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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래서 뭘 하려고.”
공천록이 우장과 피풍을 걷었다. 군병들은 그의 요대에 걸린 채도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주루나 반점에서 야채라도 썰게?”
“아아, 사부께서 이름난 요리사셨죠.”
공천록은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준 두 사람 중 한 명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기억이 닿는 처음, 요리사로서 자신과 만났고, 가문이 멸망한 후에는 사부라고 부르라면서 요리 외에 갖가지 재주들을 전수해준 남자. 지금 공천록이 입은 그것도 그의 복장을 따라한 것이다.
“그래, 뭐. 어때, 괜찮겠지?”
동전을 받았던 군병이 동료에게 양해를 구한다. 조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동료.
그 뜻을 알아차린 공천록이 그에게도 슬쩍 동전 두 닢을 찔러주며 허리를 굽혔다.
“큼, 큼. 자! 다음!”
뻔뻔한 군병들을 뒤로하고, 공천록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성문을 통과하려 했다.
타박, 타박.
공천록과 하가장 무인들 간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공천록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려던 그 순간.
툭. 공천록의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다시 한 번 그 칼을 보여주겠는가.”
아까 그 하가장의 중년인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공천록이 무(武)의 세계와 연관 있는 자임을 깨달았다. 일부러 공천록의 신체와 접촉한 이유는 아마도 무인으로서의 반응을 떠보고자 한 것이리라. 반탄력 같은 뭐 그런.
물론 중년인은 공천록에게서 그 어떠한 반응도 얻지 못했다.
공천록은 중년인을 일별하고 뒤쪽의 군병들을 쳐다보았다.
공천록을 외면하고 상인들로부터 통행세(?)를 뜯기에 바쁜 군병들. 정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인간들이다.
“…….”
쩔렁.
공천록이 조금 움직이자 허리 쪽에서 소리가 났다. 중년인 뒤에 섰던 하가 무인 두 명이 몸을 움찔한다.
공천록은 군병 앞에서 했듯 중년인에게 피풍을 젖혀주었다.
중년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조금 전, 군병들 너머로 잠깐 보았던 그 칼의 느낌과 너무나도 다른 뭔가가 그의 심령을 간질인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공천록의 얼굴로 향했다.
“요리라…….”
중년인의 말에 공천록이 빙그레 웃는다.
“사람을 요리하던 자로군.”
이해하기에 따라선 무척이나 끔찍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언사였다. 이 시대에 인육(人肉)과 관련된 괴담은 흔한 것이었으니.
“잡을까요.”
하가 무인 한 명이 중년인에게 물었다.
“보시게. 자네가 무엇을 업으로 삼는지 물어도 되겠나?”
중년인은 수하의 물음을 외면하고 오히려 공천록에게 말을 건다.
“말씀드렸다시피, 일을 찾아 떠돌고 있지요. 뭐, 힘쓰는 일이라면 안 가립니다.”
“낭인(浪人)이구먼.”
공천록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 낭인곡(浪人谷)에서 나오셨는가?”
“복이 없어서요.”
중년인은 공천록의 말에서 어떤 모호함을 느꼈다. 하지만 더 묻는다는 것은 꽤 실례다. 상대를 억압하지 않는 선에서 허용되는 강호의 관례는 여기까지다.
“일이 필요한가?”
공천록과 중년인의 눈이 허공의 한 점에서 만난다.
***
서현(舒縣) 백천당(白天黨).
황산(黃山) 귀굴(鬼窟).
수주(隨州) 용린각(龍鱗閣).
신양(信陽) 흑검문(黑劍門).
무호(蕪湖) 홍마군(紅馬軍).
장강(長江) 수로맹(水路盟).
이 여섯 무림 세력의 연합체를 육문연합이라 부른다.
회남도 전체에 널린 수많은 무림 문파들 중 비교적 규모가 있는 마흔네 개를 또 추려서, 한 지역 전체를 호령하는 강력한 세력을 뽑았을 때 항상 회자되는 문파들이다.
물론 회남 최강은 하가장이다. 이들 여섯 문파는 하가장과 상부상조하며, 가끔은 하가장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고, 때로는 하가장에 붙어 다른 문파를 압박하기도 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지난 백년내전 당시에는 그저 그런, 이름도 없는 세력이었으나 내전이 끝나고 남과 북, 각각의 거대 조직이 와해된 후, 스스로의 이름을 전면에 내걸고 나선 신생 문파라 할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은 하가장의 아래에서 큰 소리를 내지 못하던 문파들이었다. 하지만 현재 여섯이 하나가 되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되었으니 이는 하가장의 최대 위협으로 규정된 상태다…….
“…라는 얘기지.”
“허어, 그런 참.”
식탁에 앉은 사내들은 가운데의 쥐꼬리 수염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에? 다들 정말 제대로 듣고 오긴 한 건가?”
쥐꼬리 수염이 다른 이들의 반응에 오히려 의아해했다.
“그냥 뭐… 돈이 좀 된다기에.”
“자네는?”
“확실히 팔자는 고쳐준다더구먼.”
“그럼 자넨?”
“우리네 삶이 뭐 있겠나. 이리저리 써주는 데 있으면 돌고 돌다 가는 거지.”
쥐꼬리 수염은 한심하다는 듯 사내들을 쭉 보다가 크게 한숨을 쉰다.
“진짜 제대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먼, 다들. 어휴.”
“에이 이 사람아. 죽을 자리라니. 뭔 재수 없는 소린가. 이래봬도 오 년이네, 오 년. 칼밥 먹고 산 지가.”
얼굴에 대각으로 큰 상흔이 남아 코와 입술이 일그러진 사내가 쥐꼬리 수염을 나무랐다.
“…….”
쥐꼬리 수염이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하긴 자네들이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할만도 하지. 암.”
“어유! 답답하구먼. 좀 장황하게 풀어나 보게.”
쇠못 같은 수염이 얼굴 전체를 덮은 털보가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
“요즘 회남 꼬라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들 듣지 못했나 보이.”
쥐꼬리 수염이 본격적으로 얘기를 하려하자 주변 식탁을 차지한 자들이 귀를 쫑긋한다.
약 이십 석 규모의 작은 반점(飯店). 합비 도성의 중심가로 들어가기 전, 여행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에는 모자람이 없을 정도이긴 하다.
언제부터인가 이곳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무림인들의 차지가 되어 때 아닌 호황을 맞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는 그런저런 수준의 낭인들이었고 바로 지금도 그 점은 변함이 없었다.
절반 이상의 자리가 찬 반점 내에는 다양한 복장의, 또 다양한 생김생김의 낭인들이, 또 갖가지 병장기를 거리낌 없이 내놓고 식사를 즐기는 중이다. 하가장이 내놓은 몇 가지 규칙만 잘 지킨다면 누구도 이곳에서 병기를 휴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회남 하가는 회하 이남의 최대 문파란 말씀이야. 그동안 적수가 없었지. 남룡천이 승승장구하던 시절에도 천주가 협조를 구할 정도로 엄청난 잠재력을 보유한 가문. 그것은 아마도 백 년 전, 멸왕을 무찌른 대영웅 하영생(何永生) 가주 시절부터 쌓아온 힘일 테지. 이 산중(山中) 호랑이의 독보에 제동을 건 녀석들이 육문이라네. 최강을 집어삼키겠다는 의지로 말이야. 즉! 상대는 사활을 걸었어. 흔한 동네 왈패들의 싸움이 아니라는 뜻이지. 이제 살짝 이해가 가나?”
“그… 거야 뭐 모르는 바가 아니네만.”
“몰라, 자네들은 몰라. 그러니 그런 얼굴들을 하고서 예까지 기어왔지.”
쥐꼬리 수염은 잠시 주변을 살핀다. 그의 눈에 보이는 자들이라곤 그저 이류에 살짝 걸쳐있는 낭인 무사들과 조금 젊은 남자들 몇, 방립을 푹 눌러쓰고 검은 피풍을 두른 사내가 전부였다.
“하가장이 일시에 동원할 수 있는 일류 이상 무인들의 머릿수가 몇인지 알아? 무려 이천이야 이천. 그것도 여기 합비의 본가에서만. 회남 전체에 퍼진 방계와 외척들, 그 산하에 속한 여러 무력 단체들까지 합친다면 거의 오육천은 거뜬히 넘을 거라고.”
“허!”
중인들은 그들이 상상했던 이상으로 막강한 하가장의 저력에 할 말을 잃는다.
“이런 무시무시한 세력을 거느린 하가장이 뭐가 아쉬워서 용병 찌꺼기를 받아들이겠어? 중요하거나 압도적인 싸움은 지들이 하고, 위태위태한 전투 아니면 뭔가 던져줄 만한 꺼리에 누굴 내보내겠냐 이거지.”
여기저기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들은 전원이 하가장의 용병 모집 소식을 듣고 몰려온 자들이다. 그러니 쥐꼬리 수염의 말에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정서적 이상을 품고, 또 누군가는 부유한 가문의 용병이 되어 한 밑천 잡기 위해, 다른 누구는 공을 세워 팔자 한 번 펴보겠다는 욕심으로, 남무림 전역에서 합비로 몰려든 것이다. 그래서일까. 당연히 생각해 보았어야 할 부분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소홀히 넘겼다. 아니,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조금 전에 말했지? 육문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그들이 처음 발호했을 때, 제일 먼저 했던 짓들이 그들 세력권 근처의 하가장 거점들을 쓸어버리는 거였다지. 칼을 든 무인들은 당연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남녀노소를 도륙내 버렸다고 하더만. 끝을 보자는 게지. 우리가 하가장의 용병단에 들어가는 순간, 그런 미친 자들과 맞붙어야 할 거야. 신나는 일 아닌가?”
꿀꺽.
여기 모인 무인들 중 몇몇은 육문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아는 자들이었다.
정파로 분류되는 백천당과 홍마군은 그렇다 치고 용린각과 흑검문은 상당히 두려운 존재들이었다. 사파 중에서도 ‘내가 원조요!’할 정도로 잔인하고 끔찍한 짓을 예사로 하는 자들.
또, 오천 귀병을 거느린 귀굴의 지존 홍면귀(紅面鬼) 서산(徐匴)은 알려진 바가 적기에 더 경계해야 할 자였고, 장강 수적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수로맹은 속한 무인들의 수를 세는 것조차 버겁다고 알려져 있다.
“어라? 썩을 거, 다들 왜 이래? 그 백배나 되던 용기는 어디 가셨지? 응?”
“제기랄, 잘못했으면 쇳물에 발을 담글 뻔했구먼. 난 갈라오.”
털보가 벌떡 일어나며 자신의 병기를 챙긴다. 그를 보는 쥐꼬리 수염은 쓰다, 달다 말도 없이 그저 조용히 지켜만 본다.
털보의 뒷모습을 보던 몇 명이 우물쭈물 눈치를 보더니 곧 뒤따라 일어나 반점을 나섰다.
그렇게 절반에 달하는 낭인들이 목표했던 일을 버리고 떠났다.
남은 이들은 겨우 열 명. 쥐꼬리 수염과 같이 자리했던 이들 중에서는 일그러진 얼굴의 사내만 남았고, 잘 차려입은 청년들 넷, 왠지 무기력해 보이는 낭인들이 또 넷, 그리고 끝까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탕육으로 배를 채우던 방립의 사내가 다다.
낭인들은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는 중이었고, 청년들은 굳은 얼굴로 자신들 앞에 놓인 음식에 시선을 줄 뿐이었다.
“흠흠, 자넨 그래도 남았구먼.”
쥐꼬리 수염이 일그러진 얼굴의 사내에게 말했다.
“흐유. 나가면 또 뭘 하겠나. 꼴이 이래서 더 이상 써주는 데도 없는데. 하가장에서 방패막이라도 좋으니 받아만 준다면야… 또 혹시 아는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좋은 세상을 볼지.”
반점에서 처음 만났지만 어느새 쥐꼬리 수염과 친해진 그였기에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아 보는 것이다.
“거∼어기 힘 좀 있어 보이는 네 분, 정말 하씨들이 버리는 패가 되려 하시오?”
네 명의 낭인에게도 말을 걸어보는 쥐꼬리 수염.
“그런 그쪽은 왜 여기 있소? 대놓고 죽으러 가는 길이라 하면서 정작 본인은 잘도 남아 있구려.”
주름이 자글자글한 자가 툭 던지듯 말했다.
쥐꼬리 수염이 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쩐지 의미심장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젊은 친구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아 보이는데 꼭 남의 손을 빌려 창창한 앞길을 끊으려 하는가?”
청년들 중, 키가 제일 크고 얼굴이 각진 이가 일어나며 말한다.
“지금 하가장에는 세 개의 큰 용병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같은 외부인들뿐 아니라, 하가의 피를 받은 무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었다지요. 근 몇 달간, 그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하니 꼭 용병들이 다 죽어 나간다는 말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모든 게 자기 할 나름이 아닐까요.”
“호오∼!”
쥐꼬리 수염이 감탄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방립의 사내에게 닿았다.
“식사는 할 만한가?”
“그래서 뭘 하려고.”
공천록이 우장과 피풍을 걷었다. 군병들은 그의 요대에 걸린 채도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주루나 반점에서 야채라도 썰게?”
“아아, 사부께서 이름난 요리사셨죠.”
공천록은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준 두 사람 중 한 명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기억이 닿는 처음, 요리사로서 자신과 만났고, 가문이 멸망한 후에는 사부라고 부르라면서 요리 외에 갖가지 재주들을 전수해준 남자. 지금 공천록이 입은 그것도 그의 복장을 따라한 것이다.
“그래, 뭐. 어때, 괜찮겠지?”
동전을 받았던 군병이 동료에게 양해를 구한다. 조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동료.
그 뜻을 알아차린 공천록이 그에게도 슬쩍 동전 두 닢을 찔러주며 허리를 굽혔다.
“큼, 큼. 자! 다음!”
뻔뻔한 군병들을 뒤로하고, 공천록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성문을 통과하려 했다.
타박, 타박.
공천록과 하가장 무인들 간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공천록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려던 그 순간.
툭. 공천록의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다시 한 번 그 칼을 보여주겠는가.”
아까 그 하가장의 중년인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공천록이 무(武)의 세계와 연관 있는 자임을 깨달았다. 일부러 공천록의 신체와 접촉한 이유는 아마도 무인으로서의 반응을 떠보고자 한 것이리라. 반탄력 같은 뭐 그런.
물론 중년인은 공천록에게서 그 어떠한 반응도 얻지 못했다.
공천록은 중년인을 일별하고 뒤쪽의 군병들을 쳐다보았다.
공천록을 외면하고 상인들로부터 통행세(?)를 뜯기에 바쁜 군병들. 정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인간들이다.
“…….”
쩔렁.
공천록이 조금 움직이자 허리 쪽에서 소리가 났다. 중년인 뒤에 섰던 하가 무인 두 명이 몸을 움찔한다.
공천록은 군병 앞에서 했듯 중년인에게 피풍을 젖혀주었다.
중년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조금 전, 군병들 너머로 잠깐 보았던 그 칼의 느낌과 너무나도 다른 뭔가가 그의 심령을 간질인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공천록의 얼굴로 향했다.
“요리라…….”
중년인의 말에 공천록이 빙그레 웃는다.
“사람을 요리하던 자로군.”
이해하기에 따라선 무척이나 끔찍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언사였다. 이 시대에 인육(人肉)과 관련된 괴담은 흔한 것이었으니.
“잡을까요.”
하가 무인 한 명이 중년인에게 물었다.
“보시게. 자네가 무엇을 업으로 삼는지 물어도 되겠나?”
중년인은 수하의 물음을 외면하고 오히려 공천록에게 말을 건다.
“말씀드렸다시피, 일을 찾아 떠돌고 있지요. 뭐, 힘쓰는 일이라면 안 가립니다.”
“낭인(浪人)이구먼.”
공천록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 낭인곡(浪人谷)에서 나오셨는가?”
“복이 없어서요.”
중년인은 공천록의 말에서 어떤 모호함을 느꼈다. 하지만 더 묻는다는 것은 꽤 실례다. 상대를 억압하지 않는 선에서 허용되는 강호의 관례는 여기까지다.
“일이 필요한가?”
공천록과 중년인의 눈이 허공의 한 점에서 만난다.
서현(舒縣) 백천당(白天黨).
황산(黃山) 귀굴(鬼窟).
수주(隨州) 용린각(龍鱗閣).
신양(信陽) 흑검문(黑劍門).
무호(蕪湖) 홍마군(紅馬軍).
장강(長江) 수로맹(水路盟).
이 여섯 무림 세력의 연합체를 육문연합이라 부른다.
회남도 전체에 널린 수많은 무림 문파들 중 비교적 규모가 있는 마흔네 개를 또 추려서, 한 지역 전체를 호령하는 강력한 세력을 뽑았을 때 항상 회자되는 문파들이다.
물론 회남 최강은 하가장이다. 이들 여섯 문파는 하가장과 상부상조하며, 가끔은 하가장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고, 때로는 하가장에 붙어 다른 문파를 압박하기도 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지난 백년내전 당시에는 그저 그런, 이름도 없는 세력이었으나 내전이 끝나고 남과 북, 각각의 거대 조직이 와해된 후, 스스로의 이름을 전면에 내걸고 나선 신생 문파라 할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은 하가장의 아래에서 큰 소리를 내지 못하던 문파들이었다. 하지만 현재 여섯이 하나가 되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되었으니 이는 하가장의 최대 위협으로 규정된 상태다…….
“…라는 얘기지.”
“허어, 그런 참.”
식탁에 앉은 사내들은 가운데의 쥐꼬리 수염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에? 다들 정말 제대로 듣고 오긴 한 건가?”
쥐꼬리 수염이 다른 이들의 반응에 오히려 의아해했다.
“그냥 뭐… 돈이 좀 된다기에.”
“자네는?”
“확실히 팔자는 고쳐준다더구먼.”
“그럼 자넨?”
“우리네 삶이 뭐 있겠나. 이리저리 써주는 데 있으면 돌고 돌다 가는 거지.”
쥐꼬리 수염은 한심하다는 듯 사내들을 쭉 보다가 크게 한숨을 쉰다.
“진짜 제대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먼, 다들. 어휴.”
“에이 이 사람아. 죽을 자리라니. 뭔 재수 없는 소린가. 이래봬도 오 년이네, 오 년. 칼밥 먹고 산 지가.”
얼굴에 대각으로 큰 상흔이 남아 코와 입술이 일그러진 사내가 쥐꼬리 수염을 나무랐다.
“…….”
쥐꼬리 수염이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하긴 자네들이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할만도 하지. 암.”
“어유! 답답하구먼. 좀 장황하게 풀어나 보게.”
쇠못 같은 수염이 얼굴 전체를 덮은 털보가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
“요즘 회남 꼬라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들 듣지 못했나 보이.”
쥐꼬리 수염이 본격적으로 얘기를 하려하자 주변 식탁을 차지한 자들이 귀를 쫑긋한다.
약 이십 석 규모의 작은 반점(飯店). 합비 도성의 중심가로 들어가기 전, 여행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에는 모자람이 없을 정도이긴 하다.
언제부터인가 이곳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무림인들의 차지가 되어 때 아닌 호황을 맞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는 그런저런 수준의 낭인들이었고 바로 지금도 그 점은 변함이 없었다.
절반 이상의 자리가 찬 반점 내에는 다양한 복장의, 또 다양한 생김생김의 낭인들이, 또 갖가지 병장기를 거리낌 없이 내놓고 식사를 즐기는 중이다. 하가장이 내놓은 몇 가지 규칙만 잘 지킨다면 누구도 이곳에서 병기를 휴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회남 하가는 회하 이남의 최대 문파란 말씀이야. 그동안 적수가 없었지. 남룡천이 승승장구하던 시절에도 천주가 협조를 구할 정도로 엄청난 잠재력을 보유한 가문. 그것은 아마도 백 년 전, 멸왕을 무찌른 대영웅 하영생(何永生) 가주 시절부터 쌓아온 힘일 테지. 이 산중(山中) 호랑이의 독보에 제동을 건 녀석들이 육문이라네. 최강을 집어삼키겠다는 의지로 말이야. 즉! 상대는 사활을 걸었어. 흔한 동네 왈패들의 싸움이 아니라는 뜻이지. 이제 살짝 이해가 가나?”
“그… 거야 뭐 모르는 바가 아니네만.”
“몰라, 자네들은 몰라. 그러니 그런 얼굴들을 하고서 예까지 기어왔지.”
쥐꼬리 수염은 잠시 주변을 살핀다. 그의 눈에 보이는 자들이라곤 그저 이류에 살짝 걸쳐있는 낭인 무사들과 조금 젊은 남자들 몇, 방립을 푹 눌러쓰고 검은 피풍을 두른 사내가 전부였다.
“하가장이 일시에 동원할 수 있는 일류 이상 무인들의 머릿수가 몇인지 알아? 무려 이천이야 이천. 그것도 여기 합비의 본가에서만. 회남 전체에 퍼진 방계와 외척들, 그 산하에 속한 여러 무력 단체들까지 합친다면 거의 오육천은 거뜬히 넘을 거라고.”
“허!”
중인들은 그들이 상상했던 이상으로 막강한 하가장의 저력에 할 말을 잃는다.
“이런 무시무시한 세력을 거느린 하가장이 뭐가 아쉬워서 용병 찌꺼기를 받아들이겠어? 중요하거나 압도적인 싸움은 지들이 하고, 위태위태한 전투 아니면 뭔가 던져줄 만한 꺼리에 누굴 내보내겠냐 이거지.”
여기저기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들은 전원이 하가장의 용병 모집 소식을 듣고 몰려온 자들이다. 그러니 쥐꼬리 수염의 말에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정서적 이상을 품고, 또 누군가는 부유한 가문의 용병이 되어 한 밑천 잡기 위해, 다른 누구는 공을 세워 팔자 한 번 펴보겠다는 욕심으로, 남무림 전역에서 합비로 몰려든 것이다. 그래서일까. 당연히 생각해 보았어야 할 부분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소홀히 넘겼다. 아니,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조금 전에 말했지? 육문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그들이 처음 발호했을 때, 제일 먼저 했던 짓들이 그들 세력권 근처의 하가장 거점들을 쓸어버리는 거였다지. 칼을 든 무인들은 당연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남녀노소를 도륙내 버렸다고 하더만. 끝을 보자는 게지. 우리가 하가장의 용병단에 들어가는 순간, 그런 미친 자들과 맞붙어야 할 거야. 신나는 일 아닌가?”
꿀꺽.
여기 모인 무인들 중 몇몇은 육문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아는 자들이었다.
정파로 분류되는 백천당과 홍마군은 그렇다 치고 용린각과 흑검문은 상당히 두려운 존재들이었다. 사파 중에서도 ‘내가 원조요!’할 정도로 잔인하고 끔찍한 짓을 예사로 하는 자들.
또, 오천 귀병을 거느린 귀굴의 지존 홍면귀(紅面鬼) 서산(徐匴)은 알려진 바가 적기에 더 경계해야 할 자였고, 장강 수적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수로맹은 속한 무인들의 수를 세는 것조차 버겁다고 알려져 있다.
“어라? 썩을 거, 다들 왜 이래? 그 백배나 되던 용기는 어디 가셨지? 응?”
“제기랄, 잘못했으면 쇳물에 발을 담글 뻔했구먼. 난 갈라오.”
털보가 벌떡 일어나며 자신의 병기를 챙긴다. 그를 보는 쥐꼬리 수염은 쓰다, 달다 말도 없이 그저 조용히 지켜만 본다.
털보의 뒷모습을 보던 몇 명이 우물쭈물 눈치를 보더니 곧 뒤따라 일어나 반점을 나섰다.
그렇게 절반에 달하는 낭인들이 목표했던 일을 버리고 떠났다.
남은 이들은 겨우 열 명. 쥐꼬리 수염과 같이 자리했던 이들 중에서는 일그러진 얼굴의 사내만 남았고, 잘 차려입은 청년들 넷, 왠지 무기력해 보이는 낭인들이 또 넷, 그리고 끝까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탕육으로 배를 채우던 방립의 사내가 다다.
낭인들은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는 중이었고, 청년들은 굳은 얼굴로 자신들 앞에 놓인 음식에 시선을 줄 뿐이었다.
“흠흠, 자넨 그래도 남았구먼.”
쥐꼬리 수염이 일그러진 얼굴의 사내에게 말했다.
“흐유. 나가면 또 뭘 하겠나. 꼴이 이래서 더 이상 써주는 데도 없는데. 하가장에서 방패막이라도 좋으니 받아만 준다면야… 또 혹시 아는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좋은 세상을 볼지.”
반점에서 처음 만났지만 어느새 쥐꼬리 수염과 친해진 그였기에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아 보는 것이다.
“거∼어기 힘 좀 있어 보이는 네 분, 정말 하씨들이 버리는 패가 되려 하시오?”
네 명의 낭인에게도 말을 걸어보는 쥐꼬리 수염.
“그런 그쪽은 왜 여기 있소? 대놓고 죽으러 가는 길이라 하면서 정작 본인은 잘도 남아 있구려.”
주름이 자글자글한 자가 툭 던지듯 말했다.
쥐꼬리 수염이 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쩐지 의미심장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젊은 친구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아 보이는데 꼭 남의 손을 빌려 창창한 앞길을 끊으려 하는가?”
청년들 중, 키가 제일 크고 얼굴이 각진 이가 일어나며 말한다.
“지금 하가장에는 세 개의 큰 용병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같은 외부인들뿐 아니라, 하가의 피를 받은 무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었다지요. 근 몇 달간, 그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하니 꼭 용병들이 다 죽어 나간다는 말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모든 게 자기 할 나름이 아닐까요.”
“호오∼!”
쥐꼬리 수염이 감탄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방립의 사내에게 닿았다.
“식사는 할 만한가?”