심이 가는 타인이 아니던가.
“나도 어차피 식사를 해야 하니, 같이 먹는 게 어때?”
일단 경계의 빛이 강한 이 남자와 친해질 필요가 있다. 화이트는 이렇게 말하고선 빙긋 웃었다. 자신이 가진 미모를 이용해 일종의 미인계를 쓰려는 생각에서다. 미모도 자신이 가진 자원이었고, 화이트는 이것을 언제나 적재적소에 사용할 줄 알았다.
“그, 그러시다면야…….”
그래, 그래야지. 앨리스의 후손을 놓치고 저조해졌던 기분이 이제 좀 좋아진다. 화이트는 옆에서 우물쭈물하는 빌과 패트에게 고개로 신호를 했다. 그들은 당장 밖으로 나갔다. 두 명분의 식사를 준비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유진은 자신의 앞에서 계속 웃고 있는 화이트란 남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부하들이 빠릿빠릿 움직이는 것을 봐서는 성격이 보통은 넘어 보인다. 놀라울 정도의 미모와 우아함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 본 전형적인 귀족 도련님 같았지만, 유진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군대에서 이런 성격의 인간들을 간혹 보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자에게 군대란 짧은 시간동안 오만 계층의 사람들을 전부 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늦게 공부를 마치고 들어온 늦깎이 대학원생부터 고등학교만 간신히 마치고 들어온 솜털이 빠지지 않은 애들, 사회 물 좀 먹고 돌아다니다 들어온 이들까지. 유진은 정말 다양한 인간의 군상을 군대에서 접했다.
‘분명히 꿍꿍이가 있어. 누가 속아 넘어갈 줄 알고?’
속으로는 이렇게 마음먹었지만, 유진은 순순히 식사 초대에 응했다. 상대의 움직임을 아직 보진 못했지만 1대 3은 유진에게도 확실히 버거웠기 때문이다. 탈출한다면 일단 일대일 상황을 만들어 놓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격투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고.
‘누군가가 순순히 호의를 베푸는 것은 일단 의심을 하고 봐야 해.’
저 아름다운 남자를 보는 순간 군만두와 웰치스에 관한 소문이 자동으로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터넷에 도는 괴담과 우스갯소리로 치부하는 이야기지만 간혹 이런 이야기 속에도 진실은 숨어 있는 법이다.
‘기회를 봐서 얼른 도망쳐야겠어. 그 전에는 이치를 안심시키는 것이 중요해.’
식사로 나온 음식이 무엇이 되었든 여기서는 먹지 않을 것이다. 음식에 무엇을 탔을지 전혀 알 수 없지 않는가. 같이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긴장을 푼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 전에 탈출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다.
‘바깥의 기척은 둘. 문제는 이 남자인데…….’
자신이 눈을 마주치니 남자가 웃었다. 정말 그린 듯한 미소였다. 붉은 눈이란 원래 불길하게 느껴져야 함에도 남자의 눈은 홍옥처럼 아름다웠다. 이 자가 정말 흰 토끼라면 ‘토끼다’란 단어의 어원이 된 것처럼 속도도 빠를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곤란한 것은 자신이다. 이곳의 지리도 익숙하지 않은데 적이 더 빠르다면 탈출할 길이 요원하다.
“이름이 어떻게 돼? 나만 소개한 것 같은데…….”
“김유진, 아니 유진 김이라고 합니다.”
“유진이라…… 예쁜 이름이네. 비슷한 또래 같은데 말 놓고 이야기해.”
“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남자가 다시 웃었다. 유진은 그런 남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흰 토끼가 어떤 존재였던가. 그렇게 많은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앨리스에게 그렇게 친절한 토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단은 대화를 해 봐야 한다. 이 남자는 분명 이상한 세계에서 처음 만난 래트보다 단수가 높은 편이니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렇게 자연스럽게 단둘이 있다는 것은 불의의 상황에 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능률적이다.
“그럼 말 놓을게.”
이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진이 순순히 대화를 시도하자 화이트가 응대했다.
“그래.”
“혹시 내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지는 않아?”
“아마도 우리 세계와는 다른 곳에서 왔겠지. 그렇게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니까.”
“맞아. 나는 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왔어. 여기와는 달리 사람이 많고 복작복작하지.”
“그렇구나.”
화이트는 자신이 잠시 들렀던 무수한 사람들의 물결과 광고판, 그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던 높은 건물들의 숲을 떠올렸다. 그렇게 복잡한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조금 신기할 뿐이다. 거기에는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들뿐이었던 것 같다.
“여긴 정말 나무가 많고 숲이 많아서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들어. 어쩌다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렇구나.”
“그런데 나는 돌아가야 하거든. 군인이라서.”
“아하.”
그러고 보니 자신이 숲을 찾아 들어간 곳은 유진이 입었던 옷과 비슷한 옷을 입은 이들이 정말 많았다. 그것이 전부 군인이었다는 건가. 소속을 나타내는 색도 없이 칙칙한 옷은 상당히 질겨 보이는 소재로 되어 있었다. 그 복장으로 숲에 숨으면 찾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하나 질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유진이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물어봐.”
“여기서 어떻게 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지?”
유진이 진지한 눈으로 화이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순간 화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돌아가고 싶어?”
“당연하지. 이대로 이 세계에 남아 있으면 탈영이란 말이야.”
“아하.”
화이트가 알기에도 군인에게 탈영이란 엄청난 중징계가 내려지는 행동이다. 하지만 화이트는 순순히 그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유진을 보내 준다면 최소한 원래 자신이 데리고 왔던 인간을 찾아내야 하는데, 최악의 경우 다시 앨리스의 세계로 넘어가야 한다. 그 번잡하고 인간들만 있는 세계로 다시 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일단 시장하니 식사부터 먼저 하자. 그리고 같이 방법을 생각해 보는 거야.”
식사에는 미리 강력한 수면제를 타 두라고 지시해 두었다. 그것도 자신이 그리 즐기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고기에 말이다. 인간이고 군인이라면 그 어떤 음식보다 고기 종류를 먼저 선호하는 것을 화이트는 잘 알고 있다.
수면제가 든 고기를 먹고 잠든 그를 이대로 왕에게 넘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으로 삼을 것인지 아직 결정은 하지 않았다. 일단은 그를 자신의 집 지하실에 구속해 두고 난 뒤에 생각해 볼 예정이었다. 일단 중요한 것은 그를 완벽하게 확보하는 것이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식당으로 가시지요.”
빌이 때마침 응접실로 들어와 이야기를 전한다. 화이트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 유진, 일단 같이 식사를 하러…….”
화이트의 말은 중간까지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응접실 문이 열리자마자 유진이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테이블을 엎고는 그대로 달려 나간 것이다.
그런 유진의 행동에 놀란 화이트가 테이블을 바로 하고 그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유진은 침착하게 빌의 멱살을 잡더니 화이트에게 내던졌다. 가벼운 체구의 빌이 요란한 비명과 함께 그대로 화이트의 위로 날아간다. 유진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안으로 들어오려는 패트를 확 밀치고선 그가 균형을 잡는 사이 그대로 밖으로 내달렸다.
“어어어!”
화이트를 덮친 멍청한 빌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다 화이트 위에 다시금 넘어졌다. 화이트는 그를 피하고 싶었으나 빌이 워낙 허둥거리는 터라 피할 겨를이 없었다. 그 바람에 둘은 패트가 일으켜 줄 때까지 바닥에서 한참 동안이나 굴러야 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멍청이 같으니. 저자를 잡아야 해! 지금 당장! 얼른!”
화이트가 마구 화를 냈다. 거의 그물 안으로 다 들어온 고기를 눈앞에서 놓친 그의 얼굴에는 분노만이 가득했다. 빌이 벌벌 떨며 기어서 응접실을 나갔다. 바깥에는 한참 동안이나 ‘잡아라, 저기다!’ 같은 소란스러운 소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젠장.”
상황을 파악한 화이트가 얼굴을 구겼다. 유진이 자신의 저택을 별 어려움 없이 탈출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4-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유진은 자신의 뒤를 쫓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옷만 갈아입고 신발은 그대로 전투화를 신었던 것이 승리의 요인 되시겠다. 게다가 군에서 완전 군장을 하고 달리던 게 이제 몸에 배인 상태라, 빈 몸으로 달리는 것쯤은 정말 가뿐함 그 자체였다.
‘역시 그 화이트란 작자는 이름만 화이트이지 속은 시커먼 능구렁이가 맞았어.’
자신의 감에 따르기로 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분명 무슨 오해가 있었다면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의 뒤를 쫓지 않았을 터. 자신에게 제공된 음식에 수면제나 독을 타는 등,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아까 쿠키를 잔뜩 먹어 둔 게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머리야, 좀 생각을 짜내 봐라.’
발은 계속 달리면서도 유진은 끊임없이 자신의 머리를 닦달했다. 인간은 쓰면 쓸수록 극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동물이다. 그의 머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앨리스 책을 읽었던 아주 어릴 적의 기억을 더듬다가 유진은 문득 한 캐릭터를 떠올렸다.
그랬다. 바로 쐐기벌레였다. 이상한 것들을 마구 먹어서 신체를 제어할 수 없었던 앨리스는 쐐기벌레가 준 버섯을 손에 얻은 후에야 자신의 몸 크기를 제어할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쐐기벌레의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는 길에 작은 사람 크기의 쐐기벌레 옷을 입은 이가 천천히 터키식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섯 모양의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쐐기벌레의 모습은 마치 룸펜 같다.
유진의 걸음이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