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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지 않아도
1화
Episode 1. 네 사람의 관계
“선배, 진짜 고마워요. 진짜! 진짜로 고맙습니다!”
연신 허공에 대고 꾸벅 90도 인사를 하는 희찬의 얼굴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해맑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열심히 하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말은 대체 누가 만들어 낸 것일까? 만약 누가 만들어 낸 말인지만 안다면 그분에게 찾아가서…… 아니 이미 돌아가셨으려나? 아무튼, 그 사람 무덤에라도 가서 백만 번 절을 올리고 와야겠다는 심정이었다.
정말이지, 열심히, 딱 ‘열심히’란 단어에 걸맞게 살아왔다. 대학교 졸업 후, 취업난에 시달려 여기저기 알바로만 전전하길 일 년. 드디어 오늘, 평소 친하게 지내던 대학 선배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정말 동아줄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 아는 사람이 강규헌 작가 어시스트로 일하고 있는데 얼마 전부터 유학 간다 말을 자주 했었거든. 아무래도 다음 주에 갈 건가 보더라고. 그래서 어시스트 자리가 빈다면서 혹시 주변에 할 만한 사람 없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전화한 거야. 생각해 보니 너도 취업 자리 알아보고 있었잖아. 괜찮다면 그 일이라도 한번 해 볼래?
네, 당연하죠. 당연한 말씀을 뭐 새삼스레 물어보고 그런답니까? 선배님도 참.
희찬은 선배의 전화가 끊길 동안 수십 번은 허공에 대고 인사를 한 것 같다.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기한 듯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너무 기쁜 나머지 그들의 시선이 느껴질 새가 없었다.
선배의 전화가 끊기고 나서야 희찬은 인사를 멈추고 뿌듯한 얼굴로 두 손에 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이 선배가 나한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 다닐 때에는 사사건건 시비에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더니, 역시 사람은 오래 알고 봐야 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유희찬! 손님 몰리는데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앙칼진 사장의 목소리에 희찬은 놀라 휴대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눈이 쭉 찢어진 사장이 쓰윽 유리창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검지를 까닥였다. 얼른 들어와 일하라는 소리였다. 평소 같았으면 구시렁거리며 저 마녀 같은 인간, 이라고 속 시원하게 욕을 해 줬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그런 사장의 목소리도 귀엽게만 느껴졌다.
“네, 지금 갑니다!”
목청 좋은 희찬이 우렁차게 소리치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주문을 받는 내내도, 커피를 만드는 내내도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취업 생각뿐이었다.
강규헌이라…… 강규헌이라 하면 고등학교 때부터 천재라 불린 사람이었다. 사진대회란 대회의 상은 모조리 휩쓸고, 현재는 패션 사진작가로 일하고 있다는 걸 신문, 잡지 등에서 몇 번 보았다.
예전에 딱 한 번 사진전을 연 적이 있어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탈탈 털어 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 사람의 사진을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딱 하나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었다. 제목은 안단테. 빛 때문에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몽환적이고 뭔가 아름답고 가슴 따뜻하게 느껴졌던 사진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모두 괴이했다. 이게 정말 사진이 맞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독특한 발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물론 그러니까 천재란 소리를 들었겠지만.
하지만 ‘안단테’라는 제목을 가진 그 사진만은 달랐다. 그 사람의 독특하고 괴이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좋았다. 그 괴이한 사진들 틈에서 아름답게 빛나던 작품이라서.
“유희찬!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넋 놓고 예전 그 사진을 떠올리던 찰나, 누군가 희찬의 어깨를 툭툭 신경질적으로 쳤다. 사장이었다. 가자미눈을 한 그녀가 희찬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저쪽 테이블 안 치워? 손님 들어오잖아!”
“아, 네! 지금 갑니다.”
하여튼, 잠깐 쉬는 꼴을 못 본다니깐. 희찬은 입을 삐죽이며 얼른 2번 테이블로 달려갔다.
그 이후로도 사장의 잔소리는 여전했다. 1번 테이블을 치우고 있으면 10번 테이블을 치우라고 하질 않나.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자기는 잡지 보고 놀면서 손님 받으라고 하질 않나. 사장의 횡포는 장장 일곱 시간을 넘게 계속되어 갔다.
참으로 고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나서야 희찬은 사장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예전에 일자리가 생기면 그만두겠다고 몇 번이나 말한 적이 있었지만 그녀는 오늘 희찬의 말을 듣고 처음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소리를 빽 질렀다.
“갑자기 알바를 그만두면 우린 어쩌니? 당장 내일부터 장사를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일주일 전에 미리 통보를 주든가!”
“죄송해요. 저도 아까 연락받은 거라서요. 하지만 몇 달 전부터 몇 번이나 말씀드렸던 건데…….”
“네가 언제 나한테 얘기했어? 어? 참나, 너 말고는 알바생도 없는데 어쩌라는 거야, 지금!”
희찬은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사장이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일 당장 희찬이 빠지면 그녀를 대신할 알바생은 이곳에 없었다. 한참을 꾸중을 듣던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고 사장의 잔소리가 드디어 잠시 멈추었다.
“엄마, 또 희찬이 괴롭혀?”
사장의 아들인 영운이었다. 씩 웃으며 희찬에게 다가간 영운은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장은 영운과 희찬을 아니꼽다는 듯 흘겨보았다.
“엄마가 언제 얠 괴롭혔다는 거야?”
“매번, 맨날, 시시때때로―”
“김영운, 엄마한테 진짜 제대로 맞아 볼래?”
“그러니까 그만 좀 희찬이 괴롭히시라고. 희찬이처럼 오래 여기서 버티는 알바생이 어딨다고 그래? 엄마 성격 때문에 알바생이 오는 족족 한 달도 못 버티고 다 나가 버렸잖아.”
영운은 희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렇지?’ 하고 물었다. 희찬은 억지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장은 영운의 태도에 이를 바드득 갈더니 다짜고짜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딱―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영운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사장을 바라보았다.
“아, 왜 때려!”
“으이그, 알지도 못하면서 싸고돌고 있어! 얘가 지금 내일부터 당장 알바를 그만두겠다고 하잖아. 알바생 없으면 내일부터 장사는 누가 다 할 건데? 엄마가 무슨 몸이 두어 개나 되는 줄 알아? 어?”
“진짜? 희찬이 알바 그만둬? 정말이야?”
영운이 놀란 눈으로 희찬을 바라보았다. 희찬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어요. 갑자기 아는 선배한테서 연락이 와서, 내일부터 바로 출근해야 해요.”
“우와, 잘됐네! 드디어 직장을 구했구나. 축하해!”
희찬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심으로 그녀를 축하해 주었다. 그러자 사장은 또 그의 뒤통수를 손으로 내리쳤다. 이번엔 아까보다 두어 배는 더 센 것 같았다.
“아! 또 왜 때려!”
“잘된 일이라니, 축하할 일이라니! 이게 지금 축하할 일이야?”
“그럼 축하할 일이지! 엄마는 희찬이 사정 뻔히 알면서 왜 그래?”
“그럼 내일부터 가게는 누가 볼 건데!”
“내가 보면 되지 뭘 그래!”
“사법고시가 코앞인데 무슨 가게 일을 돕겠다고! 안 돼. 유희찬, 전화해서 다음 주부터 출근하겠다고 해.”
“아이참, 엄마는! 됐어. 희찬이 내일부터 거기 출근해. 엄마는 내가 잘 알아서 설득할 테니깐.”
“김영운!”
사장이 또 영운의 뒤통수를 때리려고 했지만, 이번엔 영운이 그녀의 손을 잽싸게 낚아챘다. 꼼짝없이 영운의 손에 잡힌 사장이 놓으라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희찬아, 얼른 가! 어서!”
영운은 펄펄 날뛰는 사장을 간신히 제압하며 희찬에게 가라고 소리쳤다. 희찬은 사장을 힐끗 쳐다보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유희찬, 너 이대로 가면 이번 달 알바비 없을 줄 알아! 어?”
“희찬아, 걱정하지 마. 오빠가 알아서 알바비는 통장으로 보내 줄게!”
“아, 네, 감사합니다.”
“유희찬!”
“그래. 나중에 시간 나면 카페에 놀러 오고. 잘 가!”
“아, 네. 그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전 이만 가 볼게요!”
“유희찬! 어딜 가, 어딜! 유희찬, 거기 안 서?”
사장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카페 안을 울렸다. 하지만 희찬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부랴부랴 카페를 빠져나왔다.
“휴우― 마지막까지 잡아먹으실 기세네.”
희찬은 힐끗 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런 식으로 그만둘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영운에게는 미안하지만 마지막 사장의 모습이 너무나 섬뜩해서 다신 그 카페에 발을 못 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칵, 집에 도착한 희찬은 주머니에 넣어 둔 열쇠로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희찬의 인사가 허공에 부딪혔다. 하지만 익숙한 듯 그녀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거실 불을 켰다. 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마당이 있는 아담한 주택이었다. 잔디가 깔린 호화로운 마당은 아니었지만 작은 화초를 키우기엔 적절했다. 이 집은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가 사 둔 집이었다. 사람이 살려면 자기 집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아껴서 모은 돈으로 산 게 이 집이었다.
하지만 희찬의 아버지는 겨우 6개월 이곳에서 사시고 돌아가셨다. 그건 그저 불의의 교통사고였다. 아버지는 여느 날처럼 카메라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셨다. 그리고 그 이후, 아버지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그녀의 품에 돌아왔다. 그때 그녀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외로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 집에 혼자 남은 희찬은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카메라로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희찬은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침대에 내려놓고 책상 위에 있는 검은색 카메라 가방을 들었다. 바로 희찬의 손에 들린 것이 아버지가 남긴 카메라였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했고, 제일 아꼈던 카메라.
그녀의 아버지는 사진작가였다. 아주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그런 그는 딸의 사진을 찍는 걸 좋아했고, 그 덕분에 다른 집보다 두어 배 많은 앨범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자, 그럼 오랜만에 한번 가 볼까.”
희찬은 카메라 가방을 메고 집에 온 지 5분도 안 돼 다시 집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가 간 곳은 근처 한강공원이었다. 약간 쌀쌀한 날씨에 외투를 잠그고 몸을 움츠렸다. 이곳은 그녀의 아버지와 자주 오던 곳이었다. 아버지는 일이 끝날 때쯤이면 항상 그녀를 데리고 이곳으로 와 사진을 찍었다. 주로 희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아니면 한강 사이를 쭉 뻗은 다리와 풍경을 찍었다.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았다. 일 때문에 매우 바쁘셨지만, 주말이나 평일 저녁이면 항상 희찬과 이곳에 와 산책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자리를 잡고 들고 온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오래돼서 낡았지만, 아직 쓸 만한 카메라였다.
희찬은 곧 한강을 가로지르는 반포대교와 까만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조리개를 돌리며 초점을 맞추는 그녀의 능숙한 손놀림과 동시에 경쾌하게 울리는 셔터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렌즈로 보이는 밤하늘에 빠져 있던 그녀는 한 시간이 넘어서야 카메라를 내렸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팔이 엄청 아프네.”
그녀는 휙휙 어깨를 돌리며 뻐근한 팔을 풀어 냈다. 사진과를 졸업하고 일 년 내내 아르바이트로만 생활을 하다 보니 사진을 찍을 여유조차 없었다. 아마도 카메라를 마지막으로 잡아 본 게 두어 달 전쯤인 것 같았다.
“오랜만에 카메라 잡아 본 건데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어 볼까?”
희찬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가방 안에 있는 작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평소에 기념일이나 자잘한 것들은 폴라로이드로 남겨 두곤 했다. 물론, 이 습관도 그녀의 아버지 덕에 생긴 것이었다.
희찬은 카메라를 높이 들고 자신을 향해 렌즈를 갖다 대었다. 배경은 짙은 밤하늘과 한강을 가로지르는 반포대교. 가로등 불빛으로 자신의 얼굴이 보일 수 있게 한 뒤, 씩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한쪽 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찰칵, 경쾌한 셔터 소리와 함께 사진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와라, 나와라.”
주문을 외우듯 사진을 흔들며 검은 종이에 자신의 모습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폴라로이드 사진만의 묘미랄까? 사진을 흔들며 서서히 나타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다른 카메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참을 사진을 흔들자 까만 종이에 그녀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이 둥글둥글 참으로 못나게 나왔지만 희찬은 사진을 보며 낄낄 웃었다.
“어?”
희찬은 사진 귀퉁이에 찍힌 누군가를 유심히 보았다. 뒤쪽에 있던 누군가가 찍혔는지 희미하게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그녀는 뒤돌아 사진의 출처인 벤치를 쳐다보았다. 한강과 밤하늘 배경에 집중하느라 주변은 둘러보지 않았던 터라 누가 옆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벤치에 앉은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어떤 남자. 찬 강바람에 남자의 긴 머리칼이 살짝 흩날렸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한강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에 희찬은 무언가의 홀린 듯 그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오뚝한 콧날, 깊고 큰 눈, 그리고 여자처럼 도톰한 입술과 갸름한 턱선. 그녀는 멍하니 그를 보라보다 카메라 가방에서 DSLR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찰칵, 그리고는 무작정 그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저 사람…… 모델인가?”
어쩜 저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멋있을 수 있지? 희찬은 감탄사를 작게 내뱉으며 계속 셔터를 눌렀다.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무 뒤에 숨어 있는 그녀의 꼴이 영락없는 스토커처럼 느껴졌다.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희찬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그 시선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남자를 찍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렌즈 안에 그는 빛나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서울 도시의 네온사인 불빛과 반포대교, 그리고 도토리묵처럼 출렁이는 한강 물결. 사르륵 그의 머리칼을 날려 주는 강바람까지.
좋다, 좋아. 속으로 탄성을 지르며 쉴 새 없이 사진을 담고 있는 도중 그가 슬쩍 몸을 틀어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찰칵, 그의 얼굴이 정면으로 카메라에 담겼다. 기쁨과 동시에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에 놀라 희찬은 나무 뒤로 몸을 재빨리 숨겼다.
들켰나? 설마, 들킨 건가? 희찬은 카메라를 잡은 손이 흥건하게 땀으로 젖어 갔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눈을 꼭 감았다. 제발 들키지 않았기를. 평소에 기도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오늘만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길 빌고 또 빌었다.
“나와.”
하지만 역시 기도는 평소에 자주, 그리고 매일 하는 것이 좋은 거였나 보다. 그녀의 귓가에 울리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슬쩍 실눈을 떴다. 날 부르는 건가?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거기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너, 내 말 안 들려?”
정확하게 나무 뒤에 있는 희찬을 집어내자, 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앞에 보이는 가늘고 긴 다리. 그것을 따라 고개를 올리자 아까 연신 카메라의 담았던 남자가 보였다. 희찬의 카메라 셔터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삐딱하게 튼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희찬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카메라를 등 뒤로 숨겼다.
“왜, 왜 그러세요…….”
유희찬, 당황하면 안 돼. 당당하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냥 넘기면 돼.
“시치미를 떼시겠다?”
그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희찬은 뒤에 숨긴 카메라를 꽉 움켜쥐었다. 태연한 척. 그래, 태연한 척.
“시치미라니요? 무슨 소리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데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희찬은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그냥 제가 착각했나 보군요.’ 하고 그가 멀리멀리 떠나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입술 근육을 실룩거리며 무섭게 희찬을 노려보았다.
“내놔.”
“네?”
“뒤에 숨긴 카메라. 당장 내놔.”
“저기, 이건 제 업무용 카메…… 악! 이보세요!”
슬쩍 그녀가 카메라를 꺼내며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억지로 카메라를 빼앗아 갔다. 그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보며 희찬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이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저, 저기 그건 말이죠……. 그거 사실은.”
“너 내 스토커냐? 그 짧은 시간에 정말 많이도 찍었네.”
“스, 스토커라니요! 무슨 그런 막말을 하세요!”
“스토커가 아니면 대체 뭔데?”
그는 한 장, 한 장 그녀가 찍은 사진을 넘기며 말했다. 증거물이 떡하니 있어 뭐라 변명할 수가 없었다. 희찬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저기 진짜 제가 몰래 찍은 건 죄송한데요. 저 진짜 스토커는 아닌…….”
“자.”
남자는 휙 그녀의 품에 카메라를 던졌다. 희찬은 바닥에 떨어질세라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움켜쥐었다. 멀쩡히 제 품 안에 돌아온 카메라. 깨부수고 초상권침해니 어쩌니 할 줄 알았는데 곱게 카메라를 돌려주는 그의 행동에 희찬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용서는 무슨, 사진 싹 다 지웠으니까. 한 번만 더 스토커 짓 하면 그때는 경찰에 확…….”
“악! 이보세요! 사진 다 지웠어요?”
희찬은 카메라를 훑어보다 소리를 빽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란 남자가 살짝 뒷걸음질 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스토커 주제에 왜 소리를 질러?”
“지우면 어떻게요! 아, 진짜 힘들게 찍은 건데!”
“내 사진 내가 지우겠다는데 스토커가 무슨 상관이지?”
“그래도, 그냥 소장하는 것도 안 됩니까? 제가 어디 팔 것도 아니고, 인터넷에 유포할 것도 아니었는데!”
“스토커 주제에 참, 말이 많네. 당장 경찰서 가서 누가 잘못했는지 따져 봐?”
경찰서라는 말에 희찬은 그제야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이것은 명백한 그녀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좋은 사진을 놓친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사진을 몰래 찍히는 일, 기분 나쁜 일인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경찰서 안 가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할 판에 말이 많네. 이 여자.”
1화
Episode 1. 네 사람의 관계
“선배, 진짜 고마워요. 진짜! 진짜로 고맙습니다!”
연신 허공에 대고 꾸벅 90도 인사를 하는 희찬의 얼굴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해맑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열심히 하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말은 대체 누가 만들어 낸 것일까? 만약 누가 만들어 낸 말인지만 안다면 그분에게 찾아가서…… 아니 이미 돌아가셨으려나? 아무튼, 그 사람 무덤에라도 가서 백만 번 절을 올리고 와야겠다는 심정이었다.
정말이지, 열심히, 딱 ‘열심히’란 단어에 걸맞게 살아왔다. 대학교 졸업 후, 취업난에 시달려 여기저기 알바로만 전전하길 일 년. 드디어 오늘, 평소 친하게 지내던 대학 선배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정말 동아줄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 아는 사람이 강규헌 작가 어시스트로 일하고 있는데 얼마 전부터 유학 간다 말을 자주 했었거든. 아무래도 다음 주에 갈 건가 보더라고. 그래서 어시스트 자리가 빈다면서 혹시 주변에 할 만한 사람 없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전화한 거야. 생각해 보니 너도 취업 자리 알아보고 있었잖아. 괜찮다면 그 일이라도 한번 해 볼래?
네, 당연하죠. 당연한 말씀을 뭐 새삼스레 물어보고 그런답니까? 선배님도 참.
희찬은 선배의 전화가 끊길 동안 수십 번은 허공에 대고 인사를 한 것 같다.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기한 듯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너무 기쁜 나머지 그들의 시선이 느껴질 새가 없었다.
선배의 전화가 끊기고 나서야 희찬은 인사를 멈추고 뿌듯한 얼굴로 두 손에 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이 선배가 나한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 다닐 때에는 사사건건 시비에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더니, 역시 사람은 오래 알고 봐야 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유희찬! 손님 몰리는데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앙칼진 사장의 목소리에 희찬은 놀라 휴대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눈이 쭉 찢어진 사장이 쓰윽 유리창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검지를 까닥였다. 얼른 들어와 일하라는 소리였다. 평소 같았으면 구시렁거리며 저 마녀 같은 인간, 이라고 속 시원하게 욕을 해 줬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그런 사장의 목소리도 귀엽게만 느껴졌다.
“네, 지금 갑니다!”
목청 좋은 희찬이 우렁차게 소리치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주문을 받는 내내도, 커피를 만드는 내내도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취업 생각뿐이었다.
강규헌이라…… 강규헌이라 하면 고등학교 때부터 천재라 불린 사람이었다. 사진대회란 대회의 상은 모조리 휩쓸고, 현재는 패션 사진작가로 일하고 있다는 걸 신문, 잡지 등에서 몇 번 보았다.
예전에 딱 한 번 사진전을 연 적이 있어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탈탈 털어 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 사람의 사진을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딱 하나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었다. 제목은 안단테. 빛 때문에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몽환적이고 뭔가 아름답고 가슴 따뜻하게 느껴졌던 사진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모두 괴이했다. 이게 정말 사진이 맞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독특한 발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물론 그러니까 천재란 소리를 들었겠지만.
하지만 ‘안단테’라는 제목을 가진 그 사진만은 달랐다. 그 사람의 독특하고 괴이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좋았다. 그 괴이한 사진들 틈에서 아름답게 빛나던 작품이라서.
“유희찬!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넋 놓고 예전 그 사진을 떠올리던 찰나, 누군가 희찬의 어깨를 툭툭 신경질적으로 쳤다. 사장이었다. 가자미눈을 한 그녀가 희찬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저쪽 테이블 안 치워? 손님 들어오잖아!”
“아, 네! 지금 갑니다.”
하여튼, 잠깐 쉬는 꼴을 못 본다니깐. 희찬은 입을 삐죽이며 얼른 2번 테이블로 달려갔다.
그 이후로도 사장의 잔소리는 여전했다. 1번 테이블을 치우고 있으면 10번 테이블을 치우라고 하질 않나.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자기는 잡지 보고 놀면서 손님 받으라고 하질 않나. 사장의 횡포는 장장 일곱 시간을 넘게 계속되어 갔다.
참으로 고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나서야 희찬은 사장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예전에 일자리가 생기면 그만두겠다고 몇 번이나 말한 적이 있었지만 그녀는 오늘 희찬의 말을 듣고 처음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소리를 빽 질렀다.
“갑자기 알바를 그만두면 우린 어쩌니? 당장 내일부터 장사를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일주일 전에 미리 통보를 주든가!”
“죄송해요. 저도 아까 연락받은 거라서요. 하지만 몇 달 전부터 몇 번이나 말씀드렸던 건데…….”
“네가 언제 나한테 얘기했어? 어? 참나, 너 말고는 알바생도 없는데 어쩌라는 거야, 지금!”
희찬은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사장이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일 당장 희찬이 빠지면 그녀를 대신할 알바생은 이곳에 없었다. 한참을 꾸중을 듣던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고 사장의 잔소리가 드디어 잠시 멈추었다.
“엄마, 또 희찬이 괴롭혀?”
사장의 아들인 영운이었다. 씩 웃으며 희찬에게 다가간 영운은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장은 영운과 희찬을 아니꼽다는 듯 흘겨보았다.
“엄마가 언제 얠 괴롭혔다는 거야?”
“매번, 맨날, 시시때때로―”
“김영운, 엄마한테 진짜 제대로 맞아 볼래?”
“그러니까 그만 좀 희찬이 괴롭히시라고. 희찬이처럼 오래 여기서 버티는 알바생이 어딨다고 그래? 엄마 성격 때문에 알바생이 오는 족족 한 달도 못 버티고 다 나가 버렸잖아.”
영운은 희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렇지?’ 하고 물었다. 희찬은 억지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장은 영운의 태도에 이를 바드득 갈더니 다짜고짜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딱―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영운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사장을 바라보았다.
“아, 왜 때려!”
“으이그, 알지도 못하면서 싸고돌고 있어! 얘가 지금 내일부터 당장 알바를 그만두겠다고 하잖아. 알바생 없으면 내일부터 장사는 누가 다 할 건데? 엄마가 무슨 몸이 두어 개나 되는 줄 알아? 어?”
“진짜? 희찬이 알바 그만둬? 정말이야?”
영운이 놀란 눈으로 희찬을 바라보았다. 희찬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어요. 갑자기 아는 선배한테서 연락이 와서, 내일부터 바로 출근해야 해요.”
“우와, 잘됐네! 드디어 직장을 구했구나. 축하해!”
희찬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심으로 그녀를 축하해 주었다. 그러자 사장은 또 그의 뒤통수를 손으로 내리쳤다. 이번엔 아까보다 두어 배는 더 센 것 같았다.
“아! 또 왜 때려!”
“잘된 일이라니, 축하할 일이라니! 이게 지금 축하할 일이야?”
“그럼 축하할 일이지! 엄마는 희찬이 사정 뻔히 알면서 왜 그래?”
“그럼 내일부터 가게는 누가 볼 건데!”
“내가 보면 되지 뭘 그래!”
“사법고시가 코앞인데 무슨 가게 일을 돕겠다고! 안 돼. 유희찬, 전화해서 다음 주부터 출근하겠다고 해.”
“아이참, 엄마는! 됐어. 희찬이 내일부터 거기 출근해. 엄마는 내가 잘 알아서 설득할 테니깐.”
“김영운!”
사장이 또 영운의 뒤통수를 때리려고 했지만, 이번엔 영운이 그녀의 손을 잽싸게 낚아챘다. 꼼짝없이 영운의 손에 잡힌 사장이 놓으라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희찬아, 얼른 가! 어서!”
영운은 펄펄 날뛰는 사장을 간신히 제압하며 희찬에게 가라고 소리쳤다. 희찬은 사장을 힐끗 쳐다보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유희찬, 너 이대로 가면 이번 달 알바비 없을 줄 알아! 어?”
“희찬아, 걱정하지 마. 오빠가 알아서 알바비는 통장으로 보내 줄게!”
“아, 네, 감사합니다.”
“유희찬!”
“그래. 나중에 시간 나면 카페에 놀러 오고. 잘 가!”
“아, 네. 그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전 이만 가 볼게요!”
“유희찬! 어딜 가, 어딜! 유희찬, 거기 안 서?”
사장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카페 안을 울렸다. 하지만 희찬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부랴부랴 카페를 빠져나왔다.
“휴우― 마지막까지 잡아먹으실 기세네.”
희찬은 힐끗 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런 식으로 그만둘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영운에게는 미안하지만 마지막 사장의 모습이 너무나 섬뜩해서 다신 그 카페에 발을 못 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칵, 집에 도착한 희찬은 주머니에 넣어 둔 열쇠로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희찬의 인사가 허공에 부딪혔다. 하지만 익숙한 듯 그녀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거실 불을 켰다. 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마당이 있는 아담한 주택이었다. 잔디가 깔린 호화로운 마당은 아니었지만 작은 화초를 키우기엔 적절했다. 이 집은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가 사 둔 집이었다. 사람이 살려면 자기 집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아껴서 모은 돈으로 산 게 이 집이었다.
하지만 희찬의 아버지는 겨우 6개월 이곳에서 사시고 돌아가셨다. 그건 그저 불의의 교통사고였다. 아버지는 여느 날처럼 카메라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셨다. 그리고 그 이후, 아버지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그녀의 품에 돌아왔다. 그때 그녀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외로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 집에 혼자 남은 희찬은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카메라로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희찬은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침대에 내려놓고 책상 위에 있는 검은색 카메라 가방을 들었다. 바로 희찬의 손에 들린 것이 아버지가 남긴 카메라였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했고, 제일 아꼈던 카메라.
그녀의 아버지는 사진작가였다. 아주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그런 그는 딸의 사진을 찍는 걸 좋아했고, 그 덕분에 다른 집보다 두어 배 많은 앨범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자, 그럼 오랜만에 한번 가 볼까.”
희찬은 카메라 가방을 메고 집에 온 지 5분도 안 돼 다시 집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가 간 곳은 근처 한강공원이었다. 약간 쌀쌀한 날씨에 외투를 잠그고 몸을 움츠렸다. 이곳은 그녀의 아버지와 자주 오던 곳이었다. 아버지는 일이 끝날 때쯤이면 항상 그녀를 데리고 이곳으로 와 사진을 찍었다. 주로 희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아니면 한강 사이를 쭉 뻗은 다리와 풍경을 찍었다.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았다. 일 때문에 매우 바쁘셨지만, 주말이나 평일 저녁이면 항상 희찬과 이곳에 와 산책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자리를 잡고 들고 온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오래돼서 낡았지만, 아직 쓸 만한 카메라였다.
희찬은 곧 한강을 가로지르는 반포대교와 까만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조리개를 돌리며 초점을 맞추는 그녀의 능숙한 손놀림과 동시에 경쾌하게 울리는 셔터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렌즈로 보이는 밤하늘에 빠져 있던 그녀는 한 시간이 넘어서야 카메라를 내렸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팔이 엄청 아프네.”
그녀는 휙휙 어깨를 돌리며 뻐근한 팔을 풀어 냈다. 사진과를 졸업하고 일 년 내내 아르바이트로만 생활을 하다 보니 사진을 찍을 여유조차 없었다. 아마도 카메라를 마지막으로 잡아 본 게 두어 달 전쯤인 것 같았다.
“오랜만에 카메라 잡아 본 건데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어 볼까?”
희찬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가방 안에 있는 작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평소에 기념일이나 자잘한 것들은 폴라로이드로 남겨 두곤 했다. 물론, 이 습관도 그녀의 아버지 덕에 생긴 것이었다.
희찬은 카메라를 높이 들고 자신을 향해 렌즈를 갖다 대었다. 배경은 짙은 밤하늘과 한강을 가로지르는 반포대교. 가로등 불빛으로 자신의 얼굴이 보일 수 있게 한 뒤, 씩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한쪽 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찰칵, 경쾌한 셔터 소리와 함께 사진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와라, 나와라.”
주문을 외우듯 사진을 흔들며 검은 종이에 자신의 모습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폴라로이드 사진만의 묘미랄까? 사진을 흔들며 서서히 나타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다른 카메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참을 사진을 흔들자 까만 종이에 그녀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이 둥글둥글 참으로 못나게 나왔지만 희찬은 사진을 보며 낄낄 웃었다.
“어?”
희찬은 사진 귀퉁이에 찍힌 누군가를 유심히 보았다. 뒤쪽에 있던 누군가가 찍혔는지 희미하게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그녀는 뒤돌아 사진의 출처인 벤치를 쳐다보았다. 한강과 밤하늘 배경에 집중하느라 주변은 둘러보지 않았던 터라 누가 옆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벤치에 앉은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어떤 남자. 찬 강바람에 남자의 긴 머리칼이 살짝 흩날렸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한강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에 희찬은 무언가의 홀린 듯 그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오뚝한 콧날, 깊고 큰 눈, 그리고 여자처럼 도톰한 입술과 갸름한 턱선. 그녀는 멍하니 그를 보라보다 카메라 가방에서 DSLR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찰칵, 그리고는 무작정 그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저 사람…… 모델인가?”
어쩜 저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멋있을 수 있지? 희찬은 감탄사를 작게 내뱉으며 계속 셔터를 눌렀다.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무 뒤에 숨어 있는 그녀의 꼴이 영락없는 스토커처럼 느껴졌다.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희찬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그 시선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남자를 찍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렌즈 안에 그는 빛나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서울 도시의 네온사인 불빛과 반포대교, 그리고 도토리묵처럼 출렁이는 한강 물결. 사르륵 그의 머리칼을 날려 주는 강바람까지.
좋다, 좋아. 속으로 탄성을 지르며 쉴 새 없이 사진을 담고 있는 도중 그가 슬쩍 몸을 틀어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찰칵, 그의 얼굴이 정면으로 카메라에 담겼다. 기쁨과 동시에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에 놀라 희찬은 나무 뒤로 몸을 재빨리 숨겼다.
들켰나? 설마, 들킨 건가? 희찬은 카메라를 잡은 손이 흥건하게 땀으로 젖어 갔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눈을 꼭 감았다. 제발 들키지 않았기를. 평소에 기도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오늘만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길 빌고 또 빌었다.
“나와.”
하지만 역시 기도는 평소에 자주, 그리고 매일 하는 것이 좋은 거였나 보다. 그녀의 귓가에 울리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슬쩍 실눈을 떴다. 날 부르는 건가?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거기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너, 내 말 안 들려?”
정확하게 나무 뒤에 있는 희찬을 집어내자, 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앞에 보이는 가늘고 긴 다리. 그것을 따라 고개를 올리자 아까 연신 카메라의 담았던 남자가 보였다. 희찬의 카메라 셔터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삐딱하게 튼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희찬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카메라를 등 뒤로 숨겼다.
“왜, 왜 그러세요…….”
유희찬, 당황하면 안 돼. 당당하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냥 넘기면 돼.
“시치미를 떼시겠다?”
그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희찬은 뒤에 숨긴 카메라를 꽉 움켜쥐었다. 태연한 척. 그래, 태연한 척.
“시치미라니요? 무슨 소리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데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희찬은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그냥 제가 착각했나 보군요.’ 하고 그가 멀리멀리 떠나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입술 근육을 실룩거리며 무섭게 희찬을 노려보았다.
“내놔.”
“네?”
“뒤에 숨긴 카메라. 당장 내놔.”
“저기, 이건 제 업무용 카메…… 악! 이보세요!”
슬쩍 그녀가 카메라를 꺼내며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억지로 카메라를 빼앗아 갔다. 그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보며 희찬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이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저, 저기 그건 말이죠……. 그거 사실은.”
“너 내 스토커냐? 그 짧은 시간에 정말 많이도 찍었네.”
“스, 스토커라니요! 무슨 그런 막말을 하세요!”
“스토커가 아니면 대체 뭔데?”
그는 한 장, 한 장 그녀가 찍은 사진을 넘기며 말했다. 증거물이 떡하니 있어 뭐라 변명할 수가 없었다. 희찬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저기 진짜 제가 몰래 찍은 건 죄송한데요. 저 진짜 스토커는 아닌…….”
“자.”
남자는 휙 그녀의 품에 카메라를 던졌다. 희찬은 바닥에 떨어질세라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움켜쥐었다. 멀쩡히 제 품 안에 돌아온 카메라. 깨부수고 초상권침해니 어쩌니 할 줄 알았는데 곱게 카메라를 돌려주는 그의 행동에 희찬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용서는 무슨, 사진 싹 다 지웠으니까. 한 번만 더 스토커 짓 하면 그때는 경찰에 확…….”
“악! 이보세요! 사진 다 지웠어요?”
희찬은 카메라를 훑어보다 소리를 빽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란 남자가 살짝 뒷걸음질 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스토커 주제에 왜 소리를 질러?”
“지우면 어떻게요! 아, 진짜 힘들게 찍은 건데!”
“내 사진 내가 지우겠다는데 스토커가 무슨 상관이지?”
“그래도, 그냥 소장하는 것도 안 됩니까? 제가 어디 팔 것도 아니고, 인터넷에 유포할 것도 아니었는데!”
“스토커 주제에 참, 말이 많네. 당장 경찰서 가서 누가 잘못했는지 따져 봐?”
경찰서라는 말에 희찬은 그제야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이것은 명백한 그녀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좋은 사진을 놓친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사진을 몰래 찍히는 일, 기분 나쁜 일인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경찰서 안 가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할 판에 말이 많네. 이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