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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꽃의 시간 1권
12화
2. 도르망, 죽은 마을(2)


시클리아멘은 달리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달리아가 표정 관리에 엄청나게 뛰어나지 않고서야, 저 말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시클리아멘이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길도 모르는 곳을 무작정 가겠다고 나선 거야?”
달리아는 힐끗,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상점에서 지도를 구하려고 했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사실 지도가 있었다고 해도 제대로 알아봤을지 의문이었다. 그녀는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생판 가 본 적이 없는 곳을 가려는 사람치고는 너무나 대책 없는 상황이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달리아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가는 길은 모르지만 가야 할 이유는 있으니까.”
“길이야 모를 수도 있지!”
가만히 눈을 굴리던 레모타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시클리아멘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든 말든, 레모타는 슬금슬금 달리아에게 다가갔다.
“저기…… 남자라고 말 안 한 건 미안해요. 사정이 있어요.”
보아하니 사과를 하려고 내내 타이밍을 기다리던 모양이었다. 잔뜩 주눅 든 레모타의 모습에도, 달리아는 무던하게 시선을 돌렸다.
“상관없어.”
“혹시 그거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같이 안 가겠다고 하는 거면, 화 풀어요.”
참 애다운 발상이었다. 달리아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로. 그런 시답잖은 걸 들먹이진 않아.”
“근데 왜 옆에 오지도 않아요?”
내내 무심하던 달리아의 눈에 처음으로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레모타를 보았다. 그녀야말로 묻고 싶었다.
“그러는 넌 왜 다가오려 하지? 우린 기껏해야 하루 함께 있었을 뿐이야.”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물론 자신을 구해 준 달리아의 모습에 신뢰감이 느껴졌다거나, 의지가 되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앞으로의 일정까지 함께하자고 다짐하기엔 부족하지 않나? 그에 대한 궁금증은 시클리아멘도 가지고 있던 터라, 아닌 척 레모타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눈만 굴리던 레모타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달리아가 좋으니까요.”
시클리아멘이 미간을 찌푸리며 레모타를 보았다. 설마하니 이성적인 의미는 아니겠지? 누가 봐도 여성적인 매력이라곤 쥐뿔도 안 보이는 달리아였다. 게다가 이노밀 해변에서 깡패들과 싸울 땐 또 어땠나. 시클리아멘 본인의 손속도 그리 자비롭진 않았지만, 남자의 급소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짓밟는 달리아를 보고 아연실색을 했다. 아무리 흉흉한 세상에 살아남기 어렵기로서니 여자의 몸으로 저렇게 독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성적인 애정은 고사하고, 인간적인 애정조차 느끼기 어려운 상대한테 저렇게 좋다고 매달리다니. 시클리아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든 말든, 달리아는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달리아는 꼭!”
기세 좋게 이어질 것 같던 말이 뚝 멈추었다. 막상 말을 내뱉으려니 무언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레모타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달리아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질 때쯤이 돼서야, 레모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엄마 같거든요.”
이번에는 달리아도 어처구니없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되물었다.
“뭐?”
“이건 또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레모타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볼이 발그레해진 것을 보니, 제 말이 얼마나 낯부끄러운 소리였는지는 아는 모양이었다. 예쁘장한 꼴로 얼굴까지 붉히니 영락없는 계집애라 시클리아멘은 새삼 감탄했다. 역시 부모를 잘 만난 덕에 저런 번지르르한 외모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 세상에 예쁘장한 것이 마냥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장이 저렇게 잘 어울리니 나름 유용하긴 했다. 그러나 달리아는 레모타의 꼴이 영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입에서 대번에 냉담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흉한 꼴이나 집어치울 순 없나?”
달리아가 지적하는 것이 본인의 여장임을 눈치챈 레모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꼴이 영락없는 여자애였다. 킬킬거리던 시클리아멘이 슬며시 끼어들어 말을 건넸다.
“뭐. 흉하진 않으니까 그렇게 의기소침하지 않아도 돼, 도련님. 근데 잘 어울리긴 하지만 그 꼴은…… 좀. 솔직히 나도 보기가 그래.”
문제는 너무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었다. 남자라는 걸 몰랐다면, 여자라는 데에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클리아멘까지 한마디 거들자, 레모타가 더욱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이게 그나마 안전하단 말이에요.”
“안전해서 인신매매단에게 붙들렸나?”
“그거야! 그렇긴 한데…….”
“어쩌면 취향일지도?”
“그런 거 아니거든?”
물론 긴 머리칼이나 치마가 익숙해진 건 사실이었지만 벗을 수 있다면야 진즉 벗었을 것이다. 레모타는 나름대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제 자신을 보호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레모타는 그저 입술만 삐죽거리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통 맞은 목소리로 대꾸하는 레모타를 보며 낄낄거리던 시클리아멘이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도련님, 엄마라니. 귀여운 소리긴 한데 그런 말 함부로 했다간 뺨 맞는다? 아줌마한테 아줌마라고 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엄마랑 아줌마랑은 달라! 너야말로 왜 자꾸 달리아한테 아줌마라고 그러는 거야?”
“다르긴 뭐가…….”
“안 가나?”
결국 보다 못한 달리아가 말을 자르고 나서야, 둘의 소모적인 대화도 멈추었다. 아줌마니 엄마니 말장난을 하는 시클리아멘을 무시하며, 달리아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녀는 곧 뒤에서 들려오는 시클리아멘의 목소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아줌마, 길 모른다며?”
멈춰 선 상태에서 잠시 침묵하던 달리아가 무심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앞장서.”
시클리아멘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참 재미있는 구성이었다. 아주 즐거운 여행길이 될 것 같았다.

***


출산은 소녀에게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적어도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출산 직후만 해도 관심을 보이던 이웃들이 하나둘 자신의 생업을 위해 돌아서면서 더더욱 그랬다. 나이가 너무 많아 손님을 받을 수 없는 늙은 창부만이 간간히 소녀를 찾아와 육아에 대한 조언을 했지만, 그도 소녀에겐 큰 위안이 되지 않았다.
몸은 아팠고 충분히 쉴 시간이나 공간은 없는 와중에 입은 늘었다. 그나마 아기가 순하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휩싸였던 탓인지, 아니면 일을 해야 하는 어미를 대신해 남의 손을 거쳐서 그런지 크게 낯가림이 심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계집아이였다. 이웃들은 아기가 자라면 곧 소녀를 도울 것이고, 그러면 생활이 지금보다 나아지리라 위로했다. 그래 봤자 십여 년이 흘러야 가능한 일이라, 소녀로서는 딱히 즐겁거나 힘이 날 말도 아니었다. 아기를 기르며 생활을 이어 나가는 건 쉽지 않았다. 소녀는 그렇게 꾸역꾸역 이 년을 버텼다.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에 뱃사람들이 줄었다. 대신 임펠의 병사들이 집창촌을 찾았다. 그제야 소녀는 나라가 전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녀의 나이가 열아홉이 되던 해였다. 그렇다고 해도 생활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손님들의 직업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소녀가 사는 마을의 대부분은 피난을 가지 않았다. 히스비아군이 북쪽 해안가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풍문으로 돌면서 몇몇 집들이 야반도주를 했지만, 부쩍 번성하게 된 집창촌에선 아예 다들 눌러앉은 참이었다. 히스비아군과 싸우기 위해 출정한 임펠의 군대가 근처에서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집창촌이 발달했던 소녀의 마을은 시의적절하게 병사들의 회포를 풀어 주는 장소였다. 뱃사람들이나 병사들이나 거칠기는 매한가지라 크게 꺼려질 것도 없었다. 집창촌 주민들은 가까이 주둔한 군대에 오히려 안심하기까지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녀의 생활도 딱히 달라질 것이 없었다. 당초 마을 안에서 나고 자랐으니 사실상 피난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런 생활이었다. 마을 밖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갑작스럽게 짊어지게 된 생명이 무거워 허덕이기 바쁜 나날.

***


세 사람은 거의 대화를 하지 않고 걷는 데에 집중했다. 간간히 레모타가 달리아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의 단답형 대답에 금방 지쳐 입을 다물었다. 수다스러운 줄 알았던 시클리아멘도 딱히 말문을 열지 않았다. 기묘하게 유지되던 침묵이 깨진 건 끝없는 줄 알았던 길의 저편에 새로운 풍경이 나타나면서부터였다. 지평선 쪽에 무언가 거무스름한 것이 보였다. 제일 앞서 걷던 시클리아멘이 먼저 멈추었다. 덩달아 레모타와 달리아도 멈춰 섰다. 아직은 거리가 멀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짐작하기로는 마을 같았다.
“도르망이야.”
멀리 시선을 두고 있던 달리아가 힐끗, 시클리아멘을 보았다. 그는 무덤덤한 눈으로 멀리 보이는 거무스름한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히스비아 군대에게 학살당했던 곳 중 하나.”
“저기가 도르망……?”
레모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아마도 지명을 들어 본 모양이었다.
“그래, 이젠 죽어 버린 마을이지.”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한 레모타를 향해 시클리아멘은 히죽 웃어 보였다. 그러곤 달리아를 돌아보며 말을 덧붙였다.
“모를 것 같아서.”
“쓸데없는 설명이군.”
달리아는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질수록 집의 골격이 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것을 보니 죄다 불탔던 모양이었다. 히스비아군이 해안가에 상륙하고, 본보기를 보인다는 의미로 몇 개의 도시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풍문으로만 들었던 소식이었다. 달리아 역시 히스비아군에게 짓밟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지만 도륙을 작당하고 짓밟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가까워질수록 달리아의 표정은 더욱 가라앉았다. 혈흔도, 시체도 남지 않은 곳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새까만 골격과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뿐이었다.
“곧 해가 질 거야. 오늘은 여기서 자릴 잡아야 해.”
“하지만 성한 건물이 없는걸?”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연히 노숙이지.”
시클리아멘의 타박을 뒤로하고, 레모타가 슬금슬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을 길게 뺄 필요도 없었다. 거의 모든 건물들이 본래의 형체를 알 수 없도록 부서진 상태였다. 굳이 뒤꿈치를 들지 않아도 멀리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 자체가 그리 넓은 것 같지도 않았다. 달리아는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시클리아멘의 말대로 이곳은 죽어 버린 마을이었다. 짐승조차 살 수 없을 만큼 척박하고 온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