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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꽃의 시간 1권
10화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9)
시클리아멘은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며 뜻 모를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달리아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레모타가 잔뜩 놀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지만,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섬으로써 제 의사를 전했다. 레모타가 불안한 눈으로 달리아와 시클리아멘을 번갈아 보았다. 레모타는 달리아를 잡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달리아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쉽게 입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달리아는 천천히 뒷걸음질로 그들과 멀어졌다. 시클리아멘은 팔짱을 끼고 서서 웃고 있을 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웃고 있는 게 전부였지만 어쩐지 위험해 보여서, 달리아는 문에 다다를 때까지 그에게 등을 보이지 않았다.
“달리아!”
문으로 빠져나가기 직전, 레모타의 부름이 들려왔다. 달리아는 내내 시클리아멘을 보던 시선을 떼어서 레모타를 돌아보았다. 단순히 중성적이라고 생각했던 목소리였다. 지금 들으니 왜 사내애라는 걸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우스울 지경이었다. 너무 예쁘게 생겼고, 치마를 입었고, 머리를 길렀다는 이유만으로 레모타를 당연히 여자애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전날 밤에 ‘여자는 찬 데 재우는 거 아니랬어요.’라고 단호하게 하던 말도 이상하기 그지없었지. 온통 이상한데 너무 쉽게 경계심을 풀었다. 그게 다, 저 물빛 눈동자 때문이었다.
레모타의 맑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달리아가 냉담하게 몸을 돌렸다. 시클리아멘이 사실 질 나쁜 깡패여서 레모타에게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달리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들어올 때는 처음 오는 길이라 조심스러웠는데, 나가는 길은 아주 수월했다. 달리아는 성큼성큼 걸어서 큰길가에 도착했다. 돌진하듯 걸어서 큰길로 나오고 나서야,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선해 보이던 물빛 눈동자. 하도 악한 것들 사이에서 살다 보니, 그 선해 보이는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홀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걸음 속도를 맞춰야 하는 일행이 없으니, 이노밀은 금방이었다. 멀리서 우수수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모래사장에 들어서니 짠 바다 냄새도 밀려왔다.
그와 함께,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찾았다!”
사내의 걸걸한 목소리였다. 달리아는 생각할 것도 없이 뒤를 돌았다. 그러나 모래사장에서의 달음박질은 금방 따라잡혔다. 뒤에서 뻗어 온 손길이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달리아가 잡힌 머리채를 두 손으로 감싸며 뒤로 넘어졌다.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어당기던 사내가 땅바닥에 그녀를 내팽개쳤다. 풀썩, 넘어지면서 일어난 모래 먼지에 목이 칼칼해졌다.
“뭐야, 아까 갔다더니 겨우 여기까지밖에 안 왔었어? 썅, 헛걸음했잖아!”
사내들의 대장인 듯한 누군가가 상스러운 욕을 하며 넘어진 달리아를 발로 찼다. 퍽! 복부를 때리는 발길질에 반사적으로 몸이 웅크려졌다. 달리아가 크게 기침을 했다. 맞은 부위를 한 팔로 감싼 달리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내들은 달리아 때문에 헛걸음했다는 사실이 꽤나 억울했던지, 한참이나 발길질을 해 댔다. 딱 기절하지 않을 정도의 강도였다. 이렇다 할 반격을 할 틈도 없어서, 달리아는 그저 팔로 복부와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리는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때려죽일 것 같던 발길질은 누군가의 명으로 잦아들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내려 바닥을 짚은 달리아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누군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내가 달리아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이년이 확실해?”
“네. 이피 놈이 말한 인상착의가 확실합니다.”
달리아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피. 그 이름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었다. 불안정하게 숨을 몰아쉬던 달리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잔뜩 구겨진 얼굴로 자신을 보는 사내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피는.”
“뭐?”
“이피는 어디 있지?”
“하, 이년 완전 미친년 아니야?”
사내가 제 동료들을 돌아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달리아는 어서 대답하라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사내가 머리채를 잡은 상태에서 달리아의 뺨을 갈겼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달리아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머리채를 잡힌 상태라 넘어지진 않았지만, 입 안이 터져서 피가 났다.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달리아는 입 안을 적시는 피를 삼키며 사내를 다시 보았다.
“말해.”
이미 전날 밤에 실컷 맞았을 이피였다. 오늘 다시 이피를 찾아가 달리아에 대해 물었다는 건 그들이 달리아와 이피가 만나는 것을 봤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육포를 받아 든 이피를 보고 같은 편이라 단정 지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곱게 소재지만 묻고 끝났을 리가 없다. 달리아의 말에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뺨을 때리는 대신 입술을 비틀며 이죽거렸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같은 패거리가 아니야? 씨발,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여태 살게 해 준 게 누군데 뒤통수를 쳐?”
“그 새끼 죽여 놓길 잘했습니다, 형님.”
“그런 새끼는 팔아도 욕 처먹어.”
달리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입술을 삐죽이던 이피의 모습을 본 게 기껏해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려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났다. 쓸데없는 참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이렇게 빨리 확인받을 줄은 몰랐다. 비린내가 입 안을 감도니 까마득해지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어금니를 꾹 깨물고 숨을 삭이던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
그녀의 중얼거림에 사내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이 미친년이 지금 뭐라고 하냐, 지금.”
“야, 네년이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아니, 잠깐! 밀지 말라니까!”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이으려던 사내가 인상을 구기며 몸을 돌렸다. 달리아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남자도 눈썹을 추켜올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머리채를 잡혀 있는 달리아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서 조용히 눈을 굴릴 뿐이었다. 아마도 누군가 나타난 모양이었다. 등 뒤에서 나지막하게 말씨름하는 목소리를 들어 보니, 누군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멍청하게 여긴 왜 끼어들고 난리람.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클리아멘은 연신 투덜거리는 중이었다.
“아, 진짜. 나 이런 비생산적인 거 되게 싫어하는데, 도련님 부탁이라서 들어주는 거야. 고마운 줄 알아.”
“알았으니까 빨리 구해 줘!”
달리아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남자가, 그녀를 옆으로 내팽개치고는 발로 세게 걷어찼다. 달리아가 헛숨을 들이켰다. 내뱉는 기침 사이로 약간의 핏물이 비쳤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보던 레모타가 기겁을 하며 시클리아멘을 재촉했다. 나지막하게 앓는 소리를 내는 달리아를 두고, 사내들이 슬렁슬렁 시클리아멘에게 다가섰다.
걷어차인 부위의 통증 때문에 잔뜩 몸을 웅크린 달리아가 숨을 고르고 있는데, 귓가로 무서운 타격음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달리아가 겨우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뿌연 모래 먼지 사이로, 피를 토하며 나뒹구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달리아의 머리채를 잡았던 남자가 쌍욕을 내뱉는 소리도 들렸다. 남자는 반쯤 몸을 일으킨 달리아에게 다가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러고는 시클리아멘을 향해 소리쳤다.
“이 새끼 너! 이년 숨통 붙어 있는 꼴 보고 싶으면…….”
남자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흔들던 달리아가 이를 악물고 팔을 들었다. 팔꿈치로 남자가 서 있는 쪽을 힘차게 때렸더니,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이 확 빠졌다.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달리아가 한 번 더 팔을 휘둘렀다. 보지도 않고 휘둘렀지만 비명 소리를 들어 보니 맞은 부위를 대충 알 것도 같았다. 맞은편에서 이 꼴을 보고 있던 시클리아멘이 질린 표정으로 달리아를 보았다.
“우와 잔인해…….”
달리아가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급소를 감싸며 주저앉아 있었다. 달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남자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웅크리고 있던 남자가 넘어지며 반사적으로 땅을 짚었다. 그 틈에 드러난 급소를 세게 걷어차니, 다시 한 번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든가 말든가, 달리아는 가차 없이 남자의 급소를 짓밟았다.
“달리아, 달리아!”
레모타가 헐레벌떡 달리아에게 달려왔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달리아가 그 목소리에 겨우 발길질을 멈추었다. 피범벅이 된 사내의 급소를 확인한 그녀가 옆을 돌아보았다. 아까 뿌리쳐졌던 기억 때문인지, 레모타는 선뜻 달리아의 팔에 매달리지 못했다. 다만 표정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괜찮아요?”
레모타를 물끄러미 보던 달리아가 깊이 숨을 내뱉었다. 아마도 인장인지 뭔지를 찾아서 바로 나온 모양이다. 모래벌판 한가운데에서 맞고 있었으니,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다만 굳이 끼어들 필요까진 없었다. 그들의 인연은 그 저택에서 끝났으므로.
“뭐하러 끼어들었지?”
“그걸 말이라고 해요? 이놈들한테 쫓기는 거 다 나 때문이잖아요. 그보다 아까 맞은 데는 괜찮아요?”
레모타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던 달리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야말로 자잘한 데에 마음 쓰는 타입이었나.”
그녀에게 이상하다고 타박하더니만, 정작 오지랖 넓은 건 레모타였나 보다. 겨우 하룻밤 같이 지낸 사람을 구하겠다고 뛰어들다니. 물론 보아하니 싸움은 저쪽에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시클리아멘이 다 한 것 같지만. 달리아의 말에 레모타가 인상을 구겼다. 물빛 눈동자의 소년은 제법 화난 기색으로 언성을 높였다.
“내가 아플 줄 알면 남도 아플 줄 안다는 걸 이해하니까 이러는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놀란 달리아가 눈을 치켜떴다. 잠시 입을 다물고 한참이나 레모타를 보던 달리아가 이내 본연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슬쩍 눈을 내리깐 그녀가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멍청하긴.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레모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레모타가 울컥한 듯 입술을 삐죽이며 말을 했다.
“아무튼! 맞으면 아프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달리아는 얼굴과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 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이 정도는 괜찮아.”
“하지만 피가 나는걸, 아줌마? 빨리 치료해야지. 흉지면 어쩌려고?”
영영 잊힐 뻔한 시클리아멘이 넌지시 말을 건네 왔다. 그사이 남은 사내들도 모두 처리했는지, 주변에 서 있는 사람이라곤 그들 셋뿐이었다. 아까도 심상찮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싸움을 잘하는 모양이었다. 힐끗 시클리아멘을 본 달리아가 그를 무시하며 레모타를 돌아보았다.
“이제 갈 길 가.”
“하지만 달리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몸이 뻐근했다. 그래도 차마 이들 앞에서 쓰러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레모타와 시클리아멘이 자리를 뜨면 근처에 앉아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에겐 먼저 돌아설 기미가 영 안 보였다. 결국 달리아는 무리를 해서라도 먼저 자리를 뜨기로 결정했다.
“우린 달그림자 늪지대로 갈 건데.”
몸을 돌리려던 달리아가 멈춰 섰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클리아멘을 보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피가 튀어서 썩 좋은 몰골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핏자국조차 참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아줌마는 어디 가?”
10화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9)
시클리아멘은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며 뜻 모를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달리아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레모타가 잔뜩 놀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지만,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섬으로써 제 의사를 전했다. 레모타가 불안한 눈으로 달리아와 시클리아멘을 번갈아 보았다. 레모타는 달리아를 잡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달리아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쉽게 입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달리아는 천천히 뒷걸음질로 그들과 멀어졌다. 시클리아멘은 팔짱을 끼고 서서 웃고 있을 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웃고 있는 게 전부였지만 어쩐지 위험해 보여서, 달리아는 문에 다다를 때까지 그에게 등을 보이지 않았다.
“달리아!”
문으로 빠져나가기 직전, 레모타의 부름이 들려왔다. 달리아는 내내 시클리아멘을 보던 시선을 떼어서 레모타를 돌아보았다. 단순히 중성적이라고 생각했던 목소리였다. 지금 들으니 왜 사내애라는 걸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우스울 지경이었다. 너무 예쁘게 생겼고, 치마를 입었고, 머리를 길렀다는 이유만으로 레모타를 당연히 여자애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전날 밤에 ‘여자는 찬 데 재우는 거 아니랬어요.’라고 단호하게 하던 말도 이상하기 그지없었지. 온통 이상한데 너무 쉽게 경계심을 풀었다. 그게 다, 저 물빛 눈동자 때문이었다.
레모타의 맑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달리아가 냉담하게 몸을 돌렸다. 시클리아멘이 사실 질 나쁜 깡패여서 레모타에게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달리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들어올 때는 처음 오는 길이라 조심스러웠는데, 나가는 길은 아주 수월했다. 달리아는 성큼성큼 걸어서 큰길가에 도착했다. 돌진하듯 걸어서 큰길로 나오고 나서야,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선해 보이던 물빛 눈동자. 하도 악한 것들 사이에서 살다 보니, 그 선해 보이는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홀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걸음 속도를 맞춰야 하는 일행이 없으니, 이노밀은 금방이었다. 멀리서 우수수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모래사장에 들어서니 짠 바다 냄새도 밀려왔다.
그와 함께,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찾았다!”
사내의 걸걸한 목소리였다. 달리아는 생각할 것도 없이 뒤를 돌았다. 그러나 모래사장에서의 달음박질은 금방 따라잡혔다. 뒤에서 뻗어 온 손길이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달리아가 잡힌 머리채를 두 손으로 감싸며 뒤로 넘어졌다.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어당기던 사내가 땅바닥에 그녀를 내팽개쳤다. 풀썩, 넘어지면서 일어난 모래 먼지에 목이 칼칼해졌다.
“뭐야, 아까 갔다더니 겨우 여기까지밖에 안 왔었어? 썅, 헛걸음했잖아!”
사내들의 대장인 듯한 누군가가 상스러운 욕을 하며 넘어진 달리아를 발로 찼다. 퍽! 복부를 때리는 발길질에 반사적으로 몸이 웅크려졌다. 달리아가 크게 기침을 했다. 맞은 부위를 한 팔로 감싼 달리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내들은 달리아 때문에 헛걸음했다는 사실이 꽤나 억울했던지, 한참이나 발길질을 해 댔다. 딱 기절하지 않을 정도의 강도였다. 이렇다 할 반격을 할 틈도 없어서, 달리아는 그저 팔로 복부와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리는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때려죽일 것 같던 발길질은 누군가의 명으로 잦아들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내려 바닥을 짚은 달리아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누군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내가 달리아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이년이 확실해?”
“네. 이피 놈이 말한 인상착의가 확실합니다.”
달리아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피. 그 이름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었다. 불안정하게 숨을 몰아쉬던 달리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잔뜩 구겨진 얼굴로 자신을 보는 사내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피는.”
“뭐?”
“이피는 어디 있지?”
“하, 이년 완전 미친년 아니야?”
사내가 제 동료들을 돌아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달리아는 어서 대답하라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사내가 머리채를 잡은 상태에서 달리아의 뺨을 갈겼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달리아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머리채를 잡힌 상태라 넘어지진 않았지만, 입 안이 터져서 피가 났다.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달리아는 입 안을 적시는 피를 삼키며 사내를 다시 보았다.
“말해.”
이미 전날 밤에 실컷 맞았을 이피였다. 오늘 다시 이피를 찾아가 달리아에 대해 물었다는 건 그들이 달리아와 이피가 만나는 것을 봤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육포를 받아 든 이피를 보고 같은 편이라 단정 지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곱게 소재지만 묻고 끝났을 리가 없다. 달리아의 말에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뺨을 때리는 대신 입술을 비틀며 이죽거렸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같은 패거리가 아니야? 씨발,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여태 살게 해 준 게 누군데 뒤통수를 쳐?”
“그 새끼 죽여 놓길 잘했습니다, 형님.”
“그런 새끼는 팔아도 욕 처먹어.”
달리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입술을 삐죽이던 이피의 모습을 본 게 기껏해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려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났다. 쓸데없는 참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이렇게 빨리 확인받을 줄은 몰랐다. 비린내가 입 안을 감도니 까마득해지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어금니를 꾹 깨물고 숨을 삭이던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
그녀의 중얼거림에 사내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이 미친년이 지금 뭐라고 하냐, 지금.”
“야, 네년이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아니, 잠깐! 밀지 말라니까!”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이으려던 사내가 인상을 구기며 몸을 돌렸다. 달리아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남자도 눈썹을 추켜올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머리채를 잡혀 있는 달리아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서 조용히 눈을 굴릴 뿐이었다. 아마도 누군가 나타난 모양이었다. 등 뒤에서 나지막하게 말씨름하는 목소리를 들어 보니, 누군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멍청하게 여긴 왜 끼어들고 난리람.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클리아멘은 연신 투덜거리는 중이었다.
“아, 진짜. 나 이런 비생산적인 거 되게 싫어하는데, 도련님 부탁이라서 들어주는 거야. 고마운 줄 알아.”
“알았으니까 빨리 구해 줘!”
달리아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남자가, 그녀를 옆으로 내팽개치고는 발로 세게 걷어찼다. 달리아가 헛숨을 들이켰다. 내뱉는 기침 사이로 약간의 핏물이 비쳤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보던 레모타가 기겁을 하며 시클리아멘을 재촉했다. 나지막하게 앓는 소리를 내는 달리아를 두고, 사내들이 슬렁슬렁 시클리아멘에게 다가섰다.
걷어차인 부위의 통증 때문에 잔뜩 몸을 웅크린 달리아가 숨을 고르고 있는데, 귓가로 무서운 타격음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달리아가 겨우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뿌연 모래 먼지 사이로, 피를 토하며 나뒹구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달리아의 머리채를 잡았던 남자가 쌍욕을 내뱉는 소리도 들렸다. 남자는 반쯤 몸을 일으킨 달리아에게 다가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러고는 시클리아멘을 향해 소리쳤다.
“이 새끼 너! 이년 숨통 붙어 있는 꼴 보고 싶으면…….”
남자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흔들던 달리아가 이를 악물고 팔을 들었다. 팔꿈치로 남자가 서 있는 쪽을 힘차게 때렸더니,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이 확 빠졌다.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달리아가 한 번 더 팔을 휘둘렀다. 보지도 않고 휘둘렀지만 비명 소리를 들어 보니 맞은 부위를 대충 알 것도 같았다. 맞은편에서 이 꼴을 보고 있던 시클리아멘이 질린 표정으로 달리아를 보았다.
“우와 잔인해…….”
달리아가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급소를 감싸며 주저앉아 있었다. 달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남자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웅크리고 있던 남자가 넘어지며 반사적으로 땅을 짚었다. 그 틈에 드러난 급소를 세게 걷어차니, 다시 한 번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든가 말든가, 달리아는 가차 없이 남자의 급소를 짓밟았다.
“달리아, 달리아!”
레모타가 헐레벌떡 달리아에게 달려왔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달리아가 그 목소리에 겨우 발길질을 멈추었다. 피범벅이 된 사내의 급소를 확인한 그녀가 옆을 돌아보았다. 아까 뿌리쳐졌던 기억 때문인지, 레모타는 선뜻 달리아의 팔에 매달리지 못했다. 다만 표정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괜찮아요?”
레모타를 물끄러미 보던 달리아가 깊이 숨을 내뱉었다. 아마도 인장인지 뭔지를 찾아서 바로 나온 모양이다. 모래벌판 한가운데에서 맞고 있었으니,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다만 굳이 끼어들 필요까진 없었다. 그들의 인연은 그 저택에서 끝났으므로.
“뭐하러 끼어들었지?”
“그걸 말이라고 해요? 이놈들한테 쫓기는 거 다 나 때문이잖아요. 그보다 아까 맞은 데는 괜찮아요?”
레모타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던 달리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야말로 자잘한 데에 마음 쓰는 타입이었나.”
그녀에게 이상하다고 타박하더니만, 정작 오지랖 넓은 건 레모타였나 보다. 겨우 하룻밤 같이 지낸 사람을 구하겠다고 뛰어들다니. 물론 보아하니 싸움은 저쪽에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시클리아멘이 다 한 것 같지만. 달리아의 말에 레모타가 인상을 구겼다. 물빛 눈동자의 소년은 제법 화난 기색으로 언성을 높였다.
“내가 아플 줄 알면 남도 아플 줄 안다는 걸 이해하니까 이러는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놀란 달리아가 눈을 치켜떴다. 잠시 입을 다물고 한참이나 레모타를 보던 달리아가 이내 본연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슬쩍 눈을 내리깐 그녀가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멍청하긴.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레모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레모타가 울컥한 듯 입술을 삐죽이며 말을 했다.
“아무튼! 맞으면 아프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달리아는 얼굴과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 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이 정도는 괜찮아.”
“하지만 피가 나는걸, 아줌마? 빨리 치료해야지. 흉지면 어쩌려고?”
영영 잊힐 뻔한 시클리아멘이 넌지시 말을 건네 왔다. 그사이 남은 사내들도 모두 처리했는지, 주변에 서 있는 사람이라곤 그들 셋뿐이었다. 아까도 심상찮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싸움을 잘하는 모양이었다. 힐끗 시클리아멘을 본 달리아가 그를 무시하며 레모타를 돌아보았다.
“이제 갈 길 가.”
“하지만 달리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몸이 뻐근했다. 그래도 차마 이들 앞에서 쓰러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레모타와 시클리아멘이 자리를 뜨면 근처에 앉아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에겐 먼저 돌아설 기미가 영 안 보였다. 결국 달리아는 무리를 해서라도 먼저 자리를 뜨기로 결정했다.
“우린 달그림자 늪지대로 갈 건데.”
몸을 돌리려던 달리아가 멈춰 섰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클리아멘을 보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피가 튀어서 썩 좋은 몰골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핏자국조차 참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아줌마는 어디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