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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꽃의 시간 1권
7화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6)
레모타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잠이 덜 깬 눈을 한참 비비던 레모타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들었다. 달리아는 진즉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있었다. 레모타가 졸음기 덜 가신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달리아는 힐끗, 레모타를 보았다. 그러곤 한쪽에 빼 두었던 음식을 집어 내밀었다. 육포와 물이었다.
“먹어. 나갈 거야.”
“달리아는 먹었어요?”
레모타가 비몽사몽 육포를 받아 우물거렸다. 달리아는 그런 레모타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피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육포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던 이피. 그에 비해 레모타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든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아이였다. 레모타가 귀하게 자란 아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 근처엔 귀한 집 자식이 살 만한 도시가 없었다. 그림이 관광객으로 붐비던 화려한 도시였던 것은 모두 옛일 아닌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바깥과 달리, 내륙엔 귀족들의 거주지를 보호하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다. 오늘날의 귀족들은 모두 그곳에 살았다. 레모타는 분명 그 장벽의 안쪽에 살 법한 꼴인데, 어째서 이런 해안까지 오게 되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것도 혼자서.
“다 먹었나?”
육포를 쥐여 준 지 겨우 오 분도 채 안 지났다. 달리아의 자비 없는 물음에 레모타가 육포를 씹는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육포라고는 하지만 질이 좋은 것은 아니라, 턱이 얼얼하도록 씹어야 겨우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었다.
레모타가 겨우 육포를 다 먹고 물 한 잔을 비울 즈음, 달리아는 나갈 준비를 마치고 서서 레모타를 보고 있었다. 행여 놓고 나갈까 걱정이 되었는지, 레모타가 냉큼 달리아의 꽁무니로 붙었다.
“어디 가요? 이 도시를 떠날 거예요?”
“필요한 것들을 구하면.”
“어느 방향으로 가는데요?”
“해가 뜨는 곳.”
“동쪽이요? 혹시 수도로 가나요?”
앞서 걷던 달리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덕분에 바짝 따라붙던 레모타가 그녀의 등에 얼굴을 부딪치며 멈춰 서야 했다. 달리아가 레모타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뭔가 너무 많은 걸 캐물었다고 생각했는지, 레모타가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피했다. 달리아는 미묘한 눈으로 레모타를 보다가, 이내 다시 걸음을 돌렸다.
다행히도 밤새 그들이 머문 건물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 거리를 살피고 조심스럽게 집을 나선 달리아가 후드를 푹 눌러쓰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레모타도 덩달아 후드를 푹 눌러썼다. 총총 걸음으로 달리아를 따라가던 레모타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전날 그렇게 헤매었던 것이 우습게도, 골목은 생각보다 금방 빠져나왔다. 큰길에 다다르자 달리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방향으로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레모타가 슬금슬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가 필요한 건데요? 상점에 가야 하는 건가요?”
상점이라는 게 아직 유지될 수 있는 치안 환경인지 의심스러웠지만, 달리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던 레모타가 달리아에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럼, 내가 가는 길을 안내할게요.”
그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당연히 레모타가 이 지역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달리아는 금세 경계심 어린 눈으로 레모타를 보았다. 어제 짐작했던 것처럼, 레모타는 제 패거리에게 사람을 공급하는 미끼였던 걸까? 달리아의 시선을 눈치챈 레모타가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이상한 생각 말아요! 안내할 수 있다고 하는 건, 내가 어릴 적에 이 동네에 살았기 때문이에요! 전쟁이 터지면서 피난을 가긴 했지만, 원래 집은 이 근처였거든요!”
절박하게 손을 흔들며 말하는 레모타의 목소리엔 진심이 묻어났다. 달리아는 레모타의 물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언제?”
“네? 어릴 적, 그러니까 여섯 살? 전쟁 터진 게 세 살 때고, 삼 년 뒤에 피난을 갔으니까 그 전까진 여기 살았어요!”
세 살에 전쟁이 터졌다고 하는 걸 보니, 레모타의 나이는 열여섯 살인 모양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기껏해야 열두어 살 정도나 되었을까 짐작했는데. 열여섯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왜소하고 작은 체구라 직접 나이를 듣지 않으면 영영 진짜 나이를 모를 터였다. 사소한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한 달리아가 무심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림에 살았다고?”
“정확히는 이노밀 해변 근처에서…….”
거기까지 말하던 레모타가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급한 마음에 말을 쏟아 내던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잠시 침묵하던 레모타가,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림이 히스비아군에게 짓밟힌 건 내가 이곳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다른 도시에 비해 꽤 오래 버텼죠. 부유하던 도시라서 용병을 고용할 돈도 많았나 봐요. 어쨌든 그 덕분에 거리의 지리 정도는 익히고 떠났죠. 지금은 외곽이라 분위기가 좋지 않지만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안쪽엔 사설 경비를 두는 가게도 제법 많았어요. 그들 중 몇은 가게를 지켰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지켰길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마지막 말에 자신감은 없었지만, 달리아는 애써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달리아는 쓸데없이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원하는 건?”
단박에 본론으로 넘어가는 달리아의 모습에, 레모타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잠시 주저하던 레모타가 이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노밀 해변에 가야 해요. 거기까지만 동행해 줘요. 어차피 동쪽으로 가야 한다면, 이노밀 해변을 통해서 도르망으로 가는 게 빠르니까 헛걸음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느 길이 빠른지, 솔직히 달리아는 알지 못했다. 다만 레모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달리아는 충분히 고민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길을 아는 누군가를 통해 빠르게 필요한 것을 구하고 나가는 편이 좋았다. 도시를 헤매 봤자 좋을 것은 없었다. 괜한 시비나 생길 테지. 레모타가 달리아에게 동행을 요청하는 이유라면 달리 없었다. 어제와 같은 불상사를 겪지 않기 위해서이리라. 지금이야 망토를 둘러서 그나마 눈길을 덜 끌긴 하지만, 여전히 치마를 두른 예쁘장한 레모타는 뭇 건달들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네가 바라는 도움은 못 줘.”
거리낌 없이 사내들을 두들겨 패면서 왔지만, 사실 달리아가 특별히 싸움을 잘하는 건 아니었다. 본래 어디서 주먹질을 배운 적도 없거니와, 감옥에 갇혔을 때엔 온종일 지하 동굴이나 파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그 덕분에 악력이 좀 생겼을진 몰라도, 그것이 불량배들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는 건 아니었다. 이전의 사례들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달리아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녀의 말에 레모타가 고개를 내저었다.
“날 지켜 달라는 건 아니에요. 아니 물론, 지켜 주면 고맙지만 그보단 같이 가 주길 바라는 거예요.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피할 수 있는 위험은 충분히 많으니까요.”
달리아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모타가 환하게 웃으며 앞장섰다. 사뭇 천진하기까지 한 그 안도에 도리어 거북한 건 달리아였다. 그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기에, 그녀는 썩 질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눈에 띄게 기뻐하는 레모타가 못내 불편했지만, 달리아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어차피 레모타와는 이노밀 해변까지만 함께할 사이였다.
그림에서 살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단 알 만한 거리가 나왔는지, 레모타는 거침없이 앞서 나갔다. 어제 봤던 풍경과는 약간 달랐다. 어젠 정말 누가 봐도 전쟁 통 폐허였는데, 레모타가 향하는 곳은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우울했지만 아까보단 훨씬 질서가 잡힌 거리였다. 레모타 말대로 가게를 지켜 낸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들은 오롯이 스스로의 힘으로만 지켜 낸 게 아닐 것이다. 달리아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외곽에서 활개를 치는 불량배들. 그리고 안쪽에 형편을 그럭저럭 유지해 나가는 가게들. 그들의 관계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달리아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합리화에 가까웠지만 별수 없었다.
그녀는, 물건을 살 돈이라곤 한 푼도 없었으므로.
“……상점을 찾았잖아요?”
“응.”
달리아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모타는 말을 잃고 그녀를 보았다. 레모타의 황당한 표정을 본 달리아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물건을 산다곤 하지 않았지.”
“훔칠 거라고 하지도 않았죠.”
“누가 봐도 돈이 없는 몰골 아닌가?”
그야 그렇긴 했다. 상점을 안내하긴 했지만 물건을 어떻게 사려고 그러나 싶긴 했다. 그래도 너무 당당하게 들어가기에 당연히 다른 수가 있겠거니 했던 것이다. 설마하니 이렇게 다짜고짜 상점털이범이 될 줄이야. 레모타는 말을 잃고 달리아의 얼굴만 멀거니 응시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가게 주인을 돌아보았다. 이런 것에 안도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가게 주인은 생명을 부지한 상태였다. 가게에 구비되어 있던 노끈으로 묶는 과정에서 약간의 타박상을 입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입에 물린 재갈도 비명을 지르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어제 가열하게 사내들을 패던 달리아치곤 꽤 얌전한 제압이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다고 말했잖아요.”
“그래서 구하고 있잖아.”
결국 먼저 손을 든 건 레모타였다. 당연하다는 듯 주인을 제압하고 가게의 물건을 터는 달리아의 모습에 레모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달리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창밖을 힐끗거리며 망을 보는 것으로 그 범죄에 합류했다. 영 찜찜한 표정이었지만 수가 없었다. 레모타가 알아서 망을 보는 사이, 달리아는 가게 안에 진열되어 있던 가방 하나를 집어 들었다. 비밀 방에서 챙겨 온 천 가방보단 훨씬 쓸 만한 가죽 가방이었다. 이 정도면 장기적인 여행에도 버텨 낼 수 있을 것이다.
천 가방에 넣어 온 물건들을 모두 옮겨 담고, 가게 안에서 필요하겠다 싶은 물품 몇 개와 약간의 돈을 챙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많이 챙기는 것보다는 필요한 것만 챙기는 게 중요했기에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돈도 양심적으로 여비로 쓸 정도만 챙겼다. 입에 재갈을 문 가게 주인이 뭐라고 웅얼거렸지만 달리아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전전긍긍하며 창밖을 살피던 레모타가 달리아를 돌아보았다. 가죽 가방을 멘 달리아는 막 짧은 칼을 허리춤에 챙기고 있었다. 사람 한 명의 뱃가죽 정도는 대번에 꿰뚫을 것같이 서슬 퍼런 단검이었다. 레모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나마 투덜거리려던 마음이 싹 가셨다. 상점을 털고는 있지만, 주인을 때려죽이지 않은 게 어딘가.
“다 챙겼어요?”
달리아는 대답 대신 서랍을 뒤졌다. 무언가 찾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레모타가 막 물어보려는 찰나, 창밖으로 사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레모타가 후다닥 달리아에게 뛰어갔다.
“얼른 가요! 누군가 와요!”
달리아가 짧게 혀를 찼다. 그녀의 눈에 잠시 고민이 스쳤으나, 그녀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자고로 도망갈 땐 신속해야 했다.
***
7화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6)
레모타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잠이 덜 깬 눈을 한참 비비던 레모타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들었다. 달리아는 진즉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있었다. 레모타가 졸음기 덜 가신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달리아는 힐끗, 레모타를 보았다. 그러곤 한쪽에 빼 두었던 음식을 집어 내밀었다. 육포와 물이었다.
“먹어. 나갈 거야.”
“달리아는 먹었어요?”
레모타가 비몽사몽 육포를 받아 우물거렸다. 달리아는 그런 레모타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피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육포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던 이피. 그에 비해 레모타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든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아이였다. 레모타가 귀하게 자란 아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 근처엔 귀한 집 자식이 살 만한 도시가 없었다. 그림이 관광객으로 붐비던 화려한 도시였던 것은 모두 옛일 아닌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바깥과 달리, 내륙엔 귀족들의 거주지를 보호하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다. 오늘날의 귀족들은 모두 그곳에 살았다. 레모타는 분명 그 장벽의 안쪽에 살 법한 꼴인데, 어째서 이런 해안까지 오게 되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것도 혼자서.
“다 먹었나?”
육포를 쥐여 준 지 겨우 오 분도 채 안 지났다. 달리아의 자비 없는 물음에 레모타가 육포를 씹는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육포라고는 하지만 질이 좋은 것은 아니라, 턱이 얼얼하도록 씹어야 겨우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었다.
레모타가 겨우 육포를 다 먹고 물 한 잔을 비울 즈음, 달리아는 나갈 준비를 마치고 서서 레모타를 보고 있었다. 행여 놓고 나갈까 걱정이 되었는지, 레모타가 냉큼 달리아의 꽁무니로 붙었다.
“어디 가요? 이 도시를 떠날 거예요?”
“필요한 것들을 구하면.”
“어느 방향으로 가는데요?”
“해가 뜨는 곳.”
“동쪽이요? 혹시 수도로 가나요?”
앞서 걷던 달리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덕분에 바짝 따라붙던 레모타가 그녀의 등에 얼굴을 부딪치며 멈춰 서야 했다. 달리아가 레모타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뭔가 너무 많은 걸 캐물었다고 생각했는지, 레모타가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피했다. 달리아는 미묘한 눈으로 레모타를 보다가, 이내 다시 걸음을 돌렸다.
다행히도 밤새 그들이 머문 건물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 거리를 살피고 조심스럽게 집을 나선 달리아가 후드를 푹 눌러쓰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레모타도 덩달아 후드를 푹 눌러썼다. 총총 걸음으로 달리아를 따라가던 레모타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전날 그렇게 헤매었던 것이 우습게도, 골목은 생각보다 금방 빠져나왔다. 큰길에 다다르자 달리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방향으로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레모타가 슬금슬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가 필요한 건데요? 상점에 가야 하는 건가요?”
상점이라는 게 아직 유지될 수 있는 치안 환경인지 의심스러웠지만, 달리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던 레모타가 달리아에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럼, 내가 가는 길을 안내할게요.”
그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당연히 레모타가 이 지역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달리아는 금세 경계심 어린 눈으로 레모타를 보았다. 어제 짐작했던 것처럼, 레모타는 제 패거리에게 사람을 공급하는 미끼였던 걸까? 달리아의 시선을 눈치챈 레모타가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이상한 생각 말아요! 안내할 수 있다고 하는 건, 내가 어릴 적에 이 동네에 살았기 때문이에요! 전쟁이 터지면서 피난을 가긴 했지만, 원래 집은 이 근처였거든요!”
절박하게 손을 흔들며 말하는 레모타의 목소리엔 진심이 묻어났다. 달리아는 레모타의 물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언제?”
“네? 어릴 적, 그러니까 여섯 살? 전쟁 터진 게 세 살 때고, 삼 년 뒤에 피난을 갔으니까 그 전까진 여기 살았어요!”
세 살에 전쟁이 터졌다고 하는 걸 보니, 레모타의 나이는 열여섯 살인 모양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기껏해야 열두어 살 정도나 되었을까 짐작했는데. 열여섯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왜소하고 작은 체구라 직접 나이를 듣지 않으면 영영 진짜 나이를 모를 터였다. 사소한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한 달리아가 무심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림에 살았다고?”
“정확히는 이노밀 해변 근처에서…….”
거기까지 말하던 레모타가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급한 마음에 말을 쏟아 내던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잠시 침묵하던 레모타가,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림이 히스비아군에게 짓밟힌 건 내가 이곳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다른 도시에 비해 꽤 오래 버텼죠. 부유하던 도시라서 용병을 고용할 돈도 많았나 봐요. 어쨌든 그 덕분에 거리의 지리 정도는 익히고 떠났죠. 지금은 외곽이라 분위기가 좋지 않지만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안쪽엔 사설 경비를 두는 가게도 제법 많았어요. 그들 중 몇은 가게를 지켰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지켰길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마지막 말에 자신감은 없었지만, 달리아는 애써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달리아는 쓸데없이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원하는 건?”
단박에 본론으로 넘어가는 달리아의 모습에, 레모타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잠시 주저하던 레모타가 이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노밀 해변에 가야 해요. 거기까지만 동행해 줘요. 어차피 동쪽으로 가야 한다면, 이노밀 해변을 통해서 도르망으로 가는 게 빠르니까 헛걸음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느 길이 빠른지, 솔직히 달리아는 알지 못했다. 다만 레모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달리아는 충분히 고민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길을 아는 누군가를 통해 빠르게 필요한 것을 구하고 나가는 편이 좋았다. 도시를 헤매 봤자 좋을 것은 없었다. 괜한 시비나 생길 테지. 레모타가 달리아에게 동행을 요청하는 이유라면 달리 없었다. 어제와 같은 불상사를 겪지 않기 위해서이리라. 지금이야 망토를 둘러서 그나마 눈길을 덜 끌긴 하지만, 여전히 치마를 두른 예쁘장한 레모타는 뭇 건달들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네가 바라는 도움은 못 줘.”
거리낌 없이 사내들을 두들겨 패면서 왔지만, 사실 달리아가 특별히 싸움을 잘하는 건 아니었다. 본래 어디서 주먹질을 배운 적도 없거니와, 감옥에 갇혔을 때엔 온종일 지하 동굴이나 파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그 덕분에 악력이 좀 생겼을진 몰라도, 그것이 불량배들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는 건 아니었다. 이전의 사례들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달리아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녀의 말에 레모타가 고개를 내저었다.
“날 지켜 달라는 건 아니에요. 아니 물론, 지켜 주면 고맙지만 그보단 같이 가 주길 바라는 거예요.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피할 수 있는 위험은 충분히 많으니까요.”
달리아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모타가 환하게 웃으며 앞장섰다. 사뭇 천진하기까지 한 그 안도에 도리어 거북한 건 달리아였다. 그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기에, 그녀는 썩 질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눈에 띄게 기뻐하는 레모타가 못내 불편했지만, 달리아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어차피 레모타와는 이노밀 해변까지만 함께할 사이였다.
그림에서 살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단 알 만한 거리가 나왔는지, 레모타는 거침없이 앞서 나갔다. 어제 봤던 풍경과는 약간 달랐다. 어젠 정말 누가 봐도 전쟁 통 폐허였는데, 레모타가 향하는 곳은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우울했지만 아까보단 훨씬 질서가 잡힌 거리였다. 레모타 말대로 가게를 지켜 낸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들은 오롯이 스스로의 힘으로만 지켜 낸 게 아닐 것이다. 달리아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외곽에서 활개를 치는 불량배들. 그리고 안쪽에 형편을 그럭저럭 유지해 나가는 가게들. 그들의 관계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달리아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합리화에 가까웠지만 별수 없었다.
그녀는, 물건을 살 돈이라곤 한 푼도 없었으므로.
“……상점을 찾았잖아요?”
“응.”
달리아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모타는 말을 잃고 그녀를 보았다. 레모타의 황당한 표정을 본 달리아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물건을 산다곤 하지 않았지.”
“훔칠 거라고 하지도 않았죠.”
“누가 봐도 돈이 없는 몰골 아닌가?”
그야 그렇긴 했다. 상점을 안내하긴 했지만 물건을 어떻게 사려고 그러나 싶긴 했다. 그래도 너무 당당하게 들어가기에 당연히 다른 수가 있겠거니 했던 것이다. 설마하니 이렇게 다짜고짜 상점털이범이 될 줄이야. 레모타는 말을 잃고 달리아의 얼굴만 멀거니 응시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가게 주인을 돌아보았다. 이런 것에 안도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가게 주인은 생명을 부지한 상태였다. 가게에 구비되어 있던 노끈으로 묶는 과정에서 약간의 타박상을 입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입에 물린 재갈도 비명을 지르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어제 가열하게 사내들을 패던 달리아치곤 꽤 얌전한 제압이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다고 말했잖아요.”
“그래서 구하고 있잖아.”
결국 먼저 손을 든 건 레모타였다. 당연하다는 듯 주인을 제압하고 가게의 물건을 터는 달리아의 모습에 레모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달리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창밖을 힐끗거리며 망을 보는 것으로 그 범죄에 합류했다. 영 찜찜한 표정이었지만 수가 없었다. 레모타가 알아서 망을 보는 사이, 달리아는 가게 안에 진열되어 있던 가방 하나를 집어 들었다. 비밀 방에서 챙겨 온 천 가방보단 훨씬 쓸 만한 가죽 가방이었다. 이 정도면 장기적인 여행에도 버텨 낼 수 있을 것이다.
천 가방에 넣어 온 물건들을 모두 옮겨 담고, 가게 안에서 필요하겠다 싶은 물품 몇 개와 약간의 돈을 챙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많이 챙기는 것보다는 필요한 것만 챙기는 게 중요했기에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돈도 양심적으로 여비로 쓸 정도만 챙겼다. 입에 재갈을 문 가게 주인이 뭐라고 웅얼거렸지만 달리아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전전긍긍하며 창밖을 살피던 레모타가 달리아를 돌아보았다. 가죽 가방을 멘 달리아는 막 짧은 칼을 허리춤에 챙기고 있었다. 사람 한 명의 뱃가죽 정도는 대번에 꿰뚫을 것같이 서슬 퍼런 단검이었다. 레모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나마 투덜거리려던 마음이 싹 가셨다. 상점을 털고는 있지만, 주인을 때려죽이지 않은 게 어딘가.
“다 챙겼어요?”
달리아는 대답 대신 서랍을 뒤졌다. 무언가 찾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레모타가 막 물어보려는 찰나, 창밖으로 사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레모타가 후다닥 달리아에게 뛰어갔다.
“얼른 가요! 누군가 와요!”
달리아가 짧게 혀를 찼다. 그녀의 눈에 잠시 고민이 스쳤으나, 그녀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자고로 도망갈 땐 신속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