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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죽어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인은 살며시 눈을 들었다. 멍과 핏자국으로 엉망이 된 얼굴에는 절망과 공포가 가득히 자리하고 있었다. 천강은 여인이 재차 품 안의 무언가를 끌어안는 것을 보았다. 아이였다. 하얀 옷을 입은 아이. 사내아이의 옷.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좋은 천으로 지은 옷을 입은 사내아이. 그렇다면 민두혼의 아들이겠군. 자신이 딱 적절한 때를 맞춰 온 모양이다.
천강은 두루마리를 펼쳐 그 안에 적힌 황제의 명을 소리 높여 읽었다.
“황제의 뜻을 거스른 민두혼의 일가에 나 황제 명운화주(明云和鑄) 진화(臻禍)는 역(逆)의 낙인을 내린다. 그 일가 모두의 지위를 박탈하고 신병을 관(官)의 소유로 둔다. 다만 일가 중 그 누구도 참살하여서는 안 되며 이를 어기는 자에 대해 엄벌에 처한다.”
천강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하석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석의 안색이 굳어졌다. 기대에 부응하는 반응을 보여 준 하석에게, 천강은 덤을 붙여 주었다.
“황명을 어긴 자에 대한 처벌은 총대장 윤천강에게 일임한다.”
하석이 삽시간에 얼굴을 백지장처럼 만드는 신묘한 재주를 보여 주었다. 입 끝이 올라가려 했지만 천강은 아닌 척, 못 본 척 계속 황명을 읽어 나갔다.
“민두혼의 식솔과 노비들은 당일로 도관원(陶官阮)에 적을 둘 것이나 민두혼과 그의 처, 자(子)와 녀(女)는…….”
천강의 말이 멈추었다. 이런.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눈 두어 번 깜빡일 시간이었지만 천강이 멈칫하자 매와 같은 눈초리들이 쏠렸다. 천강은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민두혼과 그의 처, 자와 녀는 종주공 윤인호에게 신병과 처분을 일임한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민씨 일가의 처분을 넘긴다는 황명은 곧 자신에게 넘긴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아버지는 언제나 어린 황제의 옆자리에 붙어 있으니까.
마지막 낭독에 일동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음을 천강은 깨달았다. 여인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의 눈까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자 천강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물로 범벅이 되었지만 말갛고 하얀 얼굴이다. 동그란 까만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입술도 떨렸지만 그 와중에도 단정함이 엿보이는 생김새였다. 열둘? 아니, 민두혼의 아들이 열셋이라고 했던가. 또래보다 작아 보였다. 민두혼이 기골이 장대하니 성인이 되면 다르려나. 물론 무사히 성인이 될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 없는 처지이지만 말이다.
“죽여서 수급을 가져가면 될 일이 아닙니까.”
잔뜩 뒤틀린 하석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상념을 방해하자 확 거부감이 일었다.
“닥쳐라!”
천강은 일갈하며 하석을 쏘아보았다. 하석이 움찔 뒤로 몸을 물렸다.
“너는 이미 황명을 어긴 죄인이다. 내 너에게 내린 전갈은 민두혼의 식솔들을 구금하고 내 명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헌데 너는 내 명을 어기고 필요도 없는 살생을 저질렀다. 쓸데없는 살생은 절대 하지 않는다. 너는 총대장인 내가 입을 열어 명하기 전에는 그 입을 닥치고 처분을 기다려라!”
하석이 당황하여 눈을 굴리다 얼른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지만 천강은 보았다. 하석이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을.
‘골치 아픈 자다.’
한참이나 어린 자신이 상관인 것도 마뜩잖은데 부하들 앞에서 질책을 받았으니 틀림없이 복수할 틈을 호시탐탐 노리겠지.
그나저나 이 아이는 어쩐다.
천강은 여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이의 얼굴은 두려움만 가득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닌가.
천강은 혀를 찼다. 이대로 데리고 가자니 이 아이가 분란의 씨앗이 될 것은 자명한 일. 그렇다고 죽이자니 조금 전에 하석에게 홧김에 내뱉은 말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필사적으로 아이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 여인의 좁은 어깨가 단칼에 내려치기엔 너무 좁아 보였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부관의 물음에 천강은 고개를 저으며 고민을 끝냈다. 그래. 훗날 분란이 된다면 그때 또 처리하면 될 일.
“백부님께 보내라.”
“백부님이라 함은…….”
“안주(安州)의 총관이신 큰아버님 말이다. 폐하의 명으로 민두혼의 아들을 거두었으나 경(京)에 두는 것은 혼란이 야기될 것이 자명한 일이라 그 신병을 백부님께 부탁드린다 전하거라. 수습이 되는대로 그 이후의 거취에 대해서 상의드리겠다 말씀드리는 것도 잊지 말거라.”
부관은 복종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긴장의 끈이 끊어졌는지 아이의 몸이 풀썩 늘어졌다.
“이, 일어나십시오. 아…… 도, 도련님. 정신 차려 보세요.”
여인이 찰싹찰싹 뺨을 때렸지만 아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하얀 볼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인은 당장 죽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인지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서러움인지 모를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아이를 끌어안고 히끅히끅 울었다. 천강은 더 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불타오르던 대들보가 무너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날의 선택이 훗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음을, 천강이 알게 되기까지는 칠 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세월은 공평하게 흘렀다.
나라를 호령하는 왕후장상의 이마에도, 밭을 가는 범부의 얼굴에도 차별 없이 주름을 그려 넣고, 작고 여리기만 하던 아이가 소녀가 되어 이윽고 소녀의 이마에서 여인의 향취가 배어나기 시작할 때까지.



1장


뿌우우―
소라 나팔이 길게 내뱉는 소리에 수풀 속에서 약초를 골라내던 손이 멈췄다.
‘왜 벌써?’
의아함을 가득 담은 까만 눈동자가 정확하게 한 지점을 응시했다. 저 멀리 수평선을 지나 항구 쪽으로 커다란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엄지손가락보다 작게 보이는 배지만 선체 전체가 선명한 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 배에 새겨져 있을 것은 틀림없이 황제의 상징인 황금 용.
하얀 손이 얼른 약초의 흙을 털어 노끈을 엮어 만든 망태기에 넣었다. 서둘러야겠다. 봉화대(烽火垈) 근처까지 올라왔으니 서둘러 달려 내려가도 한 식경은 넘게 걸릴 것이다. 배가 들어오기 전에 항구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 미지수다. 지난번 배가 들어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또 배가 들어오는 걸까.
‘그런 건 항구에 가 보면 알게 되겠지.’
황제의 갑작스러운 하사품인지, 새로운 죄인이 섬에 갇히러 실려 왔는지.

그곳은 고인 물과 같은 섬이었다. 고요하고 변함없는 적막이 안개처럼 둘러싼 섬은 선선대의 황제가 윤씨 일가에 하사한 것이었다. 정확한 해도(海圖)와 솜씨 좋은 뱃사람 없이는 접근도 힘들어 처음에는 윤씨 일가만의 휴양 장소처럼 쓰여졌던 것이, 윤종명과 윤인호의 부친인 윤시랑이 수(遂)를 복속시키는 전투에서 끌고 온 다수의 왕족과 명문가 포로들을 모아 두고 감시하기 시작하면서 용도가 달라졌던 것이다.
안주(安州). 평안한 마을이라는 그 이름처럼 그곳은 사시사철 혹독한 더위도, 매서운 추위도 없었다. 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끝없는 물처럼 조용하고, 또 가라앉아 있었다.
섬 자체는 따뜻한 기후 덕에 풍족하지는 않아도 자급자족이 가능했고 바다가 감싸고 있는 곳이라 언제든 바다에서 나는 먹거리도 넉넉히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섬을 벗어나고자 하면 배를 타고 몇 식경도 채 가기 전에 매서운 소용돌이에 휩쓸려 배가 나무 조각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섣불리 섬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자는 드물었다. 간혹 도망치려는 자가 있다 해도 파도에 떠밀려 온 부서진 소지품들이 도망자들의 매서운 종말을 말해 주었기에 그 의지는 물거품처럼 사그라지곤 했다.
섬에서 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는 황제의 군선(軍船). 황가의 상징인 붉은색으로 선체 전체를 칠한 배는 몇 가지 경우에만 섬에 온다. 나라에 특별한 경사가 있어 황제가 죄인들에게까지 하사품을 선사할 경우나, 섬을 관할하는 윤종명이 섬 안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품을 보내 달라 요청했을 경우, 그리고 새로운 죄인이 섬에 들어올 경우가 그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근 삼 년 동안 새로 죄인이 들어온 일은 없었다. 지난번 배가 왔던 것은 한 달 전쯤, 황제의 탄신일을 즈음하여 무명천과 섬에서는 나지 않는 곡식들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짧은 간격으로 배가 들어온 적이 없었기에 항구에는 섬 안의 사람들이 반 이상 나와 모여 있었다. 늘 변함이 없는 섬에서 배가 들어오고 그것을 구경하는 것은 섬사람들에게도 특별한 일탈이었다.
“배가 다 들어왔구먼.”
“한 달도 안 되어 배가 들어오는 건 드문 일인데.”
“경(京)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겔까?”
“우리네하고야 무슨 상관이 있는 일이겠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 남자들의 목소리에 저쪽에서 삐죽 하얀 얼굴이 올라왔다 내려갔다. 배는 아직 안 들어온 모양이었다.
헌데 이상했다. 황제의 하사품을 실어 나르는 때처럼 배에 나무 궤짝이 가득 찬 것도 아니었고, 죄수를 호송할 때처럼 무장한 군인들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항구에 정박하여 닻을 내리는 뱃머리에 옥색 비단으로 지은 단정한 옷을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청년을 호위하듯 뒤에 서 있는 체격 좋은 검을 든 남자 몇.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아 보이는 낯을 한 청년의 등 뒤로 갑판 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짐을 나르며 배에서 내릴 준비를 하느라 시장통처럼 분주한데, 청년은 홀로 유람길에 나선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삐죽거리며 사람들을 헤치고 부두로 걸음을 옮기자 나이 지긋한 중년 남자들이 휙 고개를 돌려, 이놈 이제야 왔냐 한마디씩을 건넸고 여인들은 얼굴 잊어버리겠다며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왔다. 예, 예 건성으로 대답하며 도착한 부둣가에서는 윤종명이 배에서 제일 먼저 내리는 청년을 맞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옥색 비단은 황가의 방계들이 입는 옷. 직계는 아니지만 황제와 먼 친척쯤 되는 촌수일 청년이니 윤종명에게는 고개를 숙여야 할 대상인 것이다.
헌데, 청년이 난처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오래간만에 뵌 인사를 희롱으로 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얼른 더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청년에게 윤종명은 껄껄 너털웃음을 지었다.
“귀하신 분을 맞아 법도에 맞는 인사를 드리는 것인데 어찌 희롱으로 치부하십니까?”
“아직 귀하신 분이 아닙니다. 법도는 귀하신 분이 되면 그때 정식으로 따져 주십시오.”
“그랬다가 경을 치려고요?”
너스레를 떨었지만 이만 되었다 싶었는지 윤종명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얼굴로 청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서 오너라. 문혁아. 건강해 보이는구나.”
“예. 무탈하신 듯 보여 다행입니다.”
황제의 군선이 방문한 이유가 하사품도 죄수도 아닌 윤종명을 방문한 방문객의 개인적인 볼일인 듯하다, 하고 부둣가에 서 있던 이들이 옆으로 뒤로 말을 전해 주었다. 그렇다면 구경할 거리가 별로 없을 것 같다 생각한 이들은 구경꾼 행렬에서 빠져나와 볼일을 보기 위해 돌아갔고, 말끔한 미남의 얼굴을 오래간만에 본 아낙들은 저 청년이 어디서 온 누구인지를 수군거리며 삼삼오오 원을 그렸다.
“안주까지 어쩐 일로 왔는지는 여장(旅裝)을 풀고 나서 듣자꾸나. 식사는 하였느냐?”
“예. 그런데 식사보다 먼저 이걸.”
문혁이라 불린 청년은 말을 자르며 품 안에서 곱게 만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수행 인원들도 꽤 많았건만 굳이 직접 몸에 지니고 온 것이 누가 봐도 중요한 용무인 듯했다. 윤종명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금색 끈으로 묶은 두루마리를 받았다.
“이게 무엇이더냐.”
“폐하의 친서입니다. 지급으로 보실 것이며, 누구도 없는 곳에서 보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누구도 없는 곳에서 보라고 전한 친서를 이런 백주 대낮에 눈이 많은 곳에서 건네는 의향은? 묻는 시선에 문혁은 멋쩍게 웃었다.
“기밀이나 중차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폐하의 개인적인 용무이니 남들 보지 않는 곳에서 보고 바로 답신을 달라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그래? 허나 폐하의 말씀이라면 지급으로 보기는 해야 할 터. 그렇다면 너는 먼저 내 집에 가 있거라. 안내해 줄 이를 하나 붙여 줄 것이니.”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옳지, 겸아!”
윤종명은 마침 눈에 띈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인파 틈에 섞여 사라지려던 동그란 뒤통수가 뜨끔 멈춰 서는 게 문혁의 눈에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