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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해가 지고 있었다. 세상을 뒤덮은 노을이 반짝거렸다. 주황빛으로 물든 나무와, 풀과, 꽃이 마치 인사를 하듯 살랑인다. 풀썩.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속절없이 아이가 나뒹군 것은 그때였다.
이레는 더러워진 뺨 위로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상처투성이였던 무릎은 엉망이었다. 조금 겁먹은 눈으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던 이레는,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다시 앞을 보고 뛰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흐릿했지만 멈추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뛰었다.
그렇게 이레는 숲으로 들어섰다. 더 깊이, 깊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았던, 깊고 어두운 숲으로.
***
제야는 인상을 찡그렸다. 늘 그렇듯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보이는 것은 빽빽한 나무 따위가 아니었다. 낯선 아이가 자신의 몸을 이부자리로 삼듯 요령 좋게 누워 콜콜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다.
처음에는 몸이 무겁기에 인간들이 또 다른 저주를 퍼붓고 갔나 싶었고, 아이를 발견한 후에는 이제 하다하다 자신에게 인간의 아이를 떠맡긴 것인가 싶었다. 꽤나 설득력 있는 생각이었던 것이, 아이의 몰골은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해 줄 수가 없었다.
작은 얼굴에는 온갖 생채기와 먼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인지 옷 밖으로 튀어나온 팔과 다리는 삐쩍 말라 있었다. 그 와중에도 제야의 옷자락을 잡아 쥐는 손힘은 꽤 세서, 한눈에 애정이 결핍된 아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겁도 없이. 제야는 할 수만 있다면 아이의 이마를 톡 밀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여기까지 기어 들어와서. 아이는 아마 일어나자마자 저를 보고 자지러지게 빽빽 울 것이고, 그럼 자신은 그런 아이를 쉬이 내쫓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마치 이곳보다 더 편한 곳이 없다는 듯 쌔근쌔근 곤히 자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제야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
이레가 눈을 뜬 것은 거의 하루가 지난 그 다음날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끔뻑 들어 올리자, 순식간에 들이차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칭얼거리듯 몸을 뒤척이니 마치 얼러 주듯 금세 그늘이 졌다.
이레는 햇빛을 가로막은 인영에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햇빛을 등지고 있었기에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레는 어제 잠에 들기 전, 이 남자를 보았다.
잠들기 전의 기억이 떠오르자 이레는 남자의 품 안에서 튕겨나오듯 벌떡 일어섰다. 남자의 시선이 가만히 이레를 따라갔다. 스르륵, 남자의 검은 머리가 그의 고개를 따라 흔들린다. 칠흑 같이 검은 머리다. 마치 검은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결이 좋은.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위에 눈동자는 아주 새빨간 색이었다. 그 붉은 눈에 제 모습이 깨끗이 투영되었다. 이레는 말을 잃었다.
남자는 고요히 이레를 응시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레는 남자의 예상과는 다르게 울지도,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저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조심스레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그 작은 손을 보며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의 손이 닿은 곳은 제야의 손목이었다. 칭칭, 나무줄기에 묶여 단 한 치도 움직일 수 없게 고정이 된. 손목뿐만 아니라 거대한 나무에 묶인 남자가 아이의 눈에 들어찼다. 어디로 도망을 갈 수도, 앉을 수도, 편히 누워 잠이 들 수도 없게 온몸을 나무가 속박하고 있었다. 남자는 마치 죄인처럼 양 팔목은 나무에 높이 붙잡히고, 무릎은 꿇은 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장. 그저 묶인 것뿐인 다른 곳과는 다르게, 단단한 나무줄기는 정확히 남자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아플 법도 하건만, 이미 익숙해져 어떠한 느낌도 나지 않는 남자의 가슴에 아이의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곧, 이레의 푸른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 아프죠?”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아이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휙휙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곧 남자에게서 떨어져 제법 커다란 돌멩이를 가져왔다.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이가 무엇을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
“이봐.”
말릴 생각으로 불러 보았지만 이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를 악문 채 남자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줄기를 향해 돌멩이를 내리쳤다.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아이는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번에는 더욱 높게 돌멩이를 들었다 내리쳤다. 그러나 나무줄기는 이번에도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도리어 돌멩이를 너무 세게 쥔 탓에 안 그래도 성하지 않았던 아이의 손에 상처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손은 신경 쓰지도 않고 그저 멀쩡한 나무줄기를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제야는 그런 아이를 조금 이상한 듯 내려 보았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험한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갈 줄 알았다. 이곳에 갇힌 시간은 이미 헤아릴 수조차 없이 길다. 그 긴 시간 동안 마주친 인간들의 반응은 모두 한결같았다.
그들은 나무에 붙잡힌 제야를 보고 겁을 먹었고, 심장이 뚫린 채로도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악을 했으며,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고는 괴물이라 소리치며 도망갔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도리어 겁을 먹지 않는다면 이상할 터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숲에 출입이 암묵적으로 금지되었는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리하여 그는 아주 오랜만에 인간을 마주했다. 심지어 어린 인간이었다. 아직 어리기 때문인가. 자신의 품에서 잠을 청한 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힘을 쓰는 것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도 저렇게 절박한 얼굴로.
아이의 동그란 뺨 위로 눈물이 방울져 흐른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분하고 화가 나는 건지, 여전히 입술은 앙다문 채 서럽게 몸을 들썩이며 울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이려 했던 제야는, 곧 푹 한숨을 내쉬었다.
겁을 먹지 않았다면 겁을 주어 쫓아내면 되겠지. 어린아이가 자신과 같이 있는 모습이 발견되면 좋을 것이 없다. 제야는 짐짓 낮은 소리를 냈다.
“인간의 아이야.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들어왔느냐.”
“…….”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서 돌아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내 너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테다, 라고 하려던 차였다. 아이는 제야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얼굴로 제야의 심장을 뚫은 나무줄기를 손으로 뜯어내려 했다.
하지만 고작 인간 아이의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아이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하는 듯 보였다. 낑낑거리는 얼굴을 보며 제야는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왜.
“아, 아파요?”
“…….”
“아프죠.”
손으로 나무줄기를 뜯어내는 것마저 실패한 아이가, 죄책감이 가득하고 미안함이 가득한 눈으로 또 울었다. 제야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아이에게 묻고 말았다.
“내가 아픈 것이 왜.”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라고 네가 우느냐.”
하찮은 인간 주제에. 자기 몸 하나 제대로 돌볼 줄 모르는 아이 주제에. 온몸을 흠씬 두드려 맞은 것 같은 몰골을 하고, 나보다는 그 약한 몸이 더 아플 텐데. 자신의 상처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아이는 난생처음 보는 제야의 상처를 걱정했다.
아이는 엉엉 울었다. 그리고는 타박타박 걸어와 낑낑거리며 제야의 몸을 안았다. 체구가 작은 탓에 오히려 안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래도 두 팔을 벌려 열심히 제야를 안았다.
“피, 피도 안 나고…… 사, 상처도 없는데…….”
“…….”
“아파 보여요……. 아플 것 같아요…….”
붉은 피가 딱지가 되어 앉은 제 상처와는 다른 남자의 상처를 안고 아이는 슬퍼했다. 서러운 울음을 열심히 목 안으로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는 이렇게 큰데도 아프고…….”
“…….”
“이 숲은 너무 조용하고…….”
“…….”
“호, 혼자라서…….”
“……아이야.”
“아프지 마세요…….”
이제는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린 아이는 그렇게 울었다. 중간중간 울음을 멈추고 제야의 몸에 호― 하고 바람을 불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덜 아플 것이라고 어디에서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정작 아이에게는 그렇게 보살펴줄 사람 하나 없어 보이는데도.
제야는 한 번 더 겁을 주어 아이를 쫓아내야 할지, 아니면 잠시 이대로 두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자신에게 이리 열심히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했고, 이대로 아이를 쫓아낸다면 정말 숲을 빠져나가는 도중에 혼절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신 제야는 아직까지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해 주었다.
“아프지 않다.”
“…….”
“이런 것쯤, 하나도 아프지 않아.”
흐끅흐끅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자신을 향한다. 제야는 픽 웃어 버렸다. 얼굴이 너무 엉망인 것이 조금 우스웠기 때문이다.
“정말요……?”
또다시 아주 간절한 얼굴. 내가 뭐라고. 내가 아픈 것이 무어 대수라고.
하지만.
“그래.”
이런 작은 인간에게, 이런 한 마디쯤이야. 다행이라는 듯 환하게 펴지는 얼굴을 보며 제야는 생각했다. 여태 피가 배어 나오는 이마와, 무릎과 팔, 그 외 몸 곳곳에 수많은 생채기와 흉터를 가득 달고 말갛게 웃는다. 어쩌면 아는 것이겠지. 그만큼 아파 봐서, 다른 이가 자신처럼 아플까 봐 그게 저어되어서.
어렵지 않은 거짓말 한 마디로 눈물을 멈추고 웃어 보이는 것이 퍽 보기 좋으니, 이 정도 쯤은. 숲도, 제야도, 오랜만의 손님을 맞으며 슬쩍 웃어 보였다.
한바탕 운 이레는 다시 잠이 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제야의 무릎 위에 앉아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아이는 잠을 청했다. 제야는 여전히 반쯤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얼굴로 이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차피 답이 없는 문제였기에 곧 생각을 털어 버렸다. 대신 제야는, 아까부터 거슬렸던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속으로 짧은 주문을 외웠다. 곧 아이의 몸을 하얀 불빛이 감쌌다. 그와 동시에 제야의 심장에는 격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 정도야 이제는 아픈 축에도 들지 않았다. 제야는 이것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한 고통을 알고 있었다.
하얀 불빛이 마치 흡수되듯 아이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야는 아이의 몸을 눈으로 훑었다. 빠진 곳 없이 상처는 치료되었다. 가장 보기 싫었던 무릎의 상처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깨끗하다.
아이의 호흡이 조금 더 편해졌다. 제 품에서 뒤척이는 작은 몸을 바라보며, 제야 역시 눈을 감았다.
***
이레가 눈을 떴을 때는 또다시 아침이었다. 숲 특유의 상쾌한 공기와 솔솔 흘러 들어오는 꽃향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안고 있는 이 따뜻한 체온이 마음에 들었다. 히, 하고 웃은 이레가 조금 더 제야의 몸에 파고들었다.
제야의 호흡은 규칙적이었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정확히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잠꼬대를 하지도 않았다. 잠이 완전히 깬 이레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제야를 관찰했다. 환한 햇볕이 하얀 얼굴에 부서지는 모습이 무척이나 예뻤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야의 얼굴을 만져 보려는데, 불시에 번쩍하고 제야가 눈을 떴다. 눈부신 햇살 밑에서 보아도 여전히 붉은 눈이다. 이레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참 예쁘다.
한편, 막 얕은 잠에서 깬 제야는 황당한 기분으로 품 안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살짝 안기듯 잠들었던 아이는, 밤이 되자 추웠는지 제야의 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딱딱한 나무줄기 때문에 불편할 법도 한데,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듯이 온 힘을 다해 제야를 끌어안았다. 결국 제야는 아이 근처에 작은 불을 피워 주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밝은 아침. 아이가 깨어나자마자 제야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다. 신기할 법도 하지. 이렇게 검은 머리카락이나 하얀 피부는, 인간계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손으로 자신을 만지려고 했을 때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허용해 줄 마음은 없었다. 이제 아픈 곳도 없겠다, 자신이 아프지 않은 것도 알았겠다, 이번에야말로 겁을 먹고 도망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린 인간은 제야의 예상을 벗어났다. 아이는 제야의 눈을 황홀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제야는 어이가 없었다. 참 겁도 없는 인간이구나, 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아저씨, 눈…….”
“…….”
“체리 같아요.”
아저씨라니. 생소한 호칭에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자마자,
“먹고 싶다.”
아주 기가 막혔다.
제야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물었다.
“먹고 싶다고?”
“네.”
“……내 눈을?”
요즘 인간들은 식인도 하나, 제야는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이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
“체리가 먹고 싶어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생생하게 나는 꼬르륵 소리. 아이가 울상을 하고 자신의 배를 쳐다보았다. 아, 그래. 인간은 음식을 섭취해야 살아갈 수 있지. 마르고 작은 아이를 바라보며, 제야가 물었다.
“달리 또 먹고 싶은 건?”
“……먹고 싶은 거요?”
“좋아하는 음식은?”
“……좋아하는 음식요?”
꼭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아이가 맹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는 음식을 가릴 형편이 못 되었고, 음식에 대한 기호를 따져 본 적이 없었다. 마을에서는 이렇듯 배고픈 티를 내면, 어른들이 무척이나 싫어했다. 아이는 흘긋 제야의 눈치를 살폈다. 제야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이의 마음을 모르는 체하며 다시 물었다.
“그래. 좋아하는 음식, 없나?”
“저…….”
좋아하는 음식이라니 생각나는 것이 있기는 했다. 아주 고소한 냄새가 나고, 윤기가 흐르는…… 이레도 여태까지 딱 세 번밖에 못 먹어 본, 그런 음식. 이레는 침을 꼴깍 삼켰다.
“주……”
“…….”
“주먹밥요…….”
“…….”
……너무 비싼 걸 불렀나? 길어지는 제야의 침묵에 이레는 불안해졌다. 때리면 어떡하지. 식충이 같은 것, 하며 번쩍 손을 올리던 동네 아저씨가 떠올랐다. 이레는 눈을 감고 몸을 잔뜩 움츠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뺨을 울리는 익숙한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짝 실눈을 뜨니, 제야가 아주 복잡한 얼굴로 이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꼭…… 하얀 쌀밥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기, 김은 없어도 되고……. 그냥, 그냥 밥이면…….”
“……그게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네!”
“…….”
“진짜 맛있는데…….”
가끔 촌장님이 손님을 대접하고 남은 것을 버릴 때에나 먹을 수 있는 음식 중 하나였다. 제야의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레는 또다시 몸을 움찔했다. 역시 너무 비싼 것을 불렀나 봐. 저도 모르게 제야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내지 않으면 좋겠는데. 화내지 않으면…….
“먹거라.”
하지만 들려온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이레가 의아한 얼굴로 제야를 쳐다보았다. 제야는 눈짓으로 이레의 등 뒤를 가리켰다. 이레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가뜩이나 동그란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우와.”
주먹밥이 아주 많았다. 하얀 쌀밥에는 윤기가 흘렀고, 커다란 김이 듬뿍듬뿍 올라가 있었다. 하얀 밥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빨간 밥, 노란 밥, 색색이 예쁜 색깔의 밥도 있었고, 자그마한 깨가 뿌려져 있었다.
이렇게 많은 주먹밥이라니! 이레는 흥분한 나머지 폴짝 제야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발을 동동 굴렸다. 어떤 것부터 먹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휙, 이레가 제야를 돌아보았다.
“이거……. 이거, 다 제 거예요……?”
제야가 무심하게 까딱,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의 입이 아주 크게 벌어졌다. 이레는 곧바로 꾸벅, 제야에게 인사했다.
“고, 고맙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많이 주다니, 저분은 정말 좋은 분이신가 봐. 이레는 붉어진 얼굴로 주먹밥의 주위를 빙빙 돌다가, 결심을 한 듯 그동안 제일 먹고 싶었던 하얀 주먹밥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먹으려는 차, 이레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제야를 바라보았다.
잠시 주먹밥을 한 번, 제야를 한 번 번갈아 보던 이레가 곧 총총 제야에게 다가갔다. 이레가 왜 다가오는지 알 수 없어 가만히 아이를 보던 제야는, 제게 불쑥 내밀어진 주먹밥을 보고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저씨 먼저 드세요.”
금방이라도 음식을 입에 다 구겨 넣고 싶다는 얼굴을 하고,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잡은 채 이레는 제야에게 음식을 내밀었다. 제야는 아이의 주먹만 한 주먹밥을 보다가, 곧 고개를 내려 한 입 살짝 베어 물었다. 이레가 환하게 웃었다. 제야가 주먹밥을 씹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도 왕 주먹밥을 입에 넣었다.
아주 배가 고팠는지 작은 턱이 급히 움직였다. 그럼에도 한 번에 많은 음식을 씹어 넘기지는 못했다. 조금씩 아껴 먹는 것이 습관이 되었을 터였다.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라 했더니 고작 주먹밥 따위를 말하고, 만들어서 주었더니 맛을 볼 생각은커녕 자신에게 먼저 권하고. 보면 볼수록 도저히 짐작을 할 수가 없는 아이었다.
인간의 음식을 잘 모르는 제야가 먹기에도 참 평범하고 밋밋한 맛인데, 마치 세상에서 제일 귀한 음식을 먹는다는 듯 이레는 굉장히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도 때때로 제야를 챙기며 먹으라고 권했다. 그럼 제야는 별다른 말없이 조금씩 음식을 베어 물었다. 그럼 또 이레는 행복한 듯 웃었다.
양이 많지 않은 아이와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되는 제야는 결국 주먹밥을 다 먹지 못 했다. 하지만 이레는 내내 즐거운 얼굴이었다. 제야는 여전히 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싱글벙글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하는 아이를 보는 것이 나쁘지 않아, 제야는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새 배가 찬 아이는 또 솔솔 잠이 오는지 꾸물꾸물 제야의 위에서 잠을 청했고, 너무도 자연스러운 몸짓에 아이를 말릴 생각도 못한 제야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 버렸다. 언제나 익숙한 찬바람이, 높은 아이의 체온 때문인지 차갑다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이 지고, 새벽이 오고, 다시 아침이 찾아왔을 때, 아이는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저씨.” 하고.
대답 없는 제야를 빤히 보면서도 이레는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빙긋 웃었다. 제야의 품에서 내려온 이레가 폴짝폴짝 주위를 돌아다닌다. 제야는 괴상한 생물체를 보듯 이레를 보다, 이내 눈을 감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세상을 뒤덮은 노을이 반짝거렸다. 주황빛으로 물든 나무와, 풀과, 꽃이 마치 인사를 하듯 살랑인다. 풀썩.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속절없이 아이가 나뒹군 것은 그때였다.
이레는 더러워진 뺨 위로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상처투성이였던 무릎은 엉망이었다. 조금 겁먹은 눈으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던 이레는,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다시 앞을 보고 뛰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흐릿했지만 멈추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뛰었다.
그렇게 이레는 숲으로 들어섰다. 더 깊이, 깊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았던, 깊고 어두운 숲으로.
제야는 인상을 찡그렸다. 늘 그렇듯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보이는 것은 빽빽한 나무 따위가 아니었다. 낯선 아이가 자신의 몸을 이부자리로 삼듯 요령 좋게 누워 콜콜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다.
처음에는 몸이 무겁기에 인간들이 또 다른 저주를 퍼붓고 갔나 싶었고, 아이를 발견한 후에는 이제 하다하다 자신에게 인간의 아이를 떠맡긴 것인가 싶었다. 꽤나 설득력 있는 생각이었던 것이, 아이의 몰골은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해 줄 수가 없었다.
작은 얼굴에는 온갖 생채기와 먼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인지 옷 밖으로 튀어나온 팔과 다리는 삐쩍 말라 있었다. 그 와중에도 제야의 옷자락을 잡아 쥐는 손힘은 꽤 세서, 한눈에 애정이 결핍된 아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겁도 없이. 제야는 할 수만 있다면 아이의 이마를 톡 밀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여기까지 기어 들어와서. 아이는 아마 일어나자마자 저를 보고 자지러지게 빽빽 울 것이고, 그럼 자신은 그런 아이를 쉬이 내쫓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마치 이곳보다 더 편한 곳이 없다는 듯 쌔근쌔근 곤히 자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제야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레가 눈을 뜬 것은 거의 하루가 지난 그 다음날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끔뻑 들어 올리자, 순식간에 들이차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칭얼거리듯 몸을 뒤척이니 마치 얼러 주듯 금세 그늘이 졌다.
이레는 햇빛을 가로막은 인영에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햇빛을 등지고 있었기에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레는 어제 잠에 들기 전, 이 남자를 보았다.
잠들기 전의 기억이 떠오르자 이레는 남자의 품 안에서 튕겨나오듯 벌떡 일어섰다. 남자의 시선이 가만히 이레를 따라갔다. 스르륵, 남자의 검은 머리가 그의 고개를 따라 흔들린다. 칠흑 같이 검은 머리다. 마치 검은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결이 좋은.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위에 눈동자는 아주 새빨간 색이었다. 그 붉은 눈에 제 모습이 깨끗이 투영되었다. 이레는 말을 잃었다.
남자는 고요히 이레를 응시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레는 남자의 예상과는 다르게 울지도,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저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조심스레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그 작은 손을 보며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의 손이 닿은 곳은 제야의 손목이었다. 칭칭, 나무줄기에 묶여 단 한 치도 움직일 수 없게 고정이 된. 손목뿐만 아니라 거대한 나무에 묶인 남자가 아이의 눈에 들어찼다. 어디로 도망을 갈 수도, 앉을 수도, 편히 누워 잠이 들 수도 없게 온몸을 나무가 속박하고 있었다. 남자는 마치 죄인처럼 양 팔목은 나무에 높이 붙잡히고, 무릎은 꿇은 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장. 그저 묶인 것뿐인 다른 곳과는 다르게, 단단한 나무줄기는 정확히 남자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아플 법도 하건만, 이미 익숙해져 어떠한 느낌도 나지 않는 남자의 가슴에 아이의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곧, 이레의 푸른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 아프죠?”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아이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휙휙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곧 남자에게서 떨어져 제법 커다란 돌멩이를 가져왔다.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이가 무엇을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
“이봐.”
말릴 생각으로 불러 보았지만 이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를 악문 채 남자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줄기를 향해 돌멩이를 내리쳤다.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아이는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번에는 더욱 높게 돌멩이를 들었다 내리쳤다. 그러나 나무줄기는 이번에도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도리어 돌멩이를 너무 세게 쥔 탓에 안 그래도 성하지 않았던 아이의 손에 상처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손은 신경 쓰지도 않고 그저 멀쩡한 나무줄기를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제야는 그런 아이를 조금 이상한 듯 내려 보았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험한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갈 줄 알았다. 이곳에 갇힌 시간은 이미 헤아릴 수조차 없이 길다. 그 긴 시간 동안 마주친 인간들의 반응은 모두 한결같았다.
그들은 나무에 붙잡힌 제야를 보고 겁을 먹었고, 심장이 뚫린 채로도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악을 했으며,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고는 괴물이라 소리치며 도망갔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도리어 겁을 먹지 않는다면 이상할 터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숲에 출입이 암묵적으로 금지되었는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리하여 그는 아주 오랜만에 인간을 마주했다. 심지어 어린 인간이었다. 아직 어리기 때문인가. 자신의 품에서 잠을 청한 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힘을 쓰는 것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도 저렇게 절박한 얼굴로.
아이의 동그란 뺨 위로 눈물이 방울져 흐른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분하고 화가 나는 건지, 여전히 입술은 앙다문 채 서럽게 몸을 들썩이며 울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이려 했던 제야는, 곧 푹 한숨을 내쉬었다.
겁을 먹지 않았다면 겁을 주어 쫓아내면 되겠지. 어린아이가 자신과 같이 있는 모습이 발견되면 좋을 것이 없다. 제야는 짐짓 낮은 소리를 냈다.
“인간의 아이야.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들어왔느냐.”
“…….”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서 돌아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내 너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테다, 라고 하려던 차였다. 아이는 제야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얼굴로 제야의 심장을 뚫은 나무줄기를 손으로 뜯어내려 했다.
하지만 고작 인간 아이의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아이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하는 듯 보였다. 낑낑거리는 얼굴을 보며 제야는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왜.
“아, 아파요?”
“…….”
“아프죠.”
손으로 나무줄기를 뜯어내는 것마저 실패한 아이가, 죄책감이 가득하고 미안함이 가득한 눈으로 또 울었다. 제야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아이에게 묻고 말았다.
“내가 아픈 것이 왜.”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라고 네가 우느냐.”
하찮은 인간 주제에. 자기 몸 하나 제대로 돌볼 줄 모르는 아이 주제에. 온몸을 흠씬 두드려 맞은 것 같은 몰골을 하고, 나보다는 그 약한 몸이 더 아플 텐데. 자신의 상처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아이는 난생처음 보는 제야의 상처를 걱정했다.
아이는 엉엉 울었다. 그리고는 타박타박 걸어와 낑낑거리며 제야의 몸을 안았다. 체구가 작은 탓에 오히려 안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래도 두 팔을 벌려 열심히 제야를 안았다.
“피, 피도 안 나고…… 사, 상처도 없는데…….”
“…….”
“아파 보여요……. 아플 것 같아요…….”
붉은 피가 딱지가 되어 앉은 제 상처와는 다른 남자의 상처를 안고 아이는 슬퍼했다. 서러운 울음을 열심히 목 안으로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는 이렇게 큰데도 아프고…….”
“…….”
“이 숲은 너무 조용하고…….”
“…….”
“호, 혼자라서…….”
“……아이야.”
“아프지 마세요…….”
이제는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린 아이는 그렇게 울었다. 중간중간 울음을 멈추고 제야의 몸에 호― 하고 바람을 불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덜 아플 것이라고 어디에서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정작 아이에게는 그렇게 보살펴줄 사람 하나 없어 보이는데도.
제야는 한 번 더 겁을 주어 아이를 쫓아내야 할지, 아니면 잠시 이대로 두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자신에게 이리 열심히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했고, 이대로 아이를 쫓아낸다면 정말 숲을 빠져나가는 도중에 혼절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신 제야는 아직까지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해 주었다.
“아프지 않다.”
“…….”
“이런 것쯤, 하나도 아프지 않아.”
흐끅흐끅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자신을 향한다. 제야는 픽 웃어 버렸다. 얼굴이 너무 엉망인 것이 조금 우스웠기 때문이다.
“정말요……?”
또다시 아주 간절한 얼굴. 내가 뭐라고. 내가 아픈 것이 무어 대수라고.
하지만.
“그래.”
이런 작은 인간에게, 이런 한 마디쯤이야. 다행이라는 듯 환하게 펴지는 얼굴을 보며 제야는 생각했다. 여태 피가 배어 나오는 이마와, 무릎과 팔, 그 외 몸 곳곳에 수많은 생채기와 흉터를 가득 달고 말갛게 웃는다. 어쩌면 아는 것이겠지. 그만큼 아파 봐서, 다른 이가 자신처럼 아플까 봐 그게 저어되어서.
어렵지 않은 거짓말 한 마디로 눈물을 멈추고 웃어 보이는 것이 퍽 보기 좋으니, 이 정도 쯤은. 숲도, 제야도, 오랜만의 손님을 맞으며 슬쩍 웃어 보였다.
한바탕 운 이레는 다시 잠이 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제야의 무릎 위에 앉아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아이는 잠을 청했다. 제야는 여전히 반쯤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얼굴로 이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차피 답이 없는 문제였기에 곧 생각을 털어 버렸다. 대신 제야는, 아까부터 거슬렸던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속으로 짧은 주문을 외웠다. 곧 아이의 몸을 하얀 불빛이 감쌌다. 그와 동시에 제야의 심장에는 격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 정도야 이제는 아픈 축에도 들지 않았다. 제야는 이것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한 고통을 알고 있었다.
하얀 불빛이 마치 흡수되듯 아이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야는 아이의 몸을 눈으로 훑었다. 빠진 곳 없이 상처는 치료되었다. 가장 보기 싫었던 무릎의 상처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깨끗하다.
아이의 호흡이 조금 더 편해졌다. 제 품에서 뒤척이는 작은 몸을 바라보며, 제야 역시 눈을 감았다.
이레가 눈을 떴을 때는 또다시 아침이었다. 숲 특유의 상쾌한 공기와 솔솔 흘러 들어오는 꽃향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안고 있는 이 따뜻한 체온이 마음에 들었다. 히, 하고 웃은 이레가 조금 더 제야의 몸에 파고들었다.
제야의 호흡은 규칙적이었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정확히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잠꼬대를 하지도 않았다. 잠이 완전히 깬 이레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제야를 관찰했다. 환한 햇볕이 하얀 얼굴에 부서지는 모습이 무척이나 예뻤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야의 얼굴을 만져 보려는데, 불시에 번쩍하고 제야가 눈을 떴다. 눈부신 햇살 밑에서 보아도 여전히 붉은 눈이다. 이레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참 예쁘다.
한편, 막 얕은 잠에서 깬 제야는 황당한 기분으로 품 안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살짝 안기듯 잠들었던 아이는, 밤이 되자 추웠는지 제야의 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딱딱한 나무줄기 때문에 불편할 법도 한데,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듯이 온 힘을 다해 제야를 끌어안았다. 결국 제야는 아이 근처에 작은 불을 피워 주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밝은 아침. 아이가 깨어나자마자 제야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다. 신기할 법도 하지. 이렇게 검은 머리카락이나 하얀 피부는, 인간계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손으로 자신을 만지려고 했을 때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허용해 줄 마음은 없었다. 이제 아픈 곳도 없겠다, 자신이 아프지 않은 것도 알았겠다, 이번에야말로 겁을 먹고 도망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린 인간은 제야의 예상을 벗어났다. 아이는 제야의 눈을 황홀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제야는 어이가 없었다. 참 겁도 없는 인간이구나, 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아저씨, 눈…….”
“…….”
“체리 같아요.”
아저씨라니. 생소한 호칭에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자마자,
“먹고 싶다.”
아주 기가 막혔다.
제야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물었다.
“먹고 싶다고?”
“네.”
“……내 눈을?”
요즘 인간들은 식인도 하나, 제야는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이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
“체리가 먹고 싶어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생생하게 나는 꼬르륵 소리. 아이가 울상을 하고 자신의 배를 쳐다보았다. 아, 그래. 인간은 음식을 섭취해야 살아갈 수 있지. 마르고 작은 아이를 바라보며, 제야가 물었다.
“달리 또 먹고 싶은 건?”
“……먹고 싶은 거요?”
“좋아하는 음식은?”
“……좋아하는 음식요?”
꼭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아이가 맹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는 음식을 가릴 형편이 못 되었고, 음식에 대한 기호를 따져 본 적이 없었다. 마을에서는 이렇듯 배고픈 티를 내면, 어른들이 무척이나 싫어했다. 아이는 흘긋 제야의 눈치를 살폈다. 제야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이의 마음을 모르는 체하며 다시 물었다.
“그래. 좋아하는 음식, 없나?”
“저…….”
좋아하는 음식이라니 생각나는 것이 있기는 했다. 아주 고소한 냄새가 나고, 윤기가 흐르는…… 이레도 여태까지 딱 세 번밖에 못 먹어 본, 그런 음식. 이레는 침을 꼴깍 삼켰다.
“주……”
“…….”
“주먹밥요…….”
“…….”
……너무 비싼 걸 불렀나? 길어지는 제야의 침묵에 이레는 불안해졌다. 때리면 어떡하지. 식충이 같은 것, 하며 번쩍 손을 올리던 동네 아저씨가 떠올랐다. 이레는 눈을 감고 몸을 잔뜩 움츠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뺨을 울리는 익숙한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짝 실눈을 뜨니, 제야가 아주 복잡한 얼굴로 이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꼭…… 하얀 쌀밥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기, 김은 없어도 되고……. 그냥, 그냥 밥이면…….”
“……그게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네!”
“…….”
“진짜 맛있는데…….”
가끔 촌장님이 손님을 대접하고 남은 것을 버릴 때에나 먹을 수 있는 음식 중 하나였다. 제야의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레는 또다시 몸을 움찔했다. 역시 너무 비싼 것을 불렀나 봐. 저도 모르게 제야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내지 않으면 좋겠는데. 화내지 않으면…….
“먹거라.”
하지만 들려온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이레가 의아한 얼굴로 제야를 쳐다보았다. 제야는 눈짓으로 이레의 등 뒤를 가리켰다. 이레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가뜩이나 동그란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우와.”
주먹밥이 아주 많았다. 하얀 쌀밥에는 윤기가 흘렀고, 커다란 김이 듬뿍듬뿍 올라가 있었다. 하얀 밥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빨간 밥, 노란 밥, 색색이 예쁜 색깔의 밥도 있었고, 자그마한 깨가 뿌려져 있었다.
이렇게 많은 주먹밥이라니! 이레는 흥분한 나머지 폴짝 제야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발을 동동 굴렸다. 어떤 것부터 먹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휙, 이레가 제야를 돌아보았다.
“이거……. 이거, 다 제 거예요……?”
제야가 무심하게 까딱,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의 입이 아주 크게 벌어졌다. 이레는 곧바로 꾸벅, 제야에게 인사했다.
“고, 고맙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많이 주다니, 저분은 정말 좋은 분이신가 봐. 이레는 붉어진 얼굴로 주먹밥의 주위를 빙빙 돌다가, 결심을 한 듯 그동안 제일 먹고 싶었던 하얀 주먹밥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먹으려는 차, 이레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제야를 바라보았다.
잠시 주먹밥을 한 번, 제야를 한 번 번갈아 보던 이레가 곧 총총 제야에게 다가갔다. 이레가 왜 다가오는지 알 수 없어 가만히 아이를 보던 제야는, 제게 불쑥 내밀어진 주먹밥을 보고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저씨 먼저 드세요.”
금방이라도 음식을 입에 다 구겨 넣고 싶다는 얼굴을 하고,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잡은 채 이레는 제야에게 음식을 내밀었다. 제야는 아이의 주먹만 한 주먹밥을 보다가, 곧 고개를 내려 한 입 살짝 베어 물었다. 이레가 환하게 웃었다. 제야가 주먹밥을 씹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도 왕 주먹밥을 입에 넣었다.
아주 배가 고팠는지 작은 턱이 급히 움직였다. 그럼에도 한 번에 많은 음식을 씹어 넘기지는 못했다. 조금씩 아껴 먹는 것이 습관이 되었을 터였다.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라 했더니 고작 주먹밥 따위를 말하고, 만들어서 주었더니 맛을 볼 생각은커녕 자신에게 먼저 권하고. 보면 볼수록 도저히 짐작을 할 수가 없는 아이었다.
인간의 음식을 잘 모르는 제야가 먹기에도 참 평범하고 밋밋한 맛인데, 마치 세상에서 제일 귀한 음식을 먹는다는 듯 이레는 굉장히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도 때때로 제야를 챙기며 먹으라고 권했다. 그럼 제야는 별다른 말없이 조금씩 음식을 베어 물었다. 그럼 또 이레는 행복한 듯 웃었다.
양이 많지 않은 아이와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되는 제야는 결국 주먹밥을 다 먹지 못 했다. 하지만 이레는 내내 즐거운 얼굴이었다. 제야는 여전히 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싱글벙글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하는 아이를 보는 것이 나쁘지 않아, 제야는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새 배가 찬 아이는 또 솔솔 잠이 오는지 꾸물꾸물 제야의 위에서 잠을 청했고, 너무도 자연스러운 몸짓에 아이를 말릴 생각도 못한 제야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 버렸다. 언제나 익숙한 찬바람이, 높은 아이의 체온 때문인지 차갑다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이 지고, 새벽이 오고, 다시 아침이 찾아왔을 때, 아이는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저씨.” 하고.
대답 없는 제야를 빤히 보면서도 이레는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빙긋 웃었다. 제야의 품에서 내려온 이레가 폴짝폴짝 주위를 돌아다닌다. 제야는 괴상한 생물체를 보듯 이레를 보다, 이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