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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인 홍콩 (Love in Hong Kong)
1화
프롤로그
“네 시간 후에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평일 오전, 꽤 이른 시간의 인천공항은 한산했다.
저마다 커다란 캐리어 한가득 짐을 부치고 있는 여행객들 사이로, 휴대전화만을 손에 쥔 진헌이 넥타이를 풀었다.
“내일 자 오후 비행기 예약해 두겠습니다.”
진헌의 옆에서 그를 예의 주시하던 민성이 입을 열었다. 민성은 무표정한 진헌의 얼굴을 힐끗 훔치며 그가 말없이 건네는 넥타이를 받았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새 넥타이를 넘겨주었다.
“휴.”
진헌은 하얀 와이셔츠 칼라를 올리고 민성에게 받은 네이비색의 넥타이를 매었다. 이 넥타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진헌은 알고 있었다.
흐트러지지 않도록 깔끔하게 올린 머리와 먼지 한 톨 붙어 있지 않은 고급 양복, 그리고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심어 주는 솔리드 타입의 타이는 까다로운 이번 계약을 의미하기도 했다.
“다녀오십시오.”
“네.”
민성은 진헌에게 깔끔하고 반듯한 서류 가방을 건넸다. 진헌이 가지고 떠난 짐은 그 가방, 단 하나였다.
* * *
“여권과 바우처 주시겠습니까?”
“여기요.”
“부치실 짐은 있으신가요?”
“네.”
같은 시각.
혜라는 항공사 티켓팅 부스에서 10kg짜리 캐리어 1개와 백팩 1개를 벗어 내었다.
“일등석 왼쪽 창가 자리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좋죠.”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 발랄하게 끝이 말려 올라간 C컬 단발머리, 커다란 쥐가 그려져 있는 캐주얼한 보세 후드티에 청바지.
혜라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보다 몇십 배는 비싼, 100만 원이 훌쩍 넘는 퍼스트 클래스 편도 티켓을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
“좋아. 완벽해.”
그녀는 크게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어깨에 지고 있던 커다란 짐마저 부쳐 버린 그녀는 홀가분한 차림으로 공항 게이트로 걸어 들어갔다.
혜라가 한국에 남겨 놓은 짐은, 단 하나도 없었다.
1. 연착(Delay)
“죄송합니다. 고객님. 갑작스러운 홍콩의 기후변화로 인해 출발 예정 시간보다 조금 지연될 것 같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일등석 라운지로 고객님을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단정하게 머리를 올린 승무원이 혜라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네.”
격식 차린 승무원의 대우가 영 어색한 기분에 혜라는 대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 그녀의 안내에 따라 걸어 나갔다. 승무원의 뒤를 따라 라운지로 향하는 동안 혜라의 눈엔 번쩍번쩍한 수많은 면세점이 보였다.
액세서리가 가득 있는 유명 브랜드숍에서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휑한 목 언저리를 만지작댔다.
“라운지에 기내 면세 책자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승무원은 그녀의 몸짓을 놓치지 않고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혜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우와.”
마침내 라운지에 도착한 혜라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뱉었다. 일등석 라운지는 마치 고급 호텔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아, 네. 괜찮아요.”
혜라가 대답하자 승무원은 바르고 곧게 고개를 숙인 후 라운지 로비를 빠져나갔다. 그녀의 뒤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뚝 서 있던 혜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라운지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 정말 대박이다!”
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혜라의 입꼬리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다다다 종종대는 걸음으로 그녀는 라운지 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을 걸을 때마다 혜라의 싸구려 운동화에서 마찰음이 끼익하고 났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힌 진헌이 라운지에 마련된 바에서 익숙하게 보드카를 크리스털 컵에 따르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단정한 차림의 주방장이 다가왔다.
“과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과일은 괜찮습니다. 치즈 있습니까?”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진헌의 대답을 듣고서야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제자리로 돌아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연착으로 일정에 차질이 생겨 버렸다. 진헌은 단정하게 매어 두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한 손엔 보드카를, 다른 손엔 민성이 챙겨 준 서류 가방을 들고서 그는 고급스러운 검정 가죽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네가 그 결혼 없이 언제까지 버텨 낼 수 있는지 지켜보마.’
귓가에 이 회장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러 언론과 대중들은 진헌이 기획 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선진백화점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명품 부문 3년 연속 1위의 상위 1%를 위한 프리미엄 기업.
백화점 시장에서 탄탄한 재무구조로 지속 가능성 지수에서 독보적인 그룹.
국내의 면세점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많은 브랜드를 보유한 백화점.
그리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 해성건설 막내딸과의 혼담으로 요즘 주가가 수직 상승 중인 코스닥 상장 그룹.
“실례하겠습니다.”
“아, 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진헌이 뒤늦게 남자를 의식했다.
여러 종류의 치즈가 보기 좋게 세팅된 하얀 접시를 진헌의 앞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주방장이 말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진헌은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대답했다.
남자가 돌아서자 진헌은 휴대전화를 들어 민성에게 한 두 시간 정도 연착될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민성은 가타부타 말없이 담백한 답장을 보내왔다.
「미팅 시간 재조정하겠습니다.」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비서실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민성이였다. 워커홀릭이라 하면 진헌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처지였지만, 선진그룹을 생각하는 충성심을 따지자면 민성을 따라가진 못할 일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진헌이 고개를 돌렸다.
통 유리창 너머로 이륙을 대기 중이던 비행기가 활주로를 대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조용했던 진헌의 휴식도 끝이 났다.
“여기 정말 대박이다!”
* * *
라운지를 슥 둘러본 혜라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바리스타가 주문을 받아 직접 커피를 내려 주는 디저트 코너와 와인과 양주가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바(bar).
그 옆으론 과일과 주스, 그리고 간단한 브런치가 가능하도록 뷔페식으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방긋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훈남 주방장이 상시 대기 중이라니!
혜라는 남자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뇨. 잠깐 앉아 있으려고요.”
“휴게실은 왼쪽에 있습니다.”
“감사해요.”
주방장은 친절하게 안내한 뒤 자리로 돌아갔다. 혜라는 그의 말대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푹신한 고급 소파와 유리 테이블이 마련된 넓은 휴게실에는 안마의자와 다리를 펴고 누울 수 있는 침대형 소파도 마련되어 있었다.
라운지를 한참이나 깔깔거리며 구경하던 혜라가 앉아서 쉴 만한 자리를 찾았다. 그제야 몹시 짜증이 나 보이는 남자의 뒤통수가 봉긋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이 있었구나…….”
말을 뱉어 놓고 혜라는 아차 싶었다. 그냥 속으로 말할 것을, 하고 말이다.
남자가 어깨를 움찔거리는 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듯 보였다. 혜라는 괜히 민망해져 삐죽거리는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삑. 삑.
그녀의 운동화는 유난히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에 적응을 못 했는지 삑삑 고무 마찰음을 차지게 내고 있었다.
기분 나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다가올수록 진헌의 눈썹이 꿈틀꿈틀했다.
제발, 절대로 저 여자의 소리에 방해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언제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아하하. 저 여기 좀 앉을게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혜라가 진헌을 마주 보고 소파에 앉았다.
이 많고 많은 의자와 소파 중에 왜 하필, 굳이 자신의 앞에 앉는 것인지. 진헌은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
그의 눈썹이 더욱 꿈틀거린 건, 그 어떤 긍정의 표시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이미 소파와 한 몸인 양 아주 편한 자세로 옆에 있던 잡지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었다.
1화
프롤로그
“네 시간 후에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평일 오전, 꽤 이른 시간의 인천공항은 한산했다.
저마다 커다란 캐리어 한가득 짐을 부치고 있는 여행객들 사이로, 휴대전화만을 손에 쥔 진헌이 넥타이를 풀었다.
“내일 자 오후 비행기 예약해 두겠습니다.”
진헌의 옆에서 그를 예의 주시하던 민성이 입을 열었다. 민성은 무표정한 진헌의 얼굴을 힐끗 훔치며 그가 말없이 건네는 넥타이를 받았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새 넥타이를 넘겨주었다.
“휴.”
진헌은 하얀 와이셔츠 칼라를 올리고 민성에게 받은 네이비색의 넥타이를 매었다. 이 넥타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진헌은 알고 있었다.
흐트러지지 않도록 깔끔하게 올린 머리와 먼지 한 톨 붙어 있지 않은 고급 양복, 그리고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심어 주는 솔리드 타입의 타이는 까다로운 이번 계약을 의미하기도 했다.
“다녀오십시오.”
“네.”
민성은 진헌에게 깔끔하고 반듯한 서류 가방을 건넸다. 진헌이 가지고 떠난 짐은 그 가방, 단 하나였다.
“여권과 바우처 주시겠습니까?”
“여기요.”
“부치실 짐은 있으신가요?”
“네.”
같은 시각.
혜라는 항공사 티켓팅 부스에서 10kg짜리 캐리어 1개와 백팩 1개를 벗어 내었다.
“일등석 왼쪽 창가 자리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좋죠.”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 발랄하게 끝이 말려 올라간 C컬 단발머리, 커다란 쥐가 그려져 있는 캐주얼한 보세 후드티에 청바지.
혜라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보다 몇십 배는 비싼, 100만 원이 훌쩍 넘는 퍼스트 클래스 편도 티켓을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
“좋아. 완벽해.”
그녀는 크게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어깨에 지고 있던 커다란 짐마저 부쳐 버린 그녀는 홀가분한 차림으로 공항 게이트로 걸어 들어갔다.
혜라가 한국에 남겨 놓은 짐은, 단 하나도 없었다.
1. 연착(Delay)
“죄송합니다. 고객님. 갑작스러운 홍콩의 기후변화로 인해 출발 예정 시간보다 조금 지연될 것 같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일등석 라운지로 고객님을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단정하게 머리를 올린 승무원이 혜라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네.”
격식 차린 승무원의 대우가 영 어색한 기분에 혜라는 대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 그녀의 안내에 따라 걸어 나갔다. 승무원의 뒤를 따라 라운지로 향하는 동안 혜라의 눈엔 번쩍번쩍한 수많은 면세점이 보였다.
액세서리가 가득 있는 유명 브랜드숍에서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휑한 목 언저리를 만지작댔다.
“라운지에 기내 면세 책자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승무원은 그녀의 몸짓을 놓치지 않고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혜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우와.”
마침내 라운지에 도착한 혜라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뱉었다. 일등석 라운지는 마치 고급 호텔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아, 네. 괜찮아요.”
혜라가 대답하자 승무원은 바르고 곧게 고개를 숙인 후 라운지 로비를 빠져나갔다. 그녀의 뒤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뚝 서 있던 혜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라운지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 정말 대박이다!”
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혜라의 입꼬리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다다다 종종대는 걸음으로 그녀는 라운지 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을 걸을 때마다 혜라의 싸구려 운동화에서 마찰음이 끼익하고 났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힌 진헌이 라운지에 마련된 바에서 익숙하게 보드카를 크리스털 컵에 따르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단정한 차림의 주방장이 다가왔다.
“과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과일은 괜찮습니다. 치즈 있습니까?”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진헌의 대답을 듣고서야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제자리로 돌아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연착으로 일정에 차질이 생겨 버렸다. 진헌은 단정하게 매어 두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한 손엔 보드카를, 다른 손엔 민성이 챙겨 준 서류 가방을 들고서 그는 고급스러운 검정 가죽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네가 그 결혼 없이 언제까지 버텨 낼 수 있는지 지켜보마.’
귓가에 이 회장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러 언론과 대중들은 진헌이 기획 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선진백화점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명품 부문 3년 연속 1위의 상위 1%를 위한 프리미엄 기업.
백화점 시장에서 탄탄한 재무구조로 지속 가능성 지수에서 독보적인 그룹.
국내의 면세점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많은 브랜드를 보유한 백화점.
그리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 해성건설 막내딸과의 혼담으로 요즘 주가가 수직 상승 중인 코스닥 상장 그룹.
“실례하겠습니다.”
“아, 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진헌이 뒤늦게 남자를 의식했다.
여러 종류의 치즈가 보기 좋게 세팅된 하얀 접시를 진헌의 앞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주방장이 말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진헌은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대답했다.
남자가 돌아서자 진헌은 휴대전화를 들어 민성에게 한 두 시간 정도 연착될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민성은 가타부타 말없이 담백한 답장을 보내왔다.
「미팅 시간 재조정하겠습니다.」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비서실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민성이였다. 워커홀릭이라 하면 진헌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처지였지만, 선진그룹을 생각하는 충성심을 따지자면 민성을 따라가진 못할 일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진헌이 고개를 돌렸다.
통 유리창 너머로 이륙을 대기 중이던 비행기가 활주로를 대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조용했던 진헌의 휴식도 끝이 났다.
“여기 정말 대박이다!”
라운지를 슥 둘러본 혜라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바리스타가 주문을 받아 직접 커피를 내려 주는 디저트 코너와 와인과 양주가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바(bar).
그 옆으론 과일과 주스, 그리고 간단한 브런치가 가능하도록 뷔페식으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방긋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훈남 주방장이 상시 대기 중이라니!
혜라는 남자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뇨. 잠깐 앉아 있으려고요.”
“휴게실은 왼쪽에 있습니다.”
“감사해요.”
주방장은 친절하게 안내한 뒤 자리로 돌아갔다. 혜라는 그의 말대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푹신한 고급 소파와 유리 테이블이 마련된 넓은 휴게실에는 안마의자와 다리를 펴고 누울 수 있는 침대형 소파도 마련되어 있었다.
라운지를 한참이나 깔깔거리며 구경하던 혜라가 앉아서 쉴 만한 자리를 찾았다. 그제야 몹시 짜증이 나 보이는 남자의 뒤통수가 봉긋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이 있었구나…….”
말을 뱉어 놓고 혜라는 아차 싶었다. 그냥 속으로 말할 것을, 하고 말이다.
남자가 어깨를 움찔거리는 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듯 보였다. 혜라는 괜히 민망해져 삐죽거리는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삑. 삑.
그녀의 운동화는 유난히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에 적응을 못 했는지 삑삑 고무 마찰음을 차지게 내고 있었다.
기분 나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다가올수록 진헌의 눈썹이 꿈틀꿈틀했다.
제발, 절대로 저 여자의 소리에 방해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언제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아하하. 저 여기 좀 앉을게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혜라가 진헌을 마주 보고 소파에 앉았다.
이 많고 많은 의자와 소파 중에 왜 하필, 굳이 자신의 앞에 앉는 것인지. 진헌은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
그의 눈썹이 더욱 꿈틀거린 건, 그 어떤 긍정의 표시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이미 소파와 한 몸인 양 아주 편한 자세로 옆에 있던 잡지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