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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는 콧방귀를 뀌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유유히 희찬의 옆을 지나쳤다. 고개를 틀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희찬은 카메라를 들어 찰칵, 그의 뒷모습을 순식간에 담아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셔터 소리를 들었는지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히익, 들켰나? 놀란 희찬은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그가 가던 길 반대쪽으로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잡히면 안 돼. 마지막 한 장이라도 사수해야 해! 희찬이 전속력으로 달려 도망갈 때, 남자는 멍하니 그녀의 달아나는 모습을 바라보다 허한 웃음을 내지었다.
“저거 완전 이거 아니야?”
그는 손가락을 머리 위로 휘휘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전 아닙니다! 스토커가 아니에요!’
온몸으로 저항하며 소리쳤지만 다가오던 경찰은 희찬의 양쪽 팔을 잡아챘다. 그녀는 몸부림쳤다.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달칵, 손목에 쇠고랑이 채워졌다. 울상이 된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단 한 사람만이 희찬을 지켜보고 있었다.
‘잘 가, 스토커.’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다. 세상에, 아니야, 나는 아니야! 나는 스토커가 아니라고! 발버둥을 치며 아니라고 저항을 하자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에서 그의 사진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세상에, 이게 왜, 왜, 왜!
벌떡,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기랄, 그냥 꿈이었다.

첫 출근 꿈부터 영 뒤숭숭하다. 희찬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시계를 보니 여덟 시 삼십 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에― 여덟 시 삼십 분?”
세상에, 뭐야? 희찬은 다리에 엉겨 붙은 이불을 걷어차며 얼른 욕실로 달려갔다. 정확히 일곱 시에 맞춰 놓은 알람은 어떻게 된 거지? 울상을 지으며 분노의 양치질을 하고 휴대폰 알람을 뒤적거리다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아, 오후…….”
오전을 오후로 맞춰 놓다니. 그녀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치약 거품을 뱉어 냈다. 첫 출근이지만 머리 감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무조건 달리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그녀는 평소엔 볼 수 없었던 빠르기로 준비를 마치고 뛰쳐나와 집 앞을 지나가려던 택시를 겨우 잡아탔다. 어제저녁 선배가 알려 준 곳에 도착했지만 이미 약속 시각보다 삼십 분이란 시간이 지난 후였다.
“여기요.”
조금씩 모아 두었던 비상금을 탈탈 털어 택시비를 내고 차에서 내렸다. 쌩하니 멀어지는 택시에서 검은 매연이 뿜어져 나왔다.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으며 멍한 표정으로 강규헌 작가의 작업실을 올려다보았다.
“와, 예쁘다.”
마치 눈이 쌓인 듯한 흰색의 이층집. 마당엔 초록 잔디가 예쁘게 깔렸고, 듬성듬성 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집이 이런 곳에 있었다니. 희찬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자신이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큰일 났다. 완전히 늦었다. 부랴부랴 앞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꾹 눌렀다. 삐― 하고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낮고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어 갔다.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강 작가님이 어시스트로…….”
철컹.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문이 열렸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가 메고 있던 가방끈을 잡고 정원으로 들어섰다. 정원은 그야말로 그림이 따로 없었다. 작은 돌담길 따라 들어가면 흰색 현관문과 그 옆에는 예쁜 테라스도 자리 잡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구경을 하다가 자신이 지각했다는 걸 자각하고 얼른 현관문을 열고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작업실.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주변을 살피다가 슬쩍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
“저…… 실례합니다.”
현관문 앞에 놓인 흰색 슬리퍼를 신고 거실 안까지 들어섰지만,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 가셨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다 테이블 위 사진에 관련된 책들과 사진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듯 테이블에 다가가 사진을 하나하나 훑어보는데, 등 뒤에서 낮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늦게 온 주제에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만지다니.”
희찬은 놀란 표정으로 들고 있던 사진을 테이블 위해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뒤돌아서자 사진으로만 보던 강규헌이라는 사람이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늘어진 스웨터에 무릎이 늘어난 추리닝. 그리고 머리는 파마를 한 건지, 원래 곱슬머리인 건지 모르겠지만 정신없이 뒤엉켜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 못 한다면?”
비아냥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희찬은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금방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어 갔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고는 있나?”
“지각한 거랑 작가님 물건 마음대로 만진 거 죄송합니다.”
“안다니 다행이네.”
그는 희찬에게 다가오더니 들고 있던 머그잔을 테이블에 툭 내려놓았다. 몽글몽글 올라오는 커피 냄새가 희찬의 코를 자극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규헌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사진으로 볼 때는 잘 못 느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왜 유명한지 알 것도 같았다. 천부적인 사진 재능으로도 모자라 얼굴까지 이렇게 완벽 그 자체라니.
“남잔 줄 알았는데.”
“네?”
“유희찬. 남자 이름 같잖아.”
“아, 그런 소리 자주 듣긴 하는데…… 어시스트는 꼭 남자여야 하나요?”
“뭐 딱히 상관은 없지만.”
그런데 왜 트집을 잡고 늘어져? 희찬은 살짝 입을 삐죽 내밀었다.
“…….”
“…….”
정적이 흐른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테이블에 늘어진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희찬은 그런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보고 있던 사진을 보다 조용히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저렇게 사진만 보고 있는 건지. 꼭 가시밭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출근은 아침 아홉 시, 퇴근은 여섯 시지만 아마 그때 맞춰 가긴 힘들 거야. 오자마자 아메리카노 뽑아서 여기 이 테이블 오른쪽에 올려놓을 것. 어시스트 책상은 저 안쪽이고, 웬만하면 휴대폰은 진동으로 하고, 내가 하라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특히 사진과 책은 함부로 만지지 말 것. 그리고…….”
갑자기 쉴 틈 없이 말을 내뱉더니, 사진에 고정되어 있던 그의 시선이 그녀의 발밑으로 향했다. 희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 슬리퍼는 내 전용이야. 자기 슬리퍼는 사서 가져다 놓길.”
“아, 네!”
당황한 희찬이 신고 있던 슬리퍼를 얼른 벗어 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슬리퍼를 들어 현관문 앞에 놓으려던 찰나, 그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오늘은 그냥 신은 김에 신고 있어.”
“아…….”
희찬은 뻘쭘한 듯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다시 슬리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정말이지, 비위 맞추기 어려운 사람 같다. 만난 지 단 5분 만에 이렇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게 하다니. 희찬은 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슬그머니 폈다.
규헌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사진을 훑어보고 있었다. 희찬은 멀뚱히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따르르릉, 울리는 전화 소리에 희찬의 어깨가 움찔거린 건 말이다. 집 안 전체를 울리고 있는 전화벨 소리에 희찬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조용히 사진만 바라보던 규헌이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서 받아.”
“아, 네!”
희찬은 우렁차게 대답을 하고 전화벨이 울리는 곳으로 뛰어갔다. 전화기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거실을 이리저리 훑어보자 소파 위에 엎어져 있는 규헌의 휴대폰을 발견했다. 희찬은 미소를 머금으며 얼른 휴대폰을 집어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강규헌 작가님 휴대폰입니다.”
― 강 작가님 계십니까?
“아, 네. 계시는데.”
― 좀 바꿔 주시겠습니까?
“아, 네. 잠시만요!”
희찬은 후다닥 규헌에게 뛰어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는 사진을 넘겨 보던 행동을 멈추고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희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규헌은 이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아, 아!”
그제야 표정을 읽은 그녀는 허겁지겁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대었다.
“아, 저기 작가님께서 아직 주무시고 계셔서 저한테 말씀하시면…….”
― 아, 그럼 오늘 미팅 12시에서 11시로 앞당겨졌다고 말씀 좀 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희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그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작가님, 오늘 미팅이 12시에서 11시로 앞당겨졌다고 전해 드리래요.”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네? 그러니까 11시에 미팅을…….”
“그걸 왜 네 마음대로 정하지?”
“네? 아니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럼 날 바꿔 줘야지 멋대로 시간을 정하나?”
뭐야, 자기가 안 받는다며.
희찬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대꾸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그가 보고 있던 사진을 놓고 뚜벅뚜벅 2층으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희찬이 뒤를 쪼르르 따라가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요즘은 작가 어시스트는 작가 옷 갈아입는 것도 도와주나?”
“아, 아닙니다!”
당황한 희찬이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규헌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저벅저벅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휴우―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희찬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따박따박 말투가 화살처럼 가슴에 팍팍 박히는지 모르겠다. 성격이 별나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로 별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꼭 제2의 카페 사장님을 만난 기분이었다.
“아니, 자기가 전화 바꿔 주지 말라고 했으면서! 그럼 처음부터 전화를 자기가 받든가!”
희찬은 이를 바드득 갈며 소리쳤다. 하지만 곧바로 2층 계단 위를 슬쩍 바라보며 몸을 움츠렸다. 목소리가 좀 컸나? 들었으면 어떡하지? 희찬은 입술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울상을 지었다.
십 분 뒤, 뚜벅뚜벅 그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앉지도 못하고 서서 손톱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희찬은 고개를 들고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하늘색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며 내려오는 규헌의 모습에 그녀는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깐 잘생긴 한량인 같았다면 지금은 잘생긴 재벌 2세였다. 어쩜 저렇게 핏이 제대로 사는지. 어제 한강에서 만난 모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기럭지였다.
규헌은 계단을 내려와 쓰윽 희찬을 바라보았다. 규헌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그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웃지 마. 정나미 떨어져.”
일순, 그의 단호한 말투에 희찬의 얼굴에는 침울함이 가득 담겼다.
만난 지 15분밖에 안 됐는데 떨어질 정이 어디 있다고.
희찬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테이블 옆에 검은색 가방 하나 있을 거야. 그거 들고 나와.”
“네!”
하지만 그의 한마디에 희찬은 언제 침울했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희찬은 쪼르르 테이블 옆으로 달려갔다. 오른쪽을 바라보자 의자 밑에 검은색 큰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녀는 어깨에 큰 가방을 멨다. 꽤나 무거운 가방에 살짝 몸이 휘청거렸지만 낑낑 잘도 들고 규헌의 뒤를 따라나섰다.
정원 옆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었다. 그곳에는 비싼 외제차로 보이는 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다.
“유희찬!”
“네!”
“운전.”
그가 키를 덥석 그녀를 향해 던졌다. 날아오는 차 키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메고 있는 가방 때문인지 날아오는 키를 향해 달려가는 게 쉽지 않았다.
툭.
결국, 규헌이 던진 차 키는 정원 잔디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규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조수석에 올라타고 있었다. 희찬은 그런 그를 노려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리고는 몸을 구부려 잔디에 떨어진 키를 주워 주차장으로 향했다.
큰 가방을 뒷좌석에 싣고 운전석에 올라탄 희찬. 운전면허를 따고서 이렇게 고급 차를 운전하는 건 처음이었다. 설렘이 가득했지만 비싼 차인 만큼 흠집이라도 나면 돈이 왕창 깨진다는 부담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핸들을 돌리며 주차장을 능숙하게 빠져나갔다.

생각보다 운전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면허를 따고 오랫동안 차를 몰지 않았지만 비싼 차라서 그런지 어째 승차감도 좋고, 쭉쭉 잘 달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규헌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조수석에 타고 있는 내내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때문이었을까. 미팅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손바닥은 흥건하게 땀으로 젖어 있었다.
“여기 맞아요?”
희찬이 규헌에게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차에서 내렸다.
“대답 한마디 해 주기가 그렇게 어렵나.”
구시렁구시렁. 희찬은 그를 곁눈질로 노려보며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큰 가방을 어깨에 메고 건물 앞에 선 그녀는 ‘스쿠알로’라는 이름을 보며 멍한 표정을 내지었다.
아, 이곳이 그 유명한 ‘스쿠알로’라는 잡지사구나. 한국 잡지 중 가장 유명한 ‘스쿠알로’라는 여성 잡지. 희찬이 일하던 카페에서도 정기적으로 잡지 구독을 하고 있었고, 웬만한 20대, 30대 여성들이 요즘 자주 보는 잡지의 이름을 대라 하면 당연히 ‘스쿠알로’라 말할 정도로 유명했다. 이런 큰 회사에 와 본 건 처음이라 들뜬 희찬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건물 안을 살피고 있을 때, 어느새 오른쪽 안내데스크까지 훌쩍 가 버린 규헌이었다. 부랴부랴 그의 옆에 가 서기 무섭게 그는 안내원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희찬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또 뒤를 졸졸 따라갔다.
“13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안내원이 친절하게 엘리베이터 버튼까지 눌러 주었고, 간단한 눈인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무거운 짐 때문에 희찬은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오늘 날씨는 그리 더운 날씨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낑낑거리며 가방을 메고 있다가 결국, 엘리베이터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있던 규헌의 시선이 재빠르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따가운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희찬은 슬쩍 규헌을 바라보았고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가방을 들었다.
다행히 금방 13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검은색 뿔테안경을 쓴 남자 비서가 규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인사와 함께 그를 안내했고, 희찬은 낑낑거리며 무거운 짐 가방과 여전히 씨름 중이었다.
“이번 미팅은 대표님께서 직접 하실 계획이십니다.”
“대표님은 회사에 나오시지 않으신다고 들은 거 같은데요.”
“아, 네. 뭐, 그렇긴 합니다만, 이번엔 회장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비서도 톡 쏘는 규헌의 말투에 당황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규헌은 누구에게나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간신히 직장을 구해서 좋아했건만, 이런 사람 밑에서 일하게 되다니. 희찬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내려가려는 가방끈을 다시 올려 멨다. 한참 복도를 따라 걸어가던 그때, 반대편에서 코너에서 누군가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정우 씨, 오늘은 저녁은 나랑 놀 거지?”
“무슨 소리야, 언닌 어제도 놀았잖아. 오빠 오늘은 나랑 놀자. 응?”
“어제는 내가 아니라 유리 언니였잖아. 정우 씨, 나 오늘 저녁에 무지 한가하단 말이야. 응? 오늘은 나랑 오늘 놀자.”
“그만해. 그냥 셋이서 같이 놀면 되지. 뭘 싸우고 그래?”
꺄르르르르― 주점이나 클럽에서나 들을 수 있는 여자 콧소리와 대화들. 희찬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코너를 돌아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규헌의 옆에 있던 비서가 당황한 듯 부랴부랴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대표님!”
대표님? 저 사람이 이 잡지사 대표? 희찬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다 이내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굳은 얼굴로 자리에 멈춰 섰다.
“뭐야?”
짜증 섞인 말투로 그는 비서에게 물었다. 비서가 귓속말로 얘기를 건네자 낮은 욕을 뱉으며 양쪽 여자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손을 풀어 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 던져 주었다.
“둘은 주차장에 먼저 내려가 있어.”
“오빠 금방 올 거지?”
“금방 갈 테니까 얼른 가 있어.”
정우가 짜증 섞인 말투로 두 여자에게 말하자 그녀들은 그에게 손을 흔들며 희찬과 규헌의 옆을 지나쳤다. 도저히 옷을 입은 건지 벗은 건지 알 수가 없는 차림을 한 두 여자는 규헌을 힐끗 쳐다보더니 씩 웃으며 윙크를 날렸다. 꺄르르르― 그들의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내가 안 한다고 했을 텐데?”
“회장님께서 무조건 이번 미팅은 대표님께서 직접 하시라고 하셨어요.”
“미친.”
“이번에도 미팅 참여하지 않으시면 정말 죽을 각오하시라고…….”
비서의 말에 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다짜고짜 벽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긴 다리로 흰 벽을 차자 검은색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희찬은 그런 그를 쳐다보다가 혹여나 자신을 알아볼까 봐 규헌의 뒤에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그가 마음을 대충 진정시키고 터벅터벅 비서와 함께 규헌과 희찬 쪽으로 걸어왔다. 잔뜩 짜증 섞인 얼굴로 다가오던 그가 규헌을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말을 이어 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스쿠알로’ 대표 이사, 박정우라고 합니다.”
그는 심통 난 얼굴로 규헌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규헌은 그의 손을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말을 되받아쳤다.
“압니다.”
아, 압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비서도, 규헌의 뒤에서 숨어 있던 희찬도 놀라 그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정우는 그런 그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싸가지를 밥 말아 쳐 드셨나. 정우는 허공에 머문 손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