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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꽃의 시간 1권
1화
Prologue(1)
비가 온다.
잿빛 하늘엔 구름이 가득 끼어서,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되질 않았다. 어제부터 추적추적 내린 비는 온 세상을 칙칙한 색으로 적셨다. 처마 아래에 선 여자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멀거니 응시했다. 그녀는 이미 흠뻑 젖은 상태였기 때문에, 비를 피하는 행동은 꽤나 새삼스럽게 보였다. 잔뜩 젖어 달라붙은 갈색 머리칼은 어디에서 뒹굴었는지 진흙투성이였다. 물기가 맺힌 두 뺨도 더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나뒹군 것 같은 행색만큼이나 너절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몸을 감싼 것은 옷이라기보단 마감이 덜 된 천 조각에 가까웠다.
비를 잔뜩 맞아서일까? 그녀의 다문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때때로 간헐적인 떨림도 보였다. 앙상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그녀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들썩이는 가슴께엔 빛바랜 숫자가 적혀 있었다. 다만 거의 다 지워져 본래 숫자를 알아보긴 어려웠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이 동네 자체가 마치 죽은 것만 같았다. 대부분의 건물은 무너져 있었고, 행여 형체를 유지한 건물이 있더라도 제 기능은 하지 못할 듯싶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로 검은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젖은 재는 날리지도 못하고 축축한 땅 위에 스몄다. 생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잔해들을 돌아보던 여자가 시선을 들었다. 처마 끝에 아슬아슬하게 맺혀서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다가 추락하는 물방울이 보였다. 그 잔상을 담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빗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질퍽거리는 땅에 떨어지는 그 순간의 소리. 물방울이 부서지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온 천지를 진동하는 것 같았다. 물방울이 땅에 부딪치면, 팬 땅에선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그 속에는 짙은 녹색의 풀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착각일까? 빗줄기 사이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누군가 젖은 장화를 내딛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착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주변엔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아까보다 조금 더 거세진 빗줄기 정도였다. 세상은 아까보다 조금 더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고, 아까보다 조금 더 앞을 내다보기 어려워졌을 뿐이다. 그녀는 잠시간 젖어 들었던 상념을 털어 냈다. 여유를 부릴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자는 그대로 걸음을 내디디려다가, 문득 다시 멈춰 섰다. 몸에 엉겨 붙은 축축한 상의를 멀거니 내려다보던 그녀는 두 손으로 옷을 잡고 위로 올려 벗었다. 당초에 너덜너덜해 입으나 마나 했던 거적때기는, 벗고 나니 그 형체와 용도를 더욱 알아볼 수 없었다. 옷을 벗자 가슴만 겨우 동여맨 더러운 붕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붕대에 가려지지 않은 부분은 아물지 않은 상처와 거무스름한 흉터로 가득했다. 드러난 어깨와 쇄골, 갈비뼈는 모양이 보일 정도로 앙상해, 형형한 눈빛이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시체로 착각할 모습이었다.
여자가 상의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빗속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그녀는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
비라도 내리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여자는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이렇게 크게 입을 벌리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양쪽 입가는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에 결국 찢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찢어진 부분에 물이 닿으면서 느껴지는, 쓰린 그 통증마저 좋았다. 십여 년 동안 그녀는 물 한 모금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었으므로, 이렇게 마음껏 목을 축일 수 있다는 건 제법 감격스럽기까지 한 일이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잠시 망연하게 서 있던 그녀가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다리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 쓰러졌다간 숨을 부지할 수 없을 터였다. 질척이는 바닥을 질질 끌며 옮기는 걸음엔, 삶에 대한 의지가 묻어났다.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으며 위태롭게 걷던 그녀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아주 멀리, 어스름한 빛이 보였다. 속눈썹에 맺히는 빗방울이 무거워 눈을 크게 뜨기 어려웠지만, 비좁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틀림없는 빛이었다. 꺼질 듯 흔들리던 시선에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차갑게 식은 볼을 손으로 훔친 그녀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내딛는 바닥에 자그만 발자국이 꾹꾹 찍혔다.
걸음은 아까보다 훨씬 수월했다. 목적지가 있는 까닭이었다. 이 빗속을 벗어날 공간만 있어도 족했다. 굵은 빗줄기는 세상으로부터 여자를 숨겨 주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생기를 빼앗아 가고 있었다. 이미 물에 불어 쭈글쭈글해진 손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보나 마나 입술도 파랗게 질렸을 터였다. 온몸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걸음을 내딛는 데에 정신을 집중했다.
생각보다 집은 가까웠다. 아니, 집이라기보단 일종의 여관에 가까웠다. 황량한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여자는 집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현관문을 바로 두드리는 대신, 그녀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창가에 다가섰다. 창문은 찌든 때로 얼룩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니, 어른거리는 빛을 지나 움직이는 형체가 보였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딱지가 엉겨 붙어 있던 입술에 빨간 물이 점점이 솟아났다.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 때문에 순식간에 씻겨 나갔지만, 금방 또 입술을 빨갛게 적셨다. 상처가 터진 모양이었다.
창문가에서 한참이나 주저하던 여자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찰나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현관문을 돌아보았다. 부서진 나무판자를 우산 삼아 머리 위를 가린 중년 남성 하나가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여자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어렸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그 기색을 눈치챈 중년 남성이 얼른 말을 건넸다.
“들어오시오!”
여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등을 돌린 상태로 멈춰 선 그녀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남성은 여전히 고개를 내밀고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남성 또한 그녀를 경계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긴 매한가지였다. 다만 빗속에 방치된 그녀의 몰골을 보고, 경계심보다는 연민을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남성의 표정에 엿보이는 기이한 호의를 눈치챘지만 그녀는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 기이한 대치를 깬 것은, 집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아빠, 무슨 일이세요?”
남성의 뒤로 자그만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 열댓 살 정도 되었을까?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내민 소녀가 여자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중년 남성이 재차 말을 건넸다.
“들어오시오.”
소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녀가 느리게 몸을 돌려 남성을 마주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
집 안에 들어서고 물기를 닦아 내니 여자의 헐벗은 차림도 또렷하게 드러났다. 소녀는 부산스럽게 옷을 찾았다. 남성이 여자에게 작은 쪽방을 일러 주는 동안, 소녀가 옷을 가져왔다. 소녀의 것이라기엔 조금 품이 큰 옷이었다. 여자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소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어머니의 옷’이라고 설명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차마 옷을 버리거나 태울 수가 없었어요.”
말을 이을수록 소녀는 울 것만 같았다. 고민하던 여자가 옷을 받아 드니 소녀의 안색도 조금 환해졌다. 여자는 그런 소녀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소녀는 따뜻한 음식이라도 있는지 찾아봐야겠다며 몸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여자는 소녀에게 받은 옷을 펼쳐 보았다. 어디서나 볼 법한 흔한 옷이었다. 허름하고 낡았지만, 여자가 지금 입고 있는 천 조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찬찬히 옷을 살폈다. 바짝 마른 손길이 옷감을 쓸어내렸다.
“그럼 전 뭔가 먹을 만한 게 있는지 확인해 볼게요. 옷 갈아입으세요! 문은 닫고 갈게요!”
소녀의 말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우두커니 소녀를 응시했다.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가려던 소녀가 그 시선을 느끼곤 멈춰 섰다. 소녀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여자는 옷을 내려놓고 성큼성큼 소녀에게 다가섰다.
다가오는 그녀의 시선이 조금 무서워서, 소녀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곧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왜 그러세요?”
여자는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소녀의 팔을 잡아채었다. 갑작스럽게 당기는 그 힘은 꽤나 강했다. 그 힘을 따라 소녀의 몸이 완전히 방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소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팔을 잡은 손아귀 힘이 너무 셌다. 소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막 항의를 하려는 찰나, 소녀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그것은 생각보다 가느다랬다. 어쩌면 나약해 보이기도 했다. 목구멍을 그그극 긁어내듯 갈라지며 나왔는데, 힘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기력이 떨어져서 목소리마저 저런 쇳소리로 겨우 내는 모양이었다. 짤막한 말 한마디를 내뱉은 여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부르튼 입술 사이로 이어지는 목소리는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또렷했다.
“언제 돌아가셨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소녀는 잔뜩 놀란 표정이었다.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리던 소녀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오, 오래 전에…….”
여자가 소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이 무서웠는지, 소녀는 눈을 굴려 그 시선을 피했다. 잡힌 팔을 빼려 했지만, 손아귀는 마치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소녀는 울상을 지으며 여자를 보았다. 그녀가 딱히 위협적인 몸짓을 취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형형한 눈빛은 소녀가 겁을 집어먹기 충분했다.
“며, 몇 년 됐어요. 그건 왜요?”
여자는 소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서 있는 쪽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쪽방은 달리 어떤 용도로 쓰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다만 구석에 정체불명의 박스가 몇 개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창고 노릇을 하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이었고 들어와서 본 것들 중 무엇 하나 잘 갖춰진 게 없었다. 누가 봐도 가난한 부녀의 집이었다. 그런데도 무엇을 찾으려는 건지, 여자는 쪽방의 내부를 차근차근 뜯어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도 사람 같지 않아서 소녀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뒤를 힐끗거렸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소리를 지르면 그녀의 아버지가 올 터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달려오는 시간 동안 여자가 자신을 어쩔까 싶은 생각에 선뜻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있었다.
방을 둘러보던 여자의 시선이 다시 소녀에게로 향했다. 하얗게 질린 소녀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내내 무표정하던 얼굴이라서, 약간의 감정 변화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지레 겁을 먹고 있던 소녀는 돌변한 분위기에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까지 무서워하던 제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여자는 가녀려 보였다. 여자가 천천히 손을 놓았지만, 소녀는 당장 도망가려던 것도 잊고 멀거니 서서 여자를 응시했다. 그녀는 조금 서글픈 눈으로 소녀를 보았다. 어째서일까. 소녀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시선에서 불쾌감을 느꼈다.
“갈아입으세요.”
소녀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여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몸을 돌렸다. 옷을 집어 드는 그녀의 등을 물끄러미 보던 소녀가 문득 여자의 뒤로 다가섰다. 소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소녀의 손끝이 여자의 등에 닿았다. 정확히는 축축하고 더러운 붕대에 닿았다. 소녀가 홀린 듯 붕대를 끌어 내렸다. 흉터투성이의 맨살이었다. 그런 와중 붕대로 가려진 부분에 무언가 얼핏 엿보였다. 다른 상처들에 비해 비교적 최근 것인지, 불그스름한 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은, 숫자였다.
1화
Prologue(1)
비가 온다.
잿빛 하늘엔 구름이 가득 끼어서,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되질 않았다. 어제부터 추적추적 내린 비는 온 세상을 칙칙한 색으로 적셨다. 처마 아래에 선 여자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멀거니 응시했다. 그녀는 이미 흠뻑 젖은 상태였기 때문에, 비를 피하는 행동은 꽤나 새삼스럽게 보였다. 잔뜩 젖어 달라붙은 갈색 머리칼은 어디에서 뒹굴었는지 진흙투성이였다. 물기가 맺힌 두 뺨도 더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나뒹군 것 같은 행색만큼이나 너절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몸을 감싼 것은 옷이라기보단 마감이 덜 된 천 조각에 가까웠다.
비를 잔뜩 맞아서일까? 그녀의 다문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때때로 간헐적인 떨림도 보였다. 앙상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그녀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들썩이는 가슴께엔 빛바랜 숫자가 적혀 있었다. 다만 거의 다 지워져 본래 숫자를 알아보긴 어려웠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이 동네 자체가 마치 죽은 것만 같았다. 대부분의 건물은 무너져 있었고, 행여 형체를 유지한 건물이 있더라도 제 기능은 하지 못할 듯싶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로 검은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젖은 재는 날리지도 못하고 축축한 땅 위에 스몄다. 생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잔해들을 돌아보던 여자가 시선을 들었다. 처마 끝에 아슬아슬하게 맺혀서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다가 추락하는 물방울이 보였다. 그 잔상을 담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빗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질퍽거리는 땅에 떨어지는 그 순간의 소리. 물방울이 부서지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온 천지를 진동하는 것 같았다. 물방울이 땅에 부딪치면, 팬 땅에선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그 속에는 짙은 녹색의 풀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착각일까? 빗줄기 사이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누군가 젖은 장화를 내딛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착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주변엔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아까보다 조금 더 거세진 빗줄기 정도였다. 세상은 아까보다 조금 더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고, 아까보다 조금 더 앞을 내다보기 어려워졌을 뿐이다. 그녀는 잠시간 젖어 들었던 상념을 털어 냈다. 여유를 부릴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자는 그대로 걸음을 내디디려다가, 문득 다시 멈춰 섰다. 몸에 엉겨 붙은 축축한 상의를 멀거니 내려다보던 그녀는 두 손으로 옷을 잡고 위로 올려 벗었다. 당초에 너덜너덜해 입으나 마나 했던 거적때기는, 벗고 나니 그 형체와 용도를 더욱 알아볼 수 없었다. 옷을 벗자 가슴만 겨우 동여맨 더러운 붕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붕대에 가려지지 않은 부분은 아물지 않은 상처와 거무스름한 흉터로 가득했다. 드러난 어깨와 쇄골, 갈비뼈는 모양이 보일 정도로 앙상해, 형형한 눈빛이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시체로 착각할 모습이었다.
여자가 상의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빗속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그녀는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비라도 내리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여자는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이렇게 크게 입을 벌리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양쪽 입가는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에 결국 찢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찢어진 부분에 물이 닿으면서 느껴지는, 쓰린 그 통증마저 좋았다. 십여 년 동안 그녀는 물 한 모금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었으므로, 이렇게 마음껏 목을 축일 수 있다는 건 제법 감격스럽기까지 한 일이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잠시 망연하게 서 있던 그녀가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다리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 쓰러졌다간 숨을 부지할 수 없을 터였다. 질척이는 바닥을 질질 끌며 옮기는 걸음엔, 삶에 대한 의지가 묻어났다.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으며 위태롭게 걷던 그녀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아주 멀리, 어스름한 빛이 보였다. 속눈썹에 맺히는 빗방울이 무거워 눈을 크게 뜨기 어려웠지만, 비좁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틀림없는 빛이었다. 꺼질 듯 흔들리던 시선에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차갑게 식은 볼을 손으로 훔친 그녀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내딛는 바닥에 자그만 발자국이 꾹꾹 찍혔다.
걸음은 아까보다 훨씬 수월했다. 목적지가 있는 까닭이었다. 이 빗속을 벗어날 공간만 있어도 족했다. 굵은 빗줄기는 세상으로부터 여자를 숨겨 주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생기를 빼앗아 가고 있었다. 이미 물에 불어 쭈글쭈글해진 손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보나 마나 입술도 파랗게 질렸을 터였다. 온몸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걸음을 내딛는 데에 정신을 집중했다.
생각보다 집은 가까웠다. 아니, 집이라기보단 일종의 여관에 가까웠다. 황량한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여자는 집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현관문을 바로 두드리는 대신, 그녀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창가에 다가섰다. 창문은 찌든 때로 얼룩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니, 어른거리는 빛을 지나 움직이는 형체가 보였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딱지가 엉겨 붙어 있던 입술에 빨간 물이 점점이 솟아났다.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 때문에 순식간에 씻겨 나갔지만, 금방 또 입술을 빨갛게 적셨다. 상처가 터진 모양이었다.
창문가에서 한참이나 주저하던 여자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찰나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현관문을 돌아보았다. 부서진 나무판자를 우산 삼아 머리 위를 가린 중년 남성 하나가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여자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어렸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그 기색을 눈치챈 중년 남성이 얼른 말을 건넸다.
“들어오시오!”
여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등을 돌린 상태로 멈춰 선 그녀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남성은 여전히 고개를 내밀고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남성 또한 그녀를 경계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긴 매한가지였다. 다만 빗속에 방치된 그녀의 몰골을 보고, 경계심보다는 연민을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남성의 표정에 엿보이는 기이한 호의를 눈치챘지만 그녀는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 기이한 대치를 깬 것은, 집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아빠, 무슨 일이세요?”
남성의 뒤로 자그만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 열댓 살 정도 되었을까?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내민 소녀가 여자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중년 남성이 재차 말을 건넸다.
“들어오시오.”
소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녀가 느리게 몸을 돌려 남성을 마주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집 안에 들어서고 물기를 닦아 내니 여자의 헐벗은 차림도 또렷하게 드러났다. 소녀는 부산스럽게 옷을 찾았다. 남성이 여자에게 작은 쪽방을 일러 주는 동안, 소녀가 옷을 가져왔다. 소녀의 것이라기엔 조금 품이 큰 옷이었다. 여자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소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어머니의 옷’이라고 설명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차마 옷을 버리거나 태울 수가 없었어요.”
말을 이을수록 소녀는 울 것만 같았다. 고민하던 여자가 옷을 받아 드니 소녀의 안색도 조금 환해졌다. 여자는 그런 소녀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소녀는 따뜻한 음식이라도 있는지 찾아봐야겠다며 몸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여자는 소녀에게 받은 옷을 펼쳐 보았다. 어디서나 볼 법한 흔한 옷이었다. 허름하고 낡았지만, 여자가 지금 입고 있는 천 조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찬찬히 옷을 살폈다. 바짝 마른 손길이 옷감을 쓸어내렸다.
“그럼 전 뭔가 먹을 만한 게 있는지 확인해 볼게요. 옷 갈아입으세요! 문은 닫고 갈게요!”
소녀의 말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우두커니 소녀를 응시했다.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가려던 소녀가 그 시선을 느끼곤 멈춰 섰다. 소녀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여자는 옷을 내려놓고 성큼성큼 소녀에게 다가섰다.
다가오는 그녀의 시선이 조금 무서워서, 소녀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곧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왜 그러세요?”
여자는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소녀의 팔을 잡아채었다. 갑작스럽게 당기는 그 힘은 꽤나 강했다. 그 힘을 따라 소녀의 몸이 완전히 방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소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팔을 잡은 손아귀 힘이 너무 셌다. 소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막 항의를 하려는 찰나, 소녀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그것은 생각보다 가느다랬다. 어쩌면 나약해 보이기도 했다. 목구멍을 그그극 긁어내듯 갈라지며 나왔는데, 힘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기력이 떨어져서 목소리마저 저런 쇳소리로 겨우 내는 모양이었다. 짤막한 말 한마디를 내뱉은 여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부르튼 입술 사이로 이어지는 목소리는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또렷했다.
“언제 돌아가셨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소녀는 잔뜩 놀란 표정이었다.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리던 소녀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오, 오래 전에…….”
여자가 소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이 무서웠는지, 소녀는 눈을 굴려 그 시선을 피했다. 잡힌 팔을 빼려 했지만, 손아귀는 마치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소녀는 울상을 지으며 여자를 보았다. 그녀가 딱히 위협적인 몸짓을 취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형형한 눈빛은 소녀가 겁을 집어먹기 충분했다.
“며, 몇 년 됐어요. 그건 왜요?”
여자는 소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서 있는 쪽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쪽방은 달리 어떤 용도로 쓰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다만 구석에 정체불명의 박스가 몇 개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창고 노릇을 하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이었고 들어와서 본 것들 중 무엇 하나 잘 갖춰진 게 없었다. 누가 봐도 가난한 부녀의 집이었다. 그런데도 무엇을 찾으려는 건지, 여자는 쪽방의 내부를 차근차근 뜯어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도 사람 같지 않아서 소녀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뒤를 힐끗거렸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소리를 지르면 그녀의 아버지가 올 터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달려오는 시간 동안 여자가 자신을 어쩔까 싶은 생각에 선뜻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있었다.
방을 둘러보던 여자의 시선이 다시 소녀에게로 향했다. 하얗게 질린 소녀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내내 무표정하던 얼굴이라서, 약간의 감정 변화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지레 겁을 먹고 있던 소녀는 돌변한 분위기에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까지 무서워하던 제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여자는 가녀려 보였다. 여자가 천천히 손을 놓았지만, 소녀는 당장 도망가려던 것도 잊고 멀거니 서서 여자를 응시했다. 그녀는 조금 서글픈 눈으로 소녀를 보았다. 어째서일까. 소녀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시선에서 불쾌감을 느꼈다.
“갈아입으세요.”
소녀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여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몸을 돌렸다. 옷을 집어 드는 그녀의 등을 물끄러미 보던 소녀가 문득 여자의 뒤로 다가섰다. 소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소녀의 손끝이 여자의 등에 닿았다. 정확히는 축축하고 더러운 붕대에 닿았다. 소녀가 홀린 듯 붕대를 끌어 내렸다. 흉터투성이의 맨살이었다. 그런 와중 붕대로 가려진 부분에 무언가 얼핏 엿보였다. 다른 상처들에 비해 비교적 최근 것인지, 불그스름한 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은, 숫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