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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희찬은 둘의 기 싸움에 숨이 턱턱 막히는 듯했다. 왜 내 일자리는 하나같이 이런 곳일까. 잔뜩 울상을 짓던 그때, 정우의 시선이 규헌의 뒤에 숨어 있는 희찬에게로 슬금슬금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규헌의 뒤에서 알짱대는 저 여자. 정우는 몸을 기울여 규헌의 뒤에 있는 희찬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탄성을 내질렀다.
“어라? 그쪽…… 어디서 봤더라?”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슬며시 드는 희찬. 얼굴 바로 앞에 다가와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얼굴을 정면으로 보이고 말았다.
젠장. 들켰나?
그녀는 얼른 다시 규헌의 뒤로 얼굴을 숨겼다.
“어? 너 어제 한강 그 스토커…… 맞지?”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이미 한 발짝 늦은 후였다.
어떤 드라마에서 말하길, 사람의 인연에는 우연이란 건 없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기막힌 우연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필연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건 절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긴박한 상황은 비서 덕분에 간신히 종료되었다. 그리고 미팅 룸으로 자리를 옮긴 네 사람.
희찬은 여전히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우는 턱을 괴고 흥미로는 얼굴로 희찬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을 여기저기 돌리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미팅 시작하죠.”
고요한 미팅 룸 안에 규헌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쪽에서 보낸 기획안은 대충 검토했습니다. 그래서 기획안과 모델 분위기에 맞게 콘티를 몇 개 짜 봤는데…….”
“그런 건 그쪽에서 잘 알아서 마무리하세요.”
규헌의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우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류들을 내밀던 규헌의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 무거운 침묵. 왠지 거대한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류다. 하지만 정우는 그런 기류를 느끼지 못한 건지 꽤나 재밌다는 표정으로 규헌을 보며 또다시 말을 이어 갔다.
“제 말이 틀렸나요? 어차피 강 작가님께서는 천재이시고, 일 잘하시기로 유명하니 콘티 정도야 알아서 잘 준비하실 건데요. 뭘.”
하, 무겁다. 어깨가, 머리가. 금방이라도 뭔가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다. 희찬은 불안한 표정으로 정우와 규헌을 바라보았다.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거리며 막말을 내뱉은 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그렇죠. 제가 천재긴 하죠.”
그때였다. 규헌이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입을 연 것은.
규헌은 서류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지퍼를 닫아 옆에 앉은 희찬에게 가볍게 던져 주었다. 쿵, 무거운 짐 가방이 그녀의 무릎을 짓눌렀다.
“천재가 아니신 박 대표님께 보여 드려 봤자 이해도 못 하실 거라는 걸 제가 배려하지 못했네요. 그럼 콘티는 천재인 제가 알아서 잘 고르죠.”
나는 놈 위에 뛰는 놈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희찬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 규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허둥지둥 따라 일어섰다.
정우는 규헌을 보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성격이 좀 이상하다는 건 대충 아까 짐작은 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그는 주먹을 쥐고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가려고 문을 열었던 규헌이 뒤돌아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이내 규헌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틀어 그의 옆에 있는 희찬을 바라보았다.
“어이, 거기 여자.”
“저, 저요?”
희찬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정우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좀 남지? 할 얘기가 있으니까.”
희찬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씨익, 그가 장난스런 미소를 짓자 희찬의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설마, 마지막에 몰래 사진 찍은 것 때문에 그러나? 설마 정말 고소하려는 생각?
어느새 복잡해진 머리 때문에 심장이 쿵쿵 무섭게 뛰고 있었다.
“유희찬.”
그때, 단호한 목소리로 규헌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든 그녀가 규헌을 올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분명 이쪽으로 오라는 지시였다.
“아, 네!”
희찬은 우렁차게 그에게 대답했다. 그리곤 규헌이 문을 열고 미팅 룸을 나가자 망설임 없이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뭐야……. 야, 거기!”
당황한 정우가 소리를 지르며 희찬을 불렀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쪼르르 규헌을 따라 걸어갔다. 여전히 정우의 목소리는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희찬이 슬쩍 뒤를 바라보려 하자, 또 규헌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유희찬.”
“네, 넷!”
“신경 쓰지 마. 무시해.”
희찬은 긴장한 듯 빳빳하게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규헌은 그런 희찬에게서 눈을 떼며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표정으로 귓속을 손으로 후벼 팠다.
“젠장!”
정우는 발악을 하며 테이블을 손으로 쾅쾅 쳤다. 하지만 희찬은 돌아오지 않았다. 규헌을 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그렇게 가 버렸다.
“감히 내 스토커 주제에…….”
화를 못 이겨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정우의 모습에 비서는 겁먹은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우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비서는 피가 바짝 말라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하루에도 수십 번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잡지사 중에 ‘스쿠알로’만큼 유명하고 큰 회사가 또 어디겠는가. 비서에게는 두 눈을 꼭 감고 버티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정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스토커 주제에 자신의 말을 무시했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그 어떤 여자도 정우를 단 한 번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 적이 없었다. 정우는 외관상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다만, 약간의 흠이 있다면 이 욱하는 성질. 하지만 여자들 앞에서는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는 그였다.
“비서.”
“네, 네?”
“저 여자 신상 좀 알아와.”
“죄송합니다만, 저분은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인지라.”
“강규헌이랑 6개월 넘게 계속 일해 왔는데 따라다니는 부하 직원의 신상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남자 어시스트를 데리고 다녔습니다만.”
“뭐?”
“그렇게 궁금하시다면…… 강 작가님 전화번호라도 알려 드릴까요?”
젠장, 정우는 낮은 욕을 내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른다. 이대로 그냥 넘어가기엔 그의 자존심이 용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유……희찬.”
분명 규헌이 ‘유희찬’이라고 불렀다. 이름은 유희찬, 나이는 이십 대 초중반. 주소 모름. 전화번호 모름. 아는 것 단지 얼굴과 이름뿐.
정우는 괜한 분노에 손톱을 이로 물어뜯었다. 그때, 그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비서가 크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대표님, 회장님께서 미팅이 끝나는 즉시 곧바로 회장실로 오라 하셨습니다.”
“또, 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우는 푹 한숨을 내쉬다 짜증 섞인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저벅저벅 미팅 룸을 빠져나와 긴 복도를 걸어갔다. 희찬과 규헌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회사를 빠져나간 듯 보였다. 정우는 어젯밤 한강에서 희찬을 본 상황을 떠올렸다. 스토커 주제에 사진을 지웠다고 버럭 소리치던 이상한 여자. 그 여자를 또 우연히 회사에서 또 만났다.
“아, 미친. 왜 그딴 여자를…….”
그래, 그딴 여자.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지. 그냥 한낱 스토커일 뿐이야. 그런 여자들 한두 번 겪어 봐? 정우는 코웃음을 치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와 비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에 오자마자 꺄르르거리는 여자 웃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비서는 그 웃음소리가 꽤나 거슬리는지 귀를 살짝 틀어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정우는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익숙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어, 정우 오빠다!”
“정우 씨!”
정우의 모습이 보이자 피우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그에게 다가섰다. 그녀들이 다가오자 알싸한 담배 향이 코끝을 찔렀다. 옆에 있던 비서는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빠,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나 배고파. 우리 근사한 레스토랑 가서 밥 먹자. 응?”
정우의 양쪽 팔에 매달려 애교를 떠는 여자들.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라 비서는 고개를 휙 돌렸다. 정우는 두 여자를 보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슬쩍 그들을 밀어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미안. 오늘은 안 되겠다. 갈 데가 생겼어.”
“헐! 오빠, 다른 여자 만나기로 한 거야?”
“뭐야, 정우 씨! 오늘은 나랑 놀아야지!”
“그런 거 아니야. 회장 호출이야.”
회장의 호출이란 말에 두 여자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진 못했지만, 꽉 쥐고 있던 정우의 옷깃을 스르르 놓아주었다. 회장님 호출이라면 어쩔 수 없지, 뭐. 인심 쓰듯 두 여자가 정우에게서 순순히 떨어졌다.
“나중에 연락할게.”
그가 웃으며 두 여자에게 손을 흔들었지만,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정우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지갑에서 수표 두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택시비야. 남은 건 옷이라도 사 입어. 오늘 날씨 꽤 춥더라.”
두 여자는 제 손에 들어온 수표에 새겨진 동그라미 개수를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그녀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오빠! 고마워! 잘 쓸게!”
“그래, 민정아.”
“정우 씨. 고마워! 내일 봐!”
“선희 씨, 잘 가.”
정우가 손을 흔들자 부랴부랴 주차장 밖으로 뛰어가는 여자들. 하여튼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여자들이라니깐. 정우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능숙하게 비서에게 던져 주었다. 비서는 재빨리 키를 받아 들어 문을 열었고, 정우는 뒷좌석에 올라타 좌석 시트에 기대어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작업실로 돌아가는 동안 규헌은 희찬에게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내내 창밖만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희찬은 그런 규헌을 힐끗 쳐다보다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러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터벅터벅 작업실로 들어갔다. 희찬도 짐 가방을 들고 부랴부랴 작업실로 들어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밑에 짐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까 슬쩍 규헌이 가방을 열었을 때 보니 엄청난 사진들과 서류들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오늘 필요한 사진이랑 서류만 들고 가면 되지, 왜 이걸 다 들고 가는지 희찬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마의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허리를 펴는데 규헌이 정수기 앞에서 물을 마시곤 그녀를 불렀다.
“유희찬.”
“네!”
희찬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자 규헌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목소리 볼륨 좀 줄이지?”
“아, 죄송합니다.”
“여기 앞에 나가서 오른쪽 코너로 돌아 나가면 참맛나 중국집이라고 있어. 가서 짜장면 두 개 시켜서 네가 들고 와. 절대로 면 불지 않게.”
“네?”
“두 번 말해야 알아듣는 성격인가?”
“아, 아니요! 그런데 주문은 전화로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말하자 규헌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희찬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전화보다는 제가 다녀오는 게 더 빠를 것 같네요. 하하.”
희찬은 꾸벅 규헌에게 인사를 건네고 쪼르르 현관으로 달려가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다. 버젓이 전화기가 있는데 직접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두 개를 시켜 오라니. 그리고 왜 나한테는 메뉴 안 묻고 혼자 정해 버리는 거야? 희찬은 입을 삐죽거리며 힐끗 규헌을 쳐다보았다. 그는 거실 소파에 편안히 앉아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젠장, 완전 싸가지! 희찬은 마음속으로 소리를 빽 지르며 현관문을 쾅 닫고 중국집으로 향했다.
“대체 어디 있다는 거지?”
참맛나 중국집이라. 오른쪽 코너로 돌아 나가면 있다고 했는데. 희찬은 두리번거리며 중국집을 찾아 헤맸지만, 그 어디에서 ‘참맛나’라는 간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 나 놀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희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지나가던 한 아줌마를 덥석 붙잡았다.
“아주머니! 혹시 여기 참맛나 중국집이라고 있어요?”
“참맛나? 아, 저쪽에 있는 중국집 말하는가 보구먼! 거기가 짜장면 하나는 기가 막히지. 아가씨, 짜장면 드실려구?”
“아, 네! 여기 어디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요.”
“여기? 여기는 읍써! 저기 쭈욱 걸어가서 갈림길 나오면 오른쪽 코너로 들어가서 또 쭈욱 가야디야!”
쭈욱이 두 번에다가 여기엔 없다? 희찬은 멍하니 아주머니를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넸다. 여기엔 없다니. 아주머니의 이야기만 들어도 꽤나 먼 거리 같은데 거길 갔다 오라고? 그것도 배달이 아니라 직접 들고?
희찬은 갑자기 현기증에 몸을 비틀거렸다. 죽을 거 같다. 아무래도 강규헌이라는 작자 밑에서 일하는 건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도 어떻게 얻은 직장인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안 된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 희찬은 주먹을 꽉 쥐고 어깨를 다시 곧게 폈다.
“아자! 난 할 수 있어!”
어떻게 얻은 직장인데 다시 백수가 될 수는 없지! ‘체력’ 하면 유희찬, ‘유희찬’ 하면 체력이다. 희찬은 비장한 얼굴로 아주머니가 가리킨 곳으로 무작정 뛰었다.
아주머니의 정확하고도 주관적인 설명 때문이었을까. 이십 분이 지난 후에야 참맛나 중국집을 찾을 수 있었다.
“짜장면 두 개 주세요.”
“일행이 또 오시나 봐요?”
“아니요. 포장이요.”
주방장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손가락 두 개를 펴는 희찬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방장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 말을 건네고 짜장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희찬은 빈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조금 쉬었다가 또 뛰어가면 되겠지. 불지 않게 가져가야 하니 아마 전속력으로 달려야 할 듯싶었다. 배도 고프고, 힘도 들고. 희찬은 그 어느 때보다 죽을 지경이었다.
“짜장면 두 개 포장 나왔습니다.”
“네? 벌써요?”
오 분도 지나지 않은 거 같은데 벌써 짜장면이 나왔단다. 희찬은 울상을 지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 주방장이 건네준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래, 뛰자. 직장을 얻으려면 이 정도의 힘겨움은 감수해야지.
“아자, 아자! 파이팅!”
희찬은 큰소리로 파이팅을 외치며 무작정 작업실로 뛰기 시작했다. 우렁찬 목소리를 들은 주방장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다시 왔던 길을 뛰어가려니 숨이 턱턱 막혀 왔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에 든 이 짜장면이 불면 왠지 단칼에 잘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더럽고 치사하고, 앞으로 규헌의 비위를 맞출 생각을 하니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돈만 벌 수 있으면 뭔들 못 하리.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작업실까지 부랴부랴 뛰어갔다.
“하아, 하아. 짜장면 포장……해 왔습니다. 작가님.”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보지도 못했다. 그냥 무작정 뛰었다. 희찬은 짜장면이 들어 있는 봉투를 규헌 앞에 내밀었다. 규헌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봉투를 받아 들고 저벅저벅 식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포장을 뜯더니 나무젓가락으로 짜장면을 휘휘 저으며 면 상태를 확인했다. 눈으로는 잘 구별이 가지 않는지 그는 크게 한 젓가락 떠서 후루룩 짜장면을 들이마시듯 흡입했다.
오물오물. 그가 맛을 음미하듯 짜장면을 먹는다. 희찬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쳐다보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씹고 있던 면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안 불었네.”
“지, 진짜요?”
“딱히 내가 거짓말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그쪽도 와서 먹지?”
무덤덤한 그의 대답에 희찬은 바닥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대체 이게 뭐라고, 사람을 저렇게 간 떨리게 하는 건지. 희찬은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처럼 하하 웃더니 이내 신발을 벗고 들어가 규헌의 옆에 앉아 짜장면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짜장면은 꿀맛이었다. 배고파서였을까? 그녀는 거의 짜장면을 흡입하듯 먹어 버렸고, 오 분도 되지 않아 그릇을 싹 비웠다. 그녀는 옆에 놓인 물 한 컵을 마신 뒤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컵을 내려놓자 규헌이 그녀의 눈앞에 흰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맨 위에 이력서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규헌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거 작성하고 오늘은 퇴근. 내일은 늦지 마. 난 지각이 제일 싫으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데, 왜 이 사람이 조금 상냥해 보이는 것일까?
희찬은 환하게 웃으며 규헌이 내민 이력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규헌은 귀가 아픈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희찬은 배시시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규헌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자신의 입술을 툭툭 치며 말했다.
“입에 짜장 묻었어. 더러워.”
“아…….”
쓱쓱, 희찬은 옷소매로 입가를 닦아 냈다. 그러자 규헌의 인상이 더욱더 찌푸려졌다. 더럽다, 더러워. 얼굴에서 그의 속마음이 모두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전혀 모르는지 희찬은 그저 실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차가 멈추어지자 반사적으로 정우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자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회장의 비서실장이 정우의 차 문을 열어 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박 대표님.”
그의 인사가 언짢은 듯 정우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회사 건물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스쿠알로’는 ‘대한 일보’라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 신문사에 소속되어 있는 잡지사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그 ‘대한 일보’의 본사이자 정우의 아버지가 회장으로 계신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