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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명가 1권
우화등선
도진명가 1권(1화)
서(序)
모든 일이 순백색의 광휘와 함께 시작됐다.
망할 늙은이들.
第一章 우화등선(1)
황량한 바람이 불어오는 인적 드문 숲.
그곳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사선곡(四仙谷).
이곳에 초로의 노인 네 명이 모여 있었다.
이곳에 모인 네 명의 노인들은 생김새도 범상치 않았지만, 지닌 바 재주들이 남다른 이들이었다.
나이답지 않게 건장한 체격을 지닌 노인은 지금은 은퇴했지만 한때 강호에서 무천검제(武天劍帝)란 광오한 별호로 불렸던 인물로 검으로 일가를 이룬 이였고, 그 옆에서 점잔을 빼고 있는 문사 차림의 노인은 황제가 친히 황궁으로 초대해 스승으로 모시려 했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난 이로 강호에선 통천일사(通天一士)란 별호로 불렸다.
그 뒤쪽에 한발 빼고 있는 청수한 인상의 노인은 강호에서 약왕(藥王)이란 별호로 알려진 인물인데, 그가 만든 약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은 화타나 편작이 살아 돌아와도 고칠 수 없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였다.
마지막으로 이들 세 명 뒤쪽에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북가란 노인은, 이 범상치 않은 무리 중에서도 유별난 점이 있었는데, 이 노인의 특징은 유난히 존재감이 없다는 것이다.
어찌나 존재감이 없었는지 각자 분야의 정점에 서 있는 이 세 노인들도 집중해서 찾거나 보지 않으면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능력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애매하지만, 이 노인 또한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분야에선 과히 독보적인 위치에 선 자로 강호에선 북명사신(北命死神)이란 살벌한 별호로 불리고 있었다.
이들 네 명의 노인들은 각자 동(東), 서(西), 남(南), 북(北) 사방위(四方位) 중 한 글자씩을 떼어 서로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공교롭게도 네 명의 성씨 첫 글자만 놓고 보면 동, 서, 남, 북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강호에서 무천검제라 불렸던 건장한 체격의 노인은 성이 동방씨로 이름이 모강이라 했고, 황제가 친히 가르침을 청했을 정도로 학식이 높은 노인은 성이 서씨이고 이름이 일평이다.
그리고 약왕이란 별호를 지닌 노인은 성이 남궁씨고 이름은 호, 존재감이 유난히 없는 노인은 성이 북씨로 이름은 여학이라 했다.
이들은 남궁과 동방이란 성에서 두 번째 글자를 떼 버리고 서로를 동, 서, 남, 북으로 지칭했는데, 동방모강과 남궁호는 자신들의 성씨를 마음대로 바꿔 부르는 두 노인이 못마땅했지만, 이미 반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렇게 부르다 보니 지금에 와선 별도리 없이 자신들도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찌 됐든 평생 강호를 종횡해도 만나기 어려울 기인 넷이 이곳 사선곡에 한꺼번에 모여 있었다.
이렇듯 범상치 않은 노인 네 명이 인적 드문 계곡에 모여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를 세인들이 알았다면 다들 미쳤거나 치매에 걸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이 이곳 사선곡에 모인 이유는 너무도 황당하게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준비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우화등선.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올라 신선이 된다는 말이지만, 흔히 술에 취했을 때의 그 아딸딸한 기분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교에선 도인들이 생을 마쳤을 때 선계에 들었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강호에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경지 또는 그 경지의 인물이 사망했을 때 사용하기도 한다.
지금은 강호를 은퇴해 유유자적 살아가고 있지만, 한때 무천검제나 약왕, 또 통천일사나 북명사신이라는 거창한 별호로 불렸던 이들이 한꺼번에 미친 것도 아니고, 치매에 걸린 것도 아닐진데 이렇듯 시답잖은 짓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우화등선을 실제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들 네 명은 나이가 비슷한데다 같은 시기에 강호에서 활동을 해 왔던 터라 오래전부터 친분이 깊은 사이였다.
지금은 네 명뿐이지만 깊은 친분을 가져 왔던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구대문파 중 한 곳인 무당파(武當派) 출신의 도사인데, 출신 문파를 제외하곤 특출 남 없는 매우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들 네 노인은 그가 자신들 보다 언제나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었다.
당연한 것이, 그는 검으론 동방 노인보다 한 수 아래였고, 학식으론 서 노인에 미치지 못했으며, 약학에 대해선 무지했고, 북 노인보다 존재감이 더(?) 컸다.
그렇다 보니 이들 네 명은 늘 그가 자신들보다 한 수 아래라 생각해 왔다.
한데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 간만에 모두 모여 곡주를 마시며 풍류를 즐기고 있는데, 그 말코 도사 놈이 갑자기 흥에 겨워 춤을 추는 듯하더니 이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온 백학을 타고 훌쩍 우화등선을 해 버렸다.
이들 네 명의 노인들은 도사 신분인 친우와 몇 십 년을 함께해 왔으면서도 우화등선을 믿지 않았다.
우화등선이란 그저 도사들의 말년을 위로하기 위해 생긴 말이려니 생각하곤 말았던 것이다.
한데, 그 말코 도사 놈이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진정 우화등선을 해 버렸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혼자 흥에 겨워 춤판을 벌이다, 영롱한 광채에 쌓인 백학을 타고 마치 저잣거리 놀러나가는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늘로 올라가 버렸으니 말이다.
도저히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에 기가 막혀 있는데, 그 말코 도사 놈은 마치 미리 알고 있었기라도 한 듯 손까지 흔들어대며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떠나 갔다.
늘 자신들보다 한 수 아래라 생각했던 친우가 갑작스레 우화등선해 신선이 되게 생겼으니 이들이 배가 아프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잖아도 강호를 은퇴한 후 가족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괴팍한 성격들로 인해 은퇴한 이들 사이에서도 찬밥 신세인데, 막역지우가 혼자 신선이 돼 무릉도원으로 가 버렸으니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뿐 아니라 늙으면 애가 된다고 했던가? 평소에도 괴팍한 성격을 지니고 있던 네 노인은 치기 어린 질투심마저 느꼈다.
그때부터 남은 노인들도 우화등선을 하겠다며 어울리지도 않게 도를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사욕을 품고 도를 닦고 있으니, 아무리 무공이 높고 학식이 풍부하다 한들 등선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 우화등선을 꿈꾸며 지낸지 어언 십삼 년.
강호를 은퇴하고 이미 이십 년이 지나 네 노인 모두 세수 백을 바라보는 시점이었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체력도 달리고 마음도 약해져 최근엔 등선의 꿈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이 년 전 운남성(雲南省)에 머물고 있던 서일평으로부터 한 통의 서신이 전해져 왔다.
우화등선할 방법을 찾기 위해 강호를 종횡하다 운남의 비처에서 한 권의 서책을 구했는데, 그 책을 통해 하늘과 땅을 강제로 연결하는 진식(陣式)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지금부터 남은 생 모두를 도 닦는데 쏟아붓는다 해도 등선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니 강제로라도 하늘을 열고 등선하자는 것이다.
서일평을 모르는 이들이 들었다면 미쳤다고 코웃음을 칠 이야기였지만, 이들 노인들에겐 미친 소리로 들리지가 않았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함부로 허언하거나 농담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인물이 저토록 확신에 차 하는 말이니 반드시 가능한 일이란 뜻이었다. 해서 세 명의 노인들은 서일평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서일평은 세 노인이 자신의 뜻에 따르기로 하자 한 가지 물건을 구해 오라 일렀다.
진식의 핵심이 되는 물건이었다.
한데 그 물건을 구하는 게 쉽지가 않아 지난 이 년간 갖은 고생 끝에 겨우 구해 이 년만인 오늘 이 곳에 다시 모이게 됐다.
무당파에 적을 두고 있던 친우가 우화등선한 지 꼭 십오 년이 되던 해 가을이었다.
“물건은 준비해 왔나?”
이 모든 계획을 지휘하고 있던 서일평이 북여학에게 물었다.
“당연히 가져왔지.”
북여학이 품에서 어린아이 주먹만 한 붉은빛의 돌을 조심스레 꺼내 내밀었다.
북여학이 내미는 돌에 모든 이의 시선이 모였다.
지난 이 년간 갖은 고초 끝에 구해 온 것이 바로 이 붉은빛의 돌이었다.
이 돌은 적명석(赤明石)이란 이름을 지닌 돌로 신강(新疆) 지역에만 존재하는 매우 특이한 돌이었다.
이들이 아무리 은퇴한 무인들이라지만 마교(魔敎)의 영역인 신강 지역을 함부로 드나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은신술을 펼친 듯 존재감이 없는 북여학이 신강 지역으로 향해 적명석을 구해 왔다.
북여학의 타고난 재능으로 신강 지역을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었지만, 적명석이 워낙 희귀한 돌이라 찾는 게 쉽지가 않았다. 갖은 고초를 겪으며 이 년 동안 신강 일대를 샅샅이 뒤져 겨우 어린아이 주먹만 한 돌 하나를 겨우 구해 올 수 있었다.
서일평은 적명석이란 돌을 운남에서 얻은 서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특이했다.
신강 지역에만 존재하는 적명석은 표면이 매우 매끄럽고 붉은빛을 띠는데, 기이하게도 연공된 내기를 불어 넣으면 이를 흡수해 저장하는 묘용이 있다. 뿐만 아니라…….
내기를 흡수하는 돌이 있다는 사실은 백여 년 가까이 살아온 네 명의 노인들도 이제껏 그 어디에서도 보거나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서일평이 서책에 기술된 내용들이 허구가 아닌 사실임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자네가 일러 준 방법으로 확인은 해 봤네만, 혹 모르니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게.”
북여학의 말에 서일평은 고개를 끄덕인 후 적명석에 약간의 내기를 흘려보냈다.
우우웅.
서일평이 약간의 내기를 흘려보내자 적명석의 붉은빛이 더욱 붉어지며 약간의 진동이 일었다.
“과연! 책에 기술되어 있는 그대로일세.”
적명석에 주입된 내기가 흩어지지 않고 모여 있자 서일평이 감탄하며 말했다.
서일평이 확인을 마치자 모두의 얼굴이 환해졌다.
서일평은 북여학이 가져온 적명석이 진품임을 확인하자 미리 설치해 둔 진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난 이 년간 세 명의 노인이 적명석을 찾는 동안 자신은 이곳 사선곡에 진식을 설치했다.
이곳 사선곡이 처음부터 이런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세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풍경이 수려하고 공기가 맑아 노인들이 강호를 은퇴한 후 가끔 모여 풍류를 즐기던 장소였을 뿐이었다.
한데 십오 년 전 무당파 친우가 이곳에서 우화등선을 하게 되자, 이후 자신들도 신선이 되겠노라며 이름 없는 계곡에 거창한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다.
사선곡이란 이름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신선이 된 친우를 부러워했는지 알 수 있다.
서일평을 제외한 세 명의 노인들은 반경 이십 장에 걸쳐 펼쳐져 있는 거대한 진식을 보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와 함께 지난 십오 년간의 기다림이 현실로 이뤄지려 하자 작은 흥분과 함께 설렘을 느꼈다.
“이제 이 적명석만 올려놓으면 모든 준비가 끝나는 것일세.”
세 명의 노인들에게 진식을 발동하는 방법을 설명한 서일평은 중앙에 위치한 조그만 바위 위에 적명석을 올렸다.
“이제 각자의 자리로 가 준비들 하시게.”
세 명의 노인은 서일평의 지시에 맞춰 적명석을 중심으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이제 진식을 발동할 일만 남았다.
“좀 전 얘기한 대로 우리 네 명 모두가 일시에 기운을 뽑아 적명석으로 보내야 하니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되네.”
서일평의 말에 세 노인이 살짝 긴장했다.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서일평이 신호를 보냈다.
네 명의 노인들은 일시에 기운을 뽑아 적명석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한동안 기운을 흡수하던 적명석에서 서서히 밝은 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붉은색의 적명석과 달리 퍼져 나오는 빛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순백색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적명석으로 기운을 유도하던 서일평이 별안간 양손을 펼쳐 들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적명석으로 모여들던 기운이 진식과 공명하더니 자신들이 보낸 기운의 수십, 수백 배에 달하는 기운으로 증폭되기 시작했다.
‘헙!’
일시에 적명석에서 퍼져 나오는 막대한 기운으로 네 노인은 정신을 잃을 뻔했다. 겨우 헛숨을 삼키며 흩어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예상은 했지만 적명석과 진식으로 인해 증폭된 기운은 강호에서 한가락한다는 이들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
적명석에서 퍼져 나오는 막대한 기운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대해져서 마치 땅속으로 몸이 파묻힐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이, 이러다간 기운에 눌려 죽겠다!’
일이 잘못된 게 아닌가 생각할 찰나, 서일평이 다시 한 번 양팔을 크게 휘저으면 무언가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