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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꽃의 시간 1권
5화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4)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계집애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경계심을 푼 모양이었다. 이러니 저 불한당들에게 잡혔지. 그녀는 대답 대신 계집의 눈구멍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침묵에 잠시 주춤하던 계집애가, 금세 다시 기운을 차리고 재잘거렸다.
“가는 동안 이름을 부를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분명 계집애는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만 같이 가자고 했는데, 말하는 건 어디든 따라다닐 기세였다. 그녀는 조금 착잡한 눈을 들어 정면을 보았다. 벌써부터 후회가 되는 것 같았다. 그사이 계집애는 혼자 재잘거리며 말을 잇고 있었다.
“난 레모타예요. 내 이름을 말했으니까 얼른 알려 주세요.”
이대로라면 내내 조를 판이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 죄수 번호 4627. 그리 불린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제 이름이 가물가물했다. 까마득한 기억을 겨우 더듬어서, 그녀가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달리아.”
십 년 만에 내뱉은 이름은 참으로 낯설었다.
***
이제 와 이피를 찾는다고 해도 숙소를 소개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딘지도 모를 골목을 한참이나 헤매던 달리아는 난처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골목은 한적했다. 불한당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휑했다. 이 도시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비어 있었던 모양이다. 대로변 쪽에나 사람들이 모여 있고, 골목을 깊숙이 들어오니 인기척은 느낄 수가 없었다. 달리아는 바로 옆의 건물 창문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내부가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사람이 살지 않은 지가 오래된 것 같았다. 사람이 이렇게 없을 정도라면, 빈집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은 쉬어야 했다. 조금의 배려도 없이 성큼성큼 앞서 걷는 달리아를 용케 잃어버리지 않고 쫓아오는 레모타를 생각해서라도, 안전한 집이 필요했다.
이름을 알고부터 연신 조잘거리던 레모타는 슬슬 지쳤는지,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달리아를 놓치지 않는 데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 같았다. 조금의 자비도 없이 사내들을 때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으면서 왜 겁먹지 않는 건지, 달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레모타가 달리아를 방패막이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다는 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달리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덜컥 따라나서는 행태는 아무리 봐도 안전 불감증에 가까웠다. 바로 직전까지 팔려 갈 뻔한 주제에 금세 낯선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다니.
달리아는 레모타가 사실 어느 무리에 소속된 아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 보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무턱대고 다닐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요즘 세상은 긴장감 없이 혼자 나돌아 다니는 계집애를 가만 놔둘 정도로 평화롭지 못하니까. 어쩌면 달리아를 속여서 제 무리에게 팔아넘기려는 속셈은 아닐까? 긴장을 놓고 있으면 제 무리를 불러들여서 단숨에 그녀를 잡으려 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일부러 더 쉬지 않고 걸었다. 지쳐 쓰러지더라도 그녀보다는 레모타가 먼저 쓰러질 터였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무방비하게 자다가 뒤통수를 맞을 일은 없겠지. 그러다가도 쥐뿔도 없이 맨몸을 한 레모타를 보고 있노라면 딱히 위험할 것은 없어 보였다. 설사 일행이 있다 한들, 무엇으로 그 일행을 부르나.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자신을 따라오는 레모타를 힐끗 확인한 달리아가 이내 느슨했던 걸음에 힘을 주었다. 슬슬 골목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골목 막다른 지점에 다다르기 바로 직전, 달리아는 단조롭게 생긴 2층 건물을 하나 골랐다. 건물의 형태는 주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창문을 통해 내부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을 한 그녀가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아마도 가정집이었던 모양이다. 가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의 잔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간간히 깨진 유리 조각도 보였다. 나뒹구는 식기에 뽀얀 먼지가 쌓여 있었다. 달리아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2층으로 향했다 조심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뒤따라 들어온 레모타도 덩달아 숨을 죽이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천장에 낀 거미줄이 흉흉하게 보였다.
2층은 바깥에서 봤던 것보다 더 좁았다. 먼지와 얼룩으로 더럽혀진 침대보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게 보였다. 집 안을 샅샅이 뒤져 다른 누군가가 없는 것을 확인한 달리아가 1층으로 내려가 현관문을 닫았다. 마땅히 문 앞을 막아 둘 만한 물건이 없었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나무 작대기를 문에 기댔다. 문이 열리면 나무 작대기가 넘어지면서 소리를 낼 터였다. 창문도 막을 수 없긴 매한가지라, 창문 아래엔 유리 조각들을 뿌렸다.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곳마다 나름대로 대비를 해 둔 달리아가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의 문도 닫고, 나무 작대기를 세운 그녀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뜩 지친 얼굴을 하고 있던 레모타는 쉴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까보다 조금 더 생기 있는 얼굴로 방 안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한쪽 문짝이 떨어진 옷장 근처를 슬금슬금 돌아보며 확인하던 레모타가 문득 탄성을 내뱉었다.
“여기 뭔가 있어요.”
레모타가 가리키는 곳은 옷장으로 가려진 벽 부분이었다. 옷장 때문에 몰랐는데, 그 뒤에 벽과 똑같은 색의 문이 있었다. 달리아와 레모타가 옷장을 옆으로 밀치니, 그 문은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벽의 색깔과 맞춘 것으로 보아, 일종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통하는 문 같았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레모타 대신 달리아가 문을 힘껏 밀었다. 문은 쉽게 밀려 났다.
그곳은 일종의 비밀 방이었다. 어쩐지 밖에서 볼 때보다 좁아 보인다 싶더니만 이런 곳이 있었구나. 달리아가 먼저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비밀 방엔 창문이 없어서 엄청나게 어두웠지만, 의외로 바깥보다 깨끗했다.
“엇, 이불이에요!”
레모타가 반가운 듯 말했다. 과연, 이불과 몇 개의 옷가지, 그리고 짜리몽땅한 양초 등 사람이 있던 흔적이 어둠 속에서 어스름하게 보였다. 다만 내부에 도는 냉기는 이 방의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지 꽤나 오래되었다는 걸 알려 주었다. 아마도 흉흉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고자 이곳에 숨어 생활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비밀 방에 숨어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 결국 이곳을 나갔을 테지. 하룻밤 쉴 곳이 필요했던 두 사람에게는 딱 알맞은 장소였다.
달리아는 양초를 집어 들었다. 심지가 새카맣게 오그라들어 있었다. 불을 지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비밀 방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마땅히 불을 지필 만한 도구가 보이지 않았다.
“부싯돌은 없는지 확인해 봐.”
달리아의 말에 고개를 내밀고 그녀를 보고 있던 레모타가 냉큼 비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참 나더니 잠시 후, 레모타가 양손에 차돌과 쇳조각을 들고 나타났다. 생각해 보면, 불을 붙일 도구도 없이 양초만 들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오랫동안 쓰질 않아서 그런지 불꽃만 튀고 불이 잘 붙지 않아서 한참이나 씨름을 한 끝에, 달리아는 겨우겨우 양초 심지를 밝힐 수 있었다. 불을 밝히고 나니 비밀 방을 좀 더 잘 살펴볼 수 있었다.
방에는 꽤나 유용해 보이는 게 많았다. 옷가지나 양초는 말할 것도 없고, 소소한 생활용품들이 어설프게나마 마련되어 있었다. 달리아는 이 방의 주인이 제 발로 나갔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추측을 수정했다. 제 발로 이곳을 떠난 게 아니라, 잠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죄다 놓고 나갈 까닭이 없으니까. 비밀 방 곳곳을 불로 밝혀 보며 쓸 만한 물건들을 골라내는 달리아를 물끄러미 보던 레모타가 질문했다.
“여기서 쉬는 거예요?”
“날이 어두워졌으니 바깥을 돌아다니는 건 위험해.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게 더 생산적일 거다.”
무덤덤한 달리아의 말에, 레모타가 또르륵 눈을 굴렸다. 달리아의 눈치를 보며 몇 번이나 주저하던 레모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나 여기 같이 있어도 돼요?”
이제 와 새삼스럽게 그런 것은 무엇하러 묻나. 달리아가 힐끗, 레모타를 보았다. 벽 근처에 등을 대고 쭈그린 레모타는 아직 완전히 엉덩이를 붙이진 않은 상태였다. 아마도 달리아가 내쫓을 것을 의식한 모양이었다. 불쌍한 꼴로 앉아 있는 레모타를 물끄러미 보던 달리아가 다시 생활용품들로 관심을 돌렸다.
“나갈래?”
“아뇨!”
레모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격렬하게 내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달리아가 무심하게 말을 했다.
“거기 있는 이불 덮고 자.”
바깥에 얼룩과 먼지로 더러워진 이불에 비하면, 비밀 방 안에 있던 이불은 그나마 덮을 만했다. 쾌쾌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런 것을 따질 만큼 둘의 몰골이 깨끗한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감지덕지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이불은 1인용이라, 레모타는 다시 달리아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달리아 씨는요?”
“달리아.”
“그래요, 달리아는요?”
방을 돌아보는 건 금방이었다. 달리아는 쓸 만하다 싶은 것들을 제 앞으로 모았다. 양초를 한쪽에 내려 두고, 그 불빛에 의지해 물건들을 골라내던 달리아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별로, 상관없어.”
이 정도 바닥이면 오히려 전에 자던 곳에 비하면 호화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의 잠자리는 거친 돌바닥이었고, 기껏 준 이불도 그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던, 다 해진 천 조각이었으니까. 적어도 이 방의 바닥은 딱딱해도 표면이 거칠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몸을 누이기 충분했다. 바닥에 살갗이 쓸려서 잔상처가 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이런 달리아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레모타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차갑잖아요. 거칠기도 하고.”
옷가지를 펼쳐서 살펴보던 달리아가 레모타를 돌아보았다. 달리아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모타는 아예 이불을 넓게 펴서 바닥에 깔고 있었다.
“차라리 이걸 다 바닥에 까는 게 낫겠어요. 덮는 건 포기하더라도 맨바닥에서 잘 수는 없죠.”
“난 정말 괜찮…….”
“이미 깔았으니까 그만해요. 자고로 여자는 찬 데 재우는 거 아니랬어요.”
달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기껏해야 열댓 살쯤 먹었을 예쁘장한 계집애에게 듣기엔 영 이상한 소리였다. 게다가 서로의 몰골을 보건대, 찬 데 더운 데 가릴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할 말을 잃고 침묵하던 달리아가 결국 김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습지도 않은 소리.”
그녀는 다시 자신이 둘러보고 있던 옷가지로 관심을 돌렸다. 아마 이 방에서 지내던 이는 남자였던 모양이다. 옷은 모두 바지와 셔츠뿐이었는데, 다행히도 체격이 작은 사내였는지 옷 크기도 너무 크지 않았다. 달리아는 망토를 벗었다. 내내 다리에 휘감기는 치마가 어찌나 불편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비를 흠뻑 맞아서 치맛자락은 무겁게 늘어지며 걸음을 방해했다. 당장에 벗어 버리고 싶었던 와중에 입을 만한 옷을 주운 건 반가운 일이었다.
5화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4)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계집애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경계심을 푼 모양이었다. 이러니 저 불한당들에게 잡혔지. 그녀는 대답 대신 계집의 눈구멍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침묵에 잠시 주춤하던 계집애가, 금세 다시 기운을 차리고 재잘거렸다.
“가는 동안 이름을 부를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분명 계집애는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만 같이 가자고 했는데, 말하는 건 어디든 따라다닐 기세였다. 그녀는 조금 착잡한 눈을 들어 정면을 보았다. 벌써부터 후회가 되는 것 같았다. 그사이 계집애는 혼자 재잘거리며 말을 잇고 있었다.
“난 레모타예요. 내 이름을 말했으니까 얼른 알려 주세요.”
이대로라면 내내 조를 판이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 죄수 번호 4627. 그리 불린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제 이름이 가물가물했다. 까마득한 기억을 겨우 더듬어서, 그녀가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달리아.”
십 년 만에 내뱉은 이름은 참으로 낯설었다.
이제 와 이피를 찾는다고 해도 숙소를 소개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딘지도 모를 골목을 한참이나 헤매던 달리아는 난처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골목은 한적했다. 불한당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휑했다. 이 도시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비어 있었던 모양이다. 대로변 쪽에나 사람들이 모여 있고, 골목을 깊숙이 들어오니 인기척은 느낄 수가 없었다. 달리아는 바로 옆의 건물 창문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내부가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사람이 살지 않은 지가 오래된 것 같았다. 사람이 이렇게 없을 정도라면, 빈집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은 쉬어야 했다. 조금의 배려도 없이 성큼성큼 앞서 걷는 달리아를 용케 잃어버리지 않고 쫓아오는 레모타를 생각해서라도, 안전한 집이 필요했다.
이름을 알고부터 연신 조잘거리던 레모타는 슬슬 지쳤는지,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달리아를 놓치지 않는 데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 같았다. 조금의 자비도 없이 사내들을 때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으면서 왜 겁먹지 않는 건지, 달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레모타가 달리아를 방패막이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다는 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달리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덜컥 따라나서는 행태는 아무리 봐도 안전 불감증에 가까웠다. 바로 직전까지 팔려 갈 뻔한 주제에 금세 낯선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다니.
달리아는 레모타가 사실 어느 무리에 소속된 아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 보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무턱대고 다닐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요즘 세상은 긴장감 없이 혼자 나돌아 다니는 계집애를 가만 놔둘 정도로 평화롭지 못하니까. 어쩌면 달리아를 속여서 제 무리에게 팔아넘기려는 속셈은 아닐까? 긴장을 놓고 있으면 제 무리를 불러들여서 단숨에 그녀를 잡으려 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일부러 더 쉬지 않고 걸었다. 지쳐 쓰러지더라도 그녀보다는 레모타가 먼저 쓰러질 터였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무방비하게 자다가 뒤통수를 맞을 일은 없겠지. 그러다가도 쥐뿔도 없이 맨몸을 한 레모타를 보고 있노라면 딱히 위험할 것은 없어 보였다. 설사 일행이 있다 한들, 무엇으로 그 일행을 부르나.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자신을 따라오는 레모타를 힐끗 확인한 달리아가 이내 느슨했던 걸음에 힘을 주었다. 슬슬 골목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골목 막다른 지점에 다다르기 바로 직전, 달리아는 단조롭게 생긴 2층 건물을 하나 골랐다. 건물의 형태는 주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창문을 통해 내부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을 한 그녀가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아마도 가정집이었던 모양이다. 가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의 잔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간간히 깨진 유리 조각도 보였다. 나뒹구는 식기에 뽀얀 먼지가 쌓여 있었다. 달리아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2층으로 향했다 조심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뒤따라 들어온 레모타도 덩달아 숨을 죽이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천장에 낀 거미줄이 흉흉하게 보였다.
2층은 바깥에서 봤던 것보다 더 좁았다. 먼지와 얼룩으로 더럽혀진 침대보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게 보였다. 집 안을 샅샅이 뒤져 다른 누군가가 없는 것을 확인한 달리아가 1층으로 내려가 현관문을 닫았다. 마땅히 문 앞을 막아 둘 만한 물건이 없었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나무 작대기를 문에 기댔다. 문이 열리면 나무 작대기가 넘어지면서 소리를 낼 터였다. 창문도 막을 수 없긴 매한가지라, 창문 아래엔 유리 조각들을 뿌렸다.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곳마다 나름대로 대비를 해 둔 달리아가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의 문도 닫고, 나무 작대기를 세운 그녀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뜩 지친 얼굴을 하고 있던 레모타는 쉴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까보다 조금 더 생기 있는 얼굴로 방 안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한쪽 문짝이 떨어진 옷장 근처를 슬금슬금 돌아보며 확인하던 레모타가 문득 탄성을 내뱉었다.
“여기 뭔가 있어요.”
레모타가 가리키는 곳은 옷장으로 가려진 벽 부분이었다. 옷장 때문에 몰랐는데, 그 뒤에 벽과 똑같은 색의 문이 있었다. 달리아와 레모타가 옷장을 옆으로 밀치니, 그 문은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벽의 색깔과 맞춘 것으로 보아, 일종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통하는 문 같았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레모타 대신 달리아가 문을 힘껏 밀었다. 문은 쉽게 밀려 났다.
그곳은 일종의 비밀 방이었다. 어쩐지 밖에서 볼 때보다 좁아 보인다 싶더니만 이런 곳이 있었구나. 달리아가 먼저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비밀 방엔 창문이 없어서 엄청나게 어두웠지만, 의외로 바깥보다 깨끗했다.
“엇, 이불이에요!”
레모타가 반가운 듯 말했다. 과연, 이불과 몇 개의 옷가지, 그리고 짜리몽땅한 양초 등 사람이 있던 흔적이 어둠 속에서 어스름하게 보였다. 다만 내부에 도는 냉기는 이 방의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지 꽤나 오래되었다는 걸 알려 주었다. 아마도 흉흉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고자 이곳에 숨어 생활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비밀 방에 숨어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 결국 이곳을 나갔을 테지. 하룻밤 쉴 곳이 필요했던 두 사람에게는 딱 알맞은 장소였다.
달리아는 양초를 집어 들었다. 심지가 새카맣게 오그라들어 있었다. 불을 지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비밀 방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마땅히 불을 지필 만한 도구가 보이지 않았다.
“부싯돌은 없는지 확인해 봐.”
달리아의 말에 고개를 내밀고 그녀를 보고 있던 레모타가 냉큼 비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참 나더니 잠시 후, 레모타가 양손에 차돌과 쇳조각을 들고 나타났다. 생각해 보면, 불을 붙일 도구도 없이 양초만 들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오랫동안 쓰질 않아서 그런지 불꽃만 튀고 불이 잘 붙지 않아서 한참이나 씨름을 한 끝에, 달리아는 겨우겨우 양초 심지를 밝힐 수 있었다. 불을 밝히고 나니 비밀 방을 좀 더 잘 살펴볼 수 있었다.
방에는 꽤나 유용해 보이는 게 많았다. 옷가지나 양초는 말할 것도 없고, 소소한 생활용품들이 어설프게나마 마련되어 있었다. 달리아는 이 방의 주인이 제 발로 나갔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추측을 수정했다. 제 발로 이곳을 떠난 게 아니라, 잠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죄다 놓고 나갈 까닭이 없으니까. 비밀 방 곳곳을 불로 밝혀 보며 쓸 만한 물건들을 골라내는 달리아를 물끄러미 보던 레모타가 질문했다.
“여기서 쉬는 거예요?”
“날이 어두워졌으니 바깥을 돌아다니는 건 위험해.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게 더 생산적일 거다.”
무덤덤한 달리아의 말에, 레모타가 또르륵 눈을 굴렸다. 달리아의 눈치를 보며 몇 번이나 주저하던 레모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나 여기 같이 있어도 돼요?”
이제 와 새삼스럽게 그런 것은 무엇하러 묻나. 달리아가 힐끗, 레모타를 보았다. 벽 근처에 등을 대고 쭈그린 레모타는 아직 완전히 엉덩이를 붙이진 않은 상태였다. 아마도 달리아가 내쫓을 것을 의식한 모양이었다. 불쌍한 꼴로 앉아 있는 레모타를 물끄러미 보던 달리아가 다시 생활용품들로 관심을 돌렸다.
“나갈래?”
“아뇨!”
레모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격렬하게 내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달리아가 무심하게 말을 했다.
“거기 있는 이불 덮고 자.”
바깥에 얼룩과 먼지로 더러워진 이불에 비하면, 비밀 방 안에 있던 이불은 그나마 덮을 만했다. 쾌쾌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런 것을 따질 만큼 둘의 몰골이 깨끗한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감지덕지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이불은 1인용이라, 레모타는 다시 달리아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달리아 씨는요?”
“달리아.”
“그래요, 달리아는요?”
방을 돌아보는 건 금방이었다. 달리아는 쓸 만하다 싶은 것들을 제 앞으로 모았다. 양초를 한쪽에 내려 두고, 그 불빛에 의지해 물건들을 골라내던 달리아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별로, 상관없어.”
이 정도 바닥이면 오히려 전에 자던 곳에 비하면 호화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의 잠자리는 거친 돌바닥이었고, 기껏 준 이불도 그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던, 다 해진 천 조각이었으니까. 적어도 이 방의 바닥은 딱딱해도 표면이 거칠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몸을 누이기 충분했다. 바닥에 살갗이 쓸려서 잔상처가 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이런 달리아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레모타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차갑잖아요. 거칠기도 하고.”
옷가지를 펼쳐서 살펴보던 달리아가 레모타를 돌아보았다. 달리아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모타는 아예 이불을 넓게 펴서 바닥에 깔고 있었다.
“차라리 이걸 다 바닥에 까는 게 낫겠어요. 덮는 건 포기하더라도 맨바닥에서 잘 수는 없죠.”
“난 정말 괜찮…….”
“이미 깔았으니까 그만해요. 자고로 여자는 찬 데 재우는 거 아니랬어요.”
달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기껏해야 열댓 살쯤 먹었을 예쁘장한 계집애에게 듣기엔 영 이상한 소리였다. 게다가 서로의 몰골을 보건대, 찬 데 더운 데 가릴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할 말을 잃고 침묵하던 달리아가 결국 김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습지도 않은 소리.”
그녀는 다시 자신이 둘러보고 있던 옷가지로 관심을 돌렸다. 아마 이 방에서 지내던 이는 남자였던 모양이다. 옷은 모두 바지와 셔츠뿐이었는데, 다행히도 체격이 작은 사내였는지 옷 크기도 너무 크지 않았다. 달리아는 망토를 벗었다. 내내 다리에 휘감기는 치마가 어찌나 불편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비를 흠뻑 맞아서 치맛자락은 무겁게 늘어지며 걸음을 방해했다. 당장에 벗어 버리고 싶었던 와중에 입을 만한 옷을 주운 건 반가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