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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꽃의 시간 1권
3화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2)
아마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종전이 된 지가 몇 년인데 여전히 사람 다니는 흔적이 없다는 건, 장소 자체가 버림받았다는 소리였다. 하기야, 해안은 전쟁이 터졌을 당시 제일 먼저 쑥대밭이 됐다. 가장 먼저 침략당하고, 그래서 더 무자비하게 짓밟혔을 테니 애초부터 고향에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뭔가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다만 안심하고 몸을 누일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면 족했다. 누구의 눈에 띄지 않을 그런 공간이면 충분했다. 잔해와 가까워질수록 정경은 더욱 또렷해졌다. 까맣게 그을리고 나뒹구는 것들은 대부분 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이전부터 쭉 폐허가 된 마을을 봐 오지 않았다면, 이게 마을이었을 거라는 추측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뭐 하나 제대로 남은 것이 없었다.
물에 젖은 잔해들은 미끌미끌한 해조류가 껴서 흉측했다. 잔해들은 해변에서부터 시작해 내륙으로 이어졌다. 아마 이곳은 배가 정박했던 곳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물가와 꽤나 떨어져서 걷던 그녀가 해변으로 아예 발길을 옮겼다. 단단하던 발밑이 점점 부서지고, 신발 안으로 모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입자가 작은, 아주 부드러운 모래였다.
단숨에 물가에 도착한 그녀가 상체를 수그렸다. 물에 닿기 직전에 멈춰 선 덕분에, 밀려드는 파도는 그녀의 발을 적시지 못했다. 손을 뻗어 모래를 쥐어 보니,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쏟아져 내렸다. 모래의 뿌연 잔해가 손바닥에 남았다. 겉보기와는 달리, 깊숙한 곳을 파헤치니 꽤나 흰 모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흰 모래사장. 기억 속 어느 한 지점에서 어렴풋하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와는 평생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야기.
이곳은 상류층 인사들이 휴양지로 자주 찾아온다던 ‘이노밀 해변’이었다. 흰 모래사장이 펼쳐진 정경이 마치 흰 수염 같다 하여 ‘흰 수염 해변’이라고도 불리던 곳이었다. 그렇다면 내륙 쪽으로 이어진 잔해들도 이해가 되었다. 이노밀 해변 옆엔 관광 수익이 짭짤하던 도시 ‘그림’이 있다. 침략자들에겐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이 해변에 배를 정박하기엔 수심이 얕았지만, 관광지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근처에 큰 배를 댈 수 있을만한 정박지를 따로 개발했다고 들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침략을 더욱 수월하게 만들었으리라.
모래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림에는 폐허가 된 도시를 지키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하면 도시는 그냥 지나치고 싶었지만,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식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역이 어디까지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식량을 비축해 둬야 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이 치렁치렁한 치마 대신 이동하기 편한 복장을 구하고 싶었다.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내륙으로 이어지는 잔해들을 따라 방향을 잡았다.
그대로 바다를 등지려던 그녀가 슬쩍 시선을 내렸다. 발치에선 여전히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이 느껴졌다. 간간히 거치적거리는 것들이 차이긴 했지만, 모래사장은 참으로 부드러웠다. 과연 휴양지로 이곳을 찾은 연유를 알 것도 같았다. 다만, 겉으로 보이는 모래의 색이 검붉은 까닭에 부드러운 감촉에도 불구하고 전혀 들뜨지 않았다.
흰 수염 해변이라는 별칭이 무색할 만큼 검붉게 물든 모래사장을 훑어본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모래에 스며든 피는 파도조차 쓸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만 비린 바다 냄새로 온 모래사장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
멀리서 봐도 몇 개의 건물들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이 늦어졌다. 도시라고 부르기도 처참한 외관이었지만, 성벽이 다 무너진 것을 감안하고도 규모는 그럭저럭 봐 줄 만 했다. 적어도 마을이라는 호칭을 붙여 줄 크기는 아니었다. 길가에 움직이는 그림자들도 보였다. 사람이 있다는 건 확실해진 것이다. 그녀는 이대로 들어가도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성벽 주변에 멈춰 섰다. 지금의 그녀는 이렇다 할 호신용품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 민가에서 주방용 칼이라도 찾아 챙겨 올 것을.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그녀는 아쉬운 대로 굴러다니는 돌 조각을 집어 들었다. 손안에 들어올 만큼 작았지만 끝이 뾰족한 모양으로 부서진 것이었다. 망토 속에 그것을 챙기고, 긴 작대를 집어 지팡이처럼 짚은 그녀가 천천히 도시로 다가갔다. 거리에 나와 있던 몇몇이 그녀를 발견하고 행동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들도 이내 그녀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선 관심을 끊었다. 무방비해 보이는 여행자를 다짜고짜 공격할 만큼 내몰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심지어 몇몇은 그녀보다 더 질이 좋아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 봤자 낡고 허름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행색만 보아도 대충 이곳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관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가냘픈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어린아이가 슬금슬금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 보였다. 눈을 끔뻑거리는 아이는 더러운 피부에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시선만큼은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녀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이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왔다.
“이 도시에서 제일 좋은 여관이에요. 창문이 정말 튼튼해요.”
그러니 짐이 털릴 일도 없다. 아마도 그런 의미이리라. 그녀는 새삼스럽게 망토 안에 멘 보따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남들에겐 별것 아닌 식량으로 보일 테지만, 그녀에겐 당장 생사를 결정지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제 짐을 품에 안은 상태로, 그녀가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난 돈이 없어.”
그녀의 말에 아이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입을 삐죽이던 아이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럼 창문이 튼튼할 필요는 없겠네요.”
“하지만 쉴 곳은 필요해. 안심할 수 있는.”
“돈이 없으니까 어디서든 안심할 수 있겠죠.”
심드렁하게 대꾸한 아이가 그녀를 지나치려는 찰나, 그녀가 말을 건넸다.
“너, 밥은 먹고 일하는 거야?”
소매 아래로 보이는 아이의 팔목이 가느다랬다. 누군가 버린 옷을 주워 입었는지, 옷 품이 꽤나 커 보였다. 그래서 아이의 왜소한 체격은 오히려 더 도드라졌다. 형편이 좋다고 해 봤자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사는 아이였다. 제때 식사를 챙겨 먹는 일은 사치일 것이다. 그녀의 물음에 아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아이가 입술을 삐죽였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육포를 줄게. 난 안심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해.”
“육포?”
아이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먹을 것은 무조건 물에 넣고 끓여서 최대한 양을 불리다 보니, 무언가를 씹어 먹는 일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고기라니. 어지간한 야생동물도 잘 보이지 않는 요즘이라 고기는 꽤나 귀한 편이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해 준다니, 아이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혹할 제안이었다. 아이는 그녀의 말이 진짜인지 알아보려는 듯 영악하게 눈을 굴렸다. 나름 토박이 노릇을 하는 아이라지만 작정하고 속이려 드는 어른을 이길 재간은 없었다. 그녀는 아이의 시선을 덤덤하게 마주했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가, 이내 몸을 돌렸다.
“따라와요.”
아이는 쫄쫄쫄 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을 요리조리 꺾어 들어가는 모양새를 보니, 여관을 소개해 줄 심산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묵묵히 아이의 뒤를 따랐다. 성큼성큼 아이를 따르던 그녀가 불현듯 걸음을 늦추었다. 잘 따라오던 그녀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자, 아이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요?”
그녀는 대답 대신 전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이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건들건들 웃고 있는 사내가 언제 튀어나왔는지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이가 얼른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뒤에도 누군가 서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이야, 이피. 오랜만의 손님이네?”
“이피의 손님이라면 돈깨나 있다는 소리지?”
사내들의 이죽거림에 아이, 이피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돈이 있었으면 여관을 소개해 줬겠지! 이 길은 여관 가는 길이 아니잖아. 알면서 왜 막아서는 거야?”
“우리가 요즘 영, 장사가 안 돼서 말이야.”
사내가 키득거리며 슬금슬금 다가섰다. 잔뜩 경계심 어린 눈으로 사내들을 번갈아 노려보던 이피가 한 걸음, 물러서며 소리쳤다.
“니네 장사는 여기서 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한 명 잡았으면 됐지 뭘 더 바라?”
이피의 시선이 뒤쪽 사내에게 향했다. 사내는 밧줄을 쥐고 있었는데, 누군가 손이 꽁꽁 묶인 상태로 밧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머리에 구멍이 뚫린 천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작은 체구에 치마를 두른 모양새를 보니 어린 계집아이 같았다. 잡히는 도중 잔뜩 맞은 건지, 계집아이는 몸을 움츠리고 떨면서도 얌전히 서 있었다.
그녀도 계집애를 발견했다. 눈살을 찌푸리고 계집애를 보던 그녀가 사내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눈동자에 날이 선 적의가 스쳤다. 그러는 사이, 사내와 이피의 대화는 이어졌다.
“말도 마라. 글쎄 공급처 중 한 군데가 습격당했어. 어느 미친 새끼가 다 뒤엎고 도망갔더라고.”
이피의 앞에 선 사내가 말하자, 뒤쪽을 막아선 사내도 그 말에 동조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존나 난처하다는 말씀. 그런데 신기하게도 네놈의 손님이 습격당한 우리 공급원의 옷을 입고 있네?”
이피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전신을 감싼 망토를 확인한 이피가 표정을 구겼다.
“니 뒤에 그 새끼만 넘겨. 이피 너까지 팔아먹진 않을 테니까.”
그녀는 자신이 지나쳐온 민가를 떠올렸다. 사람 장사, 시체 장사, 몸을 파는 여자아이, 아비를 사칭하던 더러운 사내. 단편적인 단어들이 조각배처럼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녀는 망토 속에 제 짐을 다시 한 번 단단하게 묶었다. 이피는 인상을 찌푸리며 사내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갈등이 되는 모양이었다. 사내들과의 친분을 떠나, 저들이 이 일대를 휘젓는 패거리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러니 분란이 나서 좋을 게 없는 것이다. 육포에 목숨까지 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녀를 돕지 않는 이피의 사정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잠깐이나마 고민하는 기색을 보여 주는 게 고마울 지경이라, 그녀는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갯짓을 하며 이피를 옆으로 물러서게 했다. 그녀의 행동을 본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네놈이 우리 공급원 하나를 처리했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지금 누굴 건든지 알아? 넌 죽었어, 새끼야!”
아무래도 뒤에 선 사내는 그저 도주로를 막기 위해 서 있는 모양이었다. 제 뒤를 막고 있는 사내를 돌아본 그녀가 정면을 응시했다. 이피는 짜증 난다는 눈으로 길 옆에 물러서 있었다. 그녀는 쥐고 있던 작대기를 바닥에 툭, 내던졌다. 그러곤 후드를 끌어 내렸다. 내내 후드를 쓰고 있다가 벗으니 햇살이 일제히 쏟아져 눈을 아프게 찔렀다.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사내가 곧 느물느물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여자였어?”
3화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2)
아마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종전이 된 지가 몇 년인데 여전히 사람 다니는 흔적이 없다는 건, 장소 자체가 버림받았다는 소리였다. 하기야, 해안은 전쟁이 터졌을 당시 제일 먼저 쑥대밭이 됐다. 가장 먼저 침략당하고, 그래서 더 무자비하게 짓밟혔을 테니 애초부터 고향에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뭔가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다만 안심하고 몸을 누일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면 족했다. 누구의 눈에 띄지 않을 그런 공간이면 충분했다. 잔해와 가까워질수록 정경은 더욱 또렷해졌다. 까맣게 그을리고 나뒹구는 것들은 대부분 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이전부터 쭉 폐허가 된 마을을 봐 오지 않았다면, 이게 마을이었을 거라는 추측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뭐 하나 제대로 남은 것이 없었다.
물에 젖은 잔해들은 미끌미끌한 해조류가 껴서 흉측했다. 잔해들은 해변에서부터 시작해 내륙으로 이어졌다. 아마 이곳은 배가 정박했던 곳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물가와 꽤나 떨어져서 걷던 그녀가 해변으로 아예 발길을 옮겼다. 단단하던 발밑이 점점 부서지고, 신발 안으로 모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입자가 작은, 아주 부드러운 모래였다.
단숨에 물가에 도착한 그녀가 상체를 수그렸다. 물에 닿기 직전에 멈춰 선 덕분에, 밀려드는 파도는 그녀의 발을 적시지 못했다. 손을 뻗어 모래를 쥐어 보니,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쏟아져 내렸다. 모래의 뿌연 잔해가 손바닥에 남았다. 겉보기와는 달리, 깊숙한 곳을 파헤치니 꽤나 흰 모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흰 모래사장. 기억 속 어느 한 지점에서 어렴풋하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와는 평생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야기.
이곳은 상류층 인사들이 휴양지로 자주 찾아온다던 ‘이노밀 해변’이었다. 흰 모래사장이 펼쳐진 정경이 마치 흰 수염 같다 하여 ‘흰 수염 해변’이라고도 불리던 곳이었다. 그렇다면 내륙 쪽으로 이어진 잔해들도 이해가 되었다. 이노밀 해변 옆엔 관광 수익이 짭짤하던 도시 ‘그림’이 있다. 침략자들에겐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이 해변에 배를 정박하기엔 수심이 얕았지만, 관광지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근처에 큰 배를 댈 수 있을만한 정박지를 따로 개발했다고 들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침략을 더욱 수월하게 만들었으리라.
모래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림에는 폐허가 된 도시를 지키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하면 도시는 그냥 지나치고 싶었지만,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식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역이 어디까지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식량을 비축해 둬야 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이 치렁치렁한 치마 대신 이동하기 편한 복장을 구하고 싶었다.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내륙으로 이어지는 잔해들을 따라 방향을 잡았다.
그대로 바다를 등지려던 그녀가 슬쩍 시선을 내렸다. 발치에선 여전히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이 느껴졌다. 간간히 거치적거리는 것들이 차이긴 했지만, 모래사장은 참으로 부드러웠다. 과연 휴양지로 이곳을 찾은 연유를 알 것도 같았다. 다만, 겉으로 보이는 모래의 색이 검붉은 까닭에 부드러운 감촉에도 불구하고 전혀 들뜨지 않았다.
흰 수염 해변이라는 별칭이 무색할 만큼 검붉게 물든 모래사장을 훑어본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모래에 스며든 피는 파도조차 쓸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만 비린 바다 냄새로 온 모래사장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멀리서 봐도 몇 개의 건물들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이 늦어졌다. 도시라고 부르기도 처참한 외관이었지만, 성벽이 다 무너진 것을 감안하고도 규모는 그럭저럭 봐 줄 만 했다. 적어도 마을이라는 호칭을 붙여 줄 크기는 아니었다. 길가에 움직이는 그림자들도 보였다. 사람이 있다는 건 확실해진 것이다. 그녀는 이대로 들어가도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성벽 주변에 멈춰 섰다. 지금의 그녀는 이렇다 할 호신용품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 민가에서 주방용 칼이라도 찾아 챙겨 올 것을.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그녀는 아쉬운 대로 굴러다니는 돌 조각을 집어 들었다. 손안에 들어올 만큼 작았지만 끝이 뾰족한 모양으로 부서진 것이었다. 망토 속에 그것을 챙기고, 긴 작대를 집어 지팡이처럼 짚은 그녀가 천천히 도시로 다가갔다. 거리에 나와 있던 몇몇이 그녀를 발견하고 행동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들도 이내 그녀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선 관심을 끊었다. 무방비해 보이는 여행자를 다짜고짜 공격할 만큼 내몰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심지어 몇몇은 그녀보다 더 질이 좋아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 봤자 낡고 허름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행색만 보아도 대충 이곳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관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가냘픈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어린아이가 슬금슬금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 보였다. 눈을 끔뻑거리는 아이는 더러운 피부에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시선만큼은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녀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이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왔다.
“이 도시에서 제일 좋은 여관이에요. 창문이 정말 튼튼해요.”
그러니 짐이 털릴 일도 없다. 아마도 그런 의미이리라. 그녀는 새삼스럽게 망토 안에 멘 보따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남들에겐 별것 아닌 식량으로 보일 테지만, 그녀에겐 당장 생사를 결정지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제 짐을 품에 안은 상태로, 그녀가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난 돈이 없어.”
그녀의 말에 아이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입을 삐죽이던 아이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럼 창문이 튼튼할 필요는 없겠네요.”
“하지만 쉴 곳은 필요해. 안심할 수 있는.”
“돈이 없으니까 어디서든 안심할 수 있겠죠.”
심드렁하게 대꾸한 아이가 그녀를 지나치려는 찰나, 그녀가 말을 건넸다.
“너, 밥은 먹고 일하는 거야?”
소매 아래로 보이는 아이의 팔목이 가느다랬다. 누군가 버린 옷을 주워 입었는지, 옷 품이 꽤나 커 보였다. 그래서 아이의 왜소한 체격은 오히려 더 도드라졌다. 형편이 좋다고 해 봤자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사는 아이였다. 제때 식사를 챙겨 먹는 일은 사치일 것이다. 그녀의 물음에 아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아이가 입술을 삐죽였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육포를 줄게. 난 안심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해.”
“육포?”
아이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먹을 것은 무조건 물에 넣고 끓여서 최대한 양을 불리다 보니, 무언가를 씹어 먹는 일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고기라니. 어지간한 야생동물도 잘 보이지 않는 요즘이라 고기는 꽤나 귀한 편이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해 준다니, 아이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혹할 제안이었다. 아이는 그녀의 말이 진짜인지 알아보려는 듯 영악하게 눈을 굴렸다. 나름 토박이 노릇을 하는 아이라지만 작정하고 속이려 드는 어른을 이길 재간은 없었다. 그녀는 아이의 시선을 덤덤하게 마주했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가, 이내 몸을 돌렸다.
“따라와요.”
아이는 쫄쫄쫄 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을 요리조리 꺾어 들어가는 모양새를 보니, 여관을 소개해 줄 심산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묵묵히 아이의 뒤를 따랐다. 성큼성큼 아이를 따르던 그녀가 불현듯 걸음을 늦추었다. 잘 따라오던 그녀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자, 아이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요?”
그녀는 대답 대신 전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이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건들건들 웃고 있는 사내가 언제 튀어나왔는지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이가 얼른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뒤에도 누군가 서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이야, 이피. 오랜만의 손님이네?”
“이피의 손님이라면 돈깨나 있다는 소리지?”
사내들의 이죽거림에 아이, 이피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돈이 있었으면 여관을 소개해 줬겠지! 이 길은 여관 가는 길이 아니잖아. 알면서 왜 막아서는 거야?”
“우리가 요즘 영, 장사가 안 돼서 말이야.”
사내가 키득거리며 슬금슬금 다가섰다. 잔뜩 경계심 어린 눈으로 사내들을 번갈아 노려보던 이피가 한 걸음, 물러서며 소리쳤다.
“니네 장사는 여기서 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한 명 잡았으면 됐지 뭘 더 바라?”
이피의 시선이 뒤쪽 사내에게 향했다. 사내는 밧줄을 쥐고 있었는데, 누군가 손이 꽁꽁 묶인 상태로 밧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머리에 구멍이 뚫린 천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작은 체구에 치마를 두른 모양새를 보니 어린 계집아이 같았다. 잡히는 도중 잔뜩 맞은 건지, 계집아이는 몸을 움츠리고 떨면서도 얌전히 서 있었다.
그녀도 계집애를 발견했다. 눈살을 찌푸리고 계집애를 보던 그녀가 사내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눈동자에 날이 선 적의가 스쳤다. 그러는 사이, 사내와 이피의 대화는 이어졌다.
“말도 마라. 글쎄 공급처 중 한 군데가 습격당했어. 어느 미친 새끼가 다 뒤엎고 도망갔더라고.”
이피의 앞에 선 사내가 말하자, 뒤쪽을 막아선 사내도 그 말에 동조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존나 난처하다는 말씀. 그런데 신기하게도 네놈의 손님이 습격당한 우리 공급원의 옷을 입고 있네?”
이피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전신을 감싼 망토를 확인한 이피가 표정을 구겼다.
“니 뒤에 그 새끼만 넘겨. 이피 너까지 팔아먹진 않을 테니까.”
그녀는 자신이 지나쳐온 민가를 떠올렸다. 사람 장사, 시체 장사, 몸을 파는 여자아이, 아비를 사칭하던 더러운 사내. 단편적인 단어들이 조각배처럼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녀는 망토 속에 제 짐을 다시 한 번 단단하게 묶었다. 이피는 인상을 찌푸리며 사내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갈등이 되는 모양이었다. 사내들과의 친분을 떠나, 저들이 이 일대를 휘젓는 패거리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러니 분란이 나서 좋을 게 없는 것이다. 육포에 목숨까지 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녀를 돕지 않는 이피의 사정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잠깐이나마 고민하는 기색을 보여 주는 게 고마울 지경이라, 그녀는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갯짓을 하며 이피를 옆으로 물러서게 했다. 그녀의 행동을 본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네놈이 우리 공급원 하나를 처리했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지금 누굴 건든지 알아? 넌 죽었어, 새끼야!”
아무래도 뒤에 선 사내는 그저 도주로를 막기 위해 서 있는 모양이었다. 제 뒤를 막고 있는 사내를 돌아본 그녀가 정면을 응시했다. 이피는 짜증 난다는 눈으로 길 옆에 물러서 있었다. 그녀는 쥐고 있던 작대기를 바닥에 툭, 내던졌다. 그러곤 후드를 끌어 내렸다. 내내 후드를 쓰고 있다가 벗으니 햇살이 일제히 쏟아져 눈을 아프게 찔렀다.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사내가 곧 느물느물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여자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