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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유정이었다.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다가와 규헌 앞에 있는 지인들의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맞은 곳을 문지르며 입을 삐죽거렸다.
“미안해요. 어시 흠, 이름이……?”
“유희찬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희찬 씨. 얘네들이 좀 짓궂죠? 워낙에 장난이 심한 애들이라 규헌이 놀리는 데 재미 붙어서 그래요.”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선배! 선배는 너무 규헌이 자식만 싸고도는 거 아닙니까?”
“너희가 애꿎은 사람까지 잡으니까 그러지. 깡규, 너도 이제 표정 좀 풀지?”
“내 표정 원래 이랬어.”
“어이구, 그러세요? 이마에 주름 잡힌 건 노화가 와서 그런 거냐?”
유정의 말에 규헌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자 조금 그의 표정이 풀리는 것같이 보였다. 유정의 포스는 대단했다. 단 한 번에 이 많은 사람을 제압하고 규헌까지 다룰 줄 알다니. 희찬은 그런 유정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 유정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선배, 늦어서 죄송해요.”
익숙한 목소리에 모여 있던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를 발견한 유정이 제일 먼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가섰다.
“윤나영! 웬일이야, 오면 온다고 전화라도 하지!”
“선배 놀라게 해 주려고 했죠. 오면서 사진들 봤는데 하나같이 멋있더라고요. 역시 선배 사진 실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빈말인 거 다 알아, 인마. 너 못 본 3년 사이에 엄청 유명해졌더라? 뭐, 대학 다닐 때도 유명하긴 했지만.”
“대학 때 선배한테 많이 배운 덕분이죠. 헤헤, 솔직히 좀 운이 좋았어요.”
친한 사이인 듯 유정과 나영은 서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둘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슬쩍 나영의 옆에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풍채와 익숙한 얼굴. 누구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번뜩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 저 사람.
“아, 여긴 제 친한 동생. ‘스쿠알로’ 잡지 아시죠? 대표 이사예요.”
“어머,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박정우입니다.”
유정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정우의 모습에 희찬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영과 정우라니, 상상치도 못한 조합이었다. 희찬이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규헌은 나영과 정우의 사이가 그다지 놀랍지 않은 듯 무표정으로 음식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 맞다. 오늘 규헌이도 왔는데.”
유정은 뒤에 있는 규헌을 가리키며 나영에게 말했다. 규헌이란 말에 나영과 정우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정우는 적지 않게 놀란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 비해 나영은 씩 웃으며 규헌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여기서 또 보네. 오빠.”
그녀의 말에 규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저벅저벅 다른 곳으로 향했다. 천하의 윤나영 인사를 무시하다니. 지켜보던 지인들은 웅성거리며 멀어지는 규헌을 바라보았다.
“저 새끼, 진짜 너무하네. 헤어졌다고 해도 저건 아니지.”
“그러게나 말이다. 유일하게 나영이한테만 잘해 주던 자식이 찬바람이 쌩쌩 부는고만.”
역시나, 사귀었던 사이가 맞았구나. 희찬은 규헌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규헌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 게 보였다. 지금 이 자리가 매우 불편하다는 그만의 표현이었다. 그걸 알아챈 희찬이 규헌 쪽으로 가려는데 나영이 씩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여기서 또 뵙네요.”
“네! 그러네요. 하하.”
“규헌 오빠가 너무 까탈스럽게 굴죠?”
“아, 아뇨. 잘해 주세요! 엄청나게 잘해 주세요! 가끔 제 실수 때문에 잔소리를 듣긴 하지만…….”
“괜히 심술부리고 그러죠? 오빠 성격은 제가 더 잘 아는데, 정말 싫으면 그렇게 대하지도 않아요.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해 주시고 이해해 주세요. 아, 그날은 작업실 앞에서 만난 건…….”
“아, 말 안 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요.”
싱긋 나영이 웃으며 희찬에게 말했다. 아, 정말 이 여자 눈웃음이 아주 사람을 홀리게 만든다. 여자인 희찬이 봐도 이렇게 예쁜데 남자들에게는 얼마나 아름답게 보일까. 희찬은 선망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옆에 있는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까닥이며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희찬이 당황해하며 살짝 뒷걸음질 치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려 저벅저벅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뭐야…….”
이번엔 대놓고 무시하는 건가. 희찬은 머리를 긁적이며 멀어지는 정우를 힐끗거렸다. 자꾸 왜 저 사람과 마주치게 되는 걸까. 나영의 친한 동생이라니. 희찬은 자신의 우상인 나영과 매우 이상한 정우의 조합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파티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으르렁거릴 줄 알았던 정우와 규헌은 서로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희찬은 주섬주섬 음식들을 주워 먹으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계속 둘을 지켜보았다.
규헌은 혼자 벽에 기대어 홀짝홀짝 와인을 몇 잔 들이켰다.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고, 간간이 유정이 다가와 말을 거는 것이 전부였다. 그에 비해 정우는 물 만난 고기처럼 여자들과 함께 희희낙락거리느라 바빴다. 정말이지 한강에서 본 건 착시효과였을 정도로 그는 너무 달랐다. 한강에서는 그의 표정에서 외로움과 슬픔, 뭔가 겸허한 것이 보였는데, 지금 그녀 앞에 있는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방탕하고, 그저 여자는 일회용 장난감인 줄만 아는 그런 남자. 그냥 쓰레기 같은 남자에 불과했다.
“얼굴이 아깝네. 진짜.”
희찬이 괜히 심통을 부리며 주스를 한 컵을 쭉 비웠다. 더 이상 한심한 사람과 엮이고 싶진 않다는 생각을 하며 규헌에게로 시선을 돌리던 찰나, 그가 다급하게 입을 막고 파티장 밖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놀란 그녀는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작가님!”
그가 뛰어간 곳은 남자화장실이었다. 차마 들어가진 못하고 밖에서 발만 동동 굴렸다. 어쩐지,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시더라.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얼굴만 살짝 들이밀어 소리쳤다.
“작가님, 괜찮으세요?”
그녀가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떡하지? 들어가야 하나? 혹여 누군가가 남자화장실에 들어가는 그녀를 볼까 봐 두리번거리며 슬쩍 발을 떼던 그때,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희미하게 들려왔다.
“괜찮으니까 돌아가.”
“네?”
“……돌아가라고.”
희찬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곤 슬슬 뒷걸음질 치며 화장실에서 멀어졌다. 등이라도 두드려 주려 했는데, 여전히 까칠하시네. 그녀는 걱정을 뒤로한 채 터벅터벅 다시 파티장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구석에 서서 멍하니 화장실 쪽만 바라보았다. 규헌은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속이 좋지 않은 건지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아,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갈수록 걱정은 더해져 갔다. 희찬이 불안한 듯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계속 화장실 쪽만 바라보았다.
“아가씨, 혼자 왔어요?”
화장실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희찬의 앞에 와인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아, 감사합니다…….”
“파티에 왔으면 신 나게 놀아야죠. 이런 미인이 혼자 구석에 서 있으면 쓰나.”
“아, 네. 하하.”
미인? 이런 말은 오랜만에 들어 보네. 괜히 미인이란 말에 으쓱해진 희찬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며 그가 준 와인을 받아 들었다. 그는 빤히 희찬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그녀가 먼 산을 바라보자, 맞은편에 있던 정우와 딱 눈이 또 마주치고야 말았다. 여전히 정우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하하호호거리고 있었다.
“괜찮으면 저랑 다른 곳에 가서 한 잔 더 하실래요?”
“네? 아, 아니요. 전 일행이 있어서.”
“에이, 그러지 마시고 한 잔 더 합시다. 여긴 사람이 좀 많으니까 우리끼리 오붓한 곳으로 자리 옮기죠.”
“아니, 전 진짜…….”
희찬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전혀 물러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입술을 깨물며 규헌이 있는 화장실 쪽을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을까 그녀가 눈을 돌렸다. 하지만 딱히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없어 보였다. 문득 맞은편에 있는 정우가 생각나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여자들과 노느라 희찬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래도 혹여나 이쪽을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살짝 손을 흔들어 보았다.
“왜 그래요? 일행이에요?”
“아, 뭐…….”
그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애타게 흔들자 정우가 슬쩍 희찬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금세 눈을 돌리고 여러 여자와 함께 유유히 전시회장을 빠져나갔다. 역시, 도와줄 리가 없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이를 바드득 갈고 있던 찰나, 갑자기 남자의 손이 희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놀란 그녀가 뒷걸음질 치며 그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가요. 좋은 곳 데려가 줄게요. 저쪽도 2차 가는 거 같던데.”
“아, 아니요. 진짜 됐습니다.”
“에이, 괜찮아요. 부담 갖지 마요.”
당신 행동과 얼굴 자체가 그냥 부담인데 어떻게 부담을 안 가져, 이 사람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파티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전시회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아니요, 됐습니다, 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지만, 그에겐 소귀에 경 읽기였다.
“정말 됐습니다. 저 2차 안 가요.”
“아하, 이 여자 진짜. 이렇게 만난 거 좀 갑시다!”
그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끌었다. 희찬은 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남자의 힘을 혼자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아, 진짜 어떡하지? 화장실에서는 규헌이 기다리고 있고, 도와줄 사람은 없고. 희찬의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들이 들던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희찬과 남자의 앞에 우두커니 섰다.
“싫다는 사람, 그렇게 끌고 나가면 모양새가 영 그렇지 않습니까?”
“뭐야, 당신?”
“여자랑 놀고 싶으면 순순히 따라오는 그런 여자를 잡으셔야죠. 이 사람 아직 뭘 모르네.”
“참견 말고 그쪽은 좀 꺼져 주시죠?”
“꺼져? 하, 나참. 그쪽이야말로 좀 제발 꺼져 주시라고 이 여자가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데 안 보이십니까?”
정우가 손가락으로 희찬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자는 슬쩍 희찬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정우를 무섭게 노려보며 한 걸음 다가섰다.
“아니, 이 사람이 진짜. 당신 뭐야, 내가 누군지 알아?”
“제가 그쪽 같은 사람을 알아야 할 이유는 없는 거 같은데.”
“이게 진짜. 야, 너 뭐야. 너 진짜 죽고 싶냐?”
정우의 어깨를 툭툭 치며 시비를 거는 남자의 태도에 희찬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언성이 높아지자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희찬은 이러다 정말 싸움이 커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정우를 치고 있던 남자의 손을 잽싸게 낚아채며 누군가 그들 사이를 끼어들었다.
“선배는 진짜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네요.”
“넌 또 뭐……. 가, 강규헌?”
규헌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을 툭 던져 냈다. 그의 태도가 기분이 나빴는지 남자의 인상이 심하게 구겨졌다.
“야, 넌 선배를 대하는 태도가 어째 싸가지가 없다?”
“모르셨어요? 원래 저 이런 거.”
“강규헌.”
“좋은 날에 문제 일으키지 말고 가 주시죠.”
“머, 뭐야?”
“제 어시스트한테 무슨 볼일인지 몰라도 제 심기 건드리지 않는 게 선배 신상에 좋을 텐데요.”
규헌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선배라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그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규헌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툭 치고 파티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하, 살았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희찬이 한숨을 길게 늘어트렸다. 규헌은 그런 그녀가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희찬은 그의 싸늘한 시선에 주눅이 든 듯 고개를 푹 숙였고, 이내 긴 한숨을 내뱉으며 규헌이 무심히 차 키를 내밀었다.
“자.”
“네?”
“나 술 마셨으니까 네가 운전하라고.”
“아, 네!”
얼떨결에 규헌에게서 차 키를 받은 희찬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터벅터벅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구두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희찬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박정우였다. 그는 매우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해 준 건 난데 그냥 갑니까? 거참, 인심이 영 빌어먹으셨네.”
희찬은 작은 감탄사와 함께 꾸벅 정우에게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규헌이 그런 희찬을 밀어내고는 정우 앞에 우두커니 섰다. 규헌의 삐딱한 시선에 정우도 고개를 비스듬히 들었다. 그러자 규헌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말투로 정우에게 말을 이어 갔다.
“박 대표님께서 나서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도와줬으니 인사는 받아야겠는데요.”
“아니요. 쓸데없는 참견을 하셨으니 인사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봅니다, 전.”
“그건 그쪽 생각이고. 나는 받아야 하겠는데요. 강 작가님.”
뭐야, 갑자기.
희찬은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 놀라 규헌의 팔을 잡고 슬쩍 잡아당겼다.
“자, 작가님!”
“이거 놔.”
“하하, 작가님. 취하셨어요. 얼른 집에 가죠.”
“거기 여자, 좀 빠지지?”
“아이고, 왜 그러세요, 대표님. 하하, 아깐 감사했습니다. 정말로요. 작가님, 가요. 어서!”
규헌은 못 이기는 척 희찬의 손에 끌려갔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은 정우를 향하고 있었다. 전시회장을 빠져나온 희찬은 그제야 잡고 있던 규헌의 팔을 슬그머니 놓았다. 그러자 규헌은 낮게 욕을 뱉어 내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다른 분들에게 인사 안 하시고 가셔도 돼요?”
“괜찮아.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니까.”
“그래도…….”
“그냥 좀 가지? 쓸데없는 참견하지 말고.”
희찬은 입을 삐죽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규헌은 주차장을 빠져나오자마자 깊은 한숨과 함께 두 눈 지그시 감았다.

작업실 앞에 도착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에서 내렸다. 그는 희찬에게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저벅저벅 작업실 안으로 들어섰다.
털썩, 그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와인을 많이 마신 탓일까? 술을 그다지 잘하지 못하는 규헌이었기에 두통과 함께 어지러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규헌은 스르르 침대에 그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얀 천장이 빙빙 돌고 있었다. 마치 그의 몸이 좌우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랜만이야, 오빠.’
헤어지고 난 후에도 친근하게 규헌을 오빠라고 부르던 나영. 여전히 예쁘고, 여전히 멋졌다. 규헌은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누웠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깨질 듯한 두통에 침대 옆에 있는 서랍장을 열었다.
약을 여기 어디다 둔 거 같은데. 그가 약을 찾으려고 서랍장 안을 뒤지던 그때, 약이 아닌 사진 한 장이 손에 잡혔다. 그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그 사진을 꺼내 들었다.
예쁘게 웃고 있는 나영. 그리고 그녀의 옆에서 나란히 웃고 있는 다른 한 사람. 그건 규헌이 아닌 ‘스쿠알로’의 대표 이사, 박정우였다.
규헌이 잡은 사진 귀퉁이가 점점 구겨지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뒤로 돌려 뒤에 쓰여 있는 글자를 하나하나 마음속으로 읽어 내려갔다.
‘오빠, 미안해. 우리 헤어지자.’
그건 나영이 규헌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사진이자,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였다.


Episode 2. 때론 도도하게, 때론 적극적으로

지금 시각은 정확히 오후 두 시. 정우는 이 늦은 시각 자신의 회사 앞에 도착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눈부신 햇빛에 인상을 팍 찌푸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기분과 다르게 하늘이 맑다. 그는 이를 바드득 갈며 회사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일렬로 선 직원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마치 조폭을 연상케 하는 그의 회사 직원들. 그는 그런 그들의 태도가 익숙한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걸어갔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여직원이 그를 발견하고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머! 대표님, 안녕하세요.”
그녀의 목소리에 정우는 잔뜩 구기고 있던 인상을 펴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인사를 받은 게 매우 기쁜지 옆에 있는 동료와 꺅 소리를 지르며 사라지는 여직원. 그런 여직원이 멀어지자 정우는 다시 인상을 팍 쓴 채로 자신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쾅, 그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으며 소파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의 표정에는 잔뜩 짜증이 배어 있었다. 어제 그렇게 규헌과 희찬이 간 뒤로부터 정우의 표정은 짜증 그 자체였다.
“감히 내 앞에서, 그것도 내가 부른 여자를 낚아채 가?”
처음 한 번은 그러려니 했지만, 두 번 굴욕을 맛보고 나니 속에서 화가 들끓어 오른다. 규헌도 규헌이지만 자신의 부름에 아무렇지 않게 가 버리는 희찬의 태도가 그의 신경을 더 긁었다.
“으악! 짜증 나. 짜증 난다고!”
잊으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 봐도 자꾸 떠오르는 그들의 모습에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있던 신문지를 마구 찢어 바닥에 던졌다. 그때, 그의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영이었다. 신경질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른 그는 다운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 뭐야, 목소리가 왜 그래? 너 아직도 어제 일 때문에 그래?
나영이 콕 집어서 말하자 정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런 얘기할 거면 전화 끊어.”
― 알겠어, 알겠다고. 참나, 이런 여자가 있으면 저런 여자도 있지, 세상 모든 여자가 너한테 꼬리 살랑살랑 흔들며 반길 줄 알았냐?
“아, 진짜……. 그러는 누나는! 전 애인 앞에서는 빌빌대더만 뭐. 강규헌 그 사람 맞지? 나랑 찍은 사진 보내서 엿 먹였던 놈. 그 짓 할 때부터 알아봤어. 아니, 말로 해결하면 되지 나랑 찍은 사진은 왜 보내서 사람 엿을 먹여? 나는 진짜 누나가 이해가 안 간…….”
― 야, 박정우!
“아, 깜짝이야. 귀 안 막혔거든?”
― 그만 긁어라.
“누가 먼저 긁기 시작했는데 그래?”
― 아, 진짜! 됐다, 됐어. 밥 같이 먹자고 하려 했는데 밥맛이 뚝 떨어지네, 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