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뗄 수 없는
1화
Prologue


[5분 줄게, 나와.]

“휴…….”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던 윤채가 입술을 깨물며 비집고 나오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무슨 일 있어?”
옆에 있던 친구의 질문에 순식간에 모든 이목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응? 그게…….”
오랜만에 참석한 대학 동기 모임인데 오자마자 일어나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해진 윤채가 잠시 망설였다.

[내가 들어가?]

그녀의 망설임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또다시 메시지가 왔다. 손에 쥐어진 휴대폰이 보란 듯 화면을 밝히며 메시지를 띄우자 그것을 본 윤채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쩌지? 오늘 제사가 있는데 깜빡했네. 엄마가 자꾸 언제 오냐고 연락해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다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처음에는 무어라 핀잔을 주려던 친구들이 미안함을 가득 담은 윤채의 얼굴을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위이잉.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 잠깐의 시간에도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전화가 걸려 온 모양인지 꽤나 길게 울려 대자 그것을 본 친구들이 그녀보다 더 급한 몸짓으로 얼른 가 보라며 손을 흔들었다.
“미안, 다음에 보자.”
그런 상황이 못내 속상하고 화가 난 윤채가 거듭 사과를 하며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밖을 나오자 정말 안으로 들어올 생각이었는지 주원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어디 가?”
재빨리 그에게 다가간 윤채가 날카롭게 쏘아보며 조수석에 오르자 차에서 내리려 했던 주원도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왜 이렇게 늦어?”
단단히 화가 난 주원이 그녀를 향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서주원, 진짜 이럴래?”
이번만큼은 윤채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평소라면 고분고분하게 넘길 그녀였지만 더 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 반복될지 모를 이 싸움을 더는 이어 갈 자신이 없었다.
“정윤채.”
“왜.”
화가 많이 났는지 한껏 낮아진 그의 음성에 잠시 움찔대던 윤채가 지지 않으려 앙칼지게 대꾸했다.
“하…….”
주원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그만의 습관이었다. 마구잡이로 화를 쏟아 내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숨을 고르며 누르는 습관. 그러나 오늘은 윤채도 참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화를 누르고 있는 주원의 행동이 무색해질 만큼 쉬지 않고 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쏟아 냈다.
“나, 너 이러는 거 정말 싫어. 너 때문에 졸업하고 동창회 한 번을 제대로 못 갔어, 그럼 오늘만큼은 그냥 눈감아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데?”
“지금 네가 그런 말 할 상황이라고 생각해?”
화를 참는데 실패한 주원이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그녀를 마주했다.
서주원, 그가 불같은 성격이라면 윤채는 주로 그런 그를 받아 주는 편이었다. 단짝 친구인 두 사람의 어머니 덕에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그녀의 옆집으로 이사를 온 주원은 마치 처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낯설었던 첫 만남을 뒤로하고 금세 허물없이 지내게 된 두 사람은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혹은 친한 친구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삶에 섞여 들며 곁을 지켰다. 그렇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5년을 지내다 연인 관계로 발전된 것도 어언 5년. 도합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싸우고, 사랑하고, 다시 싸우기를 반복했다. 정말 헤어질 거라 결심하며 주원에게 이별을 고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지만 정신을 차려 보면 언제나 그의 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반복되는 지겨운 싸움에 윤채도 서서히 지쳐 가고 있었다.
“내가 말하지 못할 상황은 또 뭔데?”
“그걸 몰라서 물어?”
주원의 말에 윤채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동창회에 가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하지만 그녀의 입장이나 의견은 무시한 채 자신의 말만 고집하는 주원에게 너무도 화가 났다.
“석민이 오늘 안 왔어. 그리고 그때가 언젠데 아직까지 그래?”
주원은 대학 시절 그녀가 좋다며 장장 2년을 따라다닌 석민을 의식하고 있었다. 비록 주원과 같은 대학을 다니진 않았지만 윤채를 만나기 위해 캠퍼스에 오는 그를 보고도 석민은 줄기차게 그녀를 따라다녔다.
“남자 친구가 있는 걸 알면서도 따라다닌 자식인데 그 속을 어떻게 알아? 너 같으면 여자 친구가 그런 자식이랑 있다는데 마음이 참 편하기도 하겠다.”
비꼬는 주원의 말에 그나마 누그러지려던 윤채의 마음에 다시금 불길이 치솟았다.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대학 동기들이 다 같이 만나는 자리야. 더구나 만날 장소랑 약속 시간까지 너한테 이미 얘기했잖아. 그러면 됐지 이렇게까지 찾아오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
“그러는 넌? 내가 그렇게 싫다는데도 굳이 동창회를 나가려는 이유가 뭔데?”
“그럼 네가 싫다고 하면 동창회고 뭐고 다 가지 말아야 하는 거야? 내 의견 같은 건 상관없이 네가 싫다는 옷, 네가 싫다는 친구, 네가 싫다는 약속은 다 가지도, 하지도 말아야 하는 거냐고. 언제까지 이렇게 네 고집대로만 할 거니? 내가 언제까지 너한테 맞춰 줘야 하는 건데? 나도 이젠 정말 지친단 말이야.”
전에 없이 앙칼진 목소리로 따지던 윤채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기분, 이런 상태에서 더 이상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은 정말 끝을 달리고 있었다. 주원을 사랑하지만 그와 함께할수록 포기해야 하는 부분들도 점차 늘어났다. 서로 조금만 맞춰 주고 이해하면 좋을 텐데 주원과의 관계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늘 맞춰 주고 이해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러는 넌? 지금 네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훑었다. 그가 싫어하는 기장의 짧은 치마와 각선미를 도드라지게 만드는 높은 하이힐, 붉은색 립스틱까지. 주원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던 윤채도 스스로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했던가. 아무리 친한 동기들이라고 해도 편한 모습으로 만나고 싶진 않았다. 사람들 눈에 띄고 싶은 마음은 없어도 최소한 뒤떨어지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의 공을 들였다. 그러다 보니 하필이면 그가 외출할 때는 자제하라던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 있었지만 윤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자의 심리를 알 리 없는 그에게 설명은 곧 변명으로 들릴 테니까.
“그리고 내가 지친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말랬지.”
연이어 들려오는 그 한마디에 지금의 상황은 전적으로 그녀의 잘못이 되었다.
“그래, 내가 미안해.”
결국 사과는 또 그녀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윤채는 반복되는 싸움과 너무도 지치는 감정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녀의 사과에 주원은 이제야 누그러진 얼굴로 윤채에게 손을 뻗었다. 아마 늘 그래 왔듯 싸움의 끝으로 입을 맞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누그러지지 않은 감정에 눈을 감은 윤채는 자신의 옷자락을 꽉 말아 쥐었다. 그러곤 그녀의 예상대로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모든 것을 해탈한 듯 나직한 음성으로 이별을 고했다.
“그런데 우리……, 이제 정말 그만하자.”
그녀의 말을 끝으로 한동안 좁은 공간에 정적이 흘렀다. 그에 윤채가 아무런 말도, 반응도 없는 그를 보기 위해 스르르 눈을 뜨자 눈썹을 삐쭉 올린 채 그녀를 마주한 주원이 보였다.
“하.”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놀란 윤채가 재빨리 몸을 뒤로 물리자 그런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가 뒤늦게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대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윤채, 내가 헤어지자는 말도 함부로 하지 말랬지.”
주원은 헤어지자는 말이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 내뱉어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윤채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와 연인으로서 지낸 5년의 시간을 끊어 내는 일. 아니, 더 나아가 친구로 지낸 5년마저도 끊어 낼 수 있는 이별. 한순간의 감정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쳇바퀴 돌듯 매번 반복되는 지친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 여겼다.
“미안해, 주원아. 널 너무 사랑하는데 그만큼 지쳐.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계속 반복되는 이 싸움에 나도 서서히 지쳐 가. 정말 더 이상은 자신이 없어, 미안해.”
윤채가 큰 눈 가득 눈물방울을 매단 채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마 헤어지자는 말을 한 뒤 이렇게나 진지하게 그녀의 마음을 전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진심이 묻어나는 그녀의 말에 주원의 눈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을 더 마주했다가는 이별을 번복할 것만 같아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흑…….”
그를 너무도 사랑한다. 하지만 서로에게 진전이 없다면 모질게 헤어짐을 고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흐으윽…….”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꾸만 힘주어 다문 잇새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실감 나는 이별에 그와 싸울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아픔이 심장을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