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죽은 연꽃의 시간 1권
9화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8)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발소리만 터벅터벅 울리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달리아의 눈에 조그맣게 난 샛길이 들어왔다. 다행히 지금까지의 길목에선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레모타가 앞장서서 샛길로 들어섰다. 샛길은 메마른 나무들 사이로 나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샛길 너머를 응시하던 달리아가 레모타의 뒤를 따라 샛길로 들어섰다.
“이런 곳에 집이 있었나?”
“있었어요, 우리 집. 지금이야 이 꼴이지만, 나무들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되게 멋있는 길이었다고요. 지금보다 훨씬 크고 울창했거든요.”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이며 말하는 레모타를 물끄러미 보던 달리아가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비록 말라비틀어지긴 했지만, 꽤 빽빽하게 자리 잡은 나무들이 보였다. 지금 보이는 모습보다 더 크고 울창했다면, 아마도 이 숲은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무성했을 것이다.
“숨어 살았다는 건가?”
“네?”
“울창한 나무들로 가려진 곳에 집이 있었다면, 숨어 살았다는 의미 아닌가?”
말문이 막혔는지, 레모타가 달리아를 멀거니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숨어 살긴 누가 숨어 살아요! 내가 뭐하러 숨어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빽 소리를 지르니, 근처를 서성이던 까마귀가 놀라 파드득 날아올랐다. 그 소리에 더 놀란 레모타가 식겁하며 금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혼자 주거니 받거니 하는 꼴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보던 달리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레모타를 지나쳐 앞서 나갔다. 뒤늦게 민망한 듯 애꿎은 까마귀를 탓하던 레모타가 달리아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붙었다.
레모타의 집은 멀지 않았다. 비록 방치되어 있어서 깔끔한 느낌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크고 번듯한 저택이었다. 이런 숲 속에 세우기엔 아까울 정도였다. 아마 이 저택이 해변에 세워져 있었으면, 어느 높으신 분의 별장인가 보다 했을 것이다. 지금 이곳도 해변과는 멀지 않았지만, 겹겹이 선 나무 때문에 드나들기가 좋은 지리는 아니었다. 저택을 앞에 두고 멈춰 선 달리아가 천천히 문가를 살폈다. 넝쿨이 얽힌 대문을 보니, 누군가 드나들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달리아는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일말의 의심을 놓았다. 역시 레모타는 순수하게 제집을 찾아온 것이다.
“봐요. 숨어 살았으면 이렇게 큰 집에서 살았겠어요?”
다른 건 몰라도 레모타가 길가를 떠도는 아이들과는 출신이 다르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달리아는 으스대는 레모타를 무시하며 대문을 밀었다. 문은 철컹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레모타도 함께 대문을 밀었지만,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문이라서 그런지 영 움직이지 않았다. 난처한 눈으로 문을 보던 레모타가 불현듯 손바닥을 치며 담장을 따라 뒤편으로 달려갔다. 마지막으로 한번 문을 덜컹, 밀어 본 달리아도 레모타를 따라갔다.
저택을 빙 두르고 있는 담장의 한 지점에 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문이 달려 있었다. 넝쿨로 엉킨 대문과 달리, 작은 쪽문은 쉽게 열릴 것 같았다. 레모타가 환하게 웃으며 문에 손을 대려는 찰나, 달리아가 갑자기 레모타의 팔을 잡아챘다. 레모타가 의아한 눈으로 달리아를 보았다. 달리아는 설명 없이 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요?”
달리아의 시선이 쪽문의 위부터 아래까지, 천천히 내려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피던 그녀가 덤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문에 넝쿨이 없어.”
“네?”
“담장 가득 넝쿨이 뻗었는데, 문에는 넝쿨이 없어.”
레모타는 그제야 문이 이상할 정도로 깨끗하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녹이 슬고 낡은 건 대문과 다를 바 없었지만, 잘 보면 담장에 쭉쭉 뻗은 넝쿨들이 쪽문에 다다라서는 보이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끊겨 있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레모타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른침을 삼키던 레모타가 울상을 지으며 달리아를 돌아보았다.
“집에 다른 누가 있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여길 아는 사람은…….”
레모타가 입술을 깨물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레모타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나밖에 안 남았는데.”
물빛 눈동자에 얼핏 비친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달리아는 다시 한 번 문을 돌아보았다. 만약 넝쿨이 뻗었다가 떨어진 거라면 아래에 흔적이 남아야 하는데, 딱히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담장 전체로 쭉쭉 뻗은 넝쿨이 문에만 뻗지 않았다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무엇보다 잘 살펴보면, 넝쿨의 끝부분이 인위적으로 잘린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꼭 집에 들어가야 하나?”
“네. 꼭…… 가지고 나와야 하는 물건이 있어요.”
달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천천히 쪽문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잡이를 살며시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손바닥에서부터 전해졌다. 살짝만 비틀었는데 기기긱 하며 시끄러운 소음이 났다. 혹시나 싶어 문을 밀어 열고 가만히 있어 보았지만, 딱히 무언가 일어나는 건 없었다. 달리아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쪽문을 보던 레모타가 슬그머니 앞으로 나섰다. 레모타가 앞서 들어가려는 걸 잡아 세운 달리아가, 먼저 성큼 발을 내디뎠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 안으로 들어서니, 황폐한 후원이 보였다.
후원만 보아도 저택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되었다. 달리아는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위협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가 뒤로 손짓을 했다. 그제야 레모타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의 정경에 남다른 감흥이 일었는지, 레모타는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 후원을 응시했다. 바람을 타고 온 씨가 뿌리를 내렸는지, 정체불명의 잡초들만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레모타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사실 전쟁 통에 형체를 유지한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이노밀 해변도, 그림도 여태 전쟁 통에 부서진 몰골을 벗지 못한 상태 아닌가. 빽빽한 숲을 지나 이 저택을 굳이 찾아내 부수진 않았을 거라고 자위하며 도망 다니긴 했지만 막상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니 새로운 기분이었다.
“가지고 나와야 하는 건?”
“아, 그건 안에 들어가면…….”
“이야, 진짜로 여기 올 줄은 몰랐는데!”
달리아가 반사적으로 레모타를 제 뒤로 숨기며 뒤를 돌았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자리에 누군가 삐딱하게 서 있었다.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건지 모르겠다. 달리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레모타도 기겁을 하며 달리아의 팔에 매달렸다. 남자는 그들의 경계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생글거리며 몇 걸음 더 다가온 그가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인장을 가지러 온 거지? 여기에 두고 갔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남자의 회백색 반곱슬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다. 간편하지만 나름대로 깔끔한 여행복을 입은 남자는, 광대뼈가 두드러질 정도로 살집이 없었다. 체격도 얄브스름한 게 잘 먹고 다니는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거리의 부랑자들과는 또 분위기가 달랐다. 특히 저 황금색 눈동자는, 적어도 남자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거리를 떠도는 절박한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보다는 꼭, 자유로운 야생 고양이에 가까웠다.
“누구지?”
“아, 내 소개가 늦었네. 난 시클리아멘. 당신은 유모? 아니, 하녀인가?”
달리아가 눈을 굴려 힐끗, 제 팔을 잡고 있는 레모타를 보았다. 달리아의 팔을 꽉 잡고 선 모양새가 누가 봐도 남자와는 초면 같았다. 달리아는 레모타를 여전히 뒤로 감싼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물러섰다. 갑자기 나타난 시클리아멘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인기척을 죽이고 감시하는 일이 가능한, 실력 있는 누군가라면 그녀도 알아낼 길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잔뜩 날을 세우는 그녀의 모습에, 생각 없이 웃으며 다가서던 시클리아멘이 알았다는 듯 멈춰 섰다.
“그렇게 놀라지들 마. 나 나쁜 사람 아니라고. 같은 편이야. 도와주러 온 거라니까?”
“네가 누군데?”
달리아가 냉담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시클리아멘은 난처하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볼을 긁적였다. 그런 그를 한참이나 살피던 레모타가 달리아의 뒤에서 고개만 내민 자세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혹시 오버턴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용케 그 말을 알아들은 시클리아멘이 화색이 된 얼굴로 냉큼 말을 받았다.
“오, 맞아! 네 주인이 대신 신분을 알려 주는군, 하녀. 그러니 경계는 그만하라고.”
달리아가 확인을 하려는 듯 레모타를 돌아보았다. 레모타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있었다. 여전히 시클리아멘을 몰라보는 눈치였지만, 무언가 짐작 가는 구석은 있는 것 같았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었나?”
“어…… 사실 만나기로 했다기보단…….”
“아무렴 어때! 난 마중 나가라는 명을 받았고, 그래서 여기 있는 것뿐이야.”
시클리아멘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발랄한 그의 말에 레모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긴 어떻게 알았는데? 여긴 나 말고는 아무도 몰라!”
적어도 이 집이 레모타가 십여 년 전에 살던 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죽었다. 애초부터 많지도 않았다. 레모타의 말에 시클리아멘이 입매를 슬쩍 끌어 올렸다. 낮게 비웃음을 흘리던 시클리아멘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하, 이보다 더한 것도 아는데 집 정도야.”
냉소적으로 중얼거린 그가 이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니까 가령.”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가느다랗게 뜬 황금색 눈에 묘한 즐거움이 묻어났다. 입술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이내 낮은 탄성을 내뱉으며 손뼉을 쳤다.
“보기와는 다르게, 네가 실은 건강한 사내아이라는 것?”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던 달리아가 눈을 치켜떴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레모타를 거칠게 뿌리쳤다. 무방비로 있던 레모타가 휘청거리며 밀려 났다. 레모타는 잔뜩 당황한 얼굴이었다. 레모타의 반응을 통해 시클리아멘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달리아가 뒤로 성큼 물러났다. 레모타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달리아를 돌아보았다. 냉담하게 얼어붙은 달리아의 표정을 확인한 레모타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수, 숨기려던 건 아니에요!”
울상을 짓는 레모타의 모습에 시클리아멘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녀가 아니었나?”
이런 상황에 하녀까지 대동할 여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레모타가 꽤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친밀한 관계인 줄 알았더니만, 그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달리아는 사뭇 정색한 표정이었다.
“저 애는 나와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달리아는 자신을 절박하게 보는 레모타의 시선을 무시하며 시클리아멘을 돌아보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달리아의 표정에선 아무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
“일행을 만난 것 같으니 난 이만 빠지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