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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조건 1화
0. 기점
살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뒤통수를 후려 맞는 일이 있다.
“뭐……?”
막 불붙인 담배를 깊게 빨던 이욱은 고개를 들었다. 피어 올라가는 연기 너머로 침대 가에 걸터앉은 그녀가 보였다. 어둑한 스탠드 불빛에 새하얀 이욱의 셔츠를 걸친 여린 몸이 설핏설핏 비쳤다. 단추를 하나둘 끄르는 손길은 연달아 한 섹스 탓인지 나른했다. 목소리 또한.
“나 다른 남자 생겼으니까 헤어지자고. 어차피 서로 질릴 시기잖아.”
이욱은 기가 막혔다. 이별이 한쪽의 일방적인, 그것도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으로 이렇게 끝나는 것이었던가. 아니, 그런 것보다 자신의 감정까지 멋대로 속단하는 뻔뻔함에 당장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아, 그건가? 상대방을 같은 입장으로 끌어 내려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벼운 짐까지 털어 버리려는 자기기만?
“후…….”
이욱은 얼마 타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툭툭 털은 후 다시 입에 물었다. 구겨진 미간에 짙은 음영이 서렸다. 사귄지 사흘 만에 베드 인을 하긴 했으나, 그래도 1년가량 만났다. 최근 이욱이 대리로 진급하며 한동안 많은 업무에 매달리느라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그래도 섹스에서 열과 흥이 식는 경우는 없었다. 지금도 아직 침대에 열기가 남아 있지 않나.
이욱은 울컥 짜증이 났다.
‘이번에도.’
무난한 연애, 섹스, 그리고 일방적인 이별 통보.
지긋지긋한 패턴.
치익. 이욱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강하게 빨았다. 그러고 연기와 함께 손을 내저었다.
“아아, 그래라, 그래. 잘 가라, さよなら, Good Bye, До свида'ния, Chao.”
“구질구질하게 받았던 선물 다 내놓으란 소리는 하지 마.”
“괜찮아. 반은 짝퉁이었으니까.”
“뭐?!”
그러나 이욱은 내심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어렴풋 느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1년 정도 만나기는 했지만 ‘끝’까지 갈 만한 관계는 아니라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허무한 결말을 맞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것도 ‘다른 남자’라니.
‘조금 전까지 내 밑에서 교성을 지르던 여자가.’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론 당황스러웠다.
보통 이런 경우엔 분노가 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도 이 여자 몸만 좋아했던 걸까? 아니다. 아니야. 함께 웃고 떠드는 시간이 즐거운 적이 있었다. 분명 좋아했을 텐데.
‘드라마나 영화에서 떠들어 대는 사랑 타령 같은 게 전혀 공감된 적이 없긴 했어도, 좋아하긴 했었다고.’
그럼에도 또 다른 이성은 돌아갔다. 이것 또한 이욱을 당황케 했다. 어느샌가 계산적인 어른이 되어 버린 걸까 싶어, 이번엔 우울한 감정이 찾아왔다.
“어쨌든 선물 돌려 달란 소리는 안 할 테니까 전에 나한테 빌려 간 2백.”
“남자가 쪼잔하게 이럴래? 석 달 동안 한 번도 돌려 달란 소리, 하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대답을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그녀는 ‘연봉도 많이 받는 주제에’부터 시작해서, 그간 이욱에게 쌓였던 소소한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재간이 없는 이욱은 네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섹프가 더 나았지.’
처음부터 계산된 관계였다면, 서로 간의 사생활에 깊숙이 관계되는 일 없이 담백하게 끝냈을 터다. 지금 느끼는 당황스런 감정과 짜증을 느끼는 일 없이.
“태워다 줄까?”
“됐네요!”
화내면서 이욱의 셔츠를 벗는 그녀의 몸이 유연하게 휘었다. 역시 몸매 하나는 기가 막혔다. 새하얀 피부도 깨끗했다.
어쩐지 오늘은 키스 마크나 잇자국을 남기지 말라고 하더니.
이욱은 씁쓸한 눈을 끔뻑이며 담배 연기를 뱉었다. 그녀가 침대 아래에 내팽개쳐진 팬티를 집어 다리 사이에 끼웠다. 그러곤 이욱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딱 잘라 말했다.
“다신 연락하지 마.”
“네.”
차인 건 난데.
이욱은 한층 더 우울해졌다.
“SNS도 수신 거부할 거야.”
“네.”
……차인 건 난데.
이욱은 재차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브래지어를 집어 들었다. 이번엔 이욱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내 친구들한테도 연락하지 마. 이미 다 말해 둬서 받지도 않겠지만.”
“알았다고, 이 여자야.”
“뒤에 브라 후크 채워 줘.”
“…….”
이욱이 다섯 번째로 사귀었던 그녀는 이렇게 그의 곁을 떠났다.
이욱은 실연당한 김에 한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울함을 전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향했던 감정이 세간에서 떠드는 ‘좋아한다’는 감정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생각해 본들 마땅한 대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와 헤어진 지 열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욱은 다시 한번 예상치 못한 뒤통수를 맞았다.
이번엔 좀 아팠다.
“나, 게이야.”
무언가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생각에, 이욱이 처음 보인 반응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이라 다소 소란스러운 쌀국수집에서 들을 만한 얘기는 아니지 않나?
‘기획부 사원 유지운’. 평소에는 식사할 때 방해가 될까 셔츠 주머니에 잘 넣고 다니던 사원증이 길게 내려와 있었다. 이욱이 주머니에 쑤셔 넣은 사원증과 똑같은 회사 로고가 새겨진 사원증에는 선이 가늘고 단정하게 생긴, 지금의 모습과 똑같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지운이 이욱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선배 좋아했어.”
“……뭐?”
1. 혼란 (1)
“미안. 나 그쪽으로는 전혀 생각도 안 해 봤거든.”
정신을 차렸을 때 이욱은 저도 모르게 거절의 답변을 내뱉고 있었다. 지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점심을 먹고, 별다른 대화 없이 함께 회사로 돌아와 각자의 부서를 향해 헤어졌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충격을 준 가해자가 곁을 떠난 후에야 이욱은 뒤늦게 혼란에 잠겼다.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땐 지금보다 좀 더 키가 작았지만 차분한 성격은 여전해서 지운이 동생이면 챙겨 줄 맛이 조금이라도 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군대와 대학에서 갈려 이 직장에서 우연히 재회하기 전까지 만나지 못했던 시간이 있긴 했어도 그런 주제로 농담할 성격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뭐냐고, 진짜…….”
오늘 내로 제출해야 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에 사용할 집중력이 자꾸만 흐트러졌다. 아까는 너무 놀라 이성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10년 넘게 알고 지냈던 후배에게서 느끼는 배신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신경을 긁었다. 그에 따라 어제 차였던 사건은 머리 깊숙한 곳에 무서운 속도로 묻혀 갔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이욱은 모니터에 뜨는 오타 실수에 미간을 찌푸렸다.
“씨발, 못 해 먹겠네.”
“한 대리, 뭐라고?”
언제 다가왔는지 노총각 과장이 이욱 뒤에서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이욱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돌아보았다. 사회에 찌든 가식적인 미소가 절로 만들어졌다.
“어제 여친한테 차였거든요.”
“그거 축하할 일이네. 어쨌든 일에 화풀이는 하지 마.”
“네에.”
바로 어제 실연당한 것으로 당장의 잔소리를 무마하다니.
이욱은 금세 후회했다. 그러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이별을 통보했다고 상대방을 때리거나 심지어 살인까지 하는 미친놈들 뉴스가 종종 뜨는 세상이었다. 그런 개만도 못한 놈들과 같은 선상에 두고 생각하긴 싫지만, 그들의 격렬한 독점욕과 집착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내게도 독점욕이란 게 있는데 어째서 얼굴도 모르는 놈에게 내 여자를 뺏긴 것보다 그 녀석, 유지운한테 더 화가 나는 거지?’
일에 대한 집중은 좀처럼 되지 않았고 이욱은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간신히 오늘 업무를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퇴근 카드를 찍고 사무실을 나온 이욱은 지운이 있을 기획부서실 방향을 흘깃 보았다. 분명 오늘도 야근을 자처하며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이별에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고백한 녀석의 마음도 크게 동요할 수준은 아닌 걸까?’
가만히 서서 저 멀리 기획부서실 팻말을 바라보던 이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점심때부터 쭉 지운에 관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욱은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런 경우 마땅히 상담할 만한 상대도 없었다. 고교생도 아니고 서른이나 된 남성이,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 후배 놈에게 고백받았습니다’라고 누구에게 털어놓는단 말인가.
‘그나마 고민 같은 걸 털어놓았던 상대가 그 녀석이었잖아.’
위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엔 퇴근하는 사람들로 반이 채워져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욱은 내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183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30대 초반의 남성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농구를 했고, 군을 다녀온 후에도 틈틈이 몸이 물러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관리를 해 온 덕에 군살은 그리 없는 편이었다. 얼굴이야 대한민국 남자들 대다수가 ‘나 정도면 평균 아닌가’ 생각한다 해도, 이욱은 어릴 적부터 여자에게 고백받는 경험이 잦았다.
이욱은 거울을 보며 찌푸려진 미간을 검지로 눌러 폈다.
‘하지만 끝에 가서 차이는 건 항상 나였지.’
솔직히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어떤 타입을 좋아하는지, 그들도 여자들처럼 일단 외모와 키부터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고, 한이욱.’
이리저리 돌려 생각해도 변치 않는 사실이 있었다.
한이욱은 유지운에게 고백을 받음과 동시에 ‘아끼던 후배’를 잃었다는 것.
우웅.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뜨는 메시지를 확인한 이욱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여친느님: 나 너희 집에 아끼던 텀블러 놓고 왔는데. 갖다 줄 수 있어?]
[모르는 사람 물건은 전부 버렸습니다. 그런데 누구세요?]
울컥 올라오는 화에, 이욱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여기까지 작성했다. 그러나 이내 이성을 차리곤 삭제한 후 새로이 메시지를 작성하고 전송했다.
[택배로 보내 주마.]
“하……. 피곤해.”
이욱은 왁스로 정리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육체적 피로와 더불어 정신적 피로가 몰려왔다. 24시간도 안 되는 시간 내에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다.
삑. 스마트 키를 누르자 절로 펴지는 사이드 미러에 엉망이 된 앞머리가 비쳤다. 이욱은 담배부터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나 곁을 지나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 차에 올라서야 필터를 잘근 씹으며 불을 붙였다. 시동을 켠 후에도 환풍기만 가동시킨 채 한참 동안 담배만 뻐끔거렸다.
“후…….”
다 없었던 일로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어차피 헤어질 관계였다면 그 관계는 돌리지 않아도 좋았다. 그러나 후배는 달랐다. 이미 고백을 거절했지만 머릿속에서 그 기억 자체를 삭제하고 싶었다.
지운의 쓴웃음이 떠올랐다.
‘나, 게이야.’
시야에 번지는 쓰린 연기 속에서 이욱은 더욱 먼 과거를 회상했다.
‘씨발, 게이 새끼 무서워서 같이 목욕하겠냐? 후장 따일지도 모르는데?’
‘더러운 새끼.’
‘야, 너희들 조심해라? 멍하니 있다간 잡아먹혀요~’
군에서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였다. 그곳엔 동성애자라고 소문난 선임이 있었다. 그는 다른 선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고 늘 상처투성이에, 늘 혼자였다. 언젠가 화장실에 틀어박혀 숨죽여 우는 걸 들은 적도 있었다.
그와 함께 군 생활을 했던 건 3개월도 채 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문득 그가 떠올랐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설움과 고독이 꾹꾹 눌려 담겨 있던 울음소리가.
그 사람은 정말 게이였던 걸까.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10년 넘게 알고 지내던 후배가 지금껏 게이였단 사실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을 정도로……. 그 사람도 게이라는 걸 제대로 감추며 살아가고 있을까. 유지운은 어떻게 성벽을 감쪽같이 숨기며 살아왔던 걸까.
‘휴일에 술 퍼먹고 같이 잔 적도 많았잖아. 고등학생 때에도 농구부원끼리 1박 2일 놀러 가서 발가벗고 같이 목욕까지 했었는데.’
툭.
“앗, 뜨……!”
멍하니 상념에 잠겼던 이욱은 손등을 스치는 작은 열기에 화들짝 놀랐다. 어느덧 길게 타 버린 재가 바지에 뒹굴고 있었다. 이욱은 담배를 재떨이에 거칠게 비벼 껐다. 그러곤 떨어진 재를 향해 가벼이 입김을 불어 떨어뜨렸다.
‘지금 멍 때릴 때냐.’
완전히 기억을 삭제할 수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지만 잊어야 한다. 거절했으니 이미 끝난 사이다. 앞으론 이전처럼 함께 술도 마시지 못하고 밥도 못 먹겠지만…… 거절한 주제에 쓸데없이 기대감을 심어 주는 것은 더욱 잔인한 짓이다.
이욱은 그렇게 체념하며 안전벨트를 맸다. 그러나 룸 미러에 비친 그의 미간엔 다시 짜증이 완연한 굴곡으로 져 있었다.
***
금방 시합을 끝낸 것처럼 실내 체육관 공기는 후끈거렸다. 그러나 농구 코트에 서 있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디자인은 같지만 다른 명찰 색깔이 한 학년 아래라는 것을 나타내었다.
유지운.
이욱은 지운을 보자마자 꿈이란 사실을 자각했다.
정말 어지간히 충격이긴 했나 보다. 허탈한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꿈속의 얼굴 근육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10여 년 전의 앳된 모습으로 돌아간 지운이 입을 열었다. 게이란 사실을 고백했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선배. 나…….’
시선을 비스듬히 내린 지운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하지 마.’
이욱의 목구멍까지 말이 차올랐다.
‘게이야. 고등학생 때부터…….’
‘하지 마. 난 널 잃고 싶지 않다, 유지운. 하지 마.’
간절히 원해서일까. 겨우 입술이 달싹거렸다. 입 속에서 맴돌던 목소리가 바깥으로 나오려 했다. 고백받았던 그 순간엔 너무 놀라 하지 못했던 말이, 본래 했었어야 할 말이.
‘그만……!’
그러나 말문은 다시 막히고 말았다. 이욱 스스로 멈추고 말았다.
현실에선 씁쓸한 미소로 그치고 말았던 지운이 울고 있었다.
이욱이 자신의 고백을 거절할 것임을 예상하고.
‘선배 좋아했어.’
그 말과 함께 이욱은 잠에서 깼다.
이욱은 핸드폰의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되돌려지는 일 없이, 기억이 삭제되는 일 없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씨발…….”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것을 앎에도, 기대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져 짜증이 났다. 그리고 회사에서 유지운을 마주쳤을 때 어떤 표정으로 그를 봐야 하는지, 평소처럼 인사를 해도 될는지에 관한 사소한 문제가 크나큰 시련처럼 다가온다는 것이 기가 막혔다.
상체를 앞으로 굽히며 이욱은 제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었다.
“하…….”
길게 한숨을 내쉬어도 형용할 수 없는 묵직함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욱은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어 담배를 집었다. 그러다 그저께 밤에 쓰고 내팽개쳤던 콘돔 상자에 시선이 닿았다. 아직 뜯지 않은 콘돔의 개별 포장지 모서리가 슬쩍 나와 있었다.
“…….”
평범한 남성이라면 자위든 원나잇이든 그 외 기타 등등이든 일정 기간마다 성욕을 해소해야 한다. 그러니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을 좋아했다면, 유지운은…….
거기에서 이욱은 생각을 멈췄다. 또 다른 이성이 그 이상 생각해선 안 된다는 적신호를 울렸다.
이욱은 콘돔 상자를 협탁 서랍에 처넣은 후 담배를 집었다. 그러곤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문 채 침대에서 내려갔다.
평소 기상 시간보다 이른 6시. 그런 꿈을 꾼 탓에 다시 자기는 글렀다. 이욱은 기왕 일찍 일어났으니 간만에 제대로 된 아침밥을 먹고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봤자 배달시켜 먹었던 음식의 남은 반찬이지만 말이다.
“아.”
거실을 나온 이욱은 냉장고를 열어 보다 싱크대 위 선반을 보았다. 유명한 카페 로고가 새겨진 텀블러가 보였다.
해외여행 갔을 때 어렵사리 구한 한정판이었지.
이욱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연기를 훅 내뱉었다. 귀찮음이 밀려들었다.
‘나중에 보내도 되겠지.’
***
어째서 일찍 일어난 날은 오히려 평소보다 늦게 되는 걸까.
이욱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이 속한 해외영업부서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출근 카드를 찍기 위해 어느새 안으로 들어간 사원증 줄을 바깥으로 빼냈다. 그러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지운과 마주쳤다.
“아…….”
“…….”
왼팔에 잔뜩 쌓은 바인더 중 가장 위쪽의 것을 펼쳐 서류를 넘기던 모양새로 지운이 멈췄다. 지운이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2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어색한 인사가 오갔다.
“안녕하세요.”
“아…… 어.”
사석이 아닌 이상 지운은 이욱에게 존댓말을 썼지만 이렇게 마주친 시선을 노골적으로 피하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그제까지는.
이욱 역시 아침에 일어나기 직전에 꾸었던 꿈, 실제론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지운의 우는 모습이 떠올라 슬쩍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바쁘게 각자 사무실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두 사람 옆을 지나쳤지만 그들 사이에 내려앉은 어색한 정적은 깨지 못했다.
“……수고하세요.”
“아…… 그래. 너도 수고해.”
결국 먼저 자리를 피한 것은 지운이었다. 이욱은 엉겁결에 대답하며 끄덕였다. 저벅저벅. 낮은 구두 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이욱의 뺨을 스쳤다. 그 순간, 이욱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
뭔가 이상했다. 고백을 받은 자신이 오히려 더 지운에게 긴장하고, 그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더불어 화도 났다.
왜 이놈이고 저놈이고 자기 할 말만 내뱉고 떠나 버리는 걸까. 그야 본인들은 마음이 홀가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차이고 배신당한 한이욱은?!
“—유지운.”
흠칫. 그리 큰 소리로 부른 게 아니었음에도, 이욱을 돌아보는 지운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복도에 화가 실린 이욱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 잠깐 따라와.”
이욱은 지운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휴게실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0. 기점
살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뒤통수를 후려 맞는 일이 있다.
“뭐……?”
막 불붙인 담배를 깊게 빨던 이욱은 고개를 들었다. 피어 올라가는 연기 너머로 침대 가에 걸터앉은 그녀가 보였다. 어둑한 스탠드 불빛에 새하얀 이욱의 셔츠를 걸친 여린 몸이 설핏설핏 비쳤다. 단추를 하나둘 끄르는 손길은 연달아 한 섹스 탓인지 나른했다. 목소리 또한.
“나 다른 남자 생겼으니까 헤어지자고. 어차피 서로 질릴 시기잖아.”
이욱은 기가 막혔다. 이별이 한쪽의 일방적인, 그것도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으로 이렇게 끝나는 것이었던가. 아니, 그런 것보다 자신의 감정까지 멋대로 속단하는 뻔뻔함에 당장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아, 그건가? 상대방을 같은 입장으로 끌어 내려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벼운 짐까지 털어 버리려는 자기기만?
“후…….”
이욱은 얼마 타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툭툭 털은 후 다시 입에 물었다. 구겨진 미간에 짙은 음영이 서렸다. 사귄지 사흘 만에 베드 인을 하긴 했으나, 그래도 1년가량 만났다. 최근 이욱이 대리로 진급하며 한동안 많은 업무에 매달리느라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그래도 섹스에서 열과 흥이 식는 경우는 없었다. 지금도 아직 침대에 열기가 남아 있지 않나.
이욱은 울컥 짜증이 났다.
‘이번에도.’
무난한 연애, 섹스, 그리고 일방적인 이별 통보.
지긋지긋한 패턴.
치익. 이욱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강하게 빨았다. 그러고 연기와 함께 손을 내저었다.
“아아, 그래라, 그래. 잘 가라, さよなら, Good Bye, До свида'ния, Chao.”
“구질구질하게 받았던 선물 다 내놓으란 소리는 하지 마.”
“괜찮아. 반은 짝퉁이었으니까.”
“뭐?!”
그러나 이욱은 내심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어렴풋 느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1년 정도 만나기는 했지만 ‘끝’까지 갈 만한 관계는 아니라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허무한 결말을 맞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것도 ‘다른 남자’라니.
‘조금 전까지 내 밑에서 교성을 지르던 여자가.’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론 당황스러웠다.
보통 이런 경우엔 분노가 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도 이 여자 몸만 좋아했던 걸까? 아니다. 아니야. 함께 웃고 떠드는 시간이 즐거운 적이 있었다. 분명 좋아했을 텐데.
‘드라마나 영화에서 떠들어 대는 사랑 타령 같은 게 전혀 공감된 적이 없긴 했어도, 좋아하긴 했었다고.’
그럼에도 또 다른 이성은 돌아갔다. 이것 또한 이욱을 당황케 했다. 어느샌가 계산적인 어른이 되어 버린 걸까 싶어, 이번엔 우울한 감정이 찾아왔다.
“어쨌든 선물 돌려 달란 소리는 안 할 테니까 전에 나한테 빌려 간 2백.”
“남자가 쪼잔하게 이럴래? 석 달 동안 한 번도 돌려 달란 소리, 하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대답을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그녀는 ‘연봉도 많이 받는 주제에’부터 시작해서, 그간 이욱에게 쌓였던 소소한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재간이 없는 이욱은 네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섹프가 더 나았지.’
처음부터 계산된 관계였다면, 서로 간의 사생활에 깊숙이 관계되는 일 없이 담백하게 끝냈을 터다. 지금 느끼는 당황스런 감정과 짜증을 느끼는 일 없이.
“태워다 줄까?”
“됐네요!”
화내면서 이욱의 셔츠를 벗는 그녀의 몸이 유연하게 휘었다. 역시 몸매 하나는 기가 막혔다. 새하얀 피부도 깨끗했다.
어쩐지 오늘은 키스 마크나 잇자국을 남기지 말라고 하더니.
이욱은 씁쓸한 눈을 끔뻑이며 담배 연기를 뱉었다. 그녀가 침대 아래에 내팽개쳐진 팬티를 집어 다리 사이에 끼웠다. 그러곤 이욱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딱 잘라 말했다.
“다신 연락하지 마.”
“네.”
차인 건 난데.
이욱은 한층 더 우울해졌다.
“SNS도 수신 거부할 거야.”
“네.”
……차인 건 난데.
이욱은 재차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브래지어를 집어 들었다. 이번엔 이욱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내 친구들한테도 연락하지 마. 이미 다 말해 둬서 받지도 않겠지만.”
“알았다고, 이 여자야.”
“뒤에 브라 후크 채워 줘.”
“…….”
이욱이 다섯 번째로 사귀었던 그녀는 이렇게 그의 곁을 떠났다.
이욱은 실연당한 김에 한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울함을 전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향했던 감정이 세간에서 떠드는 ‘좋아한다’는 감정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생각해 본들 마땅한 대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와 헤어진 지 열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욱은 다시 한번 예상치 못한 뒤통수를 맞았다.
이번엔 좀 아팠다.
“나, 게이야.”
무언가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생각에, 이욱이 처음 보인 반응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이라 다소 소란스러운 쌀국수집에서 들을 만한 얘기는 아니지 않나?
‘기획부 사원 유지운’. 평소에는 식사할 때 방해가 될까 셔츠 주머니에 잘 넣고 다니던 사원증이 길게 내려와 있었다. 이욱이 주머니에 쑤셔 넣은 사원증과 똑같은 회사 로고가 새겨진 사원증에는 선이 가늘고 단정하게 생긴, 지금의 모습과 똑같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지운이 이욱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선배 좋아했어.”
“……뭐?”
1. 혼란 (1)
“미안. 나 그쪽으로는 전혀 생각도 안 해 봤거든.”
정신을 차렸을 때 이욱은 저도 모르게 거절의 답변을 내뱉고 있었다. 지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점심을 먹고, 별다른 대화 없이 함께 회사로 돌아와 각자의 부서를 향해 헤어졌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충격을 준 가해자가 곁을 떠난 후에야 이욱은 뒤늦게 혼란에 잠겼다.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땐 지금보다 좀 더 키가 작았지만 차분한 성격은 여전해서 지운이 동생이면 챙겨 줄 맛이 조금이라도 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군대와 대학에서 갈려 이 직장에서 우연히 재회하기 전까지 만나지 못했던 시간이 있긴 했어도 그런 주제로 농담할 성격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뭐냐고, 진짜…….”
오늘 내로 제출해야 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에 사용할 집중력이 자꾸만 흐트러졌다. 아까는 너무 놀라 이성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10년 넘게 알고 지냈던 후배에게서 느끼는 배신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신경을 긁었다. 그에 따라 어제 차였던 사건은 머리 깊숙한 곳에 무서운 속도로 묻혀 갔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이욱은 모니터에 뜨는 오타 실수에 미간을 찌푸렸다.
“씨발, 못 해 먹겠네.”
“한 대리, 뭐라고?”
언제 다가왔는지 노총각 과장이 이욱 뒤에서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이욱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돌아보았다. 사회에 찌든 가식적인 미소가 절로 만들어졌다.
“어제 여친한테 차였거든요.”
“그거 축하할 일이네. 어쨌든 일에 화풀이는 하지 마.”
“네에.”
바로 어제 실연당한 것으로 당장의 잔소리를 무마하다니.
이욱은 금세 후회했다. 그러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이별을 통보했다고 상대방을 때리거나 심지어 살인까지 하는 미친놈들 뉴스가 종종 뜨는 세상이었다. 그런 개만도 못한 놈들과 같은 선상에 두고 생각하긴 싫지만, 그들의 격렬한 독점욕과 집착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내게도 독점욕이란 게 있는데 어째서 얼굴도 모르는 놈에게 내 여자를 뺏긴 것보다 그 녀석, 유지운한테 더 화가 나는 거지?’
일에 대한 집중은 좀처럼 되지 않았고 이욱은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간신히 오늘 업무를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퇴근 카드를 찍고 사무실을 나온 이욱은 지운이 있을 기획부서실 방향을 흘깃 보았다. 분명 오늘도 야근을 자처하며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이별에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고백한 녀석의 마음도 크게 동요할 수준은 아닌 걸까?’
가만히 서서 저 멀리 기획부서실 팻말을 바라보던 이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점심때부터 쭉 지운에 관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욱은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런 경우 마땅히 상담할 만한 상대도 없었다. 고교생도 아니고 서른이나 된 남성이,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 후배 놈에게 고백받았습니다’라고 누구에게 털어놓는단 말인가.
‘그나마 고민 같은 걸 털어놓았던 상대가 그 녀석이었잖아.’
위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엔 퇴근하는 사람들로 반이 채워져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욱은 내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183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30대 초반의 남성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농구를 했고, 군을 다녀온 후에도 틈틈이 몸이 물러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관리를 해 온 덕에 군살은 그리 없는 편이었다. 얼굴이야 대한민국 남자들 대다수가 ‘나 정도면 평균 아닌가’ 생각한다 해도, 이욱은 어릴 적부터 여자에게 고백받는 경험이 잦았다.
이욱은 거울을 보며 찌푸려진 미간을 검지로 눌러 폈다.
‘하지만 끝에 가서 차이는 건 항상 나였지.’
솔직히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어떤 타입을 좋아하는지, 그들도 여자들처럼 일단 외모와 키부터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고, 한이욱.’
이리저리 돌려 생각해도 변치 않는 사실이 있었다.
한이욱은 유지운에게 고백을 받음과 동시에 ‘아끼던 후배’를 잃었다는 것.
우웅.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뜨는 메시지를 확인한 이욱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여친느님: 나 너희 집에 아끼던 텀블러 놓고 왔는데. 갖다 줄 수 있어?]
[모르는 사람 물건은 전부 버렸습니다. 그런데 누구세요?]
울컥 올라오는 화에, 이욱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여기까지 작성했다. 그러나 이내 이성을 차리곤 삭제한 후 새로이 메시지를 작성하고 전송했다.
[택배로 보내 주마.]
“하……. 피곤해.”
이욱은 왁스로 정리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육체적 피로와 더불어 정신적 피로가 몰려왔다. 24시간도 안 되는 시간 내에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다.
삑. 스마트 키를 누르자 절로 펴지는 사이드 미러에 엉망이 된 앞머리가 비쳤다. 이욱은 담배부터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나 곁을 지나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 차에 올라서야 필터를 잘근 씹으며 불을 붙였다. 시동을 켠 후에도 환풍기만 가동시킨 채 한참 동안 담배만 뻐끔거렸다.
“후…….”
다 없었던 일로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어차피 헤어질 관계였다면 그 관계는 돌리지 않아도 좋았다. 그러나 후배는 달랐다. 이미 고백을 거절했지만 머릿속에서 그 기억 자체를 삭제하고 싶었다.
지운의 쓴웃음이 떠올랐다.
‘나, 게이야.’
시야에 번지는 쓰린 연기 속에서 이욱은 더욱 먼 과거를 회상했다.
‘씨발, 게이 새끼 무서워서 같이 목욕하겠냐? 후장 따일지도 모르는데?’
‘더러운 새끼.’
‘야, 너희들 조심해라? 멍하니 있다간 잡아먹혀요~’
군에서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였다. 그곳엔 동성애자라고 소문난 선임이 있었다. 그는 다른 선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고 늘 상처투성이에, 늘 혼자였다. 언젠가 화장실에 틀어박혀 숨죽여 우는 걸 들은 적도 있었다.
그와 함께 군 생활을 했던 건 3개월도 채 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문득 그가 떠올랐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설움과 고독이 꾹꾹 눌려 담겨 있던 울음소리가.
그 사람은 정말 게이였던 걸까.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10년 넘게 알고 지내던 후배가 지금껏 게이였단 사실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을 정도로……. 그 사람도 게이라는 걸 제대로 감추며 살아가고 있을까. 유지운은 어떻게 성벽을 감쪽같이 숨기며 살아왔던 걸까.
‘휴일에 술 퍼먹고 같이 잔 적도 많았잖아. 고등학생 때에도 농구부원끼리 1박 2일 놀러 가서 발가벗고 같이 목욕까지 했었는데.’
툭.
“앗, 뜨……!”
멍하니 상념에 잠겼던 이욱은 손등을 스치는 작은 열기에 화들짝 놀랐다. 어느덧 길게 타 버린 재가 바지에 뒹굴고 있었다. 이욱은 담배를 재떨이에 거칠게 비벼 껐다. 그러곤 떨어진 재를 향해 가벼이 입김을 불어 떨어뜨렸다.
‘지금 멍 때릴 때냐.’
완전히 기억을 삭제할 수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지만 잊어야 한다. 거절했으니 이미 끝난 사이다. 앞으론 이전처럼 함께 술도 마시지 못하고 밥도 못 먹겠지만…… 거절한 주제에 쓸데없이 기대감을 심어 주는 것은 더욱 잔인한 짓이다.
이욱은 그렇게 체념하며 안전벨트를 맸다. 그러나 룸 미러에 비친 그의 미간엔 다시 짜증이 완연한 굴곡으로 져 있었다.
금방 시합을 끝낸 것처럼 실내 체육관 공기는 후끈거렸다. 그러나 농구 코트에 서 있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디자인은 같지만 다른 명찰 색깔이 한 학년 아래라는 것을 나타내었다.
유지운.
이욱은 지운을 보자마자 꿈이란 사실을 자각했다.
정말 어지간히 충격이긴 했나 보다. 허탈한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꿈속의 얼굴 근육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10여 년 전의 앳된 모습으로 돌아간 지운이 입을 열었다. 게이란 사실을 고백했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선배. 나…….’
시선을 비스듬히 내린 지운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하지 마.’
이욱의 목구멍까지 말이 차올랐다.
‘게이야. 고등학생 때부터…….’
‘하지 마. 난 널 잃고 싶지 않다, 유지운. 하지 마.’
간절히 원해서일까. 겨우 입술이 달싹거렸다. 입 속에서 맴돌던 목소리가 바깥으로 나오려 했다. 고백받았던 그 순간엔 너무 놀라 하지 못했던 말이, 본래 했었어야 할 말이.
‘그만……!’
그러나 말문은 다시 막히고 말았다. 이욱 스스로 멈추고 말았다.
현실에선 씁쓸한 미소로 그치고 말았던 지운이 울고 있었다.
이욱이 자신의 고백을 거절할 것임을 예상하고.
‘선배 좋아했어.’
그 말과 함께 이욱은 잠에서 깼다.
이욱은 핸드폰의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되돌려지는 일 없이, 기억이 삭제되는 일 없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씨발…….”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것을 앎에도, 기대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져 짜증이 났다. 그리고 회사에서 유지운을 마주쳤을 때 어떤 표정으로 그를 봐야 하는지, 평소처럼 인사를 해도 될는지에 관한 사소한 문제가 크나큰 시련처럼 다가온다는 것이 기가 막혔다.
상체를 앞으로 굽히며 이욱은 제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었다.
“하…….”
길게 한숨을 내쉬어도 형용할 수 없는 묵직함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욱은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어 담배를 집었다. 그러다 그저께 밤에 쓰고 내팽개쳤던 콘돔 상자에 시선이 닿았다. 아직 뜯지 않은 콘돔의 개별 포장지 모서리가 슬쩍 나와 있었다.
“…….”
평범한 남성이라면 자위든 원나잇이든 그 외 기타 등등이든 일정 기간마다 성욕을 해소해야 한다. 그러니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을 좋아했다면, 유지운은…….
거기에서 이욱은 생각을 멈췄다. 또 다른 이성이 그 이상 생각해선 안 된다는 적신호를 울렸다.
이욱은 콘돔 상자를 협탁 서랍에 처넣은 후 담배를 집었다. 그러곤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문 채 침대에서 내려갔다.
평소 기상 시간보다 이른 6시. 그런 꿈을 꾼 탓에 다시 자기는 글렀다. 이욱은 기왕 일찍 일어났으니 간만에 제대로 된 아침밥을 먹고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봤자 배달시켜 먹었던 음식의 남은 반찬이지만 말이다.
“아.”
거실을 나온 이욱은 냉장고를 열어 보다 싱크대 위 선반을 보았다. 유명한 카페 로고가 새겨진 텀블러가 보였다.
해외여행 갔을 때 어렵사리 구한 한정판이었지.
이욱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연기를 훅 내뱉었다. 귀찮음이 밀려들었다.
‘나중에 보내도 되겠지.’
어째서 일찍 일어난 날은 오히려 평소보다 늦게 되는 걸까.
이욱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이 속한 해외영업부서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출근 카드를 찍기 위해 어느새 안으로 들어간 사원증 줄을 바깥으로 빼냈다. 그러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지운과 마주쳤다.
“아…….”
“…….”
왼팔에 잔뜩 쌓은 바인더 중 가장 위쪽의 것을 펼쳐 서류를 넘기던 모양새로 지운이 멈췄다. 지운이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2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어색한 인사가 오갔다.
“안녕하세요.”
“아…… 어.”
사석이 아닌 이상 지운은 이욱에게 존댓말을 썼지만 이렇게 마주친 시선을 노골적으로 피하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그제까지는.
이욱 역시 아침에 일어나기 직전에 꾸었던 꿈, 실제론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지운의 우는 모습이 떠올라 슬쩍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바쁘게 각자 사무실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두 사람 옆을 지나쳤지만 그들 사이에 내려앉은 어색한 정적은 깨지 못했다.
“……수고하세요.”
“아…… 그래. 너도 수고해.”
결국 먼저 자리를 피한 것은 지운이었다. 이욱은 엉겁결에 대답하며 끄덕였다. 저벅저벅. 낮은 구두 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이욱의 뺨을 스쳤다. 그 순간, 이욱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
뭔가 이상했다. 고백을 받은 자신이 오히려 더 지운에게 긴장하고, 그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더불어 화도 났다.
왜 이놈이고 저놈이고 자기 할 말만 내뱉고 떠나 버리는 걸까. 그야 본인들은 마음이 홀가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차이고 배신당한 한이욱은?!
“—유지운.”
흠칫. 그리 큰 소리로 부른 게 아니었음에도, 이욱을 돌아보는 지운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복도에 화가 실린 이욱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 잠깐 따라와.”
이욱은 지운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휴게실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