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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꽃의 시간 1권
11화
1. 이노밀, 붉은 수염 해변(10)


달리아는 침묵했다. 레모타는 눈을 깜빡거리며 달리아를 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어째서 자신에게 이렇게 기대려 하는 걸까. 불쑥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행선지까지 알려 주는 걸 보면, 분명 함께 가고 싶다는 의미였다. 이들과 함께 간다면, 나름대로 편할지 몰랐다. 다수의 깡패들을 쓰러뜨리는 시클리아멘의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길눈이 밝은 것 같은 레모타까지. 오히려 그녀가 이들에게 짐이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달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상관이지?”
“솔직히 난 상관없는데, 거기 도련님은 아줌마가 마음에 들었나 봐.”
시클리아멘은 레모타가 좋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눈치였다. 달리아는 레모타를 돌아보았다. 선한 물빛 눈동자. 기댈 곳을 갈구하는 맹목적인 어린아이의 집착. 어린아이의 저 맹목적이고 선하면서도 이기적인 시선이, 달리아는 참 익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 알고 나서부터도 저 시선이 계속될 수 있을까?
“달리아는 어디로 가는데요?”
달리아는 입술을 짓이겼다. 머릿속을 윙윙거리는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겨우 며칠 사이에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지독하게도 무뚝뚝하고 건조한 그 목소리. 마치 교과서에서 막 튀어나온 듯 정갈하고 똑바른 발음으로, 그는 말했다.
「임펠인들의 낙원.」
“임펠인들의 낙원.”
「달그림자.」
“달그림자.”
시클리아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레모타는 환하게 웃으며 같이 가자고 손을 내밀었다.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보며, 달리아는 차마 뱉지 못한 마지막 말을 입 안에 굴렸다.
「그곳에 네 딸이 있다.」

***


로벨리아 H. 로르망드. 그녀는 우아한 여자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로르망드 가문의 외동딸로서 조금의 부족함 없는 자세로 자라났다. 바라 마지않던 왕가와의 결혼이 무산되고, 머나먼 식민지의 귀족과의 결혼이 확정되는 순간에도 그녀의 품위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식민지를 손아귀에 쥐려는 제 아버지의 기대를 안고 배에 올랐다. 그녀의 남편은 사실상 히스비아 국에 고개를 조아리고 살아남은 간신배였고,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엔 조금도 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시집을 가서도 제 가문의 성을 버젓이 살려 놓을 수 있었다. 오히려 그녀의 남편이 로르망드의 이름을 따라 성을 바꾸는 지경에 이르렀다.
히스비아 내에서도 임펠을 다스리는 데에 어느 가문이 앞장설 것인가 의견이 분분했다. 로벨리아가 배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그 논의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들 모두 로벨리아가 임펠의 귀족들에게서 굴종의 서약을 받아 낸 데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 비록 히스비아 왕가는 놓쳤지만, 그녀는 임펠에서 군림했다.
식민지는 히스비아에게 점령당했지만 로르망드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물론 제 나라의 패망을 인정하지 못한 어리석은 임펠인들로 구성된 레지스탕스가 귀찮게 굴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흔들릴 로벨리아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이제 와 못마땅한 것이 있다면 단 하나, 그녀보다 조금 늦게 임펠로 넘어온 제 남동생이었다.
“보고는 받았겠지?”
정갈한 차림의 사내는 말없이 서류를 응시했다. 빽빽하게 쓰인 글자들은 온갖 수식어와 미사여구로 가득했지만 결국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요지는, ‘목표물을 놓쳤다’는 사실. 그는 서류를 가지런히 접었다.
“애초에 네가 맡기만 했어도 이 사달은 나지 않았겠지.”
“제가 나선다고 해서 뭐가 달라졌겠습니까.”
“네 명예를 살리겠다고 고군분투하고 계신 아버님을 생각해서라도, 공을 세워야지 않니?”
“이런다고 명예가 살겠습니까? 제가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요.”
로벨리아의 안색에 노기가 어렸다. 붉게 달아오른 누이의 얼굴에도, 사내는 별다른 미동이 없었다.
자랑스러운 로르망드 가문의 차남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히스비아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 임펠로 들어온 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후손을 볼 수 없는 몸인 까닭이었다. 그 불명예스러운 현실이 아내와의 불화를 만들었고, 급기야 아내의 외도로 이어졌으며 끝내는 파경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들을 로르망드 가주는 아주 수치스럽게 여겼다. 물론, 로벨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같잖은 고집은 그만 버리고, 이 애새끼나 잡아 와.”
“귀한 입에서 애새끼라니요. 누가 들을까 겁나는군요.”
“누이로서 동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데, 그보다 더한 말인들 못 할까.”
로벨리아가 나지막하게 비웃음을 흘렸다. 의자에 기대 앉아 있던 그녀는 우아하게 몸을 일으켰다. 미리 따라 둔 와인을 집어 들며, 그녀는 힐끗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제 쓸데없는 데에 한눈팔지도 못할 텐데,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지.”
사내의 시선이 누이에게 향했다. 로벨리아는 그 시선을 모른 척, 와인을 머금으며 웃음을 흘렸다. 와인을 반절 정도 마실 때까지, 사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로벨리아는 여전히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를 외면했다. 결국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아무것도.”
한가로운 목소리로 대꾸한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직 보고를 듣지 못한 모양이지?”
사내의 눈동자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럴수록 로벨리아는 더욱 즐거워졌다. 보고를 중간에 막은 게 다름 아닌 그녀였다. 직접 전해 주고, 일그러지는 동생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 사내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은 상태였다. 로벨리아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4627, 탈옥했다던데.”
“……탈옥이라니요.”
“말 그대로. 옥시비아 캐슬도 완벽한 곳은 아니잖니? 탈옥수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닌데 새삼스러울 건 없지. 다만 그 주변의 치안이 워낙 안 좋기로 소문이 나서……. 굶주린 거지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곳이라지, 아마?”
사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옥시비아 캐슬 주변의 환경이라면 누구보다 그가 제일 잘 알았다. 범죄자들을 관리하는 총책임자가 다름 아닌 그이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주먹을 꾹 쥐었다. 분노하는 제 동생의 모습이 우스워서, 로벨리아는 아낌없는 비웃음을 지었다.
“탈옥수 하나하나를 쫓을 만큼 우리 병사들이 한가하진 않아. 그러니 이제 그 더러운 취미 생활은 집어치우고 본분이나 다해. 네 일은, 나를 도와서 임펠을 관리하는 거니까.”
로벨리아가 빈 와인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곱게 눈웃음 지었다.
“알아들었으면 이만 나가 봐, 아칸더스.”
아칸더스는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렸다.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방을 나선 그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는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기고는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단정하고 일정한 구두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러나 점점 그 소리는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었다.
아칸더스는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창백한 안색에 뻣뻣한 갈색 머리카락, 앙상한 몸을 한 여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기어코 감옥을 벗어났다고. 남색 눈동자가 새파란 빛으로 빛났다. 정갈하지만 지나치게 똑바른 나머지 딱딱한 발음이 악다문 잇새로 흘러나왔다.
“……달리아.”



2. 도르망, 죽은 마을(1)


앞서 걷던 시클리아멘이 우뚝 멈춰 섰다.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 걷던 레모타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있잖아?”
입술을 삐죽이며 인상을 찌푸리던 시클리아멘이 레모타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레모타의 등 뒤, 조금 더 멀리에서 멈춰 선 달리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무덤덤한 달리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시클리아멘이 레모타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 동행하는 거지?”
레모타가 조금 얼떨떨한 눈으로 시클리아멘을 보다가,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달리아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던 레모타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마도?”
“그럼 대체 저 아줌마는 왜 굳이 저렇게 떨어져서 걷는 거야?”
두 사람이 달리아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 모습에 살짝 미간을 좁히던 달리아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난 함께 간다고 하지 않았어. 다만 방향이 같을 뿐이다.”
방향이 같은 정도가 아니라 목적지가 일치했다. 그럼에도 부득불 일행이 되겠다는 소리는 내뱉지 않는 꼴이 어이없어서, 시클리아멘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달리아는 무덤덤하게 시선을 돌려 그들을 외면했다. 그 반응이 못내 서운했는지, 레모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 보니 기껏해야 하룻밤을 같이 지새운 게 전부였는데, 아주 대단한 정분이라도 쌓은 모양이다.
사실 하루 먼저 만난 달리아나 하루 늦게 만난 시클리아멘이나 레모타의 입장에선 경계해야 할 타인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여전히 경계를 받고 저 아줌마는 함께 못 가서 안달이라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 자리에서 초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고, 경계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어디 있나. 달리아 역시 시클리아멘의 입장에선 썩 신뢰가 가지 않는 여자였다. 시클리아멘은 냉소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우리가 못미더우면 차라리 앞서 걸으시는 게 낫지 않겠어?”
달리아가 눈을 가늘게 접었다. 사실 못미더울 것도 없는 게, 시클리아멘은 다친 그녀를 꽤 친절하게 치료해 주었다. 약을 내주고 충분히 쉬는 동안 주변을 지켜 준 것이다. 그 저변에는 레모타의 바람이 깔려 있었지만 어쨌든 레모타가 달리아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한 시클리아멘도 같은 태도일 것이라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당장 달리아에겐 이 두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는 시클리아멘이 앞서 걷던 길 너머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이내,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길을 몰라.”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온 대답에 무심코 넘어갈 뻔했다. 시클리아멘은 기가 차다는 눈으로 달리아를 보았다.
“모른다고?”
“그래.”
“하…….”
달그림자 늪을 모른다니. 아마 임펠인이라면 임펠인들의 낙원이라는 그곳이 어디에 있다는 소리 정도는 들어 봤을 것이다. 전쟁이 터지고 히스비아의 식민지가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터전을 잃은 임펠인들에게 마치 파라다이스처럼 불리던 곳이 아닌가.
본래 ‘헴포’라는 이름을 가진 이 늪은, 그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늪이라고 불릴 정도로 음습하고 흉흉한 지역이었다. 늘 자욱하게 끼어 있는 물안개가 지나는 여행자들의 발목을 잡아끌어 깊은 늪지대 아래로 당긴다는 괴담이 돌아서, 누구도 찾지 않던 장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음습한 분위기 때문에 히스비아군도 선뜻 그 지역을 들어서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갈 곳을 잃은 임펠인들 사이에선 히스비아군을 피할 수 있는 장소로 손꼽히기 시작했다. 거기에 히스비아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임펠의 레지스탕스 단체가 헴포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문이 더해져, 죽음의 늪은 순식간에 달그림자 늪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으로 탈바꿈했다. 당연히 가는 길도 입에 입을 타고 퍼져 나갔다. 그런데 그 유명한 곳으로 가는 길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