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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같은 시각, 오봉현의 현청(縣廳).
늦은 밤, 정문을 나서는 한 사람과 한 마리 말이 있었다.
“큰일 하셨습니다 그려.”
나이든 주부(主簿) 하나가 따라 나오며 말고삐를 쥔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여기 천 냥이올시다. 장소산의 모가지에 대한 금원이오. 안 문주에게만 귀띔했는데 그대가 가져올 줄을 몰랐소.”
천 냥을 받아들고 툭툭 무게를 확인해 보는 남자.
낡고 지저분한 천을 두건처럼 머리에 둘러 묶고, 푸른 호복을 입었다. 등 뒤로 넘긴 검은색 피풍 또한 낡고 군데군데 헤진 자국이 선명했지만 결코 더럽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데 어찌 그대는 상처 하나 없소? 장소산이란 놈, 무공이 강해 관에서도 한동안 손을 놓고 있던 자인데.”
주부의 말에 남자가 씨익 웃었다.
팅!
그가 허리 쪽에 걸어둔 뭔가를 손가락으로 튕겨 소리를 냈다.
“돼지가 제 잡는 칼을 만났으니 목을 내놓아야지 별 수 있나요.”
맑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젊은 음성.
“그럼 이만. 불청객은 조용히 사라집니다요.”
남자가 말에 올라 떠나려는 찰나, 주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 이름이 무어요? 강호에 귀한 이들이 많다 하기에 내 인연이라도 맺어보려 하오.”
세상에 참 순진한 하급 관리가 여기 또 있었다. 강호인과 엮여서 좋은 꼴 보기가 드문 것이 사실이거늘.
“천록이요. 공천록.”
“공(空)씨 가문에 천(天)자 록(甪)자라. 특이한 이름이구려.”
특이한 이름의 남자 공천록. 그가 다시 한 번 밝게 웃으며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린다.

***


툭. 툭.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을 때렸다.
살며시 눈을 뜨고 바라본 하늘. 눈을 감기 전까지는 분명 푸른 천공(天空)과 새하얀 구름밖에 없었건만, 어느새 푸름을 밀어내고 거뭇거뭇 어두워진 하늘과 빠르게 흘러가는 짙은 비구름만이 눈에 들어온다.
단잠을 취했던 청년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스르륵 어깨를 타고 가슴 아래로 내려오는 긴 천. 회색과 금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것인지 아니면 그냥 더러울 뿐인지 알 수 없는 천이 청년의 몸을 덮었던 빛바랜 피풍과 함께 부드러운 잔디에 떨어졌다.
비교적 호감이 가는 크고 처진 눈, 각 잡힌 코, 도톰하니 부드럽게 빠진 입술. 그 외에 별다른 특징을 찾기 힘든 평범한 생김새의 청년.
그가 대충 깎은 더벅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딘가를 휙 쏘아보았다.
언덕에 그냥 대(大)자로 뻗어 있던 청년과 달리 크게 자란 몇 그루의 나무들 중 하나에 붙어 비를 피하는 말이 그곳에 있었다.
찔끔 놀라며 그 긴 목을 돌려 청년의 시선을 피하는 말. 저러고 보면 제법 사람 흉내도 낼 줄 아는 듯하다.
“야, 미리미리 깨워 달랬더니 지만 쏙? 허! 참나.”
청년, 공천록은 투덜거리며 일어나 천을 집어 들었다. 두어 번 이마와 뒤통수를 휘감은 다음 뒤에서 묶어 길게 남은 나머지 부분을 또 귀 쪽으로 내려 목을 감싼다.
그러고 나서 물기 먹은 피풍을 탈탈 턴 뒤 몸에 걸친 공천록은 땅을 보고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다.
그가 누웠던 자리 바로 위에 거무튀튀한 물체 하나가 있었다.
한 자 길이에, 손 한 뼘 정도의 넓은 면을 가진 칼. 자루는 특별한 부속물 없이 도신과 그대로 연결된 금속으로 되어 있고, 끝이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냥 보기에는 주방에서 쓸 법한 ‘채도(菜刀)’의 형태이며 그 외 무언가 특이할 만한 점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채도를 보는 공천록의 눈이 따스함으로 물들었다.
흙에서 뽑은 채도를 닦지도 않고 요대에 건 공천록은 두건처럼 쓴 천을 매만지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어이! 너 계속 거기 있다가는 벼락 맞는다.”
어찌 이것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말이 나무와 공천록을 번갈아본 후, 길고 작게 푸르르릉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중원 천하에서 가장 긴 물길은? 바로 장강(長江)이다.
수백만 중원인들의 생명줄이며 대륙의 대동맥과도 같은 거대한 물결.
장강의 북쪽으로는 회하(淮河)가 흐른다. 이 또한 드넓은 땅의 핏줄이다.
예부터 물길을 따라 재물과 양식이 흐른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어마어마한 두 강하(江河)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천하의 모든 산물과 부와 권력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장강과 회하 사이에 존재하는 끝없는 대지.
이곳의 주인은 곧 대륙 중부의 주인과 같은 의미다.
그리고 현재 그 주인이 하가장(何家莊)임을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위로 조정과 황제가 있고 가운데 절도사가 버티고 있다고 하지만 명실공(名實共), 하가장의 위세는 황제도, 절도사도 비껴갈 정도로 드높았다.
합비(合肥).
제국 진(秦)에서부터 당(唐)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그 이름을 이어온 유서 깊은 도시.
그 지리적인 중요성 때문에 많은 군벌들이 탐내던 땅이며, 한말진초(漢末晉初)의 위장(魏將) 장료가 그의 무위를 천하에 떨친 합비전투(合肥戰鬪)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강호무림사에 있어 남룡천 북벌 병단의 근거지로서 한때 일만에 달하는 남무림의 정예들이 북쪽을 향해 검을 겨누던 선봉의 상징이기도 했다.
남룡천이 해체된 현재, 합비와 주변 지역은 예전의 명성을 잃었지만 회남제일세(淮南第一勢) 하가장 본가가 위치해 있어 여전히 강호무림의 지도에 주요한 점(點)으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는.

철퍽, 철퍽.
말의 발굽 소리는 규칙적이었다. 마치 그 주인의 심장이 뛰는 소리처럼.
비가 내려 질퍽한 길을 따라 많은 이들이 이동했다.
등짐을 진 장사치들, 수레에 무언가를 싣고 힘겹게 끄는 노인. 나귀의 등에 올라탄 아비와 아들 등등.
기름먹인 우장(雨裝)을 걸치고 죽립(竹笠)을 쓴 공천록은 말 위에서 사람들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었다.
갑자기 내린 비에 짜증스러워 하는 면면이 있는가 하면 공천록과 같이 무표정하게 앞만 보며 걷는 이들도 있다.
모두가 합비의 오래된 북문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었다. 검을 패용한 여섯 명을 제외하고는 상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가장 많았으며 나머지는 이곳 주민이거나 그 외 평범한 부류들이다.
잠깐씩 공천록 쪽을 돌아보며 뭔가를 소곤거리는 무인들을 빼고는 딱히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없었다. 어쩐지 다들 뭔가에 찌들었거나 불안감을 느끼는 듯하다.
공천록은 동쪽으로 잠시 눈을 돌렸다.
멀리 허물어져 가는 신성(新城)이 보였다.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신성.
저곳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공천록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북문 근처에 이르자 합비성의 외벽이 제대로 보인다.
상당히 긴 세월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는 낡고 오래된 기둥과 닳고 닳아 반질반질해진 돌벽, 언제인지도 모르게 바르고 구운 흙이 덕지덕지 그 벽에 붙어 있는 볼썽사나운 모습이다.
몇 명의 군병(軍兵)이 성벽 위 포루(鋪樓)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하품을 한다. 아마도 회남을 관할하는 절도사의 병사들일 터. 창을 내려놓고 투구를 삐딱하게 쓴 모양새가 한심하기까지 하다.
개방된 성문 바로 앞에는 두 명의 군병이 서서, 출입하는 이들을 검사하고 있는데 딱히 제대로 검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사들 조금 뒤편에 붉은 무복을 입은 네 명의 사내들이 있어 눈을 부릅뜨고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그들의 허리에는 각각 한 자루의 검이 걸려 있다.
공천록은 말에서 내렸다. 군병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그저 비루한 아랫것일 뿐이다. 말에 오른 채 성문을 통과할 수 있는 이들은 어느 정도 권력에 속한 자라야 한다.
대다수의 상인들은 군병들의 거들먹거림 앞에 웃는 낯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통과를 사정했다. 한두 푼 쥐어주는 것은 당연하고 추후 합비를 떠날 때, 한 턱 내겠다는 약조도 잊지 않는다.
“뭐라고요?”
“잠시 좀 보자 하였소.”
소란은 오히려 부패한 군병들이 아닌 뒤쪽의 사내들 근처에서 일어났다.
공천록보다 먼저 성문을 통과하려던 아까의 무인들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그대들이 누구이기에 감히 길을 막소.”
무인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자가 나서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이면 되오.”
차갑다. 냉기를 줄줄 흘리는 듯한 음성의 중년인.
“어디에서 오신 강호 동도들이신지?”
검을 든 무인들을 동도(同道)라 칭하는 것을 보니 저 사내들도 강호인임을 자처하는 자들이다.
“그대들이 알면 뭐할 것이며, 우리가 왜 밝혀야 하오.”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하신다면 아무도 해를 입지 않소이다.”
“허!”
척척!
무인들이 순간적으로 검파(劍把)에 손을 올렸다. 강호인으로 판명된 사내들도 스윽 검실에 손가락을 댄다.
“이크!”
대기하던 상인들과 기타 주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성문에서 벗어났다. 군병들 또한 서둘러 밖으로 나와 상인들 틈으로 몸을 숨긴다.
“흠…….”
흥미로운 눈으로 턱을 긁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는 공천록.
“이것이 합비 무인들이 ‘동도’들을 대하는 태도란 게요? 내 살다, 살다 이런 꼴은 처음이구려.”
무인들의 수장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우린 하가장 소속의 인사들이외다. 오시는 길에 아무런 얘기도 못 들으셨소?”
여전히 차갑기만 한 목소리의 중년인이 뱉은 하가장이라는 말에 수장의 표정이 변한다.
“…그렇군. 하가장이 아니고서야 어디 이런 무례를 당연시할까. 내 잠시 잊었소. 이곳 합비는 회남의 주인 하가장 본가가 위치한 곳임을. 다들 검에서 손을 떼라.”
수장의 명에 무인들이 머뭇거리다가 곧 자세를 거두었다.
상대가 저자세를 보이자 중년인도 살짝 고개를 끄덕여 뒤의 세 명에게 힘을 빼라 지시한다.
“우리는 하남 백결문의 제자들이오. 본인은 부문주 이사광이라 하며 황산(黃山)으로 가는 길인데, 그 전에 소호(巢湖)가 볼만하다 하여 이곳 합비를 경유하려던 참이었소이다.”
지역의 패권가를 향한 존경의 뜻으로, 이사광이 읍하며 예를 보였다.
중년인은 그에 답례한 뒤, 이사광에게서 백결문도임을 증명하는 패(牌)를 받아 확인한다.
“황산이라니… 정말 들은 바가 전혀 없소이까. 지금 회남이 어떤 지경인지를.”
중년인이 한마디 더 하며 패를 돌려준다.
그러는 사이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 것임을 안 군병들과 중인들은 안심한 얼굴로 돌아와 다시 자신들의 일상을 계속했다.
푸릉∼!
“괜찮아,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진정하라고.”
공천록은 어쩔 줄 모르는 말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공천록의 말은 예전에 무림 어느 문파의 전마(戰馬)였고, 더 전에는 전장을 누비던 군마(軍馬)였다. 따라서 전투의 기운을 느끼거나 피 냄새가 풍기면 지나칠 정도로 흥분하는 면이 있다. 지금처럼.
공천록의 눈에 백결문 이사광과 하가장 무리의 대표가 더 대화를 나누다 이내 하가장 무인 한 명이 그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움직이는 광경이 들어왔다.
남은 세 명은 다시 날카로운 눈으로 성으로 들어오려는 이들을 쏘아보았다.
“야야.”
툭툭.
어느새 공천록의 차례가 되었고 군병이 창대로 공천록의 가슴을 두어 번 쳤다.
“장사꾼은 아닌 듯하고, 그렇다고 여기 사람도 아니고…….”
튀어나온 눈으로 공천록의 위아래를 스윽스윽 훑어보며 얼굴을 찌푸리는 군병. 공천록의 차림을 보고 신분이 너절할 것이라 여긴 모양이다.
“뭐 훔치러 왔나?”
이 말은 즉, 뭐라도 내놓지 않으면 그냥 잡아다 족치거나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서 쫒아낼 거라는 뜻이다.
공천록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씨익 웃으며 한 발 다가섰다.
“어? 이놈 봐라?”
순간 당황한 군병이 창을 세우려는 찰나, 공천록의 그의 손을 낚아챘다.
턱!
“힉!”
질끈 눈을 감았던 군병은 이내 자신의 손바닥과 공천록의 손바닥이 붙어 있음을 깨닫고 눈을 떴다.
공천록이 손을 천천히 들었다. 그러자 군병의 손바닥이 나타났고 그 위에 동전 두 닢이 놓여 있었다.
“좀 봐 주십쇼. 일거리를 찾아 떠돌던 차에 합비가 살기 괜찮고 치안이 잘 되어 있다는 소문에 왔습죠. 여기서 열심히 살아 볼까합니다.”
참 선한 얼굴에 착한 목소리다. 게다가 뇌물까지. 군병이 다른 동료에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