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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바스락 착. 착.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한 진헌의 청각은 혜라의 사소한 소리에도 곤두섰다.
잡지의 종이가 이리도 얇고 팔랑거리는 재질이었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라운지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진헌은 보고 있던 회사 서류를 테이블 위로 던져 놓고 보드카 잔을 집어 들었다.
새하얀 피부, 삐죽 말린 단발머리, 앳된 얼굴.
제 몸보다 커 보이는 후드티에 낡은 청바지와 유아용 삑삑이 운동화 같은 싸구려 신발.
한눈에 보아도 해외여행을 처음 가 보는 티가 팍팍 나는 학생이었다.
‘마일리지인가.’
진헌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코노미 좌석에서 비즈니스 좌석으로는 그럴 만하다. 하지만 일등석까지 마일리지로 업그레이드를 가능케 하다니.
가격이 비싸질수록 수요가 증가하는 특정 재화가 있다.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심리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이를 베블런 효과라 부른다.
경영자의 입장에서 항공사의 퍼스트 클래스, 일등석이야말로 베블런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는 재화라고 진헌은 생각했다.
“으흠, 이거 예쁘다.”
책자를 보며 중얼거리는 혜라를 빤히 쳐다보던 진헌이 눈을 감고 머리를 젖혀 소파 등받이에 기대었다.
사람들은 비행시간이 똑같아도 가격은 몇 배가 차이 나는 일등석을 원한다.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단 몇 시간, 이코노미석의 고객과는 확연히 다른 대우를 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등석만을 위한 라운지도 있는 것이고, 일등석만을 위한 티켓팅 라인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차이의 대우가 무색하도록 이렇게 마일리지를 뿌려 대다니…….
“흠.”
진헌은 항공사의 운영 방침이 영 못마땅하여 낮은 신음을 토해 내었다.
잠시 후,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또각거리는 승무원의 구두 소리가 다가왔다.
그녀가 콜 버튼을 눌러 지상 승무원을 부른 것 같았지만 진헌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깜박 잠이 들었다.
* * *
“편안한 비행 되십시오.”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승무원을 향해 혜라는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운지에서의 감동은 항공기 탑승에서도 이어졌다.
일등석만을 위한 프리미엄 좌석이라니.
그녀가 제일 편하다고 생각해 왔던 찜질방 안마의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안락하고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좌석이었다.
혜라는 괜히 다리를 쭉 펴 보기도 하고 팔을 양옆으로 들어 휘저어 보기도 했다. 그런데도 발끝은 앞좌석에 닿지 않았고 쭉 뻗은 손가락 끝은 아무런 방해 없이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정말 완벽하다.”
낮게 읊조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다만 누가 보아도 ‘난 이런 고급스러운 비행이 처음이에요.’라는 티가 팍팍 나는 행동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은 있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아.”
진헌의 불편한 눈빛을 느낀 승무원이 다가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진헌이 혜라의 뒤통수에서 시선을 거뒀다.
“귀마개랑 안대 부탁합니다.”
비행은 순조롭고, 평온했다. 일등석엔 단 두 명만을 태우고 있었다.
진헌은 슬쩍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비행기 연착 탓에 공을 많이 들였던 약속 시각은 이미 지나 있었다.
이제 한 시간 정도 후면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할 터였다. 원래 스케줄대로라면 미팅 준비에 정신없는 비행이 되었겠지만 연착으로 인해 진헌에겐 뜻밖의 휴식 시간이 생긴 셈이었다.
관광이라도 해야 할까. 아니면 쇼핑이라도 해야 하나.
시답지 않은 생각에 진헌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는 일 때문에 해외 출장이 잦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가 미팅 장소와 호텔을 벗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진헌은 좌석에 비치되어 있던 책자를 꺼내 들었다. 기내 면세 물품들이 한 권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 기내에서는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 다양한 면세품을 일반 면세점보다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때마침 조용한 기내 안에 낭랑한 목소리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 잠시 후, 면세품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오니 구매를 원하시는 손님께서는 저희 면세품 판매대가 지나갈 때 구매하시길 바랍니다. 면세품 구매 시 지불할 수 있는 화폐는 한국 원, 미국 달러, 홍콩 달러, 그리고 신용카드입니다. 감사합니다.
본격적인 면세 판매가 시작되기 전, 일등석을 담당하고 있는 승무원이 피켓을 들고 한 바퀴 돌며 예고 사인을 주었다. 진헌이 면세품 책자를 성의 없이 넘겨볼 때였다. 그의 대각선 앞에 앉아있던 혜라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혜라의 손짓을 본 승무원이 재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당황스러운 승무원의 행동에 혜라는 몸 둘 바를 모르며 쩔쩔맸지만, 그녀는 단아한 웃음과 함께 상냥하게 말했다.
“지상 승무원에게서 문의 주셨다고 안내받았습니다. 말씀해 주신 상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 준비해 드릴까요?”
“아, 네. 지금 주세요.”
승무원은 갤리(galley)로 들어가 커튼을 쳤다. 이윽고 갤리를 나온 그녀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금빛 상자가 들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혜라는 달뜬 표정으로 상자를 받았다.
“마키토사에서 저희 항공사 고객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그라데이션 타입의 체인 진주 목걸이입니다. 이 제품은 저희 항공 기내 면세 한정품입니다.”
승무원의 친절한 설명을 받으며 혜라는 달칵하고 상자를 열었다. 골드 체인에 심플하게 배치된 진주가 클래식하면서 세련됐다. 참 예뻤다. 고급스럽고, 아름다웠다.
혜라는 휑하니 비어 있는 제 목 언저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착용 도와 드릴까요?”
“아, 아니요.”
입고 있는 후줄근한 후드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걸이였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과도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 혜라는 생각했다. 그녀는 잠시 넋 놓고 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승무원을 향해 말했다.
“결제는 신용카드로 할게요.”
“네. US 달러 1,150입니다. 결제 도와 드리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카드를 내밀고 결제를 하는 혜라의 뒤통수를 지켜보던 진헌의 눈썹이 묘하게 올라갔다.
1,150달러. 한화로 120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이었다.
2. 우연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한 진헌은 출국장을 나섰다. 짐이라곤 서류 가방 하나뿐인지라 그의 출국 수속은 매우 빠르게 처리되었다.
공항을 나서자 진헌의 이름이 적힌 작은 피켓을 들고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네. 오랜만입니다.”
“모시겠습니다.”
그는 리무진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진헌은 자연스럽게 리무진에 올라탔다.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글쎄요. 계획에 조금 차질이 생겼습니다.”
“그렇군요.”
단정한 정장 차림의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곤 부드럽게 리무진을 출발시켰다.
한적한 도로를 얼마나 달렸을까. 홍콩 특유의 잿빛 건물과 화려한 네온사인이 저녁 노을빛에 물들어 이채로운 모습으로 차창 밖을 지나고 있었다.
리무진의 도착지는 홍콩의 랜드마크라 해도 과언이 아닌 페닌슐라 호텔이었다. 커다란 분수대를 지나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리무진이 정차했다. 진헌은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최고급 호텔의 로비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입구에서부터 한국인 매니저가 나와 정중한 모습으로 진헌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홍콩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호텔이었다. 관광지 소개 책자에서 절대 빠지는 일이 없는 침사추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고풍스러운 영국 전통의 인테리어가 현재까지 남아 품격을 더하고 있는 곳이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압도될 듯 웅장한 성(城)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곳을 진헌은 좋아했다.
“김 실장님께 미리 전화받았습니다. 귀국 일정은 아직 미정이시라고요.”
홍콩으로 출장을 올 때면 그는 늘 이 호텔에서 묵었다. 별다른 관광 없이 일만 하고 돌아오는 진헌을 위한 민성의 작은 배려였다.
편안하고, 고급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굳이 밖으로 나서 관광을 하지 않아도 홍콩 침사추이의 시티뷰와 홍콩섬의 하버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이 매우 좋은 호텔이었다.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사실 김 실장님께서, 늘 예약하셨던 27층 로얄 스위트룸을 말씀하셨는데…….”
매니저의 곤란한 목소리에 진헌은 출국 전 사무실에서 민성이 출장 스케줄 체크 중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들었습니다. 이미 예약이 되어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26층 일반 스위트룸 괜찮으시겠습니까?”
“할 수 없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바스락 착. 착.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한 진헌의 청각은 혜라의 사소한 소리에도 곤두섰다.
잡지의 종이가 이리도 얇고 팔랑거리는 재질이었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라운지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진헌은 보고 있던 회사 서류를 테이블 위로 던져 놓고 보드카 잔을 집어 들었다.
새하얀 피부, 삐죽 말린 단발머리, 앳된 얼굴.
제 몸보다 커 보이는 후드티에 낡은 청바지와 유아용 삑삑이 운동화 같은 싸구려 신발.
한눈에 보아도 해외여행을 처음 가 보는 티가 팍팍 나는 학생이었다.
‘마일리지인가.’
진헌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코노미 좌석에서 비즈니스 좌석으로는 그럴 만하다. 하지만 일등석까지 마일리지로 업그레이드를 가능케 하다니.
가격이 비싸질수록 수요가 증가하는 특정 재화가 있다.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심리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이를 베블런 효과라 부른다.
경영자의 입장에서 항공사의 퍼스트 클래스, 일등석이야말로 베블런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는 재화라고 진헌은 생각했다.
“으흠, 이거 예쁘다.”
책자를 보며 중얼거리는 혜라를 빤히 쳐다보던 진헌이 눈을 감고 머리를 젖혀 소파 등받이에 기대었다.
사람들은 비행시간이 똑같아도 가격은 몇 배가 차이 나는 일등석을 원한다.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단 몇 시간, 이코노미석의 고객과는 확연히 다른 대우를 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등석만을 위한 라운지도 있는 것이고, 일등석만을 위한 티켓팅 라인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차이의 대우가 무색하도록 이렇게 마일리지를 뿌려 대다니…….
“흠.”
진헌은 항공사의 운영 방침이 영 못마땅하여 낮은 신음을 토해 내었다.
잠시 후,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또각거리는 승무원의 구두 소리가 다가왔다.
그녀가 콜 버튼을 눌러 지상 승무원을 부른 것 같았지만 진헌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깜박 잠이 들었다.
“편안한 비행 되십시오.”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승무원을 향해 혜라는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운지에서의 감동은 항공기 탑승에서도 이어졌다.
일등석만을 위한 프리미엄 좌석이라니.
그녀가 제일 편하다고 생각해 왔던 찜질방 안마의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안락하고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좌석이었다.
혜라는 괜히 다리를 쭉 펴 보기도 하고 팔을 양옆으로 들어 휘저어 보기도 했다. 그런데도 발끝은 앞좌석에 닿지 않았고 쭉 뻗은 손가락 끝은 아무런 방해 없이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정말 완벽하다.”
낮게 읊조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다만 누가 보아도 ‘난 이런 고급스러운 비행이 처음이에요.’라는 티가 팍팍 나는 행동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은 있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아.”
진헌의 불편한 눈빛을 느낀 승무원이 다가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진헌이 혜라의 뒤통수에서 시선을 거뒀다.
“귀마개랑 안대 부탁합니다.”
비행은 순조롭고, 평온했다. 일등석엔 단 두 명만을 태우고 있었다.
진헌은 슬쩍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비행기 연착 탓에 공을 많이 들였던 약속 시각은 이미 지나 있었다.
이제 한 시간 정도 후면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할 터였다. 원래 스케줄대로라면 미팅 준비에 정신없는 비행이 되었겠지만 연착으로 인해 진헌에겐 뜻밖의 휴식 시간이 생긴 셈이었다.
관광이라도 해야 할까. 아니면 쇼핑이라도 해야 하나.
시답지 않은 생각에 진헌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는 일 때문에 해외 출장이 잦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가 미팅 장소와 호텔을 벗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진헌은 좌석에 비치되어 있던 책자를 꺼내 들었다. 기내 면세 물품들이 한 권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 기내에서는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 다양한 면세품을 일반 면세점보다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때마침 조용한 기내 안에 낭랑한 목소리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 잠시 후, 면세품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오니 구매를 원하시는 손님께서는 저희 면세품 판매대가 지나갈 때 구매하시길 바랍니다. 면세품 구매 시 지불할 수 있는 화폐는 한국 원, 미국 달러, 홍콩 달러, 그리고 신용카드입니다. 감사합니다.
본격적인 면세 판매가 시작되기 전, 일등석을 담당하고 있는 승무원이 피켓을 들고 한 바퀴 돌며 예고 사인을 주었다. 진헌이 면세품 책자를 성의 없이 넘겨볼 때였다. 그의 대각선 앞에 앉아있던 혜라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혜라의 손짓을 본 승무원이 재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당황스러운 승무원의 행동에 혜라는 몸 둘 바를 모르며 쩔쩔맸지만, 그녀는 단아한 웃음과 함께 상냥하게 말했다.
“지상 승무원에게서 문의 주셨다고 안내받았습니다. 말씀해 주신 상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 준비해 드릴까요?”
“아, 네. 지금 주세요.”
승무원은 갤리(galley)로 들어가 커튼을 쳤다. 이윽고 갤리를 나온 그녀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금빛 상자가 들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혜라는 달뜬 표정으로 상자를 받았다.
“마키토사에서 저희 항공사 고객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그라데이션 타입의 체인 진주 목걸이입니다. 이 제품은 저희 항공 기내 면세 한정품입니다.”
승무원의 친절한 설명을 받으며 혜라는 달칵하고 상자를 열었다. 골드 체인에 심플하게 배치된 진주가 클래식하면서 세련됐다. 참 예뻤다. 고급스럽고, 아름다웠다.
혜라는 휑하니 비어 있는 제 목 언저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착용 도와 드릴까요?”
“아, 아니요.”
입고 있는 후줄근한 후드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걸이였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과도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 혜라는 생각했다. 그녀는 잠시 넋 놓고 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승무원을 향해 말했다.
“결제는 신용카드로 할게요.”
“네. US 달러 1,150입니다. 결제 도와 드리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카드를 내밀고 결제를 하는 혜라의 뒤통수를 지켜보던 진헌의 눈썹이 묘하게 올라갔다.
1,150달러. 한화로 120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이었다.
2. 우연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한 진헌은 출국장을 나섰다. 짐이라곤 서류 가방 하나뿐인지라 그의 출국 수속은 매우 빠르게 처리되었다.
공항을 나서자 진헌의 이름이 적힌 작은 피켓을 들고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네. 오랜만입니다.”
“모시겠습니다.”
그는 리무진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진헌은 자연스럽게 리무진에 올라탔다.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글쎄요. 계획에 조금 차질이 생겼습니다.”
“그렇군요.”
단정한 정장 차림의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곤 부드럽게 리무진을 출발시켰다.
한적한 도로를 얼마나 달렸을까. 홍콩 특유의 잿빛 건물과 화려한 네온사인이 저녁 노을빛에 물들어 이채로운 모습으로 차창 밖을 지나고 있었다.
리무진의 도착지는 홍콩의 랜드마크라 해도 과언이 아닌 페닌슐라 호텔이었다. 커다란 분수대를 지나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리무진이 정차했다. 진헌은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최고급 호텔의 로비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입구에서부터 한국인 매니저가 나와 정중한 모습으로 진헌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홍콩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호텔이었다. 관광지 소개 책자에서 절대 빠지는 일이 없는 침사추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고풍스러운 영국 전통의 인테리어가 현재까지 남아 품격을 더하고 있는 곳이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압도될 듯 웅장한 성(城)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곳을 진헌은 좋아했다.
“김 실장님께 미리 전화받았습니다. 귀국 일정은 아직 미정이시라고요.”
홍콩으로 출장을 올 때면 그는 늘 이 호텔에서 묵었다. 별다른 관광 없이 일만 하고 돌아오는 진헌을 위한 민성의 작은 배려였다.
편안하고, 고급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굳이 밖으로 나서 관광을 하지 않아도 홍콩 침사추이의 시티뷰와 홍콩섬의 하버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이 매우 좋은 호텔이었다.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사실 김 실장님께서, 늘 예약하셨던 27층 로얄 스위트룸을 말씀하셨는데…….”
매니저의 곤란한 목소리에 진헌은 출국 전 사무실에서 민성이 출장 스케줄 체크 중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들었습니다. 이미 예약이 되어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26층 일반 스위트룸 괜찮으시겠습니까?”
“할 수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