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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꽃의 시간 1권
8화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7)


그들은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다. 일부러 사람들이 적은 골목을 이용했지만, 그래도 불안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림이 대도시가 아닌 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어제 헤매면서 꽤 깊숙이 들어온 모양인지, 나가는 길은 멀었다. 레모타도 나가는 게 최우선이라는 걸 알았는지 쓸데없는 수다를 자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멀리 보이는 도시의 입구를 발견했다. 어제 달리아가 들어섰던 곳이었다.
달리아는 대로변으로 가는 대신, 좁은 옆 골목으로 들어섰다. 괜히 대로변을 가로지르며 이목을 끌고 싶진 않았다. 목적지가 가까워지니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달리아와 레모타가 막 좁은 골목을 꺾어 들어가는 순간, 맞은편에서 오던 누군가가 그들과 강하게 부딪쳤다. 상대방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달리아도 그 충격으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악!”
비명을 지른 상대방이 와락 인상을 구기며 자신과 부딪친 달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달리아도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방을 보았다. 그러곤 눈을 치켜떴다. 뒤로 나자빠진 상태로 굳어있는 이는 이피였다. 달리아를 알아본 이피가 새파랗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어제 달리아가 저지른 짓을 떠올린 까닭일 것이다.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달리아가 문득 이피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피를 응시하던 달리아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맞았군.”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입술의 피딱지도 어젠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꽤나 심하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대충 그 사연이 짐작돼서, 달리아는 낮게 혀를 찼다. 얼어붙은 표정으로 달리아를 보던 이피가 더듬더듬 대꾸했다.
“내, 내가 누구 때문에 맞았는데…….”
“나 때문이겠지.”
덤덤하게 대꾸한 달리아가 이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피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 태도엔 여전히 달리아에 대한 공포심이 묻어났지만, 눈을 굴리면서도 도망가지 않는 걸 보니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피는 주변을 의식하듯 두리번거렸다.
“당신이 어제 때린…….”
“그 패거리가 날 찾고 있나? 넌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고, 그래서 맞은 거군.”
이피가 입을 다물었다. 달리아는 그런 이피를 보며 실소를 지었다. 너무도 뻔해서 우스울 정도였다. 달리아의 거취를 이피가 알 리 없는데도 굳이 물어봤던 건, 그저 구실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화풀이를 할 구실. 어쩜 그리도 뻔한 행동 패턴을 가지고 있는지. 달리아가 이피에게 다가섰다. 반사적으로 이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달리아는 이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엔 약간의 육포 조각이 들려 있었다. 이피가 미심쩍은 눈으로 달리아를 보았다.
“나 때문에 맞았으니, 그에 대한 보상이야.”
이피는 육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지만, 선뜻 그것을 받아 들지도 못했다.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던 이피가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받고 눈감아 달라는 거겠죠.”
“눈치가 있으니 어딜 가든 죽진 않겠어.”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레모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피는 레모타를 힐끗 보았다. 눌러쓴 후드 너머로 물빛 눈동자가 보였다. 별로 낯이 익진 않았지만, 누군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제 잡혀 있던 애?”
“신경 꺼.”
달리아의 말에 이피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놈들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모자라 상품까지 가로챘으니, 이 도시를 나가도 곱게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사람이야.”
이죽거리는 이피의 말을 자르며, 달리아가 입을 열었다.
“상품이 아니라.”
이피는 침묵했다. 대신 레모타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다문 입술에 왠지 모를 짜증이 묻어났다.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어서, 레모타는 슬그머니 달리아의 뒤로 숨었다. 달리아는 재차 육포를 권했다. 입을 꾹 다물고 한참이나 레모타를 째려보던 이피가 낚아채듯 육포를 받았다. 그러고는 휙 몸을 돌렸다. 그대로 인사도 없이 가 버리려는데, 달리아가 선뜻 말을 걸었다.
“조용히 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 줘.”
“당신 때문에 맞은 거 안 보여요?”
“육포를 좀 더 줄게.”
무시하려던 이피가 잔뜩 인상을 구기며 멈춰 섰다. 육포를 꼭 쥔 이피의 메마른 주먹을 가만히 보던 달리아가 품에서 육포를 더 꺼냈다. 바깥까지는 기껏해야 몇 걸음. 이렇게 안내를 받을 정도로 유난을 떨 거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육포를 내밀었고, 이피는 내밀어진 육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바스라질 것처럼 말라붙은 이피의 입술은 방금 딱지가 터졌는지, 송골송골 피가 맺혔다. 결국 이피는 육포를 받아 들었다.
“따라와요.”
이피는 요리조리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신기하게도 이피가 가는 길엔 누구도 없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골목을 두엇 정도 지나치고서야, 그들은 무너진 성벽 앞에 섰다. 역시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달리아는 무너진 성벽을 손으로 잡아 보았다. 대충 타고 넘어갈 수 있을만한 높이를 가늠해서 자리를 정하는 사이, 이피는 그새 골목 쪽으로 몸을 숨긴 후였다. 아마 함께 있는 꼴을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골목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이피를 돌아본 달리아가 가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이피가 후다닥 도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달리아는 레모타를 먼저 성벽 위로 올려 보냈다. 그녀의 키보다는 높았지만 그럭저럭 넘을 수는 있을 정도라 레모타를 보내고도 혼자 충분히 성벽을 오를 수 있었다. 성벽 바깥은 무성한 잡초와 나무들로 가득했다. 탁! 성벽을 넘어 바닥에 뛰어내린 달리아가, 위치를 가늠하려는 듯 하늘을 보았다. 그러다가 곧 방향을 잡고 앞서 걸었다. 레모타가 졸래졸래 따라붙었다.
“육포를 주고 싶으면 그냥 주면 되잖아요.”
레모타가 자꾸 앞을 가리는 후드를 약간 들추며 달리아를 보았다. 동그란 물빛 눈동자는 정말로 궁금했는지, 달리아를 빤히 보고 있었다. 이대로 무시를 하면 내내 물어 올 기세였다. 힐끗, 레모타를 본 달리아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 애는 나와 한패가 아니니까.”
정당하게 일을 하고 대가로 받은 것. 그저 이피는 늘 하던 호객 행위를 한 것뿐이었다. 그것을 구분해 주는 것만으로도 이피의 마음은 한결 편해질 것이다. 달리아의 말에 레모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레모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달리아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네 집은?”
“네?”
“집에 가려던 것 아닌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던 레모타가 이내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냥 이노밀 해변까지만 같이 가 줘도 돼요.”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놈들이 있을 수도 있어.”
달리아의 말에 레모타도 이피가 했던 경고를 떠올렸다. 이노밀 해변이라면 그림과 멀지 않으니, 그들이 어슬렁거리며 두 사람을 찾아다닐 가능성도 농후했다. 어차피 달리아에게 동행을 요청한 거, 조금 더 부탁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달리아가 엄청난 싸움의 고수인 건 아니지만, 적어도 혼자 돌아다니다가 잡히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나. 잠시 고민하던 레모타가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노밀 해변으로 가다 보면, 집으로 가는 샛길이 나와요.”
달리아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노밀 해변으로 가는 길이라면 어제 지나쳐 왔던 길이라, 그녀는 선뜻 먼저 앞서 걸었다. 그런 달리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레모타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물빛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레모타가 총총걸음으로 달리아의 곁에 섰다. 달리아의 걸음에 맞춰 걸으며, 레모타가 툭 말을 내뱉었다.
“달리아는 이상해요.”
“뭐가.”
달리아는 정면에 시선을 둔 채로 무심하게 되물었다. 태연한 그 목소리에 레모타의 표정은 더욱 찌푸려졌다.
“그냥, 다요. 어젠 정말 무서웠는데, 또 오늘은 굉장히 착해 보이고. 오지랖이 넓은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자잘한 데에 마음 쓰면서 살 만한 세상은 아니잖아요.”
그것은 꽤나 냉소적인 중얼거림이었다. 달리아는 눈만 굴려 힐끗, 레모타를 보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정면을 응시한 레모타의 얼굴이 얼핏 냉담해 보였다. 내내 어설픈 꼴만 보이던 것답지 않게 진지했다. 달리아는 시선을 거두었다. 작게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잘한 데에 마음 쓸 만큼 한가하지 않아.”
달리아의 대답이 뭐가 못마땅했던지, 레모타가 입술을 삐죽였다. 달리아의 오지랖 덕분에 레모타도 도움을 받고는 있지만, 그와 별개로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다.
“하지만 뭐, 굳이 핑계까지 대면서 육포를 챙겨 주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같이 가 주는 것도 그렇고…….”
“자잘한 게 아니야.”
말을 자르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단호했다. 레모타가 놀란 듯 달리아를 돌아보았다. 달리아는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살짝 비틀린 입술은 그녀의 심경을 얼핏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니야. 이 세상이지.”
달리아의 시선이 먼 곳을 응시했다. 척박한 땅과 메마른 나무가 보였다. 십 년. 뭐든 변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 달리아는 숨을 들이켰다. 병사들의 창과 칼에 찔리던 사람들의 모습, 불타는 집,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 이제는 어스름한 기억에 불과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고약한 냄새만은 여전히 남아 떠도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고약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달리아는 시선을 내리깔며 말을 맺었다.
“그리고 넌 상품이 아니라 사람이고.”
달리아를 따라가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레모타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잘 따라오던 레모타가 멈추자, 달리아가 의아한 눈으로 레모타를 돌아보았다. 레모타는 묘한 표정으로 달리아를 보고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달리아를 응시하던 레모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이 뭔데요?”
물빛 눈동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마치 요동치는 파도를 보는 것 같았다. 지긋지긋한 바다 냄새와 파도 소리. 너무나 싫어했던 그것들을 닮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레모타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상태에서, 달리아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내가 아플 줄 알면, 남도 아플 줄 안다는 걸 이해하는 동물.”
레모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달리아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그리고 네가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도 많은 게 달라져.”
뭐가 달라지냐고 묻고 싶은데, 달리아는 제 말만 하고 몸을 돌려 버렸다. 멈춰 섰던 레모타가 허둥지둥 그녀의 곁으로 뛰어갔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