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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운전 중이야?
“응. 스피커폰이니까 걱정 마세요.”
― 걱정 절대 안 해. 아, 맞다. 누나, 우리 언제 만날까?
“뭐? 우리 엄마 만날 거라고? 갑자기 우리 엄마는 왜?”
― ……이 여자, 뭐라는 거야. 우리 언제 만나냐니까!
정우가 버럭 소리치며 말하자 나영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녀는 완벽했다. 재능도, 얼굴도, 집안도 모두 다 말이다. 하지만 조금 모자란 게 있다면 그녀가 동문서답을 아주 잘한다는 것이었다. 정우는 혀를 끌끌 차며 그녀에게 말했다.
― 하여튼 여전하다니까. 그놈의 동문서답.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리는 걸 어떡하냐?”
― 그건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는 증거야. 아, 누나. 오늘 할 일 없으면 같이 밥이나 먹자.
“지금?”
― 응. 왜 뭐 볼일 있어?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 그럼 한 시간 뒤에 누나가 좋아했던 그 레스토랑에서 만나자.
나영은 싱긋 웃으며 ‘알겠어.’라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오랜만에 보는 정우라, 나영은 살짝 들뜬 듯 어깨를 으쓱이다가 시계를 바라보았다. 레스토랑까지는 거리가 가까워서 한 시간 뒤라면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씩 웃으며 레스토랑 방향이 아닌 청담동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나영은 도로 위를 달리며 3년 만에 보는 서울 풍경에 신기한 듯 눈을 떼지 못했다. 3년이란 세월 동안 왜 이렇게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지. 곳곳에 있는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하나하나 떠오르는 기억들에는 모두 강규헌, 그가 있었다. 그와 같이 걸었던 거리. 그와 같이 간 음식점. 그와 항상 같이 가던 영화관까지. 나영은 조금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차를 멈춘 다름 아닌 규헌의 작업실이었다. 3년 전에도, 지금도 그의 작업실은 여전했다. 흰색 이층집과 꽃들이 늘어진 초록 정원. 나영은 차에서 내려 그의 작업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
나영이 작업실 앞에서 3년 전 추억을 되새기던 찰나, 누군가 그녀를 보고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희찬이었다. 땀범벅이 된 그녀가 양손에 포장 냉면을 들고 거칠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윤나영 작가님이시죠!”
희찬은 반가움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절…… 아세요?”
“아까 그 스튜디오에 있었습니다! 강규헌 작가님 어시스트 유희찬이라고 합니다.”
희찬은 꾸벅 90도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강규헌의 어시스트? 규헌이 여자를 어시스트로 뽑았다고? 나영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살짝 끄덕이며 그녀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강 작가님 만나러 오신 건가요?”
“아니요,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길에. 그럼 전 가 볼게요.”
나영이 생긋 웃으며 다시 차에 올라탔다. 희찬은 꾸벅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재빠르게 차를 몰고 멀어졌다. 멍하니 멀어지는 나영의 차량을 바라보던 희찬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어머, 내가 윤나영 작가님이랑 대화를 나눴어!”
희찬은 자리에서 펄떡펄떡 뛰며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왜 이곳에 왔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희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남의 사생활에는 관여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얼른 작업실 안으로 들어섰다.
규헌은 보통 때처럼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포토샵 작업을 하고 있었다. 희찬이 들어서자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희찬은 얼른 냉면을 꺼내 그의 앞에, 자신의 앞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확실히 얼음 안 녹은 거 맞아?”
“확실합니다! 제가 냉면집 사장님께 육수 얼음만 잔뜩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거기다 날씨도 오늘따라 추워서 얼음 녹을 일 없을 거라고 안심하라 하셨어요!”
희찬이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규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제는 그런 꼼수까지 쓴다 이거지?
규헌은 좌우로 고개를 내저으며 냉면 포장을 뜯었다. 정말 육수에 얼음이 동동 띄워져 있는 게 방금 냉면집에서 만든 냉면 같았다. 그는 젓가락을 들어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오물오물, 짜장면을 먹을 때처럼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왠지 그의 얼굴에서 만족감이 보였다.
희찬은 그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고, 그제야 그녀도 냉면을 먹으려고 젓가락을 들었다.
우릉우릉, 그녀가 냉면 면발을 집어 들었을 때 식탁 위에 있는 규헌의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희찬은 휴대폰을 힐끗 보다가 냉면을 후르륵 먹기 시작했고, 규헌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깡규, 이번 주 일요일 내 전시회 마지막 날이다. 그날 끝나고 애프터 파티할 거니까 너 무조건 와. 하늘같은 선배님 호출이다. ― 장유정]
규헌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들고 있던 휴대폰을 던지듯 식탁에 내려놓았다. 하늘같은 선배님은 무슨. 규헌은 신경질적으로 냉면을 후루룩 집어삼켰다. 희찬은 힐끗 그의 휴대폰을 슬쩍 바라보았다. 장유정? 전시회? 희찬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젓가락으로 규헌의 얼굴을 가리켰다.
“자, 작가님! 이 장유정이라는 분 설마 ‘마지막 그대를 위하여’라는 작품의 그 장유정 작가님 맞아요?”
규헌이 시큰둥한 얼굴로 희찬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얼굴을 향해 있는 그녀의 젓가락을 보며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이거 안 치워?”
“아, 죄송합니다.”
희찬이 어색하게 웃었지만, 그는 입술을 씰룩거리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고 냉면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작가님, 맞죠? 장유정 작가님 맞죠? 전시회는 가실 거예요, 작가님?”
“안 가. 귀찮아.”
“아, 왜요! 작가님 가시면 안 돼요? 가셔서 저도 좀 데려가 주시면…….”
희찬이 규헌의 옆에 차마 달라붙진 못하고 얼굴을 내밀며 애교 아닌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 규헌은 냉면 면발을 물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인상을 찌푸린 채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얼굴 치워. 냉면 맛 떨어져.”
희찬은 쑥 제자리로 돌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저 사람이 애교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지. 남 배려 따윈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 희찬은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냉면을 찔끔찔끔 먹기 시작했다.
규헌은 그런 희찬을 힐끗 쳐다보다가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 그렇게 혼나 놓고서도 금세 저렇게 웃으며 데려가 달라니. 규헌으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까 일은 순전히 희찬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나영의 대한 분노가 치솟아 희찬에게 화낸 것이었다.
규헌은 냉면을 다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멍하니 제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싸늘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어 갔다.
“이번 주 일요일 다섯 시까지 인사동으로 와.”
그는 크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화장실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냉면을 먹던 희찬이 멍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의 말을 이해하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작가님!”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냉면 국물을 후루룩 들이마셨다.

정우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그 이유는 같이 놀고 있던 여자가 찰거머리처럼 붙어 갈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수표 몇 장을 쥐여 주고 진한 키스와 함께 그녀를 떼어 놓았다. 정우는 입가에 묻은 그녀의 립스틱을 티슈로 닦으며 레스토랑 안에 있는 나영을 찾아 헤맸다.
그녀는 레스토랑 제일 안쪽 구석 창가에 앉아 있었다.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는 나영의 모습에 정우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누나!”
정우가 부르자 나영은 그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박정우!”
그녀의 특유의 하이 톤 목소리가 레스토랑에 울려 퍼졌다. 정우는 나영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게 얼마만이야. 이야, 박정우 이제 진짜 남자 같다?”
“누나 미국 갔을 때도 스물다섯, 진짜 남자였거든?”
“그때보다는 남자다워졌다는 거지, 인마. 너 아직도 여자 끌고 다녀?”
“내 삶의 낙이자 나의 유일한 특기, 취미인데 그걸 어떻게 그만둡니까?”
“허이고, 세상의 여자는 다 지 껀 줄 아는 이 자뻑쟁이야. 그렇게 대단하면 나도 한번 꼬여 보지 그래?”
“누난 어차피 안 넘어올 거잖아. 지금도 애 취급하면서.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못 꼬이는 여자는 누나 딱 하나야.”
정우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나영과 정우는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로, 친누나, 친동생처럼 지내 왔다. 서로 아버지들끼리 잘 아는 사이였고, 그렇다 보니 비슷한 또래였던 나영과 정우는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 어렸을 때는 순전히 정우가 나영에게 당하는 신세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둘의 사이는 친남매같이 변해 갔다.
“메뉴는 정했어?”
“우리 매번 먹던 걸로 했어. 괜찮지?”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을 본 것이 3년 만이다. 미국에 나영을 보러 간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을 전화로만 목소리를 듣다 이렇게 제 앞에 있는 나영이 왠지 꿈만 같기도 했다. 덕분에 정우의 표정은 평소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정우는 누구 앞에서도 자신의 편안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족이라곤 아버지밖에 없었고, 유일하게 정우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윤나영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다.
“아, 정우야. 잠깐만.”
신 나게 서로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때, 나영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바라보았다. 나영의 두 학년 선배인 유정에게서 온 문자였다.
“아는 선배가 이번 주 일요일 전시회 애프터한다고 오라네.”
“오자마자 여기서 콜세례가 터져나오는구만. 여전히 인기쟁이야.”
“워낙에 친했던 선배라서 그래. 그리고 이 선배 여자거든? 아, 너도 갈래? 오랜만에 같이 사진전이나 보러 가자.”
“나도 가도 돼?”
“당연하지. 스쿠알로 대표님께서 가시면 완전 영광이죠.”
나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정우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직장을 가진 지 딱 일주일째. 딱히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희찬은 직장 상사인 규헌에 대한 모든 것을 파악했다. 첫째, 그는 정말 지각을 싫어한다. 일 분이라도 지각하면 그날은 엄청난 히스테리를 부린다. 둘째, 그는 정말 깔끔하다. 바닥에 뭐 흘리거나 먼지 쌓이는 것을 못 본다. 하루에도 수십 번 넓은 작업실을 청소하는 데 희찬의 인력을 다 쓰는 것 같다. 셋째, 그는 좀 유치하다. 무언가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거나, 혹은 희찬이 뭔가 잘못을 했을 때, 항상 유치한 방법으로 상대를 골탕 먹이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 넷째, 그는 진짜 잘생겼다. 그 괴상한 성격만 아니라면 정말 푹 빠져 버릴 만큼.
희찬은 오랜만에 한껏 차려입은 채로 거울 앞에 섰다. 한동안 바빠서 자신을 꾸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사는 것에 치여 좋아하던 사진전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여섯 달 전에 이빛나라, 오단비 작가의 사진전, 석 달 전에 했던 심현례 사진작가의 사진전, 그리고 무려 한 달 전에 있었던 김민정, 이혜지 사진작가의 사진전까지. 그녀가 놓친 사진전만 몇 개인지 셀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오랜만에 사진전을 보러 가게 되었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만큼은 규헌의 어시스트로 들어간 게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찬은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정도 일찍 전시회 건물 앞에 도착했다.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장 앞에 몰려 있었고, 그녀는 쭈뼛쭈뼛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이른 시간이었기에 당연히 규헌은 보이지가 않았다. 먼저 들어가서 구경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그녀의 시선에 익숙한 누군가가 들어왔다. 코발트블루색 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정우였다.
저 사람이 여길 왜 왔지? 희찬은 정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얼마 전 한강에서 본 그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저렇게 혼자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모델로서도 손색이 없는 사람인데.”
희찬은 다시 여자를 끼고 있던 정우를 떠올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저 사람은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이다. 속지 말자.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지만 그에게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인가보다. 희찬은 멍하니 또 그의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희뿌연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싶은 욕구를 솟구치게 했고, 또다시 그녀는 자신의 손에 카메라가 없는 걸 아쉬워했다.
그때, 정우가 짧아진 담배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불을 비벼 끄기 시작했다. 차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던 정우는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는 희찬과 눈이 딱 마주쳤다. 놀란 희찬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슬쩍 뒷걸음질 쳤다. 정우는 그런 희찬을 보며 작게 미간을 찌푸렸고, 이내 저벅저벅 그녀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정우의 모습에 희찬은 몸을 돌려 세웠다. 아, 또 뭐라 하려고 저러나 싶어 생각에 얼른 자리를 피하려는데, 정우는 희찬의 옆을 아무 말 없이 휙 지나쳤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지나쳐 전시회장으로 들어가는 정우의 모습에 희찬은 기분이 언짢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무시하는 건가, 아님 날 못 본 건가? 그녀는 정우가 모습을 감춘 전시회장 입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하는 거야?”
그때,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뒤를 얼른 돌아보자 규헌이 멀뚱히 서서 희찬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 작가님.”
“누구 찾아?”
“아, 아니요. 그냥 들어갈까 말까 고민 중이었어요.”
“그냥 들어가 있지, 뭘 고민해?”
규헌은 희찬을 보며 혀를 끌끌 차며 전시회장으로 들어섰다. 희찬은 그런 규헌을 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뚱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녀의 뚱한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입구에서부터 장유정 작가의 사진을 본 그녀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진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름답기만 하지 않고 뭔가 가슴 묵직한 것도 느껴지는 사진들이었다.
“깡규, 진짜 왔네? 안 올 줄 알았는데.”
“선배가 오라면서.”
“어쭈? 말에 가시가 있다?”
높은 하이 톤의 목소리에 희찬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사진에서 눈을 떼었다. 장유정 작가였다. 규헌에게 장난을 치며 웃는 그녀의 모습에 희찬은 큰소리로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희찬의 인사에 놀란 그녀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누구?”
“내 어시.”
“에, 진짜?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어시스트? 웬일이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파티는 언제 시작하는데?”
“전시회가 여섯 시에 마감이니까 일곱 시쯤? 일단은 사진 보고 있어. 준비되면 부를게.”
규헌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리며 인사를 하고 희찬에게도 슬쩍 눈인사를 건넨 뒤, 그녀는 다시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희찬의 두 눈은 동경의 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멀어져 가는 유정의 모습에 전혀 눈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규헌은 그런 그녀를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혀를 끌끌 차기 시작했다.
“작가 보러 왔어, 사진 보러 왔어?”
“네?”
“사진 보러 왔으면 사진이나 봐. 작가 얼굴 봐서 네가 얻는 게 뭐가 있는데?”
쌀쌀맞은 규헌의 말에 희찬은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규헌의 말이 다 맞는 말이었기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사진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하나하나 심도 있게 사진을 바라보는 희찬의 모습. 규헌은 그런 그녀의 뒤를 아무 말 없이 맞춰 걸어갔다.
희찬은 아무생각 없이 사진을 보다가 문득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는 규헌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어시스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작가라니. 매번 그의 뒤를 따라다닌 그녀로서는 새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움직이면 그의 구두 소리가 똑같이 움직였다. 오묘한 느낌에 슬쩍 시선을 돌리자 그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놀란 그녀가 다시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규헌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저 반응은?
뭐라고 한 소리를 해 주려던 찰나,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발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준비 끝. 지하로 내려오시지요. ― 장유정]
“유희찬, 따라와.”
“네? 아직 사진 다 못 봤는데요!”
규헌은 희찬의 말을 무시하고 저벅저벅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희찬은 입을 삐죽거렸다. 아직 보지 못한 사진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희찬은 아쉬운 듯 주변을 훑어보며 지하로 내려가는 규헌을 따라나섰다. 다행히 지하에도 많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장 한가운데는 긴 테이블이 늘어져 있고, 그 위에는 파티 음식들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광경에 희찬은 어색하게 주변을 훑으며 쭈뼛쭈뼛 규헌의 뒤를 따라 걸었다.
“오, 강규헌! 웬일이야? 사진전에 다 오고?”
여기저기서 규헌을 알아보고선 반가운 듯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규헌의 옆에 서 있는 희찬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는 누구?”
“내 어시.”
“에? 여자가 네 어시라고? 말도 안 돼!”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강규헌이 여자 어시를 데리고 다니는 게 말이 되냐?”
“아가씨 진짜 누구? 규헌이 새 애인?”
깔깔 웃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던지자,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던 규헌의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희찬은 그 모습을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의 말을 이어 갔다.
“아니에요. 진짜 어시스트 맞아요. 유희찬이라고 합니다.”
꾸벅,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희찬을 쳐다보는 지인들의 시선. 희찬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단번에 그들을 저지했다.
“그만들 좀 해라. 너희는 규헌이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