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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나영은 소리를 빽 지르고 전화를 끊어 버렸고, 정우도 신경질을 내며 휴대폰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정우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대표님.”
정우는 눈썹을 치켜뜨며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 비서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슬금슬금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저번에 강 작가님과 회의했던 콘티 예제 말인데요.”
“그거 이미 끝난 얘기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한번 저희가 콘티를 보고 촬영에 들어가야 하지 않나 해서…….”
“그쪽에서 알아서 하겠다잖아. 잘난 작가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래도 절차라는 게…….”
“아, 됐어. 쓸데없는 얘기할 거면 나가.”
“대표님…….”
“아, 진짜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알아서 하시든가.”
“…….”
“안 나가냐?”
정우의 싸늘한 말투에 비서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조용히 뒷걸음질 쳐 집무실을 나섰다. 달칵, 작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비서는 잔뜩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저거 진짜 대표만 아니면 한주먹 거리도 아닌 것이…….”
비서는 굳게 닫힌 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한참 뒤, 한숨을 길게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어쩌겠는가. 사회에서는 돈이 있는 자가, 직급이 위인 자가 모두 강자인 것을. 비서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는 저장되어 있는 규헌의 번호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또 전화하면 까칠하실 텐데…….”
비서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도, 저기도 윗대가리들은 모두 다 한통속인 듯싶다.

“어? 작가님 잉크가 없는데요?”
“떨어지기 전에 충전해 뒀어야지. 어제 확인하지 않고 뭐 했어?”
“어제는 잘 나오길래…….”
“변명을 따위 집어치우고 빨리 가서 잉크 충전해 오는 게 더 효율적일 텐데.”
“아, 네! 알겠습니다. 당장 잉크 충전하고 오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복합기를 만지기 시작했다. 여기 어디 잉크가 달려 있던 거 같았는데. 요리조리 살펴 간신히 잉크 위치를 찾았지만 아무리 잡아당겨도 잉크통이 빠지질 않았다. 그녀가 낑낑거리며 한참을 잉크통과 씨름을 하고 있자, 작업에 열중하던 규헌이 힐끗 그녀를 바라보고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래서 여자 어시스트 쓰기 싫다니까.”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비켜.”
“네?”
“그거 하나 못 빼서 낑낑거리긴.”
그가 그녀를 밀어내고는 잉크통을 잡아당겨 손쉽게 빼내었다. 희찬이 그렇게 잡아당겨도 빠지지 않던 잉크통이 이렇게 손쉽게 빠지더니. 그는 무심하게 잉크통을 그녀에게 던져 주고는 저벅저벅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확실히 규헌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에 싸가지 없는 말투를 가지고 있지만, 저번에 사진전을 데려가 준 것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희찬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살짝 입술에 미소를 띠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큰 소리로 대답한 그녀는 후다닥 작업실 밖으로 뛰어가 버렸다. 쾅, 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에 규헌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희찬이 무능력한 사람은 아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미숙하달까? 조금 모자란, 그런 느낌이 든다. 하나하나 신경 써 주지 않으면 알아서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역시 어시스트로는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
규헌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책상 위에 둔 그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혀 모르는 전화번호에 그는 슬쩍 액정을 보다가 무시하고 작업에 집중했다. 한참 뒤, 벨 소리가 끊겼다. 이제야 거슬림이 사라져 그의 얼굴이 편안해지려던 찰나, 또 전화벨이 울렸다. 짜증 섞인 얼굴로 그가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대체 누구야? 그는 결국 전화를 들어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열었다.
“네, 강규헌입니다.”
― 작가님, 저 스쿠알로 남 비서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 저번에 미팅에서 말씀하신 콘티 예제 때문에 연락드렸는데요.
비서의 목소리에서 묘한 떨림이 느껴지는 걸 감지한 규헌이 살짝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몸을 뒤로 살짝 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수화기 너머 비서에게 말을 이어 갔다.
“그거라면 이미 끝난 얘기 아닙니까?”
― 네, 뭐 그렇긴 합니다만, 그건 대표님께서 충동적으로 하신 말씀이셨고, 절차적으로는 저희 쪽에서 한 번 검토를 해야 하는 게…….
“대표님께서 원하시는 겁니까?”
― 네? 네, 뭐…….
“그럼 대표님께서 직접 저한테 전화하시라고 전해 주세요.”
규헌은 비서에게 말 한 마디 건넬 여유조차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은 규헌이 다시 작업에 열중하려는데, 또다시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랑곳없이 작업에 열중하려 했건만 얼마 못 가 그는 손을 뻗어 휴대폰을 들고야 말았다.
― 강 작가님, 그러지 마시고…….
“그쪽 대표가 승인했지 않았습니까. 그럼 이만 끝내시죠. 그냥.”
― 그래도 절차라는 게.
“그놈의 절차 깬 사람이 당신 대표라는 사람입니다.”
― 작가님, 아시잖아요. 대표님께서 워낙 막 나가는 사람이시라. 한 번만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고 다시 미팅을 해 주시면…….
“제가 무슨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사람입니까? 전 다시 미팅할 시간 없습니다.”
― 그럼 작가님이 콘티 짜 놓은 거라도 저희 쪽으로 보내 주시면 다시 한 번 검토를…….
“이보세요, 비서실장님.”
― ……부탁드립니다. 강 작가님.
비서의 간절한 목소리에 규헌은 그저 한숨만 짙게 내뱉을 뿐이었다. 솔직히 대표라는 사람이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괜한 비서만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더 이상 비서에게 뭐라 하지 못하고, 규헌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알겠습니다. 그럼 컨셉 콘티 예제만 보내 드리죠.”
― 아, 정말 감사드립니다. 강 작가님.
“그럼 바로 어시를 통해 보내 드리도록 하죠.”
― 감사드립니다. 작가님! 보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
규헌은 비서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고, 이내 휴대폰 전원까지 꺼 버렸다. 덜컹, 그때 작업실 문이 열리며 희찬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가님, 다녀왔습니다.”
쌀쌀해진 날씨에 희찬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작업실에 들어섰다. 그리곤 충전해 온 잉크를 복합기에 끼기 시작했다.
“유희찬.”
“네?”
희찬이 고개를 들고 규헌을 바라보았고,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규헌의 앞에 선 그녀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서랍에 있던 콘티 예제를 꺼내 희찬에게 건네었다.
“스쿠알로에 좀 가서 남 비서한테 이거 전해 주고, 보완할 점 상의해서 와.”
“제, 제가요?”
“그럼 누가 가? 지금 할 일 많은 내가 갔다 올까?”
규헌이 턱짓으로 자신의 책상에 널려 있는 자료들과 여러 파일을 띄운 컴퓨터를 가리켰다. 희찬은 머리를 긁적이며 알겠다는 말과 함께 콘티를 받아 들었다. 취직하고서 처음이었다. 이렇게 큰 작업을 자신에게 맡긴 것은 말이다. 스케줄표 짜기나 사진 분류 작업밖에 하지 않은 터였고, 앞으로 일여 년간은 계속 이런 허드렛일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큰일에 희찬은 약간의 두려움과 설레임을 함께 느꼈다. 이런 일을 맡겼다는 건 규헌이 자신을 믿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희찬은 얼른 작업실을 나서 스쿠알로로 향했다. 가는 내내 컨셉 콘티를 하나하나 살피며 비서와 의논해야 할 것을 정리했고, 그러다 보니 생각한 것보다 더 빠르게 회사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죄송합니다. 비서실장님께서 지금 급한 호출 때문에 잠시 밖에 나가셔서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하시는데요.”
“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것이라…….”
“네, 그럼 기다릴게요.”
도착하면 바로 비서와 미팅을 할 줄 알았건만 갑작스러운 부재중이라는 통보에 희찬은 빈 미팅룸에 앉아서 우두커니 그를 기다려야만 했다. 여직원이 준 믹스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희찬은 계속해서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10분, 20분, 30분……. 무려 한 시간이 지나가는데도 남 비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들떠 있던 희찬의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한숨을 푹 내쉬며 빈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려퍼졌다. 희찬은 배를 손으로 움켜쥐고 시계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두 시가 훌쩍 넘어 버린 시각.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정수기와 그 옆에 놓인 커피믹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먹을 거라곤 저거 하나네.”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커피믹스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 빈 커피 잔에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회의일 밖에서 들려왔다. 비서실장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고개를 돌리자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응, 그래, 지영아. 오빠 보고 싶었어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낄낄거리며 좋아하는 남자.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지게 만드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 회사의 대표인 박정우, 그였다.
“그래, 오늘 보자고? 아, 이 오빠가 우리 지영이 또 맛있는 거 사 줘야겠네. 뭐 먹을래? 뭐 먹고 싶어?”
에휴, 저 모습 봐라.
“진짜 한심해 보인다. 한심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던 찰나, 정우가 슬쩍 고개를 돌려 유리창 너머 미팅룸을 바라보았다. 부지불식간에 둘은 딱 눈이 마주쳐 버렸고, 놀란 그녀가 마시던 커피를 바닥에 툭 떨어트리고 말았다.
“앗, 뜨거!”
덕분에 방금 탄 뜨거운 커피가 그녀의 옷에 튀었다. 뒷걸음질 치며 옷을 털어 냈지만 스며드는 커피는 어쩔 수가 없었다. 희찬이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을 때, 정우가 가만히 서서 유리창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희찬과 눈이 마주치자 모르는 척 복도를 지나쳐 가 버렸다.
“뭐야, 또 개무시하네.”
빈정 상한 어투로 툴툴거리던 그녀는 누렇게 젖은 자신의 옷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휴지를 찾으려 했지만 미팅룸 안에 휴지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대충 손으로 커피 묻은 옷을 털어 내던 그때, 그녀의 머리 위에서 하얀 티슈 여러 장이 떨어졌다.
“진짜 칠칠맞네, 이 여자.”
그리고 들려오는 정우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희찬을 내려다보던 그는 그녀가 멍하니 서 있자 무릎을 굽혀 티슈로 커피 묻은 옷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그 행동에 놀란 희찬이 뒷걸음질 치며 말을 이어 갔다.
“됐어요. 제가 할게요.”
희찬은 정우의 손에 들린 휴지를 빼앗아 들고 대충 묻은 커피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바닥에 깨진 커피 잔과 잔여물을 치우려고 허리를 굽히는데, 정우가 그녀를 말리며 소리쳤다.
“야야, 직원시키면 되지. 그걸 왜 네가 닦아?”
“그래도 제가 떨어트린 거잖아요.”
“됐어. 됐으니까 그냥 내버려 둬.”
손사래를 치며 말했지만 희찬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깨진 커피 잔에 손을 댔다. 놀란 정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억지로 소파에 앉혔다.
“거참, 말 더럽게 안 듣네. 하지 말라니까?”
희찬은 뾰로통한 얼굴로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반대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는 또 왜 왔어?”
“비서실장님이랑 촬영 컨셉 콘티 상의하려고 왔어요.”
“남 비서랑?”
희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하지 말라는 일은 꼭 앞장서서 하는 남 비서를 조만간 꼭 잘라 버려야겠다 다짐을 하며 낮게 욕을 읊조렸다.
희찬은 커피에 젖은 옷이 신경 쓰이는지 계속 옷을 만지작거렸다. 정우는 그런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저 그런 옷차림에 평범한 얼굴. 처음엔 그저 골빈 여자가 자신이 좋아서 알짱거리는 건 줄 알았지만, 그것은 또 아닌 듯한 행동을 보인다.
그런데도 항상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그녀가 신경 쓰이고 거슬렸다. 전시회장에도, 그리고 지금도. 정우는 희찬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한테 관심 없는 여자는 나도 관심 없다 이거야. 정우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꾹 다물고 있던 희찬의 입이 열리었다.
“전시회장에서는 감사했습니다, 대표님.”
소파에서 살짝 엉덩이를 떼어 냈던 그는 그녀의 말에 다시 조심스럽게 앉았다. 희찬은 고개를 푹 숙이고 조금 쑥스러운 듯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때는 작가님 때문에 제대로 인사 못 드려서 다시 꼭 감사하다는 말, 하고 싶었어요.”
“아, 뭐……. 내가 또 불의를 보면 좀 못 참는 성격인지라.”
“무시하고 그냥 가실 줄 알았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꾸벅, 그녀가 자리에 일어나서 정우에게 90도로 인사를 건넸다. 당황한 그가 얼떨결에 따라 일어섰고, 그녀가 자리에 앉아 그도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원래 그렇게 여자들을 좋아하세요?”
“내가?”
“뭐, 때와 장소 안 가리시고…….”
“허참, 이 여자 봐라? 내가 아니라 여자들이 날 너무 좋아하는 거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 정도로 말이야.”
정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희찬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시겠죠…….”
“정말 여자들이란 피곤한 존재야. 너도 그랬잖아. 한강에서 몰래 스토커 짓이나 하고.”
“아, 진짜 그건 그냥!”
“알겠어, 알겠어. 그냥 내가 너무 멋있는 걸 어떡하겠어. 그냥 너도 어쩌다 보니 내 미모에 반해서 그랬다 쳐.”
정우가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희찬은 어색하게 또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얘기하면 할수록 이상한 사람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 순간, 희찬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반가운 듯 그녀가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어디야?
“아, 네, 작가님. 아직 스쿠알로 본사예요.”
― 아직도 안 끝났어?
“그건 아닌데, 비서실장님께서 급하게 외근 나가셔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 그 인간은 지가 불러 놓고 왜 외근이야?
“회장님께서 하신 호출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 아…… 괜히 기다렸네.
“네? 저 기다리셨어요?”
희찬이 묻자 규헌은 아무런 대답 없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규헌이 버럭 소리치며 말을 이어 갔다.
― 시끄럽고, 끝나면 바로 작업실로 뛰어와. 점심 먹게.
“아, 네!”
희찬은 전화를 끊고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점심 혼자 먹어 버릴 줄 알았는데 자신을 기다렸다는 말에 괜히 웃음이 났다. 정우는 그런 희찬을 보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너.”
“네?”
“그 싸가지 없는 작가한테서 전화 온 거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실실 쪼개?”
“그게 그냥 뭐……. 아, 그런데 왜 우리 작가님이 싸가지가 없어요?”
“회사 대표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인간이 그럼 싸가지가 있는 거냐?”
“대표님도 우리 작가님 좋지 않게 대하셨거든요?”
“참나, 내가? 난 절대 먼저 싸가지 없게 굴지 않아. 먼저 시비 건 건 그쪽이었다고. 그리고 우리 작가님? 왜 그 싸가지가 네 작가님이냐?”
“제가 상관이니까 당연히 우리 작가님이죠!”
“설마 너 그 싸가지한테 마음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네? 무, 무슨 소리세요. 아니거든요!”
정우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희찬을 계속 주시했다. 그러자 당황한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저,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어허, 이거 봐라? 얼굴까지 빨개져?”
“지, 진짜 아니거든요?”
“말까지 더듬고?”
“대표님께서 하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해서 그런 거거든요!”
소리를 빽 지르며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정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비아냥거리듯 말을 이어 갔다.
“참나, 그럼 싸가지가 뭐가 좋다고.”
“아니라고 했잖아요!”
“에휴, 솔직히 얼굴로나 재력으로나 재능으로나 내가 더 낫지 않나? 눈깔이 단단히 삐셨어, 아주. 그런 싸가지 없고 모자른 작가가 뭐가 좋다고.”
“이보세요, 박 대표님. 우리 작가님, 모자른 작가는 아니거든요. 그쪽보다도 재능 있으신 분이세요.”
“네 상관이라고 지금 편드냐? 우리 객관적으로 좀 보자. 응? 눈이 삐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 자식이 나아?”
“그 자식이라니요, 말 좀 가려서 해 주시죠? 그리고 객관적으로 봐서도 우리 작기님이 훨 나으시거든요?”
“세상 사람들한테 다 물어봐라. 내가 나은지 걔가 나은지!”
“진짜 물어볼까요?”
“그래, 물어봐!”
감정이 격해진 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노려보았다. 참으로 유치한 말들이 오고 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무슨 큰일로 싸우는 것마냥 으르렁거렸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며 남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고,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며시 다가와 정우에게 말을 걸었다.
“대표님, 여기서 뭐하세요?”
갑작스런 비서의 등장에 놀란 정우가 몸을 움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는 괜히 남 비서의 뒤통수를 때리며 빽 소리쳤다.
“너는 사람을 불러 놓고 왜 외근을 나가!”
“아, 회장님이 부르셨는데 그럼 어떡해요!”
“그럼 사람을 부르지 말든가! 그리고 내가 미팅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대표님께서 저보고 알아서 하시라고…….”
“아오, 이걸 확!”
손을 번쩍 또 들자 비서는 눈을 감고 몸을 움츠렸다. 정우는 그런 비서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고는 조용히 미팅룸을 나섰다. 태풍이 몰아친 듯한 미팅룸 안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비서는 살짝 두 눈을 뜨고 정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그럼 콘티 미팅 시작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