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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바보.”
“뭐?”
뜬금없는 윤채의 말에 영문을 모르는 희주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침울해진 그녀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진짜 바보다, 최희주. 나랑 서주원은 처음부터 친구인 적 없었어.”
“아, 그러네. 말만 친구인 연인이었지.”
뒤늦게 그 뜻을 이해한 희주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술기운에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눈으로 바라보던 윤채가 또다시 작게 웃으며 잔을 채웠다.
“오늘은 네가 불렀으니까 끝까지 책임질 거지? 나, 너만 믿고 마신다?”
“그래, 이 언니가 집까지 편히 모실 테니까 마음껏 마셔.”
희주의 그 말이 얼마나 든든하고 안심이 되던지 윤채는 그나마 잡고 있던 이성을 놓은 채 정신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 그와 함께한 시간은 너무도 길었다. 그 많고 많은 추억에서 벗어나 온전한 그녀만의 인생을 찾기까지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지…….
그러나 언제까지 서로를 잡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제는 정말 주원을 놓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쓰다.”
마음의 씁쓸함이 입 안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털썩.
주원과 헤어진 이후 줄곧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술이 들어가니 몸이 견디질 못했다. 평소의 반도 안 되는 양에도 자꾸만 어지럽고 축 늘어지는 몸을 느끼던 윤채가 결국엔 탁자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어? 얘 진짜 뻗었네.”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억지로 힘을 주며 뜨려고 시도를 해 봤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질 않았다.
“윤채야, 정윤채.”
희주가 부르는 소리도 점점 희미해져 갈 때쯤 너무도 익숙한 주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퇴근할 때까지 붙잡고 있으랬지 언제 이렇게 취할 때까지 마시게 놔두랬어. 얘 이러면 내일 고생한단 말이야.”
“이게 기껏 불러내 주니까 어디서 짜증이야. 내가 윤채처럼 고분고분 네 성질 다 받아 줄 것 같아? 안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던데 어쩌려고 그러냐, 너.”
“휴…….”
나직한 주원의 한숨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분명 머리를 쓸어 넘기며 취해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게 눈에 선했다. 이 와중에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그려지자 가물가물한 정신에도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러자 촉촉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어떻게 할 거야? 네가 데리고 갈 거지?”
따뜻한 감촉이 느껴지고 난 후 희주의 말소리가 들린 것도 같은데 그녀의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


“으음…….”
목이 바짝 말라 왔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조금 더 자고 싶었지만 자꾸만 마르는 입에 더는 참지 못한 윤채가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렸다.
“아……. 머리야.”
흐릿하던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초점을 맞추자 그제야 익숙한 집 안의 구조가 뚜렷이 보였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에도 물을 달라 간절히 외치는 몸의 아우성에 수분을 채우려 힘들게 상체를 일으키던 순간 그녀의 옆에 묵직하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
놀란 마음에 작은 소리를 흘리며 옆으로 시선을 옮기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주원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화해를 했었나?’
잠시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어정쩡하게 앉아 있던 상체를 침대 헤드에 기대자 몸에 둘러져 있던 이불이 내려가며 그녀의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아.”
문득 어제저녁에 들었던 희주와 주원의 대화가 떠오르자 윤채의 몸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주원과 작당하고 모르는 척 그녀를 불러낸 희주에게도 배신감이 솟았지만 그보다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주원을 보니 열이 올라 가쁜 숨이 내쉬어졌다. 더욱이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지금의 상황이 기억나지 않아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직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그에게 손을 뻗은 윤채가 몸에 덮여 있는 이불을 살짝 들춰 보았다.
“하…….”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를 보니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더는 볼 것도 없는 상황에 윤채가 이 모든 사건의 주동자인 주원을 깨우기 시작했다.
“서주원, 일어나 봐.”
“조금만 더 자자.”
태평한 모습으로 도리어 앉아 있는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품으로 당겨 안는 주원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주원은 차가워진 윤채의 맨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며 다시 고른 숨을 내쉬었다.
“지금 잠이 와? 얼른 일어나라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윤채가 그를 밀어 내며 말하자 주원이 얼굴을 비비며 느릿하게 눈을 떴다.
“왜 그래?”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윤채는 뒷목을 잡을 뻔했다.
“이게 뭐야?”
그녀의 질문에 그가 깊은 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뭐가?”
“지금 이 상황 뭐냐고. 이제 이럴 사이 아니잖아, 우리.”
“기억 안 나?”
“당연한 거 아니야?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로 무슨…….”
언성이 높아지며 솟아오르는 화로 인해 숨이 가빠질 때쯤 윤채는 순간적으로 스치는 기억에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네 멋대로 헤어지자고 통보하고는 돌아서서 전화도 안 받고, 진짜 나 미치는 꼴 보려고 그래?’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 왜 자꾸 이래.’

몸에 힘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 비교적 뚜렷해진 윤채의 눈을 보며 그는 이틀 내내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한없이 다정한 손길로 다독이며 안아 주었다.

‘사랑해, 널 너무 사랑해.’

조금의 거짓도 담기지 않은 음성과 따뜻한 그의 품이 여린 마음에 생긴 생채기를 덮어 주고 있었다.

‘거부하려면 지금 해. 더 가면 나도 자제 못 해.’

그의 품에 기대어 차츰 눈이 감겨지던 그때, 순간적으로 겹쳐 오는 입술에 정신을 놓으며 매달리자 그녀를 떼어 낸 주원이 짙어진 눈으로 말했다. 그 경고에도 떨어진 온기가 절박할 정도로 아쉬워 다시금 입을 맞추자 그도 결국 그녀를 받아 주었다.

“내가 널 강제로 어떻게 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눈썹을 삐쭉 올리며 당당하게 말하는 주원의 태도에 윤채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는 어제의 일을 기억해 낸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시치미라도 뗐을 텐데 너무도 뚜렷하게 떠올라 아닌 척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걸 떠나서 우리 헤어졌잖아. 더구나 술 취한 사람한테 이러는 경우가 어디 있어.”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잖아. 그러면 된 거 아니야?”
주원의 말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니, 누가? 누가 돌아왔다는 건데?
윤채가 덤덤히 옷을 꿰어 입는 그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이러면 이럴수록 나한테 실망만 안겨 준다는 걸 왜 몰라? 지금 네 태도를 보면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는 것 같아.”
그녀의 말에 옷을 다 갖춰 입은 주원이 매서운 눈을 하고 다가왔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대체 왜 이래, 정말 나랑 헤어지기라도 할 생각인 거야?”
“너한테 헤어지자고 한 말, 나는 정말 진심이었어.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런 말 쉽게 할 사람 아니잖아, 나.”
“휴…….”
좀 전과 달리 한결 차분해진 윤채의 음성에 그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오늘만큼은 그에게도 화를 누를 시간은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윤채가 이불로 몸을 가리며 입술을 꾹 깨물곤 주원이 입을 열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차마 그와 눈을 맞출 자신은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상태로.
“우리 이렇게 쉽게 헤어질 사이 아니잖아. 그랬다면 진작 끝났겠지.”
“참아 왔으니까……. 힘들어도 사랑한다는 이유로 참고 또 참아 왔으니까 가능했던 거야. 그런데 이젠 아니야.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져 줄 수밖에 없다는 말, 나는 그것도 싫어.”
“왜 그렇게 생각해? 왜 항상 네가 날 더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결국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양보할 수밖에 없어. 늘 그래 왔던 쪽은 나고, 그때마다 내가 느끼는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 알아?”
“휴…….”
큰 눈 가득 눈물방울을 매단 채 그것을 흘려 내지 않으려 고집스레 입술을 깨물고 있는 윤채의 모습에 또다시 한숨을 내쉰 그가 자신과 헤어져 있던 짧은 시간 동안 금세 까칠해진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랬다면 내가 사과할게.”
‘이렇게 순순히 사과할 줄 아는 남자였던가?’
윤채가 자신의 앞에 있는 주원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내가 더 많이 이해하고, 양보하려고 노력할게. 그러니까 나한테서 떠나려고 하지 마, 정윤채.”
윤채는 어쩌면 지금이 그와의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때라고 생각했다. 서로를 너무 사랑하지만 아직은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번 충돌하는 두 사람의 관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