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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꽃의 시간 1권
6화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5)


“으악! 뭐 하는 거예요?”
레모타의 경악성에 달리아가 행동을 멈추었다. 그녀는 막 상의를 위로 올려 벗으려는 찰나였다. 달리아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레모타를 돌아보았다. 레모타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상태였다.
“보다시피.”
“다 큰 아가씨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달리아는 대답 대신 옷을 완전히 벗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방안을 채웠다. 레모타는 정말로 부끄러웠는지, 달리아가 옷을 갈아입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너도 갈아입는 게 좋을 거다. 치맛자락 펄럭이는 건 먹잇감이 되겠다고 자처하는 꼴이니.”
약하면 표적이 된다. 약할수록 더 쉽게 짓밟히는 세상은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러한 사실을 감옥에서 탈출하자마자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여성이나 아이는 보호받는 대상이 아니라 잡아먹을 대상이었다.
달리아의 말에 레모타가 빼꼼 고개를 들었다. 짧은 머리칼을 가진 달리아가 바지까지 입으니, 언뜻 봐선 여성으로 보이지 않았다. 달리아의 얼굴이 험상궂고 우락부락했다면, 그녀의 체격이 건장했다면 정말 남자로 보였을지도 몰랐다. 달리아는 남은 옷가지 중 몇 개를 뒤적여 레모타에게 내밀었다. 제 앞으로 내밀어진 옷가지를 물끄러미 보던 레모타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어쩌면 귀한 집 자제일지도. 레모타가 받지 않은 옷가지들을 구석으로 던져 놓으며, 달리아는 가만히 추측해 보았다. 역시 아무리 봐도 뒷골목을 전전하던 아이 같지는 않았다. 옷을 갈아입을 때 얌전 빼는 것도 그렇고, 사내 옷을 입지 않으려는 것도 그렇고. 어느 고지식한 가문의 아가씨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세상 물정을 모르고 헤매는 꼴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늑대의 아가리에 고개를 처박아도 남 탓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멍청한 제 자신을 탓해야지 누굴 탓하나. 다만 그런 지경까지 이르려거든 저 혼자 있을 때나 그리하면 될 일이었다. 달리아가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에 띄는 꼴로 다니겠다면 난 널 달고 다니지 않겠어. 골목은 알아서 벗어나.”
“……그, 그럼 망토를 두를게요!”
기어코 사내 옷은 입기 싫은 모양이다. 달리아는 힐끗, 레모타를 보았다. 레모타는 행여 달리아가 자신을 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기색이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 레모타를 내쫓을 마음은 없어서, 달리아는 무심하게 내일 가져갈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방에서 발견한 후줄근한 천 가방이 생각보다 큰 덕분에 대충 필요하다 싶은 것과 그녀가 옷가지로 싸서 챙겨 온 약간의 식량을 모두 넣을 수 있었다. 달리아가 하는 꼴을 가만히 보던 레모타가 엉금엉금 이불 위로 올라갔다. 어정쩡한 자세로 누운 레모타는 멀뚱멀뚱 천장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달리아 쪽을 보았다.
“근데 달리아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대충 필요한 것을 모두 챙긴 달리아가 가방을 한쪽 구석에 밀어 놓고서 어른거리는 양초의 불을 훅, 꺼 버렸다. 비밀 방이 새카만 어둠에 휩싸였다. 갑자기 깜깜해진 것에 놀라 헛숨을 들이켜던 레모타가 곧 더듬더듬 어둠 속을 둘러보았다. 아주 까맣게 보이던 사방이 조금씩 형체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어둠이 눈에 익어 갈 즈음, 레모타가 슬그머니 말문을 열었다.
“여기 사람 아니죠?”
“…….”
“다른 일행은 없어요?”
“…….”
“어디에서 왔는데요?”
허공에 말하는 게 지치지도 않는 듯 레모타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 건지. 이렇게 말 많은 녀석인 줄 알았으면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달리아가 낮게 혀를 찼다. 고요한 가운데에 들린 그 짧은 소리에, 레모타가 입을 다물었다. 누운 상태에서 입술을 우물거리던 레모타가 결국 체념의 한숨을 내뱉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잔뜩 있었지만, 달리아는 하나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레모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레모타마저 입을 다무니 사방은 고요했고, 어둠은 안락하게 느껴졌다.
레모타는 금방 잠들었다. 제 딴에는 꽤 힘든 하루였던지, 코까지 골면서 숙면에 빠졌다. 레모타가 깔아 둔 이불 위에 엉덩이를 댄 달리아는 눕는 대신 벽에 등을 기댔다. 벽에서부터 전해지는 냉기가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들어와 정수리까지 치솟는 것 같았다. 피로감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엔 온갖 상념이 뒤죽박죽 섞여 들었다.
들릴 리가 없는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달리아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바다는 지긋지긋하다. 흰 거품을 문 파도 소리는 그녀의 하루 온통을 둘러싸고 있었다. 비명 소리조차 낼 수 없는 밤, 아득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모든 것을 순응하라 이르는 것 같았다. 이것이 네 운명이므로, 그냥 체념하고 받아들이라 다독이는 것만 같았다. 참으로 불쾌한 소리였다. 그녀의 시간은 이토록 처참한데, 바다는 어찌 저리도 잠잠할 수 있나. 얌체처럼 입을 다물고 원래가 요조숙녀인 양 얌전을 떤다. 그러나 실은 바다만큼 포악한 것이 따로 없다는 걸 그녀는 알았다. 감옥을 나서는 시체들을 집어삼키는 게 다름 아닌 바다였으므로.
하지만 그녀가 탈출할 수 있도록 도주로를 만들어 준 것도 바다였다. 매몰차게 세상을 내려치는 파도가, 그 흰 거품이 멀리서부터 달려와 만들어 낸 해저 동굴. 그곳을 발견한 건 그야말로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달리아는 감옥을 탈출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당연했다. 옥시비아 캐슬에선 그녀를 죽이려 했고, 그녀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달리아가 옷섶을 헤치고 제 가슴께를 더듬었다. 내내 감고 있던 붕대 틈에서 납작하게 짓눌린 천 조각을 꺼내 쥐었다. 본래 거친 옷감이었지만, 얼마나 만졌는지 표면은 반질반질하게 변해 있었다. 곱게 접힌 천 조각을 손안에 쥐니,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뇌리를 맴돌며 괴롭히던 파도 소리가 저만치로 물러나는 것 같았다. 달리아는 천 조각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덮었다. 마음 같아선 천 조각을 펴서 그 안의 내용물을 보고 싶었지만, 어차피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저 이렇게 손안에 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간간히 들려오는 레모타의 코고는 소리가 산통을 깼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한가하고 태평한 느낌이 났다. 상상도 못 했던 여유였다. 탈옥이라니.
감옥엔 수많은 죄인들이 있었고 사형수는 하루에도 수십 명씩 생겼다가 사라졌다. 개중 탈옥수도 가끔 한두 명 나오긴 했다. 그때마다 수배령을 내렸지만, 그들을 위해 감옥 전체가 움직였던 일은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탈옥 소식에도 마찬가지리라. 기껏해야 수배령 정도 내릴 것이다. 사형수 하나를 잡기 위해 수십의 병사를 움직이는 일은 낭비였다. 특히나 요즘 같은 세상에선 오히려 감옥에 들어오기 위해 일부러 죄인이 되는 자들이 있었다. 너무 튀지만 않으면 감옥 생활도 사실 나쁘진 않으니까. 먹을 것을 주고, 잘 곳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선 차라리 쉬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아는 벽에 고개를 기댔다. 사방은 고요했고, 어두웠고, 평화로웠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 수 없었다.

***


전쟁은 해안가에서 시작되었다.
침략은 갑작스러웠고, 임펠의 해안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마을 셋이 순식간에 불타오르고서야 임펠의 왕은 병사들을 파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나라의 누구도 이 전쟁이 길어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쳐들어온 자들은 야만인이라고 무시받던 섬 히스비아의 병사들이었다. 위로 샤를만, 아래로 발트칸이라는 강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임펠은 잦은 침략과 전쟁을 겪어왔기 때문에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그들의 땅은 늘 남들이 탐을 내던 비옥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히스비아는 생각보다 강력했고, 임펠의 병사들은 히스비아의 병사들이 내륙에 더 이상 오지 못하게 막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임펠의 왕은 외국에서 강력한 용병들을 고용해 병사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전선은 오히려 내륙으로 밀려났다. 그제야 임펠의 왕은 히스비아의 침략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무시했던 섬나라는,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첫 발판으로 임펠을 선택한 것이다. 임펠의 왕은 결국 샤를만과 발트칸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내전을 겪고 있는 발트칸과, 후계싸움으로 정세가 어지러운 샤를만은 임펠을 전폭적으로 돕지 못했다.
히스비아의 왕은 침략할 타이밍을 치밀하게 가늠하고 준비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임펠의 왕궁은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다.
소녀의 삶은 나라의 전시 상황과 조금도 관련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소녀는 이웃들의 손에 의해 자랐는데, 주로 심부름을 해 주고 받는 약간의 사례로 먹고 살았다. 소녀는 열 살이 조금 넘어서야 자신이 사는 동네가 소위 말하는 ‘집창촌’임을 깨달았다. 그들의 주된 고객은 항해를 하다 돌아온 뱃사람들이었다. 해안가와 아주 가까운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유독 홍등가만 발달해서, 딴에는 마을 전체를 먹여 살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소녀가 악질적인 소아성애자들의 손에 넘겨지지 않은 건, 순전히 동네에서 집창촌과 마을 번화가 사이를 오고 갈 심부름꾼이 없어서였다. 덕분에 소녀는 첫 달거리를 하고도 한동안 순결한 몸을 보전할 수 있었다.
소녀는 열다섯이 되던 해부터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그 동네에서는 꽤나 늦은 출발이었다. 보통은 어미를 따라 일찌감치 기술을 배우고 장사를 시작했지만, 소녀는 마땅히 손님을 연결해 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무지했던 소녀의 첫 경험은 지독하게도 끔찍했다. 첫 손님을 받고 엉엉 우는 소녀를 보고서야, 이웃들은 소녀를 가르쳐 준 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손님을 대하는 법을 가르쳤지만 소녀는 쉬이 적응하지 못했다. 소녀가 적응한 건 손님을 받은 지 반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겨우겨우 제 일에 익숙해져 갈 즈음, 소녀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손님을 받는 법은 배웠지만, 제 몸을 돌보는 법은 배우질 못한 것이었다. 집창촌에 사는 여성들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알고 넘기던 것이라 누구도 소녀에게 새삼스러운 경고를 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는지도 몰랐다. 소녀가 나고 자란 곳이 집창촌이고, 온종일 보는 이들이 창부들이니.
열여섯이 되던 해. 한참이나 덜 여문 소녀는 임신을 했다.
당황하던 이웃들은 곧 침착하게 소녀를 안정시켰다. 낙태약이 있었지만, 그것은 몹시 독했고 소녀는 어렸다. 의사도 없는 곳에서 약을 잘못 먹였다간 송장을 치울 터였다. 그들은 소녀에게 말했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라. 아이를 낳아.」
나중엔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할 거야. 약을 몇 번 먹다 보면 저절로 불임이 될 테니까. 그리 말하며 소녀의 등을 떠밀었다. 그들은 그것이 소녀와 배 속의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 확신했다. 부풀어 오르는 제 배가 무섭기만 한 소녀의 심경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엉망진창인 몸 상태와 무기력한 기분, 앙상한 몸뚱이에서 유독 도드라지게 부푸는 배. 그 모든 공포 속에서 소녀는 열일곱이 되었고, 생애 첫아이를 낳았다. 누군가 그녀의 두 다리를 잡고 강제로 찢어발기는 듯 정신이 혼미한 경험이었다. 소녀는 첫 경험을 한 다음 날 때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주변 모두가 소녀를 독려했지만 그 어느 누구의 축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녀는 겁에 질렸고, 그렇게 배운 적이 없는 어미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