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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나는 말이다, 저 녀석이 퍽 어여쁘다.”
윤종명의 목소리가 술기운 탓인지 조금 젖어 있었다.
“저 아이에게는 나 또한 너와 마찬가지로 원수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떨어뜨린 악귀들일 것이다. 나를 악귀로 생각하는 이에게 정을 주어 무엇하겠느냐 다짐하고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수년을 곁에 두고 보니 정이 생기더구나. 안주에 있는 이들 모두가 그렇다. 황제께는 역적들이고 안주 밖에서는 죄인들이지만 곁에 두고 살을 부대끼니 모두가 따뜻한 피를 가진 이들일 뿐이더구나.”
“어여뻐서 역적에게 관원들이나 다룰 일까지 맡기시는 겁니까? 죄인에게 황제 폐하의 하사품을 다루게 하는 건 안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라면 모리배들의 모함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음? 아니 그건 아니다. 그건 안주에 관원을 안 보내 주시는 폐하 탓이지. 꼬박꼬박 물건을 보내시고 가져가시면서 관리는 손에 꼽을 만큼 보내 주셔서야 일손이 모자라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이번에 돌아가면 황제 폐하께 진언이라도 올려 보거라.”
껄껄 웃으며 윤종명은 다시금 병을 들어 목을 축였다.
“게다가 안주에 모이는 이들의 학식이야 여기서 일하는 관원들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아(高雅)한 것임은 너도 풍문으로 들어 보았을 게 아니냐. 그 아까운 걸 썩히는 것도 죄악이다. 써먹을 수 있으면 써먹는 게 멀리 보면 황제 폐하께 득이 되는 일이지 않겠느냐.”
궤변이지만 그럴싸하다. 사실 안주에 모인 죄인들 중 태반은 망국의 귀하신 분들이다.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글을 써서 일가족이 끌려온 이들도 더러 있다. 죄인의 굴레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경(京)에서 문혁과 밤을 새워 학문을 토론할 이들이었을 수도 있다.
“허면 저 겸이라는 아이의 학식이 깊어 저에게 학식을 나눠 보라 하려 하신 것입니까?”
“아니다. 네가 큰일을 앞두고 머리를 식히러 왔을 터인데 여기에서까지 그러라 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입니까.”
윤종명은 아까부터 손대지 않고 있던 문혁의 술잔에 손을 뻗어 슬쩍 문혁 앞으로 손가락 한 마디쯤 밀었다. 은근한 권유에 문혁은 더 사양치 않고 술잔을 쭉 들이켰다. 화하게 입 안에 퍼지는 감각이 문혁의 눈을 커지게 만들었다.
“어떠냐. 그럴싸하지?”
황실에 진상되는 어떤 명주보다 시원한 맛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놀라는 조카를 보며 윤종명은 호기롭게 웃었다.
“안주의 자랑이다. 이것만큼은 내 일생의 작품이라 자부할 수 있지.”
그럴 만도 하다. 이 정도면 황가에 납품만 해도 큰돈을 만질 수 있을 명주(名酒)이다. 어째서 이 술을 황제에게 진상하지 않았던 걸까? 윤종명은 빈 문혁의 잔에 다시금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저 아이는 말이다. 사는 걸 업으로 여기는 아이다.”
사는 게 업이라?
“그래. 업이지. 사는 것이 마냥 즐거운 이가 세상천지에 몇이나 되겠냐만 저 아이는 반드시 살아 있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며 살아가는 아이다.”
윤종명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나는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걸 네가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너는 이제 만인의 위에 서게 될 터이니. 길가의 풀 한 포기가 지니고 있는 사연마저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반드시 알아주기를 바란 것들을 저 아이가 보여 줄 것이라 생각했다.”
문혁은 윤종명의 말을 곱씹듯 생각에 잠겼다. 백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 옆모습을 윤종명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참으로 학자의 표본 같은 모습이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큰조카의 모습은 묘한 회한을 불러일으켰다.
“많이 컸구나.”
“백부님은 그대로이십니다.”
“입에 발린 소리.”
예끼, 하면서도 입가가 풀어지는 것이 조카의 아부가 싫지는 않은 내색이었다.
“네 이리 자란 모습을 보니 천강이는 어찌 컸을지 궁금하구나.”
얼굴을 마주한 지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나온 아우의 근황 얘기에 문혁은 잠깐 멈칫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그 녀석 피가 끓는 성정이지 않습니까. 느리기 짝이 없는 저와는 달리 천하를 호령하며, 그리 지내고 있습니다.”
“천하를 호령한다 함은 그 녀석이 사방에 적을 만들면서 종횡무진 설치고 있다는 얘기렸다?”
“……예.”
얌전한 수긍에 윤종명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보고 싶구나. 나도 늙은 모양이야. 그 정떨어지게 무뚝뚝한 녀석까지 눈에 아른거리는 걸 보면.”
한창때의 청년 못지않게 건장하고 기가 센 모습이지만 나이가 들기는 든 모양인지 윤종명의 눈가는 몇 년 전보다 확연하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온 수린이 곧장 향한 곳은 부두가 아니라 약방이었다. 약방에 들러 필요한 약초가 무엇인지 물은 후에 내일 다시 산에 올라가서 약초를 구해 볼 요량이었던 것이다. 헌데 약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생각지 못한 변수가 수린을 덮쳤다.
“어이구! 이제야 오는 게야?”
“하, 할멈?”
“어디, 어디. 얼굴 좀 보자. 다친 데는 없는 게지?”
부리나케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이 정신없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벽에 등이 닿았는데 손길은 얼굴뿐 아니라 몸 구석구석을 이리저리 훑었다.
“할멈! 정신없소. 다치긴 어딜 다친다고. 난데없이 왜 그러는 거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사람 얼굴 보자마자 다친 데 없냐고 이리저리 훑어 대는 건 뭐람. 수린의 항변에 답을 준 사람은 천천히 뒤따라오던 정 의원이었다.
“왜 그러긴. 중산댁이 지지난밤에 흉몽을 꾸었단다. 네가 호랑이 앞에 끌려가는 꿈이라나 뭐라나. 그래 놓고 어제 온다는 녀석이 안 왔으니 내도록 끙끙 앓다 저런다.”
난 또 뭐라고. 수린은 한숨을 쉬며 아직까지도 불안하게 자신을 만지고 있는 손을 잡았다. 본래도 고운 손은 아니었지만 수린을 품에 안고 안주까지 끌려와 고생하느라 더 거칠어진 손이 손바닥 안에 느껴졌다.
“할멈. 안주에 호랑이가 어디 있다고 그런 꿈 하나에 걱정을 하시오. 높지도 않은 산, 샅샅이 뒤져 봐야 기껏 나오느니 멧돼지나 족제비지. 호랑이가 있었어 보시오. 진즉 관군들이 잡아갔겠지. 나 멀쩡하니 그만 만져도 되오.”
“정말 괜찮은 게야?”
“괜찮대도.”
그래도 믿기지 않는지 여인은 수린을 불안하게 쳐다보다가 꼭 끌어안았다.
“다치면 안 된다. 우리 아가.”
“……안 다치겠소.”
많은 말이 함축된 아가라는 단어에 수린은 그저 그러겠노라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허허, 세상천지에 스물이나 먹은 아가가 다 있구먼. 천지가 경동할 일이로세.”
정 의원의 너스레에 눈물이 그렁하던 눈매가 매서워졌다.
“시끄럽소! 내 눈에 아가면 아가인 게지, 뭔 시비를 그리 걸고 그러시오!”
“시비로 들리나? 난 그저 궁금해서 꺼낸 얘기라네.”
“저, 저, 시비꾼 꼰대 같으니라고.”
두 노년들의 투닥거림에 수린은 난처해서 손을 저었다.
“두 분 다 그만하시지요. 어제 배가 들어오는 데 갔다가 총관 어르신이 손님 안내를 맡기셔서 여길 들르지 못했었던 겁니다.”
정 의원은 그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린의 손을 보았다.
“그래서 빈손이구만. 어제 남혈초를 잔뜩 캐 오겠다 큰소리를 떵떵 치더니만.”
“그리되었습니다. 총관 어르신이 시키신 일이 있어 오늘은 어렵고 남혈초는 내일 구해 오도록 할 터이니 다른 모자란 약초가 있으면 또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중산댁 밥값 벌어 오려면 약초 많이 캐 와야지. 남혈초랑, 소두풀이 좀 부족하다. 조요초하고.”
정 의원의 말이 거슬렸는지 유모가 빽 소리쳤다.
“오 년이나 내가 지어 주는 밥 먹었으면 밥값이라는 말은 관두소! 확 오늘 저녁밥에 돌을 섞어 버리기 전에.”
그 으름장에 수린은 피식피식 웃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벌써 오 년째인가. 유모가 정 의원의 약방에 몸을 의탁하고 자신과 떨어져 지내게 된 것이.
안주에 와서 첫 이 년은 민진겸의 몫으로 배정받은 초가집에서 유모와 둘이 죽은 듯 살았다. 날이 새는지 저무는지 모르고 새가 날아가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방구석에 틀어박혀 그저 그렇게 산송장처럼 지냈다. 유모가 밥을 지어 숟가락에 담아 주면 꾸역꾸역 목으로 넘기고, 달 밝은 밤에 씻자고 끌고 나가면 우물물 길어 씻고. 어찌 지냈는지 지금 떠올려 봐도 잘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로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수린을 문밖으로 이끈 것은 유모의 급작스러운 발작이었다. 한밤중에 숨넘어가는 소리에 잠이 깨어 경련하는 유모를 보고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 맨발로 뛰쳐나가 가장 가까운 집에 무작정 들어갔었다. 창졸간에 들이닥친 수린을 보고 놀란 집주인 내외가 안주에 의원은 하나뿐이라며 일러 준 대로 정 의원의 약방으로 달려갔을 때, 맨발로 밤길을 뛰어간 수린의 다리는 이미 피투성이였다. 정 의원은 한밤중의 불청객에도 당황하지 않고 먼저 피투성이 발에 천을 동여매 주고 수린이 이끄는 대로 환자에게 향했다.
그때 정 의원이 진단한 유모의 병명은 항재(抗滓)병이었다. 핏줄 안에 더러운 찌꺼기들이 쌓이고 몸 전체에 퍼져 비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병으로,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혈을 다스리고 적절한 약재를 써야 하는데 그 시기를 놓치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몹쓸 병이었다. 첫 발작에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다음 발작이 언제 일어날지, 남은 명이 얼마만큼일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정 의원은 이야기했다.
발작이 일어났을 때 의원이 곁에 없다면 어찌할 방도도 없이 저승 구경을 하게 된다는 얘기에 수린은 울며불며 제발 의원님 곁에 할멈이 머물게 해 달라 애원했다. 유모는 당연히 그럴 수 없다 말했지만 나는 내 어미가 죽는 꼴을 옆에서 볼 수 없노라 발악하는 수린의 말에 결국 정 의원의 식솔이 되어 부엌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수린의 눈에 안주에 사는 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은. 정 의원이 망국의 어의였다는 것도,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아 말리는 것을 업으로 삼은 준명 아범이 민두혼이 가장 즐겨 읽던 철학서의 저자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윤종명이 원수의 형이지만 그와 사뭇 다른 이라는 것도 알았다.
유모가 수린에게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입 안의 구슬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수린을 애지중지하던 이가 순순히 수린과 떨어져 사는 것을 받아들이고 반말을 쓰기 시작한 것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라 인정받은 것 같아서 서운한 한편으로 기뻤다. 그래도 아가라고 부르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어서, 수린은 가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농조로 건네는 ‘아가 도령’이라는 호칭도 달게 들어야 했다.
사립문 밖으로 발걸음 하기 시작하자 젊은 녀석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당장에 여기저기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에 틀어박혀 보낸 시간이 무색하게도 안주의 이들은 거리낌 없이, 마치 어제 만난 식솔 대하듯 수린을 대했다. ‘글 좀 읽는 젊은 녀석’은 참으로 쓸모가 많은 것이라, 수린은 안주 여기저기로 불려 다니기에 바빴다. 수수밭 노 영감이 허리가 아프니 약재를 전해 주라 하면 전해 주고, 대장간 홍 서방이 까막눈이라 아기 작명을 도와 달라 하면 가서 좋은 글자를 골라 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약방에 붙어살며 정 의원에게 약초와 여러 가지 병에 대해 배우는 데 할애했다. 나이 지긋한 정 의원이 아프거나 다른 환자를 돌보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에는 수린이 유모를 구할 수 있어야 했으니까. 그래도 오늘처럼 윤종명이 특별한 지시를 내린 날에는 그것을 최우선으로 따라야 했다. 억압받지 않는 곳이라 해도 안주가 죄인들의 섬인 것은 분명했기에 총관인 윤종명의 명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당분간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응? 오늘내일만이라도 여기 머물면 안 될까?”
그러니 유모의 부탁에 쓴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총관 어르신이 시키신 일이 있다고 했잖소. 내일 아침 일찍 산에 올랐다 얼른 약초 캐서 저녁 전에는 돌아올 터이니 걱정 마시오.”
“나는 말이다, 저 녀석이 퍽 어여쁘다.”
윤종명의 목소리가 술기운 탓인지 조금 젖어 있었다.
“저 아이에게는 나 또한 너와 마찬가지로 원수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떨어뜨린 악귀들일 것이다. 나를 악귀로 생각하는 이에게 정을 주어 무엇하겠느냐 다짐하고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수년을 곁에 두고 보니 정이 생기더구나. 안주에 있는 이들 모두가 그렇다. 황제께는 역적들이고 안주 밖에서는 죄인들이지만 곁에 두고 살을 부대끼니 모두가 따뜻한 피를 가진 이들일 뿐이더구나.”
“어여뻐서 역적에게 관원들이나 다룰 일까지 맡기시는 겁니까? 죄인에게 황제 폐하의 하사품을 다루게 하는 건 안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라면 모리배들의 모함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음? 아니 그건 아니다. 그건 안주에 관원을 안 보내 주시는 폐하 탓이지. 꼬박꼬박 물건을 보내시고 가져가시면서 관리는 손에 꼽을 만큼 보내 주셔서야 일손이 모자라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이번에 돌아가면 황제 폐하께 진언이라도 올려 보거라.”
껄껄 웃으며 윤종명은 다시금 병을 들어 목을 축였다.
“게다가 안주에 모이는 이들의 학식이야 여기서 일하는 관원들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아(高雅)한 것임은 너도 풍문으로 들어 보았을 게 아니냐. 그 아까운 걸 썩히는 것도 죄악이다. 써먹을 수 있으면 써먹는 게 멀리 보면 황제 폐하께 득이 되는 일이지 않겠느냐.”
궤변이지만 그럴싸하다. 사실 안주에 모인 죄인들 중 태반은 망국의 귀하신 분들이다.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글을 써서 일가족이 끌려온 이들도 더러 있다. 죄인의 굴레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경(京)에서 문혁과 밤을 새워 학문을 토론할 이들이었을 수도 있다.
“허면 저 겸이라는 아이의 학식이 깊어 저에게 학식을 나눠 보라 하려 하신 것입니까?”
“아니다. 네가 큰일을 앞두고 머리를 식히러 왔을 터인데 여기에서까지 그러라 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입니까.”
윤종명은 아까부터 손대지 않고 있던 문혁의 술잔에 손을 뻗어 슬쩍 문혁 앞으로 손가락 한 마디쯤 밀었다. 은근한 권유에 문혁은 더 사양치 않고 술잔을 쭉 들이켰다. 화하게 입 안에 퍼지는 감각이 문혁의 눈을 커지게 만들었다.
“어떠냐. 그럴싸하지?”
황실에 진상되는 어떤 명주보다 시원한 맛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놀라는 조카를 보며 윤종명은 호기롭게 웃었다.
“안주의 자랑이다. 이것만큼은 내 일생의 작품이라 자부할 수 있지.”
그럴 만도 하다. 이 정도면 황가에 납품만 해도 큰돈을 만질 수 있을 명주(名酒)이다. 어째서 이 술을 황제에게 진상하지 않았던 걸까? 윤종명은 빈 문혁의 잔에 다시금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저 아이는 말이다. 사는 걸 업으로 여기는 아이다.”
사는 게 업이라?
“그래. 업이지. 사는 것이 마냥 즐거운 이가 세상천지에 몇이나 되겠냐만 저 아이는 반드시 살아 있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며 살아가는 아이다.”
윤종명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나는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걸 네가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너는 이제 만인의 위에 서게 될 터이니. 길가의 풀 한 포기가 지니고 있는 사연마저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반드시 알아주기를 바란 것들을 저 아이가 보여 줄 것이라 생각했다.”
문혁은 윤종명의 말을 곱씹듯 생각에 잠겼다. 백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 옆모습을 윤종명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참으로 학자의 표본 같은 모습이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큰조카의 모습은 묘한 회한을 불러일으켰다.
“많이 컸구나.”
“백부님은 그대로이십니다.”
“입에 발린 소리.”
예끼, 하면서도 입가가 풀어지는 것이 조카의 아부가 싫지는 않은 내색이었다.
“네 이리 자란 모습을 보니 천강이는 어찌 컸을지 궁금하구나.”
얼굴을 마주한 지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나온 아우의 근황 얘기에 문혁은 잠깐 멈칫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그 녀석 피가 끓는 성정이지 않습니까. 느리기 짝이 없는 저와는 달리 천하를 호령하며, 그리 지내고 있습니다.”
“천하를 호령한다 함은 그 녀석이 사방에 적을 만들면서 종횡무진 설치고 있다는 얘기렸다?”
“……예.”
얌전한 수긍에 윤종명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보고 싶구나. 나도 늙은 모양이야. 그 정떨어지게 무뚝뚝한 녀석까지 눈에 아른거리는 걸 보면.”
한창때의 청년 못지않게 건장하고 기가 센 모습이지만 나이가 들기는 든 모양인지 윤종명의 눈가는 몇 년 전보다 확연하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온 수린이 곧장 향한 곳은 부두가 아니라 약방이었다. 약방에 들러 필요한 약초가 무엇인지 물은 후에 내일 다시 산에 올라가서 약초를 구해 볼 요량이었던 것이다. 헌데 약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생각지 못한 변수가 수린을 덮쳤다.
“어이구! 이제야 오는 게야?”
“하, 할멈?”
“어디, 어디. 얼굴 좀 보자. 다친 데는 없는 게지?”
부리나케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이 정신없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벽에 등이 닿았는데 손길은 얼굴뿐 아니라 몸 구석구석을 이리저리 훑었다.
“할멈! 정신없소. 다치긴 어딜 다친다고. 난데없이 왜 그러는 거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사람 얼굴 보자마자 다친 데 없냐고 이리저리 훑어 대는 건 뭐람. 수린의 항변에 답을 준 사람은 천천히 뒤따라오던 정 의원이었다.
“왜 그러긴. 중산댁이 지지난밤에 흉몽을 꾸었단다. 네가 호랑이 앞에 끌려가는 꿈이라나 뭐라나. 그래 놓고 어제 온다는 녀석이 안 왔으니 내도록 끙끙 앓다 저런다.”
난 또 뭐라고. 수린은 한숨을 쉬며 아직까지도 불안하게 자신을 만지고 있는 손을 잡았다. 본래도 고운 손은 아니었지만 수린을 품에 안고 안주까지 끌려와 고생하느라 더 거칠어진 손이 손바닥 안에 느껴졌다.
“할멈. 안주에 호랑이가 어디 있다고 그런 꿈 하나에 걱정을 하시오. 높지도 않은 산, 샅샅이 뒤져 봐야 기껏 나오느니 멧돼지나 족제비지. 호랑이가 있었어 보시오. 진즉 관군들이 잡아갔겠지. 나 멀쩡하니 그만 만져도 되오.”
“정말 괜찮은 게야?”
“괜찮대도.”
그래도 믿기지 않는지 여인은 수린을 불안하게 쳐다보다가 꼭 끌어안았다.
“다치면 안 된다. 우리 아가.”
“……안 다치겠소.”
많은 말이 함축된 아가라는 단어에 수린은 그저 그러겠노라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허허, 세상천지에 스물이나 먹은 아가가 다 있구먼. 천지가 경동할 일이로세.”
정 의원의 너스레에 눈물이 그렁하던 눈매가 매서워졌다.
“시끄럽소! 내 눈에 아가면 아가인 게지, 뭔 시비를 그리 걸고 그러시오!”
“시비로 들리나? 난 그저 궁금해서 꺼낸 얘기라네.”
“저, 저, 시비꾼 꼰대 같으니라고.”
두 노년들의 투닥거림에 수린은 난처해서 손을 저었다.
“두 분 다 그만하시지요. 어제 배가 들어오는 데 갔다가 총관 어르신이 손님 안내를 맡기셔서 여길 들르지 못했었던 겁니다.”
정 의원은 그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린의 손을 보았다.
“그래서 빈손이구만. 어제 남혈초를 잔뜩 캐 오겠다 큰소리를 떵떵 치더니만.”
“그리되었습니다. 총관 어르신이 시키신 일이 있어 오늘은 어렵고 남혈초는 내일 구해 오도록 할 터이니 다른 모자란 약초가 있으면 또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중산댁 밥값 벌어 오려면 약초 많이 캐 와야지. 남혈초랑, 소두풀이 좀 부족하다. 조요초하고.”
정 의원의 말이 거슬렸는지 유모가 빽 소리쳤다.
“오 년이나 내가 지어 주는 밥 먹었으면 밥값이라는 말은 관두소! 확 오늘 저녁밥에 돌을 섞어 버리기 전에.”
그 으름장에 수린은 피식피식 웃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벌써 오 년째인가. 유모가 정 의원의 약방에 몸을 의탁하고 자신과 떨어져 지내게 된 것이.
안주에 와서 첫 이 년은 민진겸의 몫으로 배정받은 초가집에서 유모와 둘이 죽은 듯 살았다. 날이 새는지 저무는지 모르고 새가 날아가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방구석에 틀어박혀 그저 그렇게 산송장처럼 지냈다. 유모가 밥을 지어 숟가락에 담아 주면 꾸역꾸역 목으로 넘기고, 달 밝은 밤에 씻자고 끌고 나가면 우물물 길어 씻고. 어찌 지냈는지 지금 떠올려 봐도 잘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로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수린을 문밖으로 이끈 것은 유모의 급작스러운 발작이었다. 한밤중에 숨넘어가는 소리에 잠이 깨어 경련하는 유모를 보고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 맨발로 뛰쳐나가 가장 가까운 집에 무작정 들어갔었다. 창졸간에 들이닥친 수린을 보고 놀란 집주인 내외가 안주에 의원은 하나뿐이라며 일러 준 대로 정 의원의 약방으로 달려갔을 때, 맨발로 밤길을 뛰어간 수린의 다리는 이미 피투성이였다. 정 의원은 한밤중의 불청객에도 당황하지 않고 먼저 피투성이 발에 천을 동여매 주고 수린이 이끄는 대로 환자에게 향했다.
그때 정 의원이 진단한 유모의 병명은 항재(抗滓)병이었다. 핏줄 안에 더러운 찌꺼기들이 쌓이고 몸 전체에 퍼져 비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병으로,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혈을 다스리고 적절한 약재를 써야 하는데 그 시기를 놓치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몹쓸 병이었다. 첫 발작에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다음 발작이 언제 일어날지, 남은 명이 얼마만큼일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정 의원은 이야기했다.
발작이 일어났을 때 의원이 곁에 없다면 어찌할 방도도 없이 저승 구경을 하게 된다는 얘기에 수린은 울며불며 제발 의원님 곁에 할멈이 머물게 해 달라 애원했다. 유모는 당연히 그럴 수 없다 말했지만 나는 내 어미가 죽는 꼴을 옆에서 볼 수 없노라 발악하는 수린의 말에 결국 정 의원의 식솔이 되어 부엌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수린의 눈에 안주에 사는 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은. 정 의원이 망국의 어의였다는 것도,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아 말리는 것을 업으로 삼은 준명 아범이 민두혼이 가장 즐겨 읽던 철학서의 저자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윤종명이 원수의 형이지만 그와 사뭇 다른 이라는 것도 알았다.
유모가 수린에게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입 안의 구슬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수린을 애지중지하던 이가 순순히 수린과 떨어져 사는 것을 받아들이고 반말을 쓰기 시작한 것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라 인정받은 것 같아서 서운한 한편으로 기뻤다. 그래도 아가라고 부르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어서, 수린은 가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농조로 건네는 ‘아가 도령’이라는 호칭도 달게 들어야 했다.
사립문 밖으로 발걸음 하기 시작하자 젊은 녀석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당장에 여기저기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에 틀어박혀 보낸 시간이 무색하게도 안주의 이들은 거리낌 없이, 마치 어제 만난 식솔 대하듯 수린을 대했다. ‘글 좀 읽는 젊은 녀석’은 참으로 쓸모가 많은 것이라, 수린은 안주 여기저기로 불려 다니기에 바빴다. 수수밭 노 영감이 허리가 아프니 약재를 전해 주라 하면 전해 주고, 대장간 홍 서방이 까막눈이라 아기 작명을 도와 달라 하면 가서 좋은 글자를 골라 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약방에 붙어살며 정 의원에게 약초와 여러 가지 병에 대해 배우는 데 할애했다. 나이 지긋한 정 의원이 아프거나 다른 환자를 돌보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에는 수린이 유모를 구할 수 있어야 했으니까. 그래도 오늘처럼 윤종명이 특별한 지시를 내린 날에는 그것을 최우선으로 따라야 했다. 억압받지 않는 곳이라 해도 안주가 죄인들의 섬인 것은 분명했기에 총관인 윤종명의 명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당분간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응? 오늘내일만이라도 여기 머물면 안 될까?”
그러니 유모의 부탁에 쓴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총관 어르신이 시키신 일이 있다고 했잖소. 내일 아침 일찍 산에 올랐다 얼른 약초 캐서 저녁 전에는 돌아올 터이니 걱정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