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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모니터를 보며 체크인에 집중하고 있는 매니저에게 진헌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혹시 내일이라도 객실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까?”
사실 진헌은 객실의 등급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일만 하다 돌아가는 곳이기에 잠자는 곳엔 침대와 화장실만 있다면 된다 생각한 그였다.
하지만 꼭대기 층에서 홍콩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마시는 보드카 한 잔에 잠시나마 휴식을 만끽하곤 했기에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로얄 스위트룸이 일주일간 예약되어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전부요?”
“네, 그렇습니다.”
하룻밤에 몇백만 원인 고급 스위트룸에 일주일 동안 묵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아쉽지만 진헌은 잠시 내려 두었던 서류 가방을 집어 들고 26층 스위트룸 키를 챙겼다.

샤워를 하고 나온 혜라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샤워가운을 걸쳤다. 탁 트인 유리창 너머로 절경이라 소문난 홍콩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좋다.”
27층 로얄 스위트(Suite)는 말 그대로 스위트(Sweet)했다.
통 유리창 너머로 낮보다 더 화려한 홍콩의 불빛이 반짝였다. 높은 빌딩 숲을 이루는 불빛들을 직접 보고 있자니 화질 좋은 HDTV를 통해 동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화려한 홍콩의 야경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혜라가 몸을 돌려 접견실로 향했다.
혜라는 고급 가죽 소파의 폭신한 감촉에 몸을 깊이 뉘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스위트룸 고객을 위해 준비되어 있던 비싼 초콜릿 상자를 열었다.
“고생했다, 장혜라.”
네모난 조각 초콜릿을 앙 하고 베어 물었다. 진한 초콜릿 맛이 달큼하게 입 안에 감돌다가 카카오의 씁쓸한 뒷맛을 남길 때 꿀꺽 삼켰다.
한참 입술을 오물오물하던 혜라가 새 초콜릿을 입에 물고 옆에 있던 여행 책자를 집었다.
“페닌슐라 스위트룸은 완료. 다음 코스는…….”

* * *


「레슬리 회장과 오후에 사내에서 뵙는 걸로 다시 스케줄 잡았습니다. 8시 레스토랑 예약했고, 오늘 자로 봐 주셔야 할 결재 파일 메일로 송부합니다.」
문자메시지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깬 진헌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새벽 다섯 시. 한국 시간으론 여섯 시였다. 민성은 아무래도 회사에서 밤을 지새운 것 같았다.
국내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외국 명문 대학원에서 경영을 전공한 민성은 선진백화점에, 특히 진헌의 아버지이자 수장인 이인철 회장과 관련된 모든 것에 충성을 다했다.
그가 유학 중일 때 선진에선 수차례 헤드헌터를 통해 스카우트 제의를 했지만 민성은 그때마다 거절했다.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민성은 선진그룹 신입사원 공채를 통해 말단 사원으로 입사한 것이다.
이 회장이 진헌의 옆에 그를 심어 둔 것도 그의 융통성 없이 강직한 일면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룸서비스 부탁합니다.”
진헌은 들었던 수화기를 내려놓고 욕실로 걸어갔다.
따뜻한 물줄기가 진헌의 등을 따라 흘렀다. 진헌은 부드러운 살결은 아니지만 구릿빛으로 탄탄한 제 피부를 훑어 갔다. 보기 좋게 잡힌 등 근육과 역삼각형으로 떨어지는 날렵한 허리 라인에서 그의 손이 멈췄다.
한눈에 봐도 꽤 큰 자국의 흉터가 있었다. 진헌은 한참이고 그 상처를 어루만졌고 욕실 안은 곧, 뿌연 김으로 가득 채워졌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주문해 두었던 룸서비스가 도착해 있었다. 신선한 과일과 시각과 식감을 두루 자극하는 스시가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보통 룸서비스로는 브런치가 일반적이지만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진헌을 위해 특별히 서비스된 음식이었다.
“밥값은 하고 가야겠군.”
진헌은 민성의 특별 부탁이었음을 짐작했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발휘되는 그의 철저함에 종종 소름이 돋기도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효과를 봤다. 무표정하기만 했던 진헌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최고급 호텔의 특급 주방장이 신경 써서 내놓은 스시는 그의 입맛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맛있는 음식이 주는 좋은 기분이 입 안에서 퍼졌다.
그래서였을까, 마지막 스시를 입 안에 넣고 천천히 음미하던 진헌은 출장 중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외출을 결심했다.

혜라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면서도 시선은 여행 안내 책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움직이기 편한 박스티에 스키니진을 입고 낮은 단화를 신어 단단히 무장했다.
오른손엔 책을 꼭 붙들고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혜라가 문 밖으로 나섰다.
“바쁘다, 바뻐.”
승강기 앞에서 버튼을 누르면서도 그녀는 연신 책장을 넘겼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올라온 승강기에 올라탄 혜라가 얼굴 앞으로 바짝 책을 당겨 홍콩의 유서 깊은 애프터눈 티에 대한 소개 글을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영향을 받은 홍콩의 문화로 상류사회의 한 문화로 발전된 애프터눈 티는…….”
그 순간 승강기는 땡. 소리와 함께 26층에서 멈춰 섰다.

예상치 못하게 일정이 길어진 진헌은 챙겨 오지 못한 생필품을 사러 백화점에 갈 요량이었다. 승강기 앞에서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26층을 지나친 계기판의 숫자가 27층으로 향했다.
“흠.”
멈춰 있는 승강기를 보며 그가 묵고자 했던 로얄 스위트룸의 선객이 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짧은 순간 다음 승강기를 탈까 싶었지만, 이내 괜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던 진헌이 버튼을 눌렀다. 27층에 머물러 있던 숫자는 금세 26층에 다다랐다.
곧이어 문이 열렸고 혜라가 탄 승강기 안으로 지나치게 단정한 정장 차림의 진헌이 올라탔다.
“이거 꼭 먹어야겠네.”
선객의 옆에 자연스럽게 선 진헌의 귓가에 익숙한 한국말이 들렸다. 그제야 그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그녀를 힐끔거렸다.
제 어깨를 웃도는 키, 발랄하게 삐죽 접힌 단발머리, 낭랑한 목소리, 후줄근한 옷차림.
뭘 먹겠다는 건지, 그녀가 전투적으로 뒤적거리는 책 겉표지엔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여행지, 럭셔리 홍콩 여행 편’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
그녀를 힐끔거리던 진헌의 시선이 혜라와 마주친 건 그 순간이었다.
“어제 비행기!”
“……마일리지?”
뱉어 놓고 아차 싶었던 진헌이 정면으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하지만 혜라는 먼 타국에서 만난 한국인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안면 있는 남자였다는 사실에 몹시 들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 호텔에서 묵으셔요?”
작은 승강기 안의 짧은 적막. 이상하리만큼 천천히 내려가는 건 기분 탓일까.
대놓고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진헌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네.”
“우와. 신기하네요. 여기서 또 뵈니까 너무 반가워요. 혼자 여행 오신 거예요? 얼마 동안이요?”
말 섞기를 꺼려 하는 진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혜라는 방긋방긋 웃으며 신난 목소리로 종알종알 잘도 물어보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계속 알은척을 할 것 같단 생각에 진헌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계기판의 숫자가 L층으로 바뀌길 기다렸다.

‘죄송합니다. 로얄 스위트룸이 일주일간 예약되어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전부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때 진헌은 순간적으로 어제 호텔 매니저와의 대화가 기억났다. 그녀가 내려온 27층에는 단 하나의 객실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여행 중이십니까?”
“네! 저도 혼자 여행 왔어요, 여기저기 다녀 보려고요. 지금은 애프터눈 티를…….”
멈출 생각 없는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를 듣던 진헌이 툭 말을 잘랐다.
“일주일간?”
“어? 어떻게 아셨어요? 네, 일주일간 여기서 지내요.”
혜라의 대답을 끝으로 승강기는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로비 층에 도착했고 스르륵 문이 열렸다.
토끼처럼 깡충 뛰어내린 혜라의 뒤로 묘한 표정의 진헌이 따라 내렸다. 웃으며 ‘다음에 봬요.’ 말하곤 뒤돌아 호텔 로비를 빠져나가는 그녀를 진헌은 잠시 동안 멍하게 바라보았다.
“하!”
누가 다음에 보자고 허락이나 했나.
제 마음대로 만남을 기약한 혜라의 뒷모습이 어느새 호텔 밖으로 보이자 허탈한 웃음이 진헌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진헌이 밖으로 나선 이유는 한 가지였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과 미팅 때 입을 새 셔츠를 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진헌에게 한 가지의 이유가 더 생겨 버렸다.
“로또인가.”
호기심.
전자 기기가 아닌 사람에게 느껴 보는, 실로 오랜만의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