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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계의 용사였습니다 25화

수학여행(4)


선우의 눈이 순간 꿈틀거린다. 선우는 한숨을 쉬고 인구의 어깨를 잡는다. 그리고 그와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고 말한다.
“묻는 거에만 대답해. 우리, 어디서 놀아.”
“어… 9층 907호.”
“방 크기는?”
“대형 룸이라 스무 명까지 잘 수 있어.”
“한 방에 다 같이 잘 수는 없잖아. 술 마신다며.”
“9층은 다 비워뒀어. 다른 방 아무 곳이나 쓸 수 있어.”
“잘했어. 술은?”
“방에 있는 냉장고에 넣어뒀어.”
“준비는 끝났네. 문제는 뭐야?”
“어… 내가 무슨 드립 칠지 모른다는 거?”
선우는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아무 드립이나 쳐. 우리가 커버할게.”
“…예?”
“치라고. 섹드립이든, 병신 드립이든 뭐든 치라고. 나랑 경준이가 알아서 잘 커버 칠 테니까.”
“난 왜 그런 힘든 일에 강제로 참가해야 되는 거냐?”
가만히 있던 경준은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고, 선우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말한다.
“안 도와줄 거야?”
“마! 우리가 남이가! 칭구 아이가! 당연히 도와줘야제!”
경준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잘생긴 표정을 지으며 말했고, 선우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인구를 보며 말한다.
“다른 애들도 잘해 줄 거야. 걱정하지 마. 믿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리고 실수하면 어때? 안 보면 그만이잖아. 어차피 우리 내년이면 대학 가니까 쟤들이랑 다시 만날 일 없어.”
“어… 응.”
인구는 고개를 끄덕였고, 선우는 인구의 어깨에 올린 손을 내리며 말한다.
“됐어, 그럼 가자. 걔들한테 내가 톡해 놓을게.”
선우는 고개를 돌리며 폰을 꺼냈고, 경준은 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칭찬한다.
“야, 너 방금 되게 좋은 친구 같았어.”
“언제는 안 그랬냐?”
선우는 퉁명스럽게 대꾸했고, 경준은 고개를 기울이며 말한다.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당신이 무심코 던진 팩트,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 참, 나도 모르게 무심코 팩트 폭력을 해버렸네, 하하하.”
“팩트 앞에서 우리는 너무도 나약하다.”
“인정.”
농담을 하는 둘을 보며 인구는 히죽 웃는다. 긴장이 순식간에 풀린다.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쟤들이랑 있으면 행복하다. 이 학교에 오길 정말로 잘했다.

***


선이 : 오빠, 나 씻고 갈게. 여기 대욕탕이 그렇게 좋다니 안 들어갈 수가 없네.
우림 : 나도 선이랑 같이 갈게. 일단 너희들끼리 이야기 먼저 하고 있어.
선우 : 미친년들아. 주선자인 너희들이랑 내가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 거 아니냐.
선이 : 오빠 혼자서 하고 있어; 못해?
선우 : 못해.
선이 : 어빠, 찐따야?
선우 : 찐따니까 씻는 거 포기해.
선우 : 나중에 씻어.
선우 : 내일도 있잖아.
선우 : 왜 오늘 씻어.
선이 : 오빠, 좀 이어서 보내.
선우 : 일단 올라와.
선이 : 나 욕탕 들어간다∼
선우 : 미친년아.
선우 : 야
선우 : 돼지 년아
선우 : 개돼지
선우 : 하…….
선우 : 58
선우 : …….
선우 : 진짜 갔냐;

선우는 암담한 표정을 지었고, 기원이 개인 톡으로 그에게 말한다.

기원 : 형, 저도 씻고 갈게요.
선우 : ???
선우 : 야, 넌 안 돼. 넌 진짜 안 돼.
선우 : 그러지 마. 제발.
기원 : 대강 샤워만 할게요. 보니까 피가 묻어 있었어요.
선우 : 아…….
선우 : 진짜…….
선우 : 빨리 씻어라.
기원 : 예.

선우는 이마를 꾹꾹 누른다. 그도 아직 9층에 도착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먼저 가라고 해두고 이렇게 따로 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우는 한숨을 쉰다. 선이와 우림과 함께 같이 들어가면 그럭저럭 선이랑 만담을 하던, 우림에게 소개를 받든가 해서 분위기 만들 텐데 그 두 명이 안 온다고 한다. 그 두 명이 안 된다고 해도 그 두 명 합친 것보다 나은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조력자 기원을 믿고 있었는데, 기원도 없다.

선우 : 아린아?
아린 : 네가 그렇게 선톡하니까 조금 당혹스럽네. 설레기도 하고.
선우 : 혹시 욕실이니?
아린 : 응.
선우 : 혹시 빨리 와서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해 줄 수 있니?
아린 : 미안. 난 그런 건 못하는데.
선우 : 알았어. 부담스러운 거 부탁해서 미안해.
아린 : 왜 그래∼ 징그럽게.
아린 : 기원이는?
선우 : 씻는데.
아린 : 그렇구나. 걔도 피 묻었나 보네.
선우 : 응.
선우 : 나 그럼 일단 올라가 봐야 해서.
선우 : 나중에 봐.
아린 : 금방 올라갈게.
선우 : 응.

“하…….”
최후의 보루도 안 된다고 한다. 머리가 아프다. 여장시킨 기훈이를 그 방에 던져버리고 싶다. 선우는 비척비척 몸을 흔들며 9층으로 향한다. 들어가기 싫다.


“…….”
“…….”
“…….”
글로벌 호텔 9층 907호. 단체 투숙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방. 그곳에 열댓 명이 넘는 남녀가 모여 있다. 원래라면 꽤나 풋풋한 분위기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야 하지만 지금은 텁텁한 공기 때문에 숨이 막힌다. 선우는 조용히 인구와 경준 사이에 앉는다. 인구와 경준은 죄 지은 사람 같은 얼굴이다.
남자 측과 여자 측으로 나뉘어져 앉아 있는데 분위기가 조금 싸늘하다. 서로 먼저 말을 걸기 꺼려하고 있다. 남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먼저 말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넣고 있고, 여자들은 폰으로 ‘여기 노잼인 것 같은데, 그냥 갈까?’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
“…….”
“…….”
“…….”
누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지만 여자들의 왠지 싸늘한 눈초리에 말문이 막힌다. 보는 사람의 가슴이 다 아픈 상황이다. 경준은 덜덜 떨며 선우의 팔을 잡고, 선우는 팔을 흔들어 그의 손을 뗀다.
인구는 배가 아파오는 것을 느낀다. 이대로 있다간 선생님들을 아리마 온천에 내다 꽂고 온 보람이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인구의 눈에 냉장고가 들어온다. 그래, 술이라도 마시면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인구는 조심스럽게 냉장고로 가서 알록달록한 술들을 꺼내며 말한다.
“우리 일단 뭐라도 마시면서…….”
“아, 저희 술은 안 마실 거라서. 학생이잖아요.”
대답은 차갑다. 하긴, 학생인데 술을 마시는 게 이상한 거긴 한데, 그래도 수학여행 온 건데 너무한 거 아닌가. 라고 인구는 생각한다. 마음 같아서는 비꼬는 말을 마구 날리고 싶지만 꾹꾹 눌러 참는다. 그리고 억지로 웃으며 말한다.
“이, 이건 그… 과일 맥주 같은 거라서 도수도 낫고 맛있는 거야. 음료수라고 생각하면 돼.”
“그래도 그다지 마시고 싶지 않은데.”
“…….”
인구는 공황장애에 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선우를 본다. 선우는 일찌감치 이 상황을 그나 다른 애들의 힘으로 타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폰을 보고 있다. 경준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속삭인다.
“야, 이러다 자리 파장되는 거 아니야?”
“기다려 봐.”
선우는 폰을 내린다. 웬만하면 안 하는데, 특별히 했다. 능력을 이용해서 샤워하고 있는 기원을 욕탕에서 끌어냈다.
기원은 당황하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꺼려하는 그가 능력을 썼으니 말이다.
선우는 편안하게 몸을 뒤로 기울인다. 톡까지 보내 놨다.
“지원군 불렀어.”

선우 : 머리 말리지 말고 와라.

삑! 삑! 삑!
“아… 머리 안 말리면 찝찝한데.”
“……?!”
그때 문이 열리며 수건으로 머리를 만지고 있는 기원이 나타난다. 순간 이동이라도 썼나 보다. 가운을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는 모습이 여심을 흔든다. 가운 사이로 드러난 튼튼한 가슴은 보는 사람을 설레게 만든다. 여자들의 표정이 달라진다. 남자들은 떨떠름한 표정이다. 방 안의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달라진 것 같다. 기원은 선우의 옆에 앉으며 말한다.
“분위기 왜 이래요?”
“여기에 여친이 있던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거라고 생각하냐?”
“몇 명 있을 것 같은데.”
“한 명도 없는데.”
“맙소사.”
기원은 머리를 대강 뒤로 넘겼고, 여자들은 멍한 표정을 짓는다.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다. 기원은 수건을 목에 두르며 말한다.
“저 뭐,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춤이라도 춰.”
“그건 취향이 아닌데.”
기원은 픽 웃는다. 그럼 그의 절친한 형과 그 친구들을 위해 조금 노력해 볼까.


‘젤나가 맙소사. 이게 무슨 현상이란 말인가.’
인구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기원이 와서 여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남자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름을 물어보면서 말이다. 그러자 여자들의 입에서는 봇물이라도 터진 듯 말이 쏟아져 나온다.
기원이란 녀석은 남자들이 받아치지 못하는 말들을 다 받아쳐 주고 있다. 머리에 옥타코어라도 내장되어 있나. 그로써는 이해하기도 힘든 말들에 다 답을 해주고 있다. 미친 것 같다.
선우는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대강 여자들의 질문에 대답해 준다. 뭐, 춤을 언제부터 춘 거냐 라든가 우림이랑은 무슨 관계냐, 같은 별거 아닌 질문들이라 가볍게 답해줄 수 있었다.
“이거 마셔도 돼요?”
“어? 어어… 마셔도 돼. 마시라고 사온 거니까.”
“감사해요.”
기원은 인구에게 생긋 웃어주고 맥주 캔 하나를 가져와서 딴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신 다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이거 술이에요?”
“어, 맥주야.”
“술 같진 않은데, 맛있는 음료수 같아요.”
“그게 원래 그런 거야.”
“맛있네요.”
“진짜? 오빠, 저도 마셔도 돼요?”
“응? 어, 응, 마셔, 마셔, 괜찮아.”
‘쟤 아까 술 마시기 싫다던 애 아닌가.’
태세 전환이 모 게임 캐릭터 같네, 라고 비꼬고 싶지만 꾸역꾸역 참는다. 그럭저럭 해도 될 말과 하면 안 될 말을 구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쓸모 있지?”
그때 선우가 옆으로 와서 그에게 말한다. 꽤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다. 인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다.
“사는 세계가 다른 거 같네.”
‘와, 대박 맛있어!’라며 기원의 팔을 잡고 웃음을 터뜨리는 여자를 보며 인구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
“어떤 의미론 너도 그렇지 않냐?”
선우는 농담하듯이 말한다. 인구는 킥 웃고는 맥주를 가져와서 마신다. 맛있다.
삑! 삑! 삑!
그때, 문의 잠금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인구는 고개를 돌려 문을 보았고, 선우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으며 말한다.
“일찍도 온…….”
빡!
“악!”
“이 XX놈이!”
문을 열고 선이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선우가 있는 곳까지 날아가 그의 머리를 발로 찬다. 경준과 인구는 그것을 보며 ‘헥토파스칼 킥……!’이라며 감탄한다. 선우는 앞으로 고꾸라지고, 선이는 얼굴을 붉힌 채로 소리친다.
“58키로 아니라고!”
“…….”
선우는 쓰러진 채로 말을 하지 않는다. 경준은 선이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선우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인다.
“당신이 무심코 던진 팩트,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도 있습니다.”
“팩트 아니야!”
뻑!
“컥!”
선이는 경준의 배를 발로 찼고, 경준은 선우의 옆에 쓰러진다. 선이는 씩씩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인구를 본다. 인구는 양손을 들고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으며 말한다.
“난 몰라. 아무것도 안 들었어. 아무것도 못 봤고! 무슨 일 있었어?”
“연대책임!”
“아니! 왜!”
휭! 쾅!
선이는 인구에게 달려들어 그의 허리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가 몸을 돌리고 파일 드라이버로 바닥에 내리꽂는다. 그대로 인구는 신음 소리도 못 내고 의식을 잃었다. 선이는 후… 하고 숨을 내쉰다. 이제 좀 분이 풀린다. 기원은 옆에서 그것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생각한다.
‘형이 내가 선이랑 사귀고 싶다는 듯한 말을 할 때마다 필사적으로 말리는 것은 내 목숨을 걱정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새삼 선우에게 고마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