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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총관 어르신. 혹…… 제가 나리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것이라 의심하신 것입니까?”
하필이면 윤문혁이 중독된 시기며 보기 드문 독에 중독된 것이며 수린이 의심을 살 만도 한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윤종명은 그것은 아니라며 수린의 추측을 부정했다.
“나는 네가 충동적으로 그리 얕은 수를 쓸 만큼 어리석은 녀석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러시면 어찌 저를 부르신 것입니까.”
“이 녀석은 주위에 적이 많은 녀석이다. 지위를 질투하는 자도, 성품을 시기하는 자도, 그리고 이 녀석의 아비가 업이 많은 탓에 이 녀석을 원망하는 자도 있지.”
마지막 말은 수린을 향한 화살 같아서 뜨끔했다. 그러나 윤종명은 부러 수린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네가 산에서 이 녀석을 안내하여 내려왔다 들었다. 주변에 수상한 자는 없었는지, 이 녀석에게 다른 이상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는지를 묻기 위해 부른 것이다.”
이상한 기색이…… 있었다. 분명 걸음걸이가 편치 않아 보였는데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무시했었다. 수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언질을 주었다면 이 사람이 지금 무사했을까?
“주위에…… 수상한 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종일관 무례하던 자신의 태도에도 호통 한 번 없이 넘어가던 문혁의 모습이 떠올라 죄책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그래서 더 이상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윤종명이 무언가를 더 물으려 고개를 돌리는데, 누워 있던 문혁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나리!”
“문혁아!”
정 의원과 윤종명이 동시에 외쳤다. 짧은 신음성을 끝으로 문혁이 고개가 한쪽으로 픽 꺾였다. 동시에 그때까지 잠잠하던 문혁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찌하여야 합니까?”
수린이 급히 묻자 얼른 문혁의 맥을 짚어 보던 정 의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송목의 독은 냉독인지라 천혈삼(天血蔘)의 열기로 다스리는 것이 답이다. 급한 대로 민들레 뿌리와 삼화초(三火草)로 다스리고 있기는 하나 이것은 임기응변에 불과하다. 허나 천혈삼은 워낙에 귀한 약재인지라 안주에서는 하늘이 뒤집힌대도 구할 수 없을 것이 아니냐.”
“황궁에는 있을 것이오.”
윤종명의 목소리에 두 쌍의 시선이 윤종명에게로 향했다.
“황제 폐하께서 천혈삼 백 뿌리라도 이 녀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주실 것이오. 그러니 황궁으로 보내면 되겠소?”
“황궁까지 나리의 몸이 버텨 줄지가 문제입니다. 하루 이틀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닌 데다 배와 마차로 가는 평탄치 않은 여정은 환자의 몸에 무리를 줄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입니다.”
“그러면 천혈삼을 보내 달라 전서구(傳書鳩)를 띄우는 편이 낫겠소?”
“그 또한 시간에 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리가 버틸 수만 있다면 최대한 빨리 황궁에 가셔서 천혈삼을 복용하고 어의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자신 없다는 듯 흐려지는 말끝에, 윤종명은 정 의원의 팔목을 부여잡았다.
“살려야만 하오.”
“총관 어르신.”
“이는 내 혈육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만은 아니오. 안주에 적을 두고 있는 모두를 위해서이기도 하오. 이 녀석이 이대로 변을 당한다면 황제 폐하와 내 아우의 화가 안주를 덮칠 것이 자명한 일이오.”
고목(古木)처럼 진중한 정 의원의 눈매가 떨렸다. 자신의 팔을 붙든 윤종명의 얼굴에, 그리고 울 것 같은 수린의 얼굴에 잠시 머문 시선은 한숨과 함께 아래로 떨구어졌다.
“독 기운이 오를 때마다 궁여지책이나마 쓸 약재를 마련하겠습니다.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나 고비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는 데까지는 해 보겠습니다. 나리의 수행원들에게 약재를 쓸 방법을 일러둘 터이니…….”
윤종명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정 의원의 말을 끊었다.
“정 의원이 따라가 주시오. 이 녀석을 수행하는 이들 중 의술에 조예가 깊은 자는 없소. 어찌 위중한 환자를 맡길 수가 있겠소.”
주름진 노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황제의 명에 의해 죄인이 되어 갇혀 사는 자가 황제의 허락도 없이 섬 밖으로 나가는 것은 반역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것은 곧, 죽으라는 말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정 의원의 소리 없는 항변을 읽은 듯 윤종명은 문가에 앉은 처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 일렀다.
“폐하께서 내게 꼭 답신을 하라 명하신 일이 하나 있소. 그 서신에 더해서 내가 서신을 하나 더 쓸 것이오. 반드시 몸 하나 상하지 않고 정 의원을 돌려보내 달라 쓸 것이오. 이는 내 목숨을 걸고 지킬 약조이니 믿고 따라가 주시오.”
정 의원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에 수린은 다급히 그것을 가로막았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을 쳐 마땅할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이었지만 뒷일을 생각할 짬이 없었다. 정 의원이 안주를 떠난다면 유모는 어찌한단 말인가. 언제 발작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를 돌봐 줄 의원도 없이 덩그러니 방치하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진배없다. 그렇다고 유모를 정 의원에게 딸려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황명도 없이 죄인들이 우르르 유배지를 떠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수린의 눈에 떠오른 혼란을 읽은 정 의원의 눈빛이 깊어졌다. 세월이 새겨 놓은 주름의 골이 호롱불 아래 더 두드러졌다. 난데없는 외침에 윤종명이 붓을 든 손을 멈춘 탓에 먹물은 화선지 위에 동그란 점을 그려 버렸다. 정 의원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윤종명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총관 어르신. 겸이가 나리를 모시고 가면 될 듯합니다.”
수린과 윤종명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제 나이가 이제 먼 여정을 견뎌 내며 환자를 돌보기에는 너무 많습니다. 나리를 돌보는 데 저 같은 늙은이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입니다.”
“허나 정 의원. 문혁이의 상태가 위중하다 하지 않았소. 겸이는 정식으로 의술을 배운 적도 없는데 어찌 위중한 환자를 돌보겠소.”
“수년을 제 옆에서 제 일을 거든 녀석입니다. 어깨너머 배운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환자들은 저 없이도 돌본다는 것을 총관 어르신도 아시지 않습니까. 안주에 있는 이들 중 총명하기라면 손에 꼽을 녀석이니 평소 하던 것처럼만 하면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나리의 신병은 무사할 것입니다. 그렇지?”
수린이 곧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유모가 꾸었다던 꿈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안주를 떠나면 자신은 언제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은 대역 죄인이다. 황궁에 가면 민씨 일가라면 그 집에 머물던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도 밟아 죽이고 싶어 할 이들이 널려 있을 것이다. 가문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원수들은 민두혼의 아들을 마주하게 된다면 기겁을 하며 숨통을 끊으려 들겠지. 하지만, 그래도.
“제가, 나리를 모시고 가겠습니다. 황궁에 당도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리를 살릴 것입니다. 무사히 황궁에 도착하면 곧장 돌아올 것이니 제가 나리를 모시고 가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가야 했다. 내세를 기약하며 이별을 고한 아비와 생사도 모르는 어미를 대신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의 어미가 되어 준 이의 명줄을 잇기 위해서는 가야만 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원수의 아들을 기를 쓰고 살려야 했다.
수린의 말 뒤에 따라온 침묵은 길어졌다. 정 의원이 험험 헛기침을 하며 일어섰다.
“그럼 전 어서 약방으로 돌아가 겸이에게 줄 처방과 약재를 준비하겠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떠나야 할 터이니 서두르는 것이 좋겠지요.”
은근슬쩍 기정사실화해 버리는 능청스러움은 침통한 상황에 얹어져 윤종명으로 하여금 거부할 수 없는 결말을 지어 버렸다. 정 의원이 꾸물꾸물 방을 나가 버리자 윤종명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노인네 능청은 해가 갈수록 단수가 높아지는군. 알겠다. 겸이 네가 따라 가거라. 헌데 겸아.”
“하명하십시오.”
“하명이 아니라 부탁을 할 것이다.”
“부탁……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말끝에 힘을 실으며 윤종명은 자리를 옮겨 수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수린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수린이 놀라 몸을 굳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윤종명은 꼭 잡은 수린의 손을 토닥였다.
“겸아 나는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못한다.”
“…….”
“내 조카들이 내게 아들 같았다면 너는, 내게 여식이 있었다면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라 생각하게 하는 아이였다.”
윤종명이 일찍이 하나 있던 어린 아들을 전란 중에 잃었다는 이야기는 풍문으로 들었다. 그래서 조카들에게 정이 각별하다는 것도 쉬이 짐작했다. 그런데 뒤의 이야기는 짐작지도 못한 것이었다. 딸…… 같았다고?
“황궁에 가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문혁이를 수행하고 있는 자들도 믿지 말거라. 황제 폐하께 문혁이의 신병을 넘기기 전까지는 네가 문혁이의 옆을 꼭 지켜라.”
“그, 그러겠습니다.”
“경에 가면 너는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되겠지. 너의 원수인 내 아우도.”
그럴 것이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그자를 필시 만나게 되리라. 그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저도 모르게 표정이 험해졌다. 윤종명은 그런 수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꼭 돌아오거라. 내 옆에. 부디 몸 건강히 무사하게.”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었다. 원수를 만나더라도 복수심에 자신을 잃지 말라, 경거망동하여 이리들에게 물어뜯길 빌미를 주지 말라, 문혁이 부디 잘 회복할 수 있도록 지켜 주길 바란다. 내 곁에 무사히 돌아오라는 말속에 담긴 의미를 하나하나 짚으며 수린은 겨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 말이 되어 나오지 않음을 윤종명은 굳이 탓하지 않았다.
“그럼 나는 내 처와 채비를 하겠다. 정 의원이 돌아올 동안 문혁이의 옆을 지키고 있거라.”
그렇게 옆에서 수발을 들던 계집종까지 윤종명과 처를 따라 나가자 방 안에는 위태로워 보이는 문혁과 수린만이 남았다. 수린은 한참을 동상처럼 앉아 문혁을 바라만 보다가 자시를 알리는 사찰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올 무렵에야 옆에 놓인 깨끗한 무명천을 들고 문혁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찍어 냈다.
“사셔야 합니다.”
일가족을 파탄으로 내몬 원수의 아들 따위,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일이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윤문혁이 죽는다면 수린은 이제야 겨우 마음이 정착한 두 번째 고향을 잃게 될 것이다.
“이대로 돌아가시면 저승에서도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부디 사십시오.”
그때까지 꾹 다물려 있던 문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몽혼(朦昏) 중에도 협박은 들린 건가 싶어 수린은 픽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2장
붉은 천이 허공에 나부끼며 물결을 그렸다. 두꺼운 천이 펄럭거리는 소리에 행인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걸음을 멈추고 길가로 물러났다. 수십의 장정들이 걸치고 있는 정교하게 엮은 갑옷이 햇빛에 반사되어 쨍한 빛을 내쏘았다. 화살처럼 쏘아진 빛줄기에 저네들끼리도 눈이 부실 법한데 사내들은 돌을 깎아 만든 자들처럼 표정도 없이 말을 몰았다.
“야 이놈들아, 늙은이를 차라리 죽여라!”
말발굽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울려 퍼지는 사람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 하나뿐이었다.
“멈춰! 환자 구하기 전에 내가 죽겠다!”
노인의 피를 토하는 절규에도 군마들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너, 너 이 윤 대장 너! 내 너에게 조만간 필히 살수(殺手)를 쓸 것이다. 두고 보아라!”
무시무시한 저주가 울려 퍼지자 칼날 같던 사내들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큽.”
선두에 선 세 명의 사내 중 오른쪽에 있던 자가 참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주변에 크고 작은 웃음들이 퍼졌다. 물론, 노인은 자신의 저주에 실소하는 자들에게도 아낌없이 저주를 퍼부어 주었다. 짐승이나 매한가지인 놈들, 망나니가 따로 없는 것들, 도리도 모르는 것들 등등 멀미가 나서 죽어 간다는 노인의 욕설은 쉼 없고 기운찼다.
“대장, 잠시 멈출까요?”
네놈들의 밥에 극약을 타고야 말겠다까지 나왔을 때, 선두에 있던 사내를 향해 부관으로 보이는 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몸에 두르고 있는 강철과 같이 단호한 부정이었다.
“저리 기운찬 것을 보니 멀미 좀 한다고 죽지야 않겠지. 명색이 황제 폐하의 건강을 책임지는 황국 제일의 의원인데 자기 멀미쯤이야 다스릴 방도가 있지 않겠느냐.”
어차피 멈추리라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기에 부관은 순순히 물러나 어의에게 멀미를 좀 진정시킬 물이나 건네라 일렀다. 그라고 나이 지긋한 노인을 짐짝처럼 싣고 가는 게 좋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이었다. 키득거리던 사내들도 대장의 말에 다시 무표정을 가장하여 말을 몰았다.
이틀이나 지속된 강행군은 사실 장정들에게도 버거운 여정이었다. 중무장의 갑옷과 창검을 갖춘 상태라면 더더욱. 그러나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목청 좋은 노인 하나만 빼고.
“서신에 적힌 객잔이 위치한 곳이 다음 마을이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속도를 높여야겠다.”
단호한 말에 사내들은 일제히 고삐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황가(皇家)를 상징하는 선명한 붉은 깃발에 새겨진 금빛 용이 바람에 맞춰 춤을 추었다.
“총관 어르신. 혹…… 제가 나리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것이라 의심하신 것입니까?”
하필이면 윤문혁이 중독된 시기며 보기 드문 독에 중독된 것이며 수린이 의심을 살 만도 한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윤종명은 그것은 아니라며 수린의 추측을 부정했다.
“나는 네가 충동적으로 그리 얕은 수를 쓸 만큼 어리석은 녀석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러시면 어찌 저를 부르신 것입니까.”
“이 녀석은 주위에 적이 많은 녀석이다. 지위를 질투하는 자도, 성품을 시기하는 자도, 그리고 이 녀석의 아비가 업이 많은 탓에 이 녀석을 원망하는 자도 있지.”
마지막 말은 수린을 향한 화살 같아서 뜨끔했다. 그러나 윤종명은 부러 수린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네가 산에서 이 녀석을 안내하여 내려왔다 들었다. 주변에 수상한 자는 없었는지, 이 녀석에게 다른 이상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는지를 묻기 위해 부른 것이다.”
이상한 기색이…… 있었다. 분명 걸음걸이가 편치 않아 보였는데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무시했었다. 수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언질을 주었다면 이 사람이 지금 무사했을까?
“주위에…… 수상한 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종일관 무례하던 자신의 태도에도 호통 한 번 없이 넘어가던 문혁의 모습이 떠올라 죄책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그래서 더 이상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윤종명이 무언가를 더 물으려 고개를 돌리는데, 누워 있던 문혁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나리!”
“문혁아!”
정 의원과 윤종명이 동시에 외쳤다. 짧은 신음성을 끝으로 문혁이 고개가 한쪽으로 픽 꺾였다. 동시에 그때까지 잠잠하던 문혁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찌하여야 합니까?”
수린이 급히 묻자 얼른 문혁의 맥을 짚어 보던 정 의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송목의 독은 냉독인지라 천혈삼(天血蔘)의 열기로 다스리는 것이 답이다. 급한 대로 민들레 뿌리와 삼화초(三火草)로 다스리고 있기는 하나 이것은 임기응변에 불과하다. 허나 천혈삼은 워낙에 귀한 약재인지라 안주에서는 하늘이 뒤집힌대도 구할 수 없을 것이 아니냐.”
“황궁에는 있을 것이오.”
윤종명의 목소리에 두 쌍의 시선이 윤종명에게로 향했다.
“황제 폐하께서 천혈삼 백 뿌리라도 이 녀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주실 것이오. 그러니 황궁으로 보내면 되겠소?”
“황궁까지 나리의 몸이 버텨 줄지가 문제입니다. 하루 이틀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닌 데다 배와 마차로 가는 평탄치 않은 여정은 환자의 몸에 무리를 줄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입니다.”
“그러면 천혈삼을 보내 달라 전서구(傳書鳩)를 띄우는 편이 낫겠소?”
“그 또한 시간에 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리가 버틸 수만 있다면 최대한 빨리 황궁에 가셔서 천혈삼을 복용하고 어의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자신 없다는 듯 흐려지는 말끝에, 윤종명은 정 의원의 팔목을 부여잡았다.
“살려야만 하오.”
“총관 어르신.”
“이는 내 혈육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만은 아니오. 안주에 적을 두고 있는 모두를 위해서이기도 하오. 이 녀석이 이대로 변을 당한다면 황제 폐하와 내 아우의 화가 안주를 덮칠 것이 자명한 일이오.”
고목(古木)처럼 진중한 정 의원의 눈매가 떨렸다. 자신의 팔을 붙든 윤종명의 얼굴에, 그리고 울 것 같은 수린의 얼굴에 잠시 머문 시선은 한숨과 함께 아래로 떨구어졌다.
“독 기운이 오를 때마다 궁여지책이나마 쓸 약재를 마련하겠습니다.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나 고비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는 데까지는 해 보겠습니다. 나리의 수행원들에게 약재를 쓸 방법을 일러둘 터이니…….”
윤종명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정 의원의 말을 끊었다.
“정 의원이 따라가 주시오. 이 녀석을 수행하는 이들 중 의술에 조예가 깊은 자는 없소. 어찌 위중한 환자를 맡길 수가 있겠소.”
주름진 노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황제의 명에 의해 죄인이 되어 갇혀 사는 자가 황제의 허락도 없이 섬 밖으로 나가는 것은 반역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것은 곧, 죽으라는 말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정 의원의 소리 없는 항변을 읽은 듯 윤종명은 문가에 앉은 처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 일렀다.
“폐하께서 내게 꼭 답신을 하라 명하신 일이 하나 있소. 그 서신에 더해서 내가 서신을 하나 더 쓸 것이오. 반드시 몸 하나 상하지 않고 정 의원을 돌려보내 달라 쓸 것이오. 이는 내 목숨을 걸고 지킬 약조이니 믿고 따라가 주시오.”
정 의원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에 수린은 다급히 그것을 가로막았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을 쳐 마땅할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이었지만 뒷일을 생각할 짬이 없었다. 정 의원이 안주를 떠난다면 유모는 어찌한단 말인가. 언제 발작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를 돌봐 줄 의원도 없이 덩그러니 방치하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진배없다. 그렇다고 유모를 정 의원에게 딸려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황명도 없이 죄인들이 우르르 유배지를 떠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수린의 눈에 떠오른 혼란을 읽은 정 의원의 눈빛이 깊어졌다. 세월이 새겨 놓은 주름의 골이 호롱불 아래 더 두드러졌다. 난데없는 외침에 윤종명이 붓을 든 손을 멈춘 탓에 먹물은 화선지 위에 동그란 점을 그려 버렸다. 정 의원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윤종명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총관 어르신. 겸이가 나리를 모시고 가면 될 듯합니다.”
수린과 윤종명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제 나이가 이제 먼 여정을 견뎌 내며 환자를 돌보기에는 너무 많습니다. 나리를 돌보는 데 저 같은 늙은이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입니다.”
“허나 정 의원. 문혁이의 상태가 위중하다 하지 않았소. 겸이는 정식으로 의술을 배운 적도 없는데 어찌 위중한 환자를 돌보겠소.”
“수년을 제 옆에서 제 일을 거든 녀석입니다. 어깨너머 배운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환자들은 저 없이도 돌본다는 것을 총관 어르신도 아시지 않습니까. 안주에 있는 이들 중 총명하기라면 손에 꼽을 녀석이니 평소 하던 것처럼만 하면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나리의 신병은 무사할 것입니다. 그렇지?”
수린이 곧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유모가 꾸었다던 꿈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안주를 떠나면 자신은 언제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은 대역 죄인이다. 황궁에 가면 민씨 일가라면 그 집에 머물던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도 밟아 죽이고 싶어 할 이들이 널려 있을 것이다. 가문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원수들은 민두혼의 아들을 마주하게 된다면 기겁을 하며 숨통을 끊으려 들겠지. 하지만, 그래도.
“제가, 나리를 모시고 가겠습니다. 황궁에 당도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리를 살릴 것입니다. 무사히 황궁에 도착하면 곧장 돌아올 것이니 제가 나리를 모시고 가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가야 했다. 내세를 기약하며 이별을 고한 아비와 생사도 모르는 어미를 대신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의 어미가 되어 준 이의 명줄을 잇기 위해서는 가야만 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원수의 아들을 기를 쓰고 살려야 했다.
수린의 말 뒤에 따라온 침묵은 길어졌다. 정 의원이 험험 헛기침을 하며 일어섰다.
“그럼 전 어서 약방으로 돌아가 겸이에게 줄 처방과 약재를 준비하겠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떠나야 할 터이니 서두르는 것이 좋겠지요.”
은근슬쩍 기정사실화해 버리는 능청스러움은 침통한 상황에 얹어져 윤종명으로 하여금 거부할 수 없는 결말을 지어 버렸다. 정 의원이 꾸물꾸물 방을 나가 버리자 윤종명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노인네 능청은 해가 갈수록 단수가 높아지는군. 알겠다. 겸이 네가 따라 가거라. 헌데 겸아.”
“하명하십시오.”
“하명이 아니라 부탁을 할 것이다.”
“부탁……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말끝에 힘을 실으며 윤종명은 자리를 옮겨 수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수린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수린이 놀라 몸을 굳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윤종명은 꼭 잡은 수린의 손을 토닥였다.
“겸아 나는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못한다.”
“…….”
“내 조카들이 내게 아들 같았다면 너는, 내게 여식이 있었다면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라 생각하게 하는 아이였다.”
윤종명이 일찍이 하나 있던 어린 아들을 전란 중에 잃었다는 이야기는 풍문으로 들었다. 그래서 조카들에게 정이 각별하다는 것도 쉬이 짐작했다. 그런데 뒤의 이야기는 짐작지도 못한 것이었다. 딸…… 같았다고?
“황궁에 가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문혁이를 수행하고 있는 자들도 믿지 말거라. 황제 폐하께 문혁이의 신병을 넘기기 전까지는 네가 문혁이의 옆을 꼭 지켜라.”
“그, 그러겠습니다.”
“경에 가면 너는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되겠지. 너의 원수인 내 아우도.”
그럴 것이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그자를 필시 만나게 되리라. 그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저도 모르게 표정이 험해졌다. 윤종명은 그런 수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꼭 돌아오거라. 내 옆에. 부디 몸 건강히 무사하게.”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었다. 원수를 만나더라도 복수심에 자신을 잃지 말라, 경거망동하여 이리들에게 물어뜯길 빌미를 주지 말라, 문혁이 부디 잘 회복할 수 있도록 지켜 주길 바란다. 내 곁에 무사히 돌아오라는 말속에 담긴 의미를 하나하나 짚으며 수린은 겨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 말이 되어 나오지 않음을 윤종명은 굳이 탓하지 않았다.
“그럼 나는 내 처와 채비를 하겠다. 정 의원이 돌아올 동안 문혁이의 옆을 지키고 있거라.”
그렇게 옆에서 수발을 들던 계집종까지 윤종명과 처를 따라 나가자 방 안에는 위태로워 보이는 문혁과 수린만이 남았다. 수린은 한참을 동상처럼 앉아 문혁을 바라만 보다가 자시를 알리는 사찰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올 무렵에야 옆에 놓인 깨끗한 무명천을 들고 문혁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찍어 냈다.
“사셔야 합니다.”
일가족을 파탄으로 내몬 원수의 아들 따위,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일이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윤문혁이 죽는다면 수린은 이제야 겨우 마음이 정착한 두 번째 고향을 잃게 될 것이다.
“이대로 돌아가시면 저승에서도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부디 사십시오.”
그때까지 꾹 다물려 있던 문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몽혼(朦昏) 중에도 협박은 들린 건가 싶어 수린은 픽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2장
붉은 천이 허공에 나부끼며 물결을 그렸다. 두꺼운 천이 펄럭거리는 소리에 행인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걸음을 멈추고 길가로 물러났다. 수십의 장정들이 걸치고 있는 정교하게 엮은 갑옷이 햇빛에 반사되어 쨍한 빛을 내쏘았다. 화살처럼 쏘아진 빛줄기에 저네들끼리도 눈이 부실 법한데 사내들은 돌을 깎아 만든 자들처럼 표정도 없이 말을 몰았다.
“야 이놈들아, 늙은이를 차라리 죽여라!”
말발굽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울려 퍼지는 사람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 하나뿐이었다.
“멈춰! 환자 구하기 전에 내가 죽겠다!”
노인의 피를 토하는 절규에도 군마들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너, 너 이 윤 대장 너! 내 너에게 조만간 필히 살수(殺手)를 쓸 것이다. 두고 보아라!”
무시무시한 저주가 울려 퍼지자 칼날 같던 사내들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큽.”
선두에 선 세 명의 사내 중 오른쪽에 있던 자가 참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주변에 크고 작은 웃음들이 퍼졌다. 물론, 노인은 자신의 저주에 실소하는 자들에게도 아낌없이 저주를 퍼부어 주었다. 짐승이나 매한가지인 놈들, 망나니가 따로 없는 것들, 도리도 모르는 것들 등등 멀미가 나서 죽어 간다는 노인의 욕설은 쉼 없고 기운찼다.
“대장, 잠시 멈출까요?”
네놈들의 밥에 극약을 타고야 말겠다까지 나왔을 때, 선두에 있던 사내를 향해 부관으로 보이는 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몸에 두르고 있는 강철과 같이 단호한 부정이었다.
“저리 기운찬 것을 보니 멀미 좀 한다고 죽지야 않겠지. 명색이 황제 폐하의 건강을 책임지는 황국 제일의 의원인데 자기 멀미쯤이야 다스릴 방도가 있지 않겠느냐.”
어차피 멈추리라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기에 부관은 순순히 물러나 어의에게 멀미를 좀 진정시킬 물이나 건네라 일렀다. 그라고 나이 지긋한 노인을 짐짝처럼 싣고 가는 게 좋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이었다. 키득거리던 사내들도 대장의 말에 다시 무표정을 가장하여 말을 몰았다.
이틀이나 지속된 강행군은 사실 장정들에게도 버거운 여정이었다. 중무장의 갑옷과 창검을 갖춘 상태라면 더더욱. 그러나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목청 좋은 노인 하나만 빼고.
“서신에 적힌 객잔이 위치한 곳이 다음 마을이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속도를 높여야겠다.”
단호한 말에 사내들은 일제히 고삐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황가(皇家)를 상징하는 선명한 붉은 깃발에 새겨진 금빛 용이 바람에 맞춰 춤을 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