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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조건 2화
1. 혼란 (2)
업무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음료수와 커피 자판기, 흡연 부스와 간이 의자가 놓인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욱은 투명한 흡연 부스 안으로 들어가 담배를 물었다. 뒤로 부스 문을 닫으며 지운이 물었다.
“선배…… 왜?”
“길게 안 끌어.”
아무렇지 않게 옆을 지나쳤을 때, 무심함으로 무장했던 지운의 표정은 깨어진 지 오래였다. 본래 감정 표현이 드물었던 만큼 초조해 보이는 현재 지운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유지운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이욱은 라이터 불로 시선을 옮겼다. 어색해진 관계가 짜증 나고, 낯선 지운의 약한 모습도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후련하냐?”
“……뭐?”
“난 내 마음 다 꺼냈으니 이제 끝이다. 어차피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털어놓고 끝내자. —이런 식으로, 내가 받을 충격은 신경도 안 쓰고 뒤통수쳐서 속이 시원해?”
“선배, 그건……!”
아…냐…….
이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되받아쳤던 지운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마주친 시선을 피하는 지운의 눈썹이 일그러진 채 내려갔다. 잘근 입술을 씹으며 돌리는 옆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울음을 참는 것만 같았다. 바인더를 콱 움켜쥔 지운의 손가락이 하얘졌다.
“…….”
“…….”
조금 전보다 더욱 경직된 정적이 찾아왔다.
지운은 숨을 죽인 것처럼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흐느낌은 더욱 없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녀석은 대체 누굴까.’
정말 내가 10년 넘게 알고 지냈던 유지운이 맞는 건가? 그냥 똑같은 얼굴을 한 타인이 아닐까? 이욱이 알고 있는 지운은 절대 남 앞에서 울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녀석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린 채 지운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지?”
“유지운.”
“미안해, 선배. 기분 나쁘게 해서.”
지운은 이욱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등을 돌렸다. 덥석! 이욱은 부스를 나가려는 지운의 팔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지운의 어깨가 흠칫하며 크게 떨렸다.
“기분 나쁘다니, 난 그런 말은……!”
지운의 시선이 잡힌 팔을 향했다. 잔뜩 일그러진 눈썹 아래가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러나 지운은 이내 그 눈을 감추며 이욱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곤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을 나갔다. 지운이 있었던 자리엔 고교생 때와 달리 성인 남성용 코롱 향기만 희미하게 남았다.
“아…….”
멀어지던 구둣발 소리가 이윽고 사라졌다.
이욱은 간이 의자에 털썩 앉으며 중얼거렸다.
“한심해.”
결국 자신은 지운에게 왜 그런 고백 같은 걸 해서 부담을 주냐고 짜증 낸 것에 불과했다. 지운 스스로 고백하지 않았다면 전혀 알 수 없었을, 게이라는 사실. 그것을 터뜨린 각오에 어린애나 할 법한 이기적인 투정을 부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냉정한 이성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니 그만 연을 끊으라고 속삭였다.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잊힐 거라고. 그리고 유지운도 새로이 마음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을…….
이욱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빨았다. 그러고 한숨 섞인 연기를 내뱉으며 기껏 왁스로 정돈한 머리칼을 흩트렸다.
게이라는 커밍 아웃과 동시에 줄곧 좋아했다는 고백을 하기까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욱은 이내 그 생각을 억눌렀다.
‘그만하자, 한이욱. 더 이상 생각하지 마.’
헤어질 땐 아무런 미련 없이. 비단 연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기 싫어도 끊어야 할 땐 끊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욱은 꿈에서 유지운의 눈물을 보았을 때보다 울음을 참던 현실 모습에서 더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라 욕을 내뱉었다.
“씨발…….”
***
신경을 돌릴 곳이 필요했다.
이욱은 며칠 동안 업무에 쫓기는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일만 했다.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해도 될 일까지 미리 처리하고, 하지 않아도 될 정리와 야근까지 자처했다. 그사이 노총각 과장이 이욱이 여자 친구에게 차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는지 몇몇 동료들이 이욱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지만 상관없었다.
차라리 새로운 여자를 찾아 공허하게 비어 버린 마음을 치유받을까 하는 충동도 들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만든 인연 또한 허무한 끝을 맞이한다는 것을, 서른 살의 한이욱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영 씨. 이 보고서, 내가 참고하라던 자료로 만든 거 맞아? 작년이 아니라 2년 전 프로젝트 모델을 토대로 작성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조건이나 초안 자체가 완전히 다른데 작성하면서도 이상하다는 점 못 느꼈어? 그리고 수장 씨, 프레젠테이션 오타 신경 쓰라고 했지? 한 번 더 훑어보는 게 그렇게 힘들어?”
“죄송합니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집에 들어가선 담배를 뻑뻑 피우며 술을 마시다 잠들기를 며칠째. 이욱은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보고서와 샘플 서류를 내밀었다. 신입 사원인 지영과 수장이 이욱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이욱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구겨진 제 미간을 손으로 지그시 눌러 폈다.
“아니…… 짜증 내서 미안하다.”
그날 이후 같은 회사, 같은 층에 근무하면서도 이욱은 지운과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내 식당에서도, 휴게실에서도. 이전엔 하루에 한 번 정도 우연이라도 마주쳤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운이 의도적으로 이욱을 피하고 있다는 것일 터다. —혹은 이전의 마주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이거나.
“한 대리님, 식사하러 안 가세요?”
“먼저 가세요.”
점심시간이 되자 사원들이 하나둘 사무실을 나갔다. 지난 며칠 동안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안 한 탓인지 오늘따라 식욕이 돋질 않았다. 이욱은 동료에게 가벼이 손을 흔들어 준 후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사내 식당 반대편인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휴게실엔 아무도 없었다.
덜커덩. 이욱은 자판기에 지폐를 집어넣고 대충 아무 캔 커피 버튼을 눌렀다. 솔직히 이욱 입맛엔 커피가 완전히 달거나 블랙이 아닌 이상, 그게 그 맛으로 느껴졌다.
우웅. 이욱이 떨어진 캔 커피를 집으려 할 때였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여친느님: 택배 안 오는데??]
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욱은 그제야 사고에서 완전히 밀려났던 텀블러를 떠올렸다. 정확힌 보내 주기로 했던 약속 자체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욱은 솔직하게 아직 안 보냈다고 답변을 보냈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 담뱃갑을 꺼내 흔들며 흡연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 안 간이 의자에 누군가가 놓고 간 라이터가 있었다. 달칵. —화륵! 라이터에서 불길이 크게 치솟았다.
“아욱, 씨.”
시야를 장악하는 불빛에 놀란 이욱의 입에서 욕이 튀어 나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이터를 살펴보니 화력이 최대로 맞춰져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 이딴…….”
다 큰 어른이 라이터 불에 호들갑을 떤 것 같아 이욱은 머쓱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휴게실엔 이욱 외에—
“……아.”
지운이 막 휴게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렸는지 지운은 당장 이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이욱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덜커덕 굳었다. 너무나 확연한 동요였다.
지운이 고개를 돌리며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아…… 안녕…하세요.”
이욱은 바로 며칠 전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날 지운에게 과하게 화를 냈다. 기분 나쁘게 고백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런 게 아니었는데.
‘기분…… 나쁘다든가 그런 것보다 난…….’
위잉. 지운이 앞에 선 자판기에서 지폐 삽입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음료 밑 버튼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지폐가 반환된 것이다. 구겨진 부분이라도 다시 펴는 건지 지운이 손을 꿈지럭거렸다. 이욱은 고개 숙인 지운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미 인사에 답하기엔 타이밍이 늦었다.
지난 며칠 동안 사내 식당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기에 밖에서 점심을 먹는 건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된 지 얼마 안 된 이 시간에 휴게실에 온 것을 보니…… 점심도 제대로 안 챙겨 먹는 모양이었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냐? 좀 마른 것 같다.
이 두 마디가 이욱의 목구멍까지 차고 올랐다. 하지만 이욱은 입술을 깨물며 억눌렀다. 이제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기대감을 심어 주는 잔인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유지운이란 인간은 이욱에게 있어 아끼는 후배가 아니라고.
그러는 사이에 다시 지폐가 반환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지운은 아예 다른 지폐를 꺼내기로 했는지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럼에도 지운은 고개를 조금도 돌리지 않았다. 자판기에 어렴풋 비치는 이욱의 시선이 내내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제야 이욱은 깨달았다. 유지운은 이미 자신과 인연이 끊어질 것을 각오하고 고백했던 것임을. 그리 생각하니 유지운을 잃은 상실감이 더욱 커졌다.
“……아래에.”
이욱은 라이터를 본래 있었던 자리에 툭 던졌다. 이욱의 목소리에 놀란 건지, 라이터가 떨어지는 소리에 놀란 건지 지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욱은 피우지 않은 담배를 손으로 부러뜨려 재떨이에 버렸다. 그러곤 흡연 부스를 나오며 말을 이었다.
“내가 뽑은 캔 커피 있으니까 밥 먹고 마셔라. 속 버린다.”
“…….”
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모습에 처음으로 지운을 향한 동정심이 올라와 이욱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잔인하게 쐐기를 박는 짓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는 서로를 위한 것이었다. 적어도 이욱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욱은 자신에게도 들려줄 인사를 말로 내뱉었다.
“잘 지내라.”
“……!”
지금껏 쌓아 온 정이 있다 해도 동정심으로 남자와 사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상해 본 적도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물며 동생처럼 생각하던 유지운과는 더욱 더.
이욱은 콱 움켜쥐어진 지운의 손을 보곤 휴게실을 나왔다. 그러나 발은 돌덩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툭. 결국 이욱은 몇 걸음도 가지 못한 채 복도 벽에 기대고 말았다.
정말 유지운과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야 하는 걸까? 유지운이 그렇게 잘못한 건가? 게이면 사람을 좋아해선 안 된단 말인가? 지금껏 자신을 속인 것에 배신감을 느끼긴 했지만 10여 년이 넘는 오랜 연을 매정하게 끊어 버리는 것이 정말 옳은 판단일까? 유지운이 자신을 향한 마음만 단념해 준다면, 어쩌면 이전처럼—
……흐윽.
이욱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잔뜩 억눌린 울음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이욱은 소리가 난 휴게실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혐오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유지운이 마음을 단념해 준다면, 어쩌면 이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유지운은 지금껏 자신에 대한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버틴 것이 아니던가!
‘나란 새낀 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거야……!’
이욱은 저도 모르게 휴게실로 몸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거기에서 이욱은 멈췄다. 고백을 거절하고 작별 인사까지 고한 주제에 대체 뭘 어쩌려고.
우웅.
그 순간, 조용한 복도에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깜짝 놀라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이욱은 황급히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욕을 삼켰다. 여친느님은 얼어 죽을.
우우웅. 진동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쿵. 그와 동시에 휴게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자판기에 사람이 부딪친 것만 같은 소리가.
이욱은 수신 거절을 누른 후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그러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괜찮냐?”
역시나 자판기에 부딪친 건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지운은 왼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축 늘어뜨린 지운의 왼손엔 조금 전 이욱이 뽑았던 캔 커피가 들려 있었다. 여전히 이욱을 돌아보지 않은 채 지운이 말했다.
“……가.”
저 짧은 한 마디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까지 모를 정도로 미련하진 않다. 이욱은 이젠 아주 작은 걱정도 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절감했다.
“……미안하다.”
그러고 지운을 둔 채 다시 몸을 돌렸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도 업무를 마무리할 기미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던 이욱에게 과장이 다가왔다.
“잔업하지 마.”
“네?”
“한 대리, 남아서 잔업하지 말라고. 자네 때문에 신입들이 칼퇴근하는 거 눈치 보잖아.”
칼퇴근이란 단어를 쓰는 것부터가 눈치 주는 거 아닌가? 이욱은 과장의 모순된 단어 선택에 의아한 표정을 짓다 순순히 끄덕였다.
“네. 당분간은 저도 칼퇴근만 할 거예요.”
“싸우자는 거냐.”
“네?”
두꺼운 안경을 고쳐 쓰며 중얼거린 과장은 아무 말도 안 했다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곤 신입 사원인 지영에게 다가갔다. 지영에게 이제 괜찮으니 마음 놓고 퇴근 준비하라고 말하는 노총각 과장의 모습에 이욱의 눈썹이 찡그러졌다. 다른 사원들을 대할 때완 달리 능글능글하게 짓는 미소에서 음흉한 속내가 보였다.
‘아무리 여자가 고파도 그렇지, 띠동갑보다 더 어린 신입을.’
이욱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퇴근 준비를 했다.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쳐 둔 슈트 겉옷을 집었을 때 묵직한 게 느껴졌다. 주머니를 뒤적이니 전원이 꺼진 핸드폰이 나왔다.
전원을 켜자마자 날아드는 메시지는 무려 열두 개. 메시지는 왜 전화를 끊냐고 따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집에 놔둔 스타킹도 같이 보내 달라는 것과 왜 아직도 전원이 꺼져 있냐 안달하는 말, 정말 이럴 거냐 한이욱 야야야 불러 대다 잘 먹고 잘 살라는 인사로 끝이 났다.
메시지를 모두 확인한 이욱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찼으면서 참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예전이었다면 참 솔직하고 털털하구나, 하고 생각했을 성격인데 지금 다시 보니 상대방을 전혀 배려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 뭐가 씌었던 게지. 아니면…… 여자에게 차이고도 자존심도 없이 이것저것 챙겨줄 정도로 무르고 한심한 놈이라고 얕잡아 보인 걸지도.
이욱의 미소가 쓰게 변질되었다.
‘한심한 건 사실이지.’
“저기…… 한 대리님. 저녁 약속 있으세요?”
그때 지영이 조심스레 이욱에게 다가와 물었다. 노총각 과장은 어느샌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신 또 다른 신입인 수장이 지영 뒤에 쭈뼛거리며 서있었다. 그러나 이욱을 보는 시선엔 무언가의 기대로 차 있었다.
“없으면 우리랑 같이 저녁 먹어요. 대리님께 의논드리고 싶은 일도 있고…….”
지영이 과장이 있는 곳을 슬쩍 보았다. 지영의 시선을 좇은 이욱은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 입사한 신입 입장에서 나이 든 상사가 치근덕거리는 것만큼 곤란한 건 없다. 그리고 오늘 두 사람에게 괜히 짜증을 냈던 것도 마음에 걸린 차였다. 모처럼의 금요일이지만 어차피 여친에게도 차여 집에 일찍 들어가 봤자 할 일도 없었다.
“좋아.”
그러나 30여 분 후. 이욱은 괜히 왔다 후회하고 말았다. 셋이서 회사 근처의 치킨 호프집에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술이 두 바퀴 돌기 전까지만.
타앙! 지영이 거칠게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이욱을 노려보았다.
“씽…… 여자한테 차인 게 뭐 대수라고 땅바닥을 푹푹 파냐? 앙?! 젊은 나이에, 좋은 직장에, 응? 차 있겠다, 연봉 많이 받겠다, 기럭지 되겠다, 얼굴도 그만하면 되겠다, 응? 그런데 왜 화풀이를 우리한테 해, 이 한심아!”
“…….”
“지, 지영 씨 잠깐, 잠깐 진정 좀…….”
신압 사원 환영회 때 술을 다 거절했던 게 이런 이유였었나. 이욱은 고개를 살며시 돌리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지영이 대뜸 이욱에게 닭다리를 들이댔다.
“먹어! 안주는 먹어야 될 거 아냐아!”
“네, 네. 감사합니다.”
“옳~지, 잘해써, 잘해써.”
“아, 이게 아닌데…….”
수장이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욱은 받아 든 닭다리를 뜯었다.
지영의 술주정은 그 후로 10여 분간 계속 이어지다 그녀가 테이블에 이마를 대고 잠이 들어서야 끝났다. 이욱은 앞으로 회식 땐 절대 지영 근처에 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처음엔 지영 씨가 과장님 일로 대리님한테 상담해 볼까 말을 꺼냈던 건데…… 죄송합니다, 대리님.”
“괜찮아.”
“그런데 대리님…… 여친이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을 때 이런 말 꺼내는 건 조금 이르다 생각하기는 하는데. 혹시…… 소개팅 한번 안 해 보실래요? 실은 우리 대학 후배 중에 엄청 예쁜 애가 있는데—”
“됐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욱은 뚝 자르며 거절했다. 수장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수장이 기도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으며 애원했다.
“하, 한 번만 만나 주시면 안 될까요, 대리님? 실은 전에 야유회 때 찍었던 사진을 걔가 봤거든요. 그런데 대리님한테 여친 없으면 소개 좀 시켜 달라고 부탁을…… 하하핫.”
“당분간 여자는 안 만날 거야.”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만나 주시기만 하면 그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대리님……!”
수장은 끈질겼다. 그리고 목구멍 너머로 들이키는 맥주 양이 점점 늘어 감에 따라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에도, 고민하는 것에도, 심지어 거절의 말을 계속 내뱉는 것에도 지친 이욱은 결국 짜증을 내며 승낙해 버렸다.
‘한심한 한이욱.’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과 퇴근하기 전에 보았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린 지운의 뒷모습도.
난 네게 날 좋아해 달라고 한 적 없어. 그런데 왜 다른 여자를 만나는 데에 네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이욱은 울컥 또 짜증이 났다. 대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처음부터,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을 좋아했다면 그 시간 동안 저만 멍청이같이 모른 채, 쭉…… 유지운 혼자만 자신을—
“나쁜 새끼…….”
“네?”
며칠 동안 밤마다 술을 마신 터라 취기가 빨리 올라왔다. 이욱은 수장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젓고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웠다. 이마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는데 시야가 일순 흔들렸다.
아무리 세상이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문을 낮추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의 시선을 자유로이 변환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다.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는 마음 넓게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솔직히 이 한국이란 나라에서 서른 살의 남자가, 이제 슬슬 자리를 잡고 결혼 문제도 생각해야 하는 서른 살의 남자가 뒤늦게 커밍 아웃을 하려면 모든 걸 버려야 할 정도의 각오가 필요하다.
아니, 그 이전에.
이욱은 지운과 키스를 하거나 섹스를 하는 자신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끝났지만.”
“네?”
이욱의 중얼거림에 수장이 다시 되물었다. 이번엔 손을 내젓는 것조차 귀찮아져서 이욱은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우우웅. 우우웅.
“큿…….”
진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며칠 동안 술 마시고 잠드는 짓을 반복해 예민해진 신경을 제대로 긁는 소리였다.
움찔거리던 이욱의 눈이 찡그러졌다. 그러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손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잡았다. 간밤에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 소주 두 병을 비우고 잔 탓인지 머리가 왱왱 울렸다. 간신히 눈을 뜬 이욱은 환한 액정 불빛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얼핏 보았던 발신인 이름이 뒤늦게 이성을 두드렸다.
이욱은 다시 조심조심 눈을 떴다. 그사이 전화는 부재중으로 넘어갔다.
[부재중 전화 - 유지운.]
“……어?”
끔뻑거리던 이욱의 눈이 커졌다. 시간은 새벽 5시를 갓 넘기고 있었다.
왜 이런 시간에……? 이욱은 한참을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걸었던 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술을 퍼마시고 홧김에 전화를 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유지운은 취해도 곱게 취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이런 시간에 전화를 걸었다는 것은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여보세요?
통화 연결음 노래가 한 마디 나오기도 전에 끊겼다. 그러나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지운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유지운 핸드폰 아닙니까?”
-아, 혹시 이 핸드폰 주인과 아는 사이십니까?
잔뜩 잠긴 이욱의 목소리와 달리, 상대방은 또렷한 발음의 사무적인 어투였다. 이욱은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 그런데 누구십니까?”
1. 혼란 (2)
업무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음료수와 커피 자판기, 흡연 부스와 간이 의자가 놓인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욱은 투명한 흡연 부스 안으로 들어가 담배를 물었다. 뒤로 부스 문을 닫으며 지운이 물었다.
“선배…… 왜?”
“길게 안 끌어.”
아무렇지 않게 옆을 지나쳤을 때, 무심함으로 무장했던 지운의 표정은 깨어진 지 오래였다. 본래 감정 표현이 드물었던 만큼 초조해 보이는 현재 지운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유지운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이욱은 라이터 불로 시선을 옮겼다. 어색해진 관계가 짜증 나고, 낯선 지운의 약한 모습도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후련하냐?”
“……뭐?”
“난 내 마음 다 꺼냈으니 이제 끝이다. 어차피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털어놓고 끝내자. —이런 식으로, 내가 받을 충격은 신경도 안 쓰고 뒤통수쳐서 속이 시원해?”
“선배, 그건……!”
아…냐…….
이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되받아쳤던 지운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마주친 시선을 피하는 지운의 눈썹이 일그러진 채 내려갔다. 잘근 입술을 씹으며 돌리는 옆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울음을 참는 것만 같았다. 바인더를 콱 움켜쥔 지운의 손가락이 하얘졌다.
“…….”
“…….”
조금 전보다 더욱 경직된 정적이 찾아왔다.
지운은 숨을 죽인 것처럼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흐느낌은 더욱 없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녀석은 대체 누굴까.’
정말 내가 10년 넘게 알고 지냈던 유지운이 맞는 건가? 그냥 똑같은 얼굴을 한 타인이 아닐까? 이욱이 알고 있는 지운은 절대 남 앞에서 울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녀석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린 채 지운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지?”
“유지운.”
“미안해, 선배. 기분 나쁘게 해서.”
지운은 이욱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등을 돌렸다. 덥석! 이욱은 부스를 나가려는 지운의 팔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지운의 어깨가 흠칫하며 크게 떨렸다.
“기분 나쁘다니, 난 그런 말은……!”
지운의 시선이 잡힌 팔을 향했다. 잔뜩 일그러진 눈썹 아래가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러나 지운은 이내 그 눈을 감추며 이욱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곤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을 나갔다. 지운이 있었던 자리엔 고교생 때와 달리 성인 남성용 코롱 향기만 희미하게 남았다.
“아…….”
멀어지던 구둣발 소리가 이윽고 사라졌다.
이욱은 간이 의자에 털썩 앉으며 중얼거렸다.
“한심해.”
결국 자신은 지운에게 왜 그런 고백 같은 걸 해서 부담을 주냐고 짜증 낸 것에 불과했다. 지운 스스로 고백하지 않았다면 전혀 알 수 없었을, 게이라는 사실. 그것을 터뜨린 각오에 어린애나 할 법한 이기적인 투정을 부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냉정한 이성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니 그만 연을 끊으라고 속삭였다.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잊힐 거라고. 그리고 유지운도 새로이 마음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을…….
이욱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빨았다. 그러고 한숨 섞인 연기를 내뱉으며 기껏 왁스로 정돈한 머리칼을 흩트렸다.
게이라는 커밍 아웃과 동시에 줄곧 좋아했다는 고백을 하기까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욱은 이내 그 생각을 억눌렀다.
‘그만하자, 한이욱. 더 이상 생각하지 마.’
헤어질 땐 아무런 미련 없이. 비단 연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기 싫어도 끊어야 할 땐 끊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욱은 꿈에서 유지운의 눈물을 보았을 때보다 울음을 참던 현실 모습에서 더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라 욕을 내뱉었다.
“씨발…….”
신경을 돌릴 곳이 필요했다.
이욱은 며칠 동안 업무에 쫓기는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일만 했다.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해도 될 일까지 미리 처리하고, 하지 않아도 될 정리와 야근까지 자처했다. 그사이 노총각 과장이 이욱이 여자 친구에게 차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는지 몇몇 동료들이 이욱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지만 상관없었다.
차라리 새로운 여자를 찾아 공허하게 비어 버린 마음을 치유받을까 하는 충동도 들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만든 인연 또한 허무한 끝을 맞이한다는 것을, 서른 살의 한이욱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영 씨. 이 보고서, 내가 참고하라던 자료로 만든 거 맞아? 작년이 아니라 2년 전 프로젝트 모델을 토대로 작성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조건이나 초안 자체가 완전히 다른데 작성하면서도 이상하다는 점 못 느꼈어? 그리고 수장 씨, 프레젠테이션 오타 신경 쓰라고 했지? 한 번 더 훑어보는 게 그렇게 힘들어?”
“죄송합니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집에 들어가선 담배를 뻑뻑 피우며 술을 마시다 잠들기를 며칠째. 이욱은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보고서와 샘플 서류를 내밀었다. 신입 사원인 지영과 수장이 이욱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이욱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구겨진 제 미간을 손으로 지그시 눌러 폈다.
“아니…… 짜증 내서 미안하다.”
그날 이후 같은 회사, 같은 층에 근무하면서도 이욱은 지운과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내 식당에서도, 휴게실에서도. 이전엔 하루에 한 번 정도 우연이라도 마주쳤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운이 의도적으로 이욱을 피하고 있다는 것일 터다. —혹은 이전의 마주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이거나.
“한 대리님, 식사하러 안 가세요?”
“먼저 가세요.”
점심시간이 되자 사원들이 하나둘 사무실을 나갔다. 지난 며칠 동안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안 한 탓인지 오늘따라 식욕이 돋질 않았다. 이욱은 동료에게 가벼이 손을 흔들어 준 후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사내 식당 반대편인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휴게실엔 아무도 없었다.
덜커덩. 이욱은 자판기에 지폐를 집어넣고 대충 아무 캔 커피 버튼을 눌렀다. 솔직히 이욱 입맛엔 커피가 완전히 달거나 블랙이 아닌 이상, 그게 그 맛으로 느껴졌다.
우웅. 이욱이 떨어진 캔 커피를 집으려 할 때였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여친느님: 택배 안 오는데??]
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욱은 그제야 사고에서 완전히 밀려났던 텀블러를 떠올렸다. 정확힌 보내 주기로 했던 약속 자체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욱은 솔직하게 아직 안 보냈다고 답변을 보냈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 담뱃갑을 꺼내 흔들며 흡연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 안 간이 의자에 누군가가 놓고 간 라이터가 있었다. 달칵. —화륵! 라이터에서 불길이 크게 치솟았다.
“아욱, 씨.”
시야를 장악하는 불빛에 놀란 이욱의 입에서 욕이 튀어 나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이터를 살펴보니 화력이 최대로 맞춰져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 이딴…….”
다 큰 어른이 라이터 불에 호들갑을 떤 것 같아 이욱은 머쓱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휴게실엔 이욱 외에—
“……아.”
지운이 막 휴게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렸는지 지운은 당장 이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이욱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덜커덕 굳었다. 너무나 확연한 동요였다.
지운이 고개를 돌리며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아…… 안녕…하세요.”
이욱은 바로 며칠 전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날 지운에게 과하게 화를 냈다. 기분 나쁘게 고백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런 게 아니었는데.
‘기분…… 나쁘다든가 그런 것보다 난…….’
위잉. 지운이 앞에 선 자판기에서 지폐 삽입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음료 밑 버튼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지폐가 반환된 것이다. 구겨진 부분이라도 다시 펴는 건지 지운이 손을 꿈지럭거렸다. 이욱은 고개 숙인 지운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미 인사에 답하기엔 타이밍이 늦었다.
지난 며칠 동안 사내 식당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기에 밖에서 점심을 먹는 건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된 지 얼마 안 된 이 시간에 휴게실에 온 것을 보니…… 점심도 제대로 안 챙겨 먹는 모양이었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냐? 좀 마른 것 같다.
이 두 마디가 이욱의 목구멍까지 차고 올랐다. 하지만 이욱은 입술을 깨물며 억눌렀다. 이제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기대감을 심어 주는 잔인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유지운이란 인간은 이욱에게 있어 아끼는 후배가 아니라고.
그러는 사이에 다시 지폐가 반환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지운은 아예 다른 지폐를 꺼내기로 했는지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럼에도 지운은 고개를 조금도 돌리지 않았다. 자판기에 어렴풋 비치는 이욱의 시선이 내내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제야 이욱은 깨달았다. 유지운은 이미 자신과 인연이 끊어질 것을 각오하고 고백했던 것임을. 그리 생각하니 유지운을 잃은 상실감이 더욱 커졌다.
“……아래에.”
이욱은 라이터를 본래 있었던 자리에 툭 던졌다. 이욱의 목소리에 놀란 건지, 라이터가 떨어지는 소리에 놀란 건지 지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욱은 피우지 않은 담배를 손으로 부러뜨려 재떨이에 버렸다. 그러곤 흡연 부스를 나오며 말을 이었다.
“내가 뽑은 캔 커피 있으니까 밥 먹고 마셔라. 속 버린다.”
“…….”
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모습에 처음으로 지운을 향한 동정심이 올라와 이욱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잔인하게 쐐기를 박는 짓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는 서로를 위한 것이었다. 적어도 이욱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욱은 자신에게도 들려줄 인사를 말로 내뱉었다.
“잘 지내라.”
“……!”
지금껏 쌓아 온 정이 있다 해도 동정심으로 남자와 사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상해 본 적도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물며 동생처럼 생각하던 유지운과는 더욱 더.
이욱은 콱 움켜쥐어진 지운의 손을 보곤 휴게실을 나왔다. 그러나 발은 돌덩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툭. 결국 이욱은 몇 걸음도 가지 못한 채 복도 벽에 기대고 말았다.
정말 유지운과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야 하는 걸까? 유지운이 그렇게 잘못한 건가? 게이면 사람을 좋아해선 안 된단 말인가? 지금껏 자신을 속인 것에 배신감을 느끼긴 했지만 10여 년이 넘는 오랜 연을 매정하게 끊어 버리는 것이 정말 옳은 판단일까? 유지운이 자신을 향한 마음만 단념해 준다면, 어쩌면 이전처럼—
……흐윽.
이욱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잔뜩 억눌린 울음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이욱은 소리가 난 휴게실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혐오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유지운이 마음을 단념해 준다면, 어쩌면 이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유지운은 지금껏 자신에 대한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버틴 것이 아니던가!
‘나란 새낀 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거야……!’
이욱은 저도 모르게 휴게실로 몸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거기에서 이욱은 멈췄다. 고백을 거절하고 작별 인사까지 고한 주제에 대체 뭘 어쩌려고.
우웅.
그 순간, 조용한 복도에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깜짝 놀라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이욱은 황급히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욕을 삼켰다. 여친느님은 얼어 죽을.
우우웅. 진동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쿵. 그와 동시에 휴게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자판기에 사람이 부딪친 것만 같은 소리가.
이욱은 수신 거절을 누른 후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그러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괜찮냐?”
역시나 자판기에 부딪친 건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지운은 왼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축 늘어뜨린 지운의 왼손엔 조금 전 이욱이 뽑았던 캔 커피가 들려 있었다. 여전히 이욱을 돌아보지 않은 채 지운이 말했다.
“……가.”
저 짧은 한 마디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까지 모를 정도로 미련하진 않다. 이욱은 이젠 아주 작은 걱정도 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절감했다.
“……미안하다.”
그러고 지운을 둔 채 다시 몸을 돌렸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도 업무를 마무리할 기미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던 이욱에게 과장이 다가왔다.
“잔업하지 마.”
“네?”
“한 대리, 남아서 잔업하지 말라고. 자네 때문에 신입들이 칼퇴근하는 거 눈치 보잖아.”
칼퇴근이란 단어를 쓰는 것부터가 눈치 주는 거 아닌가? 이욱은 과장의 모순된 단어 선택에 의아한 표정을 짓다 순순히 끄덕였다.
“네. 당분간은 저도 칼퇴근만 할 거예요.”
“싸우자는 거냐.”
“네?”
두꺼운 안경을 고쳐 쓰며 중얼거린 과장은 아무 말도 안 했다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곤 신입 사원인 지영에게 다가갔다. 지영에게 이제 괜찮으니 마음 놓고 퇴근 준비하라고 말하는 노총각 과장의 모습에 이욱의 눈썹이 찡그러졌다. 다른 사원들을 대할 때완 달리 능글능글하게 짓는 미소에서 음흉한 속내가 보였다.
‘아무리 여자가 고파도 그렇지, 띠동갑보다 더 어린 신입을.’
이욱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퇴근 준비를 했다.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쳐 둔 슈트 겉옷을 집었을 때 묵직한 게 느껴졌다. 주머니를 뒤적이니 전원이 꺼진 핸드폰이 나왔다.
전원을 켜자마자 날아드는 메시지는 무려 열두 개. 메시지는 왜 전화를 끊냐고 따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집에 놔둔 스타킹도 같이 보내 달라는 것과 왜 아직도 전원이 꺼져 있냐 안달하는 말, 정말 이럴 거냐 한이욱 야야야 불러 대다 잘 먹고 잘 살라는 인사로 끝이 났다.
메시지를 모두 확인한 이욱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찼으면서 참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예전이었다면 참 솔직하고 털털하구나, 하고 생각했을 성격인데 지금 다시 보니 상대방을 전혀 배려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 뭐가 씌었던 게지. 아니면…… 여자에게 차이고도 자존심도 없이 이것저것 챙겨줄 정도로 무르고 한심한 놈이라고 얕잡아 보인 걸지도.
이욱의 미소가 쓰게 변질되었다.
‘한심한 건 사실이지.’
“저기…… 한 대리님. 저녁 약속 있으세요?”
그때 지영이 조심스레 이욱에게 다가와 물었다. 노총각 과장은 어느샌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신 또 다른 신입인 수장이 지영 뒤에 쭈뼛거리며 서있었다. 그러나 이욱을 보는 시선엔 무언가의 기대로 차 있었다.
“없으면 우리랑 같이 저녁 먹어요. 대리님께 의논드리고 싶은 일도 있고…….”
지영이 과장이 있는 곳을 슬쩍 보았다. 지영의 시선을 좇은 이욱은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 입사한 신입 입장에서 나이 든 상사가 치근덕거리는 것만큼 곤란한 건 없다. 그리고 오늘 두 사람에게 괜히 짜증을 냈던 것도 마음에 걸린 차였다. 모처럼의 금요일이지만 어차피 여친에게도 차여 집에 일찍 들어가 봤자 할 일도 없었다.
“좋아.”
그러나 30여 분 후. 이욱은 괜히 왔다 후회하고 말았다. 셋이서 회사 근처의 치킨 호프집에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술이 두 바퀴 돌기 전까지만.
타앙! 지영이 거칠게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이욱을 노려보았다.
“씽…… 여자한테 차인 게 뭐 대수라고 땅바닥을 푹푹 파냐? 앙?! 젊은 나이에, 좋은 직장에, 응? 차 있겠다, 연봉 많이 받겠다, 기럭지 되겠다, 얼굴도 그만하면 되겠다, 응? 그런데 왜 화풀이를 우리한테 해, 이 한심아!”
“…….”
“지, 지영 씨 잠깐, 잠깐 진정 좀…….”
신압 사원 환영회 때 술을 다 거절했던 게 이런 이유였었나. 이욱은 고개를 살며시 돌리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지영이 대뜸 이욱에게 닭다리를 들이댔다.
“먹어! 안주는 먹어야 될 거 아냐아!”
“네, 네. 감사합니다.”
“옳~지, 잘해써, 잘해써.”
“아, 이게 아닌데…….”
수장이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욱은 받아 든 닭다리를 뜯었다.
지영의 술주정은 그 후로 10여 분간 계속 이어지다 그녀가 테이블에 이마를 대고 잠이 들어서야 끝났다. 이욱은 앞으로 회식 땐 절대 지영 근처에 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처음엔 지영 씨가 과장님 일로 대리님한테 상담해 볼까 말을 꺼냈던 건데…… 죄송합니다, 대리님.”
“괜찮아.”
“그런데 대리님…… 여친이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을 때 이런 말 꺼내는 건 조금 이르다 생각하기는 하는데. 혹시…… 소개팅 한번 안 해 보실래요? 실은 우리 대학 후배 중에 엄청 예쁜 애가 있는데—”
“됐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욱은 뚝 자르며 거절했다. 수장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수장이 기도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으며 애원했다.
“하, 한 번만 만나 주시면 안 될까요, 대리님? 실은 전에 야유회 때 찍었던 사진을 걔가 봤거든요. 그런데 대리님한테 여친 없으면 소개 좀 시켜 달라고 부탁을…… 하하핫.”
“당분간 여자는 안 만날 거야.”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만나 주시기만 하면 그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대리님……!”
수장은 끈질겼다. 그리고 목구멍 너머로 들이키는 맥주 양이 점점 늘어 감에 따라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에도, 고민하는 것에도, 심지어 거절의 말을 계속 내뱉는 것에도 지친 이욱은 결국 짜증을 내며 승낙해 버렸다.
‘한심한 한이욱.’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과 퇴근하기 전에 보았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린 지운의 뒷모습도.
난 네게 날 좋아해 달라고 한 적 없어. 그런데 왜 다른 여자를 만나는 데에 네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이욱은 울컥 또 짜증이 났다. 대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처음부터,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을 좋아했다면 그 시간 동안 저만 멍청이같이 모른 채, 쭉…… 유지운 혼자만 자신을—
“나쁜 새끼…….”
“네?”
며칠 동안 밤마다 술을 마신 터라 취기가 빨리 올라왔다. 이욱은 수장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젓고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웠다. 이마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는데 시야가 일순 흔들렸다.
아무리 세상이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문을 낮추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의 시선을 자유로이 변환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다.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는 마음 넓게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솔직히 이 한국이란 나라에서 서른 살의 남자가, 이제 슬슬 자리를 잡고 결혼 문제도 생각해야 하는 서른 살의 남자가 뒤늦게 커밍 아웃을 하려면 모든 걸 버려야 할 정도의 각오가 필요하다.
아니, 그 이전에.
이욱은 지운과 키스를 하거나 섹스를 하는 자신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끝났지만.”
“네?”
이욱의 중얼거림에 수장이 다시 되물었다. 이번엔 손을 내젓는 것조차 귀찮아져서 이욱은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우우웅. 우우웅.
“큿…….”
진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며칠 동안 술 마시고 잠드는 짓을 반복해 예민해진 신경을 제대로 긁는 소리였다.
움찔거리던 이욱의 눈이 찡그러졌다. 그러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손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잡았다. 간밤에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 소주 두 병을 비우고 잔 탓인지 머리가 왱왱 울렸다. 간신히 눈을 뜬 이욱은 환한 액정 불빛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얼핏 보았던 발신인 이름이 뒤늦게 이성을 두드렸다.
이욱은 다시 조심조심 눈을 떴다. 그사이 전화는 부재중으로 넘어갔다.
[부재중 전화 - 유지운.]
“……어?”
끔뻑거리던 이욱의 눈이 커졌다. 시간은 새벽 5시를 갓 넘기고 있었다.
왜 이런 시간에……? 이욱은 한참을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걸었던 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술을 퍼마시고 홧김에 전화를 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유지운은 취해도 곱게 취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이런 시간에 전화를 걸었다는 것은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여보세요?
통화 연결음 노래가 한 마디 나오기도 전에 끊겼다. 그러나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지운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유지운 핸드폰 아닙니까?”
-아, 혹시 이 핸드폰 주인과 아는 사이십니까?
잔뜩 잠긴 이욱의 목소리와 달리, 상대방은 또렷한 발음의 사무적인 어투였다. 이욱은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 그런데 누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