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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꽃의 시간 1권
4화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3)


그녀는 사내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여자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마음을 놓았는지, 사내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내색이었다. 오히려 제 앞섶을 내보이며 노골적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이쁜이한테 맞아 죽다니. 우리 공급원 복이 터졌네?”
“……죽었나?”
그녀의 나지막한 물음에 사내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이내 다시 웃음을 흘렸다.
“뭐, 죽을 듯이 헐떡거리기에 우리가 곱게 포장해서 데려오긴 했지. 이왕이면 죽은 놈보단 산 놈이 낫거든. 신선하고.”
그녀는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차가운 칼날이 훑고 지나간 듯, 피부가 아렸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질끈 감았다가 뜬 그녀가 재차 물었다.
“여자애는?”
“그년? 그년이야 계속 거기서 일해야지. 원래 사내놈 혼자 있으면 사람들이 경계를 너무 많이 하거든. 그보다, 공급원에게 만족을 못 했었나 보지? 킬킬. 하긴 그 새끼가 시원찮긴 해.”
천박하게 웃는 사내를 물끄러미 보던 그녀가 툭, 대꾸했다.
“그래.”
너무나 쉽게 나온 대답에, 사내가 잠시 눈을 껌뻑였다. 그런 그를 향해 그녀가 덤덤한 목소리로 재차 말을 했다.
“그 말이 맞아.”
사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이제 노골적으로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침착한 표정이나 짧은 단발머리는 마음에 안 들었지만, 창백한 안색은 보다 보니 제법 괜찮아 보였다. 나날이 살아 있는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모처럼의 수확이었다. 하물며 여성이라니. 사내는 기꺼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렇다면 사람 잘 찾아왔지. 내가 또 죽여주거든.”
사내와의 거리는 이제 지척이었다. 그녀는 망토 속의 손을 꺼냈다. 순간적으로 사내가 몸을 긴장시켰지만, 맨손임을 확인하고 곧 긴장을 풀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사내의 목덜미를 쓸며 감쌌다. 그 손길이 의외로 능숙해서, 사내는 저도 모르게 헤벌쭉 웃음 지었다.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손으로 사내의 뒷덜미와 귀 밑을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포옹을 하려는 듯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사내는 두 손을 그녀의 허리에 두르며 실실 웃었다. 그녀가 망토 속의 또 다른 손을 꺼냈다. 너무 가까이에서 끌어안은 까닭에, 사내는 그녀의 또 다른 손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오랜만…….”
퍽!
사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허리를 당겨 안으려던 손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밀쳤다. 그가 상체를 웅크리며 제 한쪽 머리통을 손으로 감쌌다. 그의 손이 질척한 피에 젖어 들었다. 밀쳐진 그녀가 사내에게 성큼성큼 다가서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렀다. 사내가 미처 대응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머리를 감싼 사내의 손을 가격했다. 사내가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 사내의 손등이 돌에 짓뭉개지며 피범벅이 되었다.
뒤쪽을 막아선 사내가 욕설을 내뱉으며 뛰듯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쥐고 있던 밧줄을 잊고 있던 탓에, 곧 억지로 끌려오는 계집애의 무게에 주춤했다. 그러는 사이 작대기를 집어 든 그녀가 그의 머리를 겨냥해 내리쳤다. 미처 방어를 하지 못하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그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뒤쪽 사내를 상대하는 동안, 제 머리를 감싸고 있던 사내가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으며 주먹을 쥐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겨우 그를 피해 몸을 굴린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한 움큼 쥔 흙을 그의 얼굴로 집어 던졌다. 그러곤 눈에 흙이 들어가 주춤하는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쥐고 있는 돌을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상태에서 사내는 본능적으로 다친 자신의 머리를 팔로 감쌌다. 그러나 이번에 고통이 느껴진 쪽은 머리가 아니라 명치였다. 사내가 결국 몸을 웅크리며 쓰러졌다. 그녀는 곧바로 바닥에 흙을 쓸어 쥐며 밧줄을 쥔 사내에게 던졌다. 그러곤 작대기로 사정없이 사내를 후려갈겼다. 몇 번 후려치니 작대기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금방 부서졌다. 손으로 방어를 하듯 휘젓던 사내가 욕설을 내뱉으며 밧줄을 놓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가 부러진 작대기를 고쳐 쥐고 몸을 피하는 순간, 뒤쪽에 묶여 있던 계집애가 불현듯 몸을 던져 사내에게 부딪쳤다. 사내가 균형을 잃고 휘청하는 것을 확인한 여자가 작대기를 들고 돌진했다. 부러지는 바람에 끝이 뾰족하게 변한 작대기가 사내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깊이 찔리진 않았지만 겉가죽이 뚫린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사내는 제 배에 찔린 작대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상체를 수그렸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쥐고 있던 돌을 그의 머리에 내리쳤다. 퍽!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본 이피는 하얗게 질린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골목 벽에 거의 몸을 붙이다시피 밀착하고 서 있던 이피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다가, 이내 냉큼 달음박질쳤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도망가는 이피를 보았지만, 애써 쫓지 않았다. 대신 쓰러진 사내들에게 다가가 쥐고 있는 돌로 세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뾰족하던 돌 끝은 뭉툭해지다 못해 살점이 묻어났지만, 여자는 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저항을 하려던 사내들의 팔이 결국 길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질 즈음이 돼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며 옷이며 손이며 피가 잔뜩 튄 상태였다. 숨을 고르며 움직이지 않는 두 명의 사내를 번갈아 보던 그녀가 시선을 조금 옮겼다. 머리에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 계집애가 골목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꼴을 보니 겁먹은 게 분명했다. 그녀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돌을 옆으로 휙 집어 던졌다. 돌은 데구르르, 구석으로 굴러갔다.
그녀는 성큼성큼 계집애에게 다가갔다. 쭈그리고 앉아 눈치를 보던 계집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금방 벽에 가로막혀 도망칠 구멍을 잃고 말았다. 자신에게 뻗어 오는 그녀의 손길을 본 계집애가 두 팔 사이로 고개를 파묻고 잔뜩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곧,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계집애의 손을 묶고 있는 밧줄을 잡아 풀고 있었다. 다행히 손으로 풀 수 있는 매듭이었던지, 약간의 씨름 끝에 밧줄을 풀 수 있었다. 손이 묶인 상태에서 거칠게 끌려다녔던 까닭에 계집애의 손목 살갗은 빨갛게 벗겨져 있었다. 그녀는 손목의 밧줄만 풀어 주고 몸을 일으켰다. 자유로워진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계집애가 고개를 들었다. 뚫려 있는 구멍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계집애가 제 손으로 천천히 천을 벗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물빛 눈동자였다. 더러운 몰골임에도 크고 동그란 눈동자가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머리카락은 얼룩덜룩한 갈색이었는데, 진흙이나 다른 이유로 더러워진 게 아니라 머리 자체의 색깔이었다. 게다가 고약한 냄새가 천을 벗자마자 훅 끼쳤다. 후각을 심하게 자극하는 그 냄새에 눈살을 찌푸릴 법도 하건만, 그녀는 미동 없는 표정으로 계집애를 보았다. 행색도 초라하니 후줄근했지만, 계집애는 귀엽고 예쁘장했다. 씻겨서 제대로 옷을 입혀 놓으면 제법 태가 날 것 같았다.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보던 계집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예쁘장한 외모와는 다르게, 중저음에 가까운 목소리라 사춘기를 벗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녀는 별다른 대꾸 없이 몸을 돌리려 했다. 그녀의 무덤덤한 반응에 도리어 당황한 표정을 짓던 계집애가 멀어지려는 망토 자락을 잡았다.
“저, 저기!”
그녀의 시선이 망토 자락으로 향했다. 자그만 손이 절박하게 옷자락을 쥐고 있었다. 계집치고 큰 손은 그간의 험한 생활을 대변하듯 조강했다. 그러나 흘러내린 소매 너머로 얼핏 보이는 속살은 뽀얀 게, 본래가 흰 피부라는 걸 알게 해 주었다. 그녀는 계집애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계집애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어, 어디 가세요?”
“그건 왜?”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니까…….”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애매했던지, 계집애는 어설프게 말끝을 흐렸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여자는 혼자 다녀도 충분해 보이는 것이다. 눈앞에서 사내 둘과 싸우는 꼴을 보았으니 위험을 운운하는 것은 꽤 우스운 핑곗거리였다. 그녀는 계집애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마 혼자 다녀서 위험한 것은 이 계집애일 것이다. 이렇게 예쁘장한 외모를 하고 무방비하게 거리를 나다니니, 저런 쓰레기들에게 잡혀 팔려 나갈 뻔했지. 여태 숨을 부지하고 선 것만 해도 운이 좋은 것이었다. 그녀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계집애가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렸다.
“아까도 골목에서 헤매다가 잡혀서…… 여길 벗어날 때까지만 따라가면 안 될까요? 절대 귀찮게 안 할게요…….”
그녀는 쓰러져 있는 사내들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그중 한 사람의 손가락이 아주 살짝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그녀는 지체 없이 다가가 발로 그를 지그시 밟았다. 그 모습을 계집애가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사내들을 내려다보는 상태에서, 그녀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안 무서워?”
“누, 누가요?”
“내가.”
계집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큰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응시하던 계집애가 이번엔 쓰러진 사내들을 보았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무섭지 않아요. 저놈들을 물리쳐 주셨잖아요.”
‘물리쳤다’는 표현은 이상했다. 그녀는 그 표현의 이상함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 사내들을 물리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싸워서 이겼을 뿐이었다. 그저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에 의지해서.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널 위한 건 아니었어.”
“상관없어요.”
대답은 빨랐다. 급하게 말을 받은 계집애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방금 전까지 제법 또박또박하게 대꾸하던 목소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여기에 놓고 가면, 난 이번에야말로 죽을 거예요.”
물빛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순수한 공포였다. 죽음에 대한, 삶이 끝난다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인지. 제 감정을 걸러 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표출하는 계집애의 얼굴을, 그녀는 찬찬히 뜯어보았다. 계집애는 오직 생존을 원하고 있었다. 아마도 많은 죽음을 목도했으리라. 어쩌면 가까운 이의 죽음까지도.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거대한 죽음 앞에서, 저 계집애는 아직 제가 살아남을 구멍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계집애의 물빛 눈동자는 참으로 이상한 여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혀끝까지 치민 ‘알게 뭐야’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질 않았다.
“……따라와도 널 신경 써 주지는 않을 거야.”
계집애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무심한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몸을 돌렸다. 계집애가 환한 얼굴로 그 뒤를 따르려는데, 그녀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대신, 얼굴은 가려.”
그녀야 후드를 눌러쓰면 그만이었지만, 계집애는 지금 걸친 일상복이 전부였다. 그녀의 말에, 계집애가 난처한 얼굴로 주춤 멈춰 섰다. 그러다가 곧 무언가를 생각해 냈는지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자신이 직접 벗었던 천을 다시 뒤집어쓴 계집애가 의기양양하게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지만, 이내 별말 없이 몸을 돌렸다. 계집애가 쪼르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