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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하는 수 없이 수린의 손을 놓았지만 유모는 못내 불안한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러느냐 묻자 기다렸다는 듯 꺼내는 이야기는, 푸른빛이 나는 마차가 수린의 앞에 와서 서 있는데 타기 싫어 발버둥 치는 걸 장정들이 떼로 몰려와 수린을 태웠다는 것이다.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당도한 곳에는 집채만 한 백호가 있었는데 백호는 수린을 보자마자 아가리를 떠억 벌리더니 앞발로 수린을 끌어다 품 안에 넣고 닭이 알 품듯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품더라는 것이었다.
“난 또 무슨 대단한 흉몽이라고. 호랑이한테 물려 죽는 꿈도 아닌데 걱정할 것도 없겠소.”
딴에는 숨넘어가게 설명하는 꿈 이야기를 허허 웃어넘기는 수린의 모습에 유모는 눈초리가 매서워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꿈을 꾸고 나서 꼬박 이틀을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 그리 말하는 게야. 나는 피가 마르는 줄 알았구만!”
“아, 알았소. 알았어.”
수린은 씩씩거리는 유모의 손을 꼭 잡았다.
“절대 위험한 데에는 안 갈 테니 걱정 마시오. 할멈. 경거망동도 안 할 것이고, 내일 산에 갈 때에도 약초만 캐면 바로 내려오겠소. 약조할 테니 마음 놓으시오.”
진심 어린 다독임에 겨우 유모는 씩씩거리는 숨을 가라앉혔지만 그래도 못내 불안한 눈빛은 감추지 못했다.

* * *


안주는 그리 작은 섬은 아니지만 산지와 평지가 섞여 있어 가옥이 지어진 곳은 항구가 있는 평지 쪽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해서 산세가 험한 곳이 아님에도 인적은 많지 않아 산길은 크고 작은 풀과 나무로 우거져 있었고, 그 탓에 산에 익숙한 자가 아니면 길을 찾기 난감해하곤 했다. 수린은 안주에 사는 이 중에서도 산세에 가장 익숙한 축에 속했다. 벌써 오 년이나 하루가 멀다 하고 산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던 수린에게 산의 지리는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 훤히 떠오르는 빤한 것이었다.
그래서 약초를 캐기 위해 올라온 산등성이 저 멀리에서 귀하디귀한 비단 옷자락이 보였을 때, 재빨리 샛길을 찾아 도망갈 수 있었다.
호위도 없이 온다더니만, 정말 혼자 올 줄이야.
문혁은 긴 부채로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를 들춰 가며 천천히 산을 거닐고 있었다. 수린은 문혁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가늠해 보고 얼른 예상 경로와 반대되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구경이나 하러 올라온 모양이니 금방 내려갈 터이지. 약초를 캐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내려가고 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했건만 약초를 캐다 다음 고개로 넘어가 볼까 생각했던 갈림길에서 또 흰 옷자락을 보자 수린은 운수 사납게 되었다고 입 안으로 투덜거렸다.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있다가 문혁이 소맷자락으로 땀을 닦으며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다람쥐처럼 날래게 자리를 피했는데, 한 식경쯤 후에 또다시 문혁을 마주치게 되자 저자가 일부러 내가 가는 길을 따라오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얼른 피해서 아예 산을 내려가 버려야겠다. 오늘은 일진이 안 좋은 모양이니.
“잠깐 거기 서 보아라. 그만 좀 도망가고.”
뭐 밟았다. 수린은 불러 세우는 차분한 목소리에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입 안이 껄끄러워 입매가 절로 구겨졌다. 안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도망가고 있는 게 다 보인 모양이다.
“네가 날 꺼려 한다는 건 알고 있으나 부득이하게 너를 쫓아와 불러 세운 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쫓아온 게 맞았다. 수린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숨을 몰아쉬는 문혁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산행이 힘들었다고 온몸으로 부르짖고 있는 모양새였다.
“어인 일이십니까. 나리.”
“흠, 그러니까 그게 말이다.”
헛기침을 추임새로 넣어 가며 길게 숨을 가다듬는 것이 껄끄러운 이야기를 꺼낼 듯싶어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산속까지 일부러 쫓아와 저럴까. 하고 싶은 이야기라면 그제 아침에 했어도 되었을 것을. 독대하고 꺼냈어야 하는 이야기인 것일까. 혹, 자신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에 대한 말을 나누고 싶어서? 이런저런 추측을 하면 할수록 미간에 골이 패였다.
심각하게 굳어지는 수린의 표정을 살피던 문혁은 흠흠 하더니 안 그래도 상기된 얼굴이 더욱 상기되어서 시선을 산등성이 저 너머로 던지며 대수롭지 않은 척― 그러나 너무나 어색하기 짝이 없게― 말했다.
“그…… 내려가는 길이 어디냐?”
“……예?”
한참 심각하던 수린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멍하니 답해 버렸다. 문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문혁은 앞서가는 뒤통수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발을 재게 놀렸다. 체구도 작고 키도 문혁보다 한참이나 작은데 산에 익숙해 그런지 발걸음이 여간 빠른 게 아니었다.
갈림길에서 이쪽입니다, 저쪽입니다 정도의 말은 해 줄 법도 한데 문혁의 안내자는 참 고집스럽게도 입 한 번 열지 않고 앞장서서 가기만 바빴다. 절대로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는 탓에 문혁은 아까부터 욱신거리는 발목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아까 높낮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바위 위에서 성큼 뛰어내린 게 화근이었다. 모서리에 튀어나와 있던 나뭇가지를 보지 못하고 찔려 버린 발목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쑤셔 왔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서 내려가 약초라도 붙이면 되겠지 했는데 일직선이라고 생각하고 올라왔던 산길이 올라올 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길을 잃은 것이구나 판단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름 표식이 될 만한 나무를 기억하며 올라왔다 생각했는데 수목(樹木)은 시시각각 둔갑을 하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금방 지나쳤던 길을 다시 가 보아도 그 나무는 그 나무가 아니었다.
화끈― 발목에 한 줄기 열기가 치솟을 무렵에 저 멀리 지나가는 인영(人影)이 보였다. 넓지 않은 산이라 했으니 저자에게 길을 물어 내려 가야겠다 여기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보였다 싶었던 그림자는 이내 사라졌다. 반나절을 사람 그림자도 못 본 산에서 처음 본 이를 놓치면 밤을 지새울 수도 있겠구나 싶어 나뭇잎이 밟힌 흔적을 더듬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깨에 노끈 망태기를 걸친 뒷모습을 재차 발견했을 때는 그것이 어제 보았던 민두혼의 아들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기척을 느끼고 일부러 도망치듯 모른 척 자리를 피하고 있다는 것도.
도망가는 이를 일부러 따라가 멈추게 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다. 허나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걸음이 빠르기도 하군.’
다람쥐처럼 날랜 발걸음을 쫓아가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었다. 어깨에 두른 망태기에서 슬쩍 보이는 초록색 잎들이 혹시 약초가 아닌가 싶었지만 상처가 아프니 약초를 달라 입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기묘한 일이지 않은가. 문혁은 나면서부터 타인을 부리는 데에 익숙한 자였다. 그런데 쉬이 멈추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민씨 일가라는 이름에 드는 부채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철갑처럼 온몸에 벽을 두른 작은 어깨가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안쓰럽다?
그래. 안쓰러웠다. 어찌하여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인지 문혁도 알 길이 없었으나 처음 만난 날부터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이 그리 불쾌하지 않았던 것은 또래의 사내들보다 한참이나 낮은 눈높이를 가진 저자가 문혁에게 연민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수린은 뒤따라오는 문혁의 걸음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진즉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약방에서 어깨너머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도운 것이 수년이다. 몸 상태가 성치 않은 자를 판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접질리기라도 한 건가?’
몸에 밴 듯 곧고 꼿꼿한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허나 걸음의 균형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알은척해야 하나. 그러려면 말을 섞어야 하는데. 에잇, 힘들면 먼저 이야기를 꺼냈겠지. 아무 말 없는 걸 보면 대단찮은 생채기 정도일 것이다.
꺼림칙한 기분을 꾹꾹 눌러 무시하며 최대한 빨리 산에서 내려와 마을 입구에 당도했을 땐 문혁의 걸음걸이는 처음에 비해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마지막까지 수린은 문혁에게 안주에 있는 유일한 의원인 정 의원의 거처 정도는 알려 줘야 하나를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으로 잔뜩 구겨진 수린의 미간을 달리 해석한 모양인지 문혁은 수린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제 갈 길을 향해 갔다.
그리고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수린의 판단은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쳐 왔다.

* * *


정 의원에게 약초를 건네고 돌아와 이른 잠을 청하려던 차에 문이 부서지도록 두드리는 소리가 수린을 방해했다.
“뉘십니까?”
“겸아! 문 열거라! 어서!”
“남씨 아저씨?”
수돌 아범이었다. 급히 시킬 심부름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용무치고는 목소리가 다급했다. 잠자리에 드느라 느슨했던 옷자락을 꼭 여미고 문을 열자마자 수돌 아범은 넋 나간 사람의 행색으로 달려들어 수린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겸아, 겸아. 너 나리와 함께 산에 다녀왔었지?”
“예? 나리라면……아, 예. 헌데 산에 함께 다녀온 것은 아니고…….”
“함께 산에 있었긴 있었던 게지?”
“그, 그렇긴 합니다만. 무슨 일입니까?”
수돌 아범이 잡고 흔드는 통에 어지러워 정신이 없었다. 대체 왜 이러느냐고 제대로 묻기도 전에 수돌 아범은 수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자, 정 의원에게는 따로 사람을 보냈다. 어서.”
“아저씨? 대체 왜 그러십니까?”
“가 보면 안다. 글쎄.”
사색이 되어 막무가내로 이끄는 수돌 아범의 기세를 멈출 수가 없었다.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해 대충 발끝만 끼워 넣은 채 질질 끌려 당도한 곳은 윤종명의 집 앞마당이었다.
“겸아!”
사방에 횃불을 밝혀 낮처럼 환한 앞마당에는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윤종명의 식솔들이었는데, 개중 있던 마을 사람들 중 하나―수린의 유모―가 수린을 보자마자 달려와 수린의 손을 잡았다.
“할멈. 무슨 일인 게요.”
당최 무슨 일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 밤에 유모는 왜 이곳에 와 있으며 사람들은 왜 불안하기 짝이 없는 기색으로 불을 밝히고 이리 모여 있는 겐가.
“들어가 보아라. 정 의원이 네가 오면 바로 들여보내라 했어.”
하며 유모가 가리키는 곳은 윤종명의 집 안방이었다.
무슨 일이 나도 크게 났구나, 총관의 안방에 불려 가다니. 무슨 일인지 짐작도 가지 않아 두려움도 들지 않았다. 그저 얼떨떨한 정신으로 문 앞에 다가가자 스르륵 장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계집종이 열어 준 문 바로 안쪽에는 음전한 성품이라 바깥출입이 잦지 않아 평소 얼굴을 보기 드문 윤종명의 처가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꽉 들어차 숨이 턱 막히는 방의 공기에 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숙이자 윤종명의 처는 수린의 인사에 소리 없이 응대하며 방 윗목을 가리켰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조심 다가간 윗목에 펼쳐진 이부자리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혈색이 환하던 문혁이 시체나 다름없는 파리한 얼굴빛을 하고 누워 있었다.
“왔느냐.”
윤종명은 돌아보지도 않고 수린에게 말을 건넸다. 이부자리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정 의원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수린을 보았다.
“겸아, 보아라.”
정 의원이 이부자리를 들추고 옷을 잘라 드러내 놓은 문혁의 발목을 수린에게 보여 주었다. 수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목에 무언가에 찔린 상처가 있었고 그 주변에 둥그렇게 시퍼런 독이 올라 있었다.
“이것은 시송목(矢松木)의 독이다.”
“시송목이라 하셨습니까?”
수린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시송목은 화살과 같은 잎을 가졌다 하여 그 이름이 지어진 나무로, 기후가 온난한 곳에서만 자란다. 열매를 잘 말려 가루를 내어 처방하면 열병에 특효약이 되지만 나무 자체는 그 독성이 심히 강해 황가에서 지정한 몇몇 농가에서만 재배되고 있었고 안주에서는 진즉에 씨를 말려 버린 터였던 것이다.
“허나 안주에 시송목은 더는 없습니다. 제가 하루가 멀다 하고 산을 오른 것이 벌써 몇 년째이나 시송목은 그림자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럼 이게 무엇이란 말이냐. 환부를 원형으로 두르는 푸른 독의 띠와 급격히 체온이 내려가는 증상, 낯빛이 파리해지는 증상 모두 시송목의 독에 중독되었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다.”
수린은 당황하여 반송장이 되어 있는 문혁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푸른빛이 돌 정도로 파리한데 식은땀이 흘러 머리카락이 축축했다.
“허면 대체 어디에서 시송목의 독에 중독이 되신 것이란 말입니까.”
“그것을 확인해 보려 너를 부른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
되물으려다 확 찬물이 끼얹어진 것 같은 기분에 윤종명을 보았다. 침통하게 가라앉은 표정이 어둡기 짝이 없는 중년의 사내는 조카에게 고정된 시선을 내내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