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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겸아. 이리 와서 내 큰조카 놈 좀 내 집으로 안내하거라. 수돌 아범에게 내 큰조카 윤문혁이 당분간 집에 묵게 될 것이니 손님들에게 객방 몇 개를 내어 주면 된다 얘기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얼굴은 굳어 있었다. 윤종명의 말 어딘가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듯 경직된 눈동자에 문혁은 의아했다. 저 소년, 표정이 왜 저러지? 표정은 금방이라도 잇새로 욕설을 내뱉을 것 같으면서도, 소년은 고분고분 걸어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어르신.”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맑았다. 하지만 앞장선다며 돌아서며 스쳐 간 눈동자는 냉랭한 빛을 가득 담고 있었다. 윤종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지만 그뿐, 황제가 전한 두루마리를 들고 뱃머리에 올랐다. 문혁이 황제에게 전달받았을 물품들을 확인하고 배의 정박 장소를 지시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았다.
느닷없이 적의가 담긴 눈을 한 소년에게 인도된 문혁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소년의 뒤를 따랐다.
영문 모를 적의(敵意).
그것이 문혁이 겸이라 불린 소년, 민진겸이라는 이름으로 민수린이라는 이름을 가리며 살아온 소녀에 대해 느낀 첫 감상이었다.

윤문혁. 종주공 윤인호의 큰아들. 황성 병호대 대장 명광장군 윤천강의 형. 안주의 총관인 윤종명의 조카. 황실 학사로 그 학식이 깊이를 잴 수 없이 깊어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장래가 유망한 자.
수린은 자신이 윤문혁에 대해 알고 있던 그리 많지 않은 정보들을 되짚어 보았다. 머릿속을 암만 뒤져 보아도 윤문혁에 대한 나쁜 평판은 나오지 않았다.
‘운이 좋은 자로군.’
나라의 군권을 틀어쥔 가문 출신이지만 학문에만 매진한 장자(長子). 정작 윤인호의 칼이 되어 피를 뒤집어쓴 건 차남인 윤천강인데 황제가 곁에 두는 것은 장남인 윤문혁이라. 수린은 쓰게 웃었다.
원수의 아들이다. 하루아침에 평화롭던 자신의 세계를 불태워 버리고 죄인이라는 이름의 낙인을 찍은 자의 아들. 군마를 끌고 와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외딴섬에 가둬 버린 자의 형. 그런데 그 얼굴은 너무나 청렴한 학자의 그것이다. 혀뿌리에서부터 쓴맛이 배어 나오는 것은 서책을 즐겨 보던 오라비인 진겸이 떠오른 탓이다. 풍파 없이 자라 현재에 이르렀다면 윤문혁의 지금 모습이 진겸의 그것이었을 것이기에.
부두에서 윤종명의 집까지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을 걸어오는 동안 부러 말을 건네지 않았지만 문혁은 지루하지도 않은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수린의 뒤를 따랐다.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것이 문혁의 시선이 한 지점에 꽂혀 있음을 느끼게 했지만 수린은 고집스레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윽고 도착한 윤종명의 집 대문 앞에서 수린은 마침 마당을 쓸고 있던 수돌 아범을 발견했다. 냉큼 다가가 윤종명의 말을 전하자 수돌 아범은 휘둥그렇게 눈을 뜨고 문혁에게 다가서서 머리를 조아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총관 어르신의 살림을 돌보고 있는 남재준이라 합니다. 시키실 것이 있어 부르실 때는 수돌 아범이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안주에 머무시는 동안 부족함이 없도록 모시겠습니다.”
총관의 조카라 하면 응당 나왔어야 할 환대를 받자 환대는커녕 적의를 쏘아 보내던 눈빛이 새삼스러워졌다. 자연스레 그 적의를 드러내던 이를 바라보자 시선도 마주치기 싫다는 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작은 머리가 삐뚜름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서 후다닥 사라졌다.
“머무실 곳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앞장서지요.”
안내인이 사라지자 수돌 아범이 두 손으로 가야 할 곳을 공손히 가리켰다. 그러나 문혁은 날랜 뒷모습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아이, 겸이라 했는가?”
“예? 아 예. 나리.”
“본래 이름이 무엇인가.”
“글쎄요, 안주에서 이름 석 자를 다 부르는 경우는 드물어서, 뭐라더라. 주겸이라 했던가, 지겸이라 했던가.”
평화롭게 보이는 섬이지만 사실 죄인들의 섬이다. 밭을 일구고, 글을 쓰고, 베를 짜고 약초를 캐며 여느 섬마을처럼 살고 있지만 섬 밖으로 나가면 죄인이라 돌팔매질을 당할 이들이다. 죄인이 아니던 시절의 이름을 뻐길 이들은 없는 것이다. 수돌 아범이 끙끙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닌지라 문혁은 그러려니 수돌 아범이 가리킨 곳으로 걸음을 떼려 했다. 그때 수돌 아범이 손바닥을 치며 외치듯 말했다.
“아, 생각났다. 민진겸이라 하였습니다!”
비상한 문혁의 기억력은 어렵지 않게 민진겸이라는 이름 석 자에 대한 기록들을 기억해 냈다. 대부관 민두혼의 아들. 한순간에 역적이 되어 관적에서 이름이 사라진 민씨 집안의 장자였다.
문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서였군. 온몸에 날을 세우고 있던 이유가.
“……무리도 아니지.”
“무어라 하셨습니까?”
혼잣말에 수돌 아범이 물어 오자 문혁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 아이가 윤씨 문중에 원한을 가지고 있어도, 그 아이의 눈빛이 신경 쓰여도, 그 아이를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텐데 생각은 하여 무엇하겠는가.

수린은 오른 어깨에 메고 있던 망태기를 내려놓았다. 모처럼 산에 올라간 김에 약초를 잔뜩 캐 오려 했는데 목표량의 반의반도 못 채웠다. 약방의 장 의원에게 남혈초를 잔뜩 캐 오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는데 내일 놀림받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다.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귓가를 때리는 것 같아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웃다가 이마에 걸리는 까끌한 느낌에 수린은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살집이 없어 뼈마디가 도드라지는 손가락의 끝마디마다 거스러미가 생겨 거칠어져 있었다.
칠 년. 비단 천에 색색의 실로 수를 놓던 고운 손가락이 흙을 만지고 짐 꾸러미를 나르며 거칠어지기에 넘치는 시간이다. 매일 마주하던 손인데 오늘따라 부담스러울 정도로 거칠게 느껴졌다.
‘돌팔매질을 당해서야.’
잔잔한 마음에 윤문혁이라는 조약돌이 던져졌다. 원수의 아들인 주제에 자기 혼자 반듯하고 올곧게 보이는 작자가.
그리 치면 윤종명도 원수의 형이다. 윤종명은 밉지 않은가? 물론 밉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부대끼며 모서리가 둥그레진 감정은 윤종명이라는 자가 정쟁을 얼마나 꺼리는 자인지를 말해 준다. 죄인들을 감독하는 총관이라 하나 안주에 모여 있는 이들 하나하나를 진심으로 보듬는 모습을 칠 년이나 보아 왔기에 윤종명에게 날이 선 감정은 생기지 않는다. 허나 윤종명도 윤씨 집안의 무인이다. 아비나 오라비가 나타나 칼을 겨눈다면 기꺼이 칼로 맞서겠지. 그때에도 미워하지 않을 수는 없을 터다.
“관두자.”
수린은 약초들을 꺼내 가지런히 늘어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잡생각이 많아지는 것도 그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자가 백부를 만나기 위해서라지만 변방의 죄인들 섬에까지 나타나서는 이리 사람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윤씨 집안의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초면인 그자가 미워도, 거칠어진 손이 서글퍼도 그자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터인데.

* * *


수린과 문혁이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아는 데에는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꼬박 하루 동안 동분서주하느라 문혁과 독대하지 못했던 윤종명이 문혁과의 주찬(晝餐) 자리에 수린을 불렀던 것이다.
“게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거라.”
윤종명이 부른다는 소리에 어제 배가 들어왔던 일 때문에 손이 모자라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던 수린은 수돌 아범이 안내한 곳에 한 상 가득 차려진 진수성찬과 문혁이 있는 것을 보고 목석이 되었다. 무슨 일인가 놀라 눈만 깜빡이는데 윤종명이 재차 자신의 왼쪽, 문혁의 맞은편 방석을 두드렸다.
“뭐 하는 게냐. 이리 앉으라니까.”
당황하기는 문혁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백부와 수린을 번갈아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입을 뻐끔거리던 수린은 재빨리 정신을 수습했다.
“송구하옵니다, 총관 어르신. 소인이 감히 겸상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듯합니다. 하명은 이 자리에서 듣겠습니다.”
“거 시끄럽구나. 앉거라. 명이다.”
“하오나…….”
“어허.”
윤종명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수린의 입술을 꾹 다물고 두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정면으로 마주 보는 자리에 앉게 된 문혁에게 하는 수 없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지만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어제 길 안내를 받으며 이미 했을 터이니 따로 통성명은 필요치 않겠지?”
통성명은커녕 말 한마디 섞지 않았었지만 수린도 문혁도 윤종명의 물음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한 잔 받으라며 내미는 윤종명의 술잔을 얌전히 받아 고개를 돌리고 안주의 특산품인 감로주를 입 안에 흘려 넣자 풀잎의 향이 입 안에 가득 찼다. 수린이 꼴깍 목 안으로 싱그러운 풀 내음의 술을 삼키고 조심스레 술잔을 내려놓자 그제야 윤종명이 운을 뗐다.
“겸이 너를 이리 부른 것은 내 조카 녀석이 안주에 머무르는 동안 안내를 맡기기 위해서다.”
“예?”
적잖이 놀라 얼빠진 반문이 나와 버렸다. 문혁 또한 금시초문이었는지 놀란 얼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뭘 그리 놀라느냐. 본래 내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맞지만 실은 어제 황제 폐하께 받은 서찰에 손이 많이 가는 과제가 적혀 있어서 말이다. 안주에 머무는 동안 안내해 줄 적당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고심해 보니 네가 제격이더구나.”
수린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귀하신 분께 감히 제가 누가 될 것입니다. 그, 안주의 안내라면 저보다는 수돌이가 섬의 곳곳을 더 잘 알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수돌이 놈의 성정이 밝은 것은 알고 있으나 명색이 황실 학사를 안내하는 일인데 대화는 통해야 할 성싶구나. 서책만 펼치면 머리가 아프다고 꽁무니를 빼는 녀석을 황실 학사에게 안내로 붙여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허면, 허면 약방의 정 의원께서 학식이 깊으시니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 드릴…….”
“정수리에 저승꽃 꽂고 다니는 노친네가 산길 안내하다 송장 치울 일 생길라.”
정 의원이 들었으면 자신은 노친네가 아니라며 불편한 헛기침을 했을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농 삼아 건네는 윤종명에게 과연 뭐라고 말을 해야 이 불편한 동행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됐습니다. 백부님.”
그때 점잖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굳이 안내를 받아야 할 만큼 산세가 험한 곳도, 길이 복잡한 곳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 혼자 둘러보아도 됩니다.”
너무 노골적으로 싫다는 티를 낸 모양이다. 문혁의 차분한 목소리에 속마음을 들킨 건가 뜨끔해 곁눈질로 훔쳐보았지만 문혁의 얼굴은 목소리처럼 평온했다.
“허나 초행길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산길도 많다. 너 혼자 가다가 발이라도 삐끗하면 어쩔 것이야.”
문혁까지 가세한 만류에 윤종명이 혀를 차며 물었다.
“많이 위험해 보이는 곳은 가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가고 싶은 곳은 호위와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니 명 거두셔도 됩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거절에 윤종명은 할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네 뜻이 그렇다면 알겠다. 그럼 겸이 너는 부두로 가서 황제 폐하가 하사하신 물품들의 목록 작성을 돕도록 해라. 성 녹관(錄官)이 요즘 눈이 많이 침침하다 하소연이 심하더구나.”
“그리하겠습니다.”
윤종명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올세라 재빨리 자리를 뜨는 뒷모습을, 문혁은 그 그림자만 남을 때가 되어서야 시선을 돌려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모르는 척 자작(自酌)하는 윤종명을 한 번 보고 나서 물음을 던졌다.
“왜 그러십니까?”
“뭐가 말이냐?”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으면서 너스레를 떠는 윤종명에게 조금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
“왜 저 아이와 저를 붙여 놓으려 하십니까. 저 아이에게 저는 꼴도 보기 싫은 원수의 아들일 터인데요. 저 역시 저를 증오하는 이와 함께 있는 것은 피하고 싶습니다.”
윤종명은 감로주가 담긴 하얀 술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술 소리가 청량하게 주위를 메꿨다.
“문혁아.”
“예. 백부님.”
“너는 죄인이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느냐.”
“……묻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황제는 어떤 사람이냐.”
“…….”
윤종명은 술을 따라 둔 술잔을 내버려 둔 채 병째로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몸을 돌려 대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