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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계의 용사였습니다 24화
수학여행(3)
인구는 고개를 기울인다.
“아, 넌 모르나? 네가 춤추는 거 보고 경준이가 감탄하면서 ‘우리도 남이 봤을 때 이렇게 감탄할 수 있는 거 해보고 싶다’라고 말했고, 전레 동아리 멤버들 전부 그거에 동감하면서 ‘10년 후의 우리가 봤을 때도 감탄할 수 있을 정도로 멋진 전설 하나 만들자’라고 다짐했어. 그래서 죽자 살자 연습한 거잖아. 그러네, 넌 모르겠네.”
인구는 갑자기 혼자서 납득한다. 참고로 전레는 동아리 이름이다. 네이밍 센스가 왜 그따위냐며 선우는 그 이름을 동아리 명으로 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쪽수에 밀려 통과됐다. 선우는 인구 수건을 뺏어서 이마를 살짝 닦으며 말한다.
“그런 것도 있었냐.”
“오, 오빠. 그거 방금 땀 닦은 수건이잖아.”
선이는 당황한다. 선우는 수건에 땀이 묻지 않은 부분을 보여주며 말한다.
“여긴 안 젖었는데.”
“…오우, 지쟈스.”
선이의 반응에 선우는 혀를 차고 수건을 다시 인구에게 넘기며 말한다.
“깔끔한 척하기는. 네 방이나 치우고 말해라.”
“야, 그런데 딴 애들 난리 남. 여자애들이 번호 따고 난리임.”
“잘됐네.”
“나도 번호 따임.”
“잘됐네.”
“경준이도 번호 따임!”
그 말에 선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한다.
“진짜?”
“경준이한테 다 말할 거야. 너무한 거 아니냐.”
인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선우는 문으로 향하며 말한다.
“난 샤워하고 올게.”
“야, 그런데 미팅 언제 할 거임? 선생님들 모두 처리해 줬으니 언제든 할 수 있는데.”
“장기 자랑 끝나고 해. 우림아, 네가 그거 알아서 해줄 수 있지?”
“미팅은 처음이라 그런데, 거기서 뭐 해?”
“그거야…….”
선우는 인구를 본다. 인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술 마셔야지.”
“…….”
“…….”
“안 마실 거임?”
“마시기야 하겠다만… 우리 고등학생인데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거 아니냐.”
“여행까지 와서 그런 거 따지면 벼락 맞음.”
“여자애들은 술 못 마시는데.”
우림은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고, 인구는 방긋 웃으며 말한다.
“걱정 마. 맥주는 술 아니야.”
논리 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선우는 밖으로 나가며 생각한다.
‘그런데 아린이랑 기원이는 어디에 있지?’
두 명이 보이지 않는다. 선우는 감지라도 해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씻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져서 그냥 샤워하러 올라갔다.
***
Ark. 방주. 노아가 대홍수를 피하기 위해 만든 배. 과거 어둠이 환계를 지배하던 시절에 루즈에 의해 개조되어 ‘신의 힘을 피하는 배’로 이용되었다. 그것이 이곳 내계에 나타났다. 동해의 정확하게 짚을 수는 없는 어느 곳에 말이다.
“아∼ 정말. 너희들 때문에 선우의 멋진 모습을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됐잖아…….”
우드득, 우드득.
아린은 한숨을 쉬고 있다. 그녀의 주변에 거대한 개미들이 괴물들을 물어뜯어 삼키고 있다. 아린은 투덜거리듯이 말한다.
“아, 진짜. 우리 루즈 님… 아니, 루즈 그 녀석한테 속아서 악당 노릇 했던 거 몰라?”
괴물들은 환계의 어둠에 속한 존재들. 고튼 데빌, 그림자 신사, 칼날 광대 같은 과거 루즈를 따랐던 상위 악마들이다. 그런 악마들이 짓이겨지고 있다. 방주를 타고 이곳에 넘어온 악마들이 아무런 힘도 못 쓰고 사라지고 있다.
아린은 입술을 비쭉이고는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안 그래?”
“말 걸지 마. 나도 짜증나니까.”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기원이 꽤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아린은 푸흡 웃으며 말한다.
“어머, 간만에 스위치 올라갔나 봐? 반말 나오네.”
“불만 있어?”
“아니∼ 없어. 딱 좋네, 그거. 선우 앞에서도 그러는 게 어때?”
아린의 놀리는 듯한 말에 기원은 쯧 하고 혀를 찼고, 기원의 발밑에서 꿈틀대던 고튼 데빌은 힘겹게 말한다.
“죄악의… 화신이시여… 어째서……?”
콱!
“아, 좀, X발 그놈의 죄악의 화신. 그만 좀 말해!”
기원은 고튼 데빌의 머리를 짓이겨 깨트려 버리고 거칠게 소리친다. 아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용사들은 방주의 왜곡에 의해 이곳에 나타나는 것을 감지할 수 없었지만 악당이던 아린과 기원은 방주가 나타나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항상 타고 다니던 녀석이니 말이다.
방주의 등장을 감지하자마자 아린과 기원은 억누르고 있던 그들 몸에 심어진 ‘핵’을 발동시켰다. 아린과 기원의 몸에는 환계의 위대한 어둠들의 핵이 들어 있다.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아린에게는 ‘충왕’이, 기원에게는, ‘죄악’이 들어 있다.
“힘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니었던 것 같군요.”
그때 바닥에서 무언가가 솟아난다. 분이라도 칠한 것 같은 창백한 얼굴, 보라색 입술, 보라색 눈동자, 검은 머리카락, 검은 코트, 검은 중절모자, 장발. 폴이다. 아린은 후후 웃으며 고개를 돌려 그를 본다.
“꽤 잃은 거 맞아. 아니었다면 너까지 이미 죽었을 테니까.”
“…….”
아린은 폴의 위아래를 훑어본 다음 풉 웃으며 기원을 본다.
“기원아, 네 옛날 모습이랑 비슷하지 않아?”
“닥쳐.”
파지지직.
기원의 왼손에 검은 번개가 생성된다. 아린은 손가락을 까딱한다. 폴의 발밑에 약한 파문이 생겨나더니 거대한 개미지옥이 솟아나 그를 삼킨다. 그리고 그곳에 기원의 검은 번개가 꽂힌다.
콰지지지직!
개미지옥이 통째로 새까맣게 타버린다. 아린은 눈썹에 손을 대고 상체를 앞으로 살짝 내밀면서 말한다.
“음∼ 어라? 없네.”
“똑바로 안 잡아?”
“네 번개가 늦은 거거든?”
아린은 투덜대며 손가락을 까딱인다. 그녀의 발밑에 파문이 생겨나고, 그 파문에서 수많은 벌레들이 기어 나와 주변으로 퍼진다. 아린은 흠∼ 흠∼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말한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난다. 환계에서 신 사냥 다닐 때도 이런 적 있던 것 같은데.”
그때 아린의 등 뒤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아린은 후후 웃으며 말한다.
“그때는 그래도 시간이 많았는데, 지금은 시간이 너무 없네.”
콰득!
아린의 등에 균열이 생겨나며 양옆으로 찢어진다. 그 안에서 거대한 지네가 튀어나와 뒤에서 다가오던 폴을 물고 앞으로 쭉 날아가 벽에 박힌다. 폴을 피를 토했고, 아린은 몸을 돌려 그를 보며 말한다.
“이젠 못 움직이지?”
지네의 입 안쪽에서 가시가 튀어나와 폴의 배에 박혀 있다. 독이다. 폴은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낀다. 아린은 등에 만들어진 균열에서 지네를 뜯어낸 다음 균열을 사라지게 하며 말한다.
“네가 ‘폴’이야?”
“…….”
“말할 수 있는 독이거든? 말 못하는 척 계속 할 거면 저기 계신 죄악의…….”
“닥쳐.”
“화신께서 널 숯 덩어리로 만들어 주실 거야.”
아린은 호호 웃었고, 폴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말한다.
“어째서 저를 공격하는 겁니까?”
“어째서라니, 너 때문에 귀찮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잖아.”
“저는 이곳 내계와 환계, 두 곳 모두를 지배할 생각입니다. 오늘은 당신들, 루즈 님의 심복이었던 두 위대한 어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우라니, 실망스럽군요.”
폴의 말에 아린은 히죽 웃으며 말한다.
“어머, 실망할 거라도 있어? 이게 대답이잖아. 우린 너희 도와줄 생각 없어. 악당 놀이는 이제 집어치웠다고.”
“비켜, 그냥 죽이는 게 낫겠어.”
그때 기원이 다가오고, 폴은 천천히 사라지며 말한다.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는 조금 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파지직!
사라지는 폴에게 기원은 번개를 날리지만, 이미 폴은 사라져 있었다. 아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처음부터 가짜였던 것 같은데.”
“망할.”
“악마 놈들 주술은 해석하기가 그리 쉽지 않지. 우리라고 해도 말이야.”
아린은 호호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인다. 벌레들이 악마들의 시체를 뜯어먹는다. 아린은 고개를 돌려 방주의 컨트롤 룸을 보며 말한다.
“이거, 내버려두면 분명 나중에 귀찮게 하겠지?”
“먼저 돌아가. 내가 처리할 테니까.”
파직, 파지지직.
기원은 양손을 모은다. 그의 양손 사이에 검은 번개의 구가 생성되고, 아린은 벌레들 사이로 들어가며 말한다.
“그럼 나중에 봐∼”
아린은 사라졌고, 기원은 번개의 구를 양손으로 누른다. 번개의 구는 팟, 하고 사라지더니 갑자기 기원의 몸을 삼킬 정도로 크게 재생성 되었다가 방주 전체를 삼킬 정도로 크게 증폭된다.
쿠릉!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검은 번개가 그곳에 내리꽂힌다. 그대로 방주는 소멸된다.
***
선우는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고 있다. 팬티를 입고 있는데, 기원이 갑자기 들어온다. 기원은 그를 지그시 본다. 선우는 팬티를 올리며 말한다.
“무슨 일이냐.”
“아뇨, 몸이 좀 좋다 싶어서…….”
“누가 그거 말하냐? 봉인은 왜 풀었는데?”
선우의 말에 기원은 조금 놀랍다는 듯이 말한다.
“어, 알고 있었어요?”
“당연히 알지. 무슨 일인데? 아린이도 안 보이더니.”
선우는 혀를 차며 티셔츠를 입었고, 기원은 침대에 앉으며 말한다.
“이상한 게 갑자기 나타나서요. 처리하고 왔어요.”
“잘했어.”
“예.”
선우는 바지를 입고 말한다.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이지?”
“그러는 게 낫겠죠. 우림 누나도 아린… 누나 힘이 그대로라는 거 알면 별로 안 좋아할 거고. 선이한테도 들키면 그다지 기분 좋지는 않을 거고.”
“확실히 그렇지.”
선우는 폰을 흘끔 본다. 톡이 와 있다. 빨리 오라는 톡이다. 선우는 폰을 흔들며 말한다.
“가자. 아직 레크리에이션 하고 있겠네.”
“볼 거 있어요?”
“우리 학년이 이 학교 역대 가장 잘 노는 학년이야. 노래 잘 부르는 애들도 있어. 가자.”
“그래요?”
기원은 일어섰고, 선우는 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말한다.
“너희 형 여장이 제일 재밌었는데.”
“…뭐라고요?”
“껄껄걸, 그것도 다 추억이지. 기훈이 예쁘더라. 생각해 보니 걔 매년 당해서 올해만큼은 여장당하기 싫어서 안 온 거 아니려나.”
“…….”
못 들을 걸 들은 것 같은 기분이다.
“자∼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게는 미안하지만, 내일의 여행을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조금 쉬어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사실 장기 자랑 준비한 사람들도 이젠 없잖아요. 그러므로 레크리에이션은 여기서 끝내고…….”
진행하는 사람은 3학년 애다. 쟤도 3년 동안 이 짓을 해오니 꽤 익숙해진 모양이다. 예전보다는 오글거림이 덜하다. 선우는 폰을 보며 말한다.
“우림이가 어디서 만날 거냐고 묻는데?”
“후… 잠깐… 잠깐만…….”
인구는 심호흡을 하고 있다. 선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경준이 풉, 웃으며 말한다.
“얘 지금 긴장함. 여자 만난다고.”
“긴장할 게 뭐 있다고, 평소랑 똑같이 하면 되지.”
“난 평소랑 똑같이 하면 안 되지 않을까?”
인구의 물음에 선우는 아주 잠깐 인구의 평소 행실을 회상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래, 안 되겠네. 적어도 그 답 없는 섹드립은 좀 자제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거든… 마인드 컨트롤, 마인드 컨트롤…….”
인구는 계속 마인드 컨트롤, 하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다. 선우는 혀를 쯧쯧 찼고, 경준은 선우를 보며 말한다.
“그런데 우리 어디서 놀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여기 총 책임자는 인군데.”
“우리 대장은 너잖아, 대장.”
“대장 같은 소리 하네. 그런데 인구 저거 진짜 말 안 들리나? 왜 저래?”
인구는 계속 눈을 감고 중얼거리고 있다. 그에 경준은 인구를 탁 치며 말한다.
“마! 여자 만난다고 긴장한 찐따 새끼! 정신 안 차리나!”
“…저 찐따 맞으니까 우황청심환이라도 하나 가지고 와주면 안 될까요?”
인구는 이제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수학여행(3)
인구는 고개를 기울인다.
“아, 넌 모르나? 네가 춤추는 거 보고 경준이가 감탄하면서 ‘우리도 남이 봤을 때 이렇게 감탄할 수 있는 거 해보고 싶다’라고 말했고, 전레 동아리 멤버들 전부 그거에 동감하면서 ‘10년 후의 우리가 봤을 때도 감탄할 수 있을 정도로 멋진 전설 하나 만들자’라고 다짐했어. 그래서 죽자 살자 연습한 거잖아. 그러네, 넌 모르겠네.”
인구는 갑자기 혼자서 납득한다. 참고로 전레는 동아리 이름이다. 네이밍 센스가 왜 그따위냐며 선우는 그 이름을 동아리 명으로 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쪽수에 밀려 통과됐다. 선우는 인구 수건을 뺏어서 이마를 살짝 닦으며 말한다.
“그런 것도 있었냐.”
“오, 오빠. 그거 방금 땀 닦은 수건이잖아.”
선이는 당황한다. 선우는 수건에 땀이 묻지 않은 부분을 보여주며 말한다.
“여긴 안 젖었는데.”
“…오우, 지쟈스.”
선이의 반응에 선우는 혀를 차고 수건을 다시 인구에게 넘기며 말한다.
“깔끔한 척하기는. 네 방이나 치우고 말해라.”
“야, 그런데 딴 애들 난리 남. 여자애들이 번호 따고 난리임.”
“잘됐네.”
“나도 번호 따임.”
“잘됐네.”
“경준이도 번호 따임!”
그 말에 선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한다.
“진짜?”
“경준이한테 다 말할 거야. 너무한 거 아니냐.”
인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선우는 문으로 향하며 말한다.
“난 샤워하고 올게.”
“야, 그런데 미팅 언제 할 거임? 선생님들 모두 처리해 줬으니 언제든 할 수 있는데.”
“장기 자랑 끝나고 해. 우림아, 네가 그거 알아서 해줄 수 있지?”
“미팅은 처음이라 그런데, 거기서 뭐 해?”
“그거야…….”
선우는 인구를 본다. 인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술 마셔야지.”
“…….”
“…….”
“안 마실 거임?”
“마시기야 하겠다만… 우리 고등학생인데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거 아니냐.”
“여행까지 와서 그런 거 따지면 벼락 맞음.”
“여자애들은 술 못 마시는데.”
우림은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고, 인구는 방긋 웃으며 말한다.
“걱정 마. 맥주는 술 아니야.”
논리 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선우는 밖으로 나가며 생각한다.
‘그런데 아린이랑 기원이는 어디에 있지?’
두 명이 보이지 않는다. 선우는 감지라도 해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씻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져서 그냥 샤워하러 올라갔다.
Ark. 방주. 노아가 대홍수를 피하기 위해 만든 배. 과거 어둠이 환계를 지배하던 시절에 루즈에 의해 개조되어 ‘신의 힘을 피하는 배’로 이용되었다. 그것이 이곳 내계에 나타났다. 동해의 정확하게 짚을 수는 없는 어느 곳에 말이다.
“아∼ 정말. 너희들 때문에 선우의 멋진 모습을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됐잖아…….”
우드득, 우드득.
아린은 한숨을 쉬고 있다. 그녀의 주변에 거대한 개미들이 괴물들을 물어뜯어 삼키고 있다. 아린은 투덜거리듯이 말한다.
“아, 진짜. 우리 루즈 님… 아니, 루즈 그 녀석한테 속아서 악당 노릇 했던 거 몰라?”
괴물들은 환계의 어둠에 속한 존재들. 고튼 데빌, 그림자 신사, 칼날 광대 같은 과거 루즈를 따랐던 상위 악마들이다. 그런 악마들이 짓이겨지고 있다. 방주를 타고 이곳에 넘어온 악마들이 아무런 힘도 못 쓰고 사라지고 있다.
아린은 입술을 비쭉이고는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안 그래?”
“말 걸지 마. 나도 짜증나니까.”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기원이 꽤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아린은 푸흡 웃으며 말한다.
“어머, 간만에 스위치 올라갔나 봐? 반말 나오네.”
“불만 있어?”
“아니∼ 없어. 딱 좋네, 그거. 선우 앞에서도 그러는 게 어때?”
아린의 놀리는 듯한 말에 기원은 쯧 하고 혀를 찼고, 기원의 발밑에서 꿈틀대던 고튼 데빌은 힘겹게 말한다.
“죄악의… 화신이시여… 어째서……?”
콱!
“아, 좀, X발 그놈의 죄악의 화신. 그만 좀 말해!”
기원은 고튼 데빌의 머리를 짓이겨 깨트려 버리고 거칠게 소리친다. 아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용사들은 방주의 왜곡에 의해 이곳에 나타나는 것을 감지할 수 없었지만 악당이던 아린과 기원은 방주가 나타나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항상 타고 다니던 녀석이니 말이다.
방주의 등장을 감지하자마자 아린과 기원은 억누르고 있던 그들 몸에 심어진 ‘핵’을 발동시켰다. 아린과 기원의 몸에는 환계의 위대한 어둠들의 핵이 들어 있다.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아린에게는 ‘충왕’이, 기원에게는, ‘죄악’이 들어 있다.
“힘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니었던 것 같군요.”
그때 바닥에서 무언가가 솟아난다. 분이라도 칠한 것 같은 창백한 얼굴, 보라색 입술, 보라색 눈동자, 검은 머리카락, 검은 코트, 검은 중절모자, 장발. 폴이다. 아린은 후후 웃으며 고개를 돌려 그를 본다.
“꽤 잃은 거 맞아. 아니었다면 너까지 이미 죽었을 테니까.”
“…….”
아린은 폴의 위아래를 훑어본 다음 풉 웃으며 기원을 본다.
“기원아, 네 옛날 모습이랑 비슷하지 않아?”
“닥쳐.”
파지지직.
기원의 왼손에 검은 번개가 생성된다. 아린은 손가락을 까딱한다. 폴의 발밑에 약한 파문이 생겨나더니 거대한 개미지옥이 솟아나 그를 삼킨다. 그리고 그곳에 기원의 검은 번개가 꽂힌다.
콰지지지직!
개미지옥이 통째로 새까맣게 타버린다. 아린은 눈썹에 손을 대고 상체를 앞으로 살짝 내밀면서 말한다.
“음∼ 어라? 없네.”
“똑바로 안 잡아?”
“네 번개가 늦은 거거든?”
아린은 투덜대며 손가락을 까딱인다. 그녀의 발밑에 파문이 생겨나고, 그 파문에서 수많은 벌레들이 기어 나와 주변으로 퍼진다. 아린은 흠∼ 흠∼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말한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난다. 환계에서 신 사냥 다닐 때도 이런 적 있던 것 같은데.”
그때 아린의 등 뒤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아린은 후후 웃으며 말한다.
“그때는 그래도 시간이 많았는데, 지금은 시간이 너무 없네.”
콰득!
아린의 등에 균열이 생겨나며 양옆으로 찢어진다. 그 안에서 거대한 지네가 튀어나와 뒤에서 다가오던 폴을 물고 앞으로 쭉 날아가 벽에 박힌다. 폴을 피를 토했고, 아린은 몸을 돌려 그를 보며 말한다.
“이젠 못 움직이지?”
지네의 입 안쪽에서 가시가 튀어나와 폴의 배에 박혀 있다. 독이다. 폴은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낀다. 아린은 등에 만들어진 균열에서 지네를 뜯어낸 다음 균열을 사라지게 하며 말한다.
“네가 ‘폴’이야?”
“…….”
“말할 수 있는 독이거든? 말 못하는 척 계속 할 거면 저기 계신 죄악의…….”
“닥쳐.”
“화신께서 널 숯 덩어리로 만들어 주실 거야.”
아린은 호호 웃었고, 폴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말한다.
“어째서 저를 공격하는 겁니까?”
“어째서라니, 너 때문에 귀찮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잖아.”
“저는 이곳 내계와 환계, 두 곳 모두를 지배할 생각입니다. 오늘은 당신들, 루즈 님의 심복이었던 두 위대한 어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우라니, 실망스럽군요.”
폴의 말에 아린은 히죽 웃으며 말한다.
“어머, 실망할 거라도 있어? 이게 대답이잖아. 우린 너희 도와줄 생각 없어. 악당 놀이는 이제 집어치웠다고.”
“비켜, 그냥 죽이는 게 낫겠어.”
그때 기원이 다가오고, 폴은 천천히 사라지며 말한다.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는 조금 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파지직!
사라지는 폴에게 기원은 번개를 날리지만, 이미 폴은 사라져 있었다. 아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처음부터 가짜였던 것 같은데.”
“망할.”
“악마 놈들 주술은 해석하기가 그리 쉽지 않지. 우리라고 해도 말이야.”
아린은 호호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인다. 벌레들이 악마들의 시체를 뜯어먹는다. 아린은 고개를 돌려 방주의 컨트롤 룸을 보며 말한다.
“이거, 내버려두면 분명 나중에 귀찮게 하겠지?”
“먼저 돌아가. 내가 처리할 테니까.”
파직, 파지지직.
기원은 양손을 모은다. 그의 양손 사이에 검은 번개의 구가 생성되고, 아린은 벌레들 사이로 들어가며 말한다.
“그럼 나중에 봐∼”
아린은 사라졌고, 기원은 번개의 구를 양손으로 누른다. 번개의 구는 팟, 하고 사라지더니 갑자기 기원의 몸을 삼킬 정도로 크게 재생성 되었다가 방주 전체를 삼킬 정도로 크게 증폭된다.
쿠릉!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검은 번개가 그곳에 내리꽂힌다. 그대로 방주는 소멸된다.
선우는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고 있다. 팬티를 입고 있는데, 기원이 갑자기 들어온다. 기원은 그를 지그시 본다. 선우는 팬티를 올리며 말한다.
“무슨 일이냐.”
“아뇨, 몸이 좀 좋다 싶어서…….”
“누가 그거 말하냐? 봉인은 왜 풀었는데?”
선우의 말에 기원은 조금 놀랍다는 듯이 말한다.
“어, 알고 있었어요?”
“당연히 알지. 무슨 일인데? 아린이도 안 보이더니.”
선우는 혀를 차며 티셔츠를 입었고, 기원은 침대에 앉으며 말한다.
“이상한 게 갑자기 나타나서요. 처리하고 왔어요.”
“잘했어.”
“예.”
선우는 바지를 입고 말한다.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이지?”
“그러는 게 낫겠죠. 우림 누나도 아린… 누나 힘이 그대로라는 거 알면 별로 안 좋아할 거고. 선이한테도 들키면 그다지 기분 좋지는 않을 거고.”
“확실히 그렇지.”
선우는 폰을 흘끔 본다. 톡이 와 있다. 빨리 오라는 톡이다. 선우는 폰을 흔들며 말한다.
“가자. 아직 레크리에이션 하고 있겠네.”
“볼 거 있어요?”
“우리 학년이 이 학교 역대 가장 잘 노는 학년이야. 노래 잘 부르는 애들도 있어. 가자.”
“그래요?”
기원은 일어섰고, 선우는 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말한다.
“너희 형 여장이 제일 재밌었는데.”
“…뭐라고요?”
“껄껄걸, 그것도 다 추억이지. 기훈이 예쁘더라. 생각해 보니 걔 매년 당해서 올해만큼은 여장당하기 싫어서 안 온 거 아니려나.”
“…….”
못 들을 걸 들은 것 같은 기분이다.
“자∼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게는 미안하지만, 내일의 여행을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조금 쉬어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사실 장기 자랑 준비한 사람들도 이젠 없잖아요. 그러므로 레크리에이션은 여기서 끝내고…….”
진행하는 사람은 3학년 애다. 쟤도 3년 동안 이 짓을 해오니 꽤 익숙해진 모양이다. 예전보다는 오글거림이 덜하다. 선우는 폰을 보며 말한다.
“우림이가 어디서 만날 거냐고 묻는데?”
“후… 잠깐… 잠깐만…….”
인구는 심호흡을 하고 있다. 선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경준이 풉, 웃으며 말한다.
“얘 지금 긴장함. 여자 만난다고.”
“긴장할 게 뭐 있다고, 평소랑 똑같이 하면 되지.”
“난 평소랑 똑같이 하면 안 되지 않을까?”
인구의 물음에 선우는 아주 잠깐 인구의 평소 행실을 회상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래, 안 되겠네. 적어도 그 답 없는 섹드립은 좀 자제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거든… 마인드 컨트롤, 마인드 컨트롤…….”
인구는 계속 마인드 컨트롤, 하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다. 선우는 혀를 쯧쯧 찼고, 경준은 선우를 보며 말한다.
“그런데 우리 어디서 놀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여기 총 책임자는 인군데.”
“우리 대장은 너잖아, 대장.”
“대장 같은 소리 하네. 그런데 인구 저거 진짜 말 안 들리나? 왜 저래?”
인구는 계속 눈을 감고 중얼거리고 있다. 그에 경준은 인구를 탁 치며 말한다.
“마! 여자 만난다고 긴장한 찐따 새끼! 정신 안 차리나!”
“…저 찐따 맞으니까 우황청심환이라도 하나 가지고 와주면 안 될까요?”
인구는 이제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