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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월화 1권
1화
서장(序章)
바로 몇 식경 전에 잘 자라 웃으며 인사했던 하녀 아이의 목소리가 피비린내 나는 비명으로 바뀌어 들리던 그날,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던 오라비의 남복(男服)을 입던 그때. 아직 세상 이치를 깨닫는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단꿈이 더 좋을 어린 나이에 수린은 세상이 불타는 것을 보았다.
그날은 온 집 안이 우중충해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터였다. 근래에 조정이 심상치 않다 귀 너머로 들었지만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 주는 이는 없어 그저 그러려니, 어서 빨리 아버지가 기운을 차리시려니 하고 유모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었다.
잠이 들었다 깼지만 그리 긴 시간을 잤던 것은 아님을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이 말해 주었다. 밤을 살라 먹는 소란스러움에 눈을 뜨자 햇빛과는 다른 빛이 수린을 둘러싼 세상을 잡아먹고 있었다. 붉게 너울거리는 빛 그림자에 버무려진 비명 소리가 쭈뼛 뒷덜미에 소름을 세웠다. 수린은 얼른 옆자리에 누워 잠들었던 유모를 찾았다.
“할멈?”
없었다. 수린의 옆에 깔려진 이부자리는 심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 자리에 누웠던 이가 다급히 뛰쳐나간 것임을 말해 주는 양.
“할멈? 할멈!”
단박에 비명 같은 외침이 튀어나왔다. 무슨 일인가. 창호지 문 건너에서 너울너울 붉은 불빛이 춤을 추고 있고 옆자리에 잠들어 있어야 할 이는 보이지 않는다. 밖에서 들려오는 끊이지 않는 비명 소리는 무엇이며 뒷골을 때리는 이 섬뜩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이불을 끌어안고 벽으로 물러나던 수린은 벌컥 문이 열리자 혼절하도록 놀랐다. 벼락처럼 들어선 커다란 그림자에 기겁을 하고 올려다보니 그는 수린의 아비인 민두혼이었다. 들어선 이가 아비라 하여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하얀 명주옷을 입던 아비가 느닷없이 갑옷을 입고 들이닥친 데다 그 갑옷에 피칠갑이 되어 있고 아비의 손에 짐짝처럼 끌려온 이가 바로 자신의 유모였으니 말이다.
“대감! 아니 됩니다!”
“네년의 목을 내 손으로 따야 내 말을 듣겠느냐!”
“대감! 아기씨 연치 이제 겨우 열둘입니다!”
“내가 내 여식의 나이를 몰라 그걸 묻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단 말이냐! 네가 안 하면 내가 하겠다!”
수린은 잠이 덜 깬 말간 눈으로 꿈뻑꿈뻑 아비와 유모를 바라보았다. 아비와 유모가 주고받는 언쟁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식솔들 앞에서 절대 언성을 높이는 일 없던 아비가 어찌 유모를 잡아먹을 듯이 호통을 치는 것이며, 수린과 오라비인 진겸을 키우는 동안 숨소리조차 크게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유모가 무슨 영문으로 아비에게 피를 토하듯 읍소하는 것인가.
민두혼은 유모를 내동댕이치고 수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한 것은 아비의 체구가 워낙에 산처럼 컸기 때문이었다. 허나 민두혼은 수린의 몸짓을 달리 이해한 모양이었다. 단박에 서슬 퍼렇던 눈동자가 흔들렸다.
“…….”
꽉 깨문 아비의 입술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수린은 이불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수린의 눈높이쯤, 아비의 팔꿈치엔 하얀 천들이 걸려 있었다.
옷이다. 잠자리에서 입는 옷. 그리고 사내아이의 옷. 수린이 눈을 깜빡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역정으로 가득했던 민두혼의 얼굴은 회한으로 일그러졌다.
“아버님…….”
그리고 수린이 자신을 불렀을 때 끝내 고목 같던 그의 몸이 무너졌다. 털썩. 어린 딸 앞에 무릎을 꿇고 민두혼은 새 같은 딸의 작은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하나뿐인 고운 딸. 너무 작아 제대로 안아 주지도 못했던 아이다. 칼을 잡고 창을 잡았던 거친 손으로 힘껏 끌어안으면 다치기라도 할까 겁나 쉬이 머리도 쓰다듬지 못하던 딸이었다.
“수린아. 아비를 용서 마라.”
수린은 눈가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그때는 이 아비가 네가 기르는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때 이 아비를 짓밟고 짓밟아라. 그리하여 이 죄가 갚아진다면 말이다. 그리해도 갚아지지 않으면……. 그때는 또 네 집의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러니…… 그러니…….”
수린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세도가의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아비가 하는 말, 아비가 벌컥 열고 들어오느라 활짝 열린 방문 너머로 보이는 불타오르고 있는 집, 피 토하듯 울고 있는 유모.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며 아비가 들고 온 사내아이의 옷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 그런 것.
떨리는 수린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수린은 눈물을 떨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자신을 끌어안은 아비의 팔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내려오는 수린의 손에는 아비가 들고 있던 하얀 사내아이의 옷이 쥐어져 있었다.
수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번 옷을 다잡았다가 아비를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꾹 다문 입술과 그렁하니 맺힌 눈물에 아비는 수린의 마음을 모두 읽었다.
둘 사이에는 그 이상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아비가 거세게 이를 악무는 소리를 내다가 몸을 돌리고 방을 나가 버렸다.
그것이 수린이 마지막으로 본 아비의 모습이었다.
대부관(大府官) 민두혼은 삼대가 황제의 충신이었던 민씨 일가의 장손이었다.
대를 이어 물려받은 부와 세도도 컸지만 민두혼 본인 또한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무장이었기에 그를 따르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민두혼은 번잡한 것을 꺼려 하는 인물이라 부러 세를 늘리거나 부를 쌓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황가에 충성하였으나 아첨하지 않았고, 교언영색을 한 이들을 꺼렸다. 그것이 문제였다.
선대 황제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어린 황제의 등극 이후 극도로 혼란스러운 정국에도 민두혼은 중도를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노도(怒濤) 가운데에 꼿꼿이 서 있으려 하는 배는 침몰을 면할 수 없는 법.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민두혼은 표적이 되기에 가장 쉬운 대상이었다.
어린 황제가 누구의 손을 잡았는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제까지 충신이었던 이의 집에 흙발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가솔들의 목을 베고 대들보에 불을 놓는다면, 그것은 그와 대척점에 있는 이의 손을 황제가 잡았음을 말하는 것이니.
유모는 하염없이 울었다. 하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자신이 곱게 기른 아이가 아비와 오라비의 방패막이로 내던져졌음에야. 눈물이 나는 것은 수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비의 마음은 안다. 허나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고작 열두 살. 그 어떤 말로도 목전에 다가온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라 할 수 없는 어린 나이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옷을 갈아입었지만 도저히 머리까지는 다시 묶을 재간이 없었다. 간신히 곱게 땋은 머리만 풀었을 뿐인데도 더 이상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서 빨리 머리를 어찌해야 하는데. 민두혼의 아들이 산발한 머리를 하고 있으면 저들이 이상하게 여길 터인데. 그렇지만 두려워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눈물이 앞을 가려 뿌옇게 변한 시야에 머리를 묶었던 끈도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흑. 아기씨……. 흐윽.”
흐느끼는 유모의 목소리에 기어코 울음은 터져 버리고 말았다.
“으흑. 할멈. 할멈!”
순식간에 통곡이 된 눈물에 유모는 무릎으로 기어 와 수린을 끌어안았다. 벼락처럼 시커먼 사내들이 들이닥치며 문짝이 우당탕 뜯어져 나간 것은 그다음 순간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민두혼의 아들인 것 같습니다.”
“끌어내!”
목청껏 외치며 사내들은 수린을 꽉 끌어안고 있는 유모를 짐짝처럼 들어 마당에 내동댕이쳤다. 난장판의 와중에 묶여 있지 않고 흐트러진 수린의 머리카락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머지는?”
“반항하는 사내놈들은 다 처리한 모양입니다. 계집들은 곡창에 가둬 두었습니다. 도망간 몇이 있지만 곧 다 잡아들일 겁니다.”
“민두혼과 처는 내뺀 모양이지? 딸년만 챙기고 아들놈은 챙길 틈도 없었던 건가?”
낄낄거리며 주고받는 사내들의 목소리에 속이 메슥거렸다. 할멈이 너무 꽉 끌어안아서 그래. 아버님, 어머니, 오라버니, 무사히 도망가셨구나. 수린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이제 나는 죽는 건가. 죽는다는 건 어떤 거지. 아픈 거겠지. 아프지 않고 끝났으면 좋겠는데.
“그럼 다 끝난 거야?”
“아니, 총대장이 아직 안 왔어.”
“총대장이라는 분께서는 황성에서 아침에 출발하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헌데 총대장의 허락 없이 사내들을 죽였어도 괜찮았던 겁니까?”
“까짓 놈들 어차피 반역자 패거리다. 그리고 ‘분’은 무슨. 총대장이래 봤자 연줄로 한 자리 휘어잡은 어린놈이다. 뒤늦게 와 봐야 이제 다 잡았으면 오라에 엮어 돌아가자는 소리밖에 더 하겠나. 그나저나.”
이죽거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휙 방향을 바꾸었다.
“어디 민두혼의 아들이라는 놈 면상이나 좀 구경해 볼까.”
때맞춰 멀리서 들려오는 한 여인의 찢어지는 비명을 들으며 수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 * *
윤천강은 불타오르는 전각(殿閣)을 바라보았다. 주황색으로 너울거리는 불꽃의 혓바닥이 날름 집어삼킨 집은 틀림없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주인의 고아한 풍격이 배어 있는 곳이었으리라.
“안 가십니까?”
부관 초의량이 상관의 감상을 자르며 물어 왔다. 천강은 힐긋 부관에게 눈길을 주며 답했다.
“간다. 선발로 가 있는 부대장이 누구라고?”
“배재공(陪材公) 하태운의 장남 하석이 군사들을 이끌고 갔다 들었습니다.”
“아, 그자.”
일전에 마주쳤던 적이 있는 자라 그 이름을 기억에서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아마 그것이 일 년 전쯤이었지. 변방의 산적 떼를 토벌하러 갔다가 거의 마무리되고 잔당들만 처리하면 되는 시점에서 지원군이 도착했었다. 지원이 필요치 않다 전서구를 날렸지만 하석이라는 자가 굳이 자청하며 지원을 가겠다 나선 것이라 들었다. 그리고 보급이 필요하다며 인근 마을의 창고를 털었었지.
“민씨 집안의 창고는 산골 마을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풍족했을 터인데 그 눈이 이리저리 돌아가느라 얼굴에 제대로 붙어 있기나 할는지 모르겠군.”
비꼼이 가득 실린 말에 부관은 아무런 첨언도 하지 않았다. 부관 역시 하석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던 탓이다.
“서두르지. 황제 폐하가 내리신 황명이 소용없어질 만큼 만행을 저지른 후에 도착해서야 안 되지 않겠나.”
말의 끝맺음에 천강은 고삐를 당겼다. 긴 울음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한 말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민두혼의 집에 천강을 데려다주었다.
아비규환(阿鼻叫喚). 그 이상의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는 광경에 천강은 잠시 미간을 구겼지만 그뿐이었다. 화적 떼의 마을을 쓸어버릴 때도, 황제의 칙명을 거부한 영지를 토벌할 때도 이런 광경은 보아 왔다. 특별히 다를 것도 없다. 그것이 어제까지 죄가 없던 충신의 집이라 할지라도.
이미 마당에 널브러진 수습되지 않은 시신들과 핏자국을 지나 가장 소란스러운 지점으로 향했을 때 천강이 본 것은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는 나이 든 여인의 어깨 위로 떨어지려 하는 서슬이 퍼런 칼날이었다.
“멈추어라!”
그리 크지 않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칼을 높이 치켜든 사내의 팔이 멈추었다.
“이런, 총대장 나리 아니십니까.”
천천히 칼을 내리는 사내의 뒤틀린 입가는 사내의 심사를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건방진 어린놈. 사내의 눈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상관에게 갖추어야 할 예를 갖추는 사내의 등 뒤로, 머뭇거리던 그 수하들이 뒤따라 허리를 숙였다.
마지못해 상관 대접해 준다는 티를 너무나 역력히 내며 허리를 숙였던 사내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천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뜩이나 바쁘신 분인데 힘이 드실까 저어하여 제가 미리 처리를 좀 해 두었습니다. 누가 되지 않는다면 나머지 처리도 제가 해 두는 편이 총대장 나리의 어깨를 가볍게 해 드리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러니까 넌 닥치고 내가 하는 걸 지켜보기나 해라.
공손한 말 뒤에 담긴 뜻이 너무 노골적이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천강은 깊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폐하의 명을 전하겠다.”
천강이 품 안에서 꺼내 든 붉은 비단 두루마리에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던 사내, 하석은 눈을 부릅뜨며 무릎을 꿇었다.
1화
서장(序章)
바로 몇 식경 전에 잘 자라 웃으며 인사했던 하녀 아이의 목소리가 피비린내 나는 비명으로 바뀌어 들리던 그날,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던 오라비의 남복(男服)을 입던 그때. 아직 세상 이치를 깨닫는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단꿈이 더 좋을 어린 나이에 수린은 세상이 불타는 것을 보았다.
그날은 온 집 안이 우중충해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터였다. 근래에 조정이 심상치 않다 귀 너머로 들었지만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 주는 이는 없어 그저 그러려니, 어서 빨리 아버지가 기운을 차리시려니 하고 유모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었다.
잠이 들었다 깼지만 그리 긴 시간을 잤던 것은 아님을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이 말해 주었다. 밤을 살라 먹는 소란스러움에 눈을 뜨자 햇빛과는 다른 빛이 수린을 둘러싼 세상을 잡아먹고 있었다. 붉게 너울거리는 빛 그림자에 버무려진 비명 소리가 쭈뼛 뒷덜미에 소름을 세웠다. 수린은 얼른 옆자리에 누워 잠들었던 유모를 찾았다.
“할멈?”
없었다. 수린의 옆에 깔려진 이부자리는 심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 자리에 누웠던 이가 다급히 뛰쳐나간 것임을 말해 주는 양.
“할멈? 할멈!”
단박에 비명 같은 외침이 튀어나왔다. 무슨 일인가. 창호지 문 건너에서 너울너울 붉은 불빛이 춤을 추고 있고 옆자리에 잠들어 있어야 할 이는 보이지 않는다. 밖에서 들려오는 끊이지 않는 비명 소리는 무엇이며 뒷골을 때리는 이 섬뜩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이불을 끌어안고 벽으로 물러나던 수린은 벌컥 문이 열리자 혼절하도록 놀랐다. 벼락처럼 들어선 커다란 그림자에 기겁을 하고 올려다보니 그는 수린의 아비인 민두혼이었다. 들어선 이가 아비라 하여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하얀 명주옷을 입던 아비가 느닷없이 갑옷을 입고 들이닥친 데다 그 갑옷에 피칠갑이 되어 있고 아비의 손에 짐짝처럼 끌려온 이가 바로 자신의 유모였으니 말이다.
“대감! 아니 됩니다!”
“네년의 목을 내 손으로 따야 내 말을 듣겠느냐!”
“대감! 아기씨 연치 이제 겨우 열둘입니다!”
“내가 내 여식의 나이를 몰라 그걸 묻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단 말이냐! 네가 안 하면 내가 하겠다!”
수린은 잠이 덜 깬 말간 눈으로 꿈뻑꿈뻑 아비와 유모를 바라보았다. 아비와 유모가 주고받는 언쟁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식솔들 앞에서 절대 언성을 높이는 일 없던 아비가 어찌 유모를 잡아먹을 듯이 호통을 치는 것이며, 수린과 오라비인 진겸을 키우는 동안 숨소리조차 크게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유모가 무슨 영문으로 아비에게 피를 토하듯 읍소하는 것인가.
민두혼은 유모를 내동댕이치고 수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한 것은 아비의 체구가 워낙에 산처럼 컸기 때문이었다. 허나 민두혼은 수린의 몸짓을 달리 이해한 모양이었다. 단박에 서슬 퍼렇던 눈동자가 흔들렸다.
“…….”
꽉 깨문 아비의 입술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수린은 이불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수린의 눈높이쯤, 아비의 팔꿈치엔 하얀 천들이 걸려 있었다.
옷이다. 잠자리에서 입는 옷. 그리고 사내아이의 옷. 수린이 눈을 깜빡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역정으로 가득했던 민두혼의 얼굴은 회한으로 일그러졌다.
“아버님…….”
그리고 수린이 자신을 불렀을 때 끝내 고목 같던 그의 몸이 무너졌다. 털썩. 어린 딸 앞에 무릎을 꿇고 민두혼은 새 같은 딸의 작은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하나뿐인 고운 딸. 너무 작아 제대로 안아 주지도 못했던 아이다. 칼을 잡고 창을 잡았던 거친 손으로 힘껏 끌어안으면 다치기라도 할까 겁나 쉬이 머리도 쓰다듬지 못하던 딸이었다.
“수린아. 아비를 용서 마라.”
수린은 눈가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그때는 이 아비가 네가 기르는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때 이 아비를 짓밟고 짓밟아라. 그리하여 이 죄가 갚아진다면 말이다. 그리해도 갚아지지 않으면……. 그때는 또 네 집의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러니…… 그러니…….”
수린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세도가의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아비가 하는 말, 아비가 벌컥 열고 들어오느라 활짝 열린 방문 너머로 보이는 불타오르고 있는 집, 피 토하듯 울고 있는 유모.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며 아비가 들고 온 사내아이의 옷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 그런 것.
떨리는 수린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수린은 눈물을 떨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자신을 끌어안은 아비의 팔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내려오는 수린의 손에는 아비가 들고 있던 하얀 사내아이의 옷이 쥐어져 있었다.
수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번 옷을 다잡았다가 아비를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꾹 다문 입술과 그렁하니 맺힌 눈물에 아비는 수린의 마음을 모두 읽었다.
둘 사이에는 그 이상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아비가 거세게 이를 악무는 소리를 내다가 몸을 돌리고 방을 나가 버렸다.
그것이 수린이 마지막으로 본 아비의 모습이었다.
대부관(大府官) 민두혼은 삼대가 황제의 충신이었던 민씨 일가의 장손이었다.
대를 이어 물려받은 부와 세도도 컸지만 민두혼 본인 또한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무장이었기에 그를 따르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민두혼은 번잡한 것을 꺼려 하는 인물이라 부러 세를 늘리거나 부를 쌓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황가에 충성하였으나 아첨하지 않았고, 교언영색을 한 이들을 꺼렸다. 그것이 문제였다.
선대 황제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어린 황제의 등극 이후 극도로 혼란스러운 정국에도 민두혼은 중도를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노도(怒濤) 가운데에 꼿꼿이 서 있으려 하는 배는 침몰을 면할 수 없는 법.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민두혼은 표적이 되기에 가장 쉬운 대상이었다.
어린 황제가 누구의 손을 잡았는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제까지 충신이었던 이의 집에 흙발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가솔들의 목을 베고 대들보에 불을 놓는다면, 그것은 그와 대척점에 있는 이의 손을 황제가 잡았음을 말하는 것이니.
유모는 하염없이 울었다. 하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자신이 곱게 기른 아이가 아비와 오라비의 방패막이로 내던져졌음에야. 눈물이 나는 것은 수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비의 마음은 안다. 허나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고작 열두 살. 그 어떤 말로도 목전에 다가온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라 할 수 없는 어린 나이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옷을 갈아입었지만 도저히 머리까지는 다시 묶을 재간이 없었다. 간신히 곱게 땋은 머리만 풀었을 뿐인데도 더 이상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서 빨리 머리를 어찌해야 하는데. 민두혼의 아들이 산발한 머리를 하고 있으면 저들이 이상하게 여길 터인데. 그렇지만 두려워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눈물이 앞을 가려 뿌옇게 변한 시야에 머리를 묶었던 끈도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흑. 아기씨……. 흐윽.”
흐느끼는 유모의 목소리에 기어코 울음은 터져 버리고 말았다.
“으흑. 할멈. 할멈!”
순식간에 통곡이 된 눈물에 유모는 무릎으로 기어 와 수린을 끌어안았다. 벼락처럼 시커먼 사내들이 들이닥치며 문짝이 우당탕 뜯어져 나간 것은 그다음 순간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민두혼의 아들인 것 같습니다.”
“끌어내!”
목청껏 외치며 사내들은 수린을 꽉 끌어안고 있는 유모를 짐짝처럼 들어 마당에 내동댕이쳤다. 난장판의 와중에 묶여 있지 않고 흐트러진 수린의 머리카락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머지는?”
“반항하는 사내놈들은 다 처리한 모양입니다. 계집들은 곡창에 가둬 두었습니다. 도망간 몇이 있지만 곧 다 잡아들일 겁니다.”
“민두혼과 처는 내뺀 모양이지? 딸년만 챙기고 아들놈은 챙길 틈도 없었던 건가?”
낄낄거리며 주고받는 사내들의 목소리에 속이 메슥거렸다. 할멈이 너무 꽉 끌어안아서 그래. 아버님, 어머니, 오라버니, 무사히 도망가셨구나. 수린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이제 나는 죽는 건가. 죽는다는 건 어떤 거지. 아픈 거겠지. 아프지 않고 끝났으면 좋겠는데.
“그럼 다 끝난 거야?”
“아니, 총대장이 아직 안 왔어.”
“총대장이라는 분께서는 황성에서 아침에 출발하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헌데 총대장의 허락 없이 사내들을 죽였어도 괜찮았던 겁니까?”
“까짓 놈들 어차피 반역자 패거리다. 그리고 ‘분’은 무슨. 총대장이래 봤자 연줄로 한 자리 휘어잡은 어린놈이다. 뒤늦게 와 봐야 이제 다 잡았으면 오라에 엮어 돌아가자는 소리밖에 더 하겠나. 그나저나.”
이죽거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휙 방향을 바꾸었다.
“어디 민두혼의 아들이라는 놈 면상이나 좀 구경해 볼까.”
때맞춰 멀리서 들려오는 한 여인의 찢어지는 비명을 들으며 수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윤천강은 불타오르는 전각(殿閣)을 바라보았다. 주황색으로 너울거리는 불꽃의 혓바닥이 날름 집어삼킨 집은 틀림없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주인의 고아한 풍격이 배어 있는 곳이었으리라.
“안 가십니까?”
부관 초의량이 상관의 감상을 자르며 물어 왔다. 천강은 힐긋 부관에게 눈길을 주며 답했다.
“간다. 선발로 가 있는 부대장이 누구라고?”
“배재공(陪材公) 하태운의 장남 하석이 군사들을 이끌고 갔다 들었습니다.”
“아, 그자.”
일전에 마주쳤던 적이 있는 자라 그 이름을 기억에서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아마 그것이 일 년 전쯤이었지. 변방의 산적 떼를 토벌하러 갔다가 거의 마무리되고 잔당들만 처리하면 되는 시점에서 지원군이 도착했었다. 지원이 필요치 않다 전서구를 날렸지만 하석이라는 자가 굳이 자청하며 지원을 가겠다 나선 것이라 들었다. 그리고 보급이 필요하다며 인근 마을의 창고를 털었었지.
“민씨 집안의 창고는 산골 마을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풍족했을 터인데 그 눈이 이리저리 돌아가느라 얼굴에 제대로 붙어 있기나 할는지 모르겠군.”
비꼼이 가득 실린 말에 부관은 아무런 첨언도 하지 않았다. 부관 역시 하석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던 탓이다.
“서두르지. 황제 폐하가 내리신 황명이 소용없어질 만큼 만행을 저지른 후에 도착해서야 안 되지 않겠나.”
말의 끝맺음에 천강은 고삐를 당겼다. 긴 울음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한 말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민두혼의 집에 천강을 데려다주었다.
아비규환(阿鼻叫喚). 그 이상의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는 광경에 천강은 잠시 미간을 구겼지만 그뿐이었다. 화적 떼의 마을을 쓸어버릴 때도, 황제의 칙명을 거부한 영지를 토벌할 때도 이런 광경은 보아 왔다. 특별히 다를 것도 없다. 그것이 어제까지 죄가 없던 충신의 집이라 할지라도.
이미 마당에 널브러진 수습되지 않은 시신들과 핏자국을 지나 가장 소란스러운 지점으로 향했을 때 천강이 본 것은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는 나이 든 여인의 어깨 위로 떨어지려 하는 서슬이 퍼런 칼날이었다.
“멈추어라!”
그리 크지 않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칼을 높이 치켜든 사내의 팔이 멈추었다.
“이런, 총대장 나리 아니십니까.”
천천히 칼을 내리는 사내의 뒤틀린 입가는 사내의 심사를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건방진 어린놈. 사내의 눈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상관에게 갖추어야 할 예를 갖추는 사내의 등 뒤로, 머뭇거리던 그 수하들이 뒤따라 허리를 숙였다.
마지못해 상관 대접해 준다는 티를 너무나 역력히 내며 허리를 숙였던 사내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천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뜩이나 바쁘신 분인데 힘이 드실까 저어하여 제가 미리 처리를 좀 해 두었습니다. 누가 되지 않는다면 나머지 처리도 제가 해 두는 편이 총대장 나리의 어깨를 가볍게 해 드리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러니까 넌 닥치고 내가 하는 걸 지켜보기나 해라.
공손한 말 뒤에 담긴 뜻이 너무 노골적이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천강은 깊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폐하의 명을 전하겠다.”
천강이 품 안에서 꺼내 든 붉은 비단 두루마리에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던 사내, 하석은 눈을 부릅뜨며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