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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꽃의 시간 1권
2화
Prologue(2)


붕대는 단단하게 매여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의외로 쉽게 흘러내렸다. 여자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소녀는 쉽게 그 붕대를 끌어 내리고 숫자를 볼 수 있었다.
“4……627.”
그 와중에 아물어 가던 상처가 터졌는지, ‘2’에는 약간의 피가 맺혀 있었다. 소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형수?”
그 순간, 여자가 팔을 크게 휘두르며 돌아섰다. 비명도 나지 않을 만큼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소녀가 헛숨을 들이켜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소녀의 어른거리는 시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몇 번 입을 뻐끔거리던 소녀가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


머리가 띵했다. 소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몸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제일 처음 본 것은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소녀가 눈을 크게 떴다. 불안한 시선을 돌리니, 우두커니 선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발치엔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소녀는 불안하게 그 모습을 보았다. 숨죽여 상황을 살피고 있는데, 여자가 소녀를 돌아보았다. 소녀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소녀가 제일 처음 주었던 옷을 들고 있었다.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으,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소녀는 도망치려는 듯 몸을 꿈틀거렸지만 부질없는 몸부림으로 그쳤다. 어찌나 단단하게 묶었는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묶인 부분이 쓰라렸다. 원망스럽다는 듯 자신을 노려보는 소녀의 모습에, 여자는 침묵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들고 있는 옷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너무나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옷.
“피가 묻어 있어.”
여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소녀가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몸부림을 멈춘 소녀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서글픈 눈이었다.
“이 옷. 피가 묻은 지 얼마 안 됐어.”
소녀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소녀를 물끄러미 보던 여자가 다른 옷들을 둘러보았다. 옷은 각양각색이었다. 하나같이 허름하고 낡았지만, 수량은 꽤 되었다. 가난한 가정집에서 가지고 있기엔 조금 많아 보일 정도였다. 소녀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몸을 수그려 옷들을 조심스럽게 한쪽으로 미뤄 둔 여자가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여자의 표정이 굳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매서운 발길질이 남자에게 쏟아졌다. 쓰러져 있던 남자가 쿨럭, 하고 피를 쏟았다. 그러나 그녀의 발길질엔 자비가 없었다. 잔혹한 발길질을 정면으로 보며 벌벌 떨던 소녀가 고개를 수그렸다. 그런 소녀의 귓가로, 지나치게 덤덤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명이나 팔았지?”
울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였다. 소녀를 지켜 줄 아버지는 이미 저 바닥에 널브러져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도망가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아버지조차 잃은 소녀는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지키기엔 참으로 형편없는 몸짓이었다.
“사람 장사는 할 만하던가?”
“사,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소녀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여전히 입술은 덜덜 떨렸지만, 소녀의 눈에는 아까 전엔 보이지 않았던 독기가 엿보였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뭘 할 수 있겠어요? 이런 세상에서!”
“사람 장사를 돕고, 창부 짓을 하는 게 네가 선택한 생존방식이야?”
소녀가 허를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제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한 여자가 쓸쓸하게 시선을 내렸다.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증오가 스쳤으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있는 집. 겉으로나 안으로나 허름하기 짝이 없는 집인데, 이렇다 할 장사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부녀라는 두 사람은 꽤나 살이 붙은 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빌어먹고 사는 걸까? 갈아입으라며 건네받은 옷을 보니 그 방법을 알 수 있었다. 오래전에 병들어 죽었다는 어머니의 옷을 남겨 둘 수 있을 정도로, 이 집이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 와중에 옷에 피까지 묻어 있으니 누가 보아도 뻔했다. 그녀처럼 거리를 헤매던 부랑자들을 한 줄기 빛으로 꾀어냈겠지.
그래도 부녀라는 것은 믿고 싶었다. 딸을 키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깨어난 소녀를 보니 그마저도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제 아비를 걱정하는 대신 본인의 살 구멍을 고민했다. 자신을 지켜 줄 방패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는 모습이라니. 딸이라면 쓰러진 아비를 먼저 걱정했으리라. 적어도 여자가 아는 ‘자식’이란 그러했다. 제 부모에게 가지는 본능적인 애착. 그것을 소녀에게선 도통 찾아볼 수 없었다. 여자는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아야 할 세상인가?”
“당, 당신이야말로 사형수면서 살기 위해서 탈옥했잖아요! 당신, 옥시비아 캐슬에서 온 거 맞죠?”
소녀가 발작을 하듯 외쳤다. 그러나 여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소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 집을 지나서 쭉 직진하다 보면 절벽이 나왔다. 파도가 매섭게 몰아치는 해안가 절벽이었다. 그리고 그 절벽 끝에는 여자 죄수들이 갇혀 있는 거대한 감옥이 있었다.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오지 못한다는 악명 높은 감옥이었다. 보통은 무기징역에서 그치지만, 그중에서도 악질적인 이들은 죽어서도 지우지 못할 죄수 번호를 몸에 새긴 사형수가 되었다. 여자의 등에 아무렇게나 찍힌 숫자는, 그녀가 옥시비아 캐슬의 사형수임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사형수를 알아본다는 건, 시체 장사도 했다는 의미겠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소릴 들었는지, 소녀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이 황량한 벌판을 지나는 떠돌이는 많지 않았다. 살기 위해선 구덩이에서 시체라도 파헤쳐야 했다. 물론 옥시비아 캐슬은 바다를 바로 옆에 두고 있으므로, 시체의 처리 또한 간편했다. 다만 몇몇 관계자들의 주머니를 섭섭지 않게 챙겨 주면 시체를 마치 바다에 던지는 양 그들에게 던져 줄 뿐이었다.
썩지 않은 사형수들의 살과 뼈는 그럭저럭 좋은 값으로 넘어갔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으므로. 침묵하는 소녀를 물끄러미 보던 여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엉성하게 둘러진 붕대를 단단하게 조인 그녀가 입을 만한 옷을 하나 집어 들었다. 보통 체격의 성인이 입으면 맞을 것 같은 옷이었지만, 그녀가 입으니 꽤 넉넉한 옷이 되었다. 워낙 깡마른 탓이었다.
제대로 된 옷을 입는 것이 어색해서,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던 여자가 겨우 옷을 갖춰 입었다. 바지는 통이 너무 커서 아쉬운 대로 치마를 두를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제대로 된 사람 차림을 한 여자가 집 안을 뒤졌다. 여자가 숨겨 두었던 약간의 식량을 찾아낼 때마다 소녀는 악을 썼지만, 그것이 여자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옷 한 벌을 길게 찢어 필요한 것들을 넣고 몸에 동여맨 여자가 창밖을 살폈다. 공격적으로 쏟아지던 빗줄기가 꽤나 약해져 있었다.
“제발 풀어 주고 가요! 이대로 가면 전 죽을 거예요!”
등 뒤로 소녀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소녀를 힐끗, 돌아본 여자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소름 끼칠 정도로 무덤덤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을 타고 나왔다.
“죽는 게 편할지도.”
소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자는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망토를 몸에 둘렀다. 새까맣고 낡은 망토는 여자의 작은 체구를 다 덮고도 남았다. 후드를 눌러쓴 여자가 빗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그녀의 뺨을 적셨다. 잠시나마 온기가 돌았던 몸이 차갑게 식었다. 덩달아 그녀의 머리도 차갑게 식어 갔다.
여자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잿빛 하늘은 먹구름으로 한 치의 틈도 없이 메워져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어 입 안을 적셨다. 빗물을 마셔도,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두덩을 차게 때리는 빗물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십 년 만에 돌아온 세상은, 여전히 끔찍했다.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1)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지긋지긋하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땅은 빠르게 말랐다. 물에 씻긴 세상은 전보다 더 선명해져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라는 게 실감났다. 여자는 망토 겉으로 몸을 더듬었다. 챙겨 온 약간의 짐은 보따리에 잘 매여 있었다. 옷감이 너무 싸구려라 자칫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질긴 모양이었다. 하기야 뭐든 하찮고 무식하게 생긴 것이 더 질기고 오래가는 법이다. 물건도, 사람도.
그녀는 멈춰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아무리 걸어도 제대로 된 마을은 나오지 않았다. 마을은커녕, 집 한 채 찾아볼 수 없었다. 아까 만난 민가가 천운이었던 셈이다. 그 덕분에 약간의 식량을 비축해 둔 것이 나름의 위안이었다. 굶는 것에 익숙한 그녀라지만 언제까지고 걸을 기운이 나진 않았을 테니.
여자는 지친 눈으로 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말라비틀어진 풀과, 겨우 잎사귀를 달고 있는 앙상한 나무들이 전부였다. 그나마 있는 풀은 고르지 못한 꼴로 나 있었다. 아마도 굶주린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뜯어 간 모양이지. 시체를 팔아야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길가의 풀이야 진즉 먹어 치웠을 것이다.
구름이 잔뜩 꼈던 하늘엔 이제 해가 났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막연하게 느껴지던 일정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 것이다. 해의 위치만 보아도 가야 할 길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는 후드를 뒤로 조금 당겨 썼다. 눈앞에 언덕이 보였다. 언덕 뒤로는 이렇다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언덕 너머를 응시하던 그녀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어쩐지 공기 중으로 조금 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언덕은 의외로 멀었다. 언덕과 가까워질수록 스스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는 아니었다. 공기는 끈적끈적하게 피부를 감쌌고, 불어오는 바람은 더욱 차가웠다. 비로소 언덕에 올라 본 맞은편에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여자는 고민했다. 과연 옳게 온 것일까? 그녀는 이 나라의 지리에 해박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살았던 주변 지역 몇 군데만 귀동냥으로 들어 왔을 뿐이었다. 그녀가 있던 곳은 해안 절벽이었고, 그곳에서 쉴 새 없이 걸어 나와 다시 바닷가에 다다랐다. 서쪽의 해안을 제외한 삼면이 다른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이니, 결국 이곳은 여전히 서쪽이라는 소리였다. 다만 그녀가 출발한 해안 절벽을 중심으로 북쪽인지, 남쪽인지를 알기 어려울 뿐.
해안가를 느리게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문득 어느 지점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저 멀리 거뭇거뭇한 것들이 보였다. 아마도 그건 잔해인 것 같았다. 쑥대밭이 된 마을의 정경이라면 오는 길에 몇 번 본지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해안. 쑥대밭이 된 마을. 혹은 몇 개의 민가. 그녀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의 위치를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있던 옥시비아 캐슬은 이 나라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옥시비아 캐슬을 기준으로 남쪽은 약탈당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그녀는 지금 북쪽으로 걸어온 셈이었다. 다행히도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