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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정우는 낮은 한숨과 함께 회사 안으로 들어섰다. 비서도 정우의 뒤를 따르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 건물 최고층으로 향한 정우와 비서, 그리고 회장의 비서실장은 뚜벅뚜벅 긴 복도를 지나 회장실 앞에 우두커니 섰다.
“회장님, 대표님 오셨습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실장이 말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서실장은 익숙하게 회장실 문을 열었고, 정우는 입술을 잘끈 씹으며 그 안으로 들어섰다.
공기가 매우 무겁다. 미치도록 무거웠다. 회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숨이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정우는 아무런 인사나 소리도 없이 그를 응시했다. 창문 앞에 우두커니 앉아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남자.
그는 의자를 돌려 정우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감정 없는 그의 시선에 정우는 조심스럽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정우의 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저벅저벅 정우에게로 걸어온다.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다가올 때마다 정우의 주먹에 힘이 더더욱 실렸다.
찰싹―
아버지는 앞에 다가가자마자 그의 뺨을 내리쳤다. 정우는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다가 시선을 돌려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감정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 그리고 그 모습과 함께 겹쳐 보이는 과거의 그의 모습. 정우는 차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꽉 쥐고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얼빠진 놈.”
그가 싫다. 그가 너무나도 싫다. 감정 없는 저 얼굴로 무참히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가 정우는 미치도록 싫었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깔끔하게 아침 목욕을 한 뒤, 살짝 화장품을 얼굴에 발랐다. 활동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버스를 타고 작업실 앞에 도착해 시간을 보았다. 정확히 시간은 여덟 시 오십오 분. 희찬은 씩 웃으며 어제 규헌이 준 열쇠로 대문을 열고, 현관문으로 달려가 그가 알려 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삐리릭― 경쾌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곧바로 새로 사 온 슬리퍼로 갈아 신고 부엌으로 달려가 커피를 내렸다. 쪼로록― 떨어지는 커피를 테이블에 놓으면 모든 것이 완성. 희찬의 얼굴엔 뿌듯한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랑 날짜랑 잘 적어 놓으라고 했어, 안 했어? 스케줄표 적는 게 그렇게나 어려워?”
“그게, 그저께 작가님께서 인터뷰 전화를 받고 바로 퇴근하시라고 하는 바람에 깜박해서…….”
“그럼 내가 그날 직접 스케줄표 적고 퇴근하라 했으면 그 꼴통 같은 네 머릿속에 제대로 인지가 돼서 이렇게 까먹지 않았을 거라는 거야? 고로, 지금 이 상황은 모두 내 탓이라는 거네?”
“그, 그건 아니에요. 작가님!”
“대학교 다닐 때 장학금도 자주 받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다고, 분명 그렇게 들었던 거 같은데.”
“아, 제가 조금 장학금을 자주 받긴 했죠.”
머쓱하게 웃어 보이며 뒷목을 긁적이자 규헌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을 이어 갔다.
“칭찬 아니야. 웃지 마.”
매정한 규헌의 말에 희찬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뭔가 너무 완벽하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녀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얼마 전에 잡힌 인터뷰를 스케줄표에 적어 놓는 걸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오 분 전에 온 인터뷰 관계자의 전화에 그제야 생각이 났고, 지금 규헌은 부랴부랴 옷을 꺼내 입고 있었다. 그는 거울을 보며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만지고는 희찬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슬쩍 고개를 든 그녀가 다시 푹 고개를 숙였다.
“뭐 하고 있어? 얼른 차 대기시키지 않고.”
“아, 네!”
희찬은 규헌의 책상에 있는 차 키와 가방을 들고 서둘러 작업실을 나섰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빼자마자 규헌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걸어 나와 조수석에 올라탔다. 깔끔한 남색 슈트를 입은 그가 올라타자 시원한 향이 차 안으로 물밀 듯 밀려 들어왔다.
“작가님.”
“왜?”
“혹시…… 향수 뿌리셨어요?”
규헌은 희찬의 말에 혐오스러운 표정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좋지 않은 표정에 손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다시 말을 정정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오늘 작가님 향이 너무 좋으시네요. 바디워시를 바꾸셨나? 하하.”
그냥 좀 향수 뿌렸다고 살갑게 얘기해 주면 어디 덧나나? 흥.
희찬은 살짝 입을 삐죽거리며 그가 안전벨트 매기도 전에 차를 출발시켰다.
다행히도 인터뷰 시간에는 늦지 않게 도착했다. 희찬은 시간을 보고 조금 안심한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인터뷰가 있는 스튜디오 3층으로 향했다. 삼 층에 도착하자 인터뷰 준비에 한창인 스태프들이 여기저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규헌이 촬영장에 들어서자 모두들 그를 바라보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강 작가님!”
“안녕하세요.”
어느 한 여성 스태프가 악수를 청하자 싱긋 웃으며 악수를 받는 규헌의 모습에 희찬은 신기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웃으며 사람을 대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나? 얼마 전 ‘스쿠알로’에서 보여 줬던 무뚝뚝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람이랑 마주 보고 웃으며 대화하는 걸 못 하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규헌은 스태프들의 인사를 환하게 웃으며 받아 주었다. 그런 그가 너무나 낯설게 느껴져 희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규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윤 작가님!”
모든 스태프의 시선이 규헌에게 쏠려 있을 무렵, 한 스태프가 큰소리로 누군가를 향해 외쳤다. 규헌에게 향하던 시선들이 모두들 돌아서자 그의 시선도 윤 작가라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한국에 오시자마자 인터뷰하기 힘드실 텐데 흔쾌히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아니에요. 오자마자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저야말로 너무 고맙죠.”
스태프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를 보고 희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윤나영 사진작가?”
희찬은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윤나영이라면, 해외에서 패션 사진작가로 유명세를 탄 한국 사진작가 중 하나인 사람이었다. 외모도 예쁘고, 어린 나이에 해외 유명 사진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 사진작가. 희찬이 롤 모델로 삼고 있는 작가였다.
희찬은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도 본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른 작가 한 분과 같이 인터뷰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거물급과 같이하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희찬은 정신이 혼미해져 자신이 여기 왜 왔는지 잠시 있고 있던 찰나, 나영이 슬쩍 희찬의 쪽을 바라보더니 그녀를 향해 씩 미소를 지었다.
지, 지금 나를 보고 웃은 건가? 희찬은 당황스런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환하게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가 터벅터벅 경쾌한 구두 소리를 내며 희찬의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그녀를 볼 때마다 희찬의 심장은 더욱더 미친 듯이 뛰어갔다.
“오랜만이야.”
나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에? 희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영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 있는 사람은 규헌이었고,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 아는 사이인가? 그사이 나영이 손을 내밀어 규헌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 3년 만인가?”
나영이 웃으며 말했지만 그는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악수를 청하던 손을 살며시 내렸다.
“여전하다, 오빠는.”
나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희찬은 이상한 기류를 풍기는 둘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던 찰나, 나영의 코디네이터가 그녀에게 다가와 메이크업을 수정하자 말했다. 나영은 규헌을 보고 싱긋 웃었다.
“조금 있다가 인터뷰할 때 보자. 오빠.”
그녀가 살갑게 웃으며 말하곤 자리를 떴다. 나영은 가 버렸지만 규헌의 시선은 여전히 나영이 서 있던 곳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희찬은 그를 슬쩍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희찬에게로 옮겨졌다. 얼음 같은 그의 시선에 희찬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는 다짜고짜 그녀의 팔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자, 작가님!”
규헌은 스튜디오 밖으로 나와 아무도 없는 복도 벽에 희찬을 내던지듯 밀어붙였다. 희찬은 당황스런 얼굴로 규헌를 올려다보았다. 매우 살벌한 그의 표정에 그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희찬에게 못되게 굴고 잔소리를 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화난 표정으로 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 처리 자꾸 이따위로 할래?”
“뭐, 뭘 말씀하시는 건지…….”
“인터뷰 왜 윤나영이랑 같이한다는 거 말 안 했어?”
“에? 아, 그건 저도 오고 나서 안 사실이에요.”
“최소한 인터뷰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건지는 알고 스케줄 보고해야 할 거 아니야!”
규헌의 소리침에 희찬은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희찬은 고개를 숙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죄, 죄송합니다.”
“그 죄송하다는 말은 지금 내가 유희찬 널 만난 후로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은 더 들었어. 알아?”
“……정말 죄송합니다.”
희찬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숨을 죽였다. 규헌은 그런 희찬을 바라보고 긴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화를 삭이려 애를 썼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희찬은 입술을 꾹 깨물며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규헌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더니 이내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을 이어 갔다.
“유희찬, 봐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진짜 잘릴 줄 알아.”
단호한 말 한마디와 함께 규헌은 스튜디오 안으로 곧장 들어가 버렸다. 복도에 홀로 서 있는 희찬은 입술을 잘끈 씹다가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 냈다.
희찬이 스튜디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인터뷰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란히 앉은 규헌과 나영의 표정은 매우 상반되어 있었다. 나영의 표정은 한없이 밝아 보였지만 규헌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아까 스태프들을 보며 생글생글 웃던 그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사진작가 강규헌 씨와 윤나영 씨를 모셨습니다. 두 분은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사진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두 분은 고등학교, 대학교 선후배 사이라던데, 사실인가요?”
“네, 맞아요. 제가 후배고, 여기 규헌 씨가 한 학년 선배셨죠.”
나영이 살갑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규헌은 전혀 관심 없는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규헌의 태도에 당황한 리포터가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다음 질문을 던졌다.
“두 분은 원래 친하시죠?”
“그럼요. 학교 다닐 때부터 매번 붙어 다녔는걸요.”
나영은 들뜬 목소리로 리포터에게 말했지만, 여전히 규헌은 아무 말 없이 어두운 표정이었다. 이 이후의 질문에도 규헌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주지 않았다. 리포터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네, 아니오.’라는 단답형 대답만 나왔다.
“그러면은 조금은 짓궂은 질문을 드릴게요. 오래 알아 오셔서 그런지 두 분 사이에는 항상 열애설이 돌고 돌았어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리포터의 갑작스런 열애설 질문에 적극적이던 나영도 싱긋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스튜디오 사이를 흘렀다. 피디는 애가 타는 듯 리포터에게 어서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하하, 그럼 마지막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리포터가 허둥지둥거리며 다른 질문으로 하려던 찰나, 먼 산만 바라보고 있던 규헌의 시선이 카메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가 입을 조심스럽게 열기 시작했다.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네?”
“저희는 학교 선후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규헌의 갑작스런 대답에 스튜디오 안은 아까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피디도 당황, 리포터도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규헌이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죠.”
규헌은 들고 있던 마이크를 내려놓고 일어서 터벅터벅 스튜디오를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희찬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나섰고, 스태프들은 가려는 규헌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강규헌 씨!”
“규헌 씨! 이렇게 가시면……!”
“강 작가님!”
희찬은 그들을 간신히 밀쳐 내고 부랴부랴 그의 발걸음에 맞춰 다가갔다. 규헌이 엘리베이터를 탔고, 희찬이 그의 뒤를 따라 올라탔다. 뒤따라오는 스태프들을 보고 희찬이 얼른 닫힘 버튼을 누르자 아슬아슬하게 스태프들 앞에서 문이 닫혔다.
휴우, 십년감수했네. 희찬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힐끗 규헌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좋지 않은 규헌의 표정에 그녀는 질문하려던 입을 굳게 다물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희찬은 차로 달려가 얼른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규헌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계단으로 뒤따라오던 스태프들이 그들을 애타게 불렀다. 당황한 희찬이 규헌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는 두 눈을 감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희찬은 입술을 꽉 깨물고 차 시동을 걸고 출발시켰다. 스태프들이 부랴부랴 차 앞을 막아섰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휴우, 정말 잡히는 줄 알았네.”
도로로 빠져나오자 희찬은 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잡히는 줄 알고 얼마나 심장이 쪼그라들었는지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규헌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휴대폰 액정을 슬쩍 보더니 귀찮다는 표정으로 전원을 끄고선 뒷좌석에 휙 던졌다. 투둑, 그의 휴대폰이 차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작업실로 향하는 길은 역시나 고요했다. 항상 그랬지만 오늘은 더욱더 분위기가 어두웠다. 규헌은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잠이 든 건가? 희찬이 슬쩍 그를 쳐다보다가 작업실 앞에 차를 세웠다.
“작가님, 도착했어요.”
그녀의 말에 그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 슬며시 일어나 차에서 내렸다. 저벅저벅, 그가 축 처진 어깨로 작업실로 들어섰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규헌이 아까 던져 둔 휴대폰을 챙겨 작업실로 들어섰다.
규헌은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희찬은 안쓰럽게 그를 바라보며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올려놓았다. 아까 인터뷰도 그렇고, 분명 나영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나영의 악수도, 인터뷰도 그렇게 망쳐 놓은 것이다.
희찬은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인터뷰 질문처럼 사귀었던 사이였을까? 그렇게 예쁘고 능력 있는 사람과 무슨 문제가 있다고. 여러 생각에 빠져 있던 찰나, 갑자기 규헌이 몸을 일으키며 희찬이 이름을 불렀다.
“유희찬.”
“네!”
깜짝 놀란 그녀가 크게 대답을 하자, 그가 또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가서 앗차거 냉면집 가서 물냉면 두 개 사 와. 얼음 절대 녹지 않게 가져와.”
저번엔 중국집이더니, 오늘은 냉면집이냐. 규헌의 정말 독특한 횡포에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저번에 혹여나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중국집 번호를 저장까지 해 왔는데. 역시, 규헌은 희찬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규헌이 가 버린 촬영장 분위기는 싸늘했다. 나영은 멀뚱히 자리에 앉아 있다가 태연하게 앞에 놓인 물을 마시며 촬영장을 쭉 훑어보았다. 촬영장 분위기는 둘로 나뉘었다. 이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는 작가와 피디, 그리고 여자 스태프들과 여자 리포터.
“어쩐지, 저 사람 비위 맞추기 그렇게 어렵다더니.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방송 어떡하죠, 피디님. 이미 인터넷에 예고 글을 올려놓은 상태인데.”
발을 동동 구르는 작가와 피디는 규헌의 험담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여자 스태프와 리포터는 희희낙락거리며 규헌의 첫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까 박력 있지 않았어요? 저희는 학교 선후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와, 진짜 멋져요.”
“그러게. 박력 있고 얼굴 잘생기고.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아까 분명 처음 왔을 때는 진짜 생글생글 웃으면서 사람 마음 흔들어 놓더니 인터뷰 시작하니까 완전 쌩하더라.”
“그래도 전 나쁜 남자가 좋아요. 멋있잖아요!”
나영은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다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오늘 촬영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피디에게 다가갔다.
“피디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규헌 씨 잘 설득해서 다음 주쯤으로 촬영 다시 할 수 있도록 해 볼게요.”
“그래 주시겠어요? 아우, 감사드립니다. 정말.”
90도로 그녀에게 인사하는 피디를 뒤로한 채 싱긋 웃으며 스튜디오를 나왔다. 사실, 이번 인터뷰에 그들이 같이 출연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있었다. 나영에게만 들어온 인터뷰였지만, 나영이 피디에게 규헌과 같이하지 않으면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규헌에게는 자신과 함께 인터뷰한다는 것을 밝히지 말라고 말했다. 그가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면 어쩌나, 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흔쾌히 그가 승낙했다는 말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했다.
싸늘하고, 감정 없고, 무뚝뚝하고. 나영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는 무심히 시계를 보니 오후 두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아, 맞다. 나영은 박수를 탁, 치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단축번호 2번을 꾸욱 눌러 전화를 걸었다.
― 왜 이제 전화해? 아침에 도착한다면서.
뚱한 남자 목소리에 나영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우야!”
― 아, 귀 따가워! 소리 지르지 마. 좀!
“반가우니까 그렇지. 넌 안 반갑냐?”
나영은 환하게 웃으며 정우에게 말했다. 정우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구시렁거렸지만, 사실 오랜만에 한국에 온 그녀 때문에 살짝 기분이 들떠 있었다.
― 알겠어. 반갑다, 반가워. 그런데 대체 뭐하다가 이제야 전화를 한 거야?
“인터뷰 촬영이 있었어. 이제 끝나고 가는 길.”
나영은 핸드폰을 스피커폰으로 바꾼 뒤, 차를 출발시켰다. 그녀가 차를 출발시키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리자 정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